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비는 생명이었다
비는 생명이었다
봄의 대륙을 평정한 카르센 제국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 봄의 대륙에 존재했다. 몬스터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어둠의 숲과 요정들의 세계라 불리는 빛의 숲이 그것이었다.
가을의 대륙에서 봄의 대륙으로 넘어오자마자 보이는 거대 도시 라이난은 다른 대륙과 연결되는 통로와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상업이 매우 활발한 도시였다.
그 거대한 라이난에서 동쪽으로 길을 따라 쭈욱 가면 다일리아라는 성이 나온다. 이곳은 어둠의 숲과 맞닿아 있어 몬스터의 출몰이 잦았기에 병사들의 수도 많았고 실력도 다른 성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라이난에서 다일리아로 가는 길목은 꽃의 대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색색의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에 휘날린 꽃잎들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꽃길이었다.
그 화려한 꽃길 위를 로얀 일행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의 앞길엔 바람에 휘날려 떠다니는 꽃잎이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즐거워 보이는 레아와는 달리 이프리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에휴.......”
한숨을 쉬던 이프리트는 어제 저녁을 떠올렸다.
* * *
로얀은 지난밤 로즈아린의 신기를 되찾아왔다.
“이건가?”
로얀은 신인 로즈아린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하고는 목걸이를 건넸다.
그것을 본 로즈아린은 환한 표정으로 로얀의 손에서 빼앗듯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신기를 목에 걸고는 로얀을 쏘아보았다.
“신기를 되찾아준 건 고맙지만, 한낱 인간이 신에게 말을 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나?”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가웠다. 확실히 인간이 신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윽.
로얀은 로즈아린의 말에 다크리온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행동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마검과 성검은 신도 죽일 수 있다고 하더군.”
그 말이 공포의 그림자가 되어 로즈아린을 감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레아는 이프리트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눈짓했다.
“험험! 이 녀석은 인간이 아냐.”
이프리트는 로얀의 목에 팔을 두르며 로즈아린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로즈아린은 이프리트의 말에 로얀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인간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로얀을 바라보자 이프리트는 자신의 붉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눈을 붉게 빛내는가 싶더니 스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로얀은 나와 같은 정령왕이다.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한다면 정령왕을 능멸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꽃의 여신 로즈아린!”
“죄, 죄송해요.”
로즈아린은 이프리트에게서 폭사되는 엄청난 기운에 몸을 떨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로얀의 정체에 대해 토를 단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데 로얀은 다크리온의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치워라.”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이프리트의 손이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너무하는구먼!”
번뜩.
파팟.
다크리온에서 섬광이 번뜩이자 이프리트는 번개같은 빠르기로 로즈아린 옆에 가서 섰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다크리온이 훑고 지나갔다.
로얀은 여전히 번뜩이는 다크리온을 들고 이프리트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은은한 살기까지 내비쳤다.
로얀이 이프리트를 향해 다가가려 할 때, 그들의 우정 어린(?) 행동을 보던 로즈아린이 이프리트와 로얀에게 각각 허리를 살짝 숙였다.
“정말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레아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 그녀는 꽃잎에 휩싸였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다급해 보였다.
“자, 잠깐! 나와의 데이트는!”
파핫.
이프리트의 손이 닿기 직전 로즈아린은 끝내 사라져 버렸다.
휘이이잉.......
이프리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더니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는 로얀을 노려보았다.
“네가 너무 매정하게 대해서 그런 거야!”
로얀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이윽고 힘없이 손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지, 나도 매정하게 대했구나. 몇 년 만에 걸려든(?) 여신인데! 으아아악......!”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부림쳤다.
“가자.”
그러나 로얀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쳐다보지도 않고 다크리온을 검집에 넣고는 앞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 뒤를 레아가 웃으며 뒤따랐다. 그 웃음은 이프리트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굴러 들어온 여신을 놓친 이프리트는 모든 것을 잃은 부랑자처럼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있었다.
휘이이잉.......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 * *
로얀은 숲 속을 거닐며 물소리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물가에서 식사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기 때문이다.
퐁......!
그의 귀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감지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로얀은 가던 길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시력을 망원경처럼 조절하여 멀리 떨어진 곳의 물을 찾아내었다. 조그마한 샘물이 있었고 나뭇잎을 따라 맑은 이슬이 떨어지고 있었다.
레아는 꽃향기를 맡으며 숲을 감상하고 있다가 로얀이 갑자기 멈춰 서자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이제 식사를 하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헤헤.......”
시각을 원래대로 되돌린 로얀은 샘물이 있는 쪽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소식가인 페어리 레아는 별로 배고프지 않았고 이프리트는 정령이라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하나 로얀은 아직까지는 인간에 가까웠기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뒤를 쫓으려던 레아는 이프리트가 좀비처럼 정처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자 그의 손목을 낚아챈 후 로얀의 뒤를 쫓았다.
이슬로 만들어졌는지 무척이나 맑고 아름다운 샘물이 눈에 들어왔다. 레아는 샘물 가에 걸터앉아 물장난을 치며 즐거워했고 이프리트는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로얀은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식사를 준비하려 했다.
촤아악......!
그가 막 가죽 주머니에서 음식을 꺼내려던 순간, 레아가 손을 담그고 있던 샘물이 출렁였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자 샘물 위로 물방울이 모이며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휘오오오......!
출렁이던 샘물이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작은 파도를 일으키며 출렁였다. 그리고 샘물 위에 바람이 모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물과 바람이 각각 사람의 형상이 되어가자 로얀은 두 개의 검 위에 손을 올렸고 레아는 반가운 표정으로 웃었다. 반면 이프리트의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고요한 숲 속에 강한 힘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일행의 눈앞에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존재들.......
샘물이 뭉쳐 푸르고 긴 물결 같은 머리를 드리운, 마치 얼음을 조각해 놓은 듯 차가운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바람도 한곳으로 모여 끝이 말려 올라간 초록빛 긴 머리에 뾰족한 귀의 엘프 형상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따뜻한 봄 햇살을 보는 듯 부드러운 인상에 평온한 모습이었다.
먼저 나타난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고 뒤에 나타난 초록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다.
두 인물의 등장에 레아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녀는 정령왕들과 친분이 각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령왕 중 가장 친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실피드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온화한 실피드의 성격 덕분에 레아는 그녀에게서 어머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엘라임과 실피드가 지상으로 내려서자 레아는 쏜살같이 실피드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언니!”
와락.
자신의 품에 안긴 레아의 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며 실피드는 빙긋 웃었다.
이윽고 실피드의 품에 머리를 묻고 있던 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실피드는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들의 상봉을 옆에서 지켜보던 엘라임은 살짝 웃음 짓고는 고개를 돌려 굳어 있는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남자에게는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죄인 이프리트, 각오는 되어 있겠지?”
엘라임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이프리트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어색하게 웃었다.
“엘라임, 오랜만이네. 그동안 더 예뻐진 것 같아? 하하하!”
“실피드만 아니었다면 넌 오래 전에 소멸됐을 거다.”
이프리트와 실피드의 만남을 가장 반대한 인물이 바로 엘라임이었다. 그녀와 실피드는 태어날 때부터 친구로서 함께해 왔다. 그런 절친한 사이인 실피드의 짝으로 바람둥이인 이프리트를 엘라임이 인정할 리가 없었다.
엘라임 주위로 물방울이 생성되고 있을 때 실피드는 레아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이프리트는 실피드의 시선을 받으며 엉거주춤 앞으로 걸어갔다.
“하하하! 여긴 어쩐 일이야? 이곳에서 실피드에게 주려고 희귀한 물건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는데.”
“.......”
능청스럽게 술술 거짓말을 하는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실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화하던 그녀의 얼굴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휘오오오.......
그녀의 주위로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자 이프리트의 등에서 식은땀이 삐질 생겨났다. 저 모습은 이미 신계에서는 전설이 된, 여신과 정령왕의 대결에서 보인 실피드의 모습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실피드의 승리를 목격한 이프리트는 다시는 여신에게 작업을 걸지 않을 것이며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이프리트.”
생긋.
실피드는 자신의 연인인 이프리트를 부르며 밝게 웃었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이프리트에겐 사신의 웃음처럼 보였다.
스아아아악......!
이프리트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차가운 바람이 그의 몸을 훑고 숲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쿠쿠쿵!
커다란 굉음과 함께 이프리트의 등 뒤에 위치하고 있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드러누워 있었다. 이프리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하하! 역시 실피드는 정령왕 중에 으뜸이야!”
“고마워요.”
생긋.
하지만 그녀의 웃음에서는 날카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로즈아린이라는 꽃의 여신이 저에게 왔더군요.”
실피드의 얼굴엔 상반된 표정이 담겨 있었다. 눈동자는 싸늘했지만 그녀의 입에 걸린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평소처럼 자신의 성에서 엘라임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꽃의 여신 로즈아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엿 됐다.’
이프리트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떻게든 잡아떼야 했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결백해.”
그때!
“언니, 저 인간이 분명 그 여신에게 치근댔어요. 게다가 저에게도 찝쩍댔다니까요.”
쿠쿵......!
레아의 엄청난 발언에 이프리트는 작은 골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실피드의 주위를 감돌던 바람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프리트, 그렇게까지 타락하다니! 어떻게 어린 레아에게까지!”
“헉! 절대 아냐! 저런 발육 부진 꼬맹이에게는 관심없다고!”
이프리트의 강한 부정에 엘라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성숙한 여인은?”
“그야 물론 쭉쭉 빵빵한 미녀라면... 헉!”
이프리트는 뒤늦게 입을 막았지만 이미 실피드의 고개는 푹 숙여져 있었다. 그녀의 여려 보이는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실피드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털썩.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어! 부디 용서를!”
“.......”
사박.
실피드가 이프리트에게로 다가가자 그녀 주위에 있던 바람이 꽃잎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허걱! 부디 자비를!”
그러나 실피드는 이미 이프리트의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퍼억.
“커컥!”
정확히 그의 복부에 박힌 실피드의 주먹! 무릎을 꿇고 있던 이프리트는 하늘을 날아오르더니 곧 이어 바닥을 쭉 밀려 나갔다. 작고 흰 주먹에 실린 그녀의 파괴력은 실로 엄청났다.
스륵.
실피드는 바닥을 나뒹군 이프리트에게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프리트의 몸에서는 이미 혼이 달아나고 없었다. 실피드가 지금 어디로 갈지 잘 알고 있는 이프리트는 삶을 포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령계.......
여기서의 실피드도 무서웠지만 힘이 모두 돌아오는 정령계에선 너무도 무서웠다. 한데 그녀는 지금 자신을 데리고 정령계로 가려 하고 있었다.
완전히 기가 죽은 이프리트를 질질 끌며 실피드는 레아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아야, 이렇게 금방 헤어지게 돼서 미안해.”
“헤헤... 아니에요.”
“먼저 가볼게.”
빙긋 웃어 보이며 마지막으로 엘라임에게 말한 실피드는 이프리트의 멱살을 잡은 채 사라졌다. 정령계로 가는 이프리트의 뒤를 레아가 페어리로서 축복을 해주는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프리트와 실피드가 정령계로 가버리자 엘라임도 돌아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지금 실피드의 성으로 가는 것은 그녀의 신상에도 위험하니 얼마간은 자신의 성에서 쉴 생각이었다.
“나도 이만 가볼게.”
남자들에겐 얼음덩어리였지만 친분이 있는 여자들에겐 상냥한 엘라임이었다. 한데 작은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덥석!
엘라임의 말에 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응?”
“가지 마요. 우리랑 같이 여행하면 안 돼요?”
“미안해. 너도 잘 알잖니.”
엘라임의 눈동자는 로얀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를 꺼리는 그녀가 로얀과 같이 여행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엘라임의 성격이 이렇게 된 것은 계약자들 때문이었다.
그녀를 소환한 이들은 대개 여자였다. 남자에게 배신당하거나 욕을 본 여인들은 한을 품고 수련을 하여 정령왕을 소환했는데, 대부분의 여인들이 복수를 해줄 존재로 엘라임을 소환했던 것이다.
실피드는 온화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기에 복수와는 뭔가 맞지 않았고, 이프리트나 노아스는 남자였기에 당연히 제외되었다. 때문에 엘라임이 인간 여자들의 복수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물론 정령왕을 소환하여 계약을 맺으려면 엄청난 수련이 필요했기에 엘라임이 인간 여자들과 계약을 많이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번의 계약을 통해 여자들의 복수를 대신한 엘라임은 남자들의 안 좋은 면만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녀는 남자에 대한 거부감과 뿌리 깊은 불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엘라임은 미소를 지으며 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레아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로얀과 단둘이 다니기엔 심심했기 때문이다. 아니, 무뚝뚝한 로얀은 활발한 성격의 레아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레아는 엘라임에게 귀를 대보라고 손짓하고는 허리를 숙인 그녀에게 속삭였다.
“조금 전까진 이프리트가 있어서 그러지 않았지만, 만약 단둘이 있게 되면 절 어떻게 할지도 몰라요.”
흠칫.
큰 눈동자를 글썽이며 말하는 레아를 보며 엘라임은 몸을 작게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로얀을 쳐다보았다.
로얀은 엘라임과 실피드가 나타났을 때부터 관심을 끊고 나무 아래에 앉아 육포를 씹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레아가 엘라임에게 한 말을 모두 들었지만 뭐라고 말하기도 귀찮았고, 구태여 말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에 가만히 있었다.
로얀의 무심한 눈동자와 엘라임의 차가운 눈동자가 부딪쳤다. 그 순간 레아는 엘라임을 붙잡은 것이 잘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다시 레아에게로 향하는가 싶더니 분홍빛 엘라임의 입술이 열렸다.
“같이 가자.”
그러자 레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고 로얀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댈 뿐이었다.
* * *
이프리트가 갑자기 떠나버리고 엘라임이 합류하게 된 로얀 일행은 어둠의 숲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일리아로 향하고 있었다.
꽃잎으로 둘러싸인 숲을 지나 한참을 걸은 그들의 눈에 커다란 성이 들어왔다. 너무 멀어 아직 희미하게 보였지만 다일리아가 틀림없었다.
로얀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 그런 그의 곁에서 레아가 걷고 있었고, 레아 옆으로 엘라임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레아를 중간에 두고 로얀과 엘라임이 양쪽에서 걷고 있는 것이었다.
로얀이 앞서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와 엘라임 사이가 너무 차가워 조금이라도 사이를 트기 위해 레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러자 레아와 이야기를 하며 걷던 엘라임은 자동적으로 로얀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한동안 그들 사이엔 말이 없었다. 그때, 로얀이 주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너와 일행이 된 뒤부터 저것들이 계속 따라오는군. 뭐지?”
그는 손을 들어 길 옆 나무들이 드문드문 나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실프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초록빛을 뿌리는, 훨씬 작은 정령이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는 정령이 틀림없었다.
로얀의 말에 엘라임은 보통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정령을 알아본 그를 놀랍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로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레아는 놀라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로얀이 말을 걸어준 탓이었다.
“포레스트라는 숲의 정령이야.”
“숲의 정령?”
“응.”
처음 들어보는 정령이었다. 불의 정령, 물의 정령, 바람의 정령, 땅의 정령, 이들 말고도 정령이 또 있었던가?
“숲의 정령이란 뭐지?”
“에... 언니가 설명 좀 해줘.”
레아가 설명하기 힘든지 엘라임의 소매를 흔들며 그렇게 말하자 엘라임이 로얀을 바라보았다. 순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냉기만 흐를 뿐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린 엘라임은 숲의 정령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숲의 정령 포레스트는.......”
이 세상에는 네 명의 정령왕이 다스리는 4대 정령 외에도 세 종류의 정령이 더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령왕과 정령계가 없어 버림받은 정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령왕이 없는 이들을 통솔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 숲의 정령 포레스트는 페어리들이 돌봐주었고 빛의 정령 프라이어는 천계의 천족들이 돌봐주었다. 하나 어둠의 정령 다크는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다.
처음엔 마족들이 그들을 통솔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의 정령 스스로가 이를 거부했다.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마족들의 품에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빛의 정령인 프라이어는 커다란 빛으로 된 구체 모양의 정령이었고 어둠의 정령인 다크는 흑빛으로 된 구체 모양의 정령이었다. 그리고 포레스트는 실프의 축소판처럼 생긴 정령이었다.
정령계가 없는 세 정령들에겐 큰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장점이라면 정령사에게 소환된 4대 정령들이 본신의 힘을 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세 정령은 본신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소환된 4대 정령은 소멸당할 경우 그들의 정령계에서 조금 쉰 후에 언제라도 다시 정령사의 소환에 응해 활동할 수 있지만, 세 정령은 소멸당하면 백 년이란 시간이 지나야 다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것은 어둠의 정령 다크였다. 숲의 정령과 빛의 정령은 각기 돌봐주는 존재들이 있어 소멸당했을 경우 비록 힘을 쓸 수 없지만, 천계와 빛의 숲에서 편히 쉴 수 있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은 한때 마족의 수하였다는 이유로 돌봐주는 이는커녕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처지라 한번 소멸되면 다시 힘을 쓸 수 있기까지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지내야 했다.
어둠의 정령 다크에 대해 말하는 엘라임의 표정은 상당히 불쾌해 보였다.
그녀의 긴 설명이 끝나자 로얀은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숲의 정령은 잊어버리고 어둠의 정령 다크에 대해 생각하며 걸어갔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자 그들 사이엔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라임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그들은 또다시 다일리아를 향해 걸었다.
* * *
웅성웅성.......
축제 기간도 아니고 유명한 곡예단이 온 것도 아닌데 다일리아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로얀 일행이 있었다.
무사히 다일리아까지 오게 된 그들 일행은 쉴 곳을 찾아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엘라임의 아름다운 외모와 레아의 귀여운 외모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로얀으로 인해 그 누구도 그녀들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로얀 일행은 마침내 ‘햇살’이라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그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은 갈색 머리의 귀여운 소녀는 로얀 일행이 카운터를 향해 걸어가자 이내 다른 손님들에게로 달려갔다.
카운터엔 볼살이 포동포동한, 넉살좋게 생긴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페어리와 정령왕이 함께하는 특이한 파티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로얀이 입을 열었다.
“하룻밤 묵었으면 한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먹도록 하지.”
그러자 중년 사내는 카운터 밑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딸깍.
중년 사내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열쇠의 수는 일행의 구성이나 수와는 전혀 맞지 않게 단 한 개뿐이었다.
“두 개.”
“하하, 죄송합니다. 요즘 용병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방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성의 영주가 끊임없이 찝쩍거리는 몬스터들에게 화가 나서 몬스터마다 현상금을 붙인 것이었다. 때문에 용병들이나 여행자들은 몬스터 헌터가 되어 이 마을로 몰려들고 있었다.
방이 하나란 말에 로얀은 열쇠를 주인을 향해 밀었다. 다른 곳으로 가보기 위함이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
열쇠를 밀던 손이 멈추자 중년의 여관 주인은 넉살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가족끼리 한 방을 쓰는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가족?”
로얀은 가만히 있었지만 엘라임과 레아가 발끈했다.
레아는 키가 작았기에 엘라임의 팔에 안겨 조금 전부터 여관 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족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었다.
“예? 그러니까 이쪽 남자 분이 남편이고, 이쪽 여자 분이 부인... 꼬마 아가씨는 당연히 따님 아닌가요?”
남자들이 로얀 일행에게 찝쩍거리지 않은 이유는 로얀이 풍기는 심상찮은 기운 탓도 있었지만 그들 일행이 너무도 단란(?)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얀도 잘생긴 편에 속해 엘라임과 나란히 서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간에 끼어 있는 너무나도 귀여운 레아는 로얀과 엘라임의 딸처럼 보였던 것이다.
레아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녀도 살 만큼 산 페어리였다.
엘라임 또한 냉기를 풀풀 날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여관 주인은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내가 로얀의 딸?”
“아, 아닙니까?”
빠직.
레아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았다. 엘라임의 품에 안겨 있는 채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카운터를 탕탕 치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달각.
“어디에 있지?”
“이층 오른쪽 복도 맨 끝 방입니다.”
뚜벅뚜벅.......
로얀은 잔뜩 흥분한 레아와 여관 주인을 죽일 듯 노려보는 엘라임을 뒤로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 평소 잘 흥분하지 않던 엘라임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얼린(?) 후 이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주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딜 가더라도 방을 구하긴 힘들 것 같았기에 순순히 이층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자 레아도 허둥지둥 그들 뒤를 쫓았다.
“정말 예쁜 따님을 두셨습니다.”
여관 주인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레아의 몸이 움찔했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로얀과 엘라임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얻은 방은 깔끔했지만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로얀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로얀은 창문에서 벗어났다.
“우씨! 내가 왜 로얀의 딸이라는 거야! 내가 로얀보다 훨씬 오래 살았는데!”
엘라임은 씩씩거리는 레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귀여웠기 때문이다.
뚜벅.
“곧 비가 온다.”
로얀의 말에 레아는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바라보았고,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 식사를 하러 갈 건데.......”
그는 창가에서 턱을 손으로 받치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레아와 입구에 서 있는 엘라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안 먹을래.”
“정령은 밥을 먹든 안 막든 상관이 없지. 나도 먹지 않겠어.”
그녀들의 대답을 들은 로얀은 방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여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마을을 돌아다니던 그가 다시 여관으로 돌아온 건 초저녁 무렵이었다.
한데 그의 손엔 두꺼운 책자가 들려 있었다.
<몬스터 도감>
뚜벅뚜벅.......
로얀은 그 책을 품속에 집어넣고는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 일행의 방이 있는 이층 복도 끝으로 향했다.
“어? 왜 이리 늦었어!”
로얀을 반긴 건 레아였다. 그녀는 간편한 차림으로 엘라임과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이 막 자려 할 때 로얀이 들어온 것이었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 흘렀다. 로얀이 잘 곳을 생각하니 뭔가가 어색해졌던 것이다.
쏴아아아......!
그때 밖에서 우렁찬 빗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거세게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뚜벅뚜벅.......
로얀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아......!
문을 열자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비가 안으로 튀겼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먼저 자라.”
로얀의 말에 레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들어왔으면서 이 빗속에 또 어딜 나간다는 건지.......
“난 비가 좋거든.”
그 한마디와 함께 그는 열린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밖으로 빠져나가며 창문을 닫아주는 것도 잊지 않고.......
엘라임의 머릿속에 로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난 비가 좋거든.’
물의 정령왕인 자신도 비를 좋아했지만 일부러 맞으러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로얀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바보였군.”
그녀가 이불을 토닥거려 정리하자 레아가 웃으며 품안으로 안겨들었다. 워낙에 괴물 같은 로얀이었기에 이 빗속에 나갔지만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레아는 피곤했는지 엘라임의 품에 안겨 금세 새근거리며 꿈나라로 향했다.
* * *
쏴아아아......!
여관을 빠져나온 로얀은 비를 맞으며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성 안을 걸어다녔다. 그런 그를 마을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들의 시선을 모두 무시했다.
무작정 걷던 로얀은 성의 외곽에 있는 작은 숲을 발견했다.
타박타박.......
물방울이 발목을 찰싹찰싹 때렸다.
로얀은 비를 좋아했다. 전쟁터에서는 비로 인해 몇 번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적이 그에게 다가와 무기를 휘두르려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차에 뒤에서 몰래 다가들던 자가 물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그 소리로 적을 알아차린 적도 있었다.
물론 비를 좋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비는 무엇보다 로얀으로 하여금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몸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에게는 또 다른 생명이었다.
비를 맞으며 로얀은 두 개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르릉.......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우우웅.......
두 개의 검에서 백색 오러가 피어났다.
검을 뽑은 직후 마나 소드를 시전한 그는 아무도 없는 작은 숲의 중앙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쏴아아아......!
스팟!
빗속에서 로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 갔다.
콰가가강!
콰르르릉......!
백색 오러가 내는 굉음은 하늘에서 터지는 천둥에 묻혀버렸다.
로얀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찌르고 베고 가르고... 몸 속의 마나는 끊이지 않고 샘물처럼 솟아났다.
“나의 힘을 시험하겠다.”
콰가가강!
콰르르릉......!
그는 느꼈다. 봉인이 풀려 전대 다크로얀의 힘이 개방된다 해도 그것이 무조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폭주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힘을 얻고 난 후 어느 정도 힘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했다.
첫 번째 봉인은 거의 자동적으로 몸 안에서 다스려졌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봉인이 풀린다면 네 번째로 가기도 전에 폭주할지도 모른다.
그가 폭주한다면 얀도 레아도,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 모두가 사라질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기왕이면 죽지 말고 복수를 끝내야 했다.
쏴아아아......!
현재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로얀은 빗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