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 햇빛조차 없는 공간
고개마저 들을 수 없는 내 작은 방.
비마저 오면 또 천장이 샌다.
주룩주룩
밤새 하염없이 내린다.
뜯어도 다시 나는 잡풀들
뛰어 봐야 열 발자국도 안 되는 앞뜰 마당.
비마저 오면 이내 진흙바닥이 된다.
질퍽질퍽
몇 날 며칠 마를 새 없다.
태양 빛에 축축한 옷을 말리려 지붕 위로 올라서면
나 같은 사람들이 빽빽한 판자 위로 가득하다.
우린 서로를 보며 하얀 치아를 드러낸다.
내가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순박한 미소가 내 영혼을 옭아매기 때문이리라.
지드는 문득 옛날 하류 구역 생활 때 어느 방랑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이 났다. 한 달 동안 떠나 있었지만 마치 고향에 돌아 온 듯 애틋함 느낌이랄까.
그 모든 것이 도시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열악하고 낙후된 곳이지만 그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안식처와도 같았다.
시 구절처럼 눈앞에는 판자촌이 빽빽하고도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후와. 드디어 돌아왔군.”
지드에 이어 7호 역시 매우 반가운 얼굴이었다.
“역시 이곳에 오니까 마음이 편해지네요.”
그때 지드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7호와 8호에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이든, 아레스! 해 지기 전에 서두르자.”
순간 대장 뒤에 7호와 8호가 멀뚱히 서 버렸다. 방금 전 자신들의 귀를 의심한 듯 말이다.
“혀, 형님. 대장님께서 방금 전 뭐라 하셨죠.”
“이든…… 아레스…….”
“분명 형님과 제 이름을 부르셨죠.”
“응…….”
그 둘은 감격이라도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장님께서 언젠가 인정을 해 주실 때 번호에서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저 앞 지드가 다시 외쳤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오지 않고.”
그날 오후 석양 노을이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지드는 하류 구역으로 들어갈수록 뭔가 분위기가 전과 같지 않았음에 무척 놀라는 기색이었다.
7호 이든과 8호 아레스 역시 저 앞 공터에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어수선한 광경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대체 뭐죠?”
“글쎄다…….”
“연단 위에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연설하는 것 같은데요.”
“연설이라고?”
“일단 가 보죠.”
잠시 후 지드와 일행들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한참 열띤 연설을 하는 사내와 그 뒤로 허름한 차림의 하류검사들 열 댓 명이 사뭇 비장한 분위기로 서 있었다.
가끔 군중들은 사내가 두 주먹을 쥐고 열변을 토해 낼 때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우리가 바보입니까! 그냥 떠나라면 떠나게요. 아시다시피 이곳은 단순한 용병 거주지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피땀 흘려 수십 년을 가꾸어 온 터전입니다! 그런데 제국에서는 ‘등록 안 된 용병들 추려 내기’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고 나와서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무조건 몰아내겠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답니까.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우리 역시 절대 용납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박수와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
“옳소!”
계속 이어지는 연설.
“비록 여기 모인 분들이 제국에서 인정하는 정식 등록 용병은 아닐지라도 우린 분명 세금을 꼬박꼬박 바쳐 왔다는 사실을 다들 너무도 잘 아실 겁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저들이 거두어들인 세금만 합해도 하류 구역 몇 개는 더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 최소한의 투자만 했어도 이처럼 열악한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하류검사들의 실업 문제를 비롯해 다른 것들도 충분히 개선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돈은 싹 거두어 가고 이제 이곳이 쓸모없어지니까 주민들을 내보내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여러분!”
짝짝.
“맞는 말이오. 우린 갈 데도 없는데 대체 어디로 떠나란 말이오!”
“옳소! 이건 한마디로 날강도 같은 짓입니다.”
“빌어먹을! 난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요!”
연단의 사내 역시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가. 그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어 외쳤다.
“다들 힘을 합쳐 대항하면 저들 역시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잠시 후 군중 틈을 빠져 나온 지드와 일행은 저마다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 연설 광경은 길을 지나오면서 곳곳에서 볼 수 있었으니 인구수가 무려 일만여 명이 넘는 하류 구역에 갑자기 혼란이란 폭풍이 거세게 몰려오고 있음을 느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그들은 드디어 언덕 위에 위치한 본부 가까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다 왔다.”
7호 이든이 말문을 열자 8호 아레스 역시 한마디 했다.
“아, 그리운 우리 형님들! 잘들 있겠지?”
그대 지드는 문득 언덕 아래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공사를 하고 있음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저들은 뭐 하는 거지.”
지드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로 다가갔다. 이든과 아레스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대장의 뒤를 따랐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깊게 도랑을 판 곳에 벽돌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지드가 물었다.
“거기서 뭐하고 계시는 거요.”
그러자 한 사내가 대답했다.
“보면 모릅니까? 하수도 공사하는 거 아니오.”
“하수도 공사라니요!”
지드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하류 구역에 하수도 시설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했단 말인가.
원시적으로 파여진 도랑들이 미로처럼 얽히고 얽혀서 장마 때만 되면 넘쳐흘렀다. 낮은 지대는 거의 잠기는 것이 연례 행사였건만 갑자기 무슨 공사란 말인가.
“누구 지시를 받고 공사를 하는 거요?”
그러자 한 사내가 귀찮다는 듯 언덕 위 제법 큰 목조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사시는 여자 분이요.”
순간 지드는 깜짝 놀랐다.
“저, 저기는 내가 사는 곳인데?”
“이제 방해하지 말고 다른 데로 가 보시오. 궁금한 거 있으며 맞은편으로 가서 물어보든지. 거기 가면 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 공사를 하고 있을 거요.”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라고요?”
“이름대신 자기들끼리 번호를 부르는데, 좀 이상한 사람들 같더라고요.”
번호라는 말에 이든 그리고 아레스의 화색이 밝아졌다.
“형님들이다!”
“당장 가 보자.”
지드 역시 그쪽으로 성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지드와 일행은 저 앞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는 사내들을 보더니만 안면에 웃음을 가득 띠었다.
막내 아레스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님들! 하하!”
그러자 일제히 쳐다보는 7명의 사내들, 그들은 막내 8호와 7호 그리고 대장을 발견하고는 저마다 연장을 놓고 뛰어왔다.
그들은 마치 친형제들처럼 서로 한데 얽히고설키어 기쁨을 나누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막내야, 좀 여읜 것 같은데?”
“어휴! 말도 마십시오, 7호 형님이 어찌나 괴롭히는지.”
7호가 불끈했다.
“너 죽을래!”
당연지사 엄살을 부리는 8호.
“이거 보십시오.”
하하하!
곧이어 대원들 모두가 자세를 고쳐 잡고 대장에게 정중히 예의를 표했고 이어 수장 지노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주었다.
“대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뭘요. 그나저나 웬 하수도 공사를 하는 겁니까.”
“아가씨께서 시키셔서요.”
“아카시안 님이?”
“허허. 요즘 아가씨 덕분에 우리 동네가 살기 좋아졌습니다요.”
영문을 모르는 지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올라가시죠. 아가씨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저흰 여기서마저 일을 끝낸 다음 다시 뵙도록 하죠.”
끼익
지드는 목조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세 남매가 흙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이 지드를 발견하고는 외쳤다.
“대장 아저씨다!”
“아저씨!”
막내 아린이 먼저 뛰어 왔고 레드와 카르 역시 달려왔다.
“녀석들, 잘들 있었냐?”
그러자 지드의 품에 안긴 아린이 어리광을 부렸다.
“오빠들이 나 많이 괴롭혔어요!”
“에구. 우리 예쁜 아린을 누가 감히 괴롭힌다고 그래.”
“꿀밤도 때리고 욕도 했어요!”
그러자 두 오빠들 중 레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걔 거짓말하는 거예요.”
아린이 질세라 혀를 날름 거렸다.
“거짓말 아니야!”
“풋, 이놈들!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하!”
그때 현관문으로부터 단정하고 소박한 옷차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아카시안이었다.
“어머, 지드 님!”
“아가씨.”
아카시안은 지드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감격했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지드는 다소 당황했지만 이내 예의를 표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예정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아니에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쁘답니다.”
앞마당에 유일하게 심어져 있는 나무에는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아 홀로이 지저귀고 있었다.
1층 테라스 탁자에는 아카시안이 손수 내온 찻잔이 놓여 있었는데 지드가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입으로 갖다 대었다.
지드는 차를 다 마신 후에야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아카시안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험담이 무르익을수록 그녀는 마치 호기심 어린 아이와도 같이 초롱한 눈방울을 반짝거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얘기가 시작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흑검사 대목에서 그녀는 손에 땀까지 날 정도로 긴장하는가 하면 지드가 승리를 거둔 내용에서는 마치 자신이 이긴 듯 매우 기뻐했다.
모든 얘기가 끝이 나자 아카시안은 한 가지 내용에 다소 관심을 가졌는지 지드에게 물었다.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란 여성 검사의 검술이 그렇게도 강했나요?”
“강하다말다요. 그뿐만 아닙니다. 고공에서 펼치는 검술 동작은 완전 예술이던데요? 다리가 부러지는 기습공격을 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제 대신 그녀가 흑검사를 물리쳤을 겁니다.”
아카시안이 부러운 듯 말했다.
“상당한 미인인데다 검술마저 강하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지드가 다소 멋쩍은 얼굴을 했다.
“글쎄요? 미모에 있어서는 아가씨가 조금 더 낫다고 할까요. 후후.”
얼굴이 불거지는 아카시안,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심사 과정이 무척 길고도 어려웠는데 결국 해내셨네요.”
지드는 싱글벙글했다.
“중요한 것은 용병단 창설 허가증을 얻어 왔다는 거죠. 후후! 그나저나 오다보니 언덕 아래 도랑을 파고 하수도 공사를 하는 것 같은데 대원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린 것입니까?”
“제가 지노 수장님께 직접 부탁을 드렸어요.”
“갑자기 왜.”
“여기 동네가 이곳 고지대 건물 말고는 대부분 언덕 아래 아주 낮은 지대 위치해 있잖아요. 그 때문에 얼마 전 폭우가 내렸을 때 도랑이 넘쳐흘러 집 여러 채가 잠기고 아이들 두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었어요. 도랑이 워낙 좁은데다가 메울 게 흙밖에 없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막히거나 역류하더라고요. 하수도 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가뜩이나 가지고 계신 자금도 부족할 텐데 이 동네 모든 도랑에 하수도 공사를 한다는 건 좀 무리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만 또 폭우가 쏟아지면 사람들이 위험하잖아요. 마침 끝까지 쓰지 않고 아껴 둔 자금이 있었고요.”
“비상금마저 톡톡 털으셨다 이거죠? 정말 대책이 없으시군요.”
“대원들 월급은 남겨 놓았어요.”
그녀는 말하다 말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달 치도 안 되지만요…… 그때가 되면 굳이 제 경호 임무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드릴 돈이 없으니 고용 계약은 자동적으로 파기될 거예요.”
그러자 지드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얘기는 앞으로 꺼내지도 마세요.”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허리춤으로부터 두둑한 가죽 주머니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툭!
“그건 뭐죠?”
“금화들입니다.”
깜짝 놀라는 아카시안.
“금화들이라니요!”
“이 정도면 아마 한 일 년쯤은 자금 걱정 없이 편히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지드 님…….”
그날 저녁 지드는 오랜만에 대원들 모두와 함께 식사를 했다.
지드 대장이 용병단을 창설하겠노라 선언하자 대원들은 저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를 쳤다.
용병단 규모는 일단 현재 있는 인원으로 출발하기로 시작했고 대장 지드에 이어 수장 지노가 부대장을 맡기로 했다.
나머지 8명의 대원들은 각기 수장(首將)으로 승격했고 이후 입단하는 신참 용병들은 그들에게 고루 배정될 것이다.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있다면 번호 대신 이름을 호칭토록 하는 허락이 떨어졌으니, 대원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다만 한 가지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용병단 이름이었다. 지드를 비롯해서 대원들은 각자 생각하고 있는 명칭들을 몇 개씩 말했지만 적당한 것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 겸 회의는 밤이 깊어서야 막을 내렸다.
***
풀벌레가 시끄럽게 우는 밤이었다. 2층 조그만 목조 집무실에는 지드와 오늘 용병단 부대장으로 승격한 지노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원들과 밝은 표정으로 어울렸던 그였는데 지금은 웬일인지 뭔가 두려움이 가득하고 불안해 보였다.
지드는 그런 그의 모습에 다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제야 지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있다마다요. 지난 일주일 동안 그저 대장님 돌아오시기를 학수고대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니까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그렇게 길어 보이고 매시간 식은땀이 날정도로 불안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요.”
지노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너무 긴장한 탓인지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고 주변을 둘러보며 다소 주의가 산만하게 행동했다.
지드는 대체 그가 왜 두려움에 잔뜩 휩싸였는지 궁금증이 증폭되어만 갔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자초지종을 말해 보세요.”
“당연지사 말씀을 드려야죠. 이 날을 기다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우선 아가씨께서 지금 매우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
깜짝 놀라는 지드.
“위험에 처해 있다니요!”
“아마 하류 구역을 가로 질러 오셔서 목격하셨을 겁니다. 곳곳마다 선동자들이 연단에 모습을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광경 말입니다.”
“오다 보니까 군중들 모아 놓고 열변을 토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디다.”
지노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문을 이어 갔다.
“조만간 그들 모두가 제거 당할 운명에 놓여 있는데 아가씨 역시 그들 선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거 명단에 올라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제거 명단이라니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죠?”
“제가 얼마 전에 제국 내 행정 기관에서 일하는 절친한 친구를 우연찮게 만나서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녀석은 옛날부터 술이 많이 약해서 금방 취하는 타입인데 말도 꽤 많은 친구였죠. 그 덕분에 아주 중요한 일급 정보를 들을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지노는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양 목소리를 낮추고 지드에게 바싹 얼굴을 가져갔다.
“제국의 특수검사부인가 뭔가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기관에서 대대적인 작전이 있을 거라 했습니다. 일명 ‘굵은 가지 쳐내기’라 명명되는 작전이 이미 특수검사부의 주관 하에 머지않아 시행될 것이라 하더군요. 연설을 하는 선동자들이나 뒤에서 은밀하게 주동하는 자들, 그리고 여타 하류 구역에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자들은 무조건 명단에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가지를 친답니다.”
지드 역시 몹시 놀라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가 당장 궁금해 하는 것 따로 있었으니.
“그런데 왜 아가씨가 왜 위험에 빠졌다는 거요. 설마 이번 일과 연류가 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요?”
지노가 펄쩍 띠며 말했다.
“아이고. 연류가 되다마다요.”
“뭐라고요!”
“최근 보름여 동안 아가씨께서는 사비를 들여서는 여기 본부를 기점으로 근처 백 가구가량에 해당하는 하수도 공사를 해 왔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은 아가씨의 헌신적이고 착한 마음을 알았는지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자기들끼리 조를 짜서 공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지금은 그 인원이 제법 많아 졌습니다.”
“그게 왜 아가씨와 상관이 있다는 거죠?”
“제국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거야말로 암암리에 군중을 선동한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는 거죠. 더군다나 하류 구역 폐쇄 조치에 대한 공문이 거리마다 잔뜩 붙어 있는 마당에 하수도 공사를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이곳에 더욱 애착을 갖게 하려는 고도의 선동 작업이란 오해를 심어 주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겁니다.”
지드는 거기까지 얘기를 듣자 매우 심각한 얼굴을 했다.
“듣고 보니 이거 보통일이 아니군요.”
“정말 큰일입니다. 만일 아가씨께서 저들 명단에 올랐다면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지드가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하지만 특수검사부이든 뭐든, 절대로 아가씨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도록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쇼.”
그래도 지노는 불안했는지 뭐라 중얼 거렸다.
“특수검사부는 암살만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라던데요?”
지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새벽녘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바탕 폭풍이라도 다가오려나.
어두운 잿빛 상공은 먹구름으로 가득 찼고 한줄기 햇살마저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세상 모습이 현재 그의 답답한 심정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으리라.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갔다.
드디어 하류 구역 제1구간과 2구간이 두 마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하류 구역은 총 17개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구간에는 대략 300호가량의 판잣집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인구수는 대략 1천여 명에 이른다고 할까. 총 구간을 합친 인구수는 2만 명 정도로, 그중 하류검사들은 2천 명쯤 된다.
어쨌거나 그 하류 구역에선 벌어져선 안 될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니, 제국의 강제적인 철거에 맞서 지난 한 달 동안에 주민들을 대상으로 눈에 띄게 활동을 보여 왔던 자들 7명이 더러운 도랑물에 각자 얼굴을 처박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목은 거의 반 정도 잘려져 있었고 마을을 관통하는 제법 큰 도랑인지라 온통 붉은 피가 빽빽이 들어선 판자촌 사이사이로 흘러 내려갔으니 주민들을 경악하여 공포와 두려움에 벌벌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끔찍한 살해 사건은 그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연출 된 하류 구역에 대한 경고이자 본보기가 틀림없었다.
이번 사건은 두 개 구간만이 표적이 되어 다른 구간에게 알리는 경고성 짙은 사건이라 할 수 있었고, 주어진 기간 안에 자진하여 떠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비극적인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지드가 거주하는 곳은 17개 구간들 중 중간 지역에 해당하는 제8구간이다. 마을 중앙에 조그만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사방팔방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지드를 비롯한 대원들은 최근에 일어난 암살 사건으로 인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철통같은 경비를 하고 있었다.
아카시안과 귀여운 세 남매들을 경호하고 만에 하나 침입해 들어올지도 모르는 암살범들에 대비하기 위해 저마다 눈들을 번뜩이며 칼날을 세우는 대원들.
하류 인생을 지겨우리만큼 경험했던 그들인지라 현재 자신들이 크고 자라난 고향에서 당당하게 그 누구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경호 임무가 아닌 일종의 사명감(使命感)과도 같다고 볼 수 있었다.
지드 역시 그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수하들을 얻는 방편으로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쳤지만 지금은 이만저만 뿌듯한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저 자객 단체로부터 파견 나온 암살범들이 아닌 제국 소속 특수검사부이다.
어쩌면 지드와 대원들은 거대한 산맥을 앞에다 두고 정면으로 칼을 겨눈 셈이 된 것이다.
(하류검사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