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콰아앙!
쏴아…….
한바탕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굵은 빗줄기들은 흙바닥의 마당을 마구 파헤치듯 금세 물이 넘쳐 대문 문턱으로 넘어 흐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수장 지노는 지난번에 하수도 공사를 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라 폭우를 홀딱 맞으면서도 언덕 아래 하수구 매몰 지역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쏴―
눈앞을 가릴 정도로 비가 마구 퍼부었다. 그때 지드가 대문 밖을 나서 수장에게 다가왔다.
“그 아래는 괜찮아 보입니까?”
그 역시 걱정이 되어 나온 것 같았다.
“아이고! 대장님은 안에 계시라니까요.”
“걱정이 돼서요.”
“이제 날씨도 으슬으슬한 늦가을인데 비에 젖으면 한기가 느껴진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수장은 왜 비를 맞는 거요.”
“나야 원래 이골이 나 있으니까 상관없어요.”
“나 역시 하류 구역 토박이 출신 아닙니까. 이런 폭우를 맞으면서 밥도 많이 먹어 봤는걸요.”
“지금은 우리들 대장이신데 몸을 아끼셔야죠.”
“걱정해 주니 고맙군요. 그나저나 아래 지역은 괜찮겠지요.”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공사를 단단히 해 두었으니 한동안 이상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군.”
“이게 다 아가씨 덕분이지요.”
수장이 3층 테라스 위를 쳐다보자 지드 역시 무심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아카시안 역시 폭우가 걱정이 되었는지 나와 있었고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지난번처럼 물난리에 의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가슴속으로 비는 것 같았다.
한편 목조 건물 왼편 넓은 거실에는 폭우 때문에 모처럼만에 수련을 중단 하고 모여 있는 대원들이 각자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수장 지노는 지난번에 하수도 공사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라 폭우를 홀딱 맞으면서도 언덕 아래 하수구 매몰 지역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1호 비스크는 마운부의 달인답게 항시 큰 도끼를 꺼내어 매일 같이 깨끗한 모포로 닦고 광을 내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호 게리 역시 1호와 마찬가지로 그만의 무기인 창을 두 탁자 위에다 길게 눕혀 놓고는 창대에 기름까지 발라가며 나름 열심히 손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자 소위 저들끼리 사대천왕이라 칭하며 항시 몰려다니는 25세의 동갑내기들, 3호 크리스, 4호 갈시드, 5호 발렌, 6호 르시오가 2호의 작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형님! 창대에 기름을 바르면 미끄러워서 어찌 손으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3호 크리스가 말하자 4호 갈시드가 맞장구쳤다.
“맞아요. 겉보기에는 윤기가 반짝 반짝 흘러서 보기 좋지만 막상 전투에 임하면 불편할 텐데요.”
그러자 2호가 아우들 보란 듯 입가에 미소를 씩 짓더니만 허리춤으로부터 장갑 한쪽을 꺼내 들었다.
“내 그럴 줄 알고 이걸 준비해 뒀지.”
“그게 뭐요?”
“미끄러지지 않는 장갑이다.”
“와우.”
“녀석들 내가 바보인 줄 아나?”
“형님, 보기보다 제법인데요?”
3호 크리스의 말투가 다소 거슬렸던가, 게리가 불끈했다.
“보기보다 제법이니! 그렇다면 평소 내가 바보처럼 보였단 말이냐.”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그럼 뭐야.”
“그냥 별 뜻 없이…….”
“그렇게 할 일들 없으면 나가서 비라도 맞으며 수련을 하든지. 거참, 성가신 놈들이군.”
게리가 잔소리를 시작하자 사대천왕들은 서로가 멋쩍은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도 무기 손질하는 게 어때?”
“좋은 생각!”
“당장 시작하자.”
“헝겊은 내가 구해 볼게.”
참으로 죽이 척척 맞는다고나 할까. 신기한 일이지만 그들은 친형제들처럼 언제나 몰려다니며 함께 의논하며 행동도 같이 했다.
물론 그들도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금세 풀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다시 친한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항시 만나면 으르렁거리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7호 이든과 8호 아레스였다. 둘 역시 사대천왕과 마찬가지로 늘 붙어 다니긴 하지만 거의 말다툼하는 데 하루 일과를 보낼 정도였다.
“물론 그러시겠죠. 쳇!”
“쳇이라니! 이놈 보게나? 아무리 내가 하류 구역 출신이라지만 귀족 나부랭이 놈보다 세상 경험을 오래 했으면 오래 했지, 설마하니 내가 허튼 소리를 하겠냐.”
“이 마당에 귀족 타령은 또 왜 하는 거요? 젠장!”
그때 옆에서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던 카르발디가 끝내 못 참겠다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만 급기야 이들의 대화에 껴들었다.
“거참,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자겠네!”
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7호와 8호, 곧이어 이든이 카르발디를 노려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근데 왜 반말이냐?”
아레스 역시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야. 신참 주제에 건방지게 고참 얘기하는데 껴들다니.”
그러자 카르발디가 피식 웃었다.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새파랗게 어린 녀석들 말하는 것 좀 보게나. 내 나이 서른 살인데 아무렴 네놈들과 같이 놀아 줘야겠냐? 너희도 용병 연합회에 있어 봐서 알겠지만, 난 마지막 통과자 여덟 명에 오르기까지 했다는 거 기억하지? 그렇게 본다면 내 서열이 적어도 대장 다음인 서열 2위에 해당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앞으로 잘 알아서 모시도록 해라. 많이 귀여워 해 줄 테니 말이다.”
털썩.
카르발디는 얘기가 끝나자마자 다시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7호와 8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저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완전 그 꼴이잖아.”
“그나저나 대장님은 저자를 받아 주긴 한 거야?”
“그냥 자기가 비집고 들어온 것 같은데.”
“갈 곳이 없나. 왜 하필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지?”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천둥 번개 소리.
우르릉! 쾅!
쏴!
저편 도끼를 손질하고 있던 1호 비스크가 모처럼만에 말문을 열었다.
“제법 비가 많이 쏟아지는 것 같은데…… 한바탕 물난리가 나게 생겼군.”
2호 게리가 말했다.
“물난리라니요? 그걸 막자고 아가씨께서 그 많은 돈을 들여서 하수도 공사를 했잖습니까.”
“과연 그게 효과가 있을까.”
“있고말고요. 적어도 물이 역류하지만 않는다면 집들이 물에 잠길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 가지 걱정이라면 강풍이겠죠.”
“그다지 바람은 심하지 않는 것 같긴 한데…….”
폭풍이 지나고 오전의 태양빛이 눈부시게 비쳐 주고 있었다.
짹짹―
앞마당 나뭇가지 위에 여느 때나 다름없이 한 마리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2층 집무실 테라스에는 무슨 이유인지 지드와 아카시안이 언덕 아래 빽빽한 판잣집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비 온 뒤 해가 뜨면 주민들은 어김없이 지붕 위로 올라가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들과 모포들을 말리기 시작한다. 밤새 폭우가 쏟아져 내렸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물에 잠기거나 강풍에 쓰러진 집이 없어 보였다. 지난번 하수도 공사 덕분이 아닌가 했다.
아카시안은 눈부시고도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무심코 지켜보던 지드는 마치 천사라도 목격한 듯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아가씨는 너무 착하고 아름다웠다. 그 자신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귀하고 귀한 존재랄까.
아카시안이 문득 고개를 돌리자 지드는 본의 아니게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고 그는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무사한 것 같아요.”
“정말 그러네요.”
“밤새도록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답니다.”
“그 많은 비가 내리고도 물난리를 비켜 갈 수 있었던 것이 다 아가씨 덕분이죠.”
그때 아카시안이 지드 옆으로 다가오더니만 머리를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드 님과 대원 분들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어요.”
“…….”
그녀의 행동에 지드는 내심 당혹했다. 너무도 편하고 해맑은 표정이었던가. 아마도 아카시안이 진정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취하는 동작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드가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는 그가 31살이 되도록 여자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는 숙맥이기 때문이리라. 아카시안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요.”
“네? 뭐, 뭐가요.”
“지드 님은 그저 고용계약을 맺은 경호대장이 아니라 저희 남매를 수호하기 위해 나타나신 수호천사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감사해요. 앞으로도 계속 옆에 계셔 주시면 좋겠어요.”
“그, 그야 당연하지요.”
여전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아카시안, 지드의 머릿속은 온통 그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거렸다.
급기야 지드가 살짝 뒤로 물러나더니만 괜히 서두르는 척했다.
“아차! 오늘 아침에 거길 간다는 것을 깜박했네요.”
“어디 가시나요?”
“저기 5구간에 좀 다녀오려고요.”
“5구간이요?”
“지난 번 아르게논 님 습격 사건 이후 그곳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한번 가서 동태 좀 살펴보고 오려고요.”
“아…… 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지드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뭔가 불안한 사람처럼 재빨리 거실을 통해 계단을 내려가더니만 어느새 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시점이었다. 지드는 막 5구간 초입 부근에 들어서면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구간에 비해서 사람들로 유난히 북적거리는데 그들 대부분은 낡은 군장에 다소 칙칙한 검집을 허리에 찬 노인 검사들이었다. 주글주글하고 초라한 몰골에 검버섯마저 듬성듬성 보였으니 무장 해제를 시킨다면 영락없는 늙은이들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젊은 검사 못지않게 매우 반뜩였고 제법 위세도 당당해 보였다.
정말 소문대로 그 옛날 전설의 폭풍 용병들이 다시 모이기라도 했단 말인지…….
아무래도 자신들의 옛 주군이 은둔 생활을 접고 하류 구역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 지역으로 빠르게 퍼졌고 그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지드는 계속해서 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저들이 정녕 옛 주군인 아르게논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뭉친 자들이라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3, 40년 전에 대륙을 종횡무진하면서 대활약을 펼쳤던 살아 있는 전설들임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던가! 백발이 성성한 얼굴과 다소 등마저 구부러진 노인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를 측은함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을 주민들은 노인 검사들을 볼 때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저마다 그들을 듬직하게 여겼다.
이해가 되긴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강제 철거를 눈앞에 둔 그들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등장한 옛 영웅 아르게논이 제국으로부터 파견 나온 자객들마저 제압을 해 버렸고, 그의 옛 추종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
마치 절망 속에 밝은 희망이 새록새록 솟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잠시 후 지드는 5구간 중앙에 위치한 제법 큰 목조 건물 앞을 기웃거렸다. 이곳 거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아르게논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왔던 것이다.
허나 지난번 습격 사건 때문인지 대문과 담벼락 둘레에는 노인 용병들이 저마다 시퍼런 검들을 들고 철통같은 경비를 하고 있었다. 지드로서는 감히 그 앞에 나설 마음이 생기지 않고 있었다.
원래 그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먼발치서나마 아르게논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를 만날 이유도 없었으니 주저 없이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그때나 한번 뵈어야겠다.’
휘잉!
언덕에 올라서자 한줄기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지드는 자기 구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지름길을 택하기로 했고 5구간 서쪽 언덕길의 조그만 공터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때 뭔가에 놀란 듯 동공이 확 팽창되고 말았다.
“와!”
설마하니 불모지처럼 버려졌던 황량한 들판이 누군가에 의해 개간이 되었는지, 일정한 간격으로 파릇파릇 새싹들이 세상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텃밭이네.”
하류 구역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지난 10년 동안 봐 왔던 이곳은 항시 더러운 시궁창에 파리와 모기떼들이 극성이던 곳일 뿐이었다. 하다못해 조그만 공터에는 주민들이 갖다 버린 쓰레기 때문에 그 악취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헌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 대체 누가 저런 곳을 손수 개간하고 정성을 들인 건지 궁금해졌다.
그가 밭을 살펴보고 있을 때 바로 왼편 언덕 아래 시냇가로부터 한 노인이 물지게를 지고 끙끙대며 올라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왜소한 체격에 소박한 옷차림이랄까.
세파에 찌든 몰골마저 너무도 주글주글하고 힘없어 보였건만 그가 등에 쥔 물통 두 개는 왜 그리도 커 보이는지.
지드는 주저할 것 없이 당장 뛰어 내려가 노인을 돕기로 했다.
타다닥!
“어르신, 물지게를 제게 주시죠.”
“자넨 누군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노인께서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노인이 지드를 바라보더니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착한 젊은이로군.”
“자, 이리 주시죠.”
“그렇다면 그리 해 주겠나.”
“넵!”
“생각보다 무거울 텐데?”
“무겁기는요. 물지게 나르는 일이라면 이골이 나있습니다. 하하!”
지드는 노인에게 건네받은 물지게를 등에 메고는 제법 가파른 언덕 위로 쏜살 같이 달려갔다.
타다닥!
그가 처음 무공을 접했을 때 처음 수련한 것이 바로 물지게가 아니던가. 한편 노인은 그런 그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허허! 대단히 빠른 젊은이로군.”
잠시 후, 지드는 둔덕에 앉아서 물 한 그릇 떠먹으며 노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노인이 저 넓은 텃밭을 일구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 했다.
“정말로 노인 혼자서 저걸 다 일구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그러네.”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기는 뭘.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시작한 소일거린데. 보름 전에 씨를 뿌렸고 아마도 다음 달이면 첫 수확을 할 수 있을걸세.”
“…….”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드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다음 달이면, 어쩌면 하류 구역 전체가 폐쇄되어 주민들 모두가 떠나야만 하는 실정이지 않은가. 보기에 노인은 아마도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드가 다소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이번엔 노인이 물었다.
“왜 표정이 그런가?”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얘기를 들어보니 자네 역시 이곳 출신인 것 같은데?”
“원래 고향은 시골인데 이곳에서 거의 자라다시피 했었죠.”
“용병의 꿈을 안고 이곳에 온 게로군.”
“그렇습니다.”
“꿈은 이루었는가.”
그 말에 지드가 다소 멋쩍은 듯 답했다.
“예, 지금으로서는 그런 셈이죠.”
“허허, 축하하네.”
지드가 다소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하류 구역 돌아가는 실정이 예사롭지 않던데 노인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알다마다.”
“그런데 굳이 왜 이런 일을.”
노인이 지드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알았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는 조만간 이곳이 폐쇄될지도 모르는데 왜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느냐고 묻는 거겠지?”
“아, 그러니까…… 그게…….”
노인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하기야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 본다면 아마도 나를 망령이 난 늙은이로 취급할 게 뻔하겠지그려.”
“그런 건 아닙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네. 나도 없어질지도 모르는 땅에다 뭔가를 심으려는 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말일세.”
그때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텃밭 쪽으로 향했다. 지드는 자기 때문에 자리를 피하는 줄 알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허나 노인의 환한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노인은 쪼그려 앉은 폼으로 이제 막 새순이 돋아나는 채소 밭 주변의 잡풀들을 뽑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지드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고향이 있다지만 사실 나는 고향이 이곳이라네. 나는 한때 용병단을 만들어 세상을 주유한 적이 있었지.”
용병단이라는 말에 지드가 깜짝 놀랐다.
설마 저 왜소하고 볼품없는 노인이 과거에 용병대장이기라도 했단 말인지.
“당시에는 내 본분을 잊은 듯 세상모르고 대륙을 휩쓸고 다녔지만 훗날 나이가 들고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여기더라고.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 그 고향이라는 것을. 수년 동안 방랑 생활을 했고 결국 내 발길이 원래 자란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음에, 동물이든 사람이든 처음 난 곳으로 돌아오는 귀화 본능이 있음을 말일세.”
노인의 얘기가 길어지려 하자 지드는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했는지 몸을 비비꼬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 들려오는 음성.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고 잊고 싶었던 고된 하류 구역에 귀환한 내 모습에 그제야 깨달았지. 인간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명예와 권력보다도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고. 사실 이곳에 머물며 아직은 그게 뭔지 해답을 찾는 중일세. 하지만 결국 여기에다 뼈를 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네.”
“…….”
원래 복잡한 내용을 싫어하는 단순 성격의 지드는 대체 노인이 뭔 말을 하는 건지 멀뚱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함, 에고!”
하품마저 나오려는 것을 억지 참았다. 바로 그때였다. 언덕 아래로부터 대략 10명의 사람들이 뭐라 외치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지드가 깜짝 놀란 눈여겨 살펴보니 아까 아르게논의 집 앞에서 보았던 노인 용병들이었다.
“대장님! 어쩌자고 또 여길 나와 계시는 겁니까.”
한 용병이 말하자 다른 용병들도 한마디씩 했다.
“습격 사건이 발생한 지 이제 겨우 며칠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딜 가더라도 우릴 대동하고 가십시오.”
노인이 다소 성가신 얼굴을 했다.
“아직 내 몸은 나 혼자 지킬 수 있대도 그러는군. 대체 자네들은 언제까지 나를 산송장 취급할 건가.”
그들은 노인을 에워싸더니만 그가 들고 있던 괭이와 광주리를 건네받고 조심스럽게 모셨다.
지드는 이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고만 있었다.
노인이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지드라 합니다.”
“그래, 지드. 오늘 대화 즐거웠네.”
“저, 저도요.”
“그래, 그럼 다음에 보세나.”
저만치 사라져 가는 노인과 용병들을 바라보며 지드는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란 듯 뭐라 중얼거렸다.
“가만있어 보자! 그렇다면 저 노인이 설마!”
***
팔라카스 제국 수도 어느 밀집한 건물 사이로 한적한 골목길에 예사롭지 않은 군장 차림의 세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가운데 남자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40대 중반의 중년인이었고 양옆에는 호위검사로 보이는 20대 중반 가량의 청년들이 있었다.
오른쪽 청년이 말문을 열었다.
“대공님! 오늘은 제발 자중하시어 제1지부 수장의 심기를 건들지 말아 주세요. 지난번 그 일 때문인지 우리 제5지부에 할당된 예산이 반으로 줄어 있더군요. 아무래도 보복 차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년인, 대공 자라투스가 의외의 표정을 했다.
“뭐라! 그 얘기를 왜 지금에야 하는 건가!”
“또 흥분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작자가 실성이라도 했단 말인가! 특수검사부 지부 예산을 자기 마음대로 하다니……!”
“저기, 진정하시지요.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 아닙니까.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특수검사부 수장이라는 작자가! 빌어먹을!”
“거 보세요. 또 혈압 오르잖아요.”
“내가 지금 가만있게 생겼는가!”
“사실 혈압 오를 사람은 바로 카르세크입니다. 왜냐고요? 지난번 그가 특수검사들을 풀어서 아르게논을 습격 했던 일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쓸데없이 벌집을 건드려서 일만 커지게 만든 형국이랄까요. 그 때문에 아르게논의 추종자들이 어느새 천여 명에 육박하고 있잖습니까. 그처럼 민감한 사안에 자객들을 보내서 막무가내 식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다니, 세상에 그 작자처럼 우둔한 자가 또 어디 있을까!”
대공 역시 고소해 하는 얼굴이었다.
“우둔하다라. 그거 듣기 좋은 소리군.”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번 사태는 대공님께 득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카르세크 수장의 지난번 작전은 같은 편인 황실 쪽과 심지어 황자님마저 크게 노하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저들끼리 한창 내분을 겪고 있을 테니, 우린 그저 상황만 지켜보면 그만인 게죠.”
그제야 대공의 표정이 완전히 풀렸다.
“쌤통이다. 하하!”
“…….”
마치 심술 가득하고 철없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대공, 그의 왼쪽에는 테세우스가 묵묵히 따라 나서고 있었다.
대자객에서 특수검사부로 전향한 지 어느덧 한 달여가 지났을까.
그동안 테세우스는 제국이 크게 황실과 원로원, 두 개 세력으로 나누어져 크고 작은 암투를 계속해 왔음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이들은 잠시 후 개최될 특수검사부 긴급회의에 가는 중이었다.
같은 시각, 황실 내 황자 집무실.
날아가도 새도 잡는다는 명실상부한 실세 카르세크, 그리고 그의 호위검사인 레온은 평소답지 않게 제삼자의 위세에 눌려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저절로 가슴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리라.
그 앞에 푹신한 소파에 현재 제국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황자 게라쿠스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황자가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 일은 당숙께서 다소 성급하셨습니다.”
카르세크가 어쩔 줄을 모른 채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초반에 그 싹을 잘라야 한다는 생각만 했기에…….”
“싹을 자르려면 초강수를 두어 철저히 하지 그랬습니까. 보고 받기에는 특수검사부 중하 계열 소속 자객들 삼십 명을 파견했었다던데 그 아르게논이란 자가 제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지만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닙니까?”
“제 불찰이었습니다. 저 역시 아르게논이 수십 년 전 제법 큰 활약을 했던 뛰어난 검사이자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그의 직급이 용병 집단 대장에다가 그저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방랑 검객들을 상대로 무적의 전과를 올린 것으로 조금은 과대 포장한 인물이라 착각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실패는 그의 과거 행적을 제대로 간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로군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황자 게라쿠스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더니 테라스 창가 쪽으로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답답한 듯 가끔 한숨을 쉬며 말이다.
저벅저벅.
잠시 후 그가 침묵을 깨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숙을 추궁하고자 부른 것은 아니오. 사실 내가 답답한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수년 전 우리 황족과 원로원과의 세력 다툼을 기억하십니까? 완전히 대패한 탓에 우리에게 줄을 대었던 그 수많은 가문들이 숙청당하거나 지금까지도 쫓기는 신세가 되지 않았소. 그런 아픈 기억들이 다시 재현될까 봐 걱정이 되어서 이러는 거요.”
그러자 카르세크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는지요. 제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예전처럼 원로원 의원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겁니다.”
“물론 당숙의 마음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사실 금번 하류 구역 폐쇄 조치는 저들 원로원을 겨냥한 전술이 아닙니까. 하류 구역에 거주하는 수만 명으로부터 거두어들인 세금, 그 엄청난 금액이 불법적인 통로를 거쳐 원로원 의원들의 배를 불린다는 사실을 안 이상, 정말 신중하게 행동해서 그 어떤 작은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오. 이것은 기회입니다, 당숙.”
“그 말씀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황자 게라쿠스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이번엔 카르세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향후 대책을 마련해 봅시다.”
“이번엔 실수 없을 겁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하지만 게라쿠스는 여전히 불안한 듯한 얼굴이었다.
“지난번 실패 이후 아르게논의 주위에는 더 많은 용병들이 모여든다 하오. 대략 보고받기에도 그 숫자가 천 명에 달하는 것 같은데, 과연 그들을 상대로 일을 원활히 할 수 있겠소?”
“그래 봐야 늙은이들로 구성된 용병 나부랭이뿐입니다. 이번엔 정예 군대를 동원할 예정입니다. 며칠 내에 하류 구역 5구간을 싹 쓸어버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게라쿠스가 다소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쓸어버린다라, 어감이 조금 듣기가 거북하지만 마음엔 드는군요. 후후, 하지만 군대를 동원해 놓고도 또 실패한다면 원로원 의원들에게 확실한 약점을 잡히는 꼴이 될 테니, 확실히 해야 합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것이오.”
“몰론입니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정식 용병 집단들의 동향이라 생각하오. 비록 그들이 제국이 정한 법칙 내에서 활동하는 단체라지만 정작 마음 한구석에는 용병 수호자라 할 수 있는 아르게논이 자리를 잡고 있을 거요. 만일 이번 소탕 작전이 예상외로 질질 끌려간다면 수백의 용병 집단들이 아르게논에게 갈 우려가 있소. 그렇다면 자칫 큰 전쟁으로 번질 수 있으니 이 점 또한 염두에 두고 속전속결로 빨리 끝내자는 것이 내 바람이오.”
카르세크는 긴장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정녕 무서운 것은 아직도 잠잠히 있는 용병 집단들이 아닌가.
그들은 정식 등록이 되어 있기에 금번 하류 구역 폐쇄 조치에 상관 않는다지만, 내심 하류 구역에 머물며 제국의 일방적인 태도에 항거하는 아르게논의 의로운 행동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속을 꾹꾹 참고 있을 뿐.
황자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작전 대상이 아르게논 하나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다른 대상은 누구였소?”
“거긴 그다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게라쿠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듣고 싶소.”
“정 그러시다면. 그곳 역시…… 작전 실패로 끝났지만 지금은 해결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8구간 선동자 리스트에 오른 자는 아카시안이란 젊은 여성이었는데, 한 달 전인가 느닷없이 자비를 들여 하수도 공사를 하는 바람에 잠시 본부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황자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카르세크는 그런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문을 열었다.
“추후 더 많은 검사들을 보내어 완전히 소탕하려 했는데, 마침 어제 낮에 하류 구역 상주 관리소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난번 하수도 공사를 주도했던 것은 선동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마을을 위하는 의도에서였다고 말입니다. 나름대로 뒷조사를 시켜 보았더니 그녀는 선동 연설한 적도 없거니와 경호대장과 대원들은 정식으로 용병 집단을 설립한 상태더군요.”
카르세크는 말하는 도중 황자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기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저기,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그러자 황자가 다시 물었다.
“아까 전에 그 8구간 선동자 이름이 아카시안이라 그랬소.”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인적 사항도 잘 알겠군요.”
“그녀 밑에 세 명의 동생들이 있고 대략 열 명의 하류검사들이 그 집에서 숙식을 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황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물러가시오. 내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 하겠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카르세크와 호위검사 레온이 집무실을 빠져 나가자 황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휘잉.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머릿속을 관통하듯 오랜 한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니…….”
그는 두 손으로 난간을 꽉 잡더니만 안도의 한숨을 내 쉬기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