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룬을 향해
룬을 향해
드래곤 산맥은 중간계에서 최강의 생명체로 군림하고 있는 드래곤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강한 힘을 지녔으며 포악한 성질을 지닌 드래곤이 모여 사는 곳답게 이곳에는 인간의 마을도, 엘프나 드워프의 마을도 존재 하지 않았다.
산맥의 여기저기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었고 산맥의 곳곳엔 강한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몬스터와 드래곤만 사는 드래곤 산맥은 태초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칸 대륙의 모든 드래곤의 레어가 드래곤 산맥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다수의 드래곤이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룬이 드래곤 산맥에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드래곤 산맥이 칸 대륙을 크게 둘로 나누는 선이 되기 때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모든 대륙과 이어져 있으며 중간계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드래곤 산맥이기에 드래곤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또한 드래곤 산맥은 자원이 풍부했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드래곤 산맥을 찾는 이들은 전무하다 할 수 있었기에 드래곤 산맥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에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며 막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대한 산맥의 정상엔 자욱한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하늘에 솟아 오른 뾰족한 산꼭대기에 뿌연 안개가 고리처럼 걸려 있었다.
언제나 드래곤 산맥은 누구도 찾지 않기에 울부짖는 몬스터들의 소리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흘러나오는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그들의 우렁찬 울부짖음만이 산맥 곳곳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화아아앗!
하지만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그 누구도 함부로 찾아오지 않는 드래곤 산맥으로 흑색 빛 덩어리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가올수록 뚜렷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괴이했다. 검은 날개를 휘날리고 있었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손에 휘감긴 붉은 천을 제외하곤 온통 흑색인 칙칙한 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등에 있는 날개만 보아선 타천사 같아 보였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마기와는 전혀 다른 따스한 정령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복장을 한 이가 있었다.
비록 망토만 다르다 할 수 있었지만 갈색의 망토를 휘날리는 유난히 눈에 띄는 이였다.
바로 로안이다.
로얀의 뒤로 보이는 검은 날개의 주인들은 어둠의 최상급 정령인 다크니스들이었다. 그리고 로얀의 바로 옆에는 다크로드가 있었다.
어둠의 정령들은 온통 검은 갑주로 가려져 있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회색 눈동자가 내는 빛은 드래곤 산맥의 중앙에 둥실 떠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바로 룬이었다.
중간계에서 유일하게 천계, 마계, 정령계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곳이자 드래곤들의 성지이며, 드래곤들의 회의장이 기도 한 곳이 바로 저 룬이라는 곳이었다.
슈아아앙!
로얀은 룬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의 뒤를 그의 등에 달려 있는 검은 날개가 빛을 뿌리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검은 빛의 가루를 뿌리며 그의 뒤를 다크니스들이 쫓았다.
검은 빛의 가루를 뿌리며 날개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수백의 다크니스들이 펼치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런 그들의 멋진 모습을 시샘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들의 등장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건 바로 드래곤 산맥의 주인인 드래곤들이었다.
드래곤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한 이들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로얀과 다크니스가 드래곤 산맥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자고로 밤에 찾아오는 손님치고 환영받는 이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넘어가더라도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로얀을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로얀이 그림자 속에 숨는다고 해도 그를 제외한 다른 정령들은 드래곤들에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기에 로얀은 처음부터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지 않은 채 룬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런 그들을 향해 드래곤 산맥에서 골드 드래곤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이는 그 세 드래곤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드래곤은 모습을 나타내진 않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드래곤들이 레어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귀찮아서다. 세 마리의 드래곤이 날아오르자 일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 신경을 끊은 탓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쿠오오오-!
날아오른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거대한 눈에서 드래곤 피어를 뿌리며 로얀과 다크니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 마리의 드래곤은 모두 같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들 거대한 덩치를 지닌 에이션트 급의 드래곤들로 찬란한 황금빛 비늘을 지닌 거대한 골드 드래곤들이었다.
그중 가운데에 있는 골드 드래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린 침입자를 맞이하는 이의 목소리치곤 이상하게도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그의 음성엔 강한 힘과 함께 거대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로얀에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로얀은 그를 보며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응시했다.
“나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난 룬으로 가겠다.”
로얀은 짧게 용건만을 말하곤 앞으로 다시 나아가려 했지만 드래곤들은 그런 그의 행동을 막았다.
피식.
주춤거리는 로얀을 바라보며 드래곤들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얀의 말 속에 등장하는 다크로얀이라는 이름에 서로의 번갈아 바라보며 뭐라 대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크로얀? 쿡쿡. 우리 동족을 죽인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인간 녀석인가?]
드래곤 산맥으로 걸어 들어온 것도 아닌 날아온 데다 정령의 기운과 괴이한 기운을 풍기는 로얀에 대한 모든 것을 그 한마디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이실리아도 페르디난드도 루시어스도 모두 당했으니까.]
[흥! 이곳은 드래곤 산맥이다. 잊었나?]
순간 걱정을 하던 두 마리의 드래곤은 들려온 드래곤의 말에 마음의 여유를 지닌 채 로얀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드래곤 산맥이었다. 수백의 드래곤들이 모여 있는 드래곤들의 성지인 것이다.
드래곤 산맥에서 드래곤과 싸운다는 것은 드래곤족 전체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들의 뒤에는 수많은 드래곤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을 마주 바라보는 드래곤들에게선 여유로움이 넘쳐 났다.
[하하하, 감히 룬으로 가갰다?]
“막으면 죽인다.”
로얀은 한시 바삐 룬을 통해 엘라임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신 때문에 엘라임이 상처를 입었고, 그 때문에 그녀가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자연히 로얀의 음성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건방진 놈!]
하지만 그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드래곤들에겐 그의 말이 한없이 건방지게 들려왔고, 그들의 분노를 더욱 가증시켰다.
[죽여주마!]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로얀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휘오오오-!
그들의 주위에서 마나가 요동쳐왔다.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답게 마법을 펼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법을 펼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이 마법을 펼치기 위해선 시동어만 외치면 시전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들에겐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촤촹!
스거거걱-!
로얀의 검은 단 몇 초도 허용하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다크니스들이 그 세 마리의 골드 드래곤들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몸을 지닌 드래곤의 몸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그들이었지만 수십 명이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자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츄아아아악!
더구나 세 마리의 드래곤들 중 그 누구도 다크니스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그들의 비행능력이 드래곤보다 월등히 뛰어난 탓이었다.
다크니스의 팔에 감겨 있던 붉은 천은 두 개의 검으로 변해 다크니스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붉은 검신을 빛내는 그들의 검은 붉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붉은 피의 주인은 거대한 드래곤들의 것이었다.
스거거걱!
쿠어어어-
다크니스는 그 단단하다는 드래곤의 비늘을 종잇장 베어내듯 가르고 있었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이곳저곳의 살을 도려내는 그들로 인해 세 마리의 드래곤은 몸부림치며 붉은 피를 쏟아내었다.
허공에 떠 있는 살아 있는 거대한 표적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쿠어어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수십 명의 다크니스가 펼치는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의 덩치가 워낙에 컸기에 그들의 검을 피할 수도 없었다.
쿠어어억-!
얼마 가지 않아 고통을 견디지 못한 한 마리의 골드 드래곤이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쿠쿠쿵!
[크아악! 이 자식들!]
바닥을 구른 탓에 자존심이 상할 때로 상한 골드 드래곤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하늘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쩍 벌렸다.
우우웅!
마나가 그의 입으로 모이는 것으로 보아 브레스를 쏘려는 듯했다.
콰지지직!
쿠어어어-!
하지만 그의 시도는 너무도 황당하게 무산되어 버렸다. 그의 거대한 몸을 뚫고 섬뜩한 뭔가가 수없이 박혀들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보려던 골드 드래곤의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검을 겨누고 있는 이는 상급 정령인 세드니스였다.
그리고 그의 몸을 뚫고 박힌 섬뜩한 무언가는 세드니스의 검이었다.
푸푹!
[크아아아!]
드래곤은 고통에 찬 음성을 토해냈지만 그건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
푸푸푹-!
단단한 비늘 탓에 검이 잘 들어가지 않았기에 세드니스들은 드래곤의 허점을 노리며 검을 박아 넣었다. 비늘처럼 단단하지 않은 눈이라든지 말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드니스에게 몸을 내준 드래곤은 고슴도치같이 변해 버렸다.
세드니스들이 드래곤의 몸 중에서 잘 박히지 않는 곳이 있다 할지라도 억지로 살을 꿰뚫고 쑤셔 넣고 있었기에 드래곤의 몸은 금세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세드니스의 검은 칼이 드래곤의 몸에 주렁주렁 박혀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세드니스는 눈을 빛내며 검을 들어 올려 그의 큼직한 금색 눈 안에 박아 넣었다.
콰직!
[크아아아악!]
비늘이 없는 드래곤의 눈 속으로 세드니스의 검이 깊이 박혀 들어가자, 골드 드래곤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푸푸푹!
골드 드래곤의 매달려 있는 자신의 검을 쥔 세드니스들이 더욱 골드 드래곤의 몸속 깊이 박아 넣었다.
세드니스의 검이 드래곤의 살을 헤집으며 더욱 깊이 박혔고, 골드 드래곤이 겪는 고통은 배가되었다.
푸욱!
[크아아아!]
그렇게 느껴져 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골드 드래곤의 움직임이 곧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온몸에 붉은 피를 철철 흘리는 그에게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화르르륵!
콰하하항!
하지만 그는 눈이 서서히 감겨지려 할 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역시나 중간계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이답게 그의 마지막 일격인 드래곤의 브레스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힘들 정도로 상처를 입었었지만, 그는 세드니스들에게 둘러싸여져 있는 자리에서 마나를 입 안 가득 끌어모으곤 드래곤의 상징인 브레스를 쏜 것이었다.
콰가가가가강-!
그가 남긴 브레스는 자신의 앞에 있던 세드니스들과 울창한 숲을 덮쳤다.
스르륵!
하지만 드래곤이 입안에 마나를 모으는 순간부터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세드니스들이었기에 브레스는 세드니스를 맞추지 못했고 죄 없는 숲만을 파괴했다.
그렇게 마지막 일격인 브레스를 쏜 드래곤은 온몸에 칼이 박힌 골드 드래곤은 죽음을 맞이했다.
피범벅이 되어 숨을 거둔 그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했다.
허나, 그의 그 마지막 일격이 아무런 효용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세 드래곤이 로얀을 맞으러 나가고 난 뒤 레어 안에서 관심을 끊은 채 웅크리고 있었던 다른 드래곤들을 깨운 것이다.
골드 드래곤이 마지막 일격으로 토해낸 브레스가 숲을 뒤엎으며 굉음을 터트리자 드래곤 산맥의 전 드래곤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레어에서 나왔다.
드래곤 산맥에서는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함부로 숲을 파괴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으로 인해 골드 드래곤이 숲을 파괴했다. 그것은 상황이 상당히 위급했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전 드래곤이 다시 관심을 갖고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쿠쿵!
골드 드래곤의 거대한 머리가 지축을 뒤흔들며 떨어져 내렸다.
[아니!]
그렇게 죽어 버린 동족을 보며 하늘에 떠 있는 두 마리의 드래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지상의 세드니스들을 처리하고자 드래곤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급히 명을 내렸다.
쿠어어어-!
삐이이익!
끼아아악!
드래곤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있어 산맥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의 명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두 드래곤의 명령은 모든 몬스터들에게 전달되었고, 곧 드래곤 산맥에 있는 각종 몬스터들이 일제히 세드니스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세드니스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은 다양했다. 하늘을 나는 비행 몬스터도 있었고 거대한 몸집의 대형몬스터들도 있었다.
우어어어-!
쿵쿵쿵!
키키킥!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며 세드니스들은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죽은 골드 드래곤에게로 다가갔다.
푸푹!
그리고는 죽은 골드 드래곤의 시체에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두꺼운 비늘을 뚫고 검을 박을 때에는 힘들었지만, 빼내는 데에는 너무도 쉬웠다.
스르륵.
그런 세드니스의 모습 주위로 모습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어둠의 중급 정령인 다크였다.
그동안 몸을 숨긴 채 따라오던 그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모습을 나타낸 어둠의 중급 정령 다크는 커다란 사신의 낫을 어깨에 짊어진 그들이 광분하는 몬스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르르륵!
쿠어어어-!
그렇게 지상에선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스가가각!
케케켁!
그러나 이를 전쟁이라 볼 수는 없었다. 정령들의 일반적인 학살이었기 때문이었다.
상급 정령인 세드니스 외에도 그들보다 배 이상의 많은 수를 지닌 어둠의 중급 정령 다크가 가담해 발휘하는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어둠의 중급 정령 다크는 모습은 작았지만 사신의 낫이라 불리는 시클을 든 모습답게 몬스터를 도륙해 나가며 사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쿠어어어-!
몬스터만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많은 드래곤들이 포효하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드래곤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들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는 더욱 차갑게 빛나며 착 가라앉았다.
스윽.
“모두 죽여주마.”
로얀은 그 말과 함께 그제서야 지금껏 뽑지 않았던 검을 뽑기 위해 허리춤에 차여져 있는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후우우웅!
로얀이 검을 뽑으려 하는 동안에 드래곤들은 일제히 브레스를 쏠 준비를 했다.
그렇게 검을 뽑아든 로얀과 세드니스들, 브레스를 쏘기 위해 준비하는 드래곤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쿠오오오-!
수백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동시에 브레스를 쓰기 위해 대기 중에 떠다니는 마나를 모으자 강한 기의 파동과 함께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그동안 얼굴에 변화를 보이지 않던 로얀도 그 광경에 긴장하며 두 개의 검을 엇갈리게 표하며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로얀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복사할 수 있었지만 저 많은 드래곤이 쏘는 브레스를 피하거나 막아야 한다는 선결과제가 우선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저 브레스의 비 속에서 살아남아야 되돌려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날아오는 브레스를 보고 바로 날릴 수도 있었지만 수백 개의 브레스를 모두 볼 수는 없다. 대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브레스의 속도는 평범한 인간의 눈으론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평범하지 못한 로얀이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로얀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많이 접해 봤기에 더욱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쿠오오오-!
로얀은 금방이라도 드래곤의 거대한 입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마나의 덩어리를 보명 긴장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크로드와 다크니스들도 긴장하며 다가올 브레스의 비에 대비했다.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과는 달리 브레스를 완전히 피할 수 없었기에 더욱 대비해야 했다. 게다가 브레스에 맞으면 그대로 소멸해 100년 후에나 다시 깨어날 수 있기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쿠오오오-!
드래곤들은 로얀과 다크니스의 태도가 브레스를 대하자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보곤 그들이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이미 터져 나오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지만 드래곤들은 느긋하게 로얀과 다크니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겁에 질려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들이 공포에 절은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레스는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했다.
그때,
[모두 멈춰라! 로드로서의 명령이다!]
바로 그때 다른 드래곤들의 음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위압감과 거대한 힘이 실린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드래곤 산맥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의 그 목소리에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멈칫해졌다.
그의 말 속에 마법의 힘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모습을 나타낸 이는 붉은 비늘을 지닌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었다.
그는 모든 드래곤의 등급 중 가능 높은 곳에 위치한 에이션트 드래곤의 평균적인 체격에 비교해도 매우 큰 덩치를 지니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그의 등장에 브레스를 쏘려던 드래곤들이 일제히 중단하며 입 안 가득 모아 두었던 마나를 다시 흩어 보내야 했다.
지상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싸움도 마법이라도 걸린 듯 중단되었다.
멈춰버린 듯한 몬스터들을 보며 어둠의 정령들은 아무 말 없이 상황 판단을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명령을 내려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하늘에 떠 있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산맥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숨소리마저 잠재운 레드 드래곤은 몸집에 걸맞는 거대한 날개를 한번 퍼득이며 말했다.
[이제 그만들 하게나. 그리고 모두 각자의 레어로 돌아가게.]
휘오오오-!
날개를 한번 퍼득였을 뿐인데, 강한 돌풍이 불며 하늘에 떠 있는 이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존재감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말에도 반박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드래곤들이었다.
이 시건방진 인간을 곧 죽일 순간에 중단시켰기에 억울한 듯했다.
[하, 하오나 로드!]
반박하는 드래곤들의 말 속에 담긴 로드라는 말. 그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바로 모든 드래곤들의 수장이자 대표인, 드래곤족에서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 로드였다.
전 드래곤을 다스리는 드래곤 로드답게 그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드래곤족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레드 일족의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족 중에서 레드 드래곤이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건 역대의 드래곤 로드 중의 거의 모두가 레드 드래곤이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저놈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로드가 직접 모습을 나타내며 명했지만 많은 드래곤들이 그의 명에 강하게 부정의 의사를 표하며 나섰다.
특히 드래곤 로드의 말에 가장 강하게 반박하는 이들은 골드 드래곤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열을 내며 나서는 이유는 이미 두 드래곤이 깊은 상처를 입었고, 한 드래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골드 드래곤의 치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 외에도 이실리아와 페르디난드, 루시어스, 카엔이 속했던 종족들이 반박해 왔다.
골드 드래곤인 페르디난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속했던 레드, 실버, 블랙 일족이 바로 그들이다.
그에 반해 나머지 화이트, 그린, 블루 일족이 멀리서 불구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드래곤들을 보며 드래곤 로드는 조용히 자신의 뜻을 전했다.
흘러나오는 그의 말은 조용히 울려 퍼지는 것이었지만 그 어떤 이의 말보다도 가슴깊이 새겨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로드의 권능을 사용하겠네.]
휘오오오.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며 반박하던 드래곤들이 모두 그의 단 한 마디에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드래곤 로드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바로 드래곤 로드의 권능이라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권능에 대해 설명하자면 먼저 드래곤 로드라는 자리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드래곤 로드라는 자리는 다른 종족이 볼 때에는 대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당사자인 드래곤들에게 있어서는 귀찮은 자리에 불과했다.
천성이 게으른 드래곤이기에 그들 중 다른 동족들을 관리하며 생을 보내고 싶은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래곤들이 단합하려면 대표자가 반드시 필요했고, 좋든 싫든 드래곤들은 억지로 한 명을 지목해 드래곤 로드의 자리에 앉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드래곤들은 하나의 법칙을 정해 놓고 드래곤 로드를 선출했는데, 그 법칙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 가장 강한 드래곤이 드래곤 로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법칙 때문에 최강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많은 드래곤들이 많은 드래곤들의 떠밀림에 드래곤 로드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고 자신의 평생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 때문인지 드래곤 로드가 되지 않으려고 잠적한 드래곤도 많았다.
잠적했던 드래곤을 다른 모든 드래곤이 앞장서 찾았기에 탈출을 시도했던 대다수의 드래곤이 잡혀와 드래곤 로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전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혼자서 전 드래곤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자신의 힘을 숨기는 이도 있었고, 필사의 탈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의 힘을 숨기는 이는 드래곤들이 힘을 모아 만든 힘을 측정하는 아티팩트로 인해 밝혀졌지만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던 이들 중엔 정말로 종족을 완전히 감춰버린 드래곤도 있었다.
레드 일족이 아닌 다른 일족이 드래곤 로드가 되었을 때가 바로 한 드래곤이 로드의 자리를 피해서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고, 성공했던 때였다.
그렇게 모든 드래곤이 싫어하는 드래곤 로드의 자리이기에 각 드래곤 족의 대표가 모두 모여 회의한 끝에 드래곤 로드에게 한 가지 권한을 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든 드래곤들을 위해 일생을 희생하는 대신 주어지는 특권인 셈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권능은 로드의 일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드래곤 로드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전 드래곤족은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죽음을 명한다거나, 드래곤 하트를 달라고 하는 등 너무도 터무니없거나, 말도 안 되는 부탁은 제외되지만 말이다.
드래곤 로드의 말에 하늘을 날고 있던 드래곤은 큰 충격을 받았다.
[......!]
[어, 어째서!]
[그럼 됐겠지?]
단 한 번뿐인 권능을 로드가 여기서 사용하자 많은 드래곤들이 강한 의문을 표했지만 드래곤 로드는 느긋하게 로얀을 향해 말했다.
[거기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날 따라와 주게.]
그렇게 말한 드래곤 로드는 눈앞에 보이는 룬을 향해 날아갔다. 그 뒤를 로얀과 다크니스가 뒤따랐고 지상의 세드니스와 다크는 다시 몸을 숨겼다.
그들의 앞을 드래곤들은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 로드가 자신의 평생을 담보로 받은 권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드래곤들이 자신들을 지나쳐 룬을 향해 날아가는 로얀과 다크니스에게 강한 살기를 풀풀 풍겼지만 그들의 앞을 막지는 않았다.
비록 드래곤 로드가 로얀을 데리고 가려는 방향에 그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룬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드래곤들은 살기를 풀풀 날리며 조용히 이를 갈 뿐 이를 저지하거나 달려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분노한 드래곤들이 만들어내는 드래곤 피어의 길을 지나 로얀과 다크니스는 룬을 향해 날아갔고, 룬의 땅 위에 발을 내딛었다.
* * *
로얀이 드래곤 로드로 인해 룬으로 쉽게 들어갈 때, 레아는 다른 방법을 통해 룬으로 가기 위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로얀을 따라가고 싶었고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작은 날개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를 내며 그는 룬을 향해 날아갔다.
검게 죽은 하늘을 열심히 날아 레아가 도착한 곳은 푸른 숲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었다.
이곳은 빛의 숲으로 레아의 고향이자 그녀가 사는 곳이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여기까지 와서 찾는 그 누군가는 바로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였다.
그라시드는 드래곤 로드에게 있어 비서 같은 존재로서 그의 옆에서 많은 것을 도와주고 있는 인물이었다.
특이한 성격만 뺀다면 지혜의 드래곤이라는 골드 드래곤보다 더 지혜로운 이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의 특이한 성격이란 너무도 낙천적인 성격을 말했다. 오죽하면 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또 다른 아름다움이라 말했고, 지금의 하늘을 그림에 담겠다며 외쳐댔겠는가.
그는 숲을 사랑하는 그린 드래곤이라 그런지 초록의 풀과 아름다운 꽃을 가꾸는 곳을 좋아했다.
그가 인간들의 세계에서 따지자면 드래곤 로드의 비서였지만 항상 드래곤 로드 곁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도 자유분방한 특성을 지닌 드래곤이었고, 그에게도 쉴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드래곤 로드와 다를 바가 없는 일생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빛의 숲의 아름다움에 반한 그라시드는 오래 전부터 이곳으로 이사 와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드래곤 산맥에 사는 드래곤들처럼 레어를 만들어놓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빛의 숲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았고, 이를 절대로 망가뜨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는 오두막을 손수 짓고 엘프로 폴리모프를 했다. 이 아름다운 숲에 동화되어 조용히 은거를 하듯 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엘프들과 페어리들은 그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었다.
아니, 그가 직접 빛의 숲에 사는 이들을 찾아가 새로 이사 왔다며 자신을 소개했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었다.
누가 드래곤이 이사왔다는데, 그것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엘프들과 페어리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 간에 교류가 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엘프를 포함한 빛의 숲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저 멀리서 힐끔거리며 그라시드를 지켜볼 뿐 직접적으로는 다가가질 못했다.
너무도 당연했다. 그들 모두가 드래곤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간과 그라시드의 태도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를 무서워하는 분위기였고, 그에게 다가갈 염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지금은 빛의 숲에 사는 모든 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그라시드를 찾아갈 정도로 빛의 숲에 사는 이들은 그라시드를 믿었고 그를 따랐다.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은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는 빛의 숲에 정착을 하게 되었고, 그곳의 주민이 되었다.
자연히 이곳에 사는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와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에 거쳐 만들어진 인연으로 두 사람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레아도 처음에는 그라시드를 어려워하고 멀리했었지만 그의 너무도 괴이한 성격과 특이한 취미생활에 호기심을 보였고, 이내 오랜 세월을 함께 나눈 친구처럼 친해지게 되었다.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온 레아는 한참을 풀밭을 거닐었다. 그라시드의 행동범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오두막집이 있는 위치를 레아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집안에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항상 빛의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그였다.
때문에 레아는 풀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페어리들에게 명령을 찾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빛의 숲의 크기가 어마어마했기에 작은 어린 소녀의 몸을 지닌 레아로서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웠다.
그녀의 등에 작은 날개가 있었지만 그 날개를 퍼득이며 빛의 숲 전체를 뒤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그라시드는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빛의 숲의 동굴 속에 들어가기도 했기에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물속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다며 물속에도 들어가는 그라시드였다.
바스락 바스락.
“그라시드!”
레아는 힘차게 외치며 초록 풀들을 해치고 나아갔다. 두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댄 채 사방을 둘러보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외침소리는 숲속으로 울려 퍼졌다.
다른 페어리들도 그라시드를 찾기 위해 빛의 숲속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레아의 목이 쉬어 소리를 지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녀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바스락 바스락.
풀숲을 헤치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레아는 풀이 우거져 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라시드?”
“하하하, 페어리족의 여왕님께서 어째서 여기에 왔는지요?”
레아가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꺼낸 말에 대답을 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레아를 향해 다가왔다.
바스락 바스락.
이윽고 풀숲을 헤치며 누군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초록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가 바로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였다.
그라시드는 로얀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빛의 정령 때문에 그를 찾으러 나왔다가 로얀과 엘라임과 마주쳤었다.
단지 스쳐 지나갔던 인연이었지만 로얀과는 한번 만남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레아를 바라보는 그라시드의 초록색 에메랄드 같은 그의 눈동자는 반가움 반 장난기 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초록색 엘프들이 즐겨 있는 옷을 입고 있었고, 두 손에는 갖가지 도구가 들려져 있었다. 모두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들이었다.
레아는 그라시드의 장난기 어린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다짜고짜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예?”
그라시드는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순간 당황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레아는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진지하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날 드래곤 산맥의 룬으로 보내주세요.”
“루, 룬이요?”
그라시드는 대뜸 레아가 룬으로 보내달라고 하자 더욱 당황해야만 했다.
아무리 그가 낙천적인 성격에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특이한 드래곤이었지만 레아의 룬으로 보내달라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룬은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곳이 아니다. 드래곤들이 모여 회의 하는 곳이자 다른 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곳이다.
어떠한 드래곤에게든 다른 이들이 룬을 통해 다른 계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건 태초의 약속으로써 드래곤들에게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가 당황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는 너무도 진지한 레아의 얼굴을 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흘리며 말을 돌리려 말을 이었다.
“그런 돌덩어리에 가서 뭐 합니까. 차라리 제가 요 며칠 전에 발견한 장소로 가시죠. 정말 기막힌 풍경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써.......”
말을 잇던 그라시드는 레아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는 것을 발견하곤 말끝을 흐렸다.
“정말 꼭 가야겠습니까?”
오랜 친구였기에 그라시드는 드래곤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응! 세상의 멸망이 걸려 있는 문제라니까!”
세상이 멸망하는 것과 레아가 정령계로 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었지만 레아는 당당히 말한 것이다.
“이 검은 하늘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응! 이제 곧 정령왕들의 봉인이 풀리는데 내가 정령계로 가봐야겠어.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거든.”
그녀가 그렇게 정령계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로얀과 관계가 깊었다.
그날 로얀이 모르딘을 떠날 때 레아는 그의 등을 보며 왠지 모를 불길함에 휩싸였었다. 기분 탓이라 생각했지만 계속 그의 뒷모습이 눈에 밟히자 즉시 빛의 숲으로 온 것이었다.
정령계로 가 정령왕들의 봉인이 풀렸을 때에 그들에게 로얀에 대한 것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봉인을 푼 로얀을 마계와 천계에서 가만히 둘 리가 없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를 구출해야 했고, 그러려면 봉인이 풀린 정령왕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날 로얀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 후회가 되기까지 한 그녀였다.
그라시드는 레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아는 그의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숲의 이웃이었다.
“후~. 일단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만, 로드께서 반대하시면 다른 계로 가는 게이트를 탈 수 없을 것입니다.”
“걱정 마. 드래곤 로드께선 날 정령계로 보내 주실 거야.”
레아는 방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에효~. 알겠어요. 일단 가보도록 하죠.”
그라시드는 한숨을 한차례 더 쉬곤 몸을 움직였다.
먼저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도구를 자신의 집으로 돌려보냈고 레아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화아아앗!
그리고 그의 손에서 새어 나온 푸른빛은 레아와 그라시드를 감쌌다.
그렇게 푸른빛에 감싸인 레아와 그라시드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레아가 룬으로 오기 위해 그라시드를 찾고 있을 때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이 드래곤 로드를 따라 룬에 도착했다.
룬은 의외로 단순했고, 너무도 썰렁했다. 거대한 탁자와 수십 개의 의자만이 덩그러니 룬의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룬은 거대한 돌덩어리 같은 모양을 지닌 것답게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삭막한 땅이었다. 말 그대로 떠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인 것이다.
중앙에 있는 의자가 로드의 자리로 보였고, 그 자리의 뒤편엔 거대한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탁자의 양 옆에도 거대한 문이 보였다.
로드의 자리를 기준으로 뒤에 있는 문은 초록색의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는 게이트였고, 오른쪽에 있는 문은 이글거리는 붉은 화염이 넘실거리는 게이트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왼쪽 편에 있는 것은 새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게이트였다.
화아아앗!
룬으로 도착한 드래곤 로드는 폴리모프를 하여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변화시킨 드래곤 로드의 모습은 레드 드래곤답게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인간 남자였다.
드래곤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폴리모프했을 때의 모습이 늙은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이 펼치는 폴리모프는 그들이 원하는 연령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종족까지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폴리모프 할 수 있는 것은 중간계에 존재하는 존재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는 폴리모프를 할 수 없다.
붉은 눈동자의 중년 남자가 된 그는 로얀과 다크니스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이곳에 온 건 네 명의 정령왕에게 걸린 봉인을 풀고 싶은 것이겠지?”
“......!!”
스윽.
로드의 말에 로얀은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하하. 걱정 말게. 난 자네의 앞을 막으려는 게 아냐.”
로드는 로얀의 손이 검집으로 향하며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보곤 호통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이실리아를 오래전부터 감시해 왔다네. 그리고 그 와중에 자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지.”
말을 하던 드래곤 로드는 긴 회상에 잠겼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보아오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한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이실리아를 감시하던 중 드래곤 로드는 로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와 이실리아의 관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실리아와 드래곤들을 어떻게 죽였는지에 관한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들의 유희였고, 그들이 자초한 일이었기에 나서지 않고 놔두었었다.
무엇보다도 그 와중에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드래곤 로드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리 로얀의 정체를, 그의 힘을 끝까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로얀이 네 마리의 드래곤을 죽이는 것을 보곤 그가 스스로 칭한 것처럼 혼돈의 정령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로얀은 너무나 큰 호의를 베푸는 드래곤 로드를 보며 강한 의문을 표했다.
드래곤 로드의 권능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적지 않은 희생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드래곤 로드의 너무 과한 호의에 로얀은 그를 경계했다.
“왜 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지?”
로얀의 물음에 드래곤 로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칸 대륙에 사는 이상 이 차원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다른 드래곤들은 어째서 날 막은 거지?”
로얀은 의문을 표하자 드래곤 로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다른 드래곤들은 자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
“부정?”
“하하하. 그들도 자네가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드래곤 로드는 말끝을 흐리며 말을 이어 설명했다.
다른 드래곤들 또한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중간계에서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들의 속마음이었다.
드래곤들은 로얀의 존재를 부정했고, 그들은 로얀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만약 드래곤 로드가 로얀이 이곳으로 찾아 올 테니 얌전히 자신에게로 보내라고 말했다면 그들이 들어주었을까?
“게다가 우리 드래곤들의 모든 힘을 합친다고 해도 마계와 천계의 전쟁을 말릴 수가 없어. 기껏해야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지.”
“.......”
“헌데, 자네가 그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서 드래곤들이 들을까? 난 우리 드래곤들을 아주 잘 알고 있지.”
“만약! 자네가 정말로 정령왕들의 봉인을 푼다면 모든 드래곤들이 자네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야.”
드래곤 로드의 말이 쭈욱 이어지는 와중에도 로얀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듣기만 했다.
“하하하. 드래곤 로드라는 호칭은 이렇듯 이름만 거창할 뿐이지 실속은 없다네. 뭐, 어쨌거나 이렇게 만났으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나.”
“.......”
로드는 로얀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 하자 웃으며 정령계로 가는 게이트 앞까지 걸어갔다.
드래곤 로드는 로얀이 생각에 잠겨 있든 말든 게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령왕들은 마계, 천계, 정령계가 모두 만나는 곳에 있네. 그리고 그 봉인을 풀려면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를 지닌 이들을 죽여야 해.”
로얀은 드래곤 로드의 설명 속에 있는 빛의 무구라는 말에 오래전 만났던 이들을 떠올렸다.
빛의 성지에서 만난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와 천사 아델레이트가 생각난 것이다.
그들은 천계의 명을 받고 빛의 무구라는 것을 찾으러 왔다고 했었다.
로얀은 그들이 찾은 빛의 무구를 본 적이 있었다. 백색 팔찌 모양의 그것은 강한 신성력을 뿜어냈고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이는 기이한 물건이었다.
또한 로얀은 그 물건을 사용하는 천사 아델레이트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었다.
로얀은 과거의 생각을 접고 로드를 향해 물었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당연히 빛의 무구를 지닌 이는 천계에 있고 어둠의 무구를 지닌 이는 마계에 있지. 아! 마계와 천계에 가면 가장 높은 건물이 보일 게야. 기다란 탑인데, 그 정상에 있네. 그곳에서 무구를 사용해 정령왕들을 봉인하고 있지. 그 봉인은 그 무구를 지닌 이의 피와 연결 되 있기에 반드시 죽여야 하네.”
“.......”
로드의 말에 로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디를 먼저 가겠나.”
“천계로 먼저 가지.”
로얀은 한번 대한 적이 있는 빛의 무구가 상대하기 더욱 쉬울 것이라 판단하고 천계로 가는 것을 택했다.
스윽.
그렇게 결정을 내린 로얀은 하얀 빛을 뿜어내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다크로드와 많은 어둠의 정령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잠깐!”
그 모습을 보던 드래곤 로드가 로얀을 불러 세웠다.
멈칫.
“......?”
“천계든 마계든 무구를 지닌 이만 죽이면 되니 너무 많이 가는 것은 좋지 않네. 더구나 천계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아마 짐만 될 게야.”
확실히 이런 대군을 이끌고 가는 것은 천계와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령왕들에게 걸린 봉인을 푸는 것에 있다.
드래곤 로드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로안은 다크로드를 불렀다.
“다크로드.”
[예.]
“다크니스들만을 데리고 간다.”
[알겠습니다.]
로얀의 말이 울려 퍼졌고 다크니스를 제외한 모든 어둠의 정령들이 그를 향해 몸을 숙이며 모습을 감추었다.
다크로드가 다크니스를 지휘하며 게이트로 다가갔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다크로드와 다크니스를 보며 로얀은 몸을 다시 움직였다.
“그럼.”
로얀은 그렇게 다시 가던 길을 걸어 하얀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하얀 게이트는 그를 집어삼킬 듯 삼켜 버렸고, 이어서 뒤따라 들어온 다크디스들까지 안으로 삼켜 버렸다.
화아아앗!
그들 모두가 사라진 일렁이는 빛의 게이트를 보며 드래곤 로드는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겠네. 그리고 마계에도 가야 하니 부디 빨리 오게나.”
그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드래곤들의 회의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룬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썰렁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