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0 새벽 손님들(3권) (21/81)

Chapter. 20 새벽 손님들

제국이 용병 거주지 축소 및 폐쇄 공고를 알린 지 한 달여가 지났다.

그간 일정 기간 내에 떠나려 하지 않는 하류 구역 거주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성으로 제1구간과 2구간에서 선동을 일으키는 7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수일 후에는 제3구간과 4구간에서도 선동자들 두 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에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서 떠나려 하는 주민들이 한 집 두 집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삶의 터전을 과감히 버리고 감히 낯선 세상으로 떠나기를 꺼려하는 주민들이 더 많은 듯 보였으니, 날이 갈수록 제국의 강압적인 방침에 맞서려는 하류 구역 주민들의 저항 움직임 사이에 일단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였다.

***

하류 구역 입구로 들어선 노인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백발과 주글주글한 얼굴이 숱한 세파를 이겨 온 고령임을 분명하였지만, 번뜩이는 눈빛과 늠름한 기상에 회색 군장 차림새는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닌 듯 보였다.

그가 구역 안쪽으로 들어서자 웬일인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년층 이상이 그를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 확신한 듯 믿기지 않는 표정과 함께 탄성을 내질렀다.

“저, 저분은!”

“아르게논 님 같은데?”

“설마…….”

“맞아! 회색 군장과 대검을 보니 분명 그분이야.”

“세상에! 저분께서 나타나시다니…….”

“아! 정녕 그분이 맞는다면 이게 꿈일 수도 있겠군.”

폭풍 용병단 대장 아르게논

20여 년 전 중부 대륙에 아독이라는 흑검사가 혜성과도 같이 나타나 짧은 시기에 걸출한 영웅으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남부 대륙에서는 그보다도 오래된 역사 속에 아르게논이란 용병이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

제법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그의 나이 80줄에 접어든 고령이지만 아직도 수많은 용병들의 마음속에는 확고한 영웅의 상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아르게논은 30대 초반에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가 보였던 검술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전투 기술이었다.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검술이랄까?

그것은 그가 창안한 검술이었는데, 포스의 매개체를 검에 불어넣어 주변 공간에 띄워 놓고 일정한 조율을 통해 적을 공격하는, 일종의 마법 계열 혼용 검술이라 볼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강자들과 숱한 대결을 벌이면서 새로운 무적의 신화를 이룩했는데 그 어떤 검사도 그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도 못하고 패배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수년 후 그에게 더 이상 적수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는 용병 집단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제국의 용병 연합회를 거쳐 하나의 단체를 이끄는 허가증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폭풍 용병단이 세상에 등장했다. 폭풍이란 그들이 통과해 지나가면 그 어떤 전투장일지라도 초토화가 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사실상 오늘날 아르게논이 남부 대륙의 영웅으로 불려온 까닭은, 무패의 기록보다는 탁월한 용병술과 천재적인 전술 전략, 무엇보다도 부하들을 위한 배려와 통솔력을 가진 지장으로서, 또 위대한 용병 수호자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이곳 팔라카스 제국의 용병 거주지에서 그의 존재는 가히 신(神)에 버금갈 정도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류 구역에 턱하니 등장했으니 적어도 그를 알아보는 노인들은 한줄기 희망의 바람을 느꼈던 것이다.

설마하니 위대한 영웅이 이곳에 나타나서 주민들과 함께 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여러 날이 흘렀다. 하류 구역 주민들은 당연지사 그를 구세주처럼 떠받들어 모셨고, 그의 행적이 외부로 알려지면서부터 그를 존경하거나 추앙해 마지않았던 떠돌이 늙은 용병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국이나 정식 등록 용병 집단들은 그의 돌출적인 행동에 대해서 무척 당황스러운 반응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하류 구역에 머문 지 벌써 보름여가 지났지만 아직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저들끼리 꽤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실 아르게논의 출현 때문에 더욱 심장을 졸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7구간과 8구간 주민들이었다.

아르게논이 머물고 있는 구간 바로 옆 구간에 거주함으로써 제국의 자객들이 자신들을 더욱 주시하지 않을까 하는 원인 모를 불안감 때문이었다.

특히 8구간의 요주의 선동자로 떠오르고 있는 아카시안이 바로 다음 희생자가 될지도 몰랐으니, 그녀의 경호 임무를 맡고 있는 지드는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늦은 밤까지 잠 못 이루고 테라스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지드.

터벅터벅.

무거운 발자국 소리만큼 표정도 한없이 굳어져 있었고 곧이어 탄식의 소리가 한밤의 적막을 깨트리고 말았다.

“후.”

밤하늘에 우유를 뿌려 놓은 듯 수많은 별무리들이 경이로운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드는 난간을 잡더니만 문득 저 위 세상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가을바람 한줄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가니 마치 추수를 앞둔 고향의 밀밭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느껴졌고, 그래도 가족이라고 아버지와 형제들마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찌 본다면 그의 지금 모습은 마치 큰일을 앞둔 사람처럼 지난 시절들을 떠올리며 애틋한 끝을 놓지 않으려는 영혼과도 같았다. 그의 생전에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신경을 쓴 적이 있었던가.

아니 혼자만의 인생조차 꾸리기 힘들 정도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왔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그런 기억들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이 머릿속을 꽉 죄어 오고 있었다.

내가 아닌 그 누구를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랄까. 그게 그토록 힘든 일인 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아이고, 늦은 밤까지 여기서 뭐 하신답니까?”

순박한 말투에 그 특유한 억양, 지드는 내심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수장이 왜 나타나지 않나 했소. 후후!”

수장이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셨습니까?”

“하늘 좀 보시죠. 오늘따라 별들이 많기도 하고 유난히 반짝거리지 않나요.”

“정말 그러네요. 한바탕 폭풍이 휩쓸더니만 당분간은 날씨가 창창해질 모양입니다.”

그 말에 지드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 좋으련만, 더 큰 폭풍이 닥칠 태세이니…… 거참.”

그제야 수장 지노는 대장의 심정을 헤아리는 듯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장님께서 잠 못 이루는 그 심정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저들의 다음 목표가 여기 8구간일 수 있음을 말이죠.”

지드는 자신의 심중을 읽힌 듯 다소 멋쩍어했다.

“대장으로서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합니다.”

“미안하긴요! 대장님은 사람도 아닌가요. 그런 감정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겁니다.”

“훗, 수장이 옆에 있어서 늘 든든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다니요. 허허.”

“그렇다고 노인처럼 웃지는 마십시오. 허허가 뭡니까, 허허가. 수장께선 아직 사십 대 중반 아니오.”

“……제, 제가 그렇게 웃었습니까요.”

“그렇다니까요?”

“이런……!”

“하하!”

잠시 후, 이 둘은 제법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아르게논 님께서 하류 구역에 나타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뭐, 그분의 출현이 매우 반갑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급하게 생겼으니.”

지드의 말에 수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야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으니 대응만 잘하면 되지만 아르게논 님의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하류 구역 전 주민들에게 굳건한 희망이 되리라 봅니다.”

그 대목에서는 지드가 맞장구를 쳤다.

“맞는 말입니다. 그분은 모든 용병들이 존경해 마지않는데 설마 제국에서 턱하니 암살단을 보내기라도 하겠습니까? 만일 그랬다가는 남부 대륙의 모든 검사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그분을 보호하려고 용병들이 몰려들고 있잖습니까. 아마도 제국에서 하는 이번 하류 구역 폐쇄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을 듯 보입니다.”

이에 수장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이견(異見)을 내놓았다.

“솔직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죠?”

“비록 아르게논 님이 많은 용병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계시지만 옛날만은 못합니다. 보십시오, 이곳에 몰려든 검사들은 하나같이 한물간 늙은 용병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르게논 님도 무패다 뭐다 하지만 이미 고령에 드셨고요. 게다가 진짜 문제는, 늙었다는 게 아니라 정식 등록 용병 단체들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수장의 설명에 지드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듣고 보니 좀 그러네요.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분은 영웅이 아닙니까.”

“그저 상징일 뿐이지요. 그 옛날 대륙을 들썩거렸던 그분의 폭풍 용병단은 벌써 해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는데다가, 현실적으로는 이익 추구를 위한 상업적 등록 용병들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들 역시 제국에 기생해서 붙어사는 존재들로서 그저 쫓겨나지 않으려면 눈치를 봐야 하니 말이죠.”

“…….”

지드는 뭔가 답답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답답하다.

어느덧 푸르스름한 새벽의 여명을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수장 지노는 피곤이 몰려오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벌써 새벽녘인데,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시죠.”

“수장이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그간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요.”

지드가 그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안으로 들여보냈다. 잠시 후 지드 역시 실내로 들어와 거실 의자에 등을 젖히고는 눈을 감았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해서 날밤을 세우다시피 해서 그런지 오늘은 무척 피곤했다.

허나 단전호흡 하나만으로 능히 일주일간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그인지라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지드가 잠시 눈을 스르르 감고 호흡법에 집중하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슥.

실눈을 뜨고 보니 아카시안이 모포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지드, 그녀는 모포를 펴고는 의자에 잠든 지드를 정성스럽게 덮어 주었다.

자신과 동생들의 경호를 위해 밤낮으로 수고하는 그가 안쓰러웠는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지드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기까지 했다.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다소 애틋한 감성마저 지닌 듯 보였다. 지드는 가느다란 실눈으로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곧 그녀의 손길이 흡사 어머니의 부드러운 보살핌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는지 그대로 편안하게 잠을 자는 척했다.

바로 그때였다.

삐걱.

거실 맞은편 문이 열리면서 남동생 카르가 나왔다.

“누나, 거기서 뭐 해?”

아카시안은 깜짝 놀란 듯 지드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재빨리 숨겼다.

“뭐, 뭐 하긴. 그냥 모포를 덮어 주려고 했던 것뿐이야.”

카르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닌 것 같은데?”

“뭐, 뭐가.”

“대장 얼굴 만지는 거 다 봤어.”

그러자 아카시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르에게 다가가더니만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봉했다.

“쉿! 조용히, 지드 님 깨면 어떡하려고.”

이번엔 속삭이듯 말하는 카르.

“누나, 혹시 대장 좋아하는 거 아냐?”

“너 정말 혼날래? 쪼그만 게…….”

“나 벌써 열네 살이거든. 대충 알 건 다 아는 나이잖아? 후후!”

결국 아카시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동생의 손을 끌고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어어, 갑자기 뭐야. 내가 나갈 테니 이거 놔!”

드르륵―

잠시 후 이들 남매는 환히 밝아오는 새벽녘 아래 테라스에서 다소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 앞으로 쓸데없는 소리 하면 혼난다?”

“그냥 떠본 소린데 거참, 민감하게 반응하네. 누나, 진짜 좋아하는 거 아냐?”

“너 정말 말로 해선 안 되겠구나.”

급기야 아카시안이 주먹을 쥐고 꿀밤을 때리려 하자 카르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알았어! 안 하면 될 거 아냐. 쳇! 으으, 거 장난 좀 쳤기로서니, 폭력까지 휘두르려고 하고. 뭐, 하기야 누나한텐 게라쿠스 형이 있는데 그 누가 감히 비교가 되겠어.”

아카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게라쿠스라니! 일국의 황자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불러? 너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우리끼리 있을 때 뭐 어때?”

“그게 습관이라도 되면 나중에 사람 많을 때 진짜 큰일 난단 말이야. 그리고 그분과 나와 또다시 연관 지었다가는 진짜 혼날 줄 알아.”

웬일인지 카르는 잠시 침묵을 지켰고 다소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

카르는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그때가 좋았었는데.”

“그때라니?”

“황궁 파티…….”

아카시안은 조금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실까, 우리 꼬마 황자님이? 아무래도 네가 새벽녘에 잠이 깨서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인데 웬만하면 방으로 들어가서 좀 더 자지 그래.”

“지금 잠이 오게 생겼어? 언제 나쁜 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아무튼 난 우리 집안이 잘나가던 옛 시절이 그립단 말이야. 당시 총관이셨던 아버지가 누나랑 나만 데리고 황궁 파티에 참석했던 거 기억나지?”

“갑자기 그때 얘기는 왜 하는 거야. 응? 이제 그만해. 난 그때 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쳇. 난 하고 싶은데? 황자마저 누나를 보자마자 넋 나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후후, 결국 황자가 함께 춤을 출 것을 요청했는데 누나는 멍청하게도 그 좋은 기회를 뿌리쳤지.”

“너 정말!”

카르는 누나의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문을 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계속 황자가 날 찾아오더라니까? 자기를 그냥 형이라 부르라면서 누나랑 연결해 달라나 뭐라나. 한마디로 누나한테 완전히 반했다고나 할까? 그 이튿날 아버지와 황궁을 떠나는데 테라스에서 못내 아쉬워하던 게라쿠스 형의 초라한 얼굴이라니, 쯧쯧! 지금도 그 불쌍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네.”

결국 아카시안이 동생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거실 쪽으로 들어갔다.

툭!

“아 왜! 왜 또 밀고 그래.”

“안 되겠다. 너 억지로라도 잠 좀 더 자야겠다.”

“이거 놔! 아직 말 안 끝났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네요.”

“지금이라도 잘 생각해 봐. 누나가 황자를 찾아 가면 혹시라도 숙청 대상에서 제외되고 쫓기는 신세는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쓸데없는 소리!”

“아, 나 참! 좋은 방법을 알려 주려던 참인데.”

탁!

결국 카르는 강제로 방 안으로 떠밀려 문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카시안은 방문에 등을 기댄 채 가벼운 한숨을 쉬며 뭐라 중얼거렸다.

“후. 쟤가 오늘따라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곧이어 그녀 역시 계단을 타고 위층 자기 방으로 향했다.

탁.

그녀의 방문이 닫히자마자,

잠이 든 줄로만 알았던 지드가 살며시 눈을 뜨더니만 다소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의 아니게 테라스에서 두 남매가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하니 그들이 언급했던 황자가 머지않아 팔라카스 제국의 황위에 오를 바로 그 인물이었던가.

‘황자와…… 아는 사이라니.’

현 황제 레이우스 2세는 선천성으로 약골의 체질인지라 거의 평생을 크고 작은 병마에 시달리다시피 해 왔다. 그의 나이 50줄로 들어서자 아예 깊은 병환에 침대에 드러누웠으니 1년 전부터 국정에 관한 업무의 대부분은 첫째 황자가 도맡아 해 오는 실정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황자는 아버지와는 달리 튼튼한 신체를 타고 났고, 타고난 총명함에다 성년이 되면서 휜칠해진 키와 조각상과도 같은 외모로 벌써부터 차세대 황제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황자 나이가 이제 겨우 2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황궁 대신들은 물론 다소 적대적 관계에 있는 원로원 의원들마저 왠지 모를 위축감을 느낄 정도라 했다.

지드는 침을 꼴깍 삼켰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그쪽하고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상체를 세우더니만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스스.

스스스스.

흡사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라 할까. 그의 눈빛이 번뜩이면서 청력을 최대한 발동시켜 주변의 미세한 음들을 다시 주의 깊게 담아 내기 시작했다. 눈알이 이리저리 번득거리는 매우 긴장된 순간이었다.

스스.

스스스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일정한 리듬이 있는 소리라 할까. 놀랍게도 지드는 무려 100여 m 밖에서 나는 소리를 정확히 잡아 내고 있었다.

결국 그의 얼굴이 한없이 굳어지기 시작했으니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던가.

‘설마…… 그들이.’

헌데 동서 방향으로 각각 한 명씩 다가오고 있었으니 생각보다 인원수가 적은 듯 보였다. 지드는 아래층 거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대원들을 깨우기보다는 그 자신이 직접 대응하기로 했다.

필시 특수검사부에서 파견 나온 자객들이 분명할진데 소문에 듣자하니 그들의 전투력이 가히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했다. 괜히 부하들을 내세워 불상사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홱!

착!

2층 테라스 난간 위를 뛰어넘어 마당에 안착하는 지드, 그는 일부러 적들에게 잘 보이도록 중앙 한가운데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그의 예상대로 두 방향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 명은 대문 뒤에 숨어 엿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목조 판자 지붕 위에 바짝 엎드려서 마당을 살피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저들의 목표가 8구간 주민 선동자로 리스트에 올라 있을 아카시안이 분명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당 한가운데에서 강력한 포스를 지닌 채 서 있는 한 존재에 대해 신경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만 양쪽 방향으로부터 각각 파공음이 들려왔다.

슉!

슉!

달빛마저 구름에 간간히 가려져 있는 새벽녘인지라 아직 세상은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오감을 넘어선 육감까지 발동시키기고 있던 지드는 자신을 향해 날라 오는 양방향의 무기들을 피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에잇!”

신법을 사용할 때마다 몸이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솟구쳐 오르는 항시 신기할 뿐이었다.

허나 지금은 실전인 만큼 지드는 눈을 똑바로 뜨고 후속 동작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처음 공격을 피한 듯 지상에 가뿐히 내려앉았다지만 정작 문제는 적들이 앞뒤로부터 합공을 하니 어디부터 쳐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거지.’

바로 그때였다.

지드는 방금 전 피했다고 생각한 무기들이 시퍼런 날을 번뜩이며 자신을 향해 양방향으로부터 둥둥 떠 있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웅― 웅―

“헉! 뭐, 뭐야.”

검 두 개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지드를 노려보았고 그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자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삭!

슥!

순간 지드는 빠른 신법을 이용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탁!

아니나 다를까. 두 개의 검 역시 그의 행적을 쫓아 발밑으로 따라 올라오는 것이 아니던가. 지드는 당혹스런 나머지 허공에서 신형을 잠시 주춤했고 그 틈을 이용해 검 한 개가 몸통을 쑤시듯 공격해 들어왔다.

삭!

“억!”

털썩!

상체 비틀기 동작으로 피했지만 왼팔이 살짝 베이는 부상을 당했고 마당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아아.”

무려 5m의 높이에서 등부터 떨어졌는지라 제법 큰 충격과 적지 않은 고통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상황은 이제부터 시작이던가. 검 두 개가 다시 공격을 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뭐에라도 홀렸던가.

적들은 보이지 않고 어찌 무기들만이 사악하고 흉측한 뱀처럼 살아 움직이며 저처럼 살수를 마구 뿜어낸단 말인지.

갑자기 생각난 거지만 지난번 은빛 머리 검사의 반월형 병기와 마찬가지도 지금의 상황 역시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만 그 힘의 세기에서 훨씬 처지는 느낌을 받았던가. 같은 맥락의 기상천외한 검술일지라도 이번 것은 다소 약한 감이 들었는지라 내심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 다시 들려오는 파공음!

파파팟!

파팟!

당장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난도질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수밖에.

“에잇!”

붕!

이번에도 검 두 개가 어김없이 추격해 왔으니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홱! 홱―!

하지만 지드의 신형이 이번엔 다소 달랐으니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끝까지 해 보자 이거지. 좋아,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슉!

허공에 뜬 그의 신체가 절묘한 움직임을 자아냈다.

흡사 그 모습은 가을바람에 날리는 매화 잎처럼,

그리고 그 속도는 발밑까지 치고 올라온 검 두 개의 속도마저 무산케 했다.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

놀랍게도 지드는 방금 전까지 살기를 팍팍 품어 내었던 검 두 개의 면 위를 각각 한 발씩 밟고 올라섰던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검들은 아직 공력을 잃지 않은 듯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였는데 꼼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지드는 내공을 발끝에 모아 모든 힘을 집중시키고 있었고 검들은 살아 있는 듯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양방향으로부터 돌진해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존재들, 그들은 군장을 입고 있었다.

필시 두 검들 주인이 확실했다!

그들은 상대가 그 어떤 기상천외한 기술을 사용했는지 자신들이 조종하는 검에 올라서서 계속 버티고 있자 끝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타다닥! 타다닥!

각각 앞뒤로 달려드는 군장 사내들, 사실 지드 역시 그들이 나타나리라 어느 정도 예상했던지, 그동안 꼼짝 못하게 했던 무기들을 놔주는 척하다가 갑자기 힘을 주어 양발로 손잡이들을 동시에 걷어찼다.

탁탁!

파! 팟!

두 개의 검은 돌진해 들어오는 자기 주인들을 향해 무섭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들 중 한 명은 애석하게도 자신의 검에 목줄기를 관통당해 즉사하고 말았다.

“아악!”

다른 한 명은 상체를 재빨리 비틀었기에 검이 어깨를 스치는 경미한 부상을 입었지만,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내는 갑작스런 반격에 충격을 받았는지 격한 말을 뱉어냈다.

“우욱! 빌어먹을!”

이때 공중으로부터 지상으로 착지한 지드.

그는 죽은 자를 무시한 채 대문 쪽에 멀뚱히 서 있는 사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잿빛 머리칼 사이로 북어 대가리 같은 몰골이 드러났다. 그 누구를 암살하러 온 특수검사부 소속 자객이 분명할진대 복면 같은 것은 쓰지도 않고 있었다.

어쨌든 단번에 상황이 역으로 돌아선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이 조종하던 무기가 오히려 주인들을 공격하여 한명은 즉사시켰고, 나머지 한 명은 넋을 잃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지드는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검을 들어 사내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왔는지 정체부터 밝혀라.”

그러자 사내가 더욱 무서운 인상을 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웠다.

“네놈이 뭘 어떻게 해서 내 동료를 제압했는지 모르겠지만…… 각오해라.”

스윽.

검을 다시 가슴 정중앙에 고정시키는 사내, 그는 특수검사부 소속인 만큼 침착하게 다음 공격에 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조차 지드는 저들이 사용했던 놀라운 검 조종 기술에 대해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검술이지?’

지드는 순간 하류검사 시절 그 누구로부터 저와 같은 검술에 대해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옛날 아르게논과 그의 폭풍 용병단원들이 검을 부메랑처럼 조종할 수 있었다는 내용!

그러나 생각을 채 정리하지도 못한 바로 그때, 사내가 기습적으로 검을 던졌다.

“죽어라!”

홱!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검은 주인의 손을 떠나서도 마치 조종을 받는 듯 스스로 조준을 하며 강력한 회전을 일으키며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결국 지드는 승부를 일찍 마무리 짓고자 위해 특단의 방법을 사용키로 했다.

“제이 초 파검식!”

타다닥! 파팟!

단 한 번의 검 부딪침으로 상대방의 검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지드는 다소 싱거운 듯 자신의 검을 살펴보며 입맛을 다셨다.

“끝난 건가.”

무림의 모든 문파의 검법을 파훼한다는 독고구검 제2초 파검식, 신기한 일이지만 그 기술은 이 세계에서도 제법 잘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지난번 흑검술에 이어 공력 검술일지도 모르는 이 놀라운 기술 역시 그 앞에선 그다지 위력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상당한 고수와 싸움을 하려 했단 사실을 알고는 무척 당혹해 하는 얼굴이었다. 지드가 다짜고짜 물었다.

“특수검사부 소속이 맞는가!”

“…….”

“내 말이 맞지?”

사내는 대답 대신 재빨리 등을 돌려 대문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뭐라 외쳤다.

“비, 빌어먹을! 두고 보자!”

지드가 그를 쫓지 않고 뭐라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봐!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우리는 주민들 선동한 일도 없고 정식으로 용병단을 창설하기까지 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특수검사부이든 뭐든 간에 다음부터는 이곳에 올 필요조차 없음을 알아 두어라!”

하지만 사내는 들은 둥 마는 둥 도망가기에 정신이 없었고 어느새 대문 밖으로 나갔다. 헌데 갑작스레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악!”

지드는 뭔 일인가 하고 재빨리 대문 밖으로 나갔다. 살펴보니 방금 전 도망갔던 사내가 흙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뭐야!”

새로 등장한 정체불명의 사내는 막 살인을 끝내고는 흑검(黑劍)에 묻은 피를 헝겊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어느덧 밝아진 여명 아래 드러나 보이는 사내, 놀랍게도 그는 지드가 아는 자였다.

“당신은!”

사내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기억하겠죠? 후후.”

“카, 카르발디…….”

“와우! 역시 내 이름을 잊지 않았군요.”

“왜 여기에?”

“그대가 보고 싶어 왔소이다.”

“……?”

지드가 뭔 말인가 싶어 멀뚱히 서 있자 카르발디가 능청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대를 보기 위해 새벽 일찍부터 찾아왔는데 마당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더라고요. 당신을 습격한 한 놈은 일찌감치 죽어 있었고 다른 한 놈이 대문을 통해 이곳으로 달아나는 것 같아서 내가 처리했지요.”

지드의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용병 집단 특별 허가 테스트 최종 후보자들 중 한 명이었던 카르발디, 하필 저 뻔뻔하고 비겁한 녀석이 이때 등장할 게 뭐란 말인가.

카르발디는 그런 지드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더욱 얄밉게 웃어 보였다.

“헤헤, 어찌 표정이 달갑지 않은 것 같은데요? 혹시 내가 못 올 곳에 오기라도 한 건가.”

“새벽부터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뭐지?”

“에고! 일단 표정부터 펴고 얘기합시다. 이거 원 무서워서 말을 할 수 있어야지.”

“본론이나 말하시지.”

“그대의 용병단에 가입하고 싶어서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지드. 카르발디가 재차 말했다.

“말 그대로, 나를 받아 주십시오.”

“…….”

그때 대문 안쪽으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만 그제야 잠이 깬 대원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뭐, 뭔 일 있었나 봐! 시체잖아!”

“대장님이시다.”

수장 지노가 무척 놀란 듯 물었다.

“대장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특수검사부의…….”

“근데 저놈은 누굽니까.”

“혹시…… 적!”

대원들은 카르발디를 적으로 알고는 삽시간에 포위를 했고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어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카르발디는 다소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감탄의 반응을 보였다.

“와우! 벌써 부하들을 거두어 들였군요.”

그때 1호 비스크가 눈알을 부라리며 큰 도끼로 위협을 하며 말했다.

“대장님! 대체 이 빤질빤질 한 자식 뭡니까! 적이라면 지금 당장 몸통을 쪼개버릴까요?”

그러자 지드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놔두게나.”

“대체 이놈은 뭡니까.”

“그는 손님이니 자네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네.”

“손님이라니요!”

“잘하면 자네들 밑으로 들어올지도 몰라.”

“우리들 밑으로요.”

“……그러니까! 신참 하나 들어온 거네요?”

그러자 8호 아레스가 제일 기뻐했다.

“이제 내 밑에도 하나 생겼다. 하하.”

카르발디가 난색한 얼굴을 했다.

“이보시오, 지드. 뭔가 모르는 모양인데 내 실력이면 적어도 당신 다음 서열의 보직을 줘야 하는 것이 아니요?”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돌아가든지?”

“…….”

***

지난밤에 일어난 아르게논 기습 사건은 실로 충격 그 이상이었다. 하류 구역뿐만 아니라 드넓은 용병 거주지 전체가 들썩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설마하니 제5구간에 머물고 있는 옛 용병대장을 암살하려고 대규모 특수부 검사들이 파견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려 30명에 이르는 자객들이 아르게논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잃어야만 했으니, 지난 밤 사건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최대의 화젯거리로 떠오르고 있었다.

새벽의 은밀한 기습 공격이었는지라 아르게논의 추종자들이 미처 잠에서 깨기도 전에 승부는 이미 나 버렸고, 나중에야 환하게 밝아 오는 여명(餘命) 아래 대검을 땅에 꽂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아르게논만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번 사건은 꺼져 가는 등불 신세였던 하류 구역 전 주민들에게 그야말로 새로운 빛을 안겨 주고도 남았으리라.

옛 영웅이 어느 날 핍박받는 하층민들을 구하기 위해 홀연히 나타나서는 상황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아르게논이야말로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구세주와도 같았다.

사실 5구간 외에도 8구간에서 똑같은 기습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관심은 오로지 아르게논밖에 없는 듯 보였다.

8구간에서의 일도 어찌 본다면 대단한 화젯거리라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지드는 긴급 비상 회의를 열었다. 다소 비좁은 집무실 안에는 수장과 여덟 명의 대원들 모두가 기다란 탁자를 빙 둘러 착석해 있었다.

혹시라도 아카시안을 노리는 자객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지난 며칠 동안 그토록 가슴을 졸이던 차에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니.

대원들 모두는 저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대장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다들 놀랐겠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인 만큼 앞으로라도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어제는 운이 좋아 두 명뿐이어서 제압했다지만 이후 더 많은 인원이 올 가능성이 크다. 그때에는 자네들도 나서서 그들이 이곳에 단 한 발자국이라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덩치 큰 1호 비스크 뭔가 볼멘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어제는 왜 저희들을 깨우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이거…… 창피하기도 하다고요.”

그러자 대장 대신 수장 지노가 그를 나무라 듯 꾸짖었다.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내 분명 조를 나누어 교대로 잠을 자라 했건만 다들 자빠져 잔 게 누구야. 자네가 대원들 중 제일 맏형이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더냐.”

비스크는 머리를 푹 숙이더니만 다소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다른 대원들 역시 풀 죽은 채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죄송합니다.”

“저도요.”

“설마 새벽이 다 가고 이른 아침에 침입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수장이 다시 소리쳤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니. 자객들이 하루 중 가장 취약한 시간대를 골라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상식 아니냐.”

“그러시다면 수장님은 그때 뭐하고 계셨습니까.”

7호의 질문이었다.

“나, 나? 그러니까…….”

수장이 말을 더듬거렸다.

“역시 주무시고…….”

“뭐, 뭐라고. 밤새 뜬 눈으로 있다가 새벽에 잠깐 졸았을 뿐이라고.”

“어쨌든 잔 건 잔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그걸 일일이 따지자는 거냐.”

“저희들도 몇 날 며칠 밤새웠단 말입니다. 새벽에만 잠깐 졸았을 뿐.”

“아이고, 저 어린 녀석이 눈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것 좀 보게!”

다소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려 하자 지드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다들 그만하지. 어차피 지난 일이고 결과적으로 아무 탈이 없었으니 굳이 들춰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작 우리가 앞으로 토론해야 할 문제는 향후 대책에 관한 것이랄까. 각자 좋은 의견 있다면 편하게 말하도록.”

그때 막내 8호 아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보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오해를 푸는 일입니다.”

“오해라니?”

“아카시안 님이 선동자로서 본의 아니게 제국의 암살 리스트에 오른 일을 말하는 겁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하수도를 공사한 것이 어떤 나쁜 목적을 가지고 주민들을 선동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말씀인데 지금이라도 당장 용병 거주지 내 상주 관리소를 찾아가서 자초지종 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린 아가씨는 절대 그런 의도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게 제 의견입니다.”

“…….”

제법 좋은 의견이었던가. 지드와 수장 그리고 대원들은 저마다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질 깐깐한 7호만큼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웃기는 소리.”

아레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또 형님이쇼?”

“그들이 그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어 줄 것 같으냐, 순진한 녀석아.”

“아니, 해 보지 않고 어떻게 그리 확신하쇼?”

“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쫓겨날 것이 뻔할걸.”

“나 참. 매사를 그리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보면 세상이 뭔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났지요.”

이에 불끈하는 7호.

“뭐라, 이 자식이 정말!”

둘의 다툼의 대원들은 또 시작인가 하고 저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쟤들은 왜 항상 저 모양이지.”

“전생에 개와 고양이였나.”

그때 지드가 다소 진지한 얼굴로 8호 아레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막내야, 우리가 그리 말하며 과연 상주 관리소에서 곧이곧대로 받아 줄까?”

8호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어디까지나 제 소견이지만 우리 얘기를 믿어 줄 가능성은 충분하다 봅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대장님께는 용병단 창설 허가증이 있기 때문이죠.”

“용병단 창설 허가증이라?”

“그거야말로 우리를 살려 줄 유일한 희망이자 생명과도 같은 가치가 있다는 거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류 구역 축소 및 폐쇄 조치에 해당하는 자들은 떠돌이 하류검사들과 그들의 식솔들이 아닙니까. 반면 제국의 용병 연합회 정식 등록 용병들이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단 것은 대장님께서 더욱 잘 아실 겁니다.”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당당한 정식 용병인데 무엇 때문에 뒤에서 주민들을 선동하고 획책이라도 하겠습니다. 용병 허가증을 가지고 그들에게 보여 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아마도 십중팔구 그들도 이해할 것입니다.”

“…….”

얘기를 듣고 보니 8호 아레스 말이 맞았다. 지드와 대원들의 얼굴에 저마다 한줄기 희망의 빛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좋은 의견이군.”

아직 18살인 아레스는 대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자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상주 관리소를 찾아가서 오해를 푸는 일은 네가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순간 입을 쏙 다물고 마는 아레스.

‘아고.’

옆에서 이든이 쌤통이라는 듯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러자 아레스가 큰 소리로 말했다.

“7호 형님과 함께라면 당장 갔다 오겠습니다!”

순간 7호 이든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뭐야, 이 자식!’

지드가 말했다.

“좋다, 내일 아침 일찍 너희 둘은 용병 허가증을 가지고 그곳을 다녀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이든! 자네는 왜 대답이 없나.”

“……알겠습니다.”

이든은 힘없는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고 물귀신처럼 자신을 끌어 들인 아레스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하류 구역 초입 구간에 위치한 상주 관리소는 주민들이 제일 가기 꺼려 하는 곳으로, 아주 깐깐한 제국의 관리들과 건방져 보이는 병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레스가 뻔뻔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이든은 대답 대신 몸으로 표현했다.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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