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드림 스톤 (29/42)

4장 드림 스톤

드림 스톤

로얀의 눈동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어둠 속을 걸으며 주위의 기운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로얀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이곳은 마치 개미집을 연상케 했다. 여기저기 뚫려 있는 입구... 그 중 하나에라도 발을 들여놨다가는 이 땅 속에 영원히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뚜벅뚜벅......!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로얀은 드디어 목적지에 다 와간다는 것을 느꼈다. 멀리서 다크로드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아앗!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갔을 때, 이윽고 로얀의 눈동자로 밝은 빛이 달려들었다.

뚜벅.

그러나 로얀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 빛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성인 남자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입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상당히 좁은 공간으로 특별한 장식은커녕 낡은 나무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만이 입구 맞은편에 덜렁 놓여 있었는데, 그러한 살벌한 풍경을 사방 석벽에 걸려 있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들이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오셨군요, 마스터.]

두 음성이 동시에 로얀을 맞이했다. 음침하고 스산한 목소리는 로얀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고 어둠의 정령 다크로드가 말하는 정령어는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었다. 한 명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로얀과 마주보고 있는 검은 복면을 한 남자였고 다른 두 사람은 로얀의 오른편에 서 있는, 역시나 복면을 한 사람과 마법사 도리스였다.

도리스는 밧줄로 몸이 꽁꽁 묶인 채 그 복면인에게 잡혀 있었는데, 그의 목에서는 복면인이 쥐고 있는 단검의 날카로운 날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불꽃에 번뜩이고 있었다.

도리스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고 말라 버린 입술은 바들바들 떨고 있어 누가 봐도 누군가에게 붙잡혀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도리스와 비슷한 성질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본 로얀은 지금의 이 상황 역시 같은 편끼리 펼치는 자작극임을 눈치 채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복면을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요새의 비밀을 상세히 말하면서까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저런 연기를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스르륵.

[저들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도리스의 그림자 속에 있던 다크로드가 로얀의 그림자 속으로 옮겨오며 그렇게 말하고는 지금까지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들의 배후에는 아무래도 드래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미 쉐이트에게서 들은 사실인 데다가 그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실이기도 했다.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는 진짜인가?]

“나를 여기로 부른 것이 너인가?”

로얀은 다크로드에게 정령어로 말한 직후 눈앞의 검은 복면을 한 존재에게 그렇게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눈앞의 존재가 도리스보다 강해 보일 테지만 로얀이 느끼기에는 도리스가 제일 강했다.

[예. 그 지도를 멀리서 보았는데, 빛의 정령이 만든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빛의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지도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것으로 보아 진짜가 틀림없었습니다.]

“당연하지. 저기 있는 늙은 마법사의 동료이자 드래곤 슬레이어인 다크로얀, 너에 대해 미리 조사 좀 했지.”

도리스를 인질로 검 자루를 움켜쥐고 있다고 믿고 있는 복면인은 오만하게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이 마을의 모든 어쌔신과 시프를 책임지고 있는 르샤크라고 한다.”

“.......”

로얀은 르샤크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다크로드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지?]

[마법으로 어디론가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를 보낼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바로 그 지도를 가지고 온 드래곤의 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지도를 찾으려면 드래곤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드래곤을 만나려면 이들의 장난에 좀더 놀아주는 수밖에.’

속는 셈 치고 저들의 말을 따라주다 보면 언젠가는 드래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르샤크는 로얀이 계속 말이 없자 그가 도리스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동료가 걱정되나 보군. 우리의 요구는 하나야. 그걸 들어준다면 저 마법사 노인을 살려주지.”

스윽.

그의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도리스의 목에 단검을 대고 있던 복면인이 그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로, 로얀 군!”

도리스의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얀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원하는 게 뭐지?”

이미 그들의 장난에 좀더 놀아주기로 결정한 로얀은 순순히 그들의 의도에 응했다. 그러나 사실 로얀은 거짓 눈물을 흘리는 도리스를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었다.

“며칠 전 오래 전부터 찾던 던전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아서 말이야, 대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가져와 줘야겠어.”

“알겠다. 어디로 가면 되지?”

로얀은 르샤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

[이번 일은 절대 맡으시면 안 됩니다.]

르샤크는 로얀이 너무도 쉽게 넘어오자 순간 당황해 할 말을 잃었고, 다크로드는 로얀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르샤크는 곧 동료가 걱정이 돼서 그런 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로얀을 응시했다.

“흠흠! 여기 지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굴의 위치만 가르쳐줄 뿐, 그 내부 구조는 아무도 모른다.”

르샤크는 어깨를 으슥해 보이며 탁자 위로 둘둘 말린 지도를 던져 놓았다.

“그 던전에 있는 드림 스톤이라는 것을 가지고 와줘야겠어. 그것은 검은색으로 된 돌로 신비한 빛을 뿌리니 아마 알아보기 쉬울 거야.”

뚜벅.

스윽.

로얀은 걸음을 옮겨 낡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지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스터!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저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다크로드였기에 그는 저 지도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 돌과 던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고대의 한 전설과 관련이 있는 곳... 다크로드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이야기가 만약 사실이라면 그곳으로 가는 것은 어쩌면 카엔과의 싸움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크로드의 그런 걱정을 모르는 로얀은 그의 말을 흘려버리고는 르샤크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그럼 갔다 오지.”

스윽.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린 로얀의 눈에 도리스가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도리스에게서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의 환영을 보고 있었지만 르샤크와 복면인은 그가 도리스를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뚜벅뚜벅.......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두 어쌔신과 도리스, 아니 세 명의 도플갱어를 무시하고 로얀은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뒤로하고 로얀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고 다크로드는 그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 * *

얼마 후 로얀은 뮤트의 북쪽 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문 앞에는 온몸을 천으로 친친 감고 있는 네 명의 경비병이 있었는데, 지루함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들은 휘몰아치는 모랫바람 속에서 느릿하게 다가오는 로얀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천으로 얼굴을 감싸지 않아 그 긴 흑발이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병 자신들은 천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모래가 비집고 들어와 서로 대화조차 할 수 없는데 말이다.

터벅터벅.......

그들의 눈에는 로얀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는 다크로드가 뒤따르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던 모래가 검집 속으로 들어가면 적이 출현했을 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뮤트의 병사들은 창을 주로 사용했다. 검이라곤 소맷자락 속이나 바짓단 속에 단검을 숨기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터벅.

창......!

양쪽에 서 있던 병사들이 창을 내밀자 그 두 사람의 창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로얀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휘오오오.......

섬뜩한 창의 날과 함께 로얀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동자도 빛났다. 그들은 심한 모랫바람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어 눈빛으로 로얀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신분증이었다.

스윽.

로얀은 품속에서 용병패를 찾아 그것을 그들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말도 흐르지 않았다.

B급의 용병패는 흔하다 할 수 있었고 용병이 이곳을 한두 번 지나간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고 로얀에게 용병패를 넘겨주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발을 떼었다.

어떻게 이 모랫바람 속에서 그리도 태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모랫바람이 입을 막고 있어 병사들은 궁금증을 묻어두고 서서히 멀어져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터벅터벅.......

멈칫.

뮤트의 북문을 떠나 걸음을 옮기던 로얀의 발걸음이 다시 멈추어졌다. 모랫바람 속에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 때문이었다.

입 부분에 특수한 가죽으로 만든 무언가를 두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을 천으로 감고 있는 자였다. 그는 키가 무척이나 작아 로얀의 허리 정도에나 올 듯했지만 덩치는 상당해 보였다.

“자네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목소리에 로얀은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이 모랫바람 속에서 말을 한다는 점이었고 하나는 그 목소리가 드워프 록의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사실 록이 이 모랫바람 속에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그의 입을 가리고 있는 특수한 가죽 덕분이었다. 그것은 드워프인 그가 직접 만든 그 자신의 발명품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로얀은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네가 요즘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것을 난 알고 있지. 한데 자네가 우리 일행에 들어온 것은 정말 빛의 성지 때문인가?”

드래곤 슬레이어씩이나 되는 인물이 왜 빛의 성지에 그렇게 목을 메는 것인지 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윽.

로얀의 눈동자가 록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나?”

흠칫.

록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로얀이 묻는 그는 록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 평생에 하나뿐인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내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그는... 아마 죽었겠지.”

록의 음성이 슬픔에 절어 떨려왔다.

처음 도리스가 도플갱어가 되어 나타났을 때에는 긴가민가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록은 그가 자신의 친구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따라다닌 것은 친구의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복수라기보다는 자신의 친구 모습으로 다니는 도플갱어를 없애고 싶었다. 그것이 죽은 친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쉐이트에게서 로얀과 도리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어 도플갱어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록은 그 배후의 존재를 알기 위해 지금껏 그와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늘 술자리에서 도리스가 갑자기 자리를 뜨자 록은 그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그리고 도리스가 사라진 쪽을 멀리서 바라보다 얼마 후 그쪽으로 향하는 로얀을 볼 수 있었다.

도플갱어의 배후에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록은 복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허튼 수를 부린다면 악독한 드래곤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드워프 마을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평소 드워프를 노예처럼 다루는 드래곤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행을 이끌고 다른 마을로 갈 생각이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드래곤이 있지. 아무리 자네가 드래곤 슬레이어라 해도 여러 마리의 드래곤과 싸우는 것은 정말 자살행위야.”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사실 드워프 록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라 부르기도 뭐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만류하니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정말 그의 목숨까지 걸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이런 모습을 드래곤이 본다면 드워프 록은 그들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린 자네에게 사막에서 목숨을 빚진 적이 있지. 비록 드래곤을 상대할 수는 없어 친구의 복수는 포기했지만 드워프는 원래 은원이 분명한 종족이지. 그래서 말하는 것이네. 그만두게.”

록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빛의 성지로 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 그 무엇이 막는다 해도 갈 수밖에.......”

터벅터벅.......

휘오오오......!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로얀을 록은 붙잡을 수 없었다. 그 칠흑 같은 눈동자에 담긴 굳건한 의지를 보았고, 그 의지는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드래곤들을 자네가 죽여준다면 내 무엇으로든 은혜를 갚겠네. 정말 자네가 그들의 손안에서 살아남는다면 겨울의 대륙의 카야 산맥으로 와주게나!”

멀어져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외친 것이 드워프 록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뮤트를 벗어난 로얀과 다크로드는 눈앞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걸었다.

“왜 이번 일을 그렇게 말린 것이냐?”

로얀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있는 다크로드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저도 워낙 오래 전 들었던 이야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 던전은 드래곤과 싸우는 것보다 더 위험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던전 하나가 드래곤보다 위험할 수 있다니... 로얀은 어리둥절해 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속의 다크로드를 바라보았다.

[오래 전, 마계에서 파괴의 종족이라 불리는 발록의 수장과 몽마들의 왕이라 불리는 마족이 크게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한데 아무리 몽마의 왕이라 해도 무력으로는 발록의 수장을 이길 수가 없어 그는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럼 그 함정이라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향하는 던전?”

[네. 그 당시 어쩐 일인지 중간계와 다른 차원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약해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빛의 정령들이 천계로 간 때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 약해진 결계를 뚫고 중간계에서 대결을 펼치자고 몽마의 왕이 발록의 수장에게 말했습니다. 자존심과 호승심이 강한 발록의 수장은 당연히 그 말을 수락했는데, 그것이 그의 실수였습니다. 몽마의 왕은 이미 중간계에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약해진 결계를 뚫고 중간계로 내려올 수는 있었지만 힘이 반감되는 것은 마왕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발록의 수장은 몽마의 왕이 파놓은 함정에 지금까지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저 발록이 갇혀 있다는 것뿐인데 어째서 위험하다는 거지?”

[아무리 힘이 반감됐다고는 하나 그는 발록의 수장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그곳에 갇혀 있다는 것은 그 던전에 있는 함정이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발록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아무튼 정말 위험합니다.]

사박, 사박.......

다크로드가 이야기를 마치고 더 이상 말이 없자 로얀은 다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데... 오래 전 일을 자세히 기억하는군.”

[빛과 어둠의 정령은 정령 중에서도 활동범위가 가장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다크로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로얀은 다음 마을을 향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 * *

모랫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흘러 들어온 짙은 혈향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바삭.

로얀의 발에 바삭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밟히며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붉은 피가 바닥을 흐르고 있었고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마을에 있는 건물 들은 모두 파괴되어 활활 불타고 있었고 검은 연기는 하늘로 솟아올라 맑았던 하늘을 흑빛으로 뒤덮었다.

이글거리는 불꽃과 부패하지 않은 시체들로 보아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에 두고 있는 이 마을은 습격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사막에 서식하는 다른 이종족이나 몬스터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저지른 일은 아닌 듯했다. 음식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몬스터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장 맛있는 먹이인 인간의 시체가 여기저기 붉은 피를 뿌리며 널려 있었던 것이다.

한데 무기를 쥐고 죽어 있는 마을 남자들은 간간이 보이는 것에 반해 습격한 이의 시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마을 사람 전원이 처참하게 도륙당한 것이다.

지금 로얀의 눈앞에 보이는 이곳은 원래 셀피아라는 사막마을로 인구도 적고 평소 몬스터의 공격도 없었기에 자경단의 규모 또한 상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시체 한 구 남기지 않은 적들로 보아 자경단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이곳이 셀피아인가?”

로얀은 품속을 뒤져 확인 차 르샤크에게서 받은 지도를 꺼내 펼쳐보았다.

드워프 록을 만나고 난 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어온 그였다. 사막의 서늘한 밤도, 사막의 푹푹 찌는 낮의 태양도 그의 발길을 붙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을이 습격당한 모습이 조금 이상합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요?]

다크로드가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로얀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평화롭던 마을이 갑자기 이렇게 혈향을 흘리며 활활 타오르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무엇보다 식량이나 귀중품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이 더 수상했다.

“드래곤이 만든 연극의 배경 중 하나겠지. 지도에 따르면 던전은 이 마을의 오아시스 속에 있다.”

다크로드의 물음에 사막의 모래보다 더 메마른 음성으로 대답한 로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의 환영을 받으며 로얀은 지도 상에서 사라져가는 셀피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크로드는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 눈까지만 살짝 내민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뒤를 경계했다.

스윽.

이윽고 마을 중앙에 선 로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기억 저편의 한 장면이 차르륵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을 잃은 그는 혼돈의 정령왕이 된 순간이 바로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혼돈의 정령왕이 된 그가 제일 처음 본 것은 이 마을보다 더 황량한 마을이었다. 그곳은 이곳처럼 사막도 아닌데 모랫바람이 일고 있었고 풀 한 포기 자라나 있지 않았다. 자신이 살았던 곳으로 보이는 그 마을은 이미 깨끗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기억의 영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얀의 이름과 함께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레이나라는 이름이었다.

“크윽......!”

파지직!

로얀이 그 자신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순간, 그의 왼손에서는 황금빛 전류가 파지직 하고 흘렀다.

다그닥, 다그닥.......

그 때문일까? 로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시선조차 두지 못했다.

그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주위를 살피던 다크로드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마스터!]

다그닥, 다그닥.......

스윽.

점점 가까워져 오는 소리에 다크로드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검은 기류와 함께 팔을 감고 있는 붉은 천이 넘실거렸다.

“다크로드, 가만히... 있어라. 저들보다... 마을 곳곳에 뭔가가 숨어 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듯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각.

“워워!”

히힝!

“너희들은 뭐지?”

검은 연기 속을 뚫고 나타나 로얀 등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상당히 젊은 청년이었다. 많이 봐줘야 2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그 청년은 사막에 어울리지 않게 큰 백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는데, 눈을 살짝 내리깔고 로얀과 다크로드를 보는 그는 세상을 다 가진 황제같이 거만해 보였다.

사막의 지리적 조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낙타를 선호했지만 귀족들은 천한 사람들이나 낙타를 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낙타를 탔을 때의 모습에 멋이 없다는 게 귀족들이 낙타보다 말을 선호하는 진정한 이유였다.

말을 타고 당당히 나타난 이 청년도 꽤나 쟁쟁한 귀족가의 자식인 듯 그의 양옆으로 역시나 말을 타고 있는 호위기사가 그와 별 차이 나지 않는 눈빛으로 로얀과 다크로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들 뒤로는 말을 타고 있는 기사가 열 명 정도 더 보였고, 그 뒤를 메우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보병이었는데 이들 모두가 사막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간단한 갑주만을 착용한 상태였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이라 모랫바람은 심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천으로 두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귀족가의 도련님으로 보이는 청년이 또다시 로얀을 향해 떠들어댔다.

“너희가 이곳을 이렇게 만든 범인인가?”

“.......”

두 번이나 말을 씹힌 백발 청년이 입술을 씰룩거리자 그 오른편에 있던 중년의 호위기사가 눈을 한껏 치켜 뜨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창......!

“감히 도련님의 말을 무시하다니!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의 호통소리를 들은 귀족 청년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곳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며 놀기 위해 왔던 그는 타오르는 마을을 보고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화가 났지만 마을 중앙에서 본 로얀과 다크로드로 인해 기분이 조금 풀렸다.

용병으로 보이는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의 호위기사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너무도 훌륭하게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죽여주마.”

다크로드가 살기가 진득하게 묻은 인간의 말을 내뱉자 그것은 귀족 청년을 비롯해 기사들과 병사들의 가슴속 깊숙이 박혔다.

츠츠츳!

검은 기류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스파크를 일으켰고 그의 양팔에 감겨 있는 붉은 천이 넘실거렸다.

섬뜩.

병사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고 기사들은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며 다크로드를 노려보았으며 백발 청년은 자신이 잠깐이나마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에 화가 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윽.

그때,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얀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온다.”

그의 말에 검은 기류를 흘리며 붉은 천을 흩날리던 다크로드가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방에서 뭔가가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 함정이었나! 네놈들!”

로얀과 다크로드를 향해 고함을 지른 호위기사는 로얀과 다크로드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꾸민 짓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백마 위에서 사방에서 자신들을 조여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바라보던 귀족 청년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 너희들부터 죽여주마. 모두 이놈들을 사살하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음성에 따라 기사와 병사들이 로얀과 다크로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사방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 또한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게 된 다크로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로얀의 주위를 맴돌았고 로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다크로드는 로얀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 올렸다. 주인의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 인간들만이라면 몰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과 싸우는 것은 위험했다.

다크로드를 진정으로 두렵게 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로얀이 폭주하여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와아아......!”

자신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병사들을 본 로얀은 검집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춰 세웠다.

마치 머릿속에서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는 멈춰 세웠던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다크 미스트.”

츄아아악.

그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와도 같은 자욱한 기류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러자 그 주위에 검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더군다나 거기에 마을을 태우고 있는 불길이 내뿜는 연기가 더해져 그 효과는 배로 늘어났다.

다크 미스트는 시야를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둠의 정령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마나를 천천히 빨아들이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아주 미약한 양이긴 했지만 말이다.

다크로드는 내심 안심하며 로얀에게로 다가갔다.

“이 기회에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로얀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한번 싸워볼 만했겠지만 지금 그의 몸 상태는 무척이나 나빴다.

“그럴 수... 없을 것 같군.”

스르릉!

촤아아!

촤촤착!

로얀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다크리온을 뽑아냄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그림자를 갈라놓았다.

다크로드 역시 자신의 뒤쪽에서 덮쳐오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 감겨 있던 붉은 천이 채찍처럼 늘어나 상대를 찢어놓았다.

촤르륵.

눈앞에 드러난 그 그림자의 정체!

“모래?”

로얀의 말대로 그와 다크로드가 부순 그림자는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림자 속에서 마나석의 기운을 느낀 그들이 그것을 부숴버렸기 때문에 모래인간은 다시 재생되지 않은 것이다. 로얀과 다크로드 둘 다 키메라와 싸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상대를 파악하고 그의 약점을 부순 것이다.

모래인간은 로얀이 사막에 와서 처음 만났던 샌드맨과는 전혀 달랐다. 모래로 된 갑주까지 차려 입은 모래인간은 정말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누군가 마법을 사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크로드는 로얀의 의문을 풀어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들 모래인간은 몬스터가 아니라 골렘처럼 마나석으로 인해 움직이는 존재들이었지만 골렘처럼 커다란 마나석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급의, 아주 조그마한 마나석으로도 움직였기 때문에 대량으로 제조가 가능했던 것이다.

모래인간이 안개 속에서도 로얀과 다크로드를 찾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원래 눈이 없는 대신 생명체에 흐르는 미세한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근처에 이들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크아아악!”

안개 속에서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도 모래인간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모래로 된 검에 피를 뿌리고 있었다.

로얀과 다크로드에게는 이 검은 안개가 도움이 되었지만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지옥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그 안개 때문에 저들은 대항 한번 못 해보고 도륙당하고 있었으니까.

파팟.

콰가가각!

로얀은 다른 인간들의 상황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조이는 두통은 싸움이 시작되자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모래인간들 때문에 로얀과 다크로드는 서로 떨어져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그들의 주위로 모랫바람이 휘날렸다.

파하학!

로얀이 휘두르는 마검 다크리온이 그 모랫바람을 뚫고 자그마한 마나석을 부숴버렸자 모래인간은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촤촤촤아!

다크로드의 몸이 살짝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허공에서 춤췄다. 그러자 붉은 천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모래인간 사이사이를 누볐다.

다크로드가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는, 어둠의 상급 정령에게는 기본적인 공격방법이었다.

후두둑!

다크로드는 모래인간들을 쉽게쉽게 부숴버렸다. 그건 로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콰가가각!

우선 소리부터가 달랐다.

로얀은 오러 블레이드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모래인간들을 금빛 오러를 휘날리며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때문에 마나석을 맞추든 안 맞추든 모래인간은 로얀의 검에 닿기만 하면 사라져 버렸다.

“으득!”

로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몸 속에서 피가 꾸역꾸역 솟아올라 오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 안에서 진한 혈향을 느끼며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본 다크리온은 더욱 빨리 움직였다. 이윽고 그 주위에 있는 모래인간이 모두 터져 나가자 그는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마스터!”

스윽.

“.......”

로얀은 다크로드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마을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모래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크기의 뭔가가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서히 드러나는 모습!

거대한 여덟 개의 발과 몸은 도마뱀 같았지만 얼굴과 목은 기다란 뱀 같았다. 그리고 몬스터 주제에 머리에 달고 있는 왕관 같은 무언가.......

그 모습을 본 다크로드가 나직이 음성을 흘렸다.

“바질... 리스크.”

인형이라 할 수 있는 모래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상당한 지능을 갖춘 상급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바질리스크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며 로얀은 쭉 찢어진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다크로드, 저놈은 내가 맡겠다. 뒤를 부탁하겠다.”

“하, 하지만!”

“명령이다.”

스릉.

로얀은 딱 잘라 말하고는 에리오네를 뽑았다. 그러자 에리오네는 모습을 드러낸 것과 동시에 황금빛을 뿌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힘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힘을 모래인간에게 쓰는 것보다는 상급 몬스터인 바질리스크에게 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크로드는 바질리스크와 대치하고 있는 자신의 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또 모래인간들이 달려 들어와 그와의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쭈르륵.

다크로드의 팔에 감겨 있던 붉은 천이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팔을 타고 흘러내린 그 붉은 천이 그의 두 손에서 서서히 어떠한 형체를 갖춰갔다.

“블러드 소드.”

그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액체로 변했던 천이 형체를 완전히 갖추었다. 심하게 휘어진, 핏빛으로 번뜩이는 두 자루의 시미터였다.

날카로운 그것을 양손에 든 채 모래인간들을 노려보는 다크로드의 몸에서는 검은 기류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들을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로얀에게 가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지금 자신의 왕은 검을 든 어린아이와 같이 위험한 상태였던 것이다.

* * *

저 위에서 로얀을 내려다보는 쭉 찢어진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사막에서만 서식하는, 정말 희귀한 몬스터인 바질리스크의 눈이었다.

“네가 다크로얀이라는 인간이냐?”

놀랍게도 바질리스크는 대륙공용어인 인간의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었다. 지능까지 갖춘 상급의 몬스터다웠다.

“날 알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시킨 것인가?”

“맞다니 다행이군.”

바질리스크는 로얀의 물음을 무시하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쿠쿠쿠......!

쉐에엑!

곧 이어 지축을 뒤흔들며 그 거대한 여덟 개의 발을 움직이던 바질리스크의 뱀 머리가 로얀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 들어왔다.

콰가강......!

그러나 로얀이 잽싸게 몸을 움직여 피하는 바람에 바질리스크는 머리를 맨바닥에 처박았다.

쉬쉬쉬!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천천히 감겨 올라가자 그의 얼굴이 하늘로 치솟으며 햇살에 비늘이 반짝였다.

순간, 옆으로 몸을 날렸던 로얀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양손에 들려 있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금빛을 뿌리며 바람을 갈랐다.

“죽음의 반월!”

콰가가강!

바질리스크의 공격이 지축을 뒤흔들었다면 로얀의 공격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바질리스크의 비늘이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마나 소드를 견딜 수는 없었다. 그런데 로얀은 지금 마나 소드보다 한 단계 위인 금빛 오러를 사용하고 있었다.

쿠쿠쿵!

자신의 단단한 비늘을 믿고 버티려던 바질리스크는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만든 금빛 반월의 오러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땅을 뒤집으며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푸화화확!

쿠쿵!

육중한 몸을 굴려 피했다고는 하지만 수십여 개에 달하는 반월의 오러를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바질리스크는 여덟 개의 다리 중 뒤쪽 다리 하나를 잃고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키에엑!”

고통에 찬 음성은 보통 몬스터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질리스크가 괴로워할 때 로얀 역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너무도 과도한 힘이 몸을 갉아먹는다고나 할까? 로얀이 금빛 오러를 사용하여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의 몸 속에 있는 거대한 힘이 들끓었고, 그것이 그의 육체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와라!”

입 속에서 살짝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느끼며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꽉 움켜쥐었다.

“크륵!”

바질리스크는 명색이 사막의 왕이라는 자신이 바닥을 굴렀다는 것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바닥으로 구르게 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무의식적으로 바질리스크는 그 종족의 특기를 사용하려 했다. 바로 그의 눈으로 상대를 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스르륵.

그의 쭉 찢어진 눈 속에 있는 눈알이 회색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바로 그때!

[너는 혹시라도 그 인간이 길을 찾지 못할 것을 염려해 보내는 안내자일 뿐이다. 그러니 안내자로서의 임무만을 충실히 이행해라!]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음성이 있었다.

드래곤 피어와 함께 쏟아져 나왔던 그 말은 비수가 되어 바질리스크의 가슴을 후벼팠다. 지난번 드래곤이 자신에게 한 말이 지금 떠오른 것이었다.

자신의 잠을 깨운 존재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아무리 같은 도마뱀(?) 과라 해도 그의 눈앞에 있던 세 개의 그림자는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 무려 세 마리나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이유는 말해 주지 않은 채 그에게 모래인간들과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로얀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렇게 로얀을 습격한 것이었다.

스륵.

회색빛이 눈알 속에서 사라지고 이제 날카로운 노란색 눈동자가 다시 로얀을 노려보았다.

쩌억.

커다란 그의 입이 벌어지자 날카로운 이빨이 초록색 액체를 뚝뚝 흘렸다.

치이익!

입 안에서 흘러나온 초록색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하얀 연기와 함께 모래가 녹아들었다. 바질리스크의 또 다른 특기인 독이었다.

‘저런 괴물 같은 인간이라면 이 정도 독 때문에 죽지는 않겠지?’

혼자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 바질리스크는 목을 살짝 뒤로 젖힌 후 앞으로 내뻗었다.

푸화확!

그 순간, 그의 입 속에서 초록색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쉐도우.”

스르륵.

독이 몸에 닿기 전에 로얀은 쉐도우를 사용해 근처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치지지직!

독에서 뿜어져 나온 자욱한 연기가 로얀이 사용했던 다크 미스트와 불길 속에서 흘러나오는 연기와 합쳐져 진한 장막을 쳤다.

스르륵.

쿠쿠쿵!

“......?”

그림자 속에서 밖으로 나온 로얀은 저 멀리 도망치는 바질리스크를 볼 수 있었다.

상급 몬스터가 독을 뿜고 갑자기 도망친다? 로얀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질리스크는 어딘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를 가로막는 나무들은 힘없이 부러졌고 건물은 부서져 내렸다.

또한 바질리스크는 가다가 멈춰 로얀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가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무슨 속셈이지?’

숨는다기보다는 마을의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바질리스크의 모습에 로얀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지이잉.

로얀이 잠깐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이 떨려왔다.

‘검들도 금빛 오러의 힘을 느끼는 것일까?’

로얀은 두 검을 다시 꽉 쥐며 몸을 날렸다.

팟!

이왕 힘을 쓰기 시작한 거 지금 바질리스크를 끝장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스터!”

멀리서 모래인간들을 상대하며 그 모습을 바라본 다크로드가 급히 외쳤다. 하지만 골든 마스터인 로얀은 다크로드도 겨우 형체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빨라 그때 이미 그는 바질리스크를 쫓아 사라지고 없었다.

“사신의 춤!”

스가가각......!

촤르륵!

다크로드의 양손에 들려 있는, 보통의 시미터보다 더 휘어진 붉은색 도가 번뜩이며 모래인간들 사이를 누볐다. 그리고 아주 정확히 모래인간의 몸 속에 있는 작은 마나석을 부숴버렸다.

촤르륵.

모래로 흩어지는 모래인간들을 보며 다크로드는 로얀의 뒤를 쫓으려 했다.

터벅터벅!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

어느새 모래인간들이 그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의 왕에게 무례를 범했던 어린 인간의 것이었다. 그는 용케 여태까지 살아남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스거걱!

촤르륵.

다크로드는 인간의 외침에 신경을 끄고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한데 그의 이런 태도가 그 귀족 청년을 살아나게 했다. 그가 모래인간을 모조리 처리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아!”

또 하나의 모래인간을 베어 넘긴 다크로드에게 귀족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콰당!

그리고 모래인간이 소멸한 자리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있는 귀족 청년이 튀어나왔다.

바닥을 구르며 다크로드에게로 온 그는 다크로드의 다리를 붙잡으며 외쳤다.

“제발 살려줘, 제발! 으흐흑!”

애처롭게 우는 그였지만 다크로드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예의 그 붉은 도가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꺼져라.”

“으흐흑......?”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죽는다. 꺼져라.”

“으아아......!”

다크로드의 스산한 음성에 귀족 청년은 모래인간이 없는 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스윽.

특수한 가죽으로 만든 듯한 검은 투구를 쓰고 있는 다크로드. 그의 회색빛 두 눈이 검은 흑막 속에서 스산하게 빛났다.

지금 그는 모래인간들 틈 사이로 보이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인간들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귀족 청년이 데리고 온 인간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고, 다크로드의 발끝에도 와 닿았다.

스윽.

다크로드는 무릎을 굽혀 오른손에 들려 있는 블러드 소드를 그쪽으로 옮겼다.

푹.

그리고 붉은 피로 축축해진 땅에 그것을 꽂았다.

쿵쿵!

그런 다크로드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모래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다시 다크로드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순간, 붉은 피를 내려다보는 다크로드의 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블러드 보그.”

츠츠츠!

블러드 소드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떨리는가 싶더니 그 파동이 붉은 피로 전해졌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땅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있는 다른 웅덩이의 피도 함께 출렁거렸다.

다크로드가 최상급 정령이 되면서 생긴 또 다른 기술이었다. 피의 늪이라는 이름대로 피가 있어야 사용 가능한 기술로, 붉은 피가 시전자의 주위로 모여들어 죽음의 늪을 생성하는 것이었다.

츄아악......!

마을 여기저기에 고여 있던 붉은 피가 땅 속 깊이 박힌 다크로드의 블러드 소드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물에 약한 모래인간들은 붉은 피가 모여들어 발을 적시자 발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츄아악!

그렇게 모여든 붉은 피가 다크로드를 중심으로 커다란 호수를 형성시켰다. 그리고.......

촤르륵......!

붉은 피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불쑥불쑥 솟아올라 모래인간을 덮쳤다.

콰드득!

스산한 소리를 내며 모래인간을 덮친 붉은 피가 그들의 육신을 조이며 부수기 시작했다.

굳이 마나석을 노릴 필요도 없었다. 붉은 피가 그들 모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자 마나석은 자연히 부서져 내렸던 것이다.

모래인간을 가루로 만든 붉은 피는 그들의 시체(?)를 끌고 땅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다크로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의 시체도 모래인간의 시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귀족 청년만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멀리서 그런 다크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블러드 포그의 단점은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 바로 앞에서 붉은 피의 호수가 멈춰 더 이상 퍼지지 않았기에 그 청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윽.

다크로드에게 있어 인간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청년을 내버려두고 로얀이 사라진 방향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귀족 청년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 이윽고 하얀 거품을 물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다크로드가 블러드 보그라는 기술로 모래인간을 멋지게 전멸시키는 동안 로얀은 바질리스크와 대면하고 있었다.

바질리스크는 발이 많아서인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로얀의 움직임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곧 바질리스크를 앞질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앞지르기 전에 바질리스크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바질리스크와 로얀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반구형으로 움푹 파여 있는 곳으로 푸른 물줄기가 여기저기 흐르고 곳곳에 물이 고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마을의 중심인 오아시스인 듯했다.

하나 마을의 젖줄인 오아시스는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누군가 임의로 물을 없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아마 드래곤을 등에 업은 눈앞의 바질리스크일 것이다.

이 오아시스는 지도에 따르면 드림 스톤이 있는 던전으로 가는 입구가 되는 곳이었다.

“나를 일부러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인가?”

어떤 묘한 힘이 담긴 로얀의 음성이 바질리스크에게로 전해졌다.

“크크크... 나의 다리를 자른 널 드디어 죽일 수 있겠군.”

긴 혀를 날름거리며 웃음을 흘린 바질리스크는 이윽고 입을 살짝 벌렸다. 덕분에 독이 가득한 그의 입 안이 언뜻 들여다보였는데, 뜻밖에도 그 안에는 작은 구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바질리스크의 극독에도 녹지 않는 물건이 있다니!

신기한 빛을 뿌리고 있는 그 구슬들은 각각 푸른빛과 흑빛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중 칙칙한 검은 구슬의 빛깔이 더욱 묘하고 신기했다.

그 검은 구슬은 바로 마정석이라는 것으로 마기를 품고 있어 흑마법사들에게는 마나석보다도 더 귀한 보물 취급을 받았다. 한데 그 빛깔로 보아 바질리스크가 들고 있는 마정석은 최상급의 물품이었다.

입 안에서 구슬을 굴리던 바질리스크가 두 개의 구슬 중 바로 그 검은 구슬을 커다란 뱀의 그것처럼 생긴 혀를 이용해 밖으로 내뱉었다.

쉬르륵.

지이잉......!

바닥으로 떨어진 구슬이 부르르 떨리며 강한 마기를 뿜었다. 그리고 움푹 파여 있는 오아시스의 바닥에 기묘한 그림과 고대어가 빛을 내며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강한 빛이 폭사하는 그 순간, 로얀은 갑자기 몸을 돌려 달려나가는 바질리스크를 볼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던지 그는 벌써 오아시스를 벗어나 위에서 로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정석을 주었던 드래곤이 그렇게 하라고 바질리스크에게 미리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엇이 있고,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그도 알지 못했지만 저 빌어먹을 인간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드래곤의 말이 있었기에 바질리스크는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드래곤이 최상급 마정석까지 주면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찰박.

로얀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무시하고 바질리스크를 올려다보며 여유있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기이잉!

“음?”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부서질 듯 요란하게 떨던 검은 구슬이 오아시스의 바닥으로 들어가자 오아시스가 요동쳤고 기이한 빛이 바닥에서 솟아 나와 로얀의 발을 묶은 것이다.

마기를 풀풀 날리는 마정석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던전을 깨운 것이다.

“크크크.......”

로얀은 멀리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흘리는 바질리스크를 보고 입을 악물었다.

‘어차피 저기 들어가면 죽을 거라 했으니 여기서 돌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바질리스크는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린 후 로얀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드래곤 이상의 높은 존재가 아니라면 그 어떠한 존재라도 돌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그의 가장 강한 무기가 발동한 것이다.

회복력이 뛰어나 다리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사막의 왕이라 불리는 자신을 바닥에 구르게 한 인간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꽈악.

“......!”

로얀 또한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더욱 거세게 움켜쥐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로얀은 돌이 되지 않아 오히려 바질리스크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스르륵.

우우웅!

로얀의 몸은 강한 빛과 함께 땅 속으로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로얀은 바질리스크만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던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이건 보통의 던전이 아니었다. 과거 몽마의 수장이 발록의 수장을 가두기 위해 만든 함정이었다.

발록의 수장인 파라무트조차 빠져나오지 못한 던전을 그가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드래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얀은 이 던전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어차피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질리스크를 직시했다. 그는 던전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그를 해치우고 싶었던 것이다.

“소울 바운드.”

그러자 로얀의 그림자에서 검은색 무언가가 떨어져 나와 바질리스크를 향해 돌진하더니 이윽고 그의 그림자와 합쳐졌다.

온 힘을 다한다면 몇 초간은 바질리스크를 조종할 수 있을 테니 그 스스로 죽게 만들 생각이었다. 독으로 가득한 바질리스크의 이빨이 그의 살에 박힌다면 바질리스크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크르륵?”

바질리스크는 자신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이윽고 그의 긴 목이 다리로 향하는가 싶더니 입이 쩌억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익.

주르륵 흘러내리는 초록색 액체가 대지를 녹였다. 그 모습이 바질리스크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설마 자신의 최후가 자살이라니!

죽음을 예감하며 생을 포기하던 바질리스크는 다리 바로 앞에서 자신의 얼굴이 멈추자 로얀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츄아아악!

빛이 오아시스를 가득 메울 정도로 더욱 강해졌고 로얀은 목까지 잠겨 있었다. 그리고 곧 얼굴마저 서서히 사라져갔다.

슈우우욱!

로얀이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직후 오아시스의 바닥에서 빛나던 고대어와 기이한 문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예전의 평범한 모습을 되찾았다. 비록 물은 여전히 말라 있었지만 말이다.

바질리스크는 웃음을 흘렸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에 대한 안도감과 함께 사라져 버린 로얀에 대한 비웃음도 함께 담겨 있는 웃음이었다.

“크크크, 크하하! 저런 바보 같은.......”

퍼엉!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입 속에 있던 푸른 구슬이 폭발해 머리가 처참하게 터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 구슬은 모래인간을 조종하는 마법구로서 모래인간이 모두 죽으면 터지게 되어 있었다.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가 퍼밀리어를 사용했을 때, 그 퍼밀리어가 죽으면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가 상처를 입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단지 그 대상이 푸른색 구슬이라는 것과 그것이 폭발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폭발하는 순간은 다크로드가 블러드 보그를 사용해 모래인간을 전멸시킨 순간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