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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새로운 나날 (42/42)

9장 새로운 나날

새로운 나날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 폭주한 그 끔찍했던 사건이 있은 지 어언 삼만 년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렀다. 그 사건이 가져온 여파는 매우 컸다. 각 세계로 따지자면 정령계는 혼돈의 정령왕으로 인해 네 명뿐이던 정령왕이 다섯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령계의 영역이 더 갈라진 것은 아니었다. 로얀이 어둠의 정령들과 함께 정령계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라임과 함께 정령계에 있고 싶은 마음은 강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령계는 생겨났을 때부터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다스리는 홍염의 대지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스리는 바람의 대지, 땅의 정령왕 노아스가 다스리는 숨결의 대지, 그리고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다스리는 생명의 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정령계에 어둠의 정령과 혼돈의 정령왕 로얀이 있을 곳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힘은 어느 쪽에든 속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날 그 폭주로 인해 로얀의 힘이 드러난 탓이었다.

그날 폭주가 있은 뒤 로얀은 다시 엘라임과 한동안 떨어져 지냈다. 아직 완전히 자신의 힘이 되지 않은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보다 강한 힘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둔다면 언젠가 또다시 폭주할 것이고, 파괴를 일삼을 것이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렇게 로얀은 자신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 다시 카야 산맥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로얀은 카야 산맥을 중심으로 중간계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았다. 중간계에 어둠의 정령들을 풀어놓고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중간계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예전처럼 어둠의 정령이 중간계에 머물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둠의 정령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정령이라 불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드래곤이나 다른 이종족들도 어둠의 정령을 쓸모없는 정령이라 여기지 않았다.

많은 세월이 흘러 로얀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제어해 세상에 나왔을 때 드래곤과, 마족, 천족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가 자신을 어떻게 보건 신경 쓰지 않고, 정령계로 달려가 엘라임을 만났었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 이프리트와 실피드 커플의 뒤를 이어 정령왕 커플이 되었다.

로얀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천계는 침묵 속에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천계의 천신은 몇몇 신들과 함께 천계 깊숙한 곳으로 몸을 치료한다는 명분 하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그렇게 모습을 감춘 것은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때문이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신으로서의 위상과 자존심은 이미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마계를 공격하기 위해 편성해 두었던 군대가 단 한 사람에게 격파당하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는 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벌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천계에 속한 신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어떻게 벌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큰마음의 상처를 입었기에 스스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세계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마계였다.

팔을 잘린데다 극심한 상처로 인해 힘을 잃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루시퍼는 천사 출신인 그를 싫어하던 마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남은 마왕들은 하나의 왕좌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 싸움은 수십 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마계에 붉은 피를 뿌렸다.

그렇게 벌어진 치열한 전쟁의 승패는 결국 가려졌고, 승자가 드러났다. 그 승자는 발록의 수장인 파라무트가 차지하게 되었다.

혼돈의 정령왕과의 전투에서 몸을 사리며 도망을 쳤다는 이유로 파라무트는 마계에서 배척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시끄럽게 떠든다는 이유로 파라무트가 광분했다.

그의 진정한 힘이 펼쳐지고, 그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마족들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제공한 드래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드래곤든은 여전히 드래곤 산맥 틀에 어박힌 채 빈둥거리고 있었다.

로얀이 폭주한 덕분에 드래곤들의 수는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로얀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사건으로 드래곤족의 숫자가 반이 넘게 죽었었다.

중간계는 여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드래곤 산맥을 중심으로 기후별로 네 개로 나뉘어지는 칸 대륙은 여전했다.

많은 나라가 그동안 새로 탄생했고, 많은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걸었다.

여름의 대륙은 얀으로 인해 통일의 대륙이 되었었지만 지금은 여러 개로 쫙쫙 갈라져 있었다.

현재 여름의 대륙에는 이얀이 세웠던 몰딘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로얀은 얀의 후손이 당당히 적에게 맞서 싸웠고, 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절대 나서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았었다.

그렇게 몰딘 제국은 역사 속에 묻히게 되었었다.

중간계에는 이제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의 또 다른 이름인 흑안의 검사를 아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록도 전혀 남아 있질 않았고, 그는 그렇게 인간일 때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드래곤들 또한 로얀에 대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를 아는 드래곤들은 멸족의 위기까지 몰리게 한 그를 끝까지 싫어했고, 혼돈의 정령왕 또한 드래곤들을 싫어했기에 드래곤은 어둠의 정령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 아니, 맺지 못했다.

그러나 혼돈의 정령왕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나갔다. 정령왕들은 정령계에 자신의 영력을 두고 정령을 다스리고 세상의 질서를 다스렸지만 혼돈의 정령왕은 특별했다.

그는 중간계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버렸기 때문이다.

중간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가 다스리는 어둠의 정령들이 중간계 이곳저곳에 자유롭게 퍼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중에서도 중간계에서도 강한 힘을 보이고, 마나의 소모가 적으면서도 강한 어둠의 정령을 선호하는 정령술사가 늘어났다.

하지만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중간계가 아닌 정령계에 머물다시피 했다.

그가 있는 곳은 물의 정령왕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연인사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리고 오늘 좀처럼 정령계를 나서지 않고 항상 붙어 있던 혼돈의 정령왕과 물의 정령왕이 중간계로 나왔다.

그 둘 외에도 불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 그리고 땅의 정령왕까지 모두 중간계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빛의 숲이었다.

빛의 숲 깊숙한 곳에 많은 엘프들과 페어리, 그리고 어둠의 정령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의 성인식을 보기 위함이었다.

역대 페어리족의 여왕과는 달리 레아는 성인식을 치르고 페어리족의 영원한 여왕으로 남길 자청했기에 다시없을 페어리족 여왕의 성인식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온 것이었다.

드래곤들 중에선 단 한 명만이 초대를 받아 참석했는데, 그는 역시나 드래곤 로드였다.

물론 그는 과거 로얀과 만났던 드래곤 로드가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마나의 품으로 돌아갔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새로운 드래곤 로드였다.

화아아앗.

곧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다섯 명의 정령왕이 등장했고 그들은 미리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 여왕님의 성인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페어리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지며 레아의 성인식이 거행되었다.

페어리족의 여왕의 성인식답게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페어리족이 추는 춤은 눈이 부실 정도였고, 그들의 노랫소리는 영혼마저도 흔드는 듯했다. 성인식이 아니라 요정들의 축제를 감상하는 듯했다.

그들이 준비한 행사가 하나하나 끝나갔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아가 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요정의 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성인식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제 그 나무 속에서 레아가 나온다면 성인식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왔을 때의 레아의 모습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일 것이다.

화아아앗!

그렇게 모두 숨을 죽인 채 레아가 사라진 나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아가 거대한 나무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뚜벅 뚜벅.

“오오오오-”

천천히 걸어 나오는 레아의 모습에 요정의 나무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이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발꿈치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머리카락과 커다란 하늘거리는 날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긴 치마가 짧은 치마처럼 되어 있었고 신고 있던 신발은 벗어 놓았는지 새하얀 맨발이었다.

레아는 화사한 웃음을 담은 채 다섯 명의 정령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정령왕들을 바라보다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호호, 거기 바람둥이! 나 어때?”

“오오오. 크윽.”

레아의 모습에 환호하던 이프리트는 옆에서 고통을 가하는 실피드의 손길에 살짝 손을 휘적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축하한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축하해.”

“고마워, 언니.”

레아는 노아스와 실피드의 축하인사를 환한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로얀과 엘라임을 향해 다가갔다.

“축하해.”

“축하한다.”

“와~. 로얀이 나를 보며 웃다니! 엘라임 언니의 힘이겠지?”

웃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엘라임과 로얀을 보며 레아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회답했다.

그녀는 엘라임의 곁에 행복하다는 듯 서 있는 로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응?”

“받어. 렌이 오래전에 로얀에게 전해주라고 한 거야.”

레아는 성인식을 위해 나무로 들어가기 전 렌이 로얀에게 주라고 한 것을 손에 꼭 쥐고 들어갔었다.

레아의 말에 로얀은 아주 오래전 자신에게 아름다운 음을 들려주었던 귀여운 남자아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

레아의 손을 통해 전해진 것은 낡은 종이였다.

로얀은 부서질 것만 같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바스락.

<인간은 너무도 나약하지만 고통과 슬픔의 강을 건넌다면 신도 될 수 있다.>

<하나의 인연이 사라지면 하나의 인연이 생기고, 하나의 인연이 떠나면 하나의 인연이 남는다.>

렌이 로얀에게 남긴 것은 단 두 마디였다.

이것이 칸 대륙에 아름다운 음을 전한 위대한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렌이 혼돈의 정령왕 로얀에게 전하는 선물이었다.

로얀은 그 종이를 쥔 채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싱그러운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듯했다. 그의 손엔 하얗고 작은 엘라임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혼돈의 정령왕」 5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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