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어둠의 신전 (15/42)

6장 어둠의 신전

어둠의 신전

로얀이 몸을 씻고 돌아오자 엘라임과 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 아래에서 로얀을 기다리며 대화를 하고 있던 그녀들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엘라임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로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어둠의 숲을 잔잔히 비추는 햇살에 로얀의 그림자가 출렁였다. 한데 그 그림자 속에는 또 다른 존재가 숨어 있었다. 게다가 일행의 주위에는 로얀의 그림자 속에 있는 존재와 똑같이 생긴 것이 백여 정도 더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정령이 로얀의 그림자 속에 있었기에 엘라임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 사신의 낫이라는 시클을 들고 있는 정령은 어둠의 정령 다크와 흡사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하지만 로얀의 그림자 속에 있는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하급 정령인 다크와 달리 중급 정령의 것이었다.

“뭐, 뭐지?”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던 엘라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의 손은 로얀의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레아는 쉐도우를 펼친 다크로드가 보이지 않았기에 엘라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스윽.

로얀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크로드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모든 정령들은 정령왕에 대해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더군다나 몇십만 년 동안 겁에 질려 살아왔던 어둠의 정령이 왕이 생겼다고 갑자기 변할 리가 없었다.

로얀은 자신의 식구이자 부하인 다크로드가 엘라임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자 기분이 나빠졌다.

“다크로드.”

[네.......]

로얀의 부름에 다크로드는 힘없이 대답하며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는 엘라임을 힐끔거리며 로얀 옆에 섰다. 아니, 둥실 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다크로드는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로얀이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이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마라.”

힐끔.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가 엘라임을 바라보자 그녀의 싸늘한 눈동자가 보였다.

“명령이다.”

[예!]

다크로드의 대답에 엘라임의 몸에서 엄청난 힘과 함께 정령왕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싸늘한 눈동자는 다크로드를 직시하고 있었다.

“감히 중급 정령.......”

“꺄아아악!”

엘라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옆에 있던 레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다크로드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레아는 엘라임과 로얀이 무슨 일 때문에 살벌해졌는지 알지 못했지만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 나온 정령을 보고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다크로드는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어둠 속에서 간간이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한데 무엇보다도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는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몸집을 가지고 있어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레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으아아아......!]

다크로드는 레아가 달려들자 괴성과 함께 로얀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히잉, 어디로 간 거야?”

로얀의 그림자 앞에 쭈그려 앉은 레아는 손으로 그림자를 찔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턱.

그 모습에 로얀은 레아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머리가 손 안 가득 들어오는 듯했다.

“너, 이 녀석도 무서운 거냐?”

그러자 다크로드가 그의 그림자 속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는 말했다.

[페, 페어리의 여왕님이잖아요.]

“앗, 나왔다!”

레아가 고개를 내민 다크로드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크로드의 겁 많은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의 행동이 납득이 가기도 했다. 레아는 페어리의 여왕이었고 페어리는 빛의 요정족이라 할 수 있었기에 어둠인 다크로드와는 상반된 힘이었으니 중급 정령인 다크로드가 레아를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레아는 다크로드와 어둠의 정령이 같이 다녀도 좋아할 것 같았지만 엘라임은 달랐다. 그래서 로얀은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을 포함해 주위에 있는 어둠의 정령들은 모두 나의 가족이다. 이들을 건드리지 말았으면 한다.”

“당신이 어둠의 정령왕이라는 건가요?”

“아니, 혼돈의 정령왕이다.”

“.......”

엘라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로얀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숲 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 같이 가!”

로얀의 그림자만 보고 있던 레아는 그가 몸을 움직이자 급히 그 뒤를 쫓았다.

엘라임은 조금 전 로얀이 말한 혼돈의 정령왕에 대해 생각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처음에는 레아를 보호하기 위해 일행이 되었지만 지금은 로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 * *

“로얀, 그 검둥이 좀 꺼내봐.......”

아까부터 레아는 로얀의 팔을 잡고 흔들며 칭얼거렸다. 다크로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크로드는 레아가 그럴 때마다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스오오오.......

“안개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로얀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레아와 엘라임도 움직임을 멈추고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퍼져 있었다.

“여긴 안개가 많은 지역이 아닌데......?”

주변을 둘러보던 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둠의 숲을 지나지 않고 곧장 빛의 숲에 닿을 수 있는 페어리들만의 길이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레아는 그동안 몇 번이나 어둠의 숲에 들러 주변을 살폈다. 몬스터들이 무섭긴 했지만 호기심을 억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이곳에 이런 안개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추악한 언데드들이 사는, 짙은 안개가 낀 곳을 피해 빛의 숲으로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라임은 손을 뻗어 안개를 쥐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거군.”

로얀은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가득 차 있는 안개를 보고는 다크로드를 불렀다.

“다크로드.”

스르륵.

[예, 왕이시여.]

“알아보고 와라.”

번뜩.

스르륵!

다크로드는 레아가 자신을 보며 눈을 번뜩이자 급히 로얀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다른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크로드가 다시 나타난 것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활발한 어둠의 정령들에게 어둠의 숲은 그들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 숨어 다닐 수 있는 데스의 정찰 능력은 바람을 타고 다니는 바람의 정령과 비등할 정도로 뛰어났다. 고스트를 제외한 모든 존재에게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신전이라는 곳에서 사악한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어둠의 신전?”

“어둠의 신전은 과거 마왕 아슈발트를 봉인해 둔 신전으로 언데드들의 서식지 중심에 있는 곳이야. 그곳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흐음.......”

어둠의 숲을 훤히 꿰고 있는 레아가 로얀의 궁금증을 풀어주자 그는 말없이 안개를 바라보았다.

“가자.”

“응? 어디로?”

레아는 로얀이 어디를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어둠의 신전으로 간다.”

“시, 싫어!”

로얀의 말에 레아는 강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언데들의 그 괴상한 외모는 레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로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의 신전으로 가면 데스 나이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언데드들의 서식지인 그곳이라면 틀림없이 데스 나이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데스 나이트보도 더 강한 몬스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로얀을 도와준 건 뜻밖에도 엘라임이었다. 그녀는 레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레아, 우리 가보자. 어둠의 신전에 문제가 생겼다면 빛의 숲도 위험하잖아.”

빛의 숲이 위험하다는 말에 레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숲에 사는 페어리들의 여왕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페어리들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럼 결정됐군. 다크로드, 어둠의 신전으로 안내해라.”

다크로드는 로얀의 명에 몸을 움찔거렸다. 레아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앞이 잘 보였지만 엘라임과 레아는 그렇지 못했기에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다크로드가 안내해 주는 대로 어둠의 신전으로 향했다.

“안개가 더 짙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로얀은 시야를 방해받지 않았지만 확실히 안개는 그들이 어둠의 신전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더 짙어지고 있었다.

엘라임은 안개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데... 뱀파이어인가?”

“우아아앙......!”

엘라임의 말에 레아는 울먹이며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엘라임은 그런 레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뱀파이어는 사람들을 유혹해 피를 빠는 몬스터답게 얼굴이 상당히 잘생기고 예뻤다. 평소 예쁘고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레아가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뱀파이어는 무섭게 생기진 않았잖아?”

“그, 그렇지만 박쥐 덩어리잖아!”

“호호호.......”

레아의 말에 엘라임은 오랜만에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페어리의 여왕답지 않게 울먹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

“뭔가가 다가온다.”

로얀의 말에 엘라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로얀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다크로드에게 말했다.

“모습을 감춰라.”

스르륵.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는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그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바스락.

“하하하! 이런 곳에서 여행자를 만나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검은 가죽 재킷에 진홍색 머리를 한 매우 매혹적인 남자와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요염한 여인이었다.

그들이 웃음 지으며 일행에게 다가오자 레아는 엘라임 뒤에 숨었다. 정령왕이나 페어리의 여왕이 두 남녀의 정체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상대방은 로얀 일행의 정체를 전혀 몰라봤지만 말이다.

두 남녀는 모두 뱀파이어였다. 피를 먹고사는 그들에게 있어 어둠의 숲에서 발견한 로얀 일행은 그야말로 맛있는 음식이자 보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보통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아주 교활하고 머리가 좋은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숲에 있는 이들은 피에, 특히 인간의 피에 너무도 굶주려 있었다.

“호호, 반가워요.”

두 명의 뱀파이어가 무척이나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좀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로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엘라임 뒤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민 채 그들을 바라보던 레아는 로얀이 그답지 않게 검의 손잡이에 손도 가져가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의아하게 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촤르르륵.

로얀이 품속에서 몬스터 도감이라는 책을 꺼내더니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찬찬히 뭔가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입이 열렸다.

“뱀파이어라... 검을 쓸 필요도 없겠군.”

“큭!”

파팟!

로얀의 말에 뱀파이어 남녀는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아무리 봐도 인간으로 보이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볼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던 일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상급의 뱀파이어였다.

“어떻게 알았지?”

“이 자식!”

여자 뱀파이어는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를 알았는지 궁금해 물었지만 꽤나 다혈질로 보이는 남자는 이를 갈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빛으로 로얀을 노려보았다. 자신들을 깔보는 듯한 그의 말 때문이었다.

주변의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파박!

남자 뱀파이어는 안개 속에서 로얀이 앞을 보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윽.

로얀은 뱀파이어를 가볍게 피하면서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여자 뱀파이어 쪽으로 집어 던졌다.

“큭!”

날아간 뱀파이어는 몸을 회전시키며 착지했다. 덕분에 뱀파이어들끼리 부딪치는 일은 면했지만 그는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남자 뱀파이어가 자신의 동료인 듯한 여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한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크... 조용히 피를 내줬으면 고통은 덜했을 텐데,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블러드!”

“호호호! 그 육신까지 씹어 먹어 드리지요. 블러드!”

파하핫!

외침과 함께 그들은 붉은 빛에 휩싸였다.

‘저들의 기술이란 것이 저건가?’

로얀은 두 뱀파이어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책에도 뱀파이어의 블러드라는 기술이 언급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저 뱀파이어가 전투 형태로 변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로얀은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레아와 엘라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콰드드득!

붉은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붉은 빛이 점점 사그라지는 듯싶더니 두 뱀파이어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날카로운 손톱과 송곳니... 그들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조금 전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파바바밧!

남자 뱀파이어가 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로얀에게로 쇄도해 왔다. 그의 움직임은 엄청나게 빨라 그의 눈동자가 붉은 잔상을 남길 정도였다.

“블러드!”

남자 뱀파이어는 로얀 바로 앞에 당도했을 때 이상한 말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우뚝 멈추었다.

푸욱!

그의 날카로운 손톱은 로얀의 왼쪽 어깨 위로 지나갔고, 뱀파이어인 그의 심장엔 로얀의 손이 박혀 있었다.

뱀파이어의 눈이 부릅떠졌다. 등 뒤로 비어져 나온 로얀의 손에 들린 자신의 심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붉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로얀 때문이었다.

“쓸 만하군.”

로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남자 뱀파이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워낙 목소리가 작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로얀이 보인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에 듣지 못한 것이다.

너무도 오랜만에 나타난 인간 사냥감에 그들 뱀파이어 부부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을 나왔다. 어둠의 신전에서 풍기는 어둠의 기운이 오늘따라 너무도 강했기에 힘도 충만해져 있었다. 하지만 분명 인간이라 생각했던 로얀은 인간이 아니었다.

동족... 그것도 자신보다 오래 살았을 것이 분명한, 진한 피를 가진 뱀파이어였다. 아니, 그는 뱀파이어의 시조라 불리는 드라큘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강할 수는 없었다.

“쿨럭!”

남자 뱀파이어가 붉은 피를 토해 냄과 동시에 로얀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손톱이 더욱더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퍽!

남자 뱀파이어가 뭐라 말하려 할 때 그 심장은 터져 나갔고, 뱀파이어는 고개를 떨구었다.

푹.

로얀은 뱀파이어의 가슴에서 손을 빼내며 그의 식어버린 육체를 밀었다.

털썩.

“으으윽, 이, 이......!”

여자 뱀파이어는 붉은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두 손의 손톱을 앞세운 채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엄청난 속력으로 움직이는 로얀의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자리에 멈춰 섰다.

로얀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 여자 뱀파이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엘라임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는 레아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퍽!

로얀이 아무 거리낌 없이 여자 뱀파이어의 머리를 터뜨리자 피와 뇌수가 그의 몸을 적셨다. 여자 뱀파이어는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꼭 그렇게 싸워야겠어? 그리고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엘라임은 더 이상 로얀을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기술을 쓰는 데다가 이번에 그가 보여준 행동은 심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냥 검으로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잔인하게 뱀파이어를 죽여버렸다.

터벅.

“또 젖어버렸군.”

로얀은 자신의 몸을 적신 뱀파이어의 피와 뇌수를 바라보며 레아와 엘라임에게로 다가갔다. 레아는 엘라임의 품속에서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그를 쳐다보았다.

“우아앙! 로얀도 박쥐 덩어리였어?”

확!

그는 레아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계속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다시 어둠의 신전으로 향하지.”

레아는 로얀이 갑자기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자 죽은 뱀파이어들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 했다.

턱.

“대답해.”

엘라임은 몸을 돌리려는 로얀의 팔을 잡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진실된 대답을 듣기 위함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방금 건 단지 기술을 따라했을 뿐이야.”

“......?”

기술을 따라하다니? 블러드는 뱀파이어 일족 고유의 기술이었다. 그녀는 로얀의 말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다크로드, 다시 길을 안내해라.”

스륵.

[예.]

그러나 다크로드는 로얀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모든 어둠의 정령의 아버지이자 왕이 된 로얀에게 의심이라든지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얀은 여전히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엘라임의 손을 잡고 내려놓았다. 그녀의 피부는 매우 부드러웠고 시원한 느낌이 났다.

그의 행동에 엘라임은 놀라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썩은내가 심해지고 있다. 레아를 보호해라.”

후각도 다른 사람보다 발달한 로얀은 점점 진해지는 시체 썩은 냄새를 맡았다. 그가 몸을 돌리자 다크로드는 허공에 둥실 뜬 채로 길을 안내했다.

로얀의 뒷모습을 보며 엘라임도 레아의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레아가 그런 그녀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로얀이 한 말이 무슨 뜻이야?”

“박쥐 덩어리가 아니래.”

“진짜지?”

“그래.”

엘라임은 재차 확인하듯 묻는 레아를 향해 미소짓고는 혼돈의 정령왕이라 자칭하는 다크로얀의 등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의 존재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아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아니, 로얀은 만약 레아를 해치려는 존재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을 막을 위인이었다.

로얀이 적어도 자신들에게는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며 엘라임은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 * *

썩은 냄새와 갖가지 악취가 로얀의 후각을 자극했다. 뒤따라오는 엘라임과 레아도 그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많군.”

악취가 풍기는 곳에 도착한 직후 로얀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로얀 일행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시체들의 바다였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모여 있다가 로얀 일행이 나타나자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언데드 대군들... 그들 끝에 어둠의 신전으로 보이는 지붕이 힐끗 보였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들의 시선을 받으며 로얀 일행은 어둠의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달그닥!

우어어어......!

언데드들도 로얀 일행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은 느리기로 소문난 좀비보다야 빨랐지만 그래도 느리긴 마찬가지였다.

레아는 엘라임 뒤에서 조심조심, 두 눈을 질끈 감고 걸어가고 있었다. 흉측한 좀비가 보기 싫었던 그녀는 아예 눈을 감고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그닥!

우어어......!

레아는 괴기한 소리에 움찔거리며 눈을 살짝 떴다. 그녀의 눈 안 가득히 징그러운 언데드들이 들어찼다.

“꺄아아아......!”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엄청나게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언데드들을 향해 덮쳤다.

화아아악!

그리고 비명과 함께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는 레아의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와 언데드들 사이를 누볐다. 그러자 그 빛은 모여 있는 언데드들을 모두 녹여버리며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쿠어어어......!

콰드득!

초록 피부가 듬성듬성 붙어 있는 좀비는 그대로 녹아버렸고, 스켈레톤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순식간에 앞이 훤히 뚫리며 거대한 어둠의 신전이 한눈에 보였다.

로얀이 멍하니 레아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외면해 버렸다.

레아가 사용한 것은 페어리의 기술이었다. 빛을 다룰 줄 아는 페어리 중에서도 그녀는 여왕이었기에 강한 빛을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기술이었는데 정면으로 다가오는 언데드들이 너무나 징그러워 무의식중에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로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페어리의 여왕이 사용한 기술이라 그런지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지는 않았다.

끼아악......!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로얀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신전에 있던 거대한 동상이 살아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언데드들에게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로얀 일행이 레아의 힘으로 인해 보이게 되자 가고일들이 움직인 것이다.

가고일... 어둠의 신전을 지키는 문지기인 듯했다. 악마를 상상하며 만든 가고일들은 돌로 된 단단한 육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민첩했고, 상대가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질긴 몬스터였다.

끼아악......!

스윽.

로얀은 에리오네의 그립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후웅.......

스륵!

하지만 로얀이 검을 뽑기도 전에 가고일은 커다란 물방울에 하나둘 갇히기 시작했다. 엘라임의 힘이었다.

총 여섯 마리인 가고일이 모두 물방울 속에 갇히자 엘라임이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콰드드득!

끼아아......!

물 속에 갇힌 가고일들은 물의 압력이 점점 강해지자 괴로운 듯 괴성을 질러댔다.

콰드득!

이윽고 물의 압력에 완전히 박살난 가고일들은 돌 부스러기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로얀은 물끄러미 엘라임과 레아를 바라보았다. 외모만 본다면 작은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았지만, 신분이 신분인 만큼 그녀들이 가진 힘은 로얀이 막연하게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강한 것이었다.

그의 시선에 엘라임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제 그 혼자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로얀은 몸을 돌렸다. 언데드들이 사라진 자리를 또다시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스릉.......

그는 에리오네 한 자루만 뽑아 들었다.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성검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상대하기에는 언데드들이 너무 많았다.

“다크로드.”

스르륵.

로얀의 말에 흑색 로브를 걸친 조그마한 다크로드가 고개를 숙이며 부복했다.

“모두 처리해라.”

로얀의 명령을 들은 다크로드는 몸을 일으켜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왕의 명이시다. 모두 처리하라!]

스르륵.

스거걱!

쿠어어어......!

콰지직!

다크로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언데드들의 그림자 속에서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들이 모습을 나타내는가 싶더니 그 즉시 그림자의 주인을 베어버렸다.

[흑! 저 녀석의 명령을 들어야 하다니.......]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리는 어둠의 정령들의 불평에 다크로드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쳇! 저 거만한 폼 좀 봐.]

[히힛, 뭐 어때? 우린 왕의 명령이 우선이야.]

[그럼, 그럼! 이제 마음껏 노는 거야!]

[와아아아.......]

어둠의 정령 데스들은 한동안 웅성거리다가 로얀의 명령을 상기하며 곳곳에 널려 있는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반월!]

중급 정령 데스들이 일제히 중얼거리며 사신의 낫인 시클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그 모습은 마치 바람 계열의 마법인 윈드시커가 흑색을 띠며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죽음의 반월이 훨씬 앞섰다.

날카로운 흑색 날이 수십 가닥으로 나누어져 언데드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와 함께 어둠의 정령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데스들은 무척이나 즐거운 듯 언데드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가차없이 그들을 베어버렸다. 그들의 작은 낫은 휘둘러질 때만큼은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너는 안 가나?”

로얀은 신나게 날아다니는 데스들을 보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다크로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갑니다!]

휘릭.

다크로드는 뭔가 찔리는지 힘차게 대답하고는 잽싸게 하늘을 날아 언데드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로얀은 에리오네를 말아 쥐었다.

“홀리웨폰.”

화아아악!

성검이라 그런지 에리오네는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가늘게 떨었다. 무기에 성속성의 빛을 담게 해주는 마법인 홀리웨폰은 교황의 힘과 에리오네의 힘이 어우러져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후우우웅......!

거기다 백색 오러까지 씌우니 마치 거대한 빛의 기둥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타탓!

로얀이 언데드들을 향해 뛰어들자 그 모습을 엘라임과 레아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레아는 에리오네가 내뿜는 빛에 눈을 뜬 것이었다.

레아는 자신이 귀여운 인형처럼 여기던 어둠의 중급 정령들이 히히덕거리며 언데드들을 학살하고 다니자 굳어버렸고, 엘라임은 백 명의 중급 정령이 일제히 낫을 휘두르는 모습에 굳어버렸다.

콰가가강!

쿠어어어......!

로얀이 에리오네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들이 형체도 남지 않고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콰가가강!

그의 앞길을 막는 존재는 이제 없었다. 모두 에리오네의 빛에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어둠의 신전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침입자... 죽인다.]

로얀은 갑자기 들려온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에 어둠의 신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전신 갑옷을 입은 네 기사가 서 있었다.

로얀이 그렇게 만나기를 고대하던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보통 흑갑을 입고 있다고 전해지는 이들이었지만 지금 로얀의 눈앞에 있는 이들은 특이하게도 붉은색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발음도 정확했고 느껴지는 힘도 강했다.

죽은 기사의 영혼으로 만든 존재들... 그들은 기사일 때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모두 소드 마스터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중급은 되어 보였다.

파핫!

로얀이 몸을 날렸다. 앞을 가로막는 언데드들은 관심 밖이었다. 그의 눈엔 오로지 데스 나이트들만이 보였다.

후웅.

콰가가강......!

그는 바닥으로 내려서면서 데스 나이트 한 명에게 에리오네를 내리찍었다.

[크아아악......!]

그 강하다는 데스 나이트는 로얀의 단 일 검에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로얀은 데스 나이트의 명성이 조작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검이 성검이고 교황이 걸었다고 할 수 있는 홀리웨폰에 마나 소드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다.

“시시하군.”

[천계의 명을 받은 것이냐?]

“나의 의지다. 죽음의 반월!”

후웅.

쇄에에엑!

데스 나이트를 약한 몬스터로 확정지은 로얀은 남은 세 명의 데스 나이트를 향해 자신의 기술을 펼쳤다. 그러자 밝은 빛의 반월에 흑빛이 살짝 감도는 기괴한 모양의 칼날이 데스 나이트들을 덮쳤다.

지금까지 그가 쓰던 다른 기술들과는 달리 이 ‘죽음의 반월’은 자신만의 기술이었다. 그러자 문득 어둠의 정령을 받아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어둠의 정령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생겨난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헬파이어!”

그가 자신의 기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사이한 목소리가 신전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불길이 그를 덮쳤다.

화르르......!

지옥의 염화가 영혼마저 태우려는 듯 로얀의 몸을 덮쳐왔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지옥의 불꽃을 바라보며 로얀은 손을 내밀었다.

“프로텍션.”

화아악.

콰가가강!

로얀의 몸을 새하얀 빛이 뒤덮는가 싶더니 그 위로 헬파이어라는 파도가 휘몰아쳤다. 그때, 어둠의 신전에서 검은 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크크크! 정통으로 맞았으니 아무리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해도......!”

섬뜩한 목소리를 흘리며 걸어 나오던 누군가는 눈앞의 상황에 몸을 주춤거렸다. 헬파이어의 열기를 뚫고 신전의 침입자가 덮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하하하......!

후우웅!

로얀은 온몸에 빛을 두른 채 마법을 시전한 이에게 거대한 빛의 기둥을 휘둘렀다.

“카이저 실드!”

카카캉!

어둠의 신전의 대장으로 보이는 그 존재는 금빛 막을 형성하여 로얀의 검을 막았다.

이윽고 금빛 막을 형성한 존재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붉은 갑옷의 특이한 데스 나이트들처럼 그 존재 역시 푸른 빛덩이 같은 눈동자가 아닌 붉은색 눈을 하고 있는 리치였다.

리치는 마법사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 채 영원의 세월을 살아가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존재로,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리치가 되기 위해선 마법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야 했기에 로얀의 눈앞에 있는 리치도 당연히 마법적 능력은 뛰어났다. 더군다나 리치는 오랜 세월 동안 마법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두근두근.......

로얀은 이상하게도 마족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리치를 보자 아련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카이저 실드와 헬파이어를 펼치는 리치의 마법 능력은 최소한 8서클. 로얀은 6서클까지만 복사할 수 있었기에 리치의 마법은 당연히 복사할 수가 없었다. 정말 꺼림칙한 상대였다.

“프로텍션이라... 그렇다면 교황청에서 온 팔라딘이냐?”

어둠의 신전의 현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리치는 강한 신성력을 뿜어대는 로얀의 에리오네와 그가 펼친 프로텍션을 보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로얀은 리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후웅.

찌르기를 위한 뾰족한 검이라 휘두를 때의 파괴력은 다크리온보다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것은 홀리웨폰이 커버해 주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무시하는 로얀의 태도에 리치는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이노옴! 플레어!”

화르르륵!

콰가강......!

7서클의 화염계 마법인 플레어! 초고온의 화염이 로얀을 덮쳤지만 그는 또다시 그것을 몸으로 받아내며 리치에게로 돌진했다. 이번에는 에리오네의 특징을 살려 리치의 몸을 찔러 나갔다.

흠칫.

“카이저 실드.”

쾅......!

이번에도 리치는 별다른 주문 없이 시동어만 외치며 마법을 펼쳐 로얀의 공격을 막아냈다.

리치는 지금 매우 여유있어 보였지만 내심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프로텍션이든 카이저 실드든 간에 막을 생성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마법은 커다란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 로얀은 하얀 빛을 뿌리는 프로텍션을 갑옷처럼 두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괴물 같은 녀석이군.”

몬스터로 치부되는 자신의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리치는 로얀을 향해 질렸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런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얀이 수없이 많이 들어본 말이었기에 그는 리치의 말을 흘려버리고는 자신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대장인가?”

그는 어둠의 신전의 대장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대장? 크크크... 그래, 지금은 내가 대장이겠지.”

“그런가? 그렇다면 죽어라.”

로얀은 말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마검인 다크리온은 언데드인 리치에게 힘을 줄 수도 있기에 에리오네만으로 상대했다. 게다가 이까짓 리치 정도는 에리오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나 소드에 홀리웨폰을 두른 에리오네는 언데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적이었던 것이다.

콰가가강......!

로얀이 리치를 서서히 몰아가자 신전 이곳저곳이 파괴되었다.

콰드득!

뼈밖에 없는 리치가 입을 꽉 다물자 우두둑거리는 경쾌한 뼈 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 수십 합을 겨룬 두 사람이었다. 무사 대 무사의 싸움이 아니기에 수십 합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겨룬 건 사실이었다.

로얀은 검을 휘둘러 리치를 몰아붙였고 리치는 카이저 실드로 버티다 간간이 마법을 난사했다. 그러길 몇 차례, 아무리 대마법사 급의 리치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움직임이 더뎌지고 있었다.

“죽어라!”

리치는 혼신의 힘을 짜내 마나를 모으며 마법을 떠올렸다.

파지직!

“소닉 바스터!”

7서클의 바람 계열 마법... 뇌전의 힘이 살짝 가미된 이 마법은 음속의 바람이 날아가 상대를 찢어놓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마법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로얀은 프로텍션이 여러 차례 강한 마법을 받으며 서서히 부서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리치는 생각 외로 질긴 몬스터였다.

기이이잉!

소닉 바스터의 바람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로얀의 몸을 강타했다. 그는 에리오네를 들어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가는 에리오네의 검신으로 소닉 바스터의 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파삭!

“호오......!”

리치의 눈이 반짝였다. 로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하얀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잉.......

츄아악!

소닉 바스터라는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난 후 로얀의 왼쪽 어깨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주 깊숙이 베인 듯했다.

엘라임과 레아는 로얀이 아주 멀리서 싸우고 있는 데다가 언데드와 어둠의 정령으로 인해 그가 보이지 않았기에 현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마법의 폭음만이 지금 로얀이 싸우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로얀은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리치를 바라보았다. 해골인 그가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쉐도우.”

휘릭.

“응?”

리치는 로얀이 갑자기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리자 순간 당황했지만 그는 곧 로얀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몸을 돌렸다.

상대의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는 기술인 쉐도우는 강한 마나를 다루는 이들에겐 단박에 발각될 수 있었다. 어떤 존재건 몸에 희미하게나마 마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리치는 바로 그 마나의 기운으로 로얀을 찾아낸 것이다.

로얀은 리치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리치는 단번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마나를 모두 끌어 모았다.

“끝이다. 헬파이어!”

화르르륵!

그러나 실은 로얀도 쉐도우가 리치에게 발각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리치가 카이저 실드를 펼치지 않을 때를 그림자 속에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콰하하항......!

로얀은 헬파이어의 불꽃을 뚫고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프로텍션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초고온의 헬파이어에 화상을 입은 것보다는 프로텍션이 부서지면서 여기저기 찢겨진 상처가 더 심했다.

“죽음의 반월!”

슈아아악!

쇄에에엑!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로얀이 숨겨둔 한 수를 펼치자 흑색 칼날은 바람을 가르며 리치의 뼈마디를 조각조각 부숴 놓았다.

이 숨겨둔 한 수에는 실피드가 등장하자마자 사용한 바람의 칼날도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뼈만 있는 리치는 그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후욱, 후욱.......”

로얀이 뜨거운 입김을 뱉어냈다.

퉁.

데구루루.......

그때, 로얀의 옆으로 리치의 머리가 굴러왔다. 리치는 정말 고래 심줄처럼 질긴 몬스터였다.

“크크크... 곧 그분이 깨어나신다. 그분이 강림하시는 날 세상은 암흑으로 변하리라. 크하하하!”

바삭.

로얀은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 발을 들어 리치의 해골을 부숴버렸다. 리치는 라이프 배슬이 부서지지 않는 한 불사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이 리치에게는 라이프 배슬 자체가 없는 듯했다.

곧 어디서 뭐가 깨어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치가 죽어버린 어둠의 신전은 고요하기만 했다.

대장을 죽인 이상 끊임없이 나오는 언데드들에게는 흥미가 사라진 그는 몸을 돌려 엘라임과 레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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