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드는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접수 담당자로 보이는 노인의 표정에는 찬바람이 팍팍 흘렀고 그의 손에는 제법 적지 않은 양의 서류들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일이 그리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이 지드와 일행들에게 바짝 다가오더니만 한마디 던졌다.
“누가 신청자요?”
지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잽싸게 대답했다.
“접니다.”
노인이 지드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만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날짐승 가죽을 여러 장 덕지덕지 꿰매 만든 차림새 하며, 어딜 보아도 전형적인 하류검사였다.
그와 함께 온 7호와 8호의 복장 역시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던가.
“용병 거주지 내 하류 구역 출신이오?”
“네, 하류 구역입니다.”
“흠…… 하류 구역이라.”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탁자 위에 서류를 올려놓고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려 했다.
“지금부터 서류 심사를 시작할 테니까 웬만하면 묻는 질문들에 빨리빨리 답하시오.”
노인의 강압적인 말투에 지드가 얼떨결에 말했다.
“아, 네.”
“용병단 특별 허가 신청서를 낸 장본인이 맞소?”
“예, 제가 신청했습니다.”
“여기 제출 서류를 보니 경력이나 약력에 관한 것은 전혀 없는데 일부러 적지 않은 거요?”
이에 지드가 당황스런 얼굴을 했다.
“저, 저기…… 그런 것들을 꼭 적어야만 하는지요?”
노인이 이상한 눈초리로 지드를 노려보았다.
“신청서를 낼 만한 자라면 최소한 특별한 경력이나 화려한 약력 정도는 지니고 있는 것이 기본 아니오?”
“아, 그렇군요?”
“……다시 묻겠소. 실전에 관한 경험 등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게 말해 보시오.”
“…….”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만 지드, 그에게 있어 경력이라면 용병 거주지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밑바닥 삶이 전부가 아니던가.
하물며 실전은커녕 하류검사로서의 고된 기억들만 머릿속을 맴맴 돌고 있을 뿐이었다.
노련해 보이는 서류 심사관은 그런 그의 심정을 읽었는지 탁자에 펼쳐져 있던 서류들을 다짜고짜 모아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뜩 뱉어 내는 반말.
“당장 돌아가게나.”
“네?”
“다른 때 같았으면 자네와 일행들은 허위 신청에 관한 사기죄로 당장 이곳 지하 감옥에 처박았을걸세.”
“무슨 말씀인지요.”
“그걸 몰라서 묻는가! 어디서 감히 신청서를 제출해서는!”
지드가 울컥하며 말했다.
“하류 구역 거주자들은 이런 거 신청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그전에도 호기심 반 객기 반으로 이런 무모한 짓을 했던 자들이 있긴 했지. 하지만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흠씬 두들겨 맞아 반병신이 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했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특별히 배려 차원에서 그냥 보내 줄 테니 지금 이곳을 떠나게.”
그러자 지드가 노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니?”
“저는 분명 용병단을 만들기 위해 정식으로 신청서를 냈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라니요.”
그러자 노인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듣다니, 쯧쯧!”
“노인이야말로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군요.”
지드의 태도에 이번엔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서류 심사관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음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야!”
“……무슨 말씀인지요.”
“나는 그저 행정 업무를 보는 서기관으로서 사정상 자리를 비운 서류 심사관 대신에 자네를 면접하는걸세. 그래서 하는 말일세. 당장 돌아가게나. 난 원래 심장이 강하지 못해서 피 보는 일은 딱 질색이거든.”
노인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서류들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의 행동에 지드는 더 이상 뭐라 할 말도 없었다. 허름해 보이는 하류 복장에 제출 서류에서도 그 어떤 한 줄조차 채울 게 없었으니 노인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지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뭔가 항변이라도 하고 가야 하건만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던 걸까.
사실 지드 그 자신도 이곳까지 오면서 이만저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지노 수장의 권유로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신청서를 내긴 냈지만 과연 스스로가 그만한 실력을 지녔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막상 이곳에 와서 노인의 냉담한 반응을 대하니 천성이 심약한 그로서는 당장 자리에 일어나서 이 건물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자존심이 상한다고나 할까.
‘내 주제에 무슨 용병단을 창설한답시고 여기까지 찾아왔지?’
그는 체념 어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제까지 잠자코 있었던 7호가 등을 돌리고 저만큼 가는 노인에게 뭐라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희 대장님의 검술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데, 알고나 이런 푸대접을 하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어련하시려고. 허허!”
“얼마 전에 대자객 한 명을 제압한 적이 있다면 믿겠습니까!”
“…….”
툭―
노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저 경직된 뒷모습만으로도 꽤 놀란 반응을 보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대자객이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만 7호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 뭐라 그랬나.”
7호가 당당히 대답했다.
“저희 대장님이 대자객을 제압했다고 그랬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농담을 하는 것인가!”
“농담 아니오! 내 목숨을 걸고 말하는 것이니 노인 양반께서도 진지하게 듣기 바라오.”
노인이 혹시나 하고 7호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폈다. 7호의 번뜩이는 눈빛도 그렇고 인상조차 매우 당당해 보였다.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젊은이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서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없는 말을 지어 내거나 거짓말을 했다가는 진짜 큰일을 당할 수 있을걸세.”
“거짓말 아니오!”
노인이 이번엔 지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아…… 예,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만 대답해 보게나.”
“저기, 그게, 사실은 사실인데…….”
“사실이라고!”
노인이 경악한 듯 외치며 다시 탁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류 하나를 다시 집어 들어 지드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특별 허가 신청서로서, 노인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경력을 기재하는 공란이었다.
“여기에 대자객을 제압한 사실을 기재하게나.”
“…….”
지드는 잠시 망설였다. 결코 떠올리기 싫은 일이었다. 상대가 비록 대자객이었지만 여자였다는 사실과 자신의 발아래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갔던 광경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더군다나 대자객 신전으로부터 추적을 받고 있는 처지에서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알리는 것 같은지라 곧이곧대로 적는다는 것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그때 7호가 대신 펜으로 기재를 하기 시작했다.
당혹해하는 지드.
“지금 뭐 하는 거야!”
“글 쓰는 것을 배우지 못하셨나 본데, 그게 뭐 창피한 일이라고 주저합니까? 그냥 부하들 시키면 그만인 것을요.”
“…….”
지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7호가 하는 대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때 8호 역시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대자객을 제압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병단 만드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애초 그렇게 말씀하시면 될 걸 가지고 왜 그리도 뜸을 들이셨는지요.”
이번엔 노인이 지드에게 말했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용병 연합회 서기관으로서 사실 내 신분은 제법 높다고 볼 수 있네. 자네들 부하들 얘기를 들어보니 대자객을 제압한 일이 사실 같은데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난 아직도 그 말을 믿을 수 없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네. 자네가 대자객을 제압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결국 지드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네.”
“만에 하나 거짓말로 들통이 날 경우에는 자네와 두 부하들은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야 할걸세.”
“알겠소.”
“자, 지금 이 순간부터 여기 신청 서류들은 연합회에 공식적으로 접수가 되었으니 결코 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게나.”
“…….”
침을 꿀꺽 삼키는 지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던가. 앞으로 일들이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쉬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때 노인이 로비 오른쪽을 향해 소리쳤다.
“게리! 어디 있나.”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뛰쳐나왔다.
“여기 갑니다!”
허여멀겋게 생긴 소년 하나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모습을 나타냈다. 노인이 소년을 가까이 오게 하고는 지드에게 말문을 열었다.
“이 아이가 숙소로 안내해 줄걸세. 어쨌거나 기본 심사를 통과해서 웃는 낯으로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안내자 게리라는 소년은 참으로 말 많은 녀석이었다. 안내를 받은 지 벌써 30여 분이 지났건만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드와 일행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그 어떤 정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은 것이 아닌가.
“하하하! 그래서 내가 이랬죠. 나를 건들면 팔라카스 제국의 용병들 모두가 적이 된다고요! 그랬더니 다들 얼어서 꼼짝 못하는 거 있죠. 녀석들도 내가 용병 연합회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고요? 솔직히 귀족 출신 녀석들치고 겁쟁이 아닌 놈들이 없죠. 자기 집안 배경 믿고 함부로 날뛰는 꼴이란, 쯧쯧!”
유익한 정보보다는 쓸데없는 잡담이 많았으니 급기야 7호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만하지 못하겠냐. 그놈 말 더럽게 많네?”
소년이 즉각 반응했다.
“뭐라고요!”
“피곤하니까 그만 구경시키고 당장 숙소로 안내나 하시지.”
“당신 무례하군요.”
“무례한 놈은 손님을 모셔 놓고 자기 얘기만 떠드는 바로 네놈이라고.”
“누가 당신들더러 손님이래요? 쳇! 보아하니 하류검사들 같은데 기본 심사에서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개망신 당할 게 뻔해!”
그때 7호가 손을 홱 들어 위협을 했다.
“너, 이 자식 진짜 아가리 닥치지 않을 테냐.”
“이제 보니까 당신 깡패네.”
“뭐야? 이 자식이 정말!”
7호가 주먹을 쥐어 꿀밤을 때리려 하자 지드가 말렸다.
“애한테 무슨 짓인가!”
지드 말에는 꼼짝 못하는 7호, 그가 잽싸게 주먹을 내렸다.
“녀석이 하도 건방지게 굴기에.”
이번엔 8호가 참견했다.
“저 녀석 얼굴에 심술이 주렁주렁 달린 것이 마치 형님 어릴 때 보는 것 같은데요.”
“젠장! 넌 왜 또 껴드는 거야.”
지드가 말했다.
“자, 그만들 하자.”
이번엔 소년이 잔뜩 삐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지 하류검사들이란 못 말리는군. 그래, 내가 참자. 어차피 피 떡이 되어 실려 나갈 자들인데.”
7호가 다시 불끈했다.
“너 또 뭐라 시부렁거렸어!”
“그냥 혼자 한 말이니까 신경 끄시지요? 어차피 당신들 안내는 내 손에 달려 있으니까 내가 마음먹고 골리려 한다면 꽤 피곤할걸요? 그러니까 앞으로 내게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순간 들려오는 둔탁한 음.
딱!
“아얏!”
결국 7호가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소년의 머리에 꿀밤을 놓고 말았다.
“이젠 꼴 같지 않게 폭력까지 쓰네? 좋아, 어디 당신들 마음대로 해 보시지! 나는 없어져 줄 테니까.”
소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모퉁이로 사라져 버리자 지드와 8호는 그저 멀뚱한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반면 7호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당장 잡아다가 요절을 내 주고 말 테다!”
7호가 분을 이기지 못해 쫓아가려 하자 지드가 만류했다.
“그만둬!”
“저놈이 숙소도 안내해 주지 않고 내빼잖아요! 어우!”
지드와 일행은 한참을 해맨 끝에 겨우 어느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입구에서 멀뚱히 서서 들어갈까 말까 하며 망설이고 있었는데 대체 이곳이 숙소 건물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8호가 7호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휴! 형님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유? 애들이 다 그런 거지, 주먹을 휘두를 것까지는 없잖습니까.”
7호가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저 꿀밤 한 대 때렸을 뿐이라고!”
“철없는 아이, 그냥 살살 달래거나 맞춰 주면 되는 거지. 형님도 참.”
이번엔 상황이 바뀌어 7호와 8호가 한바탕할 판이었다. 결국 지드가 한마디 했다.
“됐다, 그만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볼까?”
그때 8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만 오른쪽 거대한 건물 각 층마다 즐비해 보이는 테라스들을 살펴보았다.
“저기 동쪽 건물 말이죠. 널려진 빨랫감들과 옷가지들을 보아하니 공동 숙소가 아닌가 싶은데요.”
지드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저길 봐봐, 군장과 보호대들 그리고 검이 걸려 있는 거 보여?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데…….”
8호가 덧붙여서 말했다.
“각 방마다 군장의 색상이나 그 형태가 각각 다른 것으로 보아 이곳 용병들의 복장이 아닌 외부 손님들을 위한 숙소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드의 화색이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오호라,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온 셈이군.”
7호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들도 신청자란 말인가요?”
“모두가 신청자들은 아니겠지. 우리처럼 동행자들이 있을 수 있잖아.”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군요. 건물이 꽉 들어찰 정도라면 족히 백여 명은 넘어 보이는데요.”
“정말 크군.”
지드는 그저 말로만 들어왔던 용병 연합회의 건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많이 놀랐건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7층 구조물에 왠지 모를 위축감마저 드는 느낌이었다.
8호가 덧붙여 말했다.
“스스로 실력이 있다고 여기는 검사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용병단을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할 겁니다. 아마도 저 안에는 대장님과 마찬가지로 신청서를 내고 심사를 기다리는 검사들로 꽉 차 있겠지요.”
지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내가 호랑이 굴에 뛰어든 셈이겠군.”
8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아니죠.”
“아니라니?”
“호랑이가 제 굴을 찾은 격이 아닐까요.”
지드는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건물 앞에 의미심장한 눈길로 올려다볼 뿐이었다.
‘과연 그럴까…….’
7호는 8호가 뭔가 멋있어 말로 대장에게 아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괜히 심통이 났다.
“너, 아는 거 많아서 좋겠다?”
“아오! 또 삐딱하게 듣는 거요?”
“뭐 그렇다는 거지.”
“꼬투리 잡을 일이 그렇게 없수?”
“잘난 놈 잘났다고 그러는데 뭐가 불만이야!”
이번에도 결국 지드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 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냐! 당장 돌려보내기 전에!”
지드 일행은 1층 로비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신청자와 함께 따라온 호위검사들은 각자 따로 숙소 안내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지드는 아리따운 여인, 시종을 따라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지드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어깨가 드러나고 몸이 착 달라붙은 원피스 복장의 여인, 짧은 치마에 허연 허벅지 살이 미끈하게 보였다.
한눈파는 순간 그만 발을 헛딛고 마는 지드.
“어이쿠!”
쿵!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대략 2m 아래 카펫 바닥에 대자로 자빠지고 말았다. 여인이 놀라서 재빨리 내려왔다.
“어머! 괜찮으세요.”
그는 당혹스런 나머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지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이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풋.”
순간 지드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방금 전 자신의 어벙한 행동에 대해 비웃는다 생각하니 조금은 화가 날 만도 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고 점잖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사람이란 가끔 실수도 할 때가 있는 법이지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해서 내 잠깐 발을 헛디뎠나 보오. 하하.”
호탕하게 웃는 것까진 좋았다.
곧이어 들려오는 여인의 자그마한 음성.
“바지 뒷부분이 찢어졌는데요.”
“…….”
순간 돌처럼 굳어지다 못해 경직이 되어 버린 지드, 어쩐지 엉덩이 부분이 시원했던가. 그의 오랜 습관이라면 속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
숙소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가 버린 지드,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의 몸부림을 쳤다.
정말이지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용병단 특별 허가 신청자라는 귀빈 자격으로 고급 숙소에 들어서면서 격에 맞는 행동을 하리라 그 얼마나 스스로 다짐을 했던가. 이렇게 처음부터 일이 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바깥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잠깐 문 좀 열어 주세요.”
“헉!”
아직도 가지 않고 서 있었던가.
“왜, 왜 그러시오.”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뭔 일이오.”
“숙소에 머무시는 동안 몇 가지 편의 시설 등 설명을 해드리려고요.”
“그럴 필요 없소. 내가 대충 알아서 지낼 테니 그리 아시오.”
“그러시다면 물러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불편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뵐게요.”
“그러시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지드는 그만 입이 떡 벌어진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이제야 느꼈던가. 수십 명은 지낼 수 있을 법한 넓은 공간에 사방 벽들 천장마저 온통 번쩍였다. 금 도금 장식들에 대리석 조각상들 하며 천장 벽화는 태고의 신들을 묘사한 듯 웅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큰 거실 한복판에 나 홀로 서 있는 지드, 생전 처음 접해 보는 화려함인지 한동안 꼿꼿한 그 자세로 일관했다. 고급스러움에 취한다는 말이 있던가.
방 안에 있는 것들은 하나에서 백까지 예사롭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하류 구역과 고향 농촌에서 평생을 보냈던 지드로서는 그 용도가 뭔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물건들에 호기심을 자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
그는 이것저것 만져 보며 신기해 하였다.
꼬르륵
그때 뱃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다. 이미 시간은 밤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왜 식사를 건너뛰어야만 했는지 억울하기도 했고 결국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숙소를 찾다가 시간을 허비했으니 저녁때를 놓칠 수밖에…….’
이 순간만큼은 7호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숙소 안내하던 아이를 패서 쫓아 버리는 바람에 밤새 배를 곯게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7호 역시 지금쯤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후회막급하리라.
지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그 녀석 성질이 조금 급하긴 급하지.’
지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배가 고플 때에는 물로 배 채우는 것이 최고가 아니던가.
‘가만있어 보자. 물병이 어디 있지.’
넓은 실내를 돌아다니며 물병 비슷한 것조차 찾는데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침대로 돌아와 확 누워 버리는 지드, 갈증이 심해졌는지 결국 불평불만이 가득해질 수밖에 없었다.
‘젠장! 최소한 물은 제공해 줘야 할 것 아냐? 여긴 그저 겉만 화려할 뿐, 사람을 위한 배려가 없는 곳 같군.’
마침 그때였다. 침대 아래 부분 조그만 탁자 위에 커다란 청동 그릇 하나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지드는 잽싸게 그쪽으로 머리를 향하고는 살펴보았다. 순간 그의 동공에는 출렁거리는 샘물이 가득했다.
“물이다!”
그 큰 그릇을 두 손을 들고는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허기도 지고 갈증도 심했으니 그 많은 양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마셨다.
꿀꺽꿀꺽
“와, 시원하다!”
다시 침대에 누워 버리는 지드.
털썩
푹신푹신한 대형 매트에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촉의 고급 시트에 대가리를 박았다.
귀빈들을 위해 살짝 뿌려 놓은 장미향에 취해 몽롱한 기분까지 들었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지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누굽니까?”
“저기…… 죄송해요. 제가 깜빡 잊고 물을 비치해 놓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시종이었다.
“물이라니요?”
“잠깐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
찰칵!
문을 열자 시종이 물병과 잔이 놓여 있는 은빛 쟁반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드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물은 이미 배터지게 먹었는데.”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시종이 안으로 들어와 중앙 탁자 위에 물병과 잔을 놓은 다음 침대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지드는 뭐 하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방금 전 자신이 통째로 들고 마셨던 커다란 그릇을 들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
“이상한데…… 분명 아까 물이 많았었는데.”
시종은 허리춤에서 지저분한 걸레를 꺼내어 그 그릇에 담그고는 그릇째 들고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직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분명 침대랑 아래 바닥만 조금 닦았을 뿐인데,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줄어 있다니…….”
뭐, 뭐야? 그럼 저게 걸레 빤 물?
탁!
시종이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지드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컥! 컥!”
시간은 어느덧 새벽으로 접어들었다.
딸그락. 딸그락.
7층 복도 끝에는 손님들을 위한 간이 식당 및 주방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으니,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이곳에 몰래 숨어 든 지드였다.
혹시라도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도둑고양이처럼 주방을 더듬거리는 지드, 하지만 손에 만져지는 것은 주방 기구 혹은 그릇들뿐이었다.
“배고파 뒈지겠네.”
아까 구정물로 배를 채운 것조차 이미 한참 전에 꺼진 듯 했다. 지드는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 그만 벽에 등을 기대고 말았다.
헌데 하필 그곳에는 주방 기구들을 걸어 놓은 금속 벽걸이가 있었다.
우당탕탕―
“헉!”
한바탕 난리가 난 듯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등잔불을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방금 전 소란이 그 앞쪽 투숙객을 깨운 것이 분명했다.
“거기 누구세요?”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시종은 아니었다. 불빛과 함께 가까이 다가온 존재는 머리를 뒤로 묶고 잠옷을 걸 친 아주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진 주방 기구들에 묻혀 멍하니 있는 지드를 보더니만 이내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배가 고프셨나 보군요. 그런데 왜 등잔불을 켜시지 않았나요.”
그녀는 자신이 들고 온 등잔을 일단 탁자에 올려놓았고 그 앞에 놓인 주방용 대형 등잔에 불을 밝혔다. 주변이 환해지자 여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마 오늘 처음 들어오신 것 같군요. 그렇죠?”
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저도 며칠 전에 같은 경험을 했어요. 야속하게도 식사 때를 놓치면 전혀 먹을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배가 고픈 나머지 그대처럼 주방을 뒤지며 야식을 즐기곤 했답니다. 음식들은 맞은편 찬장과 테이블 아래에 보관되어 있는데 잘 찾아보시면 누군가 먹다 남긴 와인까지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행운을 빌게요.”
여인은 말이 끝나자마자 등잔을 들고 자기 숙소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지드, 마치 새벽 천사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 불빛과 함께 짠하고 나타난 미인.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먹을 것들을 안내해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어찌 황홀하고도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 텐가.
‘이름이나 물어볼걸…….’
하지만 후회는 거기까지였다. 그녀 역시 7층에 머무는 것을 보아서 용병단 특별 허가 신청자들 중에 한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날 기회는 충분할 것이다.
기본 심사에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이튿날이 되었다.
휘잉―
계절적으로 아침나절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전형적인 초가을의 날씨였다.
정원을 함께 거닐고 있는 두 청춘들이 있었다. 하나는 20대 초반이었고 다른 한 명은 10대 후반이랄까. 웬일인지 그 둘은 다소 경직된 얼굴들이었고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으니 한눈에 봐도 냉전이 지속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조금은 위로 보이는 청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봐, 아레스! 너 정말 나랑 말하기 싫다 이거냐.”
“…….”
사내 말에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여전히 무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청년이 다그치듯 물었다.
“사내자식이 겨우 그까짓 일로 삐치냐? 그러고도 네놈이 남자야!”
결국 그 말에 청년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말문을 열고 말았다.
“남 말하네요.”
“아레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하루 종일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겠냐.”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요. 대장님이 들으면 진짜 화냅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괜찮잖아, 임마. 그냥 이름 부르자.”
“하여간 7호 형님은 태어날 때부터 천성 자체가 삐딱하게 타고 난 게 분명할거요.”
“그건 인정하지. 내가 그다지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게 아니라서.”
“그게 자랑이유?”
“……뭐야?”
순간 7호가 팔로 8호의 목을 꽉 감아 버렸다.
홱!
“아이고, 왜 또 시빕니까! 이번엔 힘으로 하자는 거요.”
“왜! 힘으로 하면 네놈이 나를 이길 것 같으냐?”
“검술로는 안 되니까 힘으로 하자는 거 아뇨?”
“어라, 이 자식 봐라? 이제는 형 앞에서 거짓말까지 술술하네. 네놈이 언제 검술로 나를 이겼냐.”
“지난번 대련에 내게 패하지 않았소.”
“언제?”
“보름 전 형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산검법 비무를 가졌잖소.”
“엥! 그건 네놈이 엎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기에 혹시라도 다쳤을까 봐 목검을 거두려는데 갑자기 기습 공격을 하는 바람에…….”
“그것도 전술이오!”
“전술 좋아하시네. 이미 끝났던 승부건만.”
“진 건 진 거니까 인정하시죠?”
“못하겠다면.”
“이 목이나 풀어요. 컥! 숨 막혀 죽겠잖아요!”
“네놈이 그리 쉽게 뒈질 놈이더냐?”
다 큰 사내들이 분수대 바로 앞에서 애들 놀 듯 서로 엉켜 붙어 있는 모습에 마침 점심 식사를 끝내고 정원을 거니는 자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흘끔흘끔 쳐다보곤 했다.
그러던 중 덩치 큰 두 명의 사내들이 다가와서는 다소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들 중 왼쪽 뺨에 손마디보다 긴 흉터가 있는 사내가 거친 음성을 내뱉었다.
“뭐야, 이 새끼들!”
다른 사내 역시 한마디 했다.
“그러게 말이야. 여기가 제 안방인가?”
그때 7호와 8호는 장난을 멈추고는 갑자기 나타난 상대방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
우람하고 단단한 체격의 예사롭지 않은 복장의 사내들, 아무리 7호와 8호가 하류검사 출신들이라지만 상대방들 군장 정중앙에 화려하게 새겨진 은빛 독수리 문장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헉! 백, 백전대장!”
8호가 먼저 신음을 흘렸고 곧이어 7호마저 심장이 철렁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
두 명의 중년 사내들은 어린 녀석들이 자신들을 알아보고는 지례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한마디 툭 던졌다.
“혼나기 전에 당장 꺼져라. 여기 분수대 앞은 아무나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다. 하물며 네놈들 같은 허름한 잡것들은 더더욱 안 되지.”
이번엔 다른 사내가 7호와 8호를 쭉 살펴보더니만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저놈들이 왜 용병 연합회 숙소에 있는 거지? 하류 구역 출신 녀석들 같은데.”
“뭐, 허드렛일 하는 시종들일 테니 신경 쓰지 말게나. 그나저나 식곤증 때문에 잠이 몰려오는데? 여기 한번 누워 볼까!”
착―
“옆으로 조금만 가 보게나. 나도 눕게.”
“벤치가 웬만한 침대보다도 더 크니까 우리 둘 누울 자리는 충분해서 좋군!”
“아함, 날씨 한번 시원하군.”
“그나저나 아가씨께선 왜 용병단 창설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어. 따분하고, 귀찮게 말야.”
“그러게 말일세. 그만한 명문가라면 굳이 이런 데 와서 고생할 필요 없이 개인 사병을 고용하면 그만인데.”
쏴!
분수대로부터 시원한 물줄기들이 청명한 가을 하늘 위로 짝 뿜어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날 분수대 뒤편에서 똥 씹은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청춘들이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자리를 백전대장들에게 내주고 쫓겨났던 7호와 8호! 그들은 치밀어 오르는 화에 분수대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억울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에이, 제길! 기분 더럽네!”
7호가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자 8호 역시 말문을 열었다.
“더럽기는요. 상대는 백전대장이란 말입니다. 아무 탈 없이 빠져 나온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지요.”
“그래도…….”
“형님도 잘 알겠지만 백전대장은 전투에 참가한 돌격 전사들 중 백 번 이상 승리를 거둔 자들에 한해서 내려지는 명예로운 칭호 아닙니까. 한마디로 전투의 귀재(鬼才)들이나 다름없는 자들인데, 우리 같은 하류검사들이 상대할 존재가 아니란 말이지요.”
7호는 못내 자존심이 상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남자로서 말이야.”
“세상에는 말이죠.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존재들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 그들을 피했다고 해서 자존심 상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
8호의 설명에 7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일이던가.
다소 경직되고 굳어진 표정, 7호는 아랫입술마저 은근히 깨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너 아까 우리가 하류검사라 말했지?”
“그랬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러네.”
“뭐가요?”
“우리가 왜 아직까지 하류검사냐!”
“그야 용병 거주지에서도 하류 구역 출신이니까 당연지사 그런 거 아닙니까. 더군다나 복장 자체부터 구질구질하고요.”
“네 복장은 좀 낫다 이거냐?”
“나는 가출했을 옷 그대로니까 형님하고는 다르죠.”
“잘났다.”
“또 괜한 트집 맙시다?”
“하여간…… 이건 아니라고 본다.”
“또 뭐요?”
“우리들 스스로가 자신을 하류라 칭하면 그게 진짜 하류다. 대장님도 그랬잖아, 본인이 하류 인생이라 여긴다면 언제까지고 하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
“틀을 벗어나야지! 하류의 단단하고 무거운 틀 말이다. 이런 개 같은 인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들 모두가 지난 몇 년 동안 대장님으로부터 혹독한 수련을 받지 않았더냐!”
7호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등 뒤로부터 검을 빼어 들고 분수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8호가 기겁을 하고 그를 만류했다.
“서, 설마…… 뭘 어쩌려고요!”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오늘부터 인생 새롭게 살 거다. 넌 나서지 마라.”
“아이고! 왜 그런데요.”
7호가 분수대를 돌아 앞쪽으로 가자 8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당장 돌아오슈! 아, 나! 정말 미치겠네!”
잠시 후 7호가 그들 앞에 바짝 다가섰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잘도 자는군. 다들 냉큼 일어나지 못하겠어!”
7호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 백전대장들에게 호통을 치듯 외치자 그들 중 하나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반응을 보였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
옆에 있던 사내 역시 상체를 일으켜 자신들 앞에 당당하게 선 7호를 쳐다보았다.
“쟤 뭐야?”
그러자 7호가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잘 만큼 잤으며 교대하시지?”
“교대라니?”
“나도 거기서 편히 낮잠을 자고 싶다, 이 말이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놈의 미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서일까.
“저놈 왜 저러는 거야?”
“뭘 잘못 먹은 것 같은데? 아님 실성했든지. 뭐, 미친 것도 급수가 있다던데 이건 증상이 상당히 심각해 보이는걸?”
“그렇다면 굳이 상대할 것까지는 없잖아.”
“동감.”
“그런데 저렇게 시퍼런 검을 뽑아 들고 설치는데…… 왠지 겁난다? 푸하하하!”
“큭큭! 에이, 설마 자는 도중에 뭔 일 있겠어? 그럴 배짱도 없어 보이는데.”
“그럼 자자. 이런 젠장, 요즘 들어서 별일들이 자주 생기는 것 같군!”
그 둘은 7호를 무시한 듯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들려오는 거친 말투.
“병신 같은 놈들! 이제 보니 백전대장이라는 것들은 이름만 그럴싸하고 실상 겁쟁이들인 게 분명하구나!”
다시 상체를 일으키는 두 명의 백전대장들, 그들의 얼굴에는 방금 전하고는 달리 살기 가득한 냉기가 팍팍 흐르고 있었다.
“너, 뭐라 지껄였냐?”
“나랑 싸우자.”
“싸우자고? 너 뭐 하는 놈이냐?”
“그냥 사람이다!”
“…….”
짹짹―
지드는 모처럼만에 잠을 푹 잤다. 깨어나 보니 태양은 어느덧 중천에 높이 떠 있는 한낮이었다.
지드는 실내 공기가 답답한지 테라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그곳으로 나갔다.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와우!”
무거운 머릿속을 관통이라도 하듯 시원한 바람의 상큼함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한 발 더 나가 7층 난간을 손으로 잡고는 숙소의 드넓고 잘 꾸며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이곳 건물 7층에 머무르는 자들은 특별 허가 신청자들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 귀빈들이랄까. 그 자신도 그들 부류에 속해 있다는 자체에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층부터 6층까지는 신청자들의 경호 혹은 호위를 담당하는 검사들이 지내는 숙소이다.
7호와 8호 역시 대장 지드가 모든 시험과정을 거쳐 용병 집단을 창설할 자격을 얻을 때까지 이 건물 아래층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지드는 혹시라도 7호와 8호가 보이지 않나 하고 정원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체 이 녀석들은 어디 있는 거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른쪽 제법 커다란 분수대에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포착했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 뭔가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뭔 일이라도 난 것이 틀림없었다.
챙챙!
“이얏!”
“헉!”
자세히 보니 호위검사들끼리 2대2로 싸움이 붙은 듯 제법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지드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말았으니.
“뭐야! 저 녀석들이 왜 저기…….”
설마하니 싸움 당사자들 중 두 명이 7호와 8호일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드를 더욱 경악케 한 것은 녀석들이 상대하는 자들의 신분이었다.
은장 흉갑 정중앙에 새겨진 은빛 독수리 문양…….
설마하니 백전대장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단 말인가!
“헉! 저놈들이 실성을 했나!”
안절부절 못하는 지드, 결국 저들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실내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때 옆쪽 테라스로부터 들려오는 소녀의 음성이 있었다.
“그냥 둬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
순간 지드는 누군가 하고 왼쪽 테라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귀엽고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테라스 난간을 부여잡고 저 아래 벌어지는 광경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제야 소녀가 고개를 돌려 지드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난 테스라 해요.”
“아, 예.”
“보아하니 백전대장들과 대결을 벌이는 자들의 복장이 그대와 비슷한 것으로 봐서 같은 일행 같은데 제법 용기들이 가상하군요. 아니, 어쩌면 무모하다 볼 수도?”
하지만 지드는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여자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당장 급한 것은 7호와 8호가 다치기 전에 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랄까.
‘당장 가서 싸움을 중지시켜야 해!’
그가 다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옆방 테라스 소녀가 다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백전대장들은 그대의 일행들을 해치지 않을 테니까요.”
지드가 소녀를 쳐다보았다.
“흠.”
“설마하니 백전대장들이 아무리 화가 나 있다 하더라도 하류 구역 용병들을 상대로 자신들 검에 피를 묻히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위로의 끝자락도 되지 못했다. 나이도 어린 계집애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지드는 기분이 팍 상하고 말았다.
“뭐라고!”
“미안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어쨌든 당신 부하들은 안심해도 좋을 듯싶어요.”
지드는 소녀가 자꾸 어른 흉내를 내며 자신에게 당신이란 호칭을 쓰자 계속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지 인상이 확 굳어지고 말았다.
‘이건 또 뭐 하는 녀석이야?’
소녀는 지드의 그런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문을 열었다.
“이곳 용병 연합회 내(內) 규칙 중 가장 엄한 것이 바로 살상에 관한 것일 테니 함부로 진검을 사용해서 사람 목숨을 끊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내 부하들은 더더욱 그렇지요.”
순간 지드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부하들이라고?”
소녀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 일행들과 대결을 벌이는 백전대장들이 바로 내 호위검사들이거든요.”
지드가 깜짝 놀랐다. 그때 소녀는 지드가 있는 테라스로 갑자기 훌쩍 넘어 오는 것이었다.
홱!
착―
“뭐, 뭐야!”
“실례지만 함께 구경해요. 사실 그동안 좀 심심했어요.”
“…….”
뭐 이런 여자애가 다 있나.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을 하지 않나, 지금은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남의 테라스에 넘어오기까지 하니 말이다. 소녀는 저 멀리 싸움 구경에만 신경을 썼고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와우! 정말 놀랍네요. 당신 일행들, 보기보다 상당히 잘하는걸요?”
이에 지드 역시 무심코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소녀의 말대로 7호와 8호는 백전대장들을 상대로 너무도 잘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가 더욱 흥분해서 외쳤다.
“이거 정말 의외인데요? 세상에, 우리 검사들이 밀리고 있잖아요!”
지드 역시 녀석들의 선전에 어느새 주먹을 쥐고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왕 붙은 거, 한번 이겨 봐라.’
우람한 체격에 주로 힘과 파괴력의 검술을 사용하는 백전대장들에 비해서 다소 빈약하고 호리호리한 7호와 8호가 제법 현란한 몸놀림으로 잘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지드의 눈빛이 반짝였고 녀석들의 몸놀림에 세세한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스승의 마음은 한결같은 법. 자신으로부터 혹독한 수련을 견뎌 낸 7호와 8호가 너무도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백전대장과 맞붙을 용기가 생겼는진 모르지만 이제는 오히려 백전대장들을 압도할 정도로 몰아가고 있었으니 기대 아닌 기대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잘했어! 상체를 유연하게 뒤틀고 상대의 옆으로 돌아 허점을 노리는 거야.’
신기하게도 녀석들은 지드의 생각대로 알아서 척척 해 주고 있었다.
둘 다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한어(漢語) 습득에 뛰어난 7호는 다른 대원들에 비해서 화산파의 다양한 검술 초식들에 비교적 빠른 성취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특히 화산파의 광풍쾌검(狂風快劍)은 그가 가장 열의를 쏟는 검법으로서 힘과 속도가 어우러진 시원스런 동작이랄까.
지금 7호는 백전대장들을 상대로 그들의 파괴력에 당당히 맞서며 하나하나 동작마다 힘찬 광풍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경지까지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8호가 사용하는 검법은 매우 정교하고 예리하였다. 화산파의 검법들 중에서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천류검(天流劍)이야말로 8호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매력적인 요소들을 듬뿍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8호는 가출하기 전에는 마법에 흥미를 느꼈고 나름대로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그것을 익히려고까지 했었다.
그렇기에 무공(武功)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뭔가 마법 에너지를 내포한 기상천외한 전투 기술임을 단번에 알아 봤던 것이다.
특히 공간 에너지를 이용하여 검에 담아내는 천류검(天流劍)은 북쪽 대륙에서 유행하는 혼용 검술과 그 맥락이 같은지라 그는 주저 없이 그걸 택했던 것이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백전대장들을 상대로 허름한 차림의 하류검사들이 저렇게 잘 싸울 거라고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특히 7층 테라스에 내려다보고 있던 소녀의 경우는 눈앞에 광경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듯 손으로 자신의 두 손으로 비비기까지 했다.
결국 승부가 나고 말았으니 승자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허름한 복장을 하류검사들이었다.
백전대장들은 칼등에 강한 타격을 받고는 실신해서 둘 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7호와 8호는 자신들이 그들을 제압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멍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수 있었던가. 그들은 구경꾼들의 감탄과 환호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와와―!
잠시 후 8호가 정신을 차리고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형님. 우리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요?”
“그런 거 같은데.”
“그럼 이긴 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겼다고요?”
“젠장! 눈으로 보고도 모르냐? 같은 말 반복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