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하류검사의 습성(1권) (2/81)

CHAPTER 1 하류검사의 습성

지드는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검술에 뜻이 있었는지라 무턱대고 세상 밖으로 뛰어들어 강한 검사가 되고자 온갖 노력을 했다. 하지만 20대 중반이 넘도록 이렇다 할 성취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름대로 검술 정진에 집중을 하려 했지만,

천성적으로 다소 인내심이 부족하고.

남을 잘 속이는 사기성마저 있는데다가.

검술 재능 역시 일반인들보다도 크게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묵직한 검사로서의 재질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다못해 검사라면 그 누구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삼류 용병 집단에서조차 받아 주려 들지 않았다. 지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짓는 것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10년 전 제법 거액을 훔쳐서 가출했던 그의 귀환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에는 부푼 꿈을 안고 마을을 떠나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으며 정말이지 밑바닥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해 왔다.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가족을 볼 수 있을 텐가.

예상대로 가족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드 스스로는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 검사라 우겼지만 수척한 몰골과 걸레 조각을 엮어서 기어 입은 차림새 등으로 보건데 동냥을 하는 거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만큼은 아무 탈 없이 돌아와 준 셋째를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지드는 딱히 이렇다 할 일 없이 빈둥빈둥 지내고 있었다. 낮에는 방바닥에 누워 식사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밤에는 선술집에 들러서 옛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마을을 떠나 겪었던 얘기를 해 주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게다가 지드의 말주변이 워낙 좋아서인지 순박한 시골 친구들은 진짜 그가 대단한 검사의 삶을 살아온 줄 알고 있었다. 세상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삶은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는 말까지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드의 모든 행동과 습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가족들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그 높은 뜻을 이어받아 당당히 농부의 대를 이으려는 큰형. 그런 큰형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나름 충성을 다하는 일벌레 둘째 형. 더구나 막내마저 그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듯 어린 나이에 온갖 허드렛일을 척척 해 내고 있었으니, 지드만이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위배되는 이질적 존재라 할 수가 있었다.

정말이지 어쩌면 10년 전 가출했던 당시 분위기와 이리도 똑같단 말인가. 그나마 어머니가 중간에서 중재 역할을 하시지 않았다면 지드는 벌써부터 견디지 못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어머니.

그렇다. 지드는 어머니 때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착한 인품을 지니고 계신 어머니는 지드에게 항시 부드럽게 대했고 설령 큰 사고를 쳤다 할지라도 화보다 자식의 안위를 더욱 챙기셨다.

지드가 제아무리 철이 없다 할지라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지 결국 고향에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직업을 가지기로 했다.

지난 10년 동안 그가 배운 것이라고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익힌 잡식성 검술밖에 없었으니 그쪽 방면으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세상 밖에서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은 형편없는 능력이라지만 이런 산골 마을에서는 제법 쓸모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결국 지드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

휘잉―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배기 위에 갈색 머리칼의 청년 지드가 있었다. 그 앞으로 30여 명의 아이들이 부동자세를 하고 서 있다.

지드는 당당한 자세로 고개마저 빳빳이 치켜들고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쭉 훑어보더니만 대뜸 한마디 했다.

“돈들 가져왔냐?”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드는 허리춤으로부터 가죽 주머니를 꺼내더니만 입구를 활짝 열어서 흙바닥에 던져 놓는다.

툭!

그러고는 무슨 이유인지 뒤로 돌아선 채 다시 말문을 열었다.

“보지 않을 테니 각자 성의를 표시하기 바란다.”

“…….”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아이들은 지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10년 전 지드가 가출하던 날 여기 모인 아이들 대부분이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어린애들이었으니 당연했다.

다만 부모님이나 마을 형들로부터 지드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바깥세상에서 제법 잘 나갔던 검사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그런 그가 마을회관에 공지를 붙여 검술 지도를 하겠다고 하니 저마다 호기심에 들떠 이곳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돈 얘기를 하다니. 순박한 아이들로서는 조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너희들이 옆 동네 애들과 전쟁 중에 있다는 거 다 안다. 그리고 지난 일 년 동안 연전연패해서 서쪽 경계 부근 붉은 나무 구릉지마저 빼앗겼다는 사실…….”

지드는 갑자기 격앙이 되었는지 두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대체 왜 저러나 하고 이상한 얼굴들을 했다.

“정말 슬픈 현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군. 대체 네 녀석들의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었으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전투 지휘부이자 심장부를 그리 쉽게 적들에게 넘겨 줄 수 있는 거냐!”

이 대목에서 아이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마저 떨어트렸다. 그런 심리를 예상했다는 듯 지드 역시 더욱 진지한 자세로 말문을 계속 이어 갔다.

“사실 난 너희들에게 검술을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세상을 주유하며 수많은 강자들과 생사를 오가는 대결만 수십 번을 한 내가 뭐가 아쉬워 이런 시골에 내려와서까지 이런 일을 하겠냐?”

“…….”

아이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는지 저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지드의 말에 숙연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 한 몸 바쳐 네 녀석들에게 희생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후배들이자 훗날 이 마을을 책임질 꿈나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검술을 가르침에 있어서 강습료 따위는 단 한 푼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례 같은 것이 있는 법! 특히 스승과 제자들의 연을 맺는 과정은 너무도 신성하기에 서로 간에 정을 나누기 위한 그 어떤 물건들이 오가야지만 나름대로 형식이 갖추어진 것이라 할까. 흠, 대충 이 정도 얘기 했으면 알아들었을 테니 지금부터 공식적인 절차에 의한 식을 거행하겠다. 자! 그럼 시작하지.”

지드는 다시 등을 돌렸고 그 뒤로는 확 벌어진 가죽 돈주머니만이 흙바닥 위에 놓였을 뿐이다. 아이들은 그제야 꼼지락거리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지드는 아이들에게 검술 기본자세부터 가르치고는 바위 뒤로 숨어서 돈 주머니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굳어지는 표정.

‘엉? 이게 뭐야!’

동전……

세 개.

하늘을 우러러 탄식의 한숨을 내뱉고 마는 지드, 3페니라면 술 한 잔 값 정도랄까. 지드는 맥이 푹 빠졌는지 그 자리에서 아예 누워 버렸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상공이 보인다.

당장이라도 마른하늘에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소원이 있다면 엄청난 거금을 들여서라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검술 스승을 만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돈은 고사하고 누워 있으니 잠만 스르르 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지드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보니 아이들 서너 명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저, 저희 언제까지 같은 자세로 있어야 해요?”

순간 지드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에게 기본자세를 취하게 한 뒤에 자신은 바위 뒤에서 잠이 들었으니 말이다.

부리나케 공터로 나가 보니 아이들은 저마다 비 오듯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가지 자세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 그만!”

아이들은 너무 힘이 들었는지 제자리에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지드는 아이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였다.

다시금 시간이 지나고 지드는 아이들을 공터 중앙으로 집합시켰다.

“검술의 길은 이렇듯 멀고도 험한 것이다. 난 초반부터 그걸 몸소 깨닫게 하려고 했다는 점 깊이 이해해 주기 바란다. 자! 다음 단계는 검술 기본 두 번째 동작으로 ‘막고 찌르기’인데 지금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해 봐라.”

지드가 미리 준비한 목검으로 몸소 시범을 보였다.

슥.

붕!

검을 눕혀 방어 자세를 취한 뒤 곧바로 사선으로 한번 휘두르는, 아주 간단한 연속 2회 동작이었다. 아이들 역시 너무 쉽다는 듯 그대로 따라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아이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어색함을 느꼈던 걸까. 결국 소년이 동작을 멈추고 주춤거리자 지드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넌 따라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소년이 용기 있게 말했다.

“저기…… 기본 이 연속 동작이 조금 이상해서요.”

지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 지금 이상하다고 말했냐!”

소년은 다소 겁먹은 듯 겨우 대답했다.

“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제가 배운 거하고 달라서요.”

“……배운 거라니?”

“우리 지역 총관님께서 기본자세를 가르쳐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분께서는 기본 이 연속 동작을 할 때 반드시 보폭도 움직여야지만 그 흐름이 자연스럽고 공격력 또한 훨씬 강해진다고 그랬습니다.”

순간 뜨끔했던가.

‘뭐야, 이 자식? 총관한테 배웠다고? 에이, 설마…… 총관이 뭣 하러 이런 가난한 꼬맹일 가르치겠어?’

지드가 일부러 화가 난 듯 윽박지르듯 말했다.

“너 이놈의 자식! 지금 내가 가르치는 검술이 요즘 유행하는 변형된 기본자세라는 걸 알기나 하냐?”

소년이 아까보다도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본자세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한 동작인데, 변형을 이루었다뇨?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소년이 다소 어수룩해 보여서 대충 넘어가려 했는데 이제 보니 생각보다 똑똑한 놈이 아닌가. 아이들 역시 소년의 말에 공감하는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지드는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로 외쳤다.

“너 이놈! 스승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꼬박꼬박 말대꾸야! 좋다, 내가 옳은지 아니면 네가 옳은지 직접 대련을 해 보면 그 결과가 나오겠지.”

대련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놀란 듯했고 개중에는 겁먹는 아이까지 있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끝까지 들이댈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은 지드의 얄팍한 잔머리를 항상 앞서 나갔다.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화, 확인이라니!”

“대련을 통해 직접 알고 싶습니다.”

지드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은……!’

그때 소년이 목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지드 역시 고개를 바짝 쳐들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너, 안 봐준다?”

“…….”

소년이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지드가 살살 달래면서 말했다.

“다시 생각해 봐라. 너 그러다가 다치면 집에서 뭐라 둘러댈 거니? 스승이 애들 팼다는 소문이 나돈다면 내 꼴이 뭐가 되겠냐.”

소년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로 스승님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내가 얘기하지 않든 말든지 엄마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떡할 거냐.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웬만하면 그냥 들어가라.”

그러자 소년이 지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설령 스승님의 목검으로 맞는다 할지라도 변형된 기본자세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드는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완전 독종이네. 젠장!’

결국 지드는 목검을 고쳐 잡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대결에 앞서서 지드는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에다가 파란 눈동자에 총명기가 가득한 녀석에 대해 궁금했다.

“너, 이름이 뭐냐.”

“아르콘입니다.”

“아르콘?”

그러자 아이들 중에 누군가 소리쳤다.

“걔가 대장인데요, 지금까지 일대일 대결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어요!”

그 말에 지드가 긴장을 했다.

‘어쩐지…… 제길!’

곧이어 둘은 기본자세만으로 간단한 대결을 하기로 했다. 지드는 상체만을 이용한 기본자세 2연속 동작이었고 아르콘은 보법(步法)을 이용한 동작.

파팟!

탁! 탁! ……팍!

“욱!”

털썩!

검술 대련은 너무도 싱겁게 끝이 났다.

처음부터 준비자세 없이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목검을 휘둘러 친 지드에 비해 아르콘은 보법을 이용한 신속한 동작으로 상체를 숙이며 재빠르게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이에 지드는 허를 찔린 듯 가슴팍에 큰 충격을 받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아…….”

고통에 찬 신음도 그렇고 넘어져 있는 폼도 볼썽사납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표정이 실망감이 점차 증폭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서 잘 알려진 검사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건만 그의 실체가 저러하니, 아이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이윽고 하나 둘 자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 세 명만이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지드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말했다.

“내 돈 돌려 줘요.”

“…….”

사람 팔자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고 할까. 지난번 아이들 앞에서 개망신 당한 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입지는 이제 절벽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언제 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더군다나 가뜩이나 집안에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터에 지드의 입지는 더 이상 내몰릴 공간조차 없을 판이었다.

급기야 아버지는 가족 회의를 열고는 셋째 지드의 향후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다. 참으로 암울한 회의였다. 지드가 밥벌어먹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 와서 농사일을 가르치려 한들 진득하지 못한데다가 인내심마저 턱없이 부족하니 오히려 일에 방해만 될 건 뻔했다. 부업이라고는 하루벌이 목축업 일이나 사냥을 통한 짐승 가죽 팔기 따위가 있었지만 그 역시 지드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결국 회의는 한 가지 결론만을 내고 끝났다.

되는대로 살아라.

지드에게 가장 어울릴 법한 신조였다. 그 후로 지드는 되도록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몇 달을 집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미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지라 선술집은커녕 동네거리마저 활보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20대 중반 나이에 별다른 기술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지드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요즘 들어 가장 참기 힘든 것은 가족들의 무관심이었다. 이제는 지드가 뭘 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으니 한집안에 지내지만 어디 사막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요즘 따라 우울증마저 기승을 부리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때면 이곳 2층 베란다에서 거꾸로 뛰어내려 바닥에 대가릴 박고 죽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삶 자체를 건성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그런 진중한 용기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젠 뭘 하지.’

뭘 하긴 해야 할 텐데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창밖을 내다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수도 없이 떠올렸지만 다른 한편으로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하면 공돈이 생겨 술 한 잔 들이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미래보다 당장 목마르고 답답한 심정을 달랠 수 있는 술이 먼저 생각나는 인생.

정말이지, 먹구름이 잔뜩 껴서 우중충해진 저 어두운 하늘이 그의 앞길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향초를 보았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이틀에 한 번씩 꼭 들판에서 꽃을 따다가 저렇듯 화병에 꽃아 주신다. 그저 눈물이 나도록 감사할 뿐이었다.

주륵.

그런 생각이 드니 이번엔 진짜 눈물이 나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간난 아기 때 말고 평생 단 한 번도 흘려 본 적이 없는 눈물이라는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드는 손으로 직접 눈물을 훔쳐보며 살피기까지 했다.

‘나…… 지금 우는 건가.’

삶 자체가 뻔뻔했지만 이제야 철이 든 걸까, 아니면 서러운 마음에 복받쳐 감정을 이기지 못했던 걸까. 잔머리꾼인 그에게도 최소한의 진중함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순간 지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배낭을 꺼내어 옷가지를 대충 꾸려 넣고 그의 유일한 재산이자 보물 1호인 녹슨 철검 한 자루를 등에 찼다.

그러고는 열려진 창가 밖에 보이는 저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뭔가 결의를 다졌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검술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수련한다면…….”

새벽녘, 그가 현관을 나설 때 난데없이 하늘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우르릉! 쾅! 우두둑!

쏴아…….

모처럼 큰마음 먹고 길을 나서는데 하필 폭우가 쏟아질게 뭐람. 지드는 뭐라 투덜대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왕이면 좋은 날씨에 나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간 그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지.’

그의 짧은 인생 대부분이 조금만 장벽에 부딪치면 이렇듯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오늘은 뭔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마당에 날씨를 탓하다니.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던가!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발길을 계단 아래로 힘차게 내딛었다. 저 말리 산맥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무작정 들어가 보기로 했다.

장대비 걷히고 구름 사이로 햇살들이 드넓은 대지 이곳저곳을 강렬하게 비춰 주니 한마디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이렇듯 대자연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언제 보아도 오묘해 보였다. 지드는 이제 막 구릉지를 지나 제법 비탈진 바위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절벽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웅성거림.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가 처음으로 이겼단 말이야.”

“그게 다 대장 덕분이지!”

“맞아, 아르콘은 윗동네 애들 여럿을 상대하고도 이기더라. 정말 대단해!”

아이들의 말소리가 커지더니만 모퉁이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필 그곳으로 가려던 지드와 마주칠 게 뭐란 말인가.

“엉……? 저 아저씨는?”

“사이비 검사!”

“하하! 맞아, 맞아. 그 아저씨가 맞아!”

“근데 여긴 뭣 하러 올라온 거지. 또 검술을 가르치려고 그러나? 큭큭!”

“아니면 돈주머니를 풀고 지난번처럼 사기를 치려는 거겠지.”

“그건 아닐걸? 실력이 들통 났으니까 구걸이라 하면 모를까.”

그러자 지드가 불끈했다.

“이놈의 자식들이, 지금 어른을 놀리는 거냐!”

“어른도 어른 나름이지. 쳇! 우리 아빠 얘기 들어보니까 저 아저씨 삼류검사도 아니고 그보다도 아래인 하류 출신이래. 아마 나랑 붙어도 내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지드는 애들한테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는지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때마침 대장 아르콘이 재빨리 나서서 아이들을 만류했다.

“다들 그만해! 아무리 모자라 보여도 저분은 우리 마을 어른인데 최소한 예의는 지켜야지. 당장 길을 비켜 드려.”

아르콘이 말하자 아이들이 두말없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지드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비좁은 통로를 지나가서 모퉁이로 잽싸게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아이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없어지자 그제야 지드는 절벽에 기댄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아이들의 놀림보다도 대장이라는 아르콘 녀석의 말이 왜 더 얄미울까.

아무리 모자라 보여도 저분은 우리 마을 어른인데.

가뜩이나 삶의 무게가 무거운 판에, 그 잘난 녀석의 한마디는 자신의 영혼을 아예 바닥에 곤두박질친 기분이었으리라.

***

3일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지드는 집을 뛰쳐나온 것을 무척 후회했다. 그 옛날 가출 했을 때에는 돈도 있었고 그럭저럭 사람들 살 만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검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생활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중이었다.

괜히 겁도 나고 공포심마저 느껴졌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의 하류 검술 실력으로는 날짐승조차 잡기 어려웠으니 육질 맛보는 것은 처음부터 단념해야 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들판과 숲속을 뒤지며 열매를 따먹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담력이 약한 그에게 어둑어둑해지는 저녁부터 그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는 너무나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귀신이나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먼저 대가리를 모포 속으로 박고 덜덜 떨던 그였는데 어른이 되고서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탁탁. 화르르―

지드는 모닥불을 떼면서도 주변으로부터 들려오는 새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 큰 눈방울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담력을 가지고 왜 집을 나왔는지 스스로를 자책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일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룻밤만 잘 버티자.’

자는 둥 마는 둥, 지드는 그저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며 어서 날이 밝기를 기도했다.

이튿날.

짹짹―

동쪽 산마루에 햇살이 드리우자 지드는 부리나케 짐을 챙겼고 산아래 숲 지역으로 향했다. 이왕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더 이상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보려고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또다시 집으로 돌아가 원래의 습성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체가, 그로서는 몹시도 슬픈 일이었다.

저벅저벅.

축 늘어진 어깨. 힘없는 발걸음.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무렵 그는 다소 갈증이 났고 근처 강을 찾아서 쉬어가기로 했다.

콸콸―

얼마 전에 내린 폭우 영향인지 강 상류 지역에는 여전히 힘찬 폭포 줄기들이 높은 지대로부터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청명한 하늘빛을 고스란히 담은 맑은 물을 두 손으로 담고 목을 축였다.

후루룩.

“맛 좋고!”

바로 그때,

오른편 바위 틈새 사이로 뭔가가 햇빛에 번쩍였다.

지드는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게 뭐지?”

지드는 호기심 어린 표정과 함께 직접 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잠시 후 그는 바위 안쪽으로부터 검 한 자루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와우!”

제법 묵직했다. 칼집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들을 볼 때 첫눈에 예사롭지 않은 검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가 있었다.

순간 지드는 가슴이 쿵쾅거렸고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은 쥐죽은 듯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고 그제야 지드는 바위 안쪽에 쭈그려 앉아 검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거참, 희한하게 생긴 검이네.”

사실이 그랬다. 그가 보아 왔던 반듯한 검들과는 겁집조차 그 모양새부터 달랐다. 한쪽으로 휘어져 있는데다가 생전 보지도 못한 문자 같은 것이 손잡이 바로 위쪽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팍팍 드는 가운데 그는 아예 검을 뽑아 보기로 했다.

슥―

쩡!

눈부신 푸른빛 섬광과 함께 들려오는 기묘한 음, 지드는 너무 놀라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웅!

“헉! 뭐야.”

쨍그랑―!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지드는 다시 검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뭔가 신비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검날은 엷은 하늘색 금속으로서 그 면에조차 기묘하고 섬세한 문양들이 보였고, 면 아래 부분에는 붉은색으로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지드는 너무나도 선명한 빨간 색채 문양에 자기도 모르게 집중했고 대체 이게 뭐를 나타내는지 의아해 했다.

“대체 이건…… 무슨 문양이지.”

문양이라기보다도 복잡한 기호에 가깝다고나 할까. 혹시라도 마법사 주문을 위해 걸어 놓은 주술적 기호가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순간 그는 심장이 철렁해져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던가. 그는 곧이어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그나저나 이거 비싼 검 같은데 내다 팔면…… 흐흐!”

순간!

들려오는 파공음!

쌕! 파팟!

갑작스레 나타난 한 형체에 지드는 깜짝 놀라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어이쿠!”

꽈당!

그는 뒤로 넘어지면서도 엄청난 기세에 눌려 숨이 턱 막혔고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짰다.

“컥!”

지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휜 수염을 펄펄 날리는 조그만 체구의 노인이었다. 지드는 재빨리 신형을 추슬렀고 경계의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세요.”

“…….”

노인은 안광이 폭렬하듯 무섭게 지드를 노려보기만 했다. 지드는 아무래도 검 주인 나타났나 싶어 벌써부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드는 노인의 생김새나 차림새가 너무나 이질적이라서 호기심이 일었다. 짝 찢어진 눈매에다 튀어 나온 광대뼈는 정말이지 처음 보는 이상한 인종이랄까, 게다가 이상야릇한 복장은 또 어떤가.

그것보다도 이마가 환히 보이도록 머리를 뒤로 넘겨서 붉은 끈으로 묶은 모습은 계집애들이나 하는 머리치장 같아 보였으니 지드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노인이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너, 내 칼 만졌지!”

지드는 노인의 위압감에 두려움이 일면서도 습성대로 일단 부인하고 볼일이었다.

“아, 아니요.”

“거짓말하면 죽는다.”

“저, 정말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과 칼집을 집어 올리더니만 아까보다도 더욱 화난 얼굴로 지드는 노려보았다.

“이렇게 칼집이 뽑혔는데도 거짓말할 거냐!”

“…….”

순간 말문이 막히고만 지드, 그는 괜히 거짓말을 했나 싶나 하고 벌써부터 후회감이 밀려왔다. 상황을 보니 당장이라도 노인의 검에 목이 싹둑 베여 이곳에서 개죽음을 맞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검날이 서서히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왔다.

‘칼 한번 만진 게 뒈질 짓인가! 빌어먹을.’

지드는 내심 대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꼼짝 못하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이 살갗에 닿자 그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아! 개 같은 내 인생, 결국 이렇게 종치는군.’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지난 일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그려졌다. 참으로 한심한 인생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됐다 싶은 심정도 있었다.

솔직히 노인의 정체가 뭐기에 칼 한번 만졌다고 사람 목숨을 해치기까지 하나 따질 의향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삶의 집착이 사라져 있었다.

“…….”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운명의 순간을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려치려면 빨리 칠 것이지, 왜 이리 뜸을 들인단 말인가.

세상에 쉬운 것이 없다더니, 죽는 것도 왜 이리 힘든지.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야 지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코앞에 노인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실실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흐흐.”

지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자 노인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놀랬지!”

“…….”

“장난이었다. 허허허!”

‘뭐, 뭐야, 이 영감.’

“거참, 희한한 놈일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말이야.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십칠 년이 지났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지드는 멍하니 노인을 바라볼 뿐, 노인 역시 지드를 빤히 쳐다보며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하더니만 잠시 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젊은 녀석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구만. 그나저나 이 깊은 산중에는 왜 올라온 겨.”

“…….”

지드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노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여? 여기 왜 왔냐니까!”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목소리 컸던가. 지드가 깜짝 놀라 얼떨결에 대답했다.

“수, 수련하려고요!”

“수련이라고?”

“네.”

“뭔 수련?”

“검술…… 수련요.”

“검술이라…….”

노인은 지드의 등 뒤에 배낭 밖으로 삐져나온 철검을 확인하더니 그제야 수궁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청루각(靑樓閣)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녀석이 제법 담력은 있어 보이는군. 사나운 짐승들이 가득한 산중에 혼자서 겁도 없이 들어오다니.”

지드가 이번에도 의아스런 얼굴을 했다.

“천…… 누…… 각? 그게 뭔데요.”

묘한 발음에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노인의 이상하게 생긴 외모와 차림새에 놀랐고, 이어 그의 요상한 말투와 가끔 들어보지도 못한 용어를 말할 때에는 전혀 딴 세상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대체…… 이 노인 정체가 뭐야.’

“터를 잡으려면 여기 강가 근처가 좋을 거여.”

노인은 한마디 하더니만 냅다 검을 집어 들고는 반대편 능선 아래로 다가가더니만 훌쩍 뛰어내렸다.

홱!

지드는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노인이 사라진 능선 부근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곳은 수십여 m나 되는 절벽이었다.

혹시라도 지드는 노인이 자살이라도 했는지 아래 지면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만 협곡과 맞닿은 숲 안쪽으로부터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을 뿐.

설마하니 노인이 저곳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