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과거의 기억
과거의 기억
두근두근......!
심장이 급격히 뛰었다. 12년 만에 불러본 말이 그의 심장을 두드린 것이다.
“어머니.......”
로얀의 입에서 잔잔히 흘러나온 말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어머니라 부른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마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크르륵.”
탁한 눈동자에 마기를 풀풀 날리는 여인은 로얀의 한마디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주위의 검은 마기는 미친 듯이 일렁였다.
쏴아아아......!
비는 끊임없이 퍼부어졌고 로얀과 그 여인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런 두 사람 주변을 어둠의 중급 정령들이 둥글게 둘러싸고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막아내 주고 있었다.
쿠어어어......!
어둠의 정령들은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지만 언데드들은 끊이지 않고 몰려오고 있었다.
찰박!
로얀의 발이 앞으로 나아가자 바닥에 고인 물방울이 튀었다.
“어머니.......”
다시 한 번 흘러나온 그의 말.
스오오오......!
한순간, 요동치던 마기가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렁이던 어둠이 여인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먹구름이 천천히 걷혔다.
먹구름이 사라진 그녀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도는 맑은 눈동자였다. 마치 비 갠 후의 맑은 하늘을 보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엘라임의 눈동자와 비슷한 것 같았다.
로얀이 기억하는 게 또 하나 있었다. 메리엘... 바로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이 떠오름과 동시에 끊어졌던 어릴 적 기억이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맞춰지고 있었다.
모든 마기가 사그라지고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온 그녀는 안색이 창백한 게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만 같았다. 로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파리한 그녀의 입술이 스르르 열렸다.
“시엔이니......?”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했던가? 확연히 달라진 로얀의 모습을 보고도 그녀는 아들을 정확히 알아보았다. 그녀의 귀는 시엔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의 눈은 현재의 로얀의 모습에서 어릴 적 귀여웠던 시엔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로얀의 눈동자도 잔물결이 이는 호수처럼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 왔구나.”
주륵.
창백한 그녀의 얼굴 위로 맑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힘겹게 걸음을 옮겨 12년 만에 만나는 아들을 향해 걸어갔다.
찰박!
비틀.
파인 웅덩이에 발이 엇갈렸는지 그녀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힘을 폭사하던 그녀가 지금은 작은 벌레 한 마리 잡을 힘이 없어 보였다.
찰박찰박......!
로얀은 비틀거리는 어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검은 머리를 타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털썩.
갈색 머리의 여인, 메리엘은 다가온 아들의 품안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스윽.
그토록 오랜 세월 떨어져 있었건만 그녀가 아들의 품에 안겨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순간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아들의 품에서 벗어난 메리엘은 로얀의 얼굴 쪽으로 떨리는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기억 속에 담으려는 듯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레이나는 같이 안 왔니......?”
떨려 나오는 그녀의 음성에 로얀은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죽었습니다.”
너무도 간단명료하고도 차가운 말! 그 말에 메리엘은 두 자식을 돌봐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흑!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구나.”
로얀의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딸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했다. 레이나가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빗방울 소리와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스오오......!
하지만 그녀의 흐느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음이 흔들려서일까? 그녀의 몸에서 다시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으윽!”
그녀는 괴로운지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고 곧 마기는 다시 사그라졌다. 그녀가 억지로 몸 속으로 집어넣은 듯했다.
울컥!
메리엘은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내며 로얀에게서 손을 떼낸 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슬퍼 보였다.
“하악, 하악... 시간이 없구나.”
그녀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지금처럼 온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아들을 만났다는 기쁨이 일으킨 기적이었다. 이제껏 마왕에게 정신을 빼앗긴 사람이 다시 제정신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이 순간 로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메리엘이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서 있는 그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내가 하늘로 가기 전에 너에게 말해 줘야 할 것이 있었는데... 이것도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겠구나.”
이 말을 시작으로 메리엘은 12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빗방울과는 다른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엔의 어머니인 메리엘과 아버지인 나르크는 둘 다 마법사였다. 메리엘은 마법능력이 매우 뛰어난 왕국의 궁정 마법사급의 대마법사였고, 나르크는 마법적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고대의 유적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천재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결혼한 두 사람은 세상의 암투와 갖가지 음모에 휩싸이기 싫어 엘프의 마을이 있다는 빛의 숲으로 향했다.
단 두 사람뿐이었지만 그 두 사람은 기적적으로 어둠의 숲을 넘어 엘프의 숲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둠의 숲에서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여 만신창이가 된 이들을 엘프들의 장로인 토시트가 거두어 엘프 마을과 떨어져 있는 빛의 숲 한쪽에 살게 했다.
그렇게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 아름다운 숲 속에서 살게 된 두 사람은 정말 행복했다. 마법사인 메리엘은 마나가 가득한 이곳에서 마법 연구를 하며 즐거워했고 나르크는 빛의 숲 속에 있는 엘프와 요정들이 만든 고대의 유적들을 보며 연구에 몰두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매일 행복하게 살던 두 사람은 시엔과 레이나를 낳았고, 그들의 행복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대 유적의 흔적을 쫓던 나르크는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가서는 안 되는 곳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어둠의 숲 중심에 있는, 몬스터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어둠의 신전! 모든 불행은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가 어둠의 신전으로 간 날은 먹구름이 꽉 낀 칙칙한 날이었다.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메리엘에게 줄 선물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던 나르크는 묘한 이끌림에 빛의 숲을 지나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몬스터들이 공격하지 않아 이상함을 느꼈지만 호기심이 강한 그는 이내 그것을 머릿속 한쪽에 밀어두고 어둠의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검은 빛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어둠의 신전에서 돌아온 나르크는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지만 메리엘은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결혼기념일 선물로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그를 따라 아이들 특유의 귀엽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그리고 있는 시엔과 레이나까지 모두 데리고 어둠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때 나르크는 이미 혼을 빼앗긴 뒤고 그의 몸 속엔 전혀 다른 누군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메리엘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이 바로 새해가 밝은 1월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어둠의 신전에 도착한 나르크는 어느 거대한 제단 앞에서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의 살은 타들어 갔고 그의 몸에선 지독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강제로 영혼을 빼앗기고 리치화된 그는 다른 리치들과는 달리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메리엘은 올해 열한 살인 시엔과 여덟 살인 레이나를 품에 안고 어둠의 신전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뛰어난 마법사인 그녀조차 알지 못하는 결계가 쳐져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리치가 된 나르크가 날아와 시엔을 메리엘의 품에서 빼앗아 갔다. 원래 레이나에게 손을 뻗었지만 시엔이 무의식적으로 동생을 가로막으며 나섰기에 그를 손에 집어 든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시엔을 낚아챈 나르크는 괴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시엔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빛의 숲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형일 리가 없었다. 그가 눈을 잃은 건 바로 이날이었다.
이미 혼을 빼앗긴 나르크는 제단 앞으로 걸어가 손에 들린 시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리낌없이 시엔의 눈에 손을 넣어 두 눈을 뽑아버렸다. 붉은 피가 튀어 올랐고 시엔의 입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튀어나와 주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두 눈을 거대한 제단 위에 올려놓고 괴기한 웃음을 짓는 나르크를 향해 메리엘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달려가 시엔을 다시 빼앗아왔다. 그리고 피를 철철 흘리는 어린 시엔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법으로 치료한 후 두 아이를 자신의 품안에 꼭 끌어안았다.
무엇인가에게 혼을 빼앗긴 나르크. 그는 마왕을 중간계로 강림시키기 위해 제물이 필요하다며 메리엘에게 시엔과 레이나를 요구했지만, 메리엘이 그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메리엘의 허락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리치가 된 나르크는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그녀에게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영혼의 힘이 보통 사람보다 배는 강한 메리엘의 몸에 마왕을 강림시킬 거라고.......
메리엘은 어린 아들과 딸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그녀가 펼친 마법은 바로 워프였다.
거대한 결계가 쳐진 이곳에서 시엔과 레이나를 워프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퍼부어야만 했다. 무리한 강제 워프는 시엔과 레이나의 머리에 타격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울부짖는 시엔과 레이나를 자신의 고향인 팔레인으로 강제 워프시킨 메리엘은 힘을 무리하게 사용한 탓에 마나 홀이 무너져 내려 보통의 힘없는 여인이 되어버렸고, 꼼짝없이 마왕의 강림을 위한 제물이 되어야만 했다.
강림을 위한 제물이 아닌 마왕을 부르는 제물은 주위 빛의 숲에 엘프라는 제물들이 널려 있었기에 시엔과 레이나가 사라졌어도 리치가 된 나르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열한 살이었던 시엔이 이날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바로 워프될 때 기억을 잃은 탓이었다. 그건 레이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이나가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것과는 달리 로얀은 부분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빛의 숲이나 어둠의 숲에 대한 기억은 워낙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기억 저 밑바닥에 스스로 처박아두었던 것이다. 때문에 결론적으로 그는 그저 깊은 숲 속에 살았다는 것과 그와 동생의 이름과 어머니의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었다.
팔레인으로 떨어진 그는 대장장이인 처크 할아버지에게서 이것저것을 배웠다. 기억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레이나를 위해 처절하게 맹인으로서의 삶을 배웠고, 메리엘을 닮아 머리가 매우 좋았던 레이나는 금방금방 지식을 쌓아갔다.
아무튼 그렇게 가혹한 세월이 흘러 1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만나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지난번 어둠의 신전에서 자신이 죽인 리치가 바로 친부인 나르크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음에도 로얀은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그때 그 리치를 죽일 때 들었던 그 이상한 느낌의 원인을 알았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다.
콰가가강......!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멀리서 타니아와 엘라임이 다가왔다. 그들은 로얀이 언데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급히 따라온 것이다. 그러나 두 여인은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로얀과 메리엘의 분위기에 멈칫했다.
그들의 등장에도 로얀과 메리엘은 눈길도 주지 않았고, 메리엘은 하던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녀의 몸이 떨려왔다.
“시엔... 나로 인해 또다시 네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단다. 이 못난 엄마를 그만 보내주겠니?”
메리엘은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희미한 웃음을 그려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깃들여 있는 마왕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왕과 아들이 싸운다면 아무리 시엔이 강하다 해도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딸에 이어 아들마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엔이 자신의 손에 의해 죽는 것도 당연히 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아들이 죽느니 차라리 아들의 손에 자신이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찰박찰박.......
로얀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에리오네의 뾰족한 날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메리엘을 향해 다가갔다.
늦게 도착해 로얀의 과거는 듣지 못하고 마지막 메리엘의 말만 들은 엘라임과 타니아는 놀란 눈으로 로얀과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무도 젊어 보여 로얀의 어머니라고는 믿어지 않았지만 분명 눈앞의 여인은 그의 어머니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보내 달라는 말에 로얀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찰박찰박.......
메리엘은 다가오는 로얀을 보며 웃음 지었다.
푸욱!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강림해 있는 이의 숨이 끊어지면 더 이상 중간계에 있을 수가 없었다. 숙주의 몸과 연결된 것이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뚝뚝!
메리엘의 몸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로얀의 손과 몸을 적셨다. 날카로운 에리오네의 날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메리엘의 심장을 꿰뚫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은커녕 여전히 웃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메리엘의 피부가 시들어갔다. 그리고 점점 모습이 변해 급기야 중년 여인의 얼굴이 된 메리엘은 검을 꽂음으로써 가까워진 로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파리한 입술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우리 아들... 그동안 정말 힘들었지? 넌 결코 혼자가 아니란다. 아빠도... 엄마도... 레이나도... 모두 언제나 네 곁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테니까... 슬퍼하지 말렴. 언제나 널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내 아들 시엔.......”
툭.
스오오오......!
로얀의 얼굴을 쓰다듬던 메리엘의 하얀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흑색 덩어리가 빠져나왔다.
쿠오오오!
[크아아아......!]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는 그 검은 안개 같은 덩어리는 괴성을 지르면서 하늘로 빨려 올라가 버렸다. 강림한 마왕이 다시 마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메리엘의 몸은 가루가 되어 빗물에 씻겨 사라져갔다.
마왕이 사라지자 모여 있던 언데드들도 검은 기류에 휩싸인 채 괴성을 지르며 모두 마계로 돌아가 버렸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타니아는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축 늘어뜨렸다.
“어,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타니아는 아무리 마왕을 마계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고는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의 심장에 검을 박은 로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냐.”
그녀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엘라임이 중얼거렸다.
“네?”
흠칫.
엘라임을 쳐다보던 타니아의 몸이 떨렸다. 처음 보는 물의 정령왕의 눈물이었다. 엘라임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주르륵!
“그는... 슬퍼하고 있어. 너무 슬퍼 나의 영혼까지 떨릴 정도로! 보는 나도 슬퍼질 정도로.......”
타니아는 엘라임의 말에 로얀을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퍼붓는 빗속에서 빗물이 아닌 다른 물방울이 로얀의 눈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에리오네를 늘어뜨리고 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어둠의 정령들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어째서... 어째서... 눈물이 흐르는 거지? 어째서 슬픈 거지? 당연히 상대를 죽일 기회였기에 죽였을 뿐인데.......”
스르륵.
슬퍼하는 그의 곁으로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시클을 늘어뜨린 채 그를 향해 부복했다.
[왕이시여, 아파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저희도 당신과 고통을, 슬픔을 함께하겠습니다.]
쏴아아......!
언데드들이 사라지자 먹구름들도 걷히려는 것인지 빗물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퍼부어 내렸다.
로얀은 에리오네를 늘어뜨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눈물이 흐르는 거냔 말이다! 으아아아! 크아아아아......!”
빗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그는 울부짖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일까? 아니면 망설임없이 어머니를 죽인 자신을 저주하는 울부짖음일까?
그런 그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더니 어둠의 중급 정령들을 감쌌다. 아니, 한동안 하늘과 대지를 감싸는 듯했다.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로얀의 슬픔을 먹음으로 해서 더욱 강한 어둠을 품게 된 그들은 점점 커져갔고, 정령력도 강해졌다.
그렇게 장엄한 광경이 연출되는 가운데 마왕의 중간계 강림 사건은 막을 내렸다.
* * *
마왕의 강림과 동시에 나타난 엄청난 수의 좀비들과 스켈레톤, 데스 나이트들과 헬하운드들이 쳐들어왔다 격퇴당한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이들에 의해 빛의 숲은 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야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빛의 숲에 사는 엘프와 페어리들 사이에 사망자나 부상자는 매우 적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페어리들이 달라붙어 치료를 해준 탓이었다.
끔찍했던 하루가 그렇게 지나고 엘프들과 페어리들은 합심해서 빛의 숲에 나 있는 불을 끄고 다시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모두들 함께 슬퍼하며 사망자들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어머니인 메리엘에게서 들은 과거 이야기와 부모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충격 때문인지 로얀은 그날 이후 아무런 말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유난히도 손을 많이 씻었다. 그의 손에 묻은 피 때문이었다. 자신을 낳아주고 자신을 사랑해 준 어머니의 붉은 피가 이미 손에서는 깨끗이 지워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피는 너무도 진해 그 혈향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찰박찰박.......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 속에 발을 담근 로얀은 허리를 숙인 채 물 속에 손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묵묵히 손을 움직여 차가운 물방울을 퉁겨내고 있었다.
그가 엘프들이 있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이 개울로 온 것은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벌써 몇 시간 동안이나 손을 씻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허리가 아파오고 손이 팅팅 불었겠지만 그는 멀쩡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지만 달빛이 투명한 개울을 비추어 주위를 훤히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로얀의 마음은 찢어져 있었다.
그도 마왕과 싸운다면 자신이 질 거라는 걸, 어머니를 통해서라면 마왕을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는 걸 알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어머니도 바라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슬펐다.
쪼르르륵.......
개울의 맑은 물은 그의 발을 감싸며 하염없이 흘러갔다.
“이미 자네의 손은 깨끗이 씻겨졌다네.”
갑자기 들려온 말에 로얀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도 냇가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한 시간 전부터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토시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긴 수염을 드리운 채 인자한 웃음을 담고 있는 토시트.......
로얀의 시선에 토시트는 은은히 빛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손에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나무로 만든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그의 옆엔 따뜻한 차가 담긴 기다란 통이 놓여 있었다.
“오래 전, 이 개울에 자네 말고도 인간이 왔었지.”
찰박찰박.......
그러나 로얀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며 다시 흐르는 개울에 손을 담갔다.
“메리엘이라는 젊은 여인과 나르크라는 젊은 남자였다네.”
멈칫.
로얀의 몸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토시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토시트는 달빛을 받고 피어오르는 찻잔의 하얀 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메리엘이라는 여인은 못 하는 것이 없고 아주 착한 마음씨를 가진 인간이었고 나르크라는 남자는 성격이 밝은, 아주 재미있는 인간이었지.”
쪼르르륵.
“피투성이가 되어 이 개울로 떠내려 온 그 두 사람을 그날도 여기서 차를 마시고 있던 내가 구해 주었다네. 그리고 다른 엘프들 몰래 그들을 치료해 주며 느낀 것은 그들이 내가 만나본 인간 중에서 가장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네.”
로얀은 더 이상 토시트의 말을 흘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에 가둔 채 저장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난 다른 엘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을 빛의 숲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줬네. 그러자 두 사람은 보는 내가 절로 웃음이 지어질 정도로 행복하게 살더구먼. 허허! 그렇게 두 사람은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았지.”
달각.
토시트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후루룩.
따뜻하고 향긋한 차가 토시트의 입 안 가득 모여 몸 속으로 흘러 내려갔다.
“하지만 그 가족은 유난히 하늘이 칙칙했던 어느 날 이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지.”
로얀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날 아침 본 그 가족은 정말 행복해 보였네. 아직도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구먼. 메리엘과 나르크가 두 자식을 보던 그 사랑스런 눈동자와, 서로를 보며 행복하게 웃음 짓는 그들의 얼굴도 말이야. 허허허......!”
달그락.
어느새 비어버린 찻잔을 토시트가 흔들어 보였다.
“허허, 차가 벌써 다 떨어졌구먼. 그럼, 밤이 깊었으니 자네도 이만 들어가 보게나.”
긴 수염을 한번 쓰다듬은 토시트가 찻잔과 차가 들어 있던 통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 위에서 내려와 엘프들이 사는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찰박찰박.......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로얀... 그렇게 한동안 개울물 속에 있던 그가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냇가로 향하는 그의 발을 타고 맑은 물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그락, 자그락!
로얀의 발이 시냇가의 자갈을 밟자 자갈이 신음소리를 냈다.
“행복했다.......”
스윽.
씁쓸히 중얼거리던 로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토시트가 앉아 있던 커다란 바위 쪽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바위 뒤의 숲 쪽이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바스락.
로얀의 말에 푸른 풀숲이 바스락거리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단발머리의 소년 렌이었다. 그는 매일 이곳으로 와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작곡하고 있었다. 물론 매일 여기로 오는 토시트와 함께 말이다.
렌은 숲 속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하하,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로얀의 말에 렌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야... 로얀 형과 장로님의 이야기를 엿들었잖아.”
“그게 어떻다는 거지?”
“.......”
로얀의 말에 무안해진 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릴 로얀이었지만 오늘 그는 렌에게로 향했다.
“저번에 했던 약속.......”
“응?”
“노래... 들려주겠나?”
씨익.
로얀의 말에 렌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토시트가 앉아 있던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곳은 윗면이 평평해 앉기 좋았고 아름다운 개울과 은은히 비치는 달빛까지... 그야말로 명당이었다.
렌은 등에 메고 있던 하프를 끌러 내렸다.
“에헴! 이 노래는 사람의 민첩성을 높여주는 건데... 마나는 담지 않고 할게.”
로얀에게 그저 노래를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기에 음유시인의 힘은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렌은 조용히 눈을 감고 하프의 반짝이는 줄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띠리링.......
렌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로얀은 달빛이 비쳐 푸른빛을 내는 개울 쪽을 바라보았다.
띠리링.......
두 번째 하프의 맑은 소리. 그리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바람의 속삭임에
내 마음 흐르고
바람의 손짓에
웃음 지어지네
바람이 이끄는 대로
바람이 원하는 대로
춤을 춘다면
영혼이 바람이 되죠
띠리링.......
아름다운 하프의 음을 마지막으로 노래가 끝났다.
“행복... 지금 난 행복한 걸까?”
조용히 개울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로얀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 * *
그날 밤이 지나가고 로얀은 이른 아침 타니아와 못다 한 결투를 펼쳤다. 그러나 그 결투는 싱겁게 로얀의 승리로 끝나 버렸다.
결투가 끝난 직후 바로 길을 떠나기 위해 로얀은 이른 아침 엘프 마을을 나섰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비극적인 삶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복수를 하러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하나뿐인 친구인 얀을 보기 위해 여름의 대륙으로 갈 생각이었다.
일단 자신이 원수를 찾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드래곤을 찾으려면 드래곤 산맥을 뒤져야 할 테고, 그렇다면 상대해야 할 드래곤은 한두 마리가 아닐 테니 말이다.
마을 입구에는 그때 보았던 페어리들과 레아가 보였다. 그리고 엘라임을 제외한 그가 아는 인물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니, 모든 엘프들과 페어리들이 나와 있었다. 마왕을 처리해 준 로얀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엘라임은 로얀이 어머니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그날 이후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오늘도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빨리 떠나는 거야?”
레아가 로얀에게 툴툴거렸다. 그녀는 이제 그와 함께 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페어리족의 장로들과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제 페어리들의 땅으로 돌아가 여왕으로서의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잠이 많은 렌도 나와 있었는데, 그는 연신 눈을 비비며 터벅터벅 로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곳에서 만든 노래를 전부 들려주고 싶었는데... 형, 다음에 꼭 다시 만나.”
그 말과 함께 렌은 손을 올려 로얀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자네가 가는 곳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렌의 뒤에서 토시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담은 채 그렇게 말하자 로얀은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나에게 신의 가호라... 내 쪽에서 사양하겠다.’
속으로 냉소를 터뜨린 로얀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의 등 뒤로 타니아와 세리나를 포함한 엘프들의 잘 가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엘라임이 마음에 걸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며 길을 떠났다.
울창했던 빛의 숲이 곳곳이 썩은 듯 시꺼먼 충치를 드러내었다. 타다 남은 나무들이 애처롭게 서 있었고 다 타버린 나무가 까만 재가 되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온전한 나무도 바람에 날려온 검은 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바삭.
나뭇가지가 로얀의 발에 힘없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타다 남은 나무의 잔해였다.
“.......”
이른 아침 안개 속을 거닐던 로얀의 눈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보였다. 어머니의 눈동자를 닮은 여인, 그의 슬픔을 처음으로 느꼈던 여인.......
푸른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편안해 보이는 바지를 입은 엘라임이 로얀을 향해 걸어왔다.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나, 나도 이프리트와 같은 이유로 함께 다니겠어.”
이프리트와 같은 이유? 그가 정말로 정령왕인지 확인하겠다는 것일까?
아니, 그건 로얀과 동행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엘라임은 이미 로얀을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갑자기 등장한 정령왕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이 왜 로얀을 따라가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날 로얀이 흘렸던 눈물과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 크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터벅터벅.......
로얀은 엘라임을 스쳐 지나갔고 엘라임은 역시나 그가 거절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
“다음으로 갈 곳은 여름의 대륙. 그곳으로 간다.”
터벅터벅.......
그는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도 엘라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왜 그녀에게 다음 목적지를 말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사실 엘라임의 제의를 거절하려 했지만 그의 몸과 마음이 그의 의지를 배신했던 것이다. 방금 한 말도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로얀이 앞서 가버리자 엘라임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녀도 모르게 바람에 실린 미소가 지나갔다.
로얀과 엘라임 단 둘이 여행한다는 것을 다른 정령들이나 레아가 안다면 난리가 날 대사건이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남자를 싫어하는 엘라임이 남자인 로얀과 같이 다닌다는 것은 희대의 특종이자 역사에 남을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로얀의 친구인 얀도 눈을 휘둥그렇게 뜰 일이었다. 무뚝뚝한 로얀 옆에 물의 정령왕이 있다는 것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엘라임이 물의 정령왕이라 놀란다기보다는 여자라서 놀라는 것일 것이다.
로얀과 엘라임은 여름의 대륙을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가을의 대륙에서 벗어난 적이 없던 로얀은 역시나 길을 몰랐기에 엘라임이 길을 안내하게 되었다.
여름의 대륙은 현재 혼돈의 시대였다. 아니, 지금뿐만 아니라 언제나 혼란한 여름의 대륙은 가을의 대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나라가 많았고 하루에도 수십 건의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의 대륙이었다.
여름 기후의 특성인 지독한 가뭄과 온종일 퍼붓는 소나기의 시간인 장마철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곳이 여름의 대륙이었다. 이 두 기후가 반복해서 일어나다 보니 여름의 대륙은 식량난으로 언제나 전쟁을 벌였다.
물론 여름 기후에 걸맞는 곡식과 과일들이 있었지만 그런 곳을 얻을 수 있는 땅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울퉁불퉁한 돌산과 사막지역에서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여름의 대륙에서는 자연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땅을 많이 가진 나라가 강대국이 되었다.
아무튼 여름의 대륙 곳곳에서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얀이 무슨 그늘을 만들어놓는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황폐한 피의 대륙이 바로 여름의 대륙이었다.
로얀은 엘라임이 아는 요정들의 비밀 통로를 따라 여름의 대륙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들이 빛의 숲을 거의 다 빠져나갔을 무렵,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투툭, 쏴아아아......!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거세지자 로얀과 엘라임은 주위에 있는 거대한 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다.
쏴아아......!
여름의 대륙이 가까워지자 그 기후의 영향으로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퍼부어지는 듯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로얀과 엘라임은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나무는 잎이 풍성해 그들을 공격해 오는 빗방울을 모두 막아주었다.
차가운 느낌과 함께 비 특유의 냄새가 로얀의 코끝을 찔렀다.
스윽.
로얀은 앉아 있는 엘라임을 한번 쳐다보더니 땅의 정령왕 노움이 준 땅의 숨결이라는 이름의 망토를 끌러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
그는 엘라임의 의아한 얼굴을 뒤로하고 그녀에게 땅의 숨결을 덮어주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엘라임에게 땅의 숨결을 덮어준 로얀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뜻밖의 행동에 엘라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바보... 물의 정령인 내가 빗물에 떨 리가 없잖아.......”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녀는 땅의 숨결을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덮고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쏴아아아......!
그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그 마왕은 누구지?”
지치지도 않는지 오랫동안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로얀이 문득 그렇게 물었다. 빗소리 때문에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로얀의 물음에 엘라임은 걱정이 앞섰다. 그가 마왕과도 싸움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마왕의 힘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다. 십중팔구 로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릴 싸움이었다.
“그 녀석에게 복수를.......”
“만난다면. 더 이상 복수의 대상을 늘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로얀이 엘라임의 말을 자르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복수의 대상?”
로얀도 고개를 돌려 조각 같은 얼굴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엘라임을 마주 바라보았다. 엘라임의 눈동자에서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보니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무거운 마음의 짐을 벗고 싶었다.
로얀은 엘라임의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보다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모든 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엘레나와 얀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었고 엘라임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로얀의 이야기는 너무도 슬프고 비극적인 한 편의 소설 같았다. 엘라임은 그의 눈동자를 통해 지독히도 슬픈 마음과 타오르는 분노가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로얀은 엘라임에게 엘레나에게도 말 안 한 혼돈의 정령왕에 관한 것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그녀 또한 정령왕이기에 말하는 것일까?
잠시 후, 로얀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엘라임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로얀에겐 절대 쓰지 않던, 다소 누그러진 어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레아처럼 누군가를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어?”
레아에게 하던 말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과거를 듣고 그를 진심으로 자신의 동료로 여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
무엇을 읽으려는 것일까? 로얀은 엘라임의 눈동자와 그녀의 전신을 자신의 눈동자에 담았다.
“그렇게 하겠다. 하지만 나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좋지 않다.”
“어째서?”
엘라임의 물음에 로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죽을 때마다 뭔가를 잃는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느낄 수가 없다. 그것이 날 두렵게 한다.”
만약 희생의 제물이 주위의 인물이라면... 그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건 정말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니 말이다.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얀도 걱정이 되었는데, 거기다 또 다른 이까지 추가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 엘라임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주위의 사람이 제물이 되진 않을 거야.”
“.......”
“다른 생명을 이 세상에서 제물로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엘라임은 붉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제물이 되지 않는다면 로얀, 그에게서 뭔가가 사라질 것이다.
로얀은 혼돈의 정령왕이 된 이후 첫 번째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생명을 해할 때 느끼는 인정을 잃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직후 들려온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음성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그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첫 번째로 사라진 것이 뭔지 몰랐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 녀석은... 죽음과 어둠의 마왕 위리놈.”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다시 꺼낸 말은 그때 나타났던 마왕에 관한 것이었다. 로얀이 복수를 하지 않겠다고 했기에 그 말을 믿고 알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복수를 하겠다고 해도 그가 마계에 있는 마왕 위리놈을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위리놈.......”
로얀은 그 이름을 가슴속에 새기려는 듯 한동안 되뇌었다.
이윽고 로얀이 떨어지는 비를 쳐다보며 엘라임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말했다.
“비가 싫어질지도 모르겠군.”
어머니의 심장을 에리오네로 꿰뚫고 그 피를 자신의 손에 묻혔던 날... 슬프고 비극적인 옛 과거를 들었던 날... 그날도 오늘처럼 어둠으로 물든 하늘에서 지독스럽게 비가 떨어지는 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