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사막의 밤 (28/42)

3장 사막의 밤

사막의 밤

사막의 도시 뮤트는 거대한 오아시스를 중앙에 두고 집들이 둥글게 들어서 있었는데, 사막의 모래를 가지고 뮤트 사람들만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이 집들은 다른 지역의 여행자들에게는 좋은 눈요깃거리였다.

빈트러드 제국에서 자원이 풍부한 나라인 몰딘 왕국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시인 뮤트는 많은 상인들이 오고 갔다.

마법사 연합처럼 상인들도 연합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국경선을 넘나들어도 나라에서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물론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적대국에서 오는 상인은 막아야 하겠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빈트러드 제국의 황제가 전쟁을 중단하고 몰딘 왕국과 휴전을 맺었기 때문에 지금 뮤트에는 그동안 전쟁 때문에 오지 못했던 몰딘 왕국의 상인들이 몰려와 있었다.

빈트러드 제국의 황제는 용병왕 카엔 공작이 사라진 직후 몰딘 왕국과 휴전을 맺고는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그리고 전 병사들을 수도로 집결시켰다.

여름의 대륙 사람들은 빈트러드 제국 황제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용병들을 이끌던 용병왕 카엔 공작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황제에게는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있었고 이미 점령한 땅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그 끔찍한 전쟁이 종결된 것에 많은 사람들이 안도하며 웃음을 흘렸다.

사실 사람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빈트러드 제국 황제는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몰딘 왕국에 드래곤의 시체가 떨어졌다는 소문과 함께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카엔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일치했다. 카엔은 블랙 드래곤이었고 몰딘 왕국에 떨어진 드래곤도 블랙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카엔에게서는 이제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카엔이 몰딘 왕국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게 당했건 뭐건 간에 이제 더 이상 몰딘 왕국과는 싸울 수가 없었다. 드래곤을 죽인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친다는 말인가? 빈트러드 제국 황제에게는 그만한 강단이 없었다.

아니, 그는 사실 상당한 겁쟁이였다. 그가 수도로 병력을 모은 것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보복으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서였다.

다른 드래곤이 동족의 복수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죽일 거라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해츨링이 죽은 것이라면 또 몰라도 성룡 이상의 드래곤이, 그것도 인간에게 죽었다면 그 멍청한 드래곤에게 욕을 퍼부었으면 퍼부었지 복수를 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빈트러드 제국의 황제가 겁을 집어먹고 휴전을 제의해 온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몰딘 왕국의 국왕인 이얀이었다.

그는 빈트러드 제국과 휴전을 맺은 후 드래곤의 몸을 팔아 나라를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몰딘 왕국의 국력은 병력과 더불어 나날이 막강해져 갔다.

* * *

사막의 도시인 뮤트는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모랫바람이 불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칠흑이 깔린 뮤트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간혹 거리를 걷는 사람은 커다란 터번을 머리에 쓰고 얼굴과 온몸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들이었다.

휘오오오......!

사막은 밤의 거리를 걷는 자들을 싫어하는지 강하게 손을 휘둘렀고, 그 손은 모래와 바람이 되어 도시를 뒤덮었다. 그때마다 거리를 걷는 사람은 몸에 두르고 있는 천을 꽉 여민 채 발걸음을 멈췄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길을 걸었다.

휘오오오......!

거친 바람의 움직임은 초저녁부터 시작되어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는데 그것은 마치 저녁이면 또다시 불어닥칠 모랫바람을 예고하는 폭풍전야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랫바람 때문에 뮤트의 사람들은 온몸을 가리고 다니는 것은 물론 집 또한 직각으로 꽉 막히게 단층으로 지었다. 그 안에서 한 가족이 사는 것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이곳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강했고 자신의 가족만을 챙겼다.

언뜻언뜻 보이는 2층 이상의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 외의 2층짜리 건물은 이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의 커다란 저택뿐이었다.

아무튼 사막의 모래처럼 무뚝뚝한 뮤트의 사람들은 주로 어둠의 직업, 즉 시프나 어쌔신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것 외에도 다른 직업을 하나씩 더 가지고 위장을 했고, 길드를 통해서 임무가 전달될 때 외에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생활했다.

어둠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뮤트에 상인들이 모이는 이유도 어쌔신과 시프 때문이었다. 그런 자들과 연관된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돈만 준다면 확실히 목숨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휘오오오!

쏴아아.......

어둠의 도시라 불리는 곳답게 짙게 깔린 어둠 위로 모래비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딸랑, 딸랑.......

뮤트에서 가장 큰 건물인 3층짜리 여관 ‘오아시스’의 문에 달린 종이 사막의 바람에 요동쳤다.

“와하하하......!”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일하고 밤에 푹 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이곳 사람들과는 달리 여행자들은 이 신기한 마을에서 술로 밤을 지새웠고,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웃음소리는 불빛과 함께 뮤트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어도 뮤트 사람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신에게 일(?)이 생기면 밤에 활동했지만 평소에는 이 시간이면 조용히 수면을 보충하는 뮤트 사람들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오는 여관 오아시스는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온 손님들로 만원이었고, 여행자들은 모두 뮤트의 밤을 즐기기 위해 일층 식당으로 내려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여관 ‘오아시스’는 일층은 식당이고 이삼 층은 숙박을 위한 방들이 있었다. 한데 그 많은 방들 중 삼층의 복도 끝 방에서는 지금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으으윽.......”

보통 때라면 그 소리를 뮤트 사람인 여관 주인이나 종업원이 못 들을 리가 없을 테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그것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방 안에는 소리를 차단하는, 은은한 검은 빛을 내는 아주 얇은 막이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음을 흘린 사람은 지금 검은 흑발을 길게 드리우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우수에 젖은 듯한 그는 눈동자를 아주 심하게 떨고 있었고, 자신의 양손을 엑스 자로 교차시켜 반대쪽 팔을 각각 잡고는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크으윽! 허억, 허억.......”

그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토록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는 로얀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모를 것 같던 그가 지금 이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로얀의 몸을 부축했다. 그는 얇고 가벼운 검은 갑주를 온몸에 걸친 것만으로도 모자라 얼굴 전체를 투구로 가리고 있었는데, 검은 투구에 유일하게 나 있는 눈 부분은 회색빛으로 빛나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검기만 한 갑주에 다른 색상을 띠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양팔뿐이었다. 그의 팔목을 피처럼 붉은 천이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붉은 천 아래쪽으로는 검은 철갑으로 뒤덮인 손이 있었다. 이 갑옷이 철로 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금속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겉모습만 봤을 때에는 철갑 같았다.

이렇게 괴상한 차림을 한 이는 사람이 아닌 정령이었다. 로얀의 그림자 속에만 있던 다크로드가 최상급 정령 다크니스가 된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크윽!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군.”

다크로드의 부축을 받고 침대 위에 걸터앉은 로얀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이 떨림이 시작된 것은 그가 뮤트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데 그 떨림은 갈수록 심해져 지금은 마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그럼 그때 금빛 오러를 쓴 것도.......]

다크로드의 말에 로얀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사실 그가 스콜피온을 상대하는 데 금빛 오러를 쓸 필요는 없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오러 블레이드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가 없었다.

“힘의 조절이 되지 않고 있다.”

[.......]

다크로드는 로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블랙 드래곤 카엔에게 죽었다 살아난 것만 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게다가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기까지 하고는 그것을 조절할 수 없다는 이상한 말을 하니 그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로얀은 지금 이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전대 다크로얀이 폭주한 이유는 그가 너무 강한 힘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힘에 미쳐버린 것이었다. 로얀 자신 역시도 지금 강한 힘에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강해지라는 뜻으로 전대 다크로얀이 봉인을 걸어둔 것이었지만 자신은 단 몇 달 만에 두 개의 목숨을 날려버렸고, 그에 따라 두 개의 봉인을 풀어버렸다.

한데 로얀 자신의 나약한 육체는 그 강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왈칵!

후두둑.

떨림을 제어하기 위해 양팔이 터져라 꽉 잡고 있던 로얀의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는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뮤트에 세워져 있는 이 건물의 바닥은 당연히 나무가 아닌 모래였다.

그제야 서서히 양팔의 떨림이 잦아들었고 심장의 쿵쾅거림이 조용해졌다.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 다크로드가 급히 다가왔지만 로얀이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큭!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군.”

[대체 마스터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다크로드의 말에 로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냥... 묻지 말았으면 한다.”

[예... 마스터.]

로얀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다크로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것이 왕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나타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로얀은 팔을 들어 아직 자신의 허리에 매여 있던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를 풀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힘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겠다! 여기서 봉인이 하나 더 풀린다면 나의 육신은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 아직 드래곤에게 복수를 끝마치지도 못했고, 엘라임을 만나지도 못했다. 이대로는... 하루 빨리 이 힘을 제어해야 해!’

로얀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품속에서 ‘몬스터 도감’을 꺼내 들었다. 힘을 제어하기 이전에 자신 옆에 다가와 있는 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자신은 지금 매우 불완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위험에 미리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책장이 넘어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메우기 시작하자 다크로드는 그런 로얀을 묵묵히 바라보며 석상처럼 서 있었다.

<도플갱어.......

일정한 형체가 없는 몬스터로 처음에는 작은 벌레나 약한 몬스터부터 시작해 점점 그 크기와 힘을 늘려 옮겨다니며 상대를 흡수, 진화하는 몬스터로 상대의 모든 기억과 힘까지 흡수하기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그러나 도플갱어의 수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도플갱어는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데다가 늙은 노인을 죽여 흡수하면 노인이 되고, 어린아이를 죽여 흡수하면 어린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숲을 거니는 그대, 동료를 살펴보아라. 언제 도플갱어가 그대들의 동료가 되어 웃고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탁!

로얀은 도플갱어에 관한 내용을 찾아 읽고는 ‘몬스터 도감’을 덮었다. 그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크로드가 지켜보고 있었다.

“도플갱어.......”

로얀은 무의식적으로 방금 읽은 도플갱어가 떠올라 중얼거렸다.

[그가 도플갱어라면 어째서 마스터에게 접근한 것일까요?]

“아직 도리스가 도플갱어라 확정 지을 수는 없다.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인간이 아닌 존재이고, 마스터께 일부러 접근한 자입니다. 제게 명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하늘 아래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다크로드가 말을 함과 동시에 허리를 숙이자 로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윽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침대 위에 누웠다.

커다란 방 안에는 네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다른 일행의 것이었다. 여자 두 명을 제외하고는 남자들은 모두 여기에 묵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리더 격인 도리스가 사라진다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

도리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일행들에게 말한다 해도 과연 처음 만난 로얀의 말을 그들이 믿어줄까?

“그가 누구든 간에 나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는 한 나와는 상관없다. 나에게 용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낫다.”

[마스터와 원한관계인 드래곤이 만든 함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자 로얀이 다크로드의 시선을 받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드래곤의 소행이라면 좋겠군. 만약 이것이 정말로 드래곤이 만든 함정이라면 그 연극 속에는 나라는 인물이 있겠지. 카엔이 만들었던 연극처럼 그 끝은 역시 나의 죽음이겠지만, 이번에도 내가 그 결말을 바꿔놓겠다.”

스르륵.

툭.

로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땅의 숨결을 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직 명을 기다리고 있는 다크로드에게 말했다.

“그래도 주의를 하는 게 좋겠지. 다크로드, 그를 감시해라. 그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일지라도 최상급 정령인 너를 쉽게 눈치 채지는 못할 것이다.”

왕의 명령에 다크로드는 허리를 숙인 후 한 팔을 가슴에 대며 답했다.

[예, 마스터.]

그리고 다크로드는 로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휴식에 들려 하자 천천히, 녹아내리듯 바닥으로 스며들어 바닥을 적시고 있던 로얀의 붉은 피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그와 거의 동시에 방 안에 쳐져 있던 검은 막도 사라졌다.

스르르륵.

다크로얀과 검은 막이 사라진 커다란 방 안에는 로얀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로얀이 오랜만에 편안한 잠에 빠져들려 하고 있을 때 여관 ‘오아시스’의 일층에서는 사람들의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었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그냥 잠을 자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어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돌로 만든 뮤트만의 특이한 각진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은 나무가 귀했기 때문에 테이블 또한 돌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의 일행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로얀과 일행이 된 이들도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여행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이나 자신들의 과거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안주용으로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 추억들은 그들이 워낙 오랫동안 같이 일한 덕분에 벌써 수십 번도 더 들은 이야기들이었다. 새로 들어온 신참(?) 로얀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지만 이들 중 그를 여기로 데리고 올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도리스와 속을 알 수 없는 드워프 록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갑자기 보물찾기(?)에 끼어든 로얀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도의 주인인 도리스가 그를 일행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초저녁부터 할 얘기가 떨어지자 이들은 묵묵히 술만 마셨다. 원래 과묵한 드워프 록은 한마디 말 없이 술잔만 들이켜고 있었고 술이 약한 클라토스는 이미 뻗어 있었다.

어린 정령술사 루이는 우유를 홀짝이고 있었고 마법사 도리스는 앞에 놓여 있는 술은 마시지 않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웃음을 담은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침묵 속에 붉은 머리의 여검사 타냐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답답한 것을 싫어해 머리카락도 짧게 자른 그녀인 만큼 조용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매우 싫어했다.

커다란 컵에 담겨 있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타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금속 술잔을 돌 테이블 위에 강하게 내려쳤다.

깡!

“으으음.......”

그러자 그 요란한 소리에 엎어져 있던 클라토스가 잠깐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졌고 술집 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도리스만이 아직도 술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크아아! 답답해, 답답해! 누구든 좋으니까 말 좀 해! 말 좀!”

타냐의 신경질적인 말에 토끼눈을 뜨고 있던 루이가 우유 잔을 만지작거리며 도리스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왜 그 로얀이라는 사람을 일행으로 받아들이셨어요?”

루이의 말에 타냐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로얀이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가 이 자리에 없으니 그에 대해 얘기하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타냐는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가 마법검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움직임은 엄청난 것이었어. 그냥 실력만 따져 보아도 우리보다 위일 거야.”

“그치만... 아무리 강해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건 그래. 도리스 영감님, 갑자기 왜 그를 일행에 끼워 넣으셨죠? 지금이라도 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쾅!

“안 돼!”

따지듯 묻는 타냐의 말에 지금껏 말없이 술잔만 바라보고 있던 도리스가 돌연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노인이 낸 소리 치고는 우렁찬 그 음성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또 한 번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흠흠! 아무 일도 아니니 하던 얘기들이나 계속하시죠.”

타냐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휙휙 저으며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잠깐 수군거리던 그들은 다시 술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일층 식당 안은 다시 떠들썩해졌다.

“안 돼! 그가 빠지면 여행의 의미가 없어.”

그 모습을 보고 도리스는 혼자 그렇게 속삭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한데 그런 그의 얼굴에는 소름 끼치는 이상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돌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어, 어디 가세요!”

루이가 도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지만 그는 이미 여관을 나서고 있었다.

이 밤에 도리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 버리자 일행은 당황하여 한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언니.”

도리스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타냐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으응?”

“할아버지... 요즘 이상한 것 같지 않아?”

“확실히 이상해졌지.”

“그치, 그치?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타냐는 진지하게 말하며 커다란 눈을 가까이 대는 루이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풋! 내 생각이지만 마법사들은 다 미친 사람들이야. 게다가 그 영감탱이는 아마 노망이 들어서 더 그런 걸 거야. 푸하하하!”

화통하게 그렇게 외친 타냐는 여자답지 않게 큰 소리로 웃고는 비어 있는 자신의 술잔을 카운터에 있는 종업원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던 루이도 자신의 잔을 잡고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클라토스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드워프 록은 술을 들이켜며 도리스가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로얀이 침대 위에서 편히 잠자기 시작한 지 몇 시간이 흘렀다.

사사삭.

오랜만에 곤히 잠자고 있던 로얀의 귓가로 미세한 소리가 감지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발달된 그의 감각은 이 미세한 소리를 정확히 집어내고 있었다. 누군가 지붕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로얀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누가 죽건 간에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로얀은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가 그냥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랐지만 그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소리가 점점 그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아직 밑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지 방 안에는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사삭.

빠르게 다가오는 이를 다크로드를 시켜 처리할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의 명으로 도리스를 감시하기 위해 그의 그림자 속에 있을 다크로드를 이런 일로 부를 수는 없었다.

타탁.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로얀은 소리로 세상을 보았다.

누군가 창가에 내려앉는 것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상대는 단 한 명뿐이었다.

휘휙.

쉐에엑!

어두운 밤의 침입자는 창가에 내려선 즉시 뭔가를 누워 있는 자신을 향해 날렸다. 날아오는 소리로 보아 암기 네 개인 듯했다.

벌떡.

타탁!

로얀은 암기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몸을 벌떡 일으켜 그것들을 낚아챘는데, 그 손놀림은 눈으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그의 그런 움직임에 침입자는 놀랐는지 살짝 몸을 떨었다.

휘휙.

쉐에엑!

로얀은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암기를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한데 그가 던진 암기는 침입자의 것보다 훨씬 더 큰 파공음을 내며 날아갔다.

퍼퍼퍽!

그리고 두 개씩, 침입자의 양팔에 정확히 박혔다.

“큭!”

어둠 속에서 짤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신음성은 단 한 번뿐이었다.

탁.

“과연 드래곤 슬레이어군요.”

창가에서 내려선 그 침입자가 그렇게 입을 열며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양팔에 암기를 각각 두 개씩이나 꽂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서서히 로얀의 눈앞에 드러나는 그는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어둠을 믿어서인지 복면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로얀의 눈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도 잘 보였다.

눈매가 위로 올라가 있고 턱선이 날카로운,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짧은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뚜벅뚜벅.

스윽.

로얀은 침대 옆에 세워둔 에리오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날려 단숨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아아, 흥분하지 마십시오.”

누가 흥분했다는 건지... 제멋대로 로얀의 상태를 입에 담은, 어쌔신으로 추정되는 이는 양팔에서 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로얀을 향해 계속 다가왔다.

그가 보통 암살자였다면 로얀은 암기로 그의 양팔이 아니라 심장을 꿰뚫어 바로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로얀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도리스와 똑같은 족속이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 챘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뮤트의 어쌔신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의 공격은 단지 인사였을 뿐입니다.”

뚜벅.

침입자가 로얀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나 로얀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저를 공격한다면 잡혀 있는 일행 분이 어떻게 될지는.......”

씨익.

침입자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그런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로얀에게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사람을 잘못 찾아왔군. 그런 인질놀이라면 일층으로 가라. 그곳에 진짜 일행들이 있으니까.”

흠칫.

로얀이 보인 뜻밖의 반응에 어쌔신은 흠칫했다. 아무리 최근에 만나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그도 일행이 아닌가? 그러나 로얀은 마치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당신도 그들의 일행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죽든지 일층으로 가든지 하나만 선택해라.”

“그, 그런... 당신이 저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도리스라는 마법사의 목숨은.......”

일이 어긋나서인지 당황하는 어쌔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고 자려던 로얀은 바로 그 순간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어쌔신은 틀림없이 도리스와 같은 족속이었다. 바로 도플갱어일지도 모르는 괴상한 존재인 것이다.

“어디로 가면 되지?”

어쌔신과 도리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드래곤 산맥으로 가지 않고 정령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빛의 성지로 갈 수 있는 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리스뿐이었다. 때문에 다른 일행이 잡혀갔다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도를 가지고 있는 도리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슨 함정을 파놓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빛의 성지로 가기 위해서는 이 어쌔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목소리를 통해 어쌔신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스윽.

로얀은 침상에서 일어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양 허리에 매었다. 그리고 땅의 숨결을 몸에 두른 후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문으로 나가지. 너는 밖에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그럼 밖에서 뵙죠.”

파팟.

어쌔신은 어찌 됐건 간에 임무를 완료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 안을 벗어났다. 그는 팔에서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끼이익.

로얀이 방문을 열고 빠져나가자 커다란 방 안은 텅 비어버렸다.

뚜벅뚜벅.......

돌로 된 계단을 밟으며 로얀은 일층으로 내려갔다.

“와하하하......!”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따갑게 했다.

“손님!”

뚜벅뚜벅 걸어 여관을 나서려던 로얀을 여종업원이 불러 세웠다.

스윽.

살짝 고개를 돌린 로얀은 여종업원의 손에 들린 기다란 천을 볼 수 있었다. 저것을 머리에 둘둘 말면 터번이 되는 것이다.

여종업원은 조금 전 밖으로 나간 도리스에게는 그가 너무나 갑자기 횡 하니 나가 버리는 바람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커다란 마법사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로얀은 달랐다.

그의 검은 머리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십중팔구 모래가 그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스윽.

뚜벅뚜벅.......

그런 사람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얀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로얀.......”

여종업원이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로얀을 본 루이가 그를 부르려 했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로얀이 이렇게 문을 통해 나간 것은 일행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뒤늦게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괜히 찾으러 와 귀찮게 할 것 같아서 미리 그것을 방지한 것이다.

오아시스 건물을 뒤로하고 로얀은 파삭이는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조금 전 그의 방에 침입했던 어쌔신이 걷고 있었다. 한데 그의 팔에서는 로얀이 꽂아두었던 암기는 물론 상처 또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휘오오오.......

그러나 로얀은 묵묵히 그러한 어쌔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휘오오오.......

심한 모랫바람이 불어와 로얀의 머리카락을 괴롭히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자잘한 모래 또한 그 속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마다 금빛 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그 모습을 앞장서 걸으면서도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어쌔신도 볼 수 있었다. 명령대로 그냥 그를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되지만 로얀의 기이한 모습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해 자연히 걸음걸이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어쌔신은 로얀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온몸을 천으로 두르고 있었고 얼굴도 로얀의 방을 빠져나온 직후 검은 천으로 둘둘 말고 있었지만 짓궂은 모래는 바람을 타고 그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니, 간혹 눈까지 침입한 모래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고 걸음걸이를 주춤거리기도 했던 것이다.

‘인간 맞아? 눈알이 무슨 강철로 돼 있기라도 한 거야?’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로얀은 마치 달밤에 산책을 나온 듯 느긋한 모습이었다. 누구는 짜증나는 모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누구는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저 인간이 드래곤 슬레이어에 독특한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분이 호기심을 가질 만큼의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뭐, 우린 명만 받들면 되지만.......’

어쌔신은 알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막도시 뮤트의 음지로 향했다.

한데 어둡고 좁은 골목을 끊임없이 지나가는 어쌔신의 걸음걸이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그 또한 느긋하고 조용히 가고 싶었지만 이 밤에 사막의 모래를 정면으로 받으며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로얀 때문에 가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뮤트의 비밀장소였기 때문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어쌔신과 로얀은 거대한 호수가 바라보이는 곳에 멈추어 섰다. 뮤트의 중앙에 있는 오아시스였다. 이 근처에는 나무들과 풀이 무성했고, 바람은 불었지만 모래는 타고 있지 않았다.

로얀을 안내했던 어쌔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몸을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그때, 로얀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호수의 모습이 그의 눈길을 끌었지만 정작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른 쪽이었다.

거미줄처럼 숲을 뒤덮은, 그의 감각에 잡힌 사람들... 아마 자신을 안내한 어쌔신과 같은 편인 듯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이 숲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도리스와 같은 족속이라는 것이었다.

경관을 감상하듯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로얀이었지만 그는 그 짧은 순간에 숨어 있는 모든 어쌔신들을 바라보았고, 덕분에 그의 시선이 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덜컥.

뭔가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바닥을 더듬던 어쌔신이 손에 잡힌 것을 들어 올렸다.

끼이익!

부스스.......

두꺼운 나무판이 들어 올려지자 그 위에 쌓여 있던 모래가 부서져 내렸다.

“이곳입니다.”

나무판 밑으로 계단이 나타나자 로얀은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게 말했다.

“허술하군.”

어쌔신의 본거지 치고는 너무도 허술해 보였던 것이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문이 있습니다. 그 뒤로부터 함정이 본격적으로 펼쳐지죠. 그럼 따라오십시오.”

어쌔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을 밟았다.

뚜벅뚜벅.......

로얀도 그 뒤를 따라 계단을 밟았다.

끼이익.

쿠쿵!

로얀이 계단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나무판이 닫혔고, 그제야 숲 속에 숨어 있던 어쌔신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로얀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어둡지만 불을 켜선 안 됩니다.”

문이 닫히고 유일한 빛인 달빛을 가리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엔 어둠으로 가득 찼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의 어둠이었다.

“불을 켜는 순간 뜨거운 불꽃이 몸을 덮쳐올 것입니다. 이 통로의 사방에는 기름이 발려 있거든요.”

어쌔신들의 본거지로 침입하는 길은 이곳이 유일했다. 숲 속의 어쌔신들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이곳으로 들어와 어둠 때문에 불을 켠다면 뜨거운 화염이 온몸을 덮칠 것이다. 불꽃이 조금도 튀지 않도록 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뚜벅뚜벅.......

로얀은 어쌔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만약 그 순간 앞장서서 가고 있던 어쌔신이 뒤를 돌아 그러한 로얀의 모습을 봤다면 눈을 커다랗게 떴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라고는 하지만 로얀은 주로 밤에 활동해 어둠에 익숙한 어쌔신보다도 더 태연하게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로얀의 눈동자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 어둠을 가르고 앞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두 사람은 대낮의 거리를 걷듯 계단을 밟으며 밑으로 내려갔다.

뚜벅.

드디어 계단이 끝나고 거대한 석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뚜벅.

어쌔신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바로 눈앞에 있는 석벽의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후 이리저리 돌렸다.

그그그긍.......

후두둑!

어쌔신은 뭔가를 작동시킨 듯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천장에서 모래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쿠쿠쿵.......

그리고 여러 가지 무늬가 수놓여 있는 거대한 석문 옆에 위치한 조그마한 문이 열렸다. 아니, 구멍이 생겼다.

“여기 이 구멍을 통과하면 길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앞으로 쭈욱 가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

어쌔신의 임무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그는 로얀이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일단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로얀에게로 다가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로얀을 구멍까지 직접 이끌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서 가겠다.”

“......!”

뚜벅뚜벅.......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는 어쌔신을 스쳐 지난 로얀은 작은 구멍을 바라보며 몸을 숙였다. 키가 큰 자신에 비해 상당히 작은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어쌔신은 로얀이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인간... 아무리 네가 대단하더라도 그분과 또 다른 두 명, 세 명이 펼치는 게임 속에서는 살아날 수 없을 거다.”

이윽고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쌔신은 또다시 석벽의 작은 구멍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그러자 기관이 다시 작동해 로얀의 모습을 삼켜버린 구멍이 그 입을 닫기 시작했다.

* * *

작은 구멍을 기어서 통과한 로얀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구멍 너머에는 성인 남자가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의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통로는 사방이 칼로 잘려진 듯 평평했다. 그리고 역시나 불빛이 전혀 없었지만 로얀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뚜벅.

밋밋한 통로 바닥을 밟으며 로얀은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수록 여기까지 안내해 준 어쌔신이 어째서 직선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양쪽 벽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직사각형으로 여기저기 뚫려 있어 마치 미로를 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 입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바람소리가 그의 몸을 휘감았고, 귓가를 가득 메웠다.

뚜벅.

일직선으로 통로를 통과하던 로얀이 이윽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다크리온의 그립을 쓰다듬었다.

뚜벅뚜벅.......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을 안내해 준 어쌔신은 분명 통로를 통과하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건만 통로를 채 통과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뚜벅.

로얀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존재는 모두 다섯 명으로 그들 모두는 로얀을 안내해 준 어쌔신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가 달랐다.

“너희들은 누구지?”

“아......!”

로얀의 말에 다가오던 이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로얀이 어둠을 뚫고 자신들을 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확인할 겸해서 아무 말 없이 옆 벽에 나 있는 네모 모양의 입구를 가리켰다.

사실 로얀에게 다가와 그를 직접 옆 통로로 안내하려 했던 그들의 원래 계획은 위험성이 높았다. 만약 로얀이 정말로 앞을 보지 못했다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다가와 팔을 붙잡는 그들을 드래곤 슬레이어씩이나 되는 로얀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일은 쉽게 풀려 로얀은 그들이 가리킨 대로 순순히 그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그가 본 어쌔신들은 모두 도리스와 같은 족속인 데 반해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그렇게 로얀과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어둠을 헤치며 다른 통로로 들어갔다.

빙글.

스윽.

앞장서서 걸어가던 어쌔신들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로얀은 손을 슬쩍 검 위에 올려놓았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블랙 드래곤을 잠재운 드래곤 슬레이어 흑안의 다크로얀님! 흠흠, 처음 뵙겠습니다. 쉐이트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키가 매우 작은 한 사람이 그를 향해 다가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어쌔신 역시 덩달아 몸을 숙였다.

스윽.

로얀은 검에서 손을 떼고 그런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쉐이트라는 사람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뚜벅.

쉐이트는 또다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들고 로얀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도와드리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

“현 뮤트의 총 대장인 르샤크는 인간이 아닙니다.”

“도플갱어겠지.”

흠칫.

진지하게 말한 쉐이트는 흘려보내듯 가볍게 내뱉은 로얀의 말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걸......?”

‘역시 도플갱어였던가?’

로얀의 짐작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막도시에는 도플갱어가 바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군. 그대는 어떻게 그들이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

“그것은... 우선 지금의 상황부터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들이 눈치 챌 수도 있으니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어쌔신과 시프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사막도시 뮤트는 국가에서 내려보낸 영주보다는 마을의 총대장인, 최고의 어쌔신이라 불리는 르샤크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한데 그런 뮤트에 이변이 생긴 것은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뮤트의 어쌔신들 중에서도 꽤 높은 직위에 있는 쉐이트는 그날도 언제나처럼 이 지하기지의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시간이 계속 지속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백여 명의 정체 모를 사람들과 유난히 눈에 띄는 세 사람이 이 지하기지로 침입한 것이다.

어쌔신과 시프들은 신속하게 그들을 공격해 들어감과 동시에 곳곳의 함정을 발동시켰지만 침입자들의 옷깃 하나 자를 수 없었다. 갑자기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어이없게도 공격해 들어가는 자세 그대로 몸이 마비된 것이다.

아직도 쉐이트의 머릿속에는 돌처럼 몸이 굳은 동료들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웃음을 흘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비릿한 조소를 흘리는 아름다운 은발을 가진 여인과 금빛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모습 역시 그의 기억 속에 새겨졌다.

지하기지 깊숙한 곳에서 업무를 보던 쉐이트는 미처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고 멀리서 백여 명의 인물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달려드는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갑자기 졸음이 몰려옴을 느꼈다. 자신의 뒤에 있던 동료들은 이미 모두 잠들어 있었다.

상급 어쌔신인 쉐이트는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텼지만 침입자들이 동료들을 죽임과 동시에 그들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고 무너져갔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자신이 업무를 보던 책상이 보였다.

처음엔 꿈을 꾼 것이라 생각했다. 꿈속에서 부서져 내렸던 기지가 지금은 말짱했고 동료들 또한 모두 무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의뢰를 거절하고 드래곤 슬레이어인 흑안의 검사에게 총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 쉐이트는 동료들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도플갱어임을 의심하게 되었다.

쉐이트는 그때 쳐들어왔던 두 명의 여인과 한 남자가 드래곤일 거라 추측했다. 이 중간계에서 손을 뻗는 것만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그 자리에 묶어놓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꾸밀 수 있는 존재는 드래곤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래곤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인 로얀을 유인하는 것이지 어쌔신과 시프를 모두 죽여 뮤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닐 거라고 쉐이트는 결론 내렸다.

그 모든 얘기를 빠르게 말하느라 힘이 드는지 쉐이트는 숨을 헐떡였다.

“드래곤이라... 나에게 도와 달라는 건가?”

“후우...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쳐들어왔던 그 세 명은 모두 드래곤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드래곤 슬레이어라 해도 드래곤 세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저희는 드래곤의 밑에서 인형이 되어 살 마음이 없기에 잠시 마을을 떠나 있을 겁니다. 그 전에 드래곤 슬레이어인 당신을 살리고 싶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복수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도리스는?”

“그자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봤는데, 그는 종종 이곳에 왔던 사람입니다. 아니, 그도 도플갱어일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당신의 동료가.......”

“나에게 그는 중요치 않다. 지도, 빛의 성지로 향하는 지도만 있으면 된다.”

로얀의 말에 쉐이트는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리고는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빛의 성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도가 진짜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서 뮤트를 떠나십시오.”

뚜벅뚜벅.......

로얀은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그들 다섯 명을 처음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와 다시 일직선으로 걸었다.

“아무리 당신이 드래곤 슬레이어라 해도 드래곤이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입니다!”

“너라면 드래곤 세 마리와 싸우겠나, 아니면 드래곤 산맥과 싸우겠나?”

뚜벅뚜벅.......

쉐이트는 멀어져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드래곤 산맥과 싸운다는 말은 곧 드래곤 족 전체와 싸운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주군, 어서 떠나셔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쉐이트를 향해 말했다.

“아니. 당분간 그들의 인형으로 살아보자.”

“네?”

“그가 드래곤들을 죽여준다면 고향을 버리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하, 하지만!”

“안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일을 그는 벌써 해냈지 않는가. 한번 믿어보자. 그 강한 에이션트 드래곤 급의 블랙 드래곤을 죽인 드래곤 슬레이어 다크로얀을!”

빙글.

뚜벅뚜벅.......

쉐이트는 몸을 돌려 로얀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네 명의 어쌔신들이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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