소설리스트

3장 여신의 부탁 (12/42)

3장 여신의 부탁

여신의 부탁

가을의 대륙과 북쪽에 있는 봄의 대륙을 잇는 거대한 터널은 드래곤들이 직접 만든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위용을 뽐내기 위해 이곳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치장했다.

터널 안은 온통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거대한 드래곤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터널의 천장에는 주먹만 한 마나석이 엄청나게 꽂혀 있었는데, 그곳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와 터널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황금과 마나석으로 도배되어 있는 터널이었지만 이곳의 금을 긁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 행위라는 것을 모두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터널을 터는 것은 곧 전 드래곤들의 레어를 동시에 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멋진 터널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드래곤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드래곤들은 가디언을 시켜 일정한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한데 그 통행료라는 것이 엄청나게 비싸, 덕분에 대륙 간의 이동은 보통 여행자들은 엄두도 못 내고 거대한 상단이나 왕국의 사절단들만이 이용했다.

그 엄청나게 화려하고 비싼 터널을 지나는 이들이 있었다. 한데 마차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흘리는 요란한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 터널을 지나는 인물은 모두 세 명뿐이었다. 바로 로얀과 레아, 이프리트였다.

그들이 통로를 아무 방해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이프리트의 공이었다. 고금제일의 중매쟁이이자 천하의 카사노바 이프리트가 드래곤 로드에게 중매를 서주겠다고 한 것 때문에 통로 입구에서의 싸움은 물론이고 통로를 이용하는 것까지 드래곤들이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프리트의 손을 거치면 누구든 천생연분이 된다.’

그의 중매쟁이 경력 3만 년이 되던 해에 들려온 말이었다.

* * *

이프리트가 싱글벙글 웃으며 로얀 옆에서 걸어가는 반면 레아는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이프리트를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였기에 그 근처에는 다가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프리트가 뒤를 돌아 레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쿡쿡! 역시 페어리의 여왕들이란.......”

“.......”

그러나 로얀은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레아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아?”

이프리트가 로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로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큭큭! 자그마치 7만 하고도 1천 살이라고.”

로얀은 이프리트의 말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놀랐다. 페어리의 여왕인 레아의 겉모습은 어린 소녀였고 그녀의 심성도 매우 어려 보였는데 실제 나이는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놀랐지? 페어리들은 10만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신의 몸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되지.”

페어리... 페어리는 요정들을 뜻했다.

요정 하면 매우 작은 몸에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을 달고 다니는 존재를 뜻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어린아이로 묘사했다. 요정 중에는 흰 수염을 늘어뜨리고 꾸부정하게 다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멸할 때까지 어린아이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 연령이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그들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신은 성장했다.

그 모든 요정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바로 페어리들의 여왕이었다.

여왕은 태어날 때부터 여왕으로 정해져 태어나기 때문에, 신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다고 전해지는 요정이었다. 그리고 엘프들과 비슷하게 1만 년 정도를 사는 요정들과는 달리 페어리들의 여왕은 10만 살이 되어서야 성인이 된다.

여왕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어린 소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정이 보통 인간 주먹만 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여왕은 인간 소녀의 몸을 지니고 있었고, 10만 살이 되면 인간 성인 여성의 육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역대 여왕 중 성인이 된 사람은 없었다. 있다면 더 이상 여왕이 바뀔 필요도, 탄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들이 성인이 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진 이들은 페어리로 10만 년이라는 지루한 인생을 살았다. 이런 판국에 성인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라니!

결국 그녀들은 모두 10만 살이 되는 해에 소멸했다. 페어리의 여왕이 성인식에서 소멸하면 원하는 존재로 환생할 수 있기에 미련도 없었다.

아무튼 레아의 성인식은 이제 2만 년하고도 9천 년이 남은 것이다. 한데 레아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내 욕 했지!”

어느새 레아가 다가와 이프리트와 로얀의 중간에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더 이상 페어리의 여왕이 바뀌진 않겠군.”

로얀의 결론이었다. 어리다는 말을 극도로 싫어하며, 다른 페어리의 여왕들과는 달리 호기심이 많은 그녀라면 아마 성인이 될 것이다.

레아는 왠지 기분이 나빠 발끈하며 외쳤다.

“로얀! 무슨 소리야!”

“풋, 그렇지? 푸하하하......!”

“뭐, 뭐야!”

이프리트의 웃음소리가 커짐에 따라 레아의 얼굴은 빛나는 마나석 아래에서 더욱더 붉어졌다.

* * *

봄의 대륙이자 꽃의 대륙이라 불리는 이곳은 현재 통일된 하나의 제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르센 제국... 봄의 대륙을 제패한 제국의 이름이었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한 지 백 년이 지났다. 백 년 동안 봄의 대륙은 엄청난 발전을 해 어느 대륙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봄의 대륙만의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도 한몫했다.

그러나 봄의 대륙을 제패한 카르센 제국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 바로 어둠의 숲과 빛의 숲이었다.

만약 빛의 숲 앞에 어둠의 숲이라는 거대한 성벽이 없었다면 빛의 숲은 진작에 인간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조화 때문인지 그 두 숲은 가까이 붙어 있었다.

어둠의 숲... 칸 대륙에 서식하는 모든 몬스터들이 모여 산다고 전해지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그러나 로얀이 지금 찾아가는 인물은 엘프인 만큼 그는 어둠의 숲 너머에 있는 빛의 숲에 있을 것이다. 빛의 숲은 페어리들과 엘프들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로얀 일행은 드래곤 산맥의 터널을 지나 라이난이라는 거대한 도시로 들어왔다. 이곳에는 칸 대륙에서 창조주를 모시는 가장 거대한 신전이 있었는데, 현재 이 신전에는 황제보다 더한 권위를 가졌다는 교황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 신전은 다른 곳과는 달리 독특한 뭔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향기였다. 봄의 대륙답게 신전 내부에 흐르는 물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향긋한 향기를 내뿜었던 것이다.

“꼬맹아, 화 좀 풀어라.......”

레아는 드래곤 산맥의 터널을 지난 뒤부터 삐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프리트가 끝내 로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프리트는 레아 옆에 붙어 그녀의 팔을 콕콕 찌르며 그녀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라이난의 한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로얀 일행은 신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신을 싫어하는 로얀이었지만 팔란 왕국과 이론 제국 간의 전쟁을 멈추게 했던 교황이라는 인물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명색이 칸 대륙의 하나뿐인 교황인데 쉽게 대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먼발치에서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해서 가는 것이었다. 신을 믿고, 신에게서 사랑받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레아와 이프리트가 벌이고 있는 말씨름을 외면한 채 로얀은 저 멀리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신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프리트는 레아가 끝까지 화를 풀지 않자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레아가 계속 삐쳐 있으면 그가 무척이나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 실피드라도 나타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레아는 이프리트만큼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그가 저지른 많은 사건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또한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인 레아는 실피드와도 무척이나 친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프리트가 왜 레아에게 꼼짝도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스윽.

흠칫.

그가 꺼내 든 것은 커다란 막대 사탕이었다. 그것을 본 레아의 몸이 살짝 떨렸다.

이프리트는 살짝 웃었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아까워했다. 이 사탕은 신들이 먹는 귀한 것으로서 그도 몇 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레아는 엄청난 속도로 이프리트의 손에 들린 사탕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힐끔 이프리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그래, 그래.”

‘윽! 벌써 한 개를 쓰다니. 앞으로 레아의 입을 막으려면 부족할지도.......’

이프리트는 로얀과 여행하면서 여전히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레아의 입을 막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인간 세상을 여행하면서도 항상 사탕을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그건 레아 때문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자신이 일궈낸 수많은 작업 중 하나를 실피드에게 말해 혼쭐이 났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여차하면 그의 비리를 실피드에게 고자질할 수 있는 레아의 입을 막기 위해서는 사탕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가 종종 신들에게 중매의 대가로 대량의 사탕을 요구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레아는 사탕을 할짝이며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밝게 웃으며 사탕을 먹는 그녀의 모습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런 그녀의 모습과 이프리트의 잘생긴 외모에 길 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로얀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얀은 이프리트와 레아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신전에 있을 교황만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계단이 로얀 앞에 펼쳐졌다. 신전 앞은 여기저기서 찾아온 신자들과 여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인가,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자신은 그렇게 처절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여기에 있는 이들은 신의 가호 아래 웃음을 잃지 않으며 행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시고 이만 가주십시오!”

신전에서 호통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신관으로 보이는 사람과 신전을 지키는 몽크들, 그리고 몽크들에게 잡혀 있는 한 여인.......

호통을 쳤던 신관이 몽크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은 여인을 신전 밖으로 내쫓았다.

갑작스런 소란에 신전 앞을 메우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 여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정적.......

신전에서 나온 여인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아름다운 초록빛 머리에 붉은 입술과 뽀얀 피부, 그리고 몸매 또한 고혹적이었다. 밝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신전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신전에서 쫓겨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신전으로 들어갔고 매번 쫓겨났다. 이곳에 오늘따라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것도 밖으로 다시 나올 그녀의 외모를 보기 위함이었다.

엄청난 미모를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없었다. 치근대던 한 남자에게 그녀가 공개적으로 본때를 보여주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로 보아 그녀는 꽤 높은 서클의 마법사인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누군가가 다가가고 있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상큼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는 인물은 바로 이프리트였다. 조각 같은 외모에 루비 같은 눈동자, 훤칠한 키의 외모... 그는 잘생긴 데다 매너있고, 몇십만 년의 경력까지 있는 선수였다. 그런 그의 말속엔 묘한 마력이 숨어 있는 듯했다.

이프리트는 사탕 때문에 나서지 않고 노려보고만 있는 레아에 대한 생각은 이미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그의 신조는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는 것이었다.

“감사해요.”

신이라도 반할 만한 미소를 띄우며 다가간 이프리트의 말에 그 차갑던 여인도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했다.

실제 이프리트는 신도 꼬신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그 여신과 실피드는 크게 싸웠다. 하지만 정령계나 신계나 똑같았기에 본신의 힘을 쓰는 실피드는 강했고, 당연히 그 싸움의 결과는 그녀의 승리로 끝났다.

이런 일 때문에 실전 경험(?)을 많이 쌓은 그녀는 정령왕 중 가장 강했고, 신계든 마계든 모두 그녀를 두려워했다. 한데 왜 실피드가 이프리트를 감싸며 그를 그렇게 사랑하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다.

정령왕의 힘은 최상위의 신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마계와 신계를 묶어두고,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자로서 정령왕들은 차원계를 지키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령왕들은 중간계의 드래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레아와 투닥거릴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인 이프리트는 여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지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이프리트의 말에 여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끼었다.

“말하자면 길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프리트는 그녀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팔로 두른 채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좀더 조용한 곳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이프리트가 여인을 이끌고 사라지려 하자 레아는 로얀의 소매를 잡아 그를 재촉하려 했지만, 그녀의 손을 피한 로얀에게 오히려 손목이 잡혔다.

굳은 얼굴로 신전 바깥에 있는 조각들을 보고 있던 로얀은 갑작스런 레아의 행동에 인상을 구겼다.

“그 변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빨리!”

오른손에 막대사탕을 들고 깡충깡충 뛰며 말하는 그녀를 보고 로얀은 레아의 손목을 놓고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그의 이런 행동은 정말 의외였다.

그렇게 그 두 사람도 이프리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 * *

레아를 따라 이프리트를 쫓던 로얀은 거대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여관과 식당을 겸하는 곳으로 크고 화려했는데, 어쩐 일인지 식당 안에는 이프리트와 신전 앞에서 만났던 여인만이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이프리트와 여인을 발견한 레아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레아가 그 여인 옆자리에 앉자 뒤따라온 로얀은 이프리트 옆에 앉았다.

이윽고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이프리트를 향해 레아가 물었다.

“이 식당 통째로 빌렸지?”

“훗!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를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게 뻔하니까.”

이프리트의 말에 여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웃기지 마. 작업에 방해가 되니까 그랬겠지!’

레아는 으르렁거리며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이프리트는 정령왕 중 가장 부자였다. 그의 취미가 취미인 만큼 들어오는 수입이 엄청나게 짭짤했던 것이다.

그는 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을 통째로 빌린 후 사람들을 간단하게 쫓아버렸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귀족이었지만 정령왕만의 기운과 힘으로 쫓아버린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드래곤 피어 같은 것으로 말이다.

식당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로얀 일행은 먼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프리트는 식사 도중에도 레아의 눈빛을 외면한 채 여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음식이 모두 사라졌다.

빈 접시를 가져가는 종업원에게 이프리트가 뭐라 속삭이자 종업원은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식당 안에는 정말 로얀 일행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프리트는 앞의 여인을 보며 턱을 괴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전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라고 합니다.”

“뭐, 뭣!”

그 말에 반응을 한 건 레아였다. 설마 인간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정체를 밝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 여자는 인간이 아니다.”

이프리트의 말에 얼굴이 살짝 굳어졌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여인은 로얀의 그 말에 움찔했다. 그녀도 이프리트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프리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그 인간이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라고 호칭했지만 그녀는 이프리트 때문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꽃의 여신 로즈아린이라고 해요.”

꽃의 여신인 그녀였지만 지위 상으로나 힘으로나 정령왕인 이프리트보다 한참이나 아래였다. 그녀는 신 중에서도 하급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급 신은 5천 살 이상의 에이션트 드래곤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드래곤은 나이에 비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본신의 힘으로도 에이션트 드래곤을 이길 수 없는 로즈아린은 인간계로 올 때의 제약 때문에 절반의 힘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지금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신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해 소드 마스터에 간신히 오른 검사의 그것과 같은 정도였다.

로즈아린의 계급이 아래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프리트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높였다.

“신기를 잃어버렸군요.”

“네.......”

이프리트의 말에 로즈아린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기는 신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한데 상급 신은 신기가 없어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하급 신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프리트는 좀 전에 신전에서 흘러나오던 꽃향기와 그녀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신기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레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도 신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잃어버렸어요?”

“하아.......”

로즈아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간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유희를 나온 그녀는 신기를 그만 강탈당하고 말았다. 범인은 아마도 드래곤.

실제로 드래곤 중에는 유희를 나오는 하급 신의 신기를 훔치는 이가 종종 있었다. 보석과 신기한 물건을 좋아하는 드래곤의 특성 때문이었다.

신기를 강탈당해 망연자실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이곳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신전 전체에서 향긋한 꽃향기가 난다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신기밖에 없었다.

로즈아린은 신기를 돌려 받기 위해 신전을 찾았지만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의 힘으론 성기사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어 번번이 쫓겨났던 것이다.

“호오... 그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프리트의 말에 로즈아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령왕인 그의 힘이라면 신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창조신인 주신의 사자인 교황이 마음에 걸렸지만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라면 문제없을 것이다.

레아도 도와주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로즈아린의 손을 잡고 있는 이프리트의 손을 탁 쳤다.

그녀의 행동에 이프리트는 손을 치우며 미소를 띄웠지만 속으로는 레아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반대하고 나설 로얀도 이번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교황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 감사해요.”

“하하! 대신 신기를 되찾은 후 저와 데이트를 해주시겠습니까?”

이프리트의 말에 로즈아린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밤에 시작하죠.”

물건을 훔치는 건 역시 밤이 무대여야 제격이다.

이프리트가 로즈아린의 손을 슬쩍 잡고는 물었다.

“시간도 남는데 그동안 도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

로즈아린이 화사한 웃음으로 답하자 이프리트는 웃으며 먼저 식당을 나섰다.

그를 따라 일어나려던 로즈아린의 소맷자락을 레아가 붙잡았다.

“저 변태의 연인이 누군지 몰라요?”

빙긋.

로즈아린은 페어리의 여왕인 레아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레아가 자신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말을 놓았다. 레아가 너무 어려 보였기에 말을 높이는 것이 어색한 이유도 있었다.

“난 그날의 사건을 직접 봤어. 단지 이프리트님의 힘을 빌리고 싶어서... 일이 끝난 후에는 실피드님에게 직접 말할 생각이야. 그러니 이프리트님에게는 비밀로 해줘.”

그녀는 신전 앞에서 이프리트를 알아보았고 신기를 되찾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신기가 아니었다면 이프리트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피드와 상급 여신의 싸움이 있었던 그날 그녀는 보았다. 차가운 얼굴로 상급 여신을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실피드를 말이다. 그 사건 이후 신계의 여신들은 이프리트를 피하게 되었다.

로즈아린의 말에 레아의 얼굴에 장난기 짙은 미소가 걸렸다. 이 일이 끝나고 이프리트가 자신에게 수작을 걸었다고 로즈아린이 실피드에게 말한다면? 그날로 이프리트는 인간계에서 사라질 것이다.

“걱정 말아요.”

레아의 말에 로즈아린이 이프리트에게로 가자 식당 안에는 로얀과 레아만이 남았다.

레아는 로얀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우리도 놀러 가자.”

드륵.

그 말에 로얀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난 잘 테니 밤이 되면 깨워줘.”

“윽, 지금은 대낮이라고!”

레아의 외침에도 로얀은 잠을 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도둑들에게는 아침의 태양과 같은 두 개의 달.

환하게 뜬 두 개의 달을 보며 로얀 일행은 신전이 보이는 숲 속에 모였다.

“레아, 부탁해.”

끄덕끄덕.

이프리트는 레아가 웃음까지 띄우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모두 손을 잡아요.”

레아의 말에 서로서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간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요정들의 기술을 레아가 지금 쓴 것이다. 이 기술은 몸을 투명인간처럼 숨기는 것이었다.

로즈아린은 손을 잡지 않았다. 신기를 가지러 가는 데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아가 힘을 발휘해 모두의 몸을 숨긴 후, 이프리트와 레아가 양쪽에서 로얀의 손을 잡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신전의 지붕에 붙어 있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창문의 창가였다. 그곳에 내려앉은 그들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게 맡겨.”

화륵.

이프리트의 손가락이 불꽃에 휩싸였다.

치이이익!

그는 그 손가락을 유리에 가져다 대더니 칼로 종이 자르듯 그것을 동그랗게 잘라 나갔다.

딸각.

이윽고 다 자른 유리를 그가 떼어냈다.

신전으로 들어갈 입구가 생기자 이프리트가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로얀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가져오지.”

“뭐? 안 돼.”

만약 로얀이 신전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의 성격상 덤벼드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신전을 파괴할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렇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커져버린다.

이프리트는 확고한 표정을 하고 있는 로얀을 바라보고는 레아에게 어서 말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괜찮아. 로얀, 갔다 와.”

이프리트와는 달리 레아는 로얀이 가는 것을 찬성했다. 신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자신들과는 달리 감각이 발달한 로얀이라면 꽃의 냄새를 따라 신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죽이진 마.”

“알겠다.”

그렇게 차갑던 로얀이 레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프리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기는 목걸이의 형태를 하고 있대.”

레아의 말에 로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손에 불꽃을 피워줬으면 한다.”

“엥? 뭔 소리야?”

“나와 싸웠을 때처럼.”

로얀의 말에 이프리트도 레아도 어리둥절했지만 이프리트는 곧 오른손에 강한 불꽃을 생성시켰다.

화르륵!

마그마의 열기처럼 뜨거운 것이 피어났다. 그러자 로얀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레아는 5분 정도가 지난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불을 꺼. 들킬지도 몰라!”

그제야 로얀은 이프리트의 팔에서 시선을 돌리며 신전 안으로 뚫린 길을 바라보았다.

“이제 됐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

파핫.

말을 마친 그는 신전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프리트와 레아는 로얀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둘은 계속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로즈아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타탁.

로얀이 뛰어내린 자리에는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신전의 구석진 곳이라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화륵.

그의 방문을 반기는 듯 벽에 줄줄이 걸린 횃불들이 출렁였다.

주위를 한번 훑어본 로얀은 후각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진한 꽃향기가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얀은 그 향기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후각이 남달리 발달한 로얀이 맡기에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진했고, 때문에 그 근원지를 찾는 것은 식은 스프 먹기보다 쉬웠다.

졸졸졸......!

향기를 쫓아 나아가던 로얀은 문득 길 양옆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 신전이 유독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물이었다. 신전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꽃향기는 그 물을 타고 전파되고 있었다.

향기를 쫓아 물을 쫓아 로얀은 한참이나 신전을 누비고 다녔다. 종종 프리스트로 보이는 사람들이나 성기사들을 보았지만 레아의 말대로 죽이지 않고 피해 다녔다.

“저기인가?”

로얀의 발걸음이 멈춘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의 눈앞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신의 모습을 조각했는지 두 개의 문짝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기사들로 보이는 남자 열 명 정도가 지키고 서 있었다.

로얀은 이곳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문 틈에서 꽃향기가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르륵.

로얀의 몸이 어둠에 잠기더니 사라져 버렸다. 레아가 펼쳤던 페어리의 기술을 쓴 것이다.

스윽.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성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성기사들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아의 기술을 본 건 단 몇 분, 빨리 끝내야 한다!’

성기사의 등 뒤로 간 로얀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양손을 휘둘러 앞에 보이는 두 명의 성기사를 노렸다.

휘익.

퍼퍽.

그의 수도가 뒷목을 강타함과 동시에 두 성기사는 짚단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털썩.

“무슨 일이야!”

남은 동료 성기사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로얀은 침착했다. 하지만 저들이 더 큰 소리를 질러 동료들을 불러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기 위해 행동을 서둘렀다.

스륵.

그는 다시 다음 목표물을 찾아 이동했다.

휘익.

퍼퍽!

털썩.

로얀은 신속하게 남은 성기사들을 처리해 갔다. 그렇지만 언제 발각될지 모르니 어서 로즈아린의 신기를 찾은 후, 가능하면 교황의 얼굴을 본 후 돌아가야 했다.

퍼퍽.

털썩.

성기사 열 명을 모두 처리한 로얀은 거대한 흰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쿠쿵.

열 때에는 아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지만 닫힐 때에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닫혔다.

쪼르르륵.......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연못... 로얀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넓은 홀 안에는 거대한 연못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수대가 없어 물이 하늘로 치솟진 않았지만 거대한 연못의 물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스르륵.

모습을 다시 나타낸 로얀은 연못을 향해 걸어갔다. 꽃의 향기는 연못에서 나오고 있었다.

“깊군.”

맑고 깊은 연못 속에는 특이하게도 어떠한 것도 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연못을 만들면 아름다운 물고기를 넣어두는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스릉.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았다. 아무래도 신전이다 보니 성검인 에리오네가 어울릴 듯했다.

화르륵.

에리오네가 뜨거운 화염에 휩싸였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본 이프리트의 기술을 복사한 것이다.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의 기술답게 마그마의 열기와 같은 뜨거움이 에리오네의 검신에서 흘러나왔다. 로얀은 불꽃으로 휩싸인 에리오네를 연못에 집어넣었다.

치지지직!

갑작스런 열기에 맑게 빛나던 연못이 비명을 질렀다. 잔잔히 흐르던 연못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일렁거렸다. 갑자기 마그마가 들어온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었기에 연못 물은 급속도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연못이 피처럼 토해 내던 연기가 잠잠해진 것은 이삼 분 후였다. 이프리트에게서 충전(?)한 불꽃이 다한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에리오네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자 로얀은 그것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연못의 물은 순식간에 증발해 밋밋하게 남은 물 아래로 연못 바닥이 보였다.

그곳을 살피던 로얀은 뭔가를 발견했다. 연못 중앙에서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목걸이를 찾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즈아린이 말한 그녀의 신기인 듯했다.

로얀은 생각할 것도 없이 훌쩍 뛰어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찰박, 찰박!

발목까지 차는 물 속을 걸어 로얀은 반짝이는 로즈아린의 신기를 주웠다. 확실히 이 목걸이에서는 강한 향기와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쏴아아......!

“......?”

갑자기 물이 급속도로 차 올랐다. 로얀은 목걸이를 품속에 집어넣고는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파팟!

타탁.

연못 밖으로 나온 로얀은 진귀한 광경을 목격했다. 증발해 없어졌던 연못의 물이 순식간에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은 저절로 생성되고 있었다. 그 괴기하기까지 한 광경에 로얀은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정말 멋지죠?”

흠칫.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아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신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적이었다. 그는 어쨌거나 물건을 훔치러 왔지 않는가? 더구나 상대가 말을 걸기 전까지 자신은 그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 위기의식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창......!

휘리릭!

쾅!

힘차게 나아가던 에리오네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생성된 흰 막에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흰 백의에 긴 백발,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 목소리의 주인은 레아와 키가 비슷했고 몸도 여자처럼 호리호리한 소년이었다. 한데 그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매우 신비로웠다.

아무리 공격이 가로막혔어도 다시 공격할 로얀이었지만 그는 소년의 신비한 분위기와 느껴지는 힘에 입을 열어 물었다.

“넌 누구지?”

“사람들은 절 교황이라고 부르더군요.”

소년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칸 대륙 모든 신전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이 이렇게 어린아이였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스릉.

로얀은 에리오네를 집어넣었다. 교황을 만나는 것도 이곳을 침입한 그의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교황이라.......”

뚜벅뚜벅.......

교황이라는 소년은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신의 사랑을 받고 자란 인간, 자신과 뭐가 다를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황을 훑어보고 있던 로얀은 그 말로 인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드래곤에게 강탈당한 로즈아린의 신기, 그것을 교황이 들고 온 것이었다.

아무리 간 큰 드래곤이라도 교황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신들과 대화할 수 있는 교황이 신들에게 드래곤이 신기를 강탈했다고 말하면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신기를 훔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는 로즈아린의 신기를 신전으로 옮겨놓고는 로얀을 기다렸다. 이프리트의 성격과 여러 가지를 모두 예상해 벌인 일이었다. 나이만 어렸지 교황은 어느 현자 못지않게 총명했다.

“날 아나?”

“물론입니다. 카오스님에게서 들었거든요.”

교황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카오스라는 말에 로얀의 눈은 크게 떠졌다. 전대 다크로얀의 기억에 따르면 카오스는 깊은 수면에 들었고, 카오스의 존재를 아는 이는 창조의 신인 주신뿐이었다.

빙긋.

“덕분에 인간 최초로 카오스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분의 존재도 알게 되었습니다. 드래곤도 모르는 분을 말이죠. 아! 카오스님이 수면에 드신 건 맞지만 인간에게 말을 전하는 것 정도야 쉽습니다. 그분은 신 중의 신이시니 말입니다.”

“카오스가 날 기다리라고 했다?”

“앗! 님 자를 붙이셔야죠.”

로얀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던 교황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난 신에게 버림받고 어둠 속에서 살아왔다.”

“전 눈이 시린 빛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로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 와중에도 교황의 말은 계속되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빛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지?”

“이것이 저의 운명이자 사명이니까요.”

팟.

꽈악.

로얀의 손이 섬광처럼 뻗어 나가 교황의 흰 목을 움켜잡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교황의 몸엔 방어막이 쳐져 있지 않았기에 로얀의 손이 그의 목을 쥘 수 있었다. 키가 작은 교황이 로얀의 손에 의해 허공으로 들렸다.

“레이나와 엘레나를 잃은 것도 나의 운명인가? 그렇다면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나의 사명은 뭐지?”

그의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큭! 자신의 사명을 찾는 것도 과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이 없을 텐데요?”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떠 있었지만 교황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지 거리낌없이 말했다.

교황의 말대로 그의 귓가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것은 한두 명이 아닌 듯했다.

아마도 신전의 성기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교황이 있는 이곳을 고작 성기사 열 명이 지키고 있었던 것도 모두 교황의 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얀은 교황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스륵.

“쿨럭! 헥헥.......”

“볼일은 끝났다. 이만 가보겠다.”

그러자 교황이 목을 어루만지며 잔잔한 웃음을 담았다.

피식.

“저들을 모두 죽이실 건가요?”

“.......”

뚜벅.

“전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았답니다.”

스윽.

그 말과 함께 교황이 로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환한 빛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곧 그의 조그마한 입술이 열렸다.

화아악......!

“기억하십시오. 리커버리! 홀리 웨폰! 프로텍션!”

로얀을 향해 엄청난 빛이 뿜어짐과 동시에 여러 개의 신성마법이 펼쳐졌다.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는 리커버리가 로얀의 눈동자에 각인되었고, 그의 검 중 에리오네에 홀리 웨폰이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인 프로텍션은 로얀의 몸에 둥근 막을 형성시켰다.

“당신의 능력으로 이 정도 힘의 신성마법이라면 복사하실 수 있겠죠?”

교황은 카오스에게서 한 가지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다크로얀에게는 힘을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그에게 신성력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로얀은 굳은 얼굴로 작은 교황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능력까지 아는 교황... 위험인물 일 순위였다.

‘죽여야 할까?’

교황의 손은 여전히 로얀을 향해 있었다. 한데 그가 별안간 작게 중얼거렸다.

“텔레포트.”

“크윽! 기다려라!”

화아악.

파핫.

로얀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교황이 강제로 텔레포트시킨 것이었다. 그가 텔레포트되어 간 곳은 이프리트와 다른 일행이 있는 숲 속이었다.

로얀이 사라지자 교황은 손을 내렸다.

“헉헉... 역시 저도 인간인지라 힘이 드네요.”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텔레포트로 사람을 강제로 이동시켰기에 힘의 소모는 더욱 컸다.

교황은 맺혀 있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그리고 눈을 떴다. 백색 눈... 온통 흰색인 백안의 눈이었다.

로얀이 사라진 자리를 교황은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카오스님에게 버림받은 단 하나의 존재... 그분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전 도저히 카오스님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그리고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당신의 몸에 휘감긴 사슬이 끊어질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교황은 백색의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카오스님의 생각을 전 영원히 알 수 없겠죠. 저도 인간이니까.”

그의 맑은 음성이 연못을 통해 긴 파장이 되어 홀 안 가득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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