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뉴월 땡볕에 늘어진 강아지처럼 하류검사들은 저마다 담벼락 그늘 아래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드는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감했다. 잠시 후 지드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앞마당으로 모이시오!”
“…….”
집합이란 말에 검사들이 하나 둘 눈을 치켜뜨고는 대체 누가 소릴 지르나 살펴보았다.
“아이고, 졸려 죽겠구먼.”
“오전부터 대체 뭔 일이래?”
초여름으로 치닫는 계절인지라 벌써부터 태양 열기가 장난 아니게 뜨거웠다.
그래서인가, 하류검사들은 불과 10여 분도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몸을 배배 틀며 지루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순간 당혹해하는 자는 바로 그들을 불러 놓고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지드였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그 누구 위에 올라서서 지휘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기에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할 말 없으면 빨리 끝내쇼.”
이어 다른 자들의 불평이 이어졌다.
“에구, 이런 땡볕에 뭘 하자는 건지.”
“열기가 가라앉을 오후 늦게 모이면 안 되겠소?”
참으로 참을성 없는 자들이었다. 어제까지 동등한 관계였던 지드가 경호대장이라는 사실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들은 그가 자신들을 다시 고용하게 만든 은인이었기에 그런대로 예우를 차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편 지드는 초반부터 뭔가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저들에게 먹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결국 그가 배에 힘을 꽉 주고는 제법 힘 있게 말문을 열었다.
“다들 내 말 명심해서 들으시오!”
목소리가 당찼던가. 순간 건들거리던 하류검사들의 시선이 지드에게 모아졌다.
“알다시피 난 오늘부터 경호대장의 임무를 부여받고 여러분들을 이끌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라오. 그리고 이후부터는 말을 놓을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 대장과 부하들 사이에는 확실한 선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잘 알 것이오.”
“…….”
반응이 없었다. 지드가 다소 당황한 얼굴을 하자 그때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거참, 누가 뭐래요?”
“네?”
“대장이 부하들에게 말 놓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냐고요.”
이번엔 제일 나이가 어려 보이는 청년이 눈치 없이 외쳤다.
“정말 대장님 순진하다.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하다니, 헤헤.”
그러자 누군가 그를 만류했다.
“쉿! 말조심해. 대장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냐!”
“내가 뭐요!”
“너, 지금 서열 이 위인 나한테 개기냐?”
“갑자기 무섭게 왜 그러쇼.”
빡!
“악!”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듯한 30대 초반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사정없이 뒤통수를 갈기자 막내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자식이, 감히 개기고 있어.”
이번엔 제일 나이 많은 자가 나섰다.
“그만들 하자! 첫날부터 대장님 앞에서 무슨 추태냐.”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아홉 명이건만 그들에게도 서열이 있었던가. 아마도 지난밤에 나이 순서대로 서열을 정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지드는 그저 말없이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대문이 활짝 열려진 저택의 대만 바로 앞에는 지드와 여인 그리고 그녀의 세 동생들이 저 멀리 보이는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유독 걱정스런 얼굴을 하는 여인,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심초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바로 옆에 묵묵히 서 있는 지드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문을 열었다.
“너무한 거 아닌가요?”
지드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닙니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떡해요.”
“그들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어떻게 확신하죠.”
“월급 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냥 갈 자들이 아니죠.”
여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는가 싶었지만 결국 마음에 있는 생각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이건 너무한 처사 같아요. 배낭에 무거운 돌들을 가득 채우게 하고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련에 임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가까운 인근 야산까지 선착순으로 뛰게 시키다니요. 저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들에게는 큰일 날 것도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걸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죠?”
“…….”
이번엔 지드가 잠잠했다.
잘 안다 뿐인가. 그 역시 얼마 전까지는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하류 인생.
사실 지드 역시 내심 적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성적으로 근성과 끈기가 모자라는 아홉 명의 부하들이 과연 초반 혹독한 기초 체력 훈련을 제대로 소화해 낼지 확신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지드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들은 올 겁니다. 아니 반드시 돌아와야만 합니다!”
여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경호대장에게서 뭔가 확고한 신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니 일단 그의 말을 믿어 보는 수밖에.
***
또다시 수일이 지났다.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저택의 앞마당은 간밤에 폭우가 쏟아진 진흙 바닥을 게거품을 물며 박박 기는 자들로 정신이 없었다.
슥―
“아아아! 배낭 무게 때문에 이젠 움직일 수가 없어.”
“나는 당장 검이라도 팽개치고 싶단 말이야.”
“대체 대장이 뭔 짓을 시키는 거지? 우! 정말 힘들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지드의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잡담 금지!”
한편 건물 2층 테라스에는 여인과 그녀의 세 동생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당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장 너무 무섭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동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둘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막내 여동생도 한마디 했다.
“왜 아저씨들만 진흙에서 노는 거야? 나도 저거 해 보고 싶다.”
여인이 결국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각자 할 일들 해. 그리고 앞으로 여기 나와서 구경할 생각하지 마.”
여인은 다소 거칠고 혹독한 수련 광경을 동생들에게 더 이상 보여 주고 싶지 않음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저택의 대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
남동생들은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보고 합창하듯 외쳤다.
“아르콘 형이다!”
빨간 망토를 휘두른 은빛 갑옷에 허리에 찬 은빛 검, 그리고 붉은 깃털을 날리는 투구를 안고 다가오는 조각상 같은 젊은 청년.
그를 알아보고는 남매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니, 특히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르콘.’
아르콘은 정원 옆길을 걸어오면서 마당에서 박박 기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하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그때 2층 테라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소리들.
“형!”
“와우, 진짜 멋있다!”
여인 역시 매우 반가운 얼굴이었다.
청년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하! 아카시안, 그새 숙녀가 다 되었구나? 이게 이 년 만인가.”
“정확히 일 년 하고 칠 개월이지.”
“그걸 다 세고 있었어?”
“어서 올라오기나 해.”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누구지?”
“경호원들 훈련 중이야.”
“경호원들?”
잠시 후 청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지드가 누군가 하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얼핏 봤지만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선가 한번 본 얼굴 같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잠시 시간이 흘렀지만 아카시안과 청년 아르콘 사이에는 제법 긴 침묵이 흘렀다. 아카시안의 집안 사정을 전해 들은 아르콘은 연신 한숨만 쉬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군. 설마하니 이런 시골구석조차…….”
아카시안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자객들이 언제 또 올지 몰라.”
“그래서 마당에서 이상한 훈련을 하는 사람들을 고용 한 거로군.”
“응.”
“어쨌든 아버님 일은 정말 안됐다. 내게 정말 잘해 주셨는데. 사실 그분 추천 덕분에 촌놈 출신인 내가 제국의 검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잖아.”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아카시안은 애써 미소를 짓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학교 일은 어때?”
“나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지.”
“하기야 너는 어렸을 때부터 검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
“사실 이번 상반기는 차석으로 마쳤어.”
그때 아르콘은 테라스 아래쪽을 문득 바라보다가 계단에 서서 훈련을 지휘하는 지드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러고는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으니.
“가만.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보다니?”
청년이 잠시 골몰하는가 싶더니만 생각이 났는지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찼다.
“아! 그러고 보니, 아마 오 년 전쯤이었나? 검술을 가르쳤던 바로 그 사람 같은데? 이름이…… 지드이던가.”
아카시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경호대장 이름이 지드인데?”
아르콘의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저 사람이 경호대장이라고?”
“응.”
한숨을 내쉬고 마는 아르콘,
오래 전 자신이 마을 전쟁놀이 대장으로 있었을 때 저 사람과 한 번 대련한 적이 있었고 단 일 검에 때려 눕혔던 기억이 생생히 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별 볼일 없는 하류검사가 이번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려서 이곳의 경호대장이 되었는지 씁쓸한 기분이었다.
“후.”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지.”
“아무래도 너 동생들 데리고 당장 어디론가 숨는 게 좋겠어.”
“무슨 소리지?”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내 말대로 하자. 저 경호대장 말이야, 내가 조금 아는데 결코 너와 네 동생들을 지켜 줄 능력이 없는 자야.”
그러자 아카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나, 저 사람한테 공격 한번 못해 보고 패했거든.”
아르콘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저자는 네 검술 실력에 반도 미치지 못하는 자인데?”
“아무튼 대단한 실력 같아 보였어. 지금도 그가 무슨 검술을 펼쳐서 나를 제압했는지 도통 모르겠거든.”
아르콘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무슨 사기라도 쳤겠지.”
“사기라니?”
“원래 저자에 대한 소문이 그리 좋지 않거든.”
아르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투구와 검을 챙겨 들었다.
“이만 가 볼게.”
“벌써.”
“사실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여기부터 들른 거야. 앞으로 한 달은 여기 있을 거니까 그때까지 매일 올게. 저 사기꾼도 감시할 겸.”
잠시 후,
건물 밖으로 나온 아르콘은 다짜고짜 지드에게 다가가더니만 불쑥 말을 건넸다.
“나를 알아보겠습니까.”
지드 역시 그제야 생각이 났다.
“너였군.”
“하필 왜 여깁니까.”
“뭔 말이냐?”
“사기 칠 데가 없어서 다 기울어져 가는 저택을 대상으로 삼았나요.”
순간 지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
“아카시안 말에 의하면 당신은 시험을 거쳐 정식으로 고용되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솔직히 그 말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난 내일부터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며 당신을 감시할 겁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제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
아르콘은 말이 끝나자마자 찬바람이 홱 날릴 정도로 등을 돌려 저택의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드, 그저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
아르콘은 정말이지 성가신 녀석이었다. 지드는 며칠 동안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졸졸 따라다니며 수련 과정을 일일이 참견하는 아르콘 녀석이 그렇게도 귀찮을 수가 없었다.
어떡해서든 자신의 사기성을 밝힌다는 명목 아래 눈에 불을 켜고 있었으니 혼을 내거나 화를 낸다고 해서 쉽사리 쫓아낼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오늘은 심법 훈련의 첫 단계로서 수련생들 아홉 명은 저마다 처음 해 보는 가부좌 자세로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생소하고도 희한한 자세인지라 다를 신기해하면서도 꺼려했지만 수련생들은 지드의 단호한 명령으로 마지못해 따랐다.
하지만 옆에서 뭐라 참견하는 아르콘 자식의 입만큼은 막을 수 없었으니.
“내 이럴 줄 알았어요. 가르칠 실력이 없으니까 결국 저런 이상한 훈련으로 시간을 때우려는 하는 거죠?”
지드는 웬만해서 말대꾸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훈련생들의 명상에 방해될까 봐 부득이 말문을 열고 말았다.
“한 번만 헛소리하면 진짜 혼난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어디 한번 붙어 봅시다.”
“이 자식이, 정말!”
“자식이라니요! 아무리 마을 형이라지만 말 함부로 하지 마쇼. 이래 뵈도 먹을 만큼 먹은 나입니다?”
“지금은 심법 훈련 중이니까 다른 데 가서 떠들라고.”
“헹! 생전 처음 보는 저런 사이비 수련을 시키고도 월급을 받아 챙기겠죠?”
“뭐라고!”
“왜요? 그 검은 속이 들켜서 당황했나요? 뭐, 화를 참지 못하겠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와 대련을 하든지.”
녀석이 원하는 건 바로 대련이었다.
어떡하든 지드의 속을 뒤집어서 자신과 대련토록 하고 그의 하류검술 실력을 아카시안이 보는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쫓아낼 명분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드는 생각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르콘이 뭐라 하든지 말든지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려고 했다.
“지금 중요한 수련이니까 제발 다른 데로 가 줘라.”
그때 아르콘이 대문 쪽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만 지드를 보며 묘한 미소를 띠었다.
“오늘은 부모님 모시고 어디 가야 할 일이 있어서 그냥 가는데, 내일은 반드시 당신 실체를 밝히고 말 겁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드가 그쪽을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이제 좀 조용하군.”
사실 아르콘 녀석의 등장이 남긴 그 파장은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아르콘은 옛날 지드가 같잖은 실력으로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돈을 갈취하려고 했던 일부터, 자신에게 일대일 대련에서 져서 망신을 당하고 결국 마을을 떠나야 했던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떠들어 댔다.
그러다 보니 훈련생들은 물론 아카시안마저 지드의 실체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아홉 명의 수련생들은 지드의 강압에 명상에 잠기는 척했지만 저마다 속으로는 요즘 하는 훈련들이 과연 실속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회의감부터 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당분간은 검조차 만지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체력 훈련과 심법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걸 강요한다. 이건 뭐, 정말 사기라도 치는 것인지 그들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아카시안 역시 세 명의 동생들과 2층 테라스에 수련 광경을 바라보며 다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단번에 제압한 지드의 실력을 믿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르콘의 주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르콘은 머리도 좋은데다가 상당한 검술 실력자였다. 제국의 검 사관학교 제2차 과정을 차석으로 학기를 마쳤다면 수재라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그 누구를 의심한다는 것은 뭔가 있다는 얘기.
하지만 아카시안 역시 주관이 뚜렷해 남의 말을 믿고 함부로 판단하는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난번 지드와 대련 후 뭔가 설명하기 힘든 강렬한 힘을 그에게서 느꼈고 그것이 결코 사이비 검술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었다.
잠시 후 아카시안이 실내로 들어가자 이젠 세 명의 동생들이 그제야 저들끼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기하자.”
“뭘?”
“대장 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이야.”
“그래! 난 진짜에 걸겠어.”
“난 조금 의심스러운데?”
그러자 오빠들 사이에 머리만 내밀고 있던 막내 여동생이 한마디 했다.
“난 대장 아저씨가 좋아. 아까 나랑 많이 놀아 줬거든.”
“…….”
오후 수련 과정이 끝나고 저녁 식사 시간이 돌아왔다. 조금 이른 저녁 식사인지라 아직 주변이 어둑어둑하지는 않았다. 그토록 불게 타오르던 태양은 서산으로 기울어지면서 점차 주황색의 고운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엔 양떼구름들이 대이동을 하고 있었고 산산한 바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 수련생들의 머리카락들을 산들 거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메뉴는 빵과 우유가 전부였지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아카시안의 빵 굽는 기술이 가히 예술적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정성과 세 명의 동생들이 직접 수련생들을 챙겨주는 성의가 너무도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좋은 분위기에서조차 지드는 계단 한편에서 외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르콘 녀석이 등장한 이후부터 그와 부하들 사이에 다소 소강적인 기류가 흐른다고 할까. 주종(主從)의 관계는 믿음과 신뢰가 밑받침되어 주어야만 하거늘, 초반부터 이렇게 삐거덕거리다니.
지드는 어렵게 얻은 경호대장 자리가 이렇게 힘든 것이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끼익―
대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묵직한 철제 군홧발 소리에 지드를 비롯해서 저택 안의 사람들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
금속 군장 차림의 사내들 네 명이 보였다.
순간 그들로부터 엄청난 살기가 팍팍 느껴졌다. 저마다 비쩍 마른 몰골에 폭렬하는 안광은 마치 피 냄새를 맡은 야수와도 같았으니,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서 심장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내들 중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른 세 명의 동료들에게 외쳤다.
“대문 걸어 잠그고 본격적으로 작업 시작하지.”
그들 중 하나가 물었다.
“숙청 대상은 네 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군.”
“고용인들이겠지.”
“그렇다면, 그들도 제거 대상이겠군?”
대장이 인상을 썼다.
“빌어먹을! 한두 번 해 보나? 저택에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제거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가축이나 강아지 한 마리까지 말이다.”
삭―
대장이 칼을 뽑자 나머지 세 명 역시 서슬이 시퍼런 무기들을 들었다.
아카시안의 표정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던가.
자객이라면 밤에 몰래 침입해 와서 행동을 개시해야 할 것인데 어찌 저들은 해가 지지도 않은 이때에 당당히 대문을 열고 들어온단 말인가.
아마도 이 저택에 비밀 장소가 있음을 사전에 알고 그곳에 숨기 전에 미리 왔을 가능성이 컸다.
곧이어 그녀는 재빨리 실내로 들어가서 아버지께서 사용하셨던 진검을 들고 현관 밖으로 나섰다.
현관 계단에는 지드와 수련생들 아홉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사내들이 자객이라는 것을 감지하고는 몹시 긴장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애석하게도 수련생들 모두는 하류검사 출신답게 벌써부터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중급 검술 실력을 지닌 아카시안마저 저들의 위세에 눌렸는지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이 순간 그녀가 믿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바로 경호대장 지드였다.
“어, 어떡하죠?”
지드가 짧게 대답했다.
“어떻게 해 봐야죠.”
지드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절대 나서지 마라.”
물론 그들은 감히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니 지드의 말이 반갑게 들렸을 것이다. 사실 지드 역시 내심으로 다소 긴장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하류검사 시절을 통틀어 실전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물며 상대방들의 팔뚝과 얼굴에 흉터들이 수십 개는 넘어 보이니 저들은 필시 생사(生死)를 오가며 실전 경험을 수도 없이 해 본 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한번 부딪치고 볼 일이었다. 더구나 그동안은 피해 왔지만, 자신이 익혔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그 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던가.
지드가 녹슨 철검을 어깨에 메고 자연스럽게 마당으로 걸어 나오자 사내들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 중 대장이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네놈은 뭐냐?”
지드가 당당히 말했다.
“경호대장이다.”
“경호대장…… 이라고?”
경호대장이라는 말에 사내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복장은 영락없는 하류 차림새에다가 그가 메고 있는 검조차 녹이 슬어 있었으니, 굳어 있던 그들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요즘은 경호대장의 직함을 개나 소나 아무한테나 갖다붙이나 보군.”
“개나 소나 아무것도 아닌 나한테 패한다면, 그것들은 뭐라 부르지?”
“뭐라?”
“자객들이라면 밤에나 기어 들어올 것이지, 뭐 하러 대문으로 걸어서 들어온 거요?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소.”
“지난번 왔을 때처럼 쥐새끼인 양 숨어 있을까 봐 오늘은 해가 지기 전에 찾아 온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자객이라면 복면 정도는 뒤집어써야 예의가 아닌가.”
“…….”
이 순간 지드는 스스로에 대해서 놀라고 있었다. 저런 무지막지해 보이는 살수들 앞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말을 되받아칠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벌써부터 심장이 터져서 쓰러졌으리라.
스승님의 말씀대로 심법으로 다져진 마음과 내공의 깊이에 따라 사람은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법이었던가.
“차라리 날 새기 전에 오든지. 나 새벽 잠 많은데…….”
결국 사내의 음성이 격해지고 말았다.
“뭐라!”
사내가 흥분하자 동료가 만류했다.
“저런 자식하고 무슨 말을 받아치고 그래? 그냥 죽이면 그만인데.”
“하기야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군.”
“두말하면 잔소리.”
척!
사내가 무식한 대검을 쳐들고 지드에게 향했다.
순간 지드는 등 뒤에 있던 두 개의 검들 중 무엇을 사용할까 고민했다. 하나는 그의 분신 같은 녹슨 철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승께서 잘 보관하라고 맡겨 두신 현철중검이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는 날도 서지 않고 무겁기만 한 현철중검보다는 철검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법했다.
슥!
지드가 검을 뽑자 사내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좌우, 뒤에서 협공해서 뛰어들어 왔다.
타다닥―
“너부터 죽어라!”
홱!
네 개의 검날이 지드의 사지 각 부분에 닿으려는 찰나!
지드가 뭐라 외치면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홱!
“매류통천!”
놀랍게도 그 높이가 사람 키보다도 훨씬 높았으니 사내들은 저마다 고개를 높니 치켜들고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제자리에서 가벼운 도약으로 어찌 저 멀리까지 뜰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곧이어 지상으로 내려올 신세, 과연 이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전사들답게 침착함을 잃지 않고는 칼을 겨눈 채 지드의 하강을 기다렸다.
그때, 다시 들려오는 외침.
“매영만천!”
그 순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이름 모를 꽃들이 허공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사내들은 그것이 무림에서나 볼 수 있는 매화꽃의 잔상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형상 이면에 엄청난 살수가 숨어져 있음은 더더욱 몰랐으리라.
지드는 칼끝을 지상으로 향하고 하강하면서 또 한 번 외쳤다.
“냉매섬개!”
파파파팟!
“악!”
“컥!”
지드가 지상에 착지했을 때에는 이미 사내들의 항거 능력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들은 이미 피를 토하고 바닥에 자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조차 자신들이 그 어떤 검술에 당했는지 몰랐으리라.
지드도 꽤 놀라고 있었다. 설마하니 십사수매화검법 초반에 해당하는 세 초식들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 이건 너무한데?’
제1수 매류통천으로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다음,
제2수 매영만천을 사용해 네 명을 현혹시키고,
이어서 제3수 냉매섬개로 극도의 빠른 쾌검이자 살검을 사용했다.
그렇게 지상으로 착지하기 전 그토록 짧은 순간에 네 명을 동시에 벨 수 있었던 것이다.
비단 지드만이 멍한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카시안과 수련생들 그리고 모두는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서도 믿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방금 전 지드가 보여 준 검술은 마치 신기한 마법과도 같이 꽃을 형상화하는가 싶더니만 이내 살검으로 변하여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때마침 빨간 노을은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당 한복판에 서 있는 지드의 얼굴에 햇살이 드리웠고 아카시안의 눈길은 지드의 늠름한 모습으로부터 좀처럼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지드는 적들을 물리쳤다는 기쁨보다는 처음으로 사람을 해하였다는 것이 다소 충격으로 와 닿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