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지드, 경호대장이 되다 (6/81)

CHAPTER 5 지드, 경호대장이 되다

집으로 돌아온 지드의 일상생활은 그리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아니 가족들의 무관심은 전보다 심해졌다고나 할까.

아버지와 형제들은 4년 만에 돌아온 지드에 대해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왜 집으로 기어 들어왔는지 묻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다만 어머니만이 여전히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주시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농사일을 하는 동안 지드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점심 식사 전까지 자빠져 자기.

식사 챙겨먹기.

마당에 기르는 개들 괴롭히며 소화하기.

자기 방에서 낮잠 자기.

저녁 식사 먹기.

개들 또 괴롭히기.

집 근처를 배회하며 빈둥거리기.

선술집 가서 옛 친구들과 술 먹고 잡담하기.

이튿날,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무렵까지 자기.

누가 봐도 한심한 일과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일 뿐, 실상 그의 행동을 면밀히 살펴보자면 전혀 다른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점심 식사 전, 자하신공에 의한 내공심법 수련하기.

개들을 대상으로 장공(掌功), 지공(指功) 연습하기.

방에서 낮잠 자는 척 검법 구결 운용 및 연구하기.

개들 대상으로 수공(手功) 수련하기.

마을 배회하는 척 야산에서 경공(經功) 수련하기.

새벽 내내 권법(拳法) 및 내공심법 수련하기.

지드는 2년 전 스승님이 자신이게 맡긴 화산파의 정수 비급들을 연공하느라 나름대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스승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진신 내공은 과연 엄청났던지 십사수매화검법(十四手梅花劍法)의 모든 초식에 대해 제법 발전을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 완벽히 익힌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본다면 지드의 현재 무공 수위는 화산파 매화검수(梅花劍樹, 전 무림이 알아주는 화산파의 미래 유망주)와 같은 급수이거나 고수 반열에 당당히 오른 위치였다.

하지만 지드에게는 최근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이 세계 관점으로 볼 때 무공 성취도가 스스로 어느 정도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섣불리 나서서 도전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고, 겁 많은 지드로서는 혹여 강자를 만나서 맥도 추지 못하고 패할까 봐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소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드는 자신이 익힌 무공 전투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제대로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캥! 캥!

개들이 시끄럽게 짖는 밤이었다.

지드는 술 한잔 생각이 났는지 선술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늘 같은 구석에 옛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지드를 보자 손을 흔들며 반겼다.

“어이! 요즘 며칠 동안 안 보이던데.”

지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좀 바빴어.”

그러자 피식 웃는 친구들.

“하하. 빈둥빈둥 노는 것도 바쁘다는 표현을 쓰시나?”

“제길! 네 녀석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내 딴엔 이 생각 저 생각에 대가리가 복잡해서 터질 지경이라고.”

“푸하하! 저놈 또 가출하겠네? 야, 야. 이번만큼은 가출하지 말고 웬만하면 고향에 정착하지 그러시냐.”

“쳇! 네놈들 일에나 신경 쓰시지.”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지 말고 이리 와서 술이나 한잔해. 인생 뭐 있나? 그저 하루하루 즐기면서 살면 그만이지.”

“그 말에는 동감이다. 흐흐!”

지드는 이내 활짝 미소를 지으며 구석 탁자로 향했다.

“그나저나 오늘 뭔 날인가? 늦은 밤까지 자리를 뜬 녀석들이 한 명도 없네?”

“하기야 뭔 날은 뭔 날이지. 며칠 전 산 너머 총관 저택에 일자리가 제법 많이 나왔는데, 거기에 취직할까 말까 의논 중이거든.”

“일자리라고? 무슨 일인데.”

일자리라는 말에 지드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서 놀고먹는 자신에 대해서 아버지와 형제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으니 조만간 폭탄이라도 터질 기세였다.

“저택 경비.”

“저택 경비라고?”

“단순히 경비만 서는 게 아니라 뭐 호위직도 겸비해야 한다나.”

“그럼 용병을 뽑는단 거잖아.”

“뭐, 그렇게 볼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건 무슨 뜻이지?”

“월급이 너무 적단 말일세. 그저 집 지키는 경비원 품삯만도 못하지.”

“얼마 준대?”

“오십 페니.”

순간 지드의 얼굴에 실망감이 확 돌았다.

“오십 페니라고? 하루치도 아니고 한 달치가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빌어먹을 총관 같으니라고, 누굴 거지로 알아?”

지드가 열을 내자 친구들이 잠시 말문을 닫았다. 잠시 후 한 친구가 말을 건넸다.

“당분간은 그 정도 금액을 주지만 나중에는 열 배로 올려 준다는 조건도 있어.”

 지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총관 저택 사정이 딱하게 되어 있더라고.”

“사정이 딱하다니?”

“아마 작년 이맘때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제국 황궁 내에서 황권과 원로원들 사이에 권력 다툼 때문에 엄청난 피바람이 일어났지 않냐.”

“그…… 랬나?”

“들어봐. 결국 원로원이 승기를 잡으면서 황권과 친밀한 인사들이 대거 숙청을 당하거나 힘든 일을 당했었지. 우리 지역 총관 역시 황권에 줄을 대고 있었으니 당연지사 압박이 들어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런데 말이야…….”

친구는 말하다 말고 술 한 잔을 쭉 들이켰고 잠시 한숨을 돌렸다.

“곧 들이닥칠 위험을 미리 안 총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극단의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지.”

“극단의 방법이라면 도망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뭐……?”

“자신이 죽으면 숙청의 파급이 끝이 날 테고 죄 없는 자식들과 시종들은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흠, 안 된 일이군.”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거야. 시종장이란 늙은이가 다른 시종들과 짜고 저택 재산과 귀중품들을 모두 빼돌리고 도망갔거든.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총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 달 전 즈음 자객들이 저택을 침입해서 그 자식들마저 모두 죽이려고 했다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 집 장녀가 꽤 총명하다고 소문났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하고 비밀 장소를 미리 만들어 둔 덕분에 본인과 세 동생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나 뭐라나. 뭐, 하지만 차후 또다시 살아나리란 보장이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더라고.”

그제야 지드는 총관 저택에서 왜 경비 및 호위병들을 뽑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서 사람들을 구하는 거였군.”

“뭐, 오십 페니가 아니라 오백 페니를 준다고 해도 그곳에 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야. 하물며 누가 그 적은 돈에 목숨을 걸고 저택을 지키겠어? 우리도 막 됐다고 얘기하던 중이야.”

“…….”

지드가 잠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만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친구에게 질문했다.

“그, 그런데 거기 장녀 말이야. 혹시 예쁘게 생겼어?”

“예쁘지. 총명하고, 착하고, 현명하고, 다방면에 못하는 것이 없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라더군. 오죽했으면 수년 전 황궁 파티에 참석했다가 황태자는 물론 모든 청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겠어?”

“이름이 뭔데.”

“뭐더라? 아, 맞아. 아마 아카시안일 거야.”

“저택이 어디라고 그랬지?”

그러자 친구가 묘한 얼굴을 했다.

“그건 왜 묻는데?”

“경비직에 관심 있어서.”

순간 친구들이 다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실력에 거기 가서 뭘 하려고?”

지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문 쪽으로 향했다.

“가서 마당이라도 쓸지 뭐.”

이번엔 다른 친구가 다시 소리쳤다.

“너, 그냥 우리 놀리려고 농담으로 말해 본 거지?”

“아니.”

“설마 진짜 거길 가려는 거야? 기껏 해 봐야 네놈은 하류검사잖아? 대체 뭣 때문에 그런 모험을 하는 건데?”

그러자 지드가 발걸음을 멈추고 친구들에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니들이나 잘하세요.”

“…….”

해 밝는 대로 걸음을 옮긴 지드는 총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마당 주변을 스윽 둘러보기 시작했다.

넓은 뜰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정원에 이름 모를 잡초들이 사람의 키만큼 듬성듬성 나 있었다. 그 너머 본관 건물 계단과 난간에는 허름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대략 100여 명 정도일까? 그들 역시 지드와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구하러 모여든 지원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네.’

이것도 직업이라고 몰려든 사람들을 보니 문뜩 옛날 자기 자신이 생각이 났다.

하류검사들의 삶이란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검사의 신분이건만 그들이 얻는 일자리 대부분은 용병 집단이나 저택에서 심부름이나 경비 혹은 각종 허드렛일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 모인 사람들 역시 슬쩍 보기만 해도 허름하다 못해 꼬질꼬질한 차림에 녹슨 싸구려 검들을 찬 행색이 보인다.

미루어 보아 단돈 50페니라도 벌어 보려고 모여든 전형적인 하류검사들이 틀림없었다.

청춘을 밑바닥에서 보내야만 했던 지드는 그들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잠시 후 지드는 마당 안쪽 계단으로 향했다.

검사들은 누군가 또 지원하러 오려니 하고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지드 역시 그들의 허름한 복장과 별단 다를 바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무리 속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안녕들 하슈, 하하!”

지드가 먼저 큰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그들 역시 손을 들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쇼?”

“어서 오슈.”

항시 느끼는 거지만 검사의 급수가 낮으면 낮을수록 사람들의 인성은 대체적으로 순박하고 우호적이었다.

물론 그 반대로 급수가 높아질수록 실력 있는 검사들은 찬바람이 쌩쌩 불다 못해 나중에는 냉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이 바닥이다.

어쨌든 지드는 이들과 만나자마자 마치 오랜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이런저런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제법 많이들 오셨네? 이거…… 초반부터 경쟁이 만만치 않겠는걸요.”

“그래도 결국엔 우리들 중에 가장 실력 좋은 사람이 뽑히겠지, 뭐.”

“그나저나 몇 명이나 뽑는다는 거요?”

“글쎄요.”

“진짜 몇 명 뽑지…….”

“지원자가 백 명이 넘는데 이왕이면 다 뽑지!”

“맞아! 그랬으면 좋겠구먼. 하하.”

“동감이올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들에게는 그 어떤 사전 정보도 없는 것 같았다. 하물며 이 저택이 자객들의 표적이 되어 있다는 것조차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50페니 벌자고 경쟁 운운하는 것조차 지드에게는 슬픈 현실로 느껴졌다.

대체 이 사람들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차 있단 말인가.

사실 얼마 전까지도 지드 자신도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류검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부터 순진한 모습까지 눈에 보이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건물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원자들은 저마다 잡담을 멈추고 일제히 그쪽으로 시전을 돌렸다.

끼익―

곧이어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에 지원자들의 시선의 모아지면서 일시에 정적이 감돌았다.

“…….”

석양 햇살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계단을 사뿐히 밟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적당한 키에 단정한 옷차림, 뒤로 묶은 머리는 단아한 소녀의 표상(表象)을 보는 것 같았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에 굳게 다문 조그만 입술은 지원자들의 집중어린 시선을 받고도 전혀 흔들림 없는 20대 초반의 성숙한 여성처럼 보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역시 힘 있고 당차 보였으니.

“모두 이리로 모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중앙 계단 아래 서 있는 그녀를 중심으로 100여 명의 지원자들이 모였다.

지드 역시 그들 틈에 끼여서 잽싸게 맨 앞줄로 새치기 했으니, 오로지 대단한 미인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함이었다.

타다닥!

“뭐야! 왜 밀고 그래?”

“거, 같이 좀 봅시다!”

대충 자리를 선점한 지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살펴보더니 내심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와우!’

다소 강인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결코 부드러움을 배제할 수 없는 얼굴이랄까! 정말이지, 세상에 저렇게 절묘하게 우아한 여성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지원자들 역시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거나 감탄해마지 않았다.

잠시 후 산만했던 대열이 조금 정리가 되자 여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선 이렇게 지원에 응해 주시고 먼 길을 오신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지원자 분들은 일단 이곳 저택에서 하루 여장을 푸시고요. 내일 오전부터 간단한 검술 시험 절차를 걸쳐서 합격자들 스무 명을 선출할 예정입니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여기서 할 일이 정확히 뭡니까!”

“경비 및 경호 임무입니다.”

“경호라면 누구로부터 보호를 의미하는 겁니까?”

그러자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자객들로부터입니다.”

자객이라는 말에 지원자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바로 그때 현관 안쪽으로부터 남자 아이 둘과 어린 소녀 하나가 각자 광주리를 안고는 마당으로 내려왔다.

세 명의 아이들이 가지고 온 것은 호밀 빵과 나무 식기, 그리고 커다란 우유 가죽 통이었는데 사람들 사이로 다니며 일일이 배급하기 시작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다들 시장하실 텐데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경호 선출은 내일 오전부터 할 것이니 오늘 밤은 이곳 저택에서 머물기 바랍니다.”

그러자 누군가 불평했다.

“대체 뭐야, 고작 빵하고 우유라니! 고기랑 술 없소?”

하나가 외치자 다른 지원자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이런 걸 먹으라니!”

“부잣집 총관 저택인데,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요?”

여기 모인 지원자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공고문을 보고 모여 든 외부인들이기에 이곳 저택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호밀 빵하고 우유조차 이들 남매들이 지닌 장신구와 마지막 비상금까지 톡톡 털어서 마련한 귀중한 식사라는 것도.

하지만 정작 문제는 지원자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저들끼리 자객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저마다 고개를 가로젓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거 왠지 이상한데?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아.”

“아까 자객 운운하던데, 여기 말이야. 설마…….”

이튿날 오전.

100여 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거의 사라지고 10명만 남게 되었다.

여인은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이외로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남아 준 10명에게 고마운 느낌이었으리라.

그녀는 간단한 검술 시험을 시행하려고 했다.

“다들 명심해서 들으세요. 만일 제가 제시한 시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자객들과 맞서 싸울 때 적어도 스스로의 목숨 정도는 지킬 정도의 능력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이면 바라마지 않겠지만…….”

여인의 얼굴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서 이번 시험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월급 50페니로 실력 있는 검사가 나서 줄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사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근 집을 저당 잡혀서 현찰을 구해 볼 참이었는데, 숙청 대상으로 낙인 찍혔는지 고리 대금 업자들까지 외면하고 있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세 동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세상은 그마저 허락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끝까지 남아 준 고마운 검사 지원자들을 죽 둘러보았다. 물론 남아 준 건 고마웠지만……

솔직히, 왠지 모르게 하나같이 약골 같아 보였다.

햇살에 눈이 부신 한낮이었다. 지드를 포함한 10명의 지원자들은 여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저택 건물의 후미 쪽이었다.

잠시 후 지원자들은 저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저택의 뒤뜰에 규모가 상당히 큰 검술 훈련장이 있을 줄은 몰랐다. 평생토록 웬만한 저택의 내부조차 구경 못한 지원자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드 역시 그들과 별다를 바 없었으니.

“와우.”

“세상에나! 엄청나게 크다.”

“마치 요새 같아.”

“요새치곤 조금 작은데.”

“어쨌든 저택 안에 이런 게 있는 건 처음 봐.”

“나도.”

그런 그들의 호들갑에 여인의 표정은 더욱 침울해져만 갔다. 그저 평범한 규모에 저렇듯 감탄을 하니 만일 도시의 대저택에서 제대로 된 수련장을 본다면 십중팔구 놀라서 기절할 게 분명해 보였다.

정말이지, 저들 중에 제대로 된 검사가 있을까? 여인은 내심 한숨만 나왔다.

‘후…… 그래도 시험은 치르게 해야겠지.’

여인은 다소 소란스런 지원자들을 진정시키고는 다음 진행을 위해 수련장 한가운데로 모이게 했다.

“지금부터 한 분씩 나와서 각자 자신들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검술 동작을 보여 주기 바랍니다.”

“…….”

착각일까? 지원자들이 움찔하는 눈치였다.

“맨 앞에 계신 분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잠시 후 30대 초반의 첫 번째 지원자가 철검과 함께 검술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붕! 붕!

마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듯한 성의 없는 동작, 어디서 보긴 봤지만 명확하지 않은 5급소 공격 기술을 보여 주려는 것 같았다.

검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녹슨 곳이 군데군데 보였고 심지어 무디어 보이는 검날은 무 조각 하나 제대로 벨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인은 예상했다는 듯 표정에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다음 분 나오세요.”

다음 지원자 역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어기적어기적 마지못해 나왔다. 그리고 앞서 나왔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충 검술 동작을 펼쳐 보였다.

붕!

“어이쿠!”

하지만 처음 휘두른 검에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마는 지원자.

그는 다시 신형을 추스르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균형을 잃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두 번째 지원자는 검술 동작이고 뭐고 간에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여인은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습니다. 들어가시고 다음 분 나오세요.”

잠시 시간이 흘렀고 10명 중 9명의 시험이 끝이 났다. 그녀의 예상대로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하류검술 비스 무리한 것들로 일관했다.

이제 남은 지원자는 단 한 사람, 이제 그녀는 그저 빨리 이 시험을 끝내고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다음 분 나오세요.”

다소 빤빤하게 생긴 사내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짓고 등장했다. 그는 다른 지원자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아예 철검을 어깨에 걸치고는 당당하게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모습에 여인이 이번에는 사뭇 다른 눈빛을 띠었다.

곧이어 사내의 검술 동작이 시작되었다.

슥―

미끄러지듯 오른쪽 발을 쭉 뻗는 동시에 어깨에 올려놓았던 철검이 미풍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전방을 향했다.

홱― 삭― 타다닥!

도약 동작이 터져 나오고 순식간에 어른 키 높이만큼 솟구쳐 오르더니만, 고공에서 현란한 검술이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파! 파! 파! 팟!

정확히 네 번의 쾌검술이 끝나자마자 마치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듯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지상으로 사뿐히 착지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유연한 몸놀림, 검조차 그와 하나가 되어 나뭇가지 흔들리듯 이리저리 마구 요동치는 듯 보였지만 그 모든 동작들이 절묘한 균형을 이룬 듯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지원자들은 저마다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고 여인조차 눈빛이 흔들렸다.

‘저 동작들은 처음 보는 건데…….’

사실이 그랬다. 전혀 다른 차원의 이질적인 검술 동작이랄까.

그녀는 기존의 정통 검술의 기본인 힘과 파괴력, 절도와는 상반되는, 너무나도 유연한 연속 동작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했다.

다만 한 가지 정도는 추정할 수 있었으니 서커스 공연자의 능숙한 검무(劍舞) 한 편을 본 느낌이랄까.

사내가 검술을 끝내고 검을 다시 어깨 위에다 멋들어지게 올려놓자 박수 소리는 예상외로 건물 2층 테라스에서부터 들려왔다.

짝! 짝! 짝! 짝!

“아저씨 최고!”

사내가 그곳을 쳐다보자 두 명의 사내아이들과 어린 소녀가 환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어제 지원자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누어 준 여인의 귀여운 동생들이 분명해 보였다. 이어 사내는 그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상체를 숙여 예의를 표했고 윙크를 보내주었다.

“고맙다, 후후!”

순간, 들뜬 기분을 싹 가라앉게 하는 여인의 냉랭한 음성.

“제가 보고자 했던 것은 검술 동작이지 검무가 아닙니다.”

그 말에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다름 아닌 지드였고 방금 전 보여 준 것은 십사수매화검법의 초반 초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건 검무가 아니라 검술이 맞소.”

“거의 대부분이 춤추는 동작인데 어찌 검술이라 하는 거죠.”

“그야 검술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검술의 소속 기원과 현재 가문의 유파에 대해서 말씀해 보기 바랍니다.”

“…….”

말문이 막히고 만 지드였다.

생각해 보니 이 여인이 무공(武功)에 대해서 알 턱이 없을 테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그 자신조차 스승님이 십사수매화검법의 똑같은 초식 동작을 선보였을 때 같은 반응이 아니었던가.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이번 시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지드가 당황했다.

“끝내다니요!”

다른 지원자들 또한 들고 일어났다.

“어찌 검술 동작 한 번만 보고 결정을 한단 말이오!”

“맞소! 적어도 대련이나 하다못해 체력과 민첩성이라든지 여타 다양한 시험을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지드 역시 그들과 뜻을 같이 했다.

“옳소!”

“…….”

여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못내 말문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각자 한 번만 목검 대련을 허용하죠. 상대는 저입니다. 시합에 앞서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저는 상승검사이셨던 아버님으로부터 검술을 직접 사사 받았다는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승검사라는 말에 지원자들의 표정이 일시에 경직이 되어 버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슥!

“앗!”

“이얏!”

직접 대련을 해 보니 여인은 지원자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류의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던가. 그저 50페니라도 받기 위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격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검술 실력이라지만 그래도 검사의 칭호를 들으며 나름대로 실전이라면 실전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을 했던 자들이었다.

여인의 정통 검술 능력이 중급에 해당한다지만 집요한 끈기로 덤벼드는 그들 하나하나를 막기까지는 다소 버거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길 수 없거나 대등한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 아홉 명의 지원자는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지원자는 단 하나, 아까 이상한 검무 동작을 보여 주었던 곱상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만 막으면 이번 시험은 없었던 일로 막을 내릴 것이다.

곧이어 그가 시합용 목검을 들고 여인 앞으로 다가섰다.

저벅저벅―

다소 마른 체구에 비해서 묵직한 발걸음이 들려왔으니 여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랄까.

다소 경솔하고 가볍게 보였던 그가 갑자기 큰 산이라도 된 듯 의연한 모습으로 보였다.

잠시 후,

삭―

툭!

“…….”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인, 대련이 이리도 허무하게 끝이 날 줄은 정말 몰랐었다.

검을 들어 공격을 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목검이 불룩한 가슴을 겨냥해 왔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실력이 없다면 이뤄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어, 어떻게 한 거죠?”

“그보다…… 자, 규정대로 저를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거죠?”

“아, 예…….”

녀석이 목검을 거두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드가 대련을 가급적 빨리 끝낸 이유는 그녀가 또다시 무공의 이상한 검술 동작을 따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하하. 고맙소!”

지드는 너무 기뻤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이런 큰 저택의 경호 임무를 얻었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이곳이 몰락한 가문이라든지 당장 자객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를 곳이라 할지라도 당장은 환호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반면 여인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그 짧은 시간에 왜 제압을 당해야만 했는지 도무지 정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귀신에 홀린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드의 절묘한 신법에 이은 무공의 오묘한 쾌검 비기를 어찌 알겠는가.

그처럼 총명하기로 이름 난 그녀조차도 대체 지드를 고용한 것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판단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날 저녁.

여인은 경호원이 된 지드에게 저택 이곳저곳을 직접 돌아다니며 상세히 안내해 주던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대문 앞에 이르러 문단속을 하려던 차에 무슨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지드가 호기심이 동해 대문을 열자,

“엥……? 뭐야, 당신들!”

놀랍게도 계단 앞에 사내들이 축 늘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던가! 여인 역시 무슨 일인가 싶어 대문 밖으로 나왔고 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설마하니 아까 탈락했던 아홉 명의 지원자들이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될 때까지 여기에서 죽치고 앉아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여인이 지드에게 물었다.

“이분들은 왜 가지 않고 여기 있는 거죠?”

“…….”

지드가 다소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여인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뭔가 알고 있은 듯한데, 제게 말해 주시겠어요?”

하류검사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드가 결국 저들을 대변이라도 하듯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저들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여인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건 왜죠?”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죠.”

“갈 곳이 없다니요?”

“이곳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러자 지드는 그 자신도 답답한 듯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이런 큰 저택에서 살아온 여인이 세상물정을 어찌 알겠는가.

더군다나 밑바닥을 전전하며 겨우겨우 삶을 버티어 온 이들에 대해 이해한다는 자체가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시죠. 처음에는 백여 명이 넘는 지원자들로 이 안이 가득했는데 여기 분위기가 싸하자 다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저들은 그럼에도 당당히 남은 자들입니다. 그 의미는 목숨을 각오하고 남아 있겠다는 결의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여인은 그제야 납득이 갔는지 다소 숙연해졌다.

“그랬군요.”

“…….”

잠시 침묵이 흘렀고 여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저들을 다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자객들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저 무책임하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그러자 지드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여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드를 바라보았다.

“쉽게 죽지 않는다니요?”

“일단 저들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한데요?”

“네?”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을 이끌어 줄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끌어 줄 사람이라고요?”

“그냥 돌려보내기보다는 뭔가 가르치거나 시도해 보고 결정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죠.”

여인이 잠시 골몰하더니만 지드를 바라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책임지면 되겠네요.”

“책임을 지다니요?”

“저기 혹시 저들의 경호대장이 되어 주실 수 있겠어요?”

지드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네?”

“부탁드릴게요.”

“…….”

지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니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수도 있었다.

‘경호대장이라니……?’

그런 제의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꿈만 같은 일이랄까.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는 지드,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표정 관리부터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음, 그게 말이죠. 그러니까…….”

“맡아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대가 경호대장이 되어 준다면 저 역시 저들을 받아들일게요. 물론 대우는 직급에 걸맞게 해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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