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지나갔다.
번쩍!
우르릉― 쾅!
때 아닌 가을 폭우가 마구 쏟아져 내렸다. 테세우스와 네온은 지난 일주일 동안 그런대로 잘 버티었지만 결국 강풍을 동반한 장대비에 막사와 숙영 장비들을 급류에 휩쓸리고부터는 망연자실하고 만다.
“모두 사라졌어.”
“그래도 무사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이 지긋지긋한 고생이 다 그 자식들 때문이야. 대체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모르지만 찾아내면 반드시 없애버리고 말 테야!”
테세우스가 거센 물살이 흐르는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들이 협곡을 통해서 빠져나갔을 수도 있었겠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지난번엔 말하길 그들이 근처 어디엔가 반드시 숨어 있을 거라며.”
“반드시라고는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발뺌하는 거야!”
“모든 가능성을 열고 살펴볼 때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지.”
“나 참, 그래서 뭘 어쩌자고?”
“반경을 조금 더 확대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거지.”
“웃기는 소리! 만일 그들이 협곡을 통해서 빠져나갔다면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한참 멀리 갔을 거야. 어떻게 찾는다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이 근처는 온통 산악 지형이잖아. 그들이 어디로 향하든 한 달 이내에 산맥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더군다나 숙청 대상들 중에는 어린애들도 포함되어 있으니, 도망가 봐야 아직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 분명해.”
“그래서 어디로 가자고?”
“우리들의 추적에 허를 찌르려고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하겠지.”
“만일 거기 없다면?”
“그때에는 지난번 알아낸 정보대로 그 아르콘이란 사관생을 잡아다가 족쳐야겠지.”
“그건 쉬운 일이겠군. 팔라카스 제국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전에 이곳부터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어. 아주 샅샅이 말이야. 아무튼 비가 그치는 대로 서두르자.”
결국 네온이 분통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대자객 신분으로 이게 무슨 짓거리냐. 그까짓 숙청 대상들 못 잡아서 본관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신세이니 말이야. 잘못하다가는 강등당해서 동료들에게 개망신까지 당할 판이니 정말 속이 타 들어가다 못해 불이라도 날 것 같아.”
네온에 비해서 테세우스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떡하든 찾아내야겠지.”
그때 네온이 무슨 이유인지 테세우스의 얼굴을 은근슬쩍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이번 임무 빨리 끝내고 당장 결혼하는 게 좋겠어.”
테세우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그 얘기냐?”
“약혼 사인데 결혼 얘기는 당연한 거 아닌가? 사실 이번 임무는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고 또 해결난다 하더라도 본관으로부터 추궁을 면치 못할 거야. 그렇게 된다면 네 오랜 숙원이었던 중부 대륙 진출은 물거품으로 사라질 테고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랑 결혼하면 총관이신 우리 아버지 사위가 될 테니까―”
테세우스가 그녀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런 식으로 인정받고 싶진 않다.”
“정말 답답해, 너. 넌 대자객들 중에서도 그 전투력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잖아. 이런 하찮은 임무 따위로 네 창창한 앞날에 오점을 남기는 건 내가 싫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네온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너 말이야. 혹시 나랑 결혼하는 거 부담돼서 그렇게 시큰둥하게 구는 거니?”
그러자 테세우스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아 주며 말했다.
“매번 그렇게 사람 마음을 떠 봐야 마음에 편하겠냐. 너도 알잖아. 성격상 나는 그때그때 주어진 임무를 마쳐야 다음 일을 할 수 있다는 거. 이번 일만 끝내면 네가 하자는 대로 다할 테니까 일단은 일에만 집중하자.”
“칫! 만약 나중에라도 변심했다가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
폭우가 그치고 세상은 점차적으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를 뚫고 대지를 비추는 광선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낡은 신전 지붕 위에는 세 남매가 아래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다.
“대장이 보기보다 무섭네.”
카르 말에 레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괴물 같아.”
그러자 막내 아린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오빠들의 말을 부정했다.
“지드 아저씨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또 참견이냐? 조그만 게.”
“욕하니까 그렇지.”
“언제 욕했다고 그래!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게 욕이 아니고 뭐야?”
“너 자꾸 말대답하면 여기 옥상에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게 할 거다.”
“…….”
그제야 아린은 입을 꼭 다물고 아래 다시 마당을 내려 보았다.
사실 오빠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서 지드 아저씨가 다른 아저씨들에게 하는 행동이 너무하다 싶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신음이 들려오니 이제는 저 아저씨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아이고! 팔다리 어깨야! 대장님, 이제는 때려 죽여도 못하겠습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하나가 불만을 터트리자 다른 검사들도 뭐라 불평을 늘어놓았다.
“무거운 돌덩이들이 들어 있는 배낭을 짊어지고 반나절 내내 장작을 패는 것도 모자라 오후에는 물까지 길어 오라니, 이거 몸이 어째 견딜 수 있답니까!”
“맞습니다. 대체 우리가 뭣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아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순간 들려오는 지드의 커다란 음성.
“다들 조용히! 이제부터 한마디라도 더 하면 내일부터 훈련 양을 배로 늘리겠다.”
“…….”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당찬 목소리.
“이제 겨우 한 달조차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들 엄살이냐! 다들 처음에 무조건 내가 하는 대로 따라오기로 굳은 약속을 했잖아. 그 어떤 혹독한 훈련일지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이다. 그 결의는 어디 있는 거지?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군. 만일 이대로 포기한다면 영원히 하류검사가 되어 세상에서나 고향에서조차 푸대접받는, 그야말로 비참한 인생을 망칠 것이 틀림없을 텐데 계속해서 엄살들 떨 건가.”
그때 누군가 말문을 열었다.
“대장님 말씀은 잘 알겠는데요. 이런 무지막지한 체력 훈련만 한다고 검술 실력이 향상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지드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드리웠다.
“좋은 질문이네. 한마디로 체력이 밑바탕 되어야 좋은 검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을 알려 주자면 여러분 모두는 이미 예전과 다르게 체력이 많이 보강되어 있다. 훈련을 시작한 지 어언 수개월이 지난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뭐가 달라졌는지 느끼기 바란다.”
“…….”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사실이 그랬다. 신기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던 것이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음성.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검을 잡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한동안 심법은 물론이고 체력 보강에만 전념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후에야 검술을 시작할 수 있다.”
지드는 설명을 마치고 검사들을 해산시켰다.
현재 그의 바람은 단 한 가지. 내일부터 강도를 더욱 높여도 저들이 아무런 불평 없이 잘 따라 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탈자가 생길지라도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다소 독한 마음을 먹고 저들의 무공 수위를 점차적으로 높여 갈 궁리에만 신경 쓸 것이기 때문에.
***
제법 많은 날이 지나갔다.
이제 수련생들은 혹독한 과정의 고비를 넘겼고 나름대로 여유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저마다 어느 정도 성취를 얻어 가고 있었다.
1호, 2호, 3호, 4호, 5호, 6호, 7호, 8호.
지드는 수장(首將) 지노를 제외한 8명의 행동 대원들을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렀다.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야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원들에게 매우 엄격한 규율 아래 매일 같이 혹독한 무공 훈련을 요구했다.
그런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대원들은 이미 1년 전부터 시작한 심법 수련에 비례하여 각종 화산파의 외공 무공들을 섭렵했으며, 그들의 실력은 중류검사들 중에서도 상급에 해당되게 되었다.
1호는 34살로서 지드보다 4살이 많다.
그의 특기는 큰 덩치에 어울릴 법한 마운부(摩雲斧, 도끼를 사용하는 패도적인 무공)로, 현재 그는 커다란 도끼로 사람 몸통만 한 통나무를 두부 자르듯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2호는 29살로서 지드보다 한 살 어리다.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그는 창법(槍法)을 선택했는데, 그 역시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제법 절묘한 동작들을 익혀 왔고 최근에는 기량이 날로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3호, 4호, 5호, 6호는 모두 20대 중반으로서 동갑내기였고 저들끼리 사대천왕이란 명칭으로 결속을 다지기까지 했다. 화산검술의 맥이라 불리는 매화검(梅花劍), 삼선검(三仙劍), 상청검(上淸劍), 육합검(六合劍) 등 다양한 검술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고 최근에는 지드의 권유로 진법에 전념 중이었다.
7호는 20살로서 검술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심지어 생전 처음 보는 문자 한어(漢語)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빨랐으므로 각종 검법 초식에 대한 습득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8호는 17살로서 대원들 중 막내였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서 검술에 뜻이 있어 수년 전 가출했음을 지드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우연찮게 저택의 경호원 모집 공고를 보고 그곳에 왔다가 대장 지드와 만나게 되었고 그가 시전한 독특한 검술에 매료되어 무조건 여기까지 따라왔던 것이다.
사실 상 8명의 대원들 중에 가장 놀라운 성취도를 보이고 있는 자는 바로 막내 8호였다.
요즘은 7호와 8호 간에 경쟁이 붙었는지 서로 비무를 통하여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다른 대원에 비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친형제처럼 친근함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볼품없었던 하류검사들이 지난 시간 동안 나름대로 성취를 이룬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니, 지드의 혹독하고 집요했던 수련 과정이 효과를 봤던가. 지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하류 인생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한 심정도 있었겠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믿음직한 부하들을 얻고 싶은 열정이 더욱 컸던 것이 오늘날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몰랐다.
휘잉
신전 뒤에는 바위산이 가로막고 있었으며 그 정상에 지드 혼자만이 올라와서는 아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검술에 정진하는 부하들,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수련에 열심히 임하고 있었다.
신전 지붕에는 세 남매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아카시안은 저녁 밀 빵을 굽느라 아궁이에 열심이 불을 지피고 있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르는 낡은 신전, 석양 노을의 주황빛 세상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였다.
위험한 바깥세상보다는 그냥 이대로 저들과 함께 여기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스승님께서 형성한 결계진 덕분에 지난 세월 동안 모두들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 왔기에 이곳이 더욱 애착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다소 걱정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결계 진법이 점차 희미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그 경계가 풀릴 조짐 같아 보이니 지드로서는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지드는 나름대로 진법 연구에 열을 쏟았지만, 워낙 난해한지라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스승님의 진법을 복원하기가 어려웠다.
만일 결계 진법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맞은편 구릉지에서 진을 치고 있는 두 명의 대자객들에게 발견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정말이지 끈질긴 자들이다.
지금은 추적을 포기하고 돌아갈 시기가 되어도 한참 되었건만 그들은 아예 제 집처럼 저곳에 터를 잡고 계속해서 주변지역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결국 한숨을 짓고 마는 지드.
쉽게 포기할 자들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결계 진법에만 의존하여 언제까지 이 안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그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한 줄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내밀었다.
휘잉
지드는 문득 가슴 안쪽으로부터 낡은 비급을 꺼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들어서 표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독고구검(獨孤九劍)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에 독고구검이야말로 무림 역사상 최강의 화산 검법이라 하셨다. 지드는 이 비급을 지니고 다니면서 늘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뜻 표지의 첫 장을 넘기지 못하고는 다시 가슴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아직 십사수매화검법도 완전하게 익히지 않은 상태인데 섣불리 이 비급에 욕심을 가질 필요는 없지.”
그가 독고구검의 비급을 주저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아직은 스스로에게 때가 이르다는 판단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온은 테세우스에게 이번 임무를 포기하고 본관으로 귀환하자고 독촉했으나 그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완벽했던 그의 경력에 크나큰 오점이 남는 셈이니 말이다.
물론 귀환하자마자 네온과 결혼을 한다면 그의 지위는 고위 간부로 오를 테니 이번 임무 실패와는 상관없이 그의 위치는 확고하게 다져질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찾아보자.”
테세우스의 끈질긴 고집에 네온 역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보다도 네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 그 말이지?”
“자존심이 아니라 내 자신이 한심해서 그래.”
“그게 그 말이잖아. 대체 그까짓 숙청 대상들에게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숙청 대상들보다도 그들을 경호하는 자가 누군지 꼭 만나 보고 싶어. 필시 예사롭지 않은 자가 분명해. 지난번 용병들을 제압한 것도 그렇고 우리들을 엿본 것도 모자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서는 우리를 가지고 놀기까지 하잖니.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며 미소를 흘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가 왜 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지? 혹시 이 지역을 완전히 빠져나간 게 아닐까.”
“그건 아냐.”
“아니라니?”
“여기 주변 어딘가에 분명 숨어 있을 거야.”
“물론 육감 아니면 추측이겠지?”
“그냥 느낌이 그래.”
결국 네온이 비아냥거렸다.
“그냥 느낌이라고? 정말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네. 그러니까 네 느낌 때문에 산과 들 그리고 구릉지, 협곡까지 그렇게도 찾았는데…… 이번엔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것이란 말이지?”
네온은 말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혼자라도 귀환해야겠어.”
그러자 테세우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조금만 더 찾아보자.”
“싫어.”
탁!
네온이 팔을 홱 뿌리치고는 언덕 아래로 향하려 하자 테세우스가 황급히 외쳤다.
“한 군데만 더 찾아보고 없으면 함께 돌아가자.”
네온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너, 한 군데만 찾아본다고 했겠다.”
“약속할게. 아무래도 동쪽 호수가 수상하거든. 거기에도 없으면 이번 임무 깨끗이 포기할게.”
“그 말 진짜지? 그럼 당장 갔다 와.”
“그럴 생각이야. 이번엔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넌 여기서 기다려.”
“그거 좋은 생각이네? 다녀와, 난 그냥 여기서 쉴래. 안전하게.”
테세우스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쪽 호수를 향해서 솟구쳐 갔다.
슉!
네온은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테세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우우, 3개월 만에 이제야 정말 본관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잠시 시간이 흘렀다.
네온은 따뜻하게 달구어진 바위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쳐들고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때였다.
방금 전 맞은편 바위 언덕 지대가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함을 느꼈던가.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잠결에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하고는 눈을 크게 뜨고 살피기까지 했다. 다소 흐릿한 영상이랄까? 건물 같은 것이 바위 언덕 위에 나타나는가 싶더니만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네온은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지……?”
네온은 직접 그곳으로 가서 살피기로 결심했는지 자줏빛 채찍을 오른손 팔뚝에 둘둘 말았다.
“아무래도 저곳이 수상한데.”
뭔가 감이 확 오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찾아 헤매었던 대상들이 무슨 조화를 부려서 저곳에 숨어 있을 거란 확신이 커져만 갔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테세우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를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녀 역시 대자객 신분이 아니던가.
그깟 숙청 대상들 여러 명은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바위 언덕 중턱까지 다다를 시점이었다.
역시 그녀의 예상이 맞았던가! 신기한 일이지만 아까 보았던 그 흐릿한 영상의 건물이 언덕 위에 버젓이 나타난 것이었다.
누런 이끼가 군데군데 낀 낡은 신전 양식의 구조물, 대체 저토록 큰 건물이 어떻게 그동안 감쪽같이 그 모습을 감추었단 말인가!
네온은 더 이상 주저거릴 것도 없다는 듯 채찍의 고정 고리를 풀고는 저 위로 단번에 튀어오르려는 듯 도약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였다.
슥―
누군가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바위 뒤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이에 네온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야, 넌!”
“…….”
네온은 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불쑥 나타난 자는 날짐승 가죽을 이어 만든 전형적인 하류검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는 낡은 철검과 또 다른 형태의 독특한 검을 매고 있었다.
눈앞까지 가리는 다소 긴 흑발 사이로 보이는 얼굴 생김새는 제법 용모가 준수해 보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은 되어 보였고 키와 체격은 보통 정도였다.
네온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뭔가 철저히 농락당한 기분이랄까.
그동안 막사를 치고 수개월 동안 생활하면서도 바로 코앞인 바위 언덕 위에 숨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이제는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니까 실체를 드러내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그녀로서는 화가 솟구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네온은 팔뚝으로부터 붉은 채찍을 서서히 풀고 손아귀에 꽉 쥐었다.
“대체 너희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서 그동안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발견된 이상 죽을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
상대방은 다소 경직이 된 듯 제자리에서 꼿꼿이 서 있었다. 네온은 상대방이 하류검사 꼴을 하고 있는데다 생긴 것도 강인해 보이지 않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자객의 위치라면 남부 대륙을 통틀어 극소수만이 맞상대를 할 수 있었으니 상대방을 우습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네놈이 먼저 등장했다면 아마도 검술 실력이 제일 낫다는 얘기인데. 뭐, 그 용기가 가상하니 고통 없이 빨리 끝내주겠다.”
네온은 말이 끝나자마자 채찍을 허공으로 들어 사내를 향해 힘껏 휘둘러 쳤다.
휘리리릭!
허공을 가로지르며 채찍의 날카로운 파공음이 귀를 찢듯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상체를 뒤로 젖히더니만 채찍의 끝을 절묘한 동작으로 피했다.
“헉!”
채찍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놓친 먹이를 둘둘 말 듯 재차 공격해 들어왔다. 이번엔 사내가 여의치 않았는지 지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치 바람에 휘말려 올라가는 새털처럼 그의 도약 동작은 너무도 가벼워 보였고 그 높이만 하더라도 족히 5m는 되어 보였다.
이에 네온이 깜짝 놀란 얼굴로 채찍을 거둬들였고 그의 착지 동작까지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그녀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류검사 따위가 자신의 공격을 피한 것도 모자라 공중으로 솟아올랐으니 말이다.
“저 자식,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네온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재차 공격을 서둘렀다,
“좋아, 이번 것도 피해 보시지?”
돌돌 말린 채찍이 다시 펴지는 순간이었다.
착!
이번엔 채찍의 줄기 주변에 붉은 섬광이 톡톡 발산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그러자 마치 불붙은 뱀처럼 바닥을 마구 요동치는 채찍, 단단한 바위 지면조차 연기를 내며 지져질 정도로 그 열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맞은편 사내는 이번 공격이 만만치 않음을 느꼈고 결국 등 뒤로부터 철검을 빼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정면으로 들어오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
“헉!”
사내는 거의 반사적으로 상체를 옆으로 비틀었고 빠른 신법으로 채찍을 피했다.
타다닥!
불기운에 얼굴과 몸이 화끈거렸으니 만에 하나 스치기라도 한다면 심한 화상은 물론 까맣게 타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채찍의 꿈틀거리는 몸통은 한 번 놓친 먹이를 다시 찾아 헤매듯 연속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피할 여력이 없었는지, 사내가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철검으로 채찍의 끝을 향해 막으려고 뻗었다.
까앙!
하지만 맥없이 부러지고 마는 철검, 사내는 당황한 나머지 아까처럼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네온은 그런 그의 동작을 미리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채찍을 조종하여 그 위까지 따라가게 하였다.
파! 파! 파! 팟!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채찍을 막는 일인데, 부러진 철검은 이미 쓸모없어져 버렸다.
결국 그는 또 다른 검을 빼 들어 채찍의 옆면을 강하게 휘둘러 쳤다.
그런데!
불길을 내며 강력한 기세를 펼쳤던 채찍이 뱀 대가리 잘리듯 하는 것이 아닌가!
네온이 깜짝 놀라 채찍을 거둬들였을 때에는 깨끗이 절단된 흉물스런 붉은 줄기만이 힘없이 바닥에서 꿈틀거릴 뿐이었다.
“세, 세상에…… 내 채찍이 잘렸잖아.”
착!
그때 지면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사내, 그 역시 방금 전 사용한 양날이 없는 뭉툭한 검을 바라보며 다소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네온이 쓸모없게 된 채찍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만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어 전속력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너 이 자식! 감히 내 채찍을 못 쓰게 만들다니!”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네온, 애석한 일이지만 그녀는 상대가 자신의 채찍 기술을 피했을 때부터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번엔 사내가 뒤로 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뭐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매류통천!”
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고 이어 또 뭐라 외쳤다.
“매영만천!”
사내가 들고 있는 검 주변이 순식간에 이상한 꽃들의 잔상이 확 펼쳐졌다.
네온은 너무 놀라 공격하다 말고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언어에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랄까. 그 아름다운 환상 이면에 엄청난 살수가 숨어 있음을 그녀가 어찌 알 텐가.
이어 들려오는 외침!
“냉매섬개!”
검으로부터 섬광이 일고 강력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파바바밧!
네온은 거의 반사적으로 뒤로 훌쩍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으로부터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홱!
파파파팟!
정확히 4번의 짧은 파공음과 동시에 빛점들이 무서운 속도로 지드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방금 전 세 개 초식들을 연이어 시전했던 그인지라 공격 자세에서 곧바로 방어 자세로 변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욱이 상대는 십사수매화검법의 소위 환영(幻影) 범위를 벗어나고도 여유 있게 반격을 시도했으니 초감각적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퍽!
“악!”
네 개의 암기들 중 하나가 지드의 왼쪽 어깻죽지를 관통해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절묘한 신법에 이은 상체 비틀림으로 나머지 세 개의 암기들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이번엔 네온이 이만저만 놀란 게 아니었다.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암기들을 뭔 가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과 희한해 보이는 발동작으로 제자리에서 세 개나 피했다는 것은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어쨌든 하나는 맞추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할 것이었다. 과연 그녀는 대자객답게 다시 냉정함을 유지했고 이번에는 허리춤에 남아 있는 모든 암기들을 발사하려는 듯 손으로 복대를 만지작거렸다.
‘도합 여섯 개라.’
그녀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홱!
팟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손놀림이었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들려오는 파공음은 한 번이었지만 꼬리를 남기고 날아가는 빛줄기는 여섯 개였다!
필시 앞서 공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와 파괴력을 동반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십사수매화검법으로 다소 승기를 잡은 듯한 지드였지만 어깨를 관통 당한데다가 곧이어 파상 공격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그 역시 특단의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번에도 보법에 의한 빠른 몸놀림으로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만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얏!”
타다닥!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이미 그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 있었고,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한 암기들 두어 개를 밟고는 더 높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홱!
혹시라도 이럴 때를 대비해서 틈틈이 익힌 보법이 있었으니, 바로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였다. 이에 네온은 상대방의 기상천외한 동작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유령이라 본 느낌이랄까?
‘이건 말도 안 돼!’
애석한 일이지만 황당한 일은 거기서 끝날 것까지 않아 보였다. 멍하니 서 있는 네온의 전방 위쪽으로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세가 감지되었고 곧이어 이상한 언어가 들려왔다.
“한매동개(寒梅冬開)!”
서늘함이 느껴지더니만 주변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고,
“한매청고(寒梅淸高)!”
지드의 머리에 서릿발이 하얗게 이는 듯 보였다.
“설매창연(雪梅蒼然)! 설매제한(雪梅制寒)!”
그리고 신기하게도 온통 눈발이 세상 가득히 날리는 환영(幻影)이 펼쳐졌다.
네온은 마치 폭설 한가운데 들어온 듯했다. 결국 한 점의 섬광이 자신에게 다가옴을 허락하고 말았으니. 네온은 미처 피할 틈조차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파팟!
“꺄악!”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자빠져서 10m나 굴러갔고 놀랍게도 그녀의 두툼한 금속 군장은 마치 종이 찢기듯 걸레 조각으로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게다가 그녀의 입으로부터 선혈이 마구 토해져 나왔으니 누가 보아도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곧이어 사내가 엎드린 채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네온에게 다가왔다.
그는 지드였다.
지드는 방금 전 심사수매화검법의 중반 초식의 결과에 대해서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제4수 한매동개(寒梅冬開)! 제5수 한매청고(寒梅淸高)!
겨울 매화는 다시 피어오르고 맑고 청결함을 간직하리라.
제6수 설매창연(雪梅蒼然)! 제7수 설매제한(雪梅制寒)!
눈 속의 묻힌 꽃잎이 빛을 내니 엄동설한이 무색하리라.
겨울 폭설의 환영 이면에 숨겨진 공격은 그야말로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무시무시한 살수 검법이랄까. 아직은 완벽한 시전을 구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현재 그 정도만으로 그의 상상을 훨씬 상회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아…….’
놀란 한편으로는 연신 피를 토해 내며 괴로워하는 여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이 숙청 대상들을 제거하는 대자객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차마 검을 들어 끝을 낼 수가 없었다.
현재 그로서는 도저히 검을 들어 여인을 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지드는 뒤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차피 군장이 찌그러질 정도로 중상을 입은 그녀인지라 극단의 방법까지는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남자 자객이 나타나기 전에 일행들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지난번, 검 하나로 절벽을 무너트린 어마어마한 전투력의 소유자.
오늘은 운이 좋아서 여자 자객과 일대일 승부를 펼쳐 이겼다지만 그 남자 자객의 존재감은 왠지 모르게 엄청난 압박감과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루 뒤, 천둥 번개가 요동을 치고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네온을 끌어안고 절규에 몸부림친다.
번쩍!
“네온! 눈 좀 떠 봐, 흑!”
“…….”
아직 미세한 숨이 붙어 있지만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피를 너무 많이 토해 냈는지 네온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테세우스는 그녀를 꼭 껴안고는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네온! 제발!”
그때였다. 축 늘어졌던 네온이 아주 미세한 기척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테세우스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서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되었다.
네온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테세우스가 귀를 바짝 대자 그녀는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겨우 속삭이듯 말했다. 네온은 테세우스의 귀에 할 말을 다 한 뒤 축 늘어지고 말았다.
테세우스는 그녀가 이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서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슬픔과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등 뒤로부터 검을 꺼내어 바위 지면을 향해 강하게 내리꽂는다. 순간 단단한 바위 지면에 사방으로 금이 쩍쩍 나며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우지직!
동시에 들려오는 절규 어린 외침.
“반드시 찾아내고 말 테다! 으아아아아아!”
우르르르! 콰아아아앙―!
천둥마저 그의 울부짖음에 동조라도 하듯 마구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비는 하루가 지나 멈췄고 해가 고개를 들었다.
네온의 시신을 돌무덤에 정성스럽게 안장한 테세우스는 그 앞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맥없이 앉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닌 악몽이기를 아직도 절실히 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태양이 서녘으로 기울어질 무렵, 그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낡은 신전과 여타 부속 건물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숙청 대상들이 이곳에서 숨어 지낸 것이 틀림없었다.
네온을 저 꼴로 만든 철전치 원수 같은 자들.
이제 삶의 목표라면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어 확실한 복수하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이곳부터 샅샅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을 때에야 그의 조사는 막을 내렸다.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큰 건물 단지가 그동안 전혀 모습을 감추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중부 대륙의 흑검사들이 자신들의 인간 사냥 게임을 즐기기 위해 주변 지역에 사술을 걸어 놓아 자신만의 영역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고, 또 그 파훼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펼쳐졌을 법한 사술 작용은 그의 상식을 넘어서도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신전 주변에는 체력과 검술 훈련을 위해 만든 시설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아무래도 숙청 대상들 외에 그들을 경호하는 검사들이 여럿 있었던 것 같았다.
테세우스는 각종 훈련장들을 보다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전혀 이질적인 기구와 도구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땅바닥에 기둥을 수십 개 박아 놓은 훈련장을 비롯하여 표창 연습을 했을 법한 통나무 단면, 그리고 거대한 솥단지 안에 담겨진 모래 역시 그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체 모래를 불에 달궈서 뭘 한 걸까?
보면 볼수록 하나같이 점점 그를 혼란 속에 빠트렸다.
여하튼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은 그들이 이곳에서 제법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과 네온이 맞은편 구릉지에서 허송세월을 보냈던 3개월여 동안.
테세우스는 하늘빛 검을 들고는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고는 아쉬운 듯 애틋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네온의 돌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죽기 전에 전해 주었던 메시지가 아직 귓가에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네온은 자신을 해한 자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테세우스에게 말해 준 다음에야 눈을 감으려 했던 것 같았다.
“그자는 양날이 뭉툭한 검은 검을 사용했는데…… 허공에 꽃의 잔상을 만들고는 심지어 폭설 같은 환영을 만들더라고…… 일종의 마법 같았는데. 어쨌든 난 그만 처음 보는 사술에 방심하고는……! 너무 억울해. 이번 임무만 마치면…… 너랑 함께 살 수 있었는데……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테세우스는 거기까지 생각하자 눈가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아직 여운이 남은 주황빛 노을이 쓸쓸히 사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비춰 주고 있었다.
***
지드와 일행은 산과 들 그리고 강을 몇 번이나 넘었는지 모를 만큼 무척이나 고단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종착역이 다가온 듯 보였다.
마지막 구릉지를 넘어서자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휘잉―
지드는 눈앞에 펼쳐진 방대한 세상을 보면서 그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공간, 빽빽이 들어선 건물들 둘레에는 높은 성벽이 끝없이 둘러쳐 있었다.
아카시안 역시 오랜만에 와 보는 제국의 수도에 짐짓 가슴을 설레고 있었다.
그녀의 남동생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저마다 눈빛을 반짝였다.
지드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던 막내 아린은 어느새 깼는지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 저기는 어디예요?”
“우리가 살 곳이란다.”
“정말요?”
이번엔 아카시안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하니 지드 님이 자객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팔라카스 제국의 수도로 정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드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잘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도시가 아니라 성벽 밖에 위치한 용병 거주지입니다.”
그녀가 다소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용병 거주지라니요?”
“수만 명이 다닥다닥 붙어서 하루에만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가는 빠져나가는 일종의 개미 지대라 할까요. 숨어 지내기에 그곳만큼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그녀가 다소 당황스런 반응을 보였다.
“거긴…… 무척 위험한 곳이라 들었는데요.”
“위험하기는 하지만 저나 제 부하들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지요.”
그러자 옆으로 일렬로 서 있던 아홉 명의 하류검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지긋지긋한 곳에 다시 돌아왔군.”
“아이고, 대장님은 하필 이곳으로 오실 게 뭐람?”
“설마하니 하류 구역으로 가서 또다시 거지같은 생활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긴 뭐가 아니냐? 거기 가는 것 같은데.”
“에구, 내 팔자야! 결국 거길 벗어나지 못하는구먼.”
사실 수장 지노를 비롯해 1호에서 8호까지의 대원들은 저 아래 용병 거주지 하류 구역을 눈앞에 둔 이 순간 각자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회한을 느끼고 있었다.
저곳에서 하류의 삶으로 천대받던 시절, 그들 중 몇 명의 가족들은 저곳에서 여전히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장 지노 같은 경우는 30년 전 하류 구역에 정착을 했고 그곳에서 결혼을 하여 현재는 아내와 4명의 자식들을 거느린 중년 가장이었다.
다른 대원들 역시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거나 자식의 신분인 자도 있었다.
이제는 무공이라는 아주 독특한 전투 기술을 습득한 그들이기에 하류 구역으로의 귀환은 더욱 뜻 깊은 의미를 지닌 셈이었다.
대원들 중 가장 순박해 보이는 수장 지노가 먼저 말했다.
“마누라와 자식들이 내가 돌아온 줄 알면 무척 반기겠군. 하하! 더군다나 나 같은 인생이 여덟 명의 검사를 거느린 수장이 되었으니, 아마도 믿지 못하겠지?”
이번엔 육중한 체구에 도끼를 등에 짊어진 1호가 말문을 열었다.
“나도요. 비록 형님처럼 수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여덟 명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가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더 이상 하류검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 기쁩니다.”
이에 각자 한마디씩 줄줄이 뱉었다.
그들 중 7호만이 매우 날카로운 눈빛에 입술을 깨물기까지 했는데, 그의 사연은 다른 대원들에 비해 조금 깊었던 모양이다.
“앞으로는 중류 구역으로부터 더 이상 핍박받을 일도 없을 거요. 지난 시절 당해 왔던 일들, 수모, 치욕, 갈취 등 이제는 역으로 갚아 주는 일만 남았지요.”
수장 지노가 그를 만류했다.
“이봐, 동생. 중류 구역 세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때 막내 8호가 눈치도 없이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난 이곳에 처음 와 보는데 형님들 말씀을 들어보니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요? 후, 귀족 출신인 제가 지내기에는 좀 그런 것 같아서.”
대원들 모두가 일제히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지드의 음성.
“다들 출발하도록!”
지드는 아린을 다시 들쳐 업고 앞장을 섰고 부하들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아카시안 역시 잔뜩 어두운 얼굴로 두 남동생들의 손을 잡고 터벅터벅 쫓아갔다.
그녀는 예전에 아버지로부터 용병 거주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거주자들 대부분이 살벌한 용병들인데다 서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폭력이 점철된 무시무시한 세계. 특히나 지금 가려는 하류 구역은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라 했다.
그녀로서는 세 동생들과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현기증이 났고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하지만 어쩌랴, 애초 경호대장 지드를 믿고 그 먼 길을 왔는데 이제 와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