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 (39/42)

6장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

화아아앗!

게이트를 통해 천계로 온 로얀은 게이트를 지키고 있을 천족들의 공격을 예상하곤 그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아주는 천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천족 모두가 곧 있을 마계와의 전쟁준비로 한창이었기에 게이트의 앞을 지키는 이가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준비하는 천족과 마족들은 전쟁놀이를 준비하는 어린 아이들 같았다.

어찌 되었건 천계로 아무 문제 없이 도착한 로얀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천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천계의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로얀에게 천계의 모습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천족의 대지는 모두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이었다. 거대한 구름들이 여기저기 둥실둥실 떠 있었고, 아름다운 색색깔의 밧줄로 서로가 이어져 있었다.

천족 모두가 날 수 있었기에 하늘을 날며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하늘이 그들의 길인 것이다.

드래곤 로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는 로얀이었다.

수많은 구름들이 떠 있었고, 그 위에는 아름다운 하나의 작품 같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구름 위에 세워져 있는 아름다운 성이 보였다. 보석으로 만든 듯한 아름다운 성은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천계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로얀이 다크로드를 포함한 모든 어둠의 정령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여기서 대기한다.”

[허나.......]

“이곳엔 그림자가 없다. 아무리 나로 인해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해도 바로 발각되고 말 것이다. 나 혼자 들어가 빛의 무구를 지닌 녀석만 죽이고 돌아오겠다.”

로얀의 말대로 천계엔 그림자는커녕 어둠이 없었다. 건물 자체가 흰빛을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지라고 할 수 있는 구름까지 흰 백색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녀석과는 한번 싸워 본 적이 있다. 3개의 봉인이 풀린 지금의 힘이라면 이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빠져나올 땐 혼자가 편할 듯하다.”

드래곤 로드가 이것까지 모두 예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얀은 혼자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는 할 수 없이 물러났다. 그리곤 허리를 숙이며 게이트로 다시 들어갔다.

화아아앗!

게이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크로드와 다크니스들을 집어 삼켜 버렸다.

하얀 구름 위에 로얀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스르르륵.

로얀은 쉐도우를 펼치며 몸을 숨겼고 날아올랐다.

어둠의 정령왕답게 로얀은 이 빛 속에서도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단, 누군가 자신을 건드린다면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힘이 흩트러지기 때문이다.

드래곤 로드가 말한 가장 높은 건물은 찾기가 쉬웠다. 거대한 성보다도 더욱 높은 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빛을 내는 지팡이처럼 생긴 탑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화아아앗!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기에 로얀은 즉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누군가 자신을 감지해 냈을지도 모르지만 로얀은 곧장 탑의 꼭대기를 향해 날아갔다.

탑이 천계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으며 가장 높은 건물이라 그런지 탑의 정상엔 천족들이 보이질 않았다.

타탁.

도착한 탑의 가장 높은 곳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중앙엔 푸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로얀을 바라보며 마법진의 중앙에 있는 이가 말했다.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는 마법진의 중앙엔 의자가 놓여져 있었고 거기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워 그의 아름다움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앉아 있는 이는 물론 천족이었지만 로얀의 생각과는 달리 그때 만났던 천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가 이곳에 빛의 무구를 지니고 있는 이가 있다.

로얀은 확인 차 그에게 물었다.

“네가 빛의 무구를 지닌 천족인가?”

로안의 물음에 앉아 있던 천족은 턱을 매만지며 로안을 바라보았다.

“흐음. 잘 찾아온 것 같다만, 넌 누구지? 아! 먼저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대천사장 중에 한 명이다. 훗! 이름은 알 필요 없겠지?”

천족과 마족이 합심하여 만든 정령왕들에게 건 봉인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천계와 마계에 거대한 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서 정령왕들이 갇힌 마법진에 힘을 보내는 방식의 특이한 봉인이었다.

무구의 주인이 된 자가 탑의 꼭대기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 속에 무구를 넣으면 그 힘이 탑의 마법진을 통해 보내지는 형태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드래곤 로드가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무구의 주인을 죽이면 봉인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탑을 부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탑을 부수려면 무구가 마법진 속에서 나와야 했다. 탑을 지탱하는 것이 그 무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법진 속의 무구를 꺼낼 수 있는 이는 무구의 주인뿐이었다.

탑을 지키는 것은 당연 무구의 주인이었다. 무구와 멀리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로얀은 눈앞의 천족을 바라보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천족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빛의 무구의 주인은 천사 아델레이트가 아니었나?”

“하! 어떻게 일반 전투 천사 따위가 빛의 무구의 주인이 될 수 있겠나.”

빛의 무구는 먼저 손에 넣는 이가 주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이었던 아델레이트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하하, 어리석게도 그는 빛의 무구를 탐냈고 결국 신의 심판을 받았다.”

아델레이트가 죽었다는 말이었지만 로얀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와 특별히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악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결론은 죽이고 빼앗았다는 거군.”

“빼앗은 게 아니다. 원래 빛의 무구의 주인은 신의 뜻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말을 하는 천족은 너무도 당당했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을 하지. 넌 정체가 뭐지? 외향으로 보자면 영락없이 더러운 타천사인데, 느껴지는 기운은 정령의 기운. 흐음.”

“혼돈의 정령왕이다.”

“하하하하. 정령왕, 정령왕이라....... 정령왕들은 모두 갇혀 버렸을 텐데?”

로얀의 대답에 천족은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고 말을 이었다.

“뭐, 어찌 되었건 봉인되어 있는 정령왕과 관계가 있는 자라는 소리겠지? 물론 목적은 봉인을 풀기 위해서일 테고.”

자신을 대천사라 소개한 그는 로얀의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말에 그가 봉인을 풀기 위해 온 이라 생각했다.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말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도 정령왕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단정지어 버리는 그였다.

물론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목적만 따지고 보면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로얀은 그런 천족을 보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탑 속에 혼자 남아 지킬 정도로 무구의 주인이 되고 싶고, 무구가 탐나는 것일까?

“이런 곳에 갇히면서까지 무구가 탐나는 건가?”

“훗! 이번 천계와 마계의 전쟁이 끝나면 더 이상 봉인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고, 난 빛의 무구를 지니고 여길 벗어날 수 있지.”

“꼭 그렇게까지.......”

“힘은 아름다운 것. 난 아름다움을 사랑하거든.”

금발을 쓸어 넘긴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고 말을 이었다.

“그냥 전쟁이 끝나길 조용히 기다리면 될 것을 여기까지 봉인을 풀기 위해 오다니 정말 멍청하군.”

스르릉.

로얀은 더 들을 필요 없이 다크리온을 뽑아 들었다. 성검 에리오네는 천족에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뽑지 않았다.

“훗, 검을 뽑아 봤자 천계의 대천사장인 나에겐.......”

쿠오오오-!

“......!”

지금껏 평정심을 유지한 채 웃음을 짓던 천족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다크리온을 쥔 로얀에게서 거대한 힘이 휘몰아쳐 나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전쟁놀이를 위해 왜 그녀가 희생되어야 하지?”

로얀은 몇 초라도 더 빨리 엘라임을 위해 봉인을 풀어주고 싶었기에 온 힘을 끌어올렸다. 단 한 번에 끝내 버리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지금 천족과 로얀 사이의 거리는 좁았다. 여기서 공격을 가한다면 천족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죽음의 반월.”

콰가가가강!

그의 온 힘이 담긴 죽음의 반월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무색의 오러가 다크리온의 검면을 타고 흘렀다.

그가 쏘아 보내진 수십여 개의 흑빛 반월이 천족을 덮쳤다.

콰하하항!

죽음의 반월의 여파로 탑이 크게 흔들렸고, 굉음이 천계 전체로 울려 퍼졌다. 이 정도로 소란을 일으켰으니 얼마 가지 않고 아마 천계의 모든 천족이 날아올 것이다.

콰르르릉!

죽음의 반월로 여파로 인해 탑이 무너져 내렸다. 빛의 무구로 인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탑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는 빛의 무구가 마법진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크으윽. 젠장! 빌어먹을! 탑이 무너져 버렸잖아! 이 빌어먹을 자식!”

대천사장인 천족이 분개하며 모습을 나타내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새하얀 깃털을 뿌리는 여섯 장의 날개를 단 그는 하늘에 둥실 뜬 채 로얀을 노려보았다.

휘리릭.

그의 몸 주위를 하얀 구가 맴돌고 있었다. 로얀이 오래전 빛의 성지에서 보았던 그 빛의 무구였다.

로얀이 바로 앞에서 펼친 공격에 담긴 강한 힘에 놀란 천족은 천신의 명령을 뒤로하고 마법진 속에서 빛의 무구를 꺼내 로얀의 공격을 막았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빛의 무구를 꺼내게 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로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빛의 무구가 막아준 것인가?”

그의 그런 중얼거림을 전혀 듣지 못했는지 천족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무너져 버린 탑으로 향해 있었다.

“이런, 봉인이 풀려 버렸잖아!”

천족은 로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무너져 내린 탑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로얀은 천족의 봉인이 풀렸다는 말에 의아해 했다. 드래곤 로드에게 들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응? 봉인을 풀려면 무구의 주인을 죽이는 것이 아닌가?”

다시 들려온 로얀의 말에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된 천족은 그의 말을 들었고, 로얀을 향해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 봉인을 풀려면 두 개의 탑을 부숴야 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냐!”

천족은 매우 흥분한 듯 로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봉인의 탑이 부숴졌다는 것 때문에 사고가 정지되었는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천신에게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천족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에게 내려질 형벌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로얀은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 로드가 날 속인 건가?’

“미안하게 됐군. 몰랐다. 그리고 천계에서의 볼일은 끝난 셈이군.”

화아아앗!

어쨌거나 로얀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몸을 돌리며 게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어딜!”

슈아아앙!

스걱!

봉인의 탑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탑을 부순 자마저 놓친다면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천족은 다급히 빛의 무구를 휘둘렀다.

날아간 빛의 무구는 몸을 숨긴 로얀의 망토 자락을 자르며 되돌아왔다. 로얀의 날아가는 속도가 너무도 빨랐기에 망토 자락만을 벤 것이었다.

정령왕이 만든 망토를 너무도 쉽게 날려 버린 빛의 무구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크윽. 절대 놓치지 않겠다!”

대천사장은 황급히 로얀의 뒤를 쫓았다. 카오스의 법에 따라 중간계로 갈 수 없다. 로얀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가 게이트로 사라지기 전에 잡아야만 했다.

빛의 무구의 주인 말고도 많은 수의 천족이 로얀의 뒤를 쫓았다. 봉인의 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달려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로얀의 날개가 펼치는 능력은 뛰어났다. 그를 뒤쫓는 천족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슈아아앙!

그것을 깨달은 대천사장도 빛의 무구를 급히 사용했다.

빛의 무구는 선회하며 빠른 속도로 로얀의 등을 노리며 날아갔다.

등 뒤로 다가오는 빛의 무구를 돌아보며 로얀은 온 힘을 다해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죽음의 반월!”

쿠하하하항!

콰가가가강!

수십 개의 검은 반월 모양의 기가 날아갔고 빛의 무구와 충돌했다.

콰항!

빛의 무구와 충돌하지 않은 반월의 기는 뒤쫓아오던 천족들을 향해 날아갔다.

천족들은 로얀을 쫓던 움직임을 멈추고 죽음의 반월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슈아아앙!

화아아앗!

죽음의 반월을 부숴낸 빛의 무구가 로얀을 향해 날아갔지만 그는 이미 게이트를 통해 중간계로 사라진 뒤였다.

“이런!”

대천사장은 빛의 무구를 거두며 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카오스의 법이 저주스러웠다.

스윽.

그때 그의 뒤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헛! 천신님.”

뒤돌아본 그는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하얀 로브를 입은 늙은 노인이었다.

백발을 휘날리는 그에게선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신비로운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인자해 보이고 성스러워 보이는 그에게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흘러나오자 허리를 숙이고 있는 대천사장은 긴장하며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제가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천신이라 불린 노인의 눈썹이 휘어졌다.

“대천사장은 중간계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허, 허면.”

스윽.

천신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대천사장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바라보는 대천사장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져 버렸다.

그 얼굴 위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콰가가강!

그 빛은 천신의 손에서 뿜어지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너무도 따스한 빛에 대천사장은 괴성을 지르며 한줌의 빛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사라진 대천사장의 자리를 대신해 그의 하얀 깃털이 휘날렸다.

천신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빛의 무구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내 손에 들어오게 될 무구였으니.”

집어 든 무구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던 천신은 급히 몸을 움직였다.

“아무튼 어서 빨리 마계에 연락을 취해야겠군.”

정령왕들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는 것은 염려스러웠지만, 그 역시도 중간계로 나갈 수가 없다.

만일 마계의 탑마저도 무너져 내리면 모든 것은 끝이다. 서둘러 마계에 연락을 취해야 했다.

* * *

그렇게 로얀이 천계에서 봉인을 부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드래곤 로드와 어둠의 정령들이 있는 룬으로 누군가 찾아 왔다.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 앉은 채로 그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 이유는 이곳에 함부로 다른 이를 데리고 온 그라시드 때문이었다.

드래곤 로드인 그 또한 로얀을 이곳으로 함부로 데리고 온 것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차원계 전체의 존망이 달린 것이었다.

“그라시드와 페어리들의 여왕이 여긴 무슨 일로?”

“.......”

룬으로 찾아온 이는 잠자리 날개 같은 얕고 투명한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을 날아온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였다.

그녀는 로얀과 헤어진 직후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로얀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거의 동시에 출발했지만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늦게 도착한 데에는 로얀의 속도가 원체 빨랐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이곳으로 오기 위해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를 찾아갔다는 것이 더 커다란 이유였다.

“하하. 오랜만이에요, 로드~.”

그라시드는 손을 번쩍 들고 힘차게 휘두르며 로드를 향해 인사했다. 죄진 게 있는 그였기에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그런 그의 활기찬 인사를 받은 로드는 한숨을 쉬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자신이 처음 질문했던 것에 대한 답을 원하는 것이었다.

레아를 알아본 이는 드래곤 로드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어둠의 정령인 다크로드 또한 그녀를 알아보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과거 페어리들의 여왕인 그녀에게 어둠의 정령들은 허리를 숙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는 것도 그녀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다크로드뿐이었다.

레아는 급히 달려와 드래곤 로드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는 다급히 말했다.

“정령계로 좀 가야겠어요.”

“정령계?”

“로얀이 봉인을 풀러 왔다고 알리게요. 그리고 로얀이 위험 할지도 모르잖아요.”

레아는 로얀이 봉인을 모두 풀고 위험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정령왕들에게 로얀의 소식을 알려 그를 도우라 말하러 가려는 것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페어리족의 여왕인 레아와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위해 정령계로 간다고 하자 의문을 표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얀이 봉인을 푸는 것과 정령계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봉인의 탑은 마계와 천계에 있는데 말이다.

“로얀이 봉인을 풀게 된다면 마계와 천계는 자신들의 계획을 망친 그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제서야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드래곤 로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을 풀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봉인이 풀린 다면 천계건 마계건 다크로얀을 죽이려 들겠지. 그때 정령왕의 힘이라면.......”

드래곤 로드는 말끝을 흐렸고, 레아는 그를 지나 다급히 정령계의 게이트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

로얀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드래곤 로드는 레아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그전에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정령왕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말이 있는데.......”

“네?”

레아는 의아해했지만 드래곤 로드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레아에게 말하는 것은 로얀에 관한 것이었다.

로얀과 이실리아에 얽힌 이야기를 그는 자세히 해주었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로얀이 한번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였다.

로얀이 죽음 뒤에 다시 살아난 것은 레아도 본 적이 있었다. 로얀이 단신으로 한 왕국에 쳐들어가 죽음을 당했을 때, 그녀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모르는 드래곤 로드는 말을 이었다.

“그는 죽을 때마다 더욱 강해져 태어났지. 하지만 강한 힘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 데스 나이트나 리치가 강한 힘을 얻고 다시 살아남는 대신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지.”

말을 하는 드래곤 로드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해 보였다.

“그도 정령왕인 이상 그에게 일어난 그 괴이한 현상을 다른 정령왕이 알아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어.”

이것이 드래곤 로드가 레아에게 자신이 한 이야기를 전하라고 한 이유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레아는 드래곤 로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다크로드의 음성이 울려 퍼져왔다.

[레아님! 물의 정령왕님께 마스터의 세 번째 봉인이 풀려났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봉인?’

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 한마디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다시 들려온 그의 말에 일단은 다크로드에게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정령계로 향하는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녀를 향해 그라시드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그녀는 이내 게이트가 뿜어내는 강한 빛에 휩싸였다.

화아아앗!

환한 빛이 레아를 집어 삼켰다.

레아는 로얀이 천계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화아아앗!

[마스터!]

레아가 정령계로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어 환한 빛과 함께 게이트를 빠져나온 로얀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다크로드였다.

다크로드는 팔에 감긴 붉은 천을 휘날리며 달려와 로얀 앞에 섰다.

로얀은 다크로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의장에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거짓말을 했더군.”

그것이 로얀이 천계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런 로얀을 바라보며 드래곤 로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거짓말이라니?”

그의 반응으로 보아 연기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봉인은 풀기 위해선 무구의 주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탑을 부수는 거였어.”

“그런 거였군. 흐음, 미안하게 됐군. 나도 자세한 건 몰라서 말이야. 아무리 드래곤 로드인 나라고 해도 천족과 마족이 합심해서 만든 마법진을 없애는 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 않겠나. 그리고, 어찌되었건 그 탑과 무구가 봉인의 핵심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았던가.”

로드의 해명에도 로얀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험험, 다른 건 모두 진실이니 어서 이제 마계로 가보게나. 천계에 있는 봉인을 풀었다면 아마 마계에서 어떤 준비를 해놓고 있을지도 몰라. 그전에 어서 가게.”

“.......”

로얀은 드래곤 로드에게 보내던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며 아무 말 없이 마계로 향하는 이글거리는 화염처럼 보이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게이트 속으로 들어갈 것 같던 로얀의 발걸음을 드래곤 로드가 붙잡았다.

“아! 좀 전에 귀여운 페어리족의 아가씨가 왔었네.”

멈칫.

로얀은 고개를 돌려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페어리?”

“페어리족의 여왕인데 조금 전 급히 정령계로 가버렸지.”

“.......”

[그... 레아님입니다.]

로얀에게 다크로드가 드래곤 로드의 말을 보충해 주었다. 그 페러리족의 아가씨가 레아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페어리족의 여왕이라는 신분이라면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왔다는 명분하에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로얀과 함께 온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무사히 들어올 순 없었겠지만 말이다.

로얀의 시선이 레아가 갔을 정령계로 향하는 게이트를 잠시 바라보다 마계로 가는 게이트로 향했다.

“이번에도 혼자 가겠다. 그게 더 빠른 듯하니.”

[예, 마스터!]

다크로드는 로얀이 천계에서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기에 순순히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화아앗!

그렇게 천계로 향하는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로얀은 마계의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붉은 홍염이 그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 * *

화아아앗!

로얀이 게이트를 타고 도착한 마계에는 천계와는 달리 많은 이들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붉은 박쥐 날개를 한 거대한 체구의 거인들이 붉은 피부에 이글거리는 화염을 담은 듯한 눈으로 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마계의 투사라 불리는 발록이다.

로얀의 앞에 서 있는 발록들은 길게 쭈욱 늘어져 있었다. 거대한 그들로 인해 마계의 모습이 가려져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모두들 로얀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거대한 발록들 사이에 육중한 근육을 자랑하듯 상체를 드러낸 남자가 서 있었다.

외향만 보아선 인간이었다.

이곳저곳으로 삐죽삐죽 솟은 붉은 머리카락이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로얀을 바라보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하하하, 역시 자네였군.”

“응? 파라무트?”

로얀을 향해 다가오는 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오래전에 만나 인연을 맺었던 발록들의 수장이라던 파라무트였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로얀은 그의 이름을 말했다.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기쁜지 파라무트는 호통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 정말 오랜만이지?”

그는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통한 성격도 그대로인 듯했다. 오히려 50년 전보다 더 젊어 보였다.

“덕분에 나세스를 박살내주고 나의 자리도 되찾았지.”

파라무트는 자신의 뒤에 늘어서 있는 발록들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자랑스럽다는 듯이 허리에 팔까지 척하니 얹은 상태였다.

“그럼 여긴 무슨 일이지?”

“아? 너와 싸우러 왔지.”

싸우러 왔다는 말을 너무도 쉽게 말하는 파라무트였다.

스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로얀은 에리오네의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파라무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싸우러 왔다고는 했지만 전혀 싸울 의사가 없어 보였다.

“위에서 내린 명령이 너와 싸우라는 거였다는 거지. 하지만 난 너와 전혀 싸울 생각이 없어.”

“......?”

“이걸로 너에게 빚진 건 완전히 사라지는 거다.”

혼돈의 정령왕이라 칭하는 이가 마계의 탑을 부수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마계의 왕 루시퍼는 수많은 마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대책을 준비했다. 바로 게이트를 지키고 있다가 로안이 나타나면 그를 막을 이를 뽑는 것이다.

그때 평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파라무트가 번쩍 손을 들고 자청해서 나섰다.

나세스로 인해(?) 더욱 강해져 돌아온 파라무트와 그가 이끄는 전투종족 발록이라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루시퍼는 매우 기뻐하며 파라무트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로얀은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파라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그냥 보내준다는 거냐?”

“뭐, 그런 셈이지.”

로얀의 말에 파라무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넌 명령을 어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뭐, 동굴에 백 년 정도 처박아 놓겠지.”

“.......”

“걱정 마. 너 아니었으면 그 끔찍한 동굴 속에서 영원히 갇혀 있어야 했으니까. 몇 백 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어서 가봐. 그리고 그 탑을 박살내 버려! 난 그 탑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크크크크.”

파라무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로안의 어깨를 탁탁 치며 웃어 젖혔다.

“아쉬운 점이라면 천계 녀석들을 박살내는 것이 물 건너갔다는 정도일까. 크흐흐.”

터벅 터벅.

로얀은 고개를 숙인 채 파라무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씨익.

로얀의 말에 파라무트는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멈칫.

한참을 파라무트의 배웅을 받은 채 걸어가던 로얀이 길을 열어 주는 거대한 발록들을 보며 멈추어 섰다.

파라무트는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어째서 이렇게 쉽게 보내 주는 걸까?

“쿡쿡, 쟤네들은 내 명령만 듣는다니까. 우리 마족들은 같은 종족 간의 충성심은 끝내주거든. 안 그러냐?”

“우어어어-!”

파라무트의 말에 발록들이 일제히 울부짖었고 로얀은 발록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계로 들어섰다.

마계는 천계와는 달리 바닥이 검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몸을 숨기기가 쉬웠다.

마계의 빛이라곤 뿜어져 나오는 용암이 다였다.

마족들은 들쑥날쑥 솟아 오른 뾰족한 바위 안을 파고 그 안에 살아가는 듯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일반 마족들이었고, 거대한 성을 짓고 사는 이들은 고위급 마족이었다.

마계는 천계와는 달리 움직이기가 편했고 로얀은 멀리 보이는 흑색 탑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로얀이 도착한 마계의 탑은 천계의 환한 빛을 뿌리는 탑과는 달리 마계의 탑에선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겉모양은 천계의 탑과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검은 지팡이 같았다.

타탁.

로얀은 역시나 천계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왔다.

“아니!”

로얀을 맞은 건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은색 눈동자를 지닌 마족이었다. 풍기는 마기의 양으로 보아 고위급 마족인 듯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로얀으로 인해 당황해 하고 있었다.

어둠의 무구의 주인이자 이 탑을 지키고 있던 그는 파라무트가 이끄는 발록들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로얀이 들이닥치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었다.

화아앗!

로얀의 등장에 마족은 천계의 천족과는 달리 방심하지 않고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검은 박쥐 날개에 이마에 기다란 뿔을 가진 마족은 로얀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하하하항!

그의 손이 허공을 수놓자 뜨거운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로얀을 덮쳤다. 화염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홍염의 일족인 듯했다.

마계는 부족 사회라 할 수 있었기에 각자의 종족에 따라 커다란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검은 박쥐 날개에 인간형인 악마 계열의 마족들은 이곳에 있는 마족처럼 그들이 지닌 속성에 따라 나누어졌다.

불을 사용하는 악마족은 악마족들 중에서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화염계열의 모든 마법을 사용했고, 그들이 펼치는 마법은 레드 드래곤이 펼치는 화염계열의 힘을 앞질렀다.

“.......”

쾅!

로얀은 말없이 에리오네를 뽑아 마족이 쏘아 보낸 거대한 불길을 무산시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무구를 끌어내기 위해선 저 마족을 탑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하거나 직접 꺼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얀은 처음부터 마족을 몰아붙이기로 결정했다.

마족은 자신의 화염을 검으로 가볍게 무산시킨 로얀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채챙!

마족은 갑자기 달려든 로얀의 공격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로얀의 검과 마족의 손톱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보랏빛의 마족의 손톱이 성검 에리오네를 버텨내고 있었다.

치이익.

고위급 마족의 손톱이라 단번에 잘리진 않았지만 허공에서 천천히 성검의 힘에 의해 녹아내렸다.

챙!

마족은 로얀의 검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났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육체적인 힘이 로얀이 자신을 앞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족은 로얀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근접전으론 승산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족의 육체적인 능력은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으로 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법을 펼치려 손을 움직이는 마족을 향해 로얀은 오른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가볍게 휘둘렀다.

“죽음의 반월.”

콰가가강!

검은 반월 모양의 기가 마족을 향해 쏘아져 나간 동시에 로얀은 왼손을 휘둘렀다.

콰하하항!

조금 전 마족이 사용한 화염을 그대로 복사해 쏘아 보낸 것이었다.

콰가가강!

마법으로 죽음의 반월을 막던 마족은 연이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염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느낄 수 있었다. 그 화염이 자신이 쏘아 보낸 것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

‘서, 설마 내 마법을 복사한 것인가?’

그가 사용한 불꽃은 홍염의 일족이 아니라면 펼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힘만 센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가 빠르게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갖가지 술수를 부리며 이상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큭, 저놈을 죽이려면 어둠의 무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 단 한번만 사용하는 거다!’

로얀이 쏘아 보낸 화염까지 모두 받아낸 마족은 로얀을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바닥으로 향했다. 천천히 접근하며 무구를 꺼내 로얀을 단 한 방에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족의 생각과는 달리 로얀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일부러 마족이 쏘아 보낸 마법을 즉시 시전 하여 자신이 상대의 기술을 복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해준 것도 그의 마음속에 있을 공포심을 증가시키기 위함이었다.

당혹감에 휩싸인 채로 궁지에 몰린다면 살기 위해 어둠의 무구를 꺼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도박일 뿐이었다. 빛의 무구는 날아다니는 빛의 구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둠의 무구는 어떻게 생겼을지 모른다.

“죽어라!”

화아앗!

천천히 이동해 로얀의 바로 앞까지 접근한 마족은 마법진 속에서 무구를 꺼내며 무구의 힘을 펼쳤다.

사사사삭!

나타난 무구는 심하게 휘어진 흑색 검이었다.

마족은 그 흑색 검을 쥐고 휘둘렀다.

검은 검기의 다발이 탑은 전혀 부수지 않고 로얀만을 난도질하기 위해 그의 몸을 감쌌다. 가시 덩굴이 몸을 옭아매어 오는 것만 같았다.

피피핏!

마족이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도 무언가가 로얀의 살갗을 베었다.

자신을 덮치는 흑색 검기를 바라보며 로얀은 다크리온까지 뽑아 들었다. 그리고 두 검을 힘껏 움켜 쥔 상태에서 휘둘렀다.

“다크 오브 데스티니!”

이 좁은 공간 속에서 펼친 그 공격은 너무도 무모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어둠의 무구가 만들어낸 검기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격을 감행했다.

쿠하하하항!

콰가가가가강-!

어둠의 무구를 사용한 마족 또한 로얀이 이렇게까지 공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눈을 부릅떴다.

검은 빛이 그의 시야를 덮어버렸다.

크아아악-!

로얀의 가장 강한 기술인 다크 오브 데스티니와 어둠의 무구가 펼친 기술이 부딪히며 일어난 폭발에 탑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어둠의 무구가 빠져나온 탑은 그저 거대한 건조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콰르르릉!

콰가가가강!

폭발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마계가 진동했고 높이 솟아 있던 탑이 그렇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또한 그 탑을 지키던 고위급 마족 또한 탑처럼 무너져 내렸다. 탑과 함께 너무도 허망하게 소멸해 버린 것이다.

슈아아앙!

그때 그 폭발 속에서 솟아 오른 흑색 빛이 있었다. 바로 검은 날개를 휘날리는 로얀이었다.

그의 옷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가엔 붉은 피를 주르륵 흘려보내고 있었다.

쿵쾅 쿵쾅.

그는 자신의 심장이 급박하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끈적끈적한 피로 인해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헉헉, 이제 봉인이 풀렸겠군. 이제 엘라임을.......”

슈아아앙!

콰하항!

“크허헉!”

무너져 내린 탑을 보며 이제 풀려났을 엘라임을 생각하던 로얀의 생각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며 백지장이 되어 버렸다.

그의 몸을 뭔가가 관통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끄으응. 오랫동안 세운 계획이!”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하얀 빛과 함께 늙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로얀의 몸을 관통했던 흰 빛이 그 노인에게로 돌아와 그의 몸 주위를 맴돌았다. 노인은 천계에서 모습을 나타내었던 천신이었다.

하얀 빛이 관통한 로얀의 옆구리는 뻥 뚫려져 있었다. 무언가로 인해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극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붉은 피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하얀 빛이 지나간 자리는 불에 지진 듯 살과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늙은 노인 외에도 한 사람이 더 등장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미남자였다.

여섯 장의 검은 날개를 지닌 그의 날개는 조금 특이했다. 다른 마족들과는 달리 깃털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타천사임을 의미했다. 원래는 천계의 천족이었으나 영혼이 악으로 물들어 마계로 떨어진 이들 중 하나라는 증거다.

그가 지닌 날개가 여섯 장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과거 천계의 대천사장이었을 것이다.

검은 날개의 사내는 부서진 탑의 잔해 속에서 어둠의 무구인 검을 집어 들었다.

“젠장할 영감탱이.”

“지금 자네가 나에게 화낼 자격이 있는가? 미리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탑 하나 못 지키는 건가, 루시퍼?”

“닥쳐! 빌어먹을 영감탱이.”

루시퍼라 불린 어둠의 무구를 집어 든 남자는 늙은 노인의 모습을 한 천신을 향해 외쳤다.

루시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로얀을 그냥 보내준 발록들과 그들의 수장인 파라무트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로얀을 바라보며 어둠의 무구를 휘둘렀다.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이 휘두른 어둠의 무구는 조금 전 고위급 마족이 휘둘렀을 때보다 더 강한 위력을 동반한 채 로얀을 덮쳤다.

콰가가각-!

“크으윽!”

극심한 상처를 입은 로얀은 이를 악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도 하늘에 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카카카캉!

촤촤촤!

수십 개의 검기 다발 중 몇 개는 로얀이 휘두르는 검에 가로 막혔지만 나머지는 모두 그의 몸을 할퀴었다.

“크허헉! 으드득.”

온몸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로얀은 하늘에서 주춤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엘라임을 가둔 장본인인 천계의 천신과 마계의 루시퍼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꽈악.

로얀은 온 힘을 짜내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들어올렸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루시퍼는 천천히 하늘위로 날아올라 천신과 함께 로얀을 중앙에 두고 마주섰다.

중앙에 있는 로얀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 대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그의 상태를 전혀 신경 쓰질 않았다.

천신은 피로 목욕을 한 로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끄응, 이제 전쟁만 남았거늘.”

기이잉.

그리고 그의 몸 주위를 도는 백색 구가 있었다. 그건 빛의 무구로 로얀의 허리에 구멍을 낸 장본인이었다.

천신과는 다르게 루시퍼는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자식!”

그리고 천신과 루시퍼는 동시에 빛의 무구와 마계의 무구를 휘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정령왕들은 풀려날 것이다. 전쟁은 고사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눈앞의 로얀만큼은 처참히 죽이고 싶었다.

천신과 마계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루시퍼의 화풀이 상대가 되어 버린 로얀이었다.

콰가가각!

슈아아앙!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가 동시에 힘을 발휘하며 로얀을 향해 덮쳐갔다.

“다크 오브 데스티니.”

백지장으로 변했던 로얀의 머릿속으로 엘라임과 함께했던 순간이, 지금껏 살아 왔던 순간이 천천히 그려졌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다크 오브 데스티니를 펼쳤다.

한 사람에게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 주위로 검은 기류가 폭발하듯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콰하하하항!

콰가가가강-!

그렇게 빛의 무구가 쏘아내는 빛과 어둠의 무구가 쏘아내는 빛이 로얀의 몸에서 펼쳐진 어둠의 기류와 부딪쳤고,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가가강!

마계를 지나 그 진동이 천계와 정령계에까지 미칠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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