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깨어나는 어둠 (17/42)

8장 깨어나는 어둠

깨어나는 어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빛의 숲에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해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 따사로운 햇살을 초록의 잎사귀들이 탐욕스럽게 집어 삼켰다.

로얀 일행이 빛의 숲에 있는 엘프의 마을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났다. 엘프들의 환영 파티가 있었던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밝은 것이다.

로얀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간단한 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파티 도중 로얀이 빛의 숲으로 온 이유를 알게 된 세리나가 오늘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게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기에 싸움에 앞서 몸을 풀고 있었던 것이다.

세리나의 말에 따르면 엘프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중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로얀 그와는 동급인 셈이었다.

우두둑!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몸을 풀 때마다 시원한 뼈 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치와의 싸움에서 입었던 상처는 레아의 치료 덕분에 모두 나아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로얀이 한창 몸을 풀고 있을 때 금발의 아름다운 엘프 세리나가 다가왔다. 그녀의 음성은 엘라임처럼 싸늘했지만 저번 용병일을 할 때보다는 한결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물의 정령왕과 페어리의 여왕을 대동하고 나타났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얀은 세리나를 보고는 나무 옆에 세워두었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집어 들어 허리에 맸다.

“지금 갈 수 있을까?”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 엘프와 결투를 벌인 뒤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 일만 끝난다면 레아와 엘라임과도 이제 같이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그녀들과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 마음을 가다듬고 싶었다. 그에게 복수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세리나는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가요.”

로얀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누군가가 달려왔다.

“헥헥... 나도 같이 가!”

레아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엘라임이 따라오고 있었다. 원래는 렌도 따라오려 했으나 그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세리나는 로얀에게 말하는 말투와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아와 엘라임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로얀이 레아에게 여기 있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레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를 앞질러 가버렸다.

“.......”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엘라임과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그것은 정말 순간이었다.

* * *

로얀 일행은 세리나의 안내를 받아 이른 아침의 빛의 숲을 거닐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엘프는 엘프 마을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듯했다. 그들은 세리나를 따라 부지런히 발을 옮겨 커다란 언덕 하나를 넘었다.

“저기예요.”

로얀 일행은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퍽! 퍽! 퍽!

묘한 소리가 숲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희미하게 누군가가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요란한 타작음이 들려왔다. 처음에 로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엘프가 검술 수련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그것이 아니었다. 시력을 조절할 수 있는 그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 엘프는 뭔가를 나무에 매달아놓고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초록빛 긴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체구, 그리고 봉긋 솟은 가슴......?

그는, 아니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엘프는 여자였고, 나무에 매달린 것은 육중한 크기의 멧돼지였다. 그녀는 목검으로 멧돼지를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였나?”

“네. 타니아 언니는 엘프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분이세요.”

“쿡! 그럼, 그럼! 정말 특이한 엘프라니까. 근데 로얀은 그녀가 여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타니아라는 엘프 이야기가 나오자 레아와 엘라임은 그녀를 아는 듯 미소를 지었다.

“특이한 건 맞는 것 같군. 돼지를 목검으로 두드리는 엘프라.......”

“뭐? 지금 타니아가 뭘 하고 있는지 보여?”

터벅터벅.......

로얀은 아름다운 세 여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시야에 잡힌 목표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행동에 세 여인은 그가 타니아를 보자마자 검을 휘두를 것 같아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사전에 아무 이야기 없이 갑자기 검을 휘두르는 것은 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대륙에 현존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단 세 명. 그 중 한 명인 타니아는 보통 엘프와는 달리 고기를 먹는 특이한 엘프였다. 여인의 몸으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특이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미리 잡아두었던 멧돼지를 통째로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목검으로 그것을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돼지를 다지던 그녀는 엘프답게 귀가 밝아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가 싶더니 상대방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를 본 타니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근처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가느다랗고 긴 레이피어가 햇빛에 번뜩였다.

타니아가 자신을 보고 레이피어를 뽑자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았다. 요즘 들어 왠지 모르게 에리오네만을 사용하게 되는 그였다.

타니아가 로얀을 보고 레이피어를 뽑으며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엘프도 자신을 잘 찾아오지 않는데 지금 찾아온 이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성되었다.

“잠깐!”

그들 사이로 서둘러 달려온 레아가 끼어들었다.

스윽.

레아의 모습을 본 타니아가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곧 레이피어를 내렸다.

“레아님! 게다가 엘라임님까지!”

그녀는 반가움에 화사한 웃음을 띄웠다. 사실 그녀들은 상당히 친분이 깊었던 것이다. 오래 전 레아가 빛의 숲에서 탈출을 감행할 때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레아의 소개로 엘라임까지 만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들 세 명은 상당한 친분을 쌓았던 것이다.

레아와 엘라임도 웃음을 띄웠다.

“로얀은 우리 동료야.”

“네? 그렇다면 드래.......”

텁!

키가 작은 레아가 빛의 손을 순식간에 생성시켜 타니아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윽고 빛의 손을 떼어낸 레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대련 한 번만 해주라.”

“대련이요?”

“응. 로얀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흐음.......”

타니아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로얀의 몸을 훑어보다 그의 허리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형태가 전혀 다른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다니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실력자란 말인가?’

타니아는 흥미가 일었다. 검의 길을 걷는 그녀에게 있어 강자와의 대결은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물론 대련을 받아들여야죠. 호호... 진작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란 걸 알았다면 제가 오히려 부탁했을 거예요.”

“그, 그래.”

레아는 타니아에게 말하며 이번에는 로얀 옆으로 다가왔다.

“이건 진짜진짜 대련이라고!”

“걱정 마.”

스윽.

로얀은 손으로 레아가 앞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막은 후 타니아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로얀과 타니아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있었으므로 대련은 곧바로 시작될 듯했다.

레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걱정스런 시선은 타니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파핫!

서로 무기를 들고 대치하고 있던 그들의 싸움은 로얀이 먼저 달려 나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도 타니아는 여유있게 자신의 레이피어에 마나 소드를 생성시켰다.

우우웅......!

하얀 오러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멀리서 그들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세리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급으로 알려져 있는 타니아가 로얀에게 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로얀은 특이하게도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쓰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일 뿐이었다.

소드 마스터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실력 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로얀과 타니아의 싸움은 이미 승부가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차창......!

타니아의 레이피어와 부딪친 백광의 오러를 머금은 에리오네가 빛의 봉이 된 듯 웅웅거렸다. 그 모습에 세리나는 경악했다. 로얀과 헤어진 지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어떻게 그사이에 중급의 소드 마스터에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단 말인가? 그것은 드래곤이 옆에 붙어서 지도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리나의 머릿속엔 어느새 한 가지 의문이 자리 잡았다.

‘로얀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로얀은 타니아와 검을 부딪침과 동시에 그녀의 레이피어를 걷어내며 틈을 노렸다.

타니아는 로얀의 힘과 속도에 당황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즉각 대응에 나섰다.

타니아는 로얀의 에리오네를 봉쇄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레이피어를 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침착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로얀의 에리오네는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찔러 들어왔다.

로얀은 싸움에 임함에 있어서는 항시 전장에 있는 병사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금 그의 검은 평소보다 더욱더 매서웠다.

‘이 엘프를 꺾음으로써 모든 인연은 끝난다. 이제 복수만이 남는 것이다!’

파밧!

순간, 로얀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타니아에게로 파고들었다.

“죽음의 반월!”

슈아아악!

검은색의 날카로운 바람! 섬뜩한 칼날이 폭풍이 되어 타니아에게로 날아갔다. 그 폭풍은 로얀의 에리오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후웅!

콰가가가......!

타니아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흑색 폭풍을 향해 허공을 찢듯 레이피어를 힘껏 그었다. 그러자 레이피어에서 강한 빛과 함께 폭풍이 몰아쳤다. 그것은 그저 마나 소드를 휘둘러 만든 것이었지만 보통 이들에겐 놀라운 기술처럼 보였다.

그녀가 만들어낸 폭풍이 로얀의 흑색 폭풍과 부딪치는가 싶더니 곧 두 개의 폭풍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동시에 소멸했다.

쾅......!

팟.

타니아는 힘겹게 로얀의 공격을 받아쳤지만 그의 공격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허공으로 솟구친 로얀이 타니아를 향해 에리오네를 겨누자 뾰족한 에리오네의 날이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맑은 하늘의 햇살을 받으며 로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에로우 샷!”

쏴아아......!

그리고 마른하늘에서 갑작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헌터들이 쓰는 기술인 에로우 샷이 로얀의 에리오네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것도 한두 발이 아닌 수십 발의 에로우 샷이 타니아를 향해 쏟아졌다.

로얀이 에로우 샷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빛의 숲에서 엘프들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쏜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엘프들이 쏘았던 에로우 샷을 이번 공격에 모두 써버렸다.

콰가가가강......!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자 레아는 눈을 질끈 감았고 엘라임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타니아는 살며시 웃음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검술을 겨룰 상대를 찾지 못해 항상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로얀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엄청난 실력에다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기술들까지 지니고 있지 않는가? 정말 오랜만에 흥이 났다.

타탁.

땅 위로 부드럽게 착지한 로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타니아가 흙먼지 속에서 에로우 샷을 모두 피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이번에 에로우 샷을 펼친 것은 타니아의 힘을 빼놓음과 동시에 그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와아, 정말 강하구나!”

흙먼지가 걷히고 타니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로얀은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도 멀쩡한 타니아의 모습에 흑색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스윽.

타니아는 레이피어의 날을 로얀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눈이 독사의 눈동자처럼 매섭게 빛났다.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주고야 마는 그녀의 성미가 작용한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는 자신이 반격하기 위해 로얀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응?”

뭔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 속에서 솟아난 푸른 물결들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기술이었다.

타니아는 급히 고개를 들어 엘라임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무슨 연유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츄아악.

“윽!”

땅 속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이번에는 두 팔을 묶었다.

로얀은 지난번 와이번과 싸울 때 그들을 묶어두었던 엘라임의 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결국 타니아는 온몸이 물줄기에 의해 포박당하고 말았다.

스윽.

웅웅웅.......

에리오네가 빛을 뿌리며 가늘게 떨렸다. 로얀은 오러를 흩날리며 천천히 타니아를 향해 다가갔다.

“인연의 사슬을 끊겠다.”

허공을 향해 차갑게 내뱉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정말 타니아를 죽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레아와 엘라임이 급히 뛰어가 말리려 했지만 로얀의 에리오네는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날카롭고 깨끗한 찌르기 공격. 에리오네의 날이 당장이라도 타니아의 하얀 목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타타탁.

“자아암깐! 멈춰요......!”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귀가 밝은 로얀의 귓가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타니아를 향해 공격하려던 로얀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고, 순간 그의 손이 멈추었다. 그렇게 엘프의 마을에서 달려온 이에 의해 에리오네의 뾰족한 날은 타니아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로얀은 타니아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마음이 복잡해 몸이 무의식중에 움직인 것이었다.

검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로얀은 미간을 찌푸리며 에리오네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타니아의 몸을 묶고 있던 물줄기를 소멸시켰다. 그렇게 그들의 싸움은 로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레아가 달려와 로얀을 향해 외쳤다.

“로얀! 방금 타니아를 죽이려 했지!”

이번이 엘라임 때를 포함해 벌써 두 번째였다.

“.......”

로얀은 레아를 한번 스윽 보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공격을 멈추게 했던 이를 바라보았다. 엘프의 숲에서 달려온 사람은 바로 렌이었다. 그는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레아의 뒤를 이어 로얀에게 가까이 다가온 엘라임은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워터팩에 이어 또다시 그가 자신의 기술을 썼기 때문이다.

타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레이피어를 내려놓았다.

이들의 묘한 분위기 속에 렌은 숨을 진정시키며 다급히 말했다.

“큰일났어요! 엘프 마을로 언데드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고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로얀과 타니아는 황급히 엘프 마을로 달려갔다. 로얀은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대결을 방해한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엘프 마을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뒤를 세리나와 엘라임, 레아가 뒤따랐다.

그 중 레아는 특히 굳은 얼굴이었는데, 이곳은 자신이 다스리는 페어리족의 땅이기도 했던 것이다.

“같이 가!”

걸음이 느린 렌은 안 그래도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는데 잠시 쉴 틈도 없이 그들이 자신만 혼자 놔두고 모두 뛰어가 버리자 고함을 지르며 어기적어기적 뒤를 따랐다.

* * *

언제나 푸름과 성스러운 빛을 잃지 않던 빛의 숲이 붉은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렀다.

창공을 삼킬 듯한 화염의 이글거림 위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가고일 떼가 괴성을 질렀다. 나무들이 풍성하던 비옥한 대지는 점차 칠흑으로 변해 갔고, 그 위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지나갔다.

좀비와 스켈레톤의 발이 대지에 닿기 전에 먼저 빛의 숲을 짓밟는 존재들이 있었다. 마왕의 군대라는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들이었다. 총합 백 명은 되어 보이는 그들이 선봉에 서서 빛의 숲을 짓밟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최선봉은 헬하운드들이 맡았다. 헬하운드는 지옥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동물형 몬스터로 인간에게 친숙한 개의 모습이었지만 개보다 훨씬 크고 이빨도 매우 예리했다. 그들은 빛의 숲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불을 뿜었다. 지금 빛의 숲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은 바로 이들 헬하운드들이 질러놓은 것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돌진하는 헬하운드 뒤로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가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철거덕, 철거덕......!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한 명이 움직이는 듯 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헬하운드와 데스 나이트, 헬나이트가 지나가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좀비와 스켈레톤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

거구의 덩치에 목이 없는 몬스터인 듀라한은 자신의 목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른 한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든, 보기만 해도 공포감을 일으키는 거구의 몬스터였다. 이들은 전생에 나무에 맺힌 것이 많은지 앞으로 걸어가면서 거대한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나무를 베어 넘겼다.

쿠쿠쿵.......

나무를 무 자르듯 베어 넘기는 듀라한이 백오십여 명, 그 뒤로 이제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수의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마계의 마왕이 중간계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이라면 드래곤들이 빛의 숲으로 도우러 와야 했다. 하지만 중간계의 지킴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들은 언제나 누군가가 피해를 봐야 도우러 오는, 매우 게을러 터진 종족이었다.

우어어어......!

죽은 자들의 진혼곡이 빛의 숲 가득 울려 퍼졌다.

피피핑......!

진혼곡의 연주를 방해하려는 듯 마나를 담은 수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메웠다.

빛의 숲의 수호자인 엘프들이 이들의 행진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이곳은 그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이곳 말고는 엘프들이 살아갈 곳이 없었다. 그것은 페어리족도 마찬가지였지만, 겁이 많은 이들은 빛의 숲 깊숙한 곳에서 잘 나오지 않았기에 지금의 상황을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활은 하늘을 향해 쏘아야 멀리 날아가고 힘을 얻게 되는 병기다. 엘프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누며 팔을 들어 올렸다.

쏴아아아......!

엘프들이 구름이 되어 화살의 소나기를 쏘았고, 그 화살 소나기들은 언데드들에게 날아가 박혔다. 수천 발의 화살은 거의 모두가 좀비와 스켈레톤만을 박살냈을 뿐 진정한 마왕의 군대라 할 수 있는 선봉의 몬스터들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지금은 비상사태인 만큼 엘프들은 눈물을 머금고 빛의 숲의 나무를 베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장벽을 만들어 방어막을 구축했다. 이것은 빛의 숲과 어둠의 숲의 경계를 순찰하는 엘프가 이들 무리를 발견하고 알린 즉시 구축된 것이었다.

그 장벽 너머로 길게 나열한 엘프들에게서 비장감이 감돌았다. 절반 정도는 최후의 방어막이라 할 수 있는 마을의 울타리에 있었지만, 거의 모든 엘프 주병력이 이곳에 나와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성인 엘프 모두가 언데드들에게 맞서기 위해 투지를 불태웠다.

최전방 방어막의 대장으로 보이는 엘프가 장벽 위로 올라왔다. 큰 키에 레이피어를 든, 초록 장발의 남자 엘프였다. 그는 단단한 나뭇잎에 마법을 건 초록색 갑옷과 투구를 걸친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다시 장전!”

끼리릭......!

모두의 힘줄이 당겨졌다. 그들의 눈은 이 순간 매의 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팔이 모두 하늘로 향하자 장벽 위에 올라가 있던 엘프가 레이피어를 위로 들어 올렸다.

“모두 힘을 아끼지 말고 에로우 샷으로 공격한다!”

팍.

그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자 환하고 노란 불빛을 담은 수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메웠다. 하늘을 나는 가고일들도 적지 않은 수가 마법의 힘을 담은 그 화살에 맞고 지상으로 추락했고, 좀비와 스켈레톤은 물론이고 듀라한도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는 마왕의 군대 중 상급에 속하는 이들답게 피해를 입지 않았고, 헬하운드는 워낙에 민첩해 모두 피해 버렸다.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는 헬하운드들이 불을 뿜으며 엘프들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모두, 우리의 고향이자 생명의 어머니인 빛의 숲을 위해 싸우자!”

타탁!

대장으로 보이던 엘프가 장벽에서 뛰어내리자 장벽이 갈라졌다. 그리고 장벽 너머에서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던 엘프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 맞추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 대부분이 레이피어를 들고 있었지만 간간이 할버드를 든 엘프도 눈에 띄었다.

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자 나무를 쌓아 만든 장벽은 다시 메워졌다.

스윽.

선두에 선 초록 장발의 엘프 대장은 레이피어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화염을 토해 내며 달려오는 헬하운드의 모습이 비쳤다.

“모두 돌격!”

“와아아아......!”

그렇게 엘프들과 언데드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화르륵......!

백오십 명 가량의 엘프들은 질서 정연하게 일제히 돌격했지만 뜨거운 화염을 토해 내며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헬하운드에 의해 진열은 초반부터 흐트러져 버렸다.

콰직.

화르륵......!

커다란 송곳니가 할버드를 힘차게 휘두르던 한 엘프의 어깨에 박혔다. 육중한 무게의 헬하운드가 어깨를 물며 올라타자 그 엘프는 땅으로 쓰러졌고, 헬하운드는 그대로 불을 뿜어 엘프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콰지직!

그리고 헬하운드는 엘프의 가슴을 물어뜯으며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대지를 적셨다.

엘프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뛰어난 활솜씨 외에도 정령술과 마법이 있었다.

촤아아악......!

쿠쿠쿵!

물의 정령이 불을 뿜는 헬하운드에게 물을 쏘았고, 땅의 정령이 땅을 가라앉혀 헬하운드의 다리를 묶어놓았다.

푸푹.

다리가 묶인 헬하운드에게 엘프들이 다가가 레이피어를 박아 넣거나 할버드로 목을 날려버렸다.

장벽 너머의 엘프들은 명령에 따라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많은 엘프들이 주문을 외웠다.

피피피핑!

쏴아아아......!

스거거걱!

화살이 하늘을 메우고, 바람의 정령이 장벽 너머로 날아드는 가고일을 바람의 칼날로 갈라놓았다.

“파이어 볼!”

화르르륵!

뒤에서 주문을 외우던 엘프들이 일제히 시동어를 외치자 주위의 불의 정령들도 불길을 내뿜었다.

콰가가강!

엄청난 불길이 언데드들에게로 쏟아졌다. 마법과 정령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자 언데드들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고 많은 수가 죽어 나갔다. 더불어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도 주춤거렸다.

장벽 안으로 들어가려는 헬하운드와 그들을 막으려는 엘프들 간의 싸움은 참혹했다. 많은 수의 엘프들이 숲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화르륵.

콰직.

“모두 대열을 갖춰라! 땅의 정령의 계약자들은 더욱 서둘러 헬하운드의 발을 묶어라!”

쿠쿠쿵!

“와아아......!”

푸푸푹.

만약 지금의 싸움을 하늘에서 본다면? 참혹하고도 장엄하며 잔혹하게 아름다울 것이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들과 엘프들의 싸움.......

장벽 너머로 길게 늘어선 엘프들이 빛의 화살을 쏘았고, 마법에 능통한 엘프들이 그 뒤에서 파괴력이 높은 화염계 마법으로 불의 정령과 공동으로 불꽃을 날렸다. 그리고 마법사와 궁수를 공격하려는 가고일들을 바람의 정령들이 막았다.

장벽 밖에서 헬하운드와 싸우는 엘프들은 이리저리 피하다 땅의 정령이 이들의 발목을 묶으면 그들에게 다가가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들이 민첩한 헬하운드들을 이리저리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물의 정령 덕분이었다. 화염을 쏘는 헬하운드의 입을 물의 정령이 물을 뿜어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에 빠르고 커다란 헬하운드의 공격을 모두 막기란 불가능해 적지 않은 수의 엘프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헬하운드의 피와 엘프의 피가 강을 이루어 대지를 적셨고, 빛의 숲은 고통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화염의 불길 속에서 엘프들은 숲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처절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날아오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끼아아악......!

거대한 와이번 떼였다. 한데 그들 등 위에는 데스 나이트가 타고 있었다.

두두두......!

그리고 대지를 울리며 달려오는 뼈로 된 말들, 그 위에는 흑색 갑옷을 걸친 거구의 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라 불리는 흑기사들이었다.

이들 흑기사들은 아군인 좀비든 스켈레톤이든 가리지 않고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듀라한과 데스 나이트, 헬나이트는 두 갈래로 갈라져 길을 비켜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마왕의 군대들의 장엄함에 엘프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로 끝없이 펼쳐진 언데드의 바다 끝에서 타오르는 한 줄기 어둠의 불꽃이 비쳤다.

* * *

평화롭기만 하던 빛의 숲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언데드들의 발 아래 성스러운 대지가 짓밟혔고, 그들의 손에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빛의 기둥 같은 나무들이 부서져 내렸다. 비옥하던 대지는 몬스터들의 피와 엘프들의 피로 바다를 이루었고 숲의 정령과 많은 요정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사렸다.

죽음의 기사라 불리는 흑기사들은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그들은 땅의 정령이 바닥을 움푹 파이게 만들어놔도 그것을 훌쩍 뛰어넘고는 질주를 거침없이 계속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스피어는 엘프의 가슴을 꿰뚫었고 푸드덕거리는 해골 말은 엘프의 몸을 으깨어 버렸다.

“크아아악......!”

여기저기에서 엘프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악......!”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벽 너머에서 주로 마법과 정령을 부리던 여자 엘프들은 와이번을 탄 데스 나이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날카로운 와이번의 이빨은 엘프의 몸을 찢어 발겼고 데스 나이트의 본 소드는 엘프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키에에엑!

스거거걱.

바람의 정령이 와이번을 찢어놓으면 그 위에 타고 있던 데스 나이트는 바닥에 착지해 눈에 보이는 모든 엘프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지옥이 연출되고 있었다.

키에엑!

“실라페!”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와이번을 탄 데스 나이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한 엘프 소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쿠하항......!

팟!

그녀와 계약한 바람의 중급 정령 실라페가 날아와 바람의 장벽을 쳤지만 거기에 부딪힌 건 와이번이지 데스 나이트가 아니었다. 데스 나이트는 와이번의 등에서 몸을 날려 그녀에게로 날아갔다. 그의 손에 들린, 뼈로 이루어진 본 소드가 번뜩였다.

“꺄아악!”

엘프 소녀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데스 나이트를 보고 급히 몸을 숙였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카카캉......!

“괜찮니?”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소녀는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타니아님!”

엘프 중 유일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타니아의 검이 달려드는 데스 나이트를 벤 것이었다. 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데스 나이트는 그녀의 마나 소드에 간단하게 베였다.

타니아는 웃으며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안심해. 든든한 지원군을 데려왔으니까.”

“예?”

싱긋 웃으며 말하는 타니아의 말에 소녀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흑발에 흑안, 두 개의 검... 어제 엘프의 마을로 온 인간 남자였다. 이 인간이 든든한 지원군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곧 이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페어리의 여왕인 레아였다. 그리고 멀리서 달려오는 세리나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렌은 보이지 않았다.

엘프 소녀는 타니아의 든든한 지원군이라는 말이 그 세 여인을 가리킨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하늘을 날아오는 엘라임과 레아보다 로얀이 이곳에 더 빨리 도착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 한바탕 해볼까나?”

타니아는 웃으며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는 장벽 너머로 몸을 날렸다. 왠지 즐거워 보이는 그녀였다.

스윽.

엘라임도 허공에 몸을 띄웠다. 그러자 그 주위로 물줄기가 회전하며 그녀를 감쌌다.

엘라임이 타니아의 뒤를 따라 장벽 너머로 사라지자 세리나도 실라페를 소환하여 와이번에 맞섰다.

멍하니 그녀들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구출(?)된 엘프 소녀를 뒤로하고 로얀은 아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물러나 있어라.”

실상 레아는 이런 전쟁에선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도 도울래.”

레아는 한 가지를 놓고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본 힘을 쓰기로 말이다.

그녀가 본 모습으로 변한다면 그 기운을 읽고 페어리들이 이쪽으로 모두 몰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천군만마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페어리는 치료에 능했고 빛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어 어둠의 종인 언데드들에게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페어리들이 몰려온다면 자신은 더 이상 로얀을 따라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로얀과 헤어지는 건 싫었지만 빛의 숲이 파괴되고 엘프들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레아는 지체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현신.”

화아아앗!

그녀의 몸을 밝은 빛이 감쌌다. 천상의 신이라도 강림하는 듯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를 감싼 빛이 점점 걷히고 드러난 모습!

“.......”

로얀도 놀란 눈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을 등에 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 분홍빛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는 어느새 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그녀의 몸에서는 밝은 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순간, 세상이 정지한 듯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언데드들도 자신의 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그녀가 내뿜는 빛에 무의식적으로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악!

화악!

레아가 본 모습으로 돌아간 직후, 숲 속이 들썩거리더니 이곳저곳에서 빛의 구가 솟아올랐다.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요정들이 밝은 빛을 뿜으며, 눈이 어지러울 만큼 많은 수가 나타났다.

후우웅.......

레아는 본 모습으로 돌아가자마자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다섯 개의 빛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 왕, 님!”

그들은 페어리족의 다섯 장로로 여왕인 레아를 바로 밑에서 받드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가출(?)을 하는 레아 때문에 언제나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알았어, 알았어. 이번 싸움이 끝나면 군말하지 않고 돌아갈게. 그러니까... 여왕으로서 명령한다. 모두 엘프를 도와 빛의 숲을 지켜라!”

“순순히 돌아오신다고 하니 이번만은 넘어가겠습니다. 에헴, 모두 여왕님의 명을 받들어라!”

다섯 장로들은 순간적으로 개방된 레아의 힘을 느끼고는 혹여라도 레아가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서 전 페어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빛의 숲을 침범한 언데드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레아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빛의 숲을 위해 마땅히 싸워야 했다.

아무튼 레아의 명령에 페어리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다친 엘프 옆에 붙어서 그들을 치료하는가 하면 허공에서 빛의 화살을 만들어내 언데드들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얀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네 본 모습이냐?”

“응.”

“아니, 아니! 인간이 감히 여왕님께!”

다섯 엘프 장로는 호들갑을 떨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자신들의 여왕에게 반말을 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얀은 친구니까 괜찮아.”

“세, 세상에! 친구라니요!”

“시끄러워! 계속 그러면 또 여행갈 거야!”

“여행이 아니라 가출입니다.”

그 뒤로도 그들의 언쟁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자 로얀은 시끄러워 그 자리를 뜨려 했다. 한데 발길을 돌려 언데드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를 향해 레아가 외쳤다.

“저기 멀리 보이는, 어둠의 빛을 쏘는 녀석을 해치워. 그러면 이 녀석들은 모두 마계로 돌아갈 거야!”

“.......”

파팟!

로얀이 몸을 날렸다. 페어리들이 쏘는 백광의 빛의 화살과 엘프들이 쏘는 노란빛을 띠는 마법 화살들을 뒤로하고 그는 장벽을 넘었다.

피피피핏!

쿠쿠쿠쿵......!

그의 눈에 엘라임이 헬하운드를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의 뜨거운 화염은 엘라임에겐 간지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 주위에서 생겨난 물줄기는 거대한 용처럼 헬하운드에게로 날아가 그들을 갈아버렸다.

“꺄하하핫!”

콰가가강......!

타니아는 흑기사들을 신나게 베며 그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한 술 더 떠 흑기사의 해골 말을 빼앗아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활약에 힘을 얻은 엘프들은 모두 흑기사와 헬하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가 다가오자 타니아와 엘라임은 남은 헬하운드는 엘프들에게 맡기고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로얀은 그들의 전투를 바라보다 멀리 보이는 검은 빛을 바라보았다.

“다크로드.”

[어떠한 명이라도 받들겠습니다, 왕이시여!]

그의 말에 그림자 속에서 다크로드가 나오는가 싶더니 로얀의 뒤로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들이 병풍처럼 그를 둘러싼 채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의 등장에 몇몇 엘프가 활을 쏘다가, 또는 할버드를 휘두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스릉.

로얀은 이번에도 에리오네를 뽑았다. 역시 어둠의 종들을 해치우는 데에는 성검인 에리오네가 월등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멀리 보이는 어둠의 빛 쪽으로 향해 있었다.

“너희들은 길을 뚫는다. 그리고 저곳까지 단숨에 돌파한다.”

[예! 명을 받듭니다.]

스으윽.

힘찬 대답과 동시에 백 명의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는 사신의 낫이라 불리는 시클을 번뜩이며 날아갔다. 그리고 정면에서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들에게 그것을 휘둘렀다.

[죽음의 반월.]

슈가가각!

바람의 칼날과 거의 흡사한 날카로운 흑색 바람이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들 사이를 누볐다. 그것이 바람의 칼날과 다른 점이라면 수십 발이 동시에 나간다는 것과 색깔이 흑색이라는 것이었다.

우어어어......!

철거덕, 철거덕!

그들의 공격에 한순간 길이 뚫리자 로얀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이 언데드 사이로 들어간 직후, 순식간에 그가 들어간 입구가 다른 언데드들로 가득 채워졌다.

* * *

콰가가강......!

쿠어어억!

흑색 바람이 불었다. 날카로운 칼날을 단 흑색 폭풍, 그 폭풍에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가 주춤거렸다.

그들은 앞서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가 처리한 헬하운드처럼 가볍게 죽일 수 있는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 모두 강도가 매우 강한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밧.

“죽음의 반월!”

콰가가강......!

쿠어어억!

와르르.......

어둠의 중급 정령이 힘들게 해치우던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가 단 한 방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로얀은 어둠의 정령을 다스리는 혼돈의 정령왕답게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를 간단하게 베어버렸다.

그런 로얀과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 백 명 앞을 오랫동안 가로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콰가가강......!

끄르륵!

쿵쿵쿵!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 무리를 뚫은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은 거구의 몬스터와 마주쳤다. 자신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낀 채 도끼를 들고 있는 듀라한이었다.

보통 사람이 그것을 보았다면 공포에 질릴 법한 모습이었지만 로얀은 무감각했고, 어둠 속에서 살아온 어둠의 정령들이야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듀라한은 그저 웃기게 생긴 몬스터일 뿐이었다.

듀라한들이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을 발견하고는 일제히 달려왔다. 정령왕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는 다른 이들에게도 보였던 터라 듀라한들을 비롯한 적들이 달려들 수 있었던 것이다.

슈아아악.

스거거걱!

쿠쿵.

힘차게 달려온 듀라한은 도끼질을 한번 해보기도 전에 어둠의 정령들에게 난도질당했다. 한 마리의 듀라한에게 수십 명의 데스가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이었다. 다른 듀라한들이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쿠어어억!

후웅.

하나, 완전한 소멸이 아니면 죽지 않는 정령이 그깟 도끼에 당할 리가 없었다. 어둠의 정령들은 도끼를 피하지도 않고 듀라한에게 달려들어 시클을 휘둘렀다.

쿠어어억.

스거거걱!

쿠쿠쿵.

육중한 듀라한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대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흘렀다.

후둑, 후두둑......!

“비.......”

어둠의 정령들과 듀라한의 싸움 속으로 뛰어들려던 로얀은 갑자기 떨어져 내리는 비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부를 통해 비의 시원함이 느껴졌고 코를 통해 비의 싱그러운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하늘은 밤처럼 어두웠다.

하늘 가득 먹구름이 꽉 끼어 있었고 그 구름들에서 빗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고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상으로 하강했다.

쏴아아아......!

우어어어......!

언데드들이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이 좋은지 괴성을 질렀다. 웨어 울프들이 보름달을 보고 더욱 강하고 광포해지는 것처럼 이들도 검은 하늘에서 힘을 얻었다.

강한 힘을 느끼며 광분하는 듀라한을 보며 로얀은 에리오네를 빙글 돌리며 걸어갔다.

“나도 비로 인해 힘이 나는군. 죽어라.”

번뜩!

쿠쿠쿵.

쾌속한 움직임!

어디서 번개가 친 것일까? 뭔가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구의 듀라한의 몸이 갈라져 있었다. 어둠 덕분에 듀라한의 힘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소멸이라는 그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다크로드, 좀더 빨리 전진한다.”

[예, 왕이시여!]

슈가가각!

로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의 정령들이 앞을 가로막은 듀라한들에게 달려들었다.

[죽음의 반월.]

스거거걱!

쿠쿠쿵......!

쌓아올렸던 모래가 무너져 내리듯 듀라한들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둠의 정령들이 만들어주는 길을 걸으며 로얀은 종종 자신에게 도끼질을 하는 듀라한을 벌레 죽이듯 베어 넘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듀라한 무리까지 뚫자 로얀과 데스 앞을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많은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보였지만 그들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로얀과 데스의 힘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로얀과 어둠의 정령은 그렇게 언데드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콰가가강!

우어어어......!

달그닥, 달그닥!

스거거걱.

느릿느릿 다가오는 좀비도 달그닥거리며 다가오는 스켈레톤도 로얀의 성검 에리오네에 녹아내리거나 데스의 시클에 난도질당했다.

콰가가강!

로얀의 눈에 점점 검은 빛이 가까워졌다. 그 거대한 빛 쪽으로 다가갈수록 온몸이 찌릿찌릿해져 오는 것을 그는 느꼈다. 드래곤의 기운을 훨씬 능가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대한 기운이었다.

언데드들로 바다를 이루고 산을 이루던 길은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에 인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에는 언데드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어둠의 빛을 뿌려 언데드들을 조종하는 이를 곧 만날 수 있으리라.

콰가강......!

[왕이시여, 앞의 존재는 무척이나 위험한 자입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다크로드는 자신의 왕의 안전을 위해 충고를 했다. 하나, 그런다고 로얀이 왔던 길을 되돌아갈 리는 없었다.

“전진한다. 너희는 나를 믿고 따르라.”

[예.......]

콰가가강!

로얀은 더욱 힘있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언데드들이 사라지며 그의 시야로 서서히 어둠의 빛을 뿜는 존재가 보였다. 이제 그의 시야를 막는 언데드는 좀비 몇 마리와 스켈레톤 몇 마리를 더해 총합 열 마리밖에 되지 않았다.

“죽음의 반월.”

슈가가각!

이제 곧 언데드들을 조종하는 존재를 만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존재감이 커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로얀이 휘두른 죽음의 반월에 의해 열 명의 언데드가 단박에 소멸되고, 드디어 적의 대장이자 이 일의 원인 제공자인 이를 볼 수 있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여기 있는 모든 언데드들의 주인!

흠칫!

그 존재에게로 다가간 로얀의 몸이 떨렸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여자였다. 윤기 흐르는 긴 갈색 머리를 드리우고, 백옥 같은 피부에 붉은 입술은 어찌 보면 아픈 환자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한데 로얀은 그 여인을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크크크... 이거 놀랍군. 인간이 여기까지 오다니.”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쏴아아아......!

로얀과 여인은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여인은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원래는 푸른빛이었던 듯했지만 지금은 흑색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의 존재에게 몸을 빼앗긴 것 같습니다.]

다크로드가 묻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얘기해 주었다. 하나, 로얀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 전 잊었던 기억이 순간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래 전 스스로 가슴속에 봉인해 둔 이가 전해 주던 느낌, 그 사람의 향기.......

잊을 수 없는 향기를 가진 사람, 증오했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원망했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

손에 쥔 에리오네가 가늘게 떨렸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로얀의 왼손이 말아 쥐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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