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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대공 자라투스 (12/81)

Chapter. 11 대공 자라투스

그날 밤.

건물 7층 어느 숙소 안에는 분위기가 제법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었다. 간혹 들려오는 호통에 양옆 테라스로부터 사람들이 뭔 일인가 하고 구경까지 할 정도였다.

“대체 네 녀석들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우리 처지가 어떤지 몰라? 이젠 하다하다 모자라서 아예 보란 듯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소란을 피워!”

“자리도 뺏기고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참,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네. 이 참에 아예 우리가 숙청 대상들 경호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확한 신분까지 알려 주지 그랬냐.”

7호와 8호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연신 풀죽은 음성으로 죄송하다고 내뱉을 뿐이었다.

지드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평소 때보다 잔소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하기야,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내가 데려온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지, 대자객 신전으로부터 추적을 받는 상황에서 무슨 용병단을 만든다고 여기까지 왔는지……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군.”

지드는 말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달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현 듯 무슨 결심을 굳혔는지 지드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내일 새벽에 돌아갈 테니까 다들 냉큼 방으로 돌아가서 짐들 꾸려.”

7호와 8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돌아가다니요! 그렇다면 용병단 창설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없었던 일로 하겠다.”

“대장님! 다시 생각해 보심이…….”

“다시 생각할 것도 없다.”

“이번 일 때문이라면 저희들이 책임을 지고 돌아가겠습니다.”

“꼭 너희들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아카시안 님과 그분의 동생들을 항시 이십사 시간 곁에서 경호해야만 했는데 잠시 신분을 망각해 있었다. 알다시피 우리는 사 년간 고용되었고 앞으로도 계약 기간이 남아 있지 않더냐. 그런데 경호대장이라는 내가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건지, 참…….”

7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분들 곁에는 수장님과 다른 대원들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장님께서 용병단을 창설하려는 이유는 타 용병단들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으려는 의도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는지요.”

지드의 반응은 냉담했다.

“내 결정에 번복을 없을 것이니 각자 숙소로 돌아가라. 예정대로 내일 새벽에 우린 이곳을 떠날 것이다.”

“…….”

대장의 확고부동한 말에 결국 7호와 8호는 말없이 방문을 나섰다.

“형님이 그들에게 먼저 시비만 걸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복도를 나선 7호와 8호는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8호의 말에 7호가 불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놈도 함께 싸워 놓고 뭔 소릴 하는 거야!”

“그거야 형님이 위험하니까 할 수 없이 껴든 거죠.”

“시끄러. 너도 공범이니까 괜한 트집 잡지 마라.”

“그나저나 대장님께서 진짜 돌아갈 생각이실까요?”

“대장님은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걸 몰라서 묻냐, 멍청한 녀석아!”

바로 그때 복도 저편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만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덜컹!

“네 이놈들, 거기서 또 다투는 거냐! 당장 내려가지 않으면 혼쭐을 내줄 테다!”

순간 둘이 깜짝 놀랐다.

“헉!”

“도, 도망가요!”

후다닥!

쏜살같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7호와 8호.

우당탕탕―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을밤을 정취를 더욱 깊게 빠져 들게 하고 있었다. 지드는 테라스 난간을 두 손으로 잡은 뒤 물끄러미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30대에 들어선 노총각, 그는 문뜩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의 삶에 일어난 사건들을 허공에 떠올려 보았다.

‘아…….’

하류검사로서 평생을 남들 심부름이나 하며 그저 그런 인생을 살 줄 알았던 그가 기인을 만나 무공이라는 기상천외한 전투 기술을 배웠던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은 경호대장이라는 직함에 9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고 심지어 용병 집단을 창설하기 위해 바로 이곳에 서 있다는 자체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갑작스레 삶이 바뀌어서일까, 지드는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직은 하류검사의 습성을 완전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아까 7호와 8호가 일으킨 문제 때문에 이곳을 떠날 것이라 결심했지만, 그건 어찌 보면 핑계에 불과한 일이었다. 엄밀히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자면 미래에 대한 왠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듯 이곳을 벗어나려는 의도가 조금은 더 컸음이 분명했다.

갑작스레 너무 높은 곳에 발을 들여 놓은 느낌이랄까.

지난번 운 좋게도 대자객 하나를 제압했다지만 그가 익힌 무공이라는 전투 기술이 과연 언제까지 승리를 안겨 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곳 용병 연합회에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상급 계열들이 모여 있을 테고, 앞으로 며칠 후면 심사라는 명목 하에 그들과 대결을 벌여야만 할 것이다. 그 일 때문인지 다소 압박감이 그의 뒷목을 짓누르듯 했다.

만에 하나 패한다면 짧으나마 달콤했던 지난 시간들이 사라지고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이랄까.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한지.

“휴…….”

깊게 한숨을 내뱉은 뒤에 무심코 가슴 안쪽으로부터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스윽.

오늘따라 유난히 영롱해 보이는 달빛 아래 비추어진 책자 표지에는 굵은 한어(漢語)체가 꿈틀거리듯 새겨져 있었다.

독고구검

스승님께서는 독고구검이 무림이란 곳에서 최고의 검법이라 일컫는 화산 검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십사수매화검법조차 아직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요즘 들어서 유독 이 비급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직 스스로의 부족함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준비랄까.

세상에는 대자객 이외에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고수들이 즐비하다고 들었다.

과연 무공이라는 전투 기술이 그들과 맞상대로 동등한 대결을 펼칠 수 있을지, 지드는 항시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독고구검 아니던가. 현재 그가 이룬 성취는 9초 중에 제3초까지로, 초식은 다음과 같았다.

제1초 총결식(總訣式)

제2초 파검식(破劍式)

제3초 파도식(破刀式)

삼 할에 해당하는 진전이 있었지만 여기까지도 무척이나 난해한 과정이었다. 무림 세계의 전투나 여타 무기 개념이 이곳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제3초 파도식(破刀式)의 경우에는 도(刀) 개념의 무기를 대처하는 검법이었기에 이곳 세계의 병기들과는 다소 무관한 기술일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인간이 만든 무기는 살상을 기본으로 하는 것.

그 어느 세계이든 검의 모양이라든지 여타 병기들의 기본 형태는 같을 테고 독고구검의 초식에 따른 위력 역시 이곳에서 통할 것이라 지드는 믿고 싶었다.

지드는 비급의 목차 부분에서 다음 남은 여섯 초식 과정 제목을 쭉 살펴보았다.

제4초 파창식(破槍式)

제5초 파편식(破鞭式)

제6초 파색식(破索式)

제7초 파장식(破掌式)

제8초 파전식(破箭式)

제9초 파기식(破氣式)

한숨만 흘러나올 뿐이다.

지드는 독고구검의 비급을 조심스럽게 가슴 안쪽으로 저미어 놓고 이번엔 벽에 기대어 놓인 뭉툭한 검을 집어 들었다.

현철중검.

스승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검은 독고구검의 창시자이신 독고구패께서 40세 이전에 천하를 주름잡았을 때 사용했다는 검으로서, 모든 무림인들이 평생토록 단 한 번만이라도 구경하기를 원하는 명검 중의 명검이라 했다.

사실 지드 역시 지난번 대자객과의 전투에서 이 검의 덕을 톡톡히 보지 않았던가.

마법이 실린 무시무시한 철편 채찍이 이 뭉툭한 형태의 검날을 감는 순간 오히려 맥없이 뚝뚝 잘리고 말았었다.

검 자체의 강도가 그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강한 것이 분명했다. 지드는 검을 몇 번이나 살펴보더니만 다시 벽에 도로 기대어 두었다.

찌르르―

때마침 풀벌레 소리가 점차적으로 작아지고 있었고 늦은 밤이 새벽의 초입으로 들어서려는 것 같았다.

지드는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는지 하품을 한 번 거나하게 하고서는 발길을 돌려 실내로 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맞은편 건물 어느 층에 등잔불이 켜지는 것이었다.

지드는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곳 창문이 열렸다.

이곳에 며칠간 지내는 동안 그 창문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아서 그저 빈 방이라 생각했는데, 모두가 잠든 이 늦은 밤에 갑자기 불이 켜지고 창문이 열린 것이다.

지드는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이 시각에…….’

테라스의 문이 워낙 넓은지라 등잔불이 여러 개 켜진 그곳 실내 안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노인 두 명이, 맞은편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지드는 그들 중 안면이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에 처음 도착하던 날 담당자 대신 나왔던 서기관이란 노인이었다.

그의 바로 옆에는 흑색 망토를 걸친 백발 노인이 보였는데, 왠지 느낌에 용병 연합회 총관으로 보였다.

막상 지드의 눈길을 끄는 자는 맞은편에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살펴보는데도 왠지 예사롭지 않은 포스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의 군장 차림새 자체가 여느 검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 같았다.

묵직한 청동색의 금속 흉갑과 각종 보호대들, 특히 그가 걸친 보라색 망토는 지드의 눈길을 더욱 사로잡았다.

남부 대륙에 있어서 망토는 일종의 신분의 급수를 나타낸다. 국적이 없는 용병들은 주로 칙칙한 회색 망토만을 착용할 수 있다.

하지만 용병대장이거나 뛰어난 검술을 지닌 특별한 용병에게는 흑색 망토를 걸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 주어진다.

제국의 정규군에 주어지는 망토 색상은 하얀색이며, 장교나 그 위 백전대장은 빨간 망토를 착용할 수 있다.

진한 하늘색 망토는 상급 계열의 검사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색상이다.

그리고 황금빛 망토는 제국에서 오로지 황제만이 착용할 수 있는 최고의 상징으로서, 바로 그 밑 제사장이나 신관들 혹은 집정관과 군단장 급 이상은 주황색 망토를 지닐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 들은 얘기에 의하면 제국에서 은밀히 키우고 있는 특수검사부가 존재한다고 그랬는데 그곳 소속 검사들이 바로 보랏빛 망토를 착용한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지드의 눈앞에 보랏빛 망토를 걸친 자가 나타났으니 그의 호기심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드는 무심코 청력(聽力)을 확장하여 그들의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지만 무공을 익힌 뒤로는 그가 원한다면 먼 거리에 떨어진 사물일지라도 안력(眼力)을 높여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지금처럼 청력(聽力)을 높여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야심한 밤에 찾아오시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총관이 바짝 긴장한 채 물었고 이에 보랏빛 망토의 중년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늦은 밤에 와서 미안하오. 워낙 중대한 일이기에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소.”

“무슨 문제이기에…….”

“이곳에 오기 바로 전 나는 참모로부터 놀라운 정보 하나를 듣게 되었소. 금번 용병 특별 허가 신청자들 중에 수상한 인물이 있다고 하더이다.”

“수상한 인물이라니요? 서기관, 용병 특별 허가 신청자들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시오.”

사내의 말에 총관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곧이어 서기관이 한 무더기의 신청서들을 탁자 위에 쌓았다.

“신청자들이 모두 몇 명입니까?”

“정확히 사십사 명입니다.”

“올해는 좀 많군요.”

“이번에는 외부인들이 많았는지라…….”

“외부 출신들은 모두 몇 명이오?”

“이십오 명입니다.”

서기관의 대답에 중년 사내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자국인들은 제외하고 외부 출신 신청자들만 검토하기로 합시다.”

그때 총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기, 자라투스 대공. 대체 무슨 급한 일이기에 이런 밤에, 그것도 몸소 이런 수고를 하시는 것인지요? 그런 일이라면 수하들을 시키거나 저희 용병 연합회가 해도 될 일 같은데요.”

순간 그가 총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소 굳어진 얼굴이랄까.

총관은 겁먹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제국 특수검사부의 수장이자 대외적으로는 대공의 신분이 아니던가.

“제 말에 무슨 실수라도…….”

대공이 진중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얻은 정보가 맞는다면 여기 외부 출신 신청자들 중에 그자가 있을 거요.”

“그자라니요?”

“흑검사.”

순간 총관과 서기관이 경악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흐, 흑검사라니요!”

중부 대륙 최강 살수인 흑검사에 대해서는 이곳 남부 대륙에서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다.

그들에 대한 얘깃거리나 일화들은 남부 대륙에서조차 흥분을 자아낼 만큼 대단한 무용담이랄까. 하지만 총관이나 서기관처럼 용병 연합회 수뇌부에 오른 자들이 느끼는 흑검사란 존재는,

은근하게 심장을 죄어 오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맞은편 건물 테라스에서 귀를 열어 놓고 대화를 듣고 있던 지드 역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흑검사라니…….’

제한된 하류 구역 생활을 오래한 나머지 다소 세상 물정이나 정보에 어두운 그였지만, 흑검사란 존재에 대해서는 가끔 들을 수 있었다,

대략적으로 엄청난 검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드의 관심은 점점 그쪽으로 더 기울어졌고 이제는 단 한마디로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더욱 기울였다.

“대체 흑검사가 무슨 일 때문에 여기 용병 연합회에 나타난 거란 말입니까!”

총관이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묻자 자라투스 대공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게 말이죠.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용병단이나 창설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니라 봅니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글쎄요, 현재 내 대원들이 총력을 기울여 조사 진행 중에 있지만 아직은 그의 존재유무만 확신할 뿐 그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 그저 추정을 하자면 그가 이곳까지 나타난 이유가 아무래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 같소.”

“임무라니요?”

“물론 특정 인물에 대한 암살일 거요.”

“그런 일이라면 남부 대륙의 대자객 신전이나 여타 살수 단체에서도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필 머나먼 중부 대륙의 살수가 개입하는 거죠?”

그때 대공이 대답 대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뒷짐을 진 채 실내를 왔다 갔다 하더니만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나 역시 그 점이 궁금했다오. 모든 살수들에게는 자기 영역이 있는 법이고 웬만하면 이 남부 대륙까지 행차할 이유가 없거든요. 하물며 제거 대상이 있다면 그대 말처럼 대자객 신전에 청부할 수도 있는 법인데 왜 굳이 흑검사가 나타나야만 했던걸까.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참모들과 나름대로 중부 대륙 흑검사들의 활동 영역과 그 외에 알려지지 않은 기행들에 대해서 사전 조사 작업을 벌였다오. 그리고 운 좋게도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소.”

총관이 물었다.

“대체 그게 뭔가요?”

“흑검사 훈련생들은 첫 임무를 수행할 때보다 수월한 장소와 대상을 선택하는데,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다른 영토에서 하는 경우가 있더이다.”

“……!”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예비 수행 장소에서 연습을 한다고나 할까요.”

“세상에! 그러니까 그게 여기 남부 대륙이란 말입니까?”

“불행하게도 그런 것 같소.”

총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물론, 지금 얘기하는 것을 정답으로 생각하진 마시오.”

“알겠습니다.”

“비록 흑검사 훈련병들이 예비 수행을 위해 이곳까지 내려온다지만 아무런 이유나 대상도 없이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요. 다시 말해서 이곳에 숨어든 자는 상부에서 내린 확실한 암살 목표를 받고 침투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오.”

“대체 누구를 암살하려고…….”

“그 누구를 찾는 일이 바로 내일이기에 이리로 부랴부랴 달려온 게 아니겠소? 일단 한 가지 묻겠소. 용병 특별 허가 신청자들 중에 집정관님의 여식이 있다고 들었소. 테스라고.”

“예,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 아이와 연관이 있는 듯하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버지인 집정관님과.”

“네?”

“정보부에서 알아본 결과 집정관께서는 젊은 시절 나처럼 특수검사였는데, 대자객들을 상대로 수차례 대결을 한 뒤에 모두 승리를 거두고는 더욱 강력한 상대를 찾기 위해 중부 대륙으로 진출했었다는 기록이 있었소. 거기서도 상당한 위명을 떨쳤다고 들었소.”

“…….”

“집정관께서 그곳에서 활약하는 동안 이름이 알려졌을 테고, 해당 국가의 비밀 기관이나 여타 부서에 리스트가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소.”

지금 단계로서는 그나마 신빙성 있는 내용이랄까. 총관과 서기관은 더 이상 반문을 하지 않았다. 대공이 서류를 집어 들며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가 다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신청서는 뭐요? 왜 신원이 확실히 기록되지 않은 것이오?”

“그게…… 저…….”

서기관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순간 대공의 표정이 굳어졌고, 대공이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용병단을 창설하는데 신원이 불확실하면 되겠소!”

대공은 팔라카스 제국의 명실상부한 정통 기관, 특수검사부 수장인 만큼 국적이나 출신 가문 등 정확한 신원에 관심을 가지거나 중점을 두는 것은 당연했다.

대공의 서릿발 같은 표정에 서기관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얘기가 길어지려 하자 대공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만합시다. 어차피 조만간 정리가 될 것이니 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정리가 되다니요?”

“용병 거주지가 대대적으로 축소될 것이란 말이오.”

“축소라니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조만간 용병 연합회 허가를 받은 용병단과 소속된 정식 용병들이 아닌 자들을 모두 추려 낼 것이오. 그 대상들은 떠돌이 검사나 하류 구역에 거주하는 하류검사들, 그리고 그 식솔들이 될 거요.”

총관과 서기관은 그 말에 매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식 용병들을 제외하더라도 용병 거주지에는 수만 명이 터를 잡고 살고 있는데요? 설마하니 그들 모두를…….”

그때 대공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서류를 탁자에다 홱 집어 던졌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니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시오. 어쨌든 내가 직접 신청자들을 하나하나 봐 가며 조사하겠소. 설마하니 외부 출신자들 중에서 쥐새끼 하나를 추려 내지 못하겠소?”

이에 총관이 당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저기, 여기 오래 계실 건가요?”

“그렇소.”

“그래도…… 저흰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데요.”

그러자 대공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시오. 누가 뭐랍디까? 다만 이번 일에는 내가 직접 관여를 해야겠소.”

“네? 대공께서 용병단 창설 후보자 선출을 직접 하신다고요!”

“뭘 그리 놀라시오? 못할 게 뭐 있소.”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오. 뭐 행사 진행 주관자만 바뀌는 것뿐 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요. 그리고 그대들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소이다. 이곳에 숨어 든 흑검사를 추려 내기 위한 작업이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이오. 그대들이 이해하는 수밖에 없을 거요.”

결국 총관은 체념한 듯 가벼운 한숨을 쉬었고 곧이어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는지요.”

“말해 보시오.”

“대공께서 임무 때문에 부득이 저희 행사를 주관하실지라도 행사 자체에 많은 신경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나 역시 용병 연합회 소속 인물로 가장하여 최대한 자연스럽게 진행해야 할 테니. 그래야만 숨어 든 자가 눈치를 차리지 못할 거 아니겠소?”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났는지 테라스 문이 닫혀졌다. 지드는 모든 대화 내용을 엿들은 뒤에 실내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당장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흑검사 추려 내기 작업이 아니라 총관이 언급했던 용병 거주지 축소에 관한 내용이었다.

“조만간 용병 연합회 허가를 받은 용병단과 소속된 정식 용병들이 아닌 자들을 모두 추려 낼 것이오. 그 대상들은 떠돌이 검사나 하류 구역에 거주하는 하류검사들, 그리고 그 식솔들이 될 거요.”

지드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일관했으니 그 충격이 적지 않아 보인 듯했다. 대자객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곳이 바로 용병 거주지인데, 그곳이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니.

그로서는 이만저만 당혹스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허탈하게 했던 것은, 지난 청춘을 묻으며 온갖 고생을 했던 곳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용병의 꿈을 안고 전국으로부터 몰려든 사람들, 그들 중에는 자신처럼 뭣 모르고 무작정 상경해서 뿌리를 내린 정착자들이 대부분이었으리라.

처음에는 검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 중 극소수만이 하류검사를 벗어나 정식 용병 단체에 입단할 수 있고 나머지는 용병 구역 내에서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가장만을 믿고 이곳에 가족들은 이미 고향에 땅과 집을 팔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 돌아갈 곳도 없다. 그들에겐 용병 거주지야말로 고향이었고, 혹시 모를 용병에 대한 실낱같은 꿈을 겨우 버티게 해 줄 유일한 안식처였다.

결국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지드.

“휴.”

정식 용병 단체들만이 철거 작업에서 제외된다면 용병거주지 규모가 무려 10분 1로 줄여진다는 얘기이다.

쫓겨날 이들은 정식 제국 시민도 아니다. 그렇다면 용병 하나의 꿈을 좇아서 태어나고 자랐던 나라를 등진 그들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할 수 없고, 결국 난민의 형태로 현재보다 더욱 고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드는 용병단 특별 허가 신청자였으니 심사만 통과한다면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원래 내일 새벽에 7호와 8호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일단 용병 연합회에서 발급하는 특별 허가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무조건 이번 심사에 통과하는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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