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카스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 수 있는 완만한 해양 지역이기에 남부 대륙 최대 중계 무역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루 동안에만 전국 군소 동맹국들로부터 이곳을 찾는 무역상들을 비롯한 방문자들이 수천 명이 넘을 정도로 교역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르고 있었다.
10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평범한 규모의 왕국이었던 이 나라가 제국의 위상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역 중심지란 지리적 특성과 전통적으로 강력한 군대를 구성할 수 있는 막강한 자금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팔라카스 제국의 확고한 위상을 근 1,000년 동안 유지시켜 왔던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지 세인들에게 질문한다면 아마 대부분은 한 가지 독특한 정책이 이 나라에 확실히 뿌리를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개방 용병 제도.
개방 용병 제도란 말 그대로 대륙의 모든 용병들에게 제국의 영토 일부분을 개방함으로써 거대한 용병 집단을 거주케 하는 제도이다.
용병들은 국적과 나이, 전투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 누구나 개방 영토에서 머물 수 있는데다가 수많은 군소 동맹국들로부터 파견 나온 군 관계자들로부터 고용되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혹은 돈 많은 자들이 많은 자금을 뿌려 가며 수십에서 수백여 명의 용병들을 고용하기도 하고 상인들이 적당한 금액을 주어 쓸 만한 호위 용병들을 구하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팔라카스 제국이 얻는 이득은 실로 엄청나다 할 수 있었다.
도시 성곽 밖 드넓은 발칸도 평원을 용병 거주지로 임대해 주고 대륙 각지로부터 온 고용인들이나 용병 당사자들 사이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시 무려 10%에 이르는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용병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식솔들마저 정착하는 실정이었으니 그 숫자만 하더라도 수만 명에 달할 정도이다.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도록 다투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린은 두 오빠 레드와 카르가 한 녀석에게 주먹질을 당하고도 모자라 거의 뻗기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결국 아린이 참다못해 냅다 튀어나가서 두 오빠들을 깔아뭉개고 있던 한 녀석의 머리통을 발로 차 버렸다.
빡!
“악!”
아이는 뒤로 자빠지면서도 누가 때렸나 살폈다.
“뭐야!”
“우리 오빠들 때리지 마.”
순간 녀석은 상대방이 어린 소녀라는 사실을 알고는 어이없어 했다.
“저 계집애가 감히!”
아이는 벌떡 일어나 아린에게 무식하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아린은 오른발을 옆으로 옮기는가 싶더니만 상대방의 들어오는 힘을 이용해서 절묘한 손동작으로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억!”
꽈당!
하필 앞으로 넘어졌던가.
녀석은 코가 깨지고 입술이 찢어져 피를 줄줄 쏟아 내고 말았다. 고작해야 열두 살 정도이니, 피를 보자 겁부터 났고 눈물이 나왔다.
“코피잖아. 흑!”
그는 코를 움켜잡고는 막사들 사이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뭐라 외쳤다.
“다음에 두고 보자. 씨!”
흙바닥에 쓰러져 있던 두 오빠들은 아린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방금 전에 어떻게 한 거니?”
“뭘?”
“그 자식을 어떻게 이겼냐고.”
아린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드 아저씨가 가르쳐 준 대로 했을 뿐이야.”
맞은편 언덕 먼발치에서 이들 남매를 바라보는 여인과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아카시안과 지드였다.
아카시안은 이제 여덟 살밖에 안 된 막내 아린이 오빠 둘도 당하지 못했던 덩치 큰 아이를 제압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린이 큰 아이를 도망치게 만들었어요.”
지드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며칠 전 가르쳐 준 호신술인데, 바로 써먹다니. 녀석, 제법인데? 후후.”
“호신술이라니요?”
“일종의 방어 기술이죠.”
“…….”
잠시 침묵이 흘렀고 이번엔 지드가 아카시안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곳 생활은 견딜 만합니까?”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아마 힘들 겁니다. 여긴 용병 거주지 중에서도 초입 구역으로서 외부에서 금방 온 신참들과 그 식솔들이 머무르는 가장 열악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카시안이 다소 어두운 얼굴을 하자 지드는 괜한 말을 했나 싶어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나와 내 부하들은 이곳이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 불편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지드는 14살에 가출한 이후 이곳에 들어와서는 24살이 되도록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산전수전을 다 겼었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이번엔 아카시안이 말문을 열었다.
“전 이곳이 오히려 우리 남매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라 생각해요. 아마 지드 님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이곳에 오신 것이겠죠? 설마하니 자객이 여기까지 찾아보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지드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건 맞는 얘기입니다. 용병 거주 지역에서도 이 외떨어진 구역은 세상 그 누구도 오기를 꺼려하는 곳이죠.”
지드는 말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대원들 말입니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자유 시간을 주었으니 아마도 가족들부터 만나 보겠죠? 나 역시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구경이나 좀 할까 하는데.”
햇살 그득한 세상이었다. 용병 거주지 중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의 산동네에 두 명의 청년이 낑낑대며 올라가고 있었다.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금발 머리 청년이 다소 성질 사나워 보이는 갈색 머리칼 청년에게 뭐라 투덜거렸다.
“아이고, 7호 형님! 언제까지 올라가야 합니까!”
“거의 다 왔다.”
“그 말 열 번은 더 들었는데?”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여름 땡볕에 가파른 경사 길을 쉬지 않고 가니 이거 힘들어서 죽겠어요.”
그러자 갈색 머리칼 사내가 발길을 멈추더니만 금발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봐, 아레스. 처음부터 졸졸 따라나선 건 네 녀석이란 걸 알아라.”
“이렇게 먼 줄 알았다면 그냥 지드 대장님하고 함께 있었죠! 그리고 왜 이름을 부릅니까? 대장님 알면 지난번처럼 혼난다고요. 앞으로는 8호라고 부르시죠.”
“단 둘이 있을 땐 예외로 하자.”
“만일 그게 습관되면 대장님 앞에서 절로 튀어나온단 말입니다.”
“에이, 젠장! 그냥 서로 이름 부르면 편할 걸 왜 번호를 매겨 가지고…….”
7호가 투덜거리자 8호가 뭐라 했다.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야만 서로 간에 당당히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지난번 몇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그걸 벌써 잊은 겁니까!”
“그래, 네놈 말이 맞다. 대장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린 아직 하류검사 티를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어휴, 또 그걸 까칠하게 받아들이시나.”
“그나저나 거기서 입만 떠들 거야? 당장 따라오지 않고!”
“알겠습니다요. 당장 가면 되잖아요.”
8호의 출신 성분은 엄밀히 따져 보면 다른 대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관계로 검술은 절대 배울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검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집을 나오는 것이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반드시 위대한 검사로 성공하리라는 굳은 의지. 그것은 그로 하여금 지드 대장이라는 신비로운 전투력의 소유자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여하튼 그는 생전 처음 접해 보는 용병 거주지의 열악한 환경에 놀라는 모습이었고 판자촌 산동네의 구불구불 끝없이 올라가는 길에 매우 힘들어했다.
잠시 후 7호는 목적지에 도착한 듯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뒤따라온 8호가 물었다.
“형님 집이 여긴가요?”
7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의 눈살이 찡그려졌다.
마당에 잡풀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 있었고 안쪽 건물은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으로, 폐허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7호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아무도 살지 않음을 확인하고 대문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어디론가 떠나 버린 것 같았다.
그가 8호에게 말했다.
“가자.”
“어디로요?”
“다음 블록에 수장 형님과 1호 형님 집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 보면 내 가족들 소식을 알 수 있을 거야.”
“와우! 그 형님들도 여기 산동네 출신이었군요.”
잠시 후 그 둘은 어느 판자 집 건물 입구 앞에 낯이 익은 두 명의 사내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다름 아닌 수장 지노와 1호였다. 7호와 8호가 늘 함께 붙어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장 지노와 1호 역시 그 둘만의 관계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었다.
둘의 나이 차는 꽤 나지만 수장의 소박하고 순박한 성격과 1호의 육중한 덩치에 우직한 성품이 통한다고나 할까.
더군다나 그 둘은 용병 거주지에서도 서로 알고 지내왔던 가까운 이웃이기도 했다. 7호 역시 이곳 출신인지라 그 둘을 잘 알고 있었다.
“수장님! 1호 형님!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7호가 아는 척을 했지만 그 둘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들을 푹푹 쉬고 있었다. 7호는 그 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왜 침울해 있는지 그 연유부터 물어보았다.
“뭐, 초상이라도 났습니까? 두 분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그제야 수장 지노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마누라들한테서 쫓겨났네.”
“쫓겨나다니요! 일 년 만에 돌아온 형님들인데…….”
“가장이 가족들 팽개치고 밖으로 일 년이나 싸돌아다녔으니 이런 대접 받을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형수님들 너무하시네요.”
그러자 이번엔 수장 옆에 앉아 있던 1호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골치 아픈 일이 있어.”
“골치 아픈 일이요?”
“지노 형님 큰 아들과 내 동생 녀석 둘이 나크 용병 집단에 들어간 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그 말에 7호가 깜짝 놀랐다.
“나크 용병 집단이라고요?”
“빌어먹을, 하필 거기라니!”
“거기는 거의 사기 집단이 아닙니까. 일부러 실력 없는 하류들만 고용해서 개처럼 부려먹고 돈 한 푼 주지 않고 쫓아내는 악랄한 곳 말입니다.”
“거기가 그런 곳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당장 문제라면 내 동생 녀석과 수장 형님 아들이 무슨 이유인지 그곳으로부터 한동안 소식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형수님들에게 쫓겨나신 거군요?”
“녀석들을 데리고 오기 전에는 집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말라더군.”
7호가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럼 찾으러 가면 되겠군요.”
수장과 1호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곳을 말인가.”
“당연하죠. 나크 용병 집단이라면 고작해야 50여 명의 용병들로 이루어진 아주 소규모 아닙니까. 형님들과 나 그리고 8호가 함께 간다면 그들을 구해 올 수 있을 겁니다.”
“그, 그래도…….”
“우린 더 이상 예전의 하류검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들 용기를 내서 쳐들어갑시다.”
이번엔 8호가 나섰다.
“형님, 잠깐만요.”
“왜?”
“이런 문제는 우선 대장님께 먼저 의논부터 드리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우린 대장님의 부하들인데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 조금 걸리네요.”
“이건 가족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그들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
7호가 큰소리를 치자 8호는 더 이상 말을 삼갔다. 수장 지노와 1호 역시 각자 검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7호 말이 맞아. 우린 옛날의 하류검사들이 아니지. 당장 가서 놈들을 혼내 주자고.”
곧이어 수장 지노와 1호, 7호, 8호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 아래쪽으로 향했다. 얼마쯤 갔을까, 수장 지노가 앞서 가는 7호에게 문득 말문을 열었다.
“이봐, 동생! 만나자마자 전해 준다는 말을 깜빡 잊고 있었네그래.”
“전해 주다니요?”
“자네 어머니와 여동생은 팔라카스 제국 내(內) 수도로 거처를 옮겼다네.”
순간 7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수도라니요! 거긴 왜…….”
7호는 다소 굳어진 얼굴로 일관했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자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사를 해야만 했단 말인가.
게다가 용병 거주지에서 제국의 수도로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건만…… 그때 수장 지노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사하는 그날 말이야. 이웃 주민들 말에 의하면 아주 크고 고급스런 마차 한 대가 와서는 자네 어머니와 여동생을 태우고 갔다더군. 뭐, 이삿짐들 역시 사람 여럿이 와서는 모두 실어 갔다는데 복장이 죄다 화려한 것으로 보아서 평범한 신분은 아닌 것 같았다나.”
“…….”
7호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그때 지노가 가슴 안쪽으로부터 조그만 양피지 조각을 꺼내더니만 7호에게 건넸다.
“자네 어머니께서 떠나는 그날 내 마누라에게 준 거라네.”
“어머니가요?”
“옮긴 주소가 적혀 있을걸세. 자네가 돌아오면 반드시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더군.”
“…….”
7호는 얼른 양피지를 펴서 들여다보았고 그 안에 적힌 주소지를 확인한 순간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자 수장 지노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놀라?”
“아, 아니요.”
7호는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양피지를 잽싸게 소매 안쪽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바로 그때 저만치 앞서 가던 1호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크 용병 집단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잠시 후 일행들은 언덕 둔덕에 엎드려서는 저마다 얼굴만 조심스럽게 내민 채 아래 공터에 위치한 막사 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와와!
때마침 들려오는 함성에 일행들의 시선은 용병들이 빙 둘러친 공터 중앙을 바라보았다.
10대로 보이는 소년 둘이서 서로 치고 박으며 진흙바닥을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용병들은 서로 내기를 건 듯 각자 소년들에게 죽어라 소리치며 응원을 보내고 있었고, 다른 한쪽 구석에는 대기조로 보이는 소년들이 잔뜩 겁에 질린 채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1호가 외쳤다.
“리카드로!”
중앙에서 한창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싸우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이 하필 동생 녀석이 아니던가.
성질 급한 1호는 다짜고짜 그 육중한 몸을 일으키더니 등 뒤로부터 도끼를 꺼내 들고는 그 아래로 쿵쿵거리며 뛰어 내려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장 지노가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그 역시 자신의 아들이 대기조에 섞여 있음을 발견하고 눈이 뒤집혔던 것이다.
아직 언덕 위에는 7호와 8호가 남아 있었다.
“아무런 계획이나 대책도 없이 저렇게 성질나는 대로 뛰어나가면 대수인가.”
7호가 투덜거리자 8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가서 함께 싸워야지.”
7호는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날려 둔덕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8호 역시 그들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앞서 나간 형님들이 무기를 마구 휘둘러 살인이라도 할 시에는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용병 거주지는 어디까지나 팔라카스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자치 기구로, 살인죄는 매우 무거운 중벌로 다스려진다.
그가 냅다 뛰어 내려가면서 저만치 앞서가는 대원들에게 절규하듯 외쳤다.
“형님들! 절대 살인은 안 됩니다!”
한편 싸움 구경을 하던 나크 용병들은 갑작스런 불청객들의 난입으로 저마다 당황하기에 이르렀고 부랴부랴 무기를 빼 들어 맞서려고 했다.
“뭐야, 저것들은? 차림새로 보아선 하류 잡것들 같은데.”
“도합 네 명이라! 저놈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설마 우리한테 볼일 있는 건 아니겠지?”
곧이어 막사 촌에 난입한 자들과 용병들 간에 진짜 싸움판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나크 용병 집단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난입한 네 명의 하류 잡것들이 이상한 전투 기술을 발휘하더니만 자신들을 하나 둘 제압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1호의 장기가 부법(斧法, 도끼를 사용하는 무공)인 만큼 그의 무식하게 큰 도끼가 휘둘러 치자 대여섯 명의 용병들이 추풍낙엽과도 같이 뒤로 자빠졌다.
“어이쿠!”
1호는 일부러 도끼를 옆으로 누였는데, 8호 말대로 사람을 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 같았다.
7호 역시 용병들 사이로 빠르게 공격해 들어가면서 오직 검면만으로 그들의 급소를 정확히 가격했다. 유혈사태만큼은 피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파파파팟!
“아악!”
수장 지노만이 아무런 무기도 없이 오로지 손바닥을 강력하게 뻗어 내고 있었는데, 드디어 오늘날 갈고닦은 무공 실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격공장(隔空掌)!”
정말이지 손으로부터 그처럼 신기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다.
지노가 손바닥으로 달려오는 상대방의 복부를 향하자 순간 무형의 힘이라도 작용한 듯 무려 10여 m나 뒤로 붕 떠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지노는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무척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 이거 제법 쓸 만한 기술인데?”
지노는 과연 손바닥으로 밀어내는 기술이 그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였는데 방금 그 위력을 실감했던 것이다.
그가 지드 대장으로부터 무공을 처음으로 배울 때 손만으로도 큰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기술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단전에 모아진 기(氣)를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손바닥에 엄청난 악력을 모이게 하여 발산하는 일종의 체술 기공이라 할까.
8호 역시 날쌘 다람쥐처럼 용병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서 하나 둘 쓰러트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18살에 지나지 않는 앳된 십 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놀림이나 검술 능력은 다른 대원들보다도 유연하고 능숙해 보였다.
물론 파괴력이나 여타 무지막지 한 기세로 보자면 1호가 제일 나았고, 7호는 치열한 접전에도 불구하고 냉정함을 잃지 않고 승부사적 기질대로 정확히 급소만 골라서 실신을 시키는 확실한 검법을 구사했다.
수장 지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장법만을 시전 하여 용병들을 퍽퍽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용병 막사 촌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4명의 침입자들이 근 50여 명이나 되는 용병들을 제압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인명 사상도 없이.
“헉! 헉!”
일행들 모두는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다소 어리둥절했으니 자신들의 전투 능력이 이 정도까지 강한 줄은 미처 몰랐던 것 같았다.
그때 이리로 달려오는 소년 둘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곳에 잡힌 채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수장의 아들과 1호 동생이었다.
***
며칠 후 지드는 이곳 지역에 터를 잡은 후 처음으로 9명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지난번 수장 지노와 1호, 7호, 8호의 나크 용병 집단 습격 사건을 비롯, 어제는 3호, 4호, 5호, 6호마저 아란시아 용병 집단 소속 검사들과 시비가 붙어서 집단 패싸움을 벌였다.
덕분에 지드는 이만저만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잔뜩 굳어진 표정의 지드, 드디어 그가 말문을 열었다.
“설마하니 대원들 각자 신분이 뭔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우린 총관 저택의 경호원으로 고용되었으며 아카시안 님과 그분의 동생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지드의 언성이 높아지자 대원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지드가 이번엔 수장 지노에게 말문을 열었다.
“수장에게 묻겠소.”
수장이 깜짝 놀라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네.”
“우리 모두가 대자객 신전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요.”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지드가 이번엔 3호에게 물었다. 그는 4호, 5호, 6호와 함께 용병들과 패싸움을 벌인 장본인이었다.
“이봐, 3호! 제정신인가! 수장과 1호는 악덕 용병 집단으로부터 아들과 동생을 구출한다는 명분이 있었다지만, 넌 몇몇 대원들과 함께 왜 지나가는 용병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벌였지?”
“먼저 시비를 건 것은 그쪽이었습니다.”
순간 지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시끄럽다.”
“…….”
수장 지노와 대원들은 할 말이 없었다. 대장 말대로 그들은 행동 가짐을 조심해야 할 경호대원들 아닌가.
그런 그들이 이곳에 오자마자 불과 며칠 만에 여기저기 벌집 쑤시듯 했으니 그 여파가 어떻게 다가올지 지금부터가 걱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자들이 있었으니 지드와 대원들이 현관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용병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스윽.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흑발 사이로 창백한 피부가 드러나 보였는데, 연약한 체격에 곱상하게 생긴 외모는 얼핏 본다면 여성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하며 오뚝한 콧날은 청년의 상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네놈들이 내가 없는 동안 우리 나크 용병 집단 진영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겠다!”
지드는 저들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하고 내심 놀라는 기색이었다. 어쨌든 지드는 일이 크게 벌어지기 전에 수습 방안부터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 대원들이 좀 심하게 했나 본데, 그 점 미안하게 생각하오.”
“뭐라? 이제 와서 미안하다면 다인가. 보아하니 용병 집단 소속도 아닌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들인지 몰라도 오늘 두고 보자.”
“사실 그대들이 먼저 아이들을 데려다가 노예 부리듯 한 건 사실이잖소.”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지드의 말을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뒤따라온 수하들에게 다짜고짜 큰소리로 명령했다.
“저것들을 비롯해서 여기 건물도 모조리 쓸어 버려.”
지드 역시 할 수 없다는 듯 현관 옆에 놓여 있는 자루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만 한 줌의 콩들을 꺼내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수장을 비롯한 대원들이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아이고, 이 상황에 웬 콩알이래요!”
“대체 그것들로 뭘 하시려고……?”
지드는 말없이 콩 한 알을 집어 들더니만 맨 선두로 다가오는 자를 향해 손가락을 퉁겼다.
퉁!
“탄지신공(彈指神功)!”
폭!
“악!”
놀랍게도 지드가 퉁긴 콩알 하나가 철 군장 오른쪽 가슴 부위에 팍 하고 박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충격에 한 명이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이어 또 다른 콩알이 날아왔다. 이번 목표는 곱상하게 생긴 대장의 복부에 찬 금속 보호대인 듯 보였다.
팍!
“욱!”
그 역시 강한 충격으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뒤따라오던 검사들이 어리둥절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대장을 살폈다.
그들은 필시 강력한 암기가 발사된 것으로 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당장 복부를 살펴보자!”
“보, 보호대가 찌그러졌어.”
“암기는?”
가장 가까이서 살펴본 검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 없는데…….”
충돌과 동시에 산산 조각난 콩알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없다니! 부서진 철 파편 조각 같은 것도 없단 말이야?”
한 검사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이번엔 맨 앞서 쓰러진 검사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철 재질의 가슴 보호대를 움푹 파고 들어가 쏙 박혀 버린 곳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집어넣어 아주 조그만 알을 끄집어냈다.
“뭐야, 이건…….”
다른 검사들이 와서 함께 살폈다.
“콩알 같은데?”
“콩알이라니!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이리 와서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그들은 설마하니 콩알이 금속의 재질을 찌그러트리고 안으로 쏙 박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기야 그들이 무림에서조차 몇몇 고수들만이 시전할 수 있는 지공(指功)에 대한 개념을 알 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지드가 무림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탄지신공을 조금밖에 익힐 수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 들려오는 음성.
“그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다들 돌아가시오.”
그제야 검사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현관 기둥에 등을 기대고는 손바닥 위에 한 줌의 콩알들을 들어 보이는 지드, 그는 언제든지 다시 콩알을 발사할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검사들 중 한 명이 외쳤다.
“뭐야! 저 자식, 지금 콩알들 가지고 우릴 위협하겠다는 건가?”
“빌어먹을!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꼴을 다 당해 보는 군.”
“당장 요절을 내 주자고!”
그들은 아까보다도 더욱 살벌한 기세로 다시 검을 쥐고 지드에게 향하려고 했다. 그러자 지드 역시 다소 냉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이번엔 콩알들이 너희들 얼굴에 깊숙이 박힐 것이다. 뭐, 그렇게 된다면 십중팔구는 생명을 잃을 텐데 거기까지는 책임지지 않겠다.”
그 말에 검사들이 주춤거렸다.
그때 대장으로 보이는 청년이 겨우 신형을 추스르고는 부하들을 만류했다.
“다들 뒤로 물러서! 너희들 상대가 아니다.”
“…….”
그제야 검사들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곱상하게 생긴 청년 대장의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지드를 노려보았다.
“차림새들을 보아하니 뜨내기 하류검사들 같은데 감히 용병 집단을 건드렸겠다! 이건 명백한 용병 연합 소속의 수백 용병들에 대한 도전이니 이후 이곳에서 편히 지낼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장은 말이 끝나자마자 등을 돌려 대문으로 향했다.
“다들 돌아가자!”
용병들 역시 그의 뒤를 따랐고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
한눈에 봐도 순박해 보이는 40대 중년인이 현관 난간에 턱을 괴고 앉아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수장 지노였다.
“이거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으니 또 물난리로 생고생 겪겠구먼. 제발 여기만은 피해 갔으면 좋으련만.”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
“지노 수장, 뭘 그리 중얼거립니까?”
중년인이 깜짝 놀랐다.
“에구머니! 간 떨어질 뻔했네. 제발 좀 인기척 좀 하고 나타나요.”
“수장이 담력을 더 키우는 편이 낫겠소, 후후.”
“원래 태어날 때부터 간이 콩알만 했는데, 없던 담력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답니까?”
지드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앞마당을 바라보다가 문득 수장에게 물었다.
“대원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는 며칠 전 부하들을 다그친 일이 다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수장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혈기왕성한 녀석들인지라 건물 구석에 박혀 하루 종일 수련만 하기에는 좀들이 쑤실 겁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 임무가 경호인만큼 일단은 조용히 지내야 하겠지요.”
수장이 잠시 침묵을 지키는가 하더니만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죠.”
“대장께서 용병 집단을 하나 만들어 보심이 어떨지요.”
지드가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용병 집단이라니요?”
“그 길만이 용병 집단들로부터 표적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만 해도 용병들로부터 수차례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연합에 가입한 용병 집단들만 하더라도 수백여 개가 넘는데…… 그들 중 하나가 공격을 받는다면 다른 단체들이 연계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어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후…… 그래요, 나도 알아요.”
“아시다시피 이곳은 용병들의 천국입니다. 주로 하류검사들로 이루어진 뜨내기 집단이나 소속이 없는 검사들은 당연지사 그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지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용병 집단을 만들어서 그들 연합회에 가입하자 그 말입니까.”
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해서 용병들의 공격을 받게 될 테고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지드는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꽤 심각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대자객 신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항시 몸을 사리며 조용하게 지내야 하건만, 용병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면 이는 무척 골치 아픈 일이었다.
잠시 후 지드가 진중한 얼굴로 수장에게 물었다.
“용병단을 만들려면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수장의 표정이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일단 제국 내 수도에 위치한 용병 연합회 사무실에 가입 의사를 밝히는 편지부터 써야 합니다.”
“그 다음은요?”
“그들로부터 답신을 기다려야죠.”
“그러면 끝입니까?”
수장이 빙그레 웃었다.
“거기부터 시작이죠. 일단 답신 내용을 보면 용병 구성 사유서와 인원 그리고 용병 집단 창시자에 대한 경력에 대한 기재 요청서가 있을 겁니다. 그에 따른 서류를 작성해서 다시 편지에 동봉해서 연합회 사무실에 보내야 합니다.”
“또 편지를 보낸다고요?”
“서류가 통과될 경우 다시 답장이 오는데 아마 허락이 떨어진다면 허가 비용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을 겁니다.”
“가입비도 있었습니까?”
“물론 있죠. 그런데 그게 말이죠. 그리 적은 액수가 아니라 서요,”
“얼만데요?”
“1만 루피입니다.”
지드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1만 루피라면 시골에서 농가 하나 정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랄까. 꽤 큰 액수는 아니지만 현재 그의 입장으로서는 단돈 1,000루피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니 그 역시 거액이라면 거액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지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용병 집단은커녕 웬만한 단체 하나조차 만들지 못할 것 같소. 우선 서류 전형에서 잘릴 것이 확실할 테고, 설령 기적이 일어나서 통과가 된다 할지라도 무려 10만 루피와 같은 거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오.”
수장이 이번에도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일반적인 관례가 그렇다는 겁니다. 아마도 대장님이라면 특별 허가 신청서를 낼 만한 자격이 충분할 겁니다.”
“특별 허가 신청서라뇨?”
“상당한 검술 실력자는 그 어떤 서류 절차나 자금 없이도 자신만의 용병 집단을 구성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특별 허가 신청서는 그런 상급 계열들을 위한 겁니다.”
순간 지드가 난색 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니까 나더러 상급 계열 자격으로 그곳에 신청서를 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일단 편지로 신청한다면 며칠 내에 그들로부터 제국 수도 입성(入城) 허가증이 답장 편지에 동봉되어 올 것입니다. 한마디로 특별 허가 신청자들에 대한 배려라 보시면 됩니다.”
“그저 신청만 했다고 그런 중요한 것들을 보내 준다면 일반인들도 그런 제도를 이용할 수 있겠군요.”
그러자 수장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만일 일반 실력도 없는 검사가 특별 허가 신청서를 내서 출입증을 받아 그곳에 갔다가는 살아서는 나올 수가 없겠지요.”
“그건 무슨 뜻이오?”
“한마디로 본인의 전투 능력에 상당한 자신감 없이는 감히 생각조차 말아야 합니다. 기본 검증만 수차례에 본격적인 검증 절차를 걸쳐야 하는데 만약 기본 검증에서조차 자격이 미달된다면 사기꾼으로 몰려 중벌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죠.”
점점 굳어지는 지드의 얼굴.
“그러니까 나더러 거길 가라는 겁니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
보름 후.
드디어 용병 연합회로부터 특별 허가 신청서에 대한 답장이 도착했다.
지드가 편지를 뜯어 보니 정말 수장이 지난번 언급한 대로 수도 성문 통과증과 연합회 건물로 가는 약도, 그리고 내용이 적혀 있는 짤막한 양피지 쪽지가 보였다.
양피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귀하의 용병 구성 특별 허가 신청서를 잘 받아 보았고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편지 안에는 그대가 용병 연합회 중앙 본부로 쉽게 찾아 올 수 있도록 자료와 정보들이 동봉되어 있습니다.
단 두 명 이상의 호위 및 경호 검사들을 대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지드가 마지막 문장을 읽더니만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두 명까지는 동행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그날 저녁.
지드는 수도로 향하기에 앞서 사무실 탁자에서 아카시안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병 창설에 관한 내용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그곳에는 7호와 8호만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수장을 비롯한 나머지 여섯 대원은 여기 남아서 경호 임무를 계속할 것입니다.”
아홉 명의 대원들 중에 자신과 함께 동행할 대원을 뽑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랄까.
두 대원이 낙점이 된 이유를 보자면 우선 7호 경우에는 그의 가족이 수도 내로 이주했기에 그들의 소식을 알 수 있을까 하는 배려 차원이었고, 8호는 수도 내 귀족 출신으로서 대원들 중 그 누구보다도 도시 지리에 능통하니 좋은 안내자가 될 듯싶어서였다.
아카시안이 근심어린 얼굴로 물었다.
“거기,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단 가 봐야 알겠지요.”
“몸조심하세요, 꼭.”
“알겠습니다.”
“…….”
지드의 힘없는 대답에 아카시안 역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튿날 오후, 노랑나비가 너울너울 날갯짓 하며 높은 요새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지드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옛날 용병 거주지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하류 구역 생활 때, 그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서 성벽 너머 세계에 들어가고 싶었던 적이 수십 수백 번이 넘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이 그에게 손짓이라도 하듯, 단 하루도 그곳을 동경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지금이야말로.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팔라카스 제국의 수도 성문을 당당하게 걸어서 입성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양옆에는 든든한 수하들인 7호와 8호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흐뭇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성문을 완전히 넘어가기까지는 아직 껄끄러운 과정이 남아 있었다.
며칠 전 용병 연합회에서 보내 주었던 통과증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외곽 성문 경비병들에게 제지를 당해야만 했다.
이유는 허름한 하류검사 복장 때문이었다.
경비 장교로 보이는 자는 지드와 그의 대원들을 불쾌한 얼굴로 아래 훑어보는가 하면 그들이 제시한 통과 증명서를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너희들, 이거 어디서 났어.”
지드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증명서 하단 부분에 용병 연합회의 도장이 찍혀 있지 않소? 바로 그곳에서 통과 증명서를 준 것이오.”
“그러니까 거기서 왜 이걸 줬냐고!”
경비대장이 성질부리듯 말하자 지드는 일부러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분하게 응수했다.
“내가 바로 용병 특별 허가 신청서를 낸 본인이오. 말 그대로 난 용병 집단을 구상 중에 있소.”
경비대장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지나가겠소.”
지드와 두 대원이 성문 안으로 쑥 들어가자 경비대장이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잠깐!”
그러자 지드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만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고 일부러 음성에 공력을 실어 말했다.
“뭐! 통과 증명서에 문제라도 있소.”
“…….”
제법 공력이 강했던가. 예기치 않은 기세에 경비대장이 얼떨결에 말했다.
“아, 아니 증명서는 이상 없는데…….”
“그렇다면 이만 가 보겠소.”
지드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남기고 두 대원들과 함께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얼마쯤 안으로 들어섰을까.
8호를 제외한 지드와 7호는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용병 거주지와 겨우 담 하나를 둔 가깝고도 먼 곳이라지만, 정말이지 이 정도까지인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지드와 7호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장통과 빽빽이 들어선 높은 건물에 그만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흰 토가 차림이거나 제법 비싸 보이는 다양한 색상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검사들의 복장은 철 재질의 군장인데다 저들끼리 급수를 정하여 개별적으로 금속 보호대를 착용하는 듯 보였다.
다시 말해서 보호대가 없는 초라한 군장 차림은 중류검사들 중에서도 하급이요, 윤기가 반짝 흐르는 금속 보호대들이 덕지덕지 붙은 자는 상급이나 특급에 해당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들이 분명했다.
그동안 용병 거주지에 보아 왔던 검사들의 복장이 다시금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7호가 물었다.
“대장님, 여긴 완전히 별천지네요?”
“그렇군.”
하지만 대도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8호에게는 그다지 신기로울 게 없었다.
“그만들 가시죠?”
“…….”
어느덧 시간이 흘렀고 서녘노을마저 세상을 붉게 물들였던 주황빛마저 사라졌다.
이제는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때마침 그들은 어느 커다란 건물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거대한 석문의 위용에 눌려서인지 그들은 문을 두드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지드로서는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니, 더러운 기분이랄까.
위화감의 정도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드는 고심 끝에 7호에게 명령했다.
“네가 문 두드려 봐라.”
그러자 7호가 난색을 표명했다.
“저기…… 이런 건 아무래도 귀족 출신인 8호가 하는 것이.”
8호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문 두드리는 것도 출신을 따져 가며 합디까.”
“하라면 할 것이지.”
“알겠수다. 어차피 배도 고프고 피곤한데 일단 안에 들어가고 봅시다.”
8호는 말이 끝나자마자 철 문고리를 잡고 석문에 세차게 부딪쳤다.
쿵쿵! 쿵쿵!
8호가 무식하게 계속해서 부딪치자 지드와 7호는 졸인 마음에 동시에 외쳤다.
“한 번만 두드려!”
“…….”
잠시 후 굳게 잠겨 있던 석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익―
벌어지는 틈새 안으로 보이는 것은 푸른 정원과 여타 조각상들이었다. 이어서 등장한 철 군장 차림의 경비병들은 방문객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만 다소 인상을 썼다.
“뭐야, 당신들.”
지드가 앞에 나서서 뭔가를 내밀었다.
경비병들이 그가 내민 양피지를 보자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특별 허가 신청자입니까?”
“그렇소.”
그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지드와 일행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경비병들을 따라서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저 멀리 신전 양식의 건물이 보였으니 아마도 연합회 본관 같아 보였다.
잠시 후 현관을 들어서 로비까지 안내된 일행은 중앙 대리석 탁자와 세트로 된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이어 시종인 듯한 자가 나오더니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접수 담당자께서는 손님을 접대하고 계시는 중이니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식사들은 하셨는지요.”
7호가 냅다 대답했다.
“안 먹었는데? 지금 당장 뭐라도 갖다 주시겠소?”
“저기,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요.”
그러자 8호가 7호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만 나지막이 언질을 주었다.
“형님, 일단 담당자란 분을 만나 보고 그 다음에 식사를 요청하는 게 순서입니다.”
7호는 자격지심이 느껴졌는지 신경질을 팍 내고 말았다.
“물어보니까 대답한 것뿐이라고!”
8호는 일단 시종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고 7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보통 시종들은 예의상 손님들에게 그런 식으로 물어봅니다.”
“제길! 물어보지나 말 것이지.”
지드가 그를 나무랐다.
“7호야, 여기서는 조용히 하자.”
“네…… 대장님.”
그때 맞은편 어두운 복도로부터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고는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화려한 금박 문양의 토가를 걸쳐 입은 다소 짤막하고 뚱뚱한 노인이었다.
아마도 그가 바로 접수 담당자인 듯싶었다.
지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하류검사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