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 건물 앞마당에 유일하게 한 그루 심어져 있는 나뭇가지 위에서 새 한 마리가 꽤나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낯선 손님들의 방문을 알리기 위함이었을까?
흑색 법복을 머리끝부터 완전히 뒤집어 쓴 정체불명의 세 명의 존재들이 찾아왔다.
지드와 수장 지노는 다소 긴장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들 중 맨 오른쪽에 있는 자가 대답했다.
“우린 이곳 주인을 보러 왔소.”
상당한 포스가 실린 음성이었다. 한번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무엇보다도 주인을 보러 왔다는 말에 당연지사 지드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야만 했다.
그가 당당히 말했다.
“주인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요.”
“아카시안이오.”
깜짝 놀라는 지드.
“……무슨 일 때문이오?”
“일단 안내나 해 주시오.”
“먼저 신분을 밝히시오.”
그러자 방금 전 말했던 사내가 얼굴을 가린 법복을 벗고는 다짜고짜 반말로 말했다.
“보아하니 경호원 같은데,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당장 안으로 안내하게.”
얼굴이 확 드러난 사내에 지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자는!’
그는 지난 번 7호를 죽이려던 자가 아닌가! 당시 지드는 그의 무시무시한 반월형의 병기로부터 위기에 몰린 7호를 구하고는 기지를 발휘해 그 순간을 모면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드가 안면탈골의 뒤틀린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사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이곳을 방문했단 말인가.
그때, 사내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말로 할 때 비켜라!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그러자 나머지 두 명의 존재들 역시 뒤집어 쓴 법복을 벗었다. 한 명은 중년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2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중년인이 청년의 눈치를 보며 다소 어려워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중 가장 높은 상관은 가운데에 선 청년인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이 다소 위엄 섞인 말투로 말했다.
“게라쿠스가 왔다고 전해 주게나.”
지드는 갑자기 멍한 상태가 되었다.
‘게라쿠스라니.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가만있어 보자, 황자 이름이…….’
설마하니 팔라카스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황자가 방문하기라도 했단 말인지. 하지만 확인하기 전까지는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지드가 수장에게 귓속말로 뭐라 지시하자 그가 목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에게 손님이 왔음을 알리려 함이었다.
잠시 후, 거실에는 게라쿠스와 아카시안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아카시안은 황자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무척이나 놀란 모습이었지만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게라쿠스는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둘은 제법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는가 싶더니만, 결국 아카시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지요?”
“말투가, 내가 온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한다는 얘기인데. 하기야 그럴 만도 할 거야. 명색이 황자면서도 숙청 대상이었던 그대 집안을 지켜 주지 못했으니 원망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부디 이해하기 바라……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어. 원로원의 기세가 워낙 드세서. 후,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아는가. 헌데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하니 내 한걸음에 이렇게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오. 그나저나 아버님은?”
아카시안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돌아…… 가셨어요.”
“이런.”
“저희 남매들 살리시려고 자진하셨죠.”
“…….”
게라쿠스는 애써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카시안의 아버지는 선대 황제께서 총애했던 대신으로서 훗날 고향 지역의 총관으로 발령받았었다.
헌데 황실이 원로원의 세력에 완전히 밀리면서 그 여파가 총관에게까지 미쳤고, 결국 그런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안 됐군.”
“이젠 괜찮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현재 경호대장님 덕분에 저희 남매들은 이렇게 안전하게 있으니까요.”
“긴말할 것 없어. 당장 나와 함께 궁으로 가지.”
아카시안은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단호하게 답을 내렸다.
“전 여기 있을 겁니다.”
“뭐라고?”
“제 집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게라쿠스의 안색이 일시에 굳어졌다.
“혹시 옛날 그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 아니겠지?”
“뭔가 오해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처음부터 황자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만나 뵈면 이 말씀만큼은 분명 드리고 싶었습니다.”
황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도 가시가 단단히 서 있군. 옛날 그까짓 계집애들 따귀 몇 번 후려친 걸 가지고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가.”
“그 얘긴 더 이상 듣고 싶진 않습니다.”
“하기야 자네의 그런 당찬 그런 모습이 자꾸만 나를 더욱 끌어당기니 내가 미친다는 거지. 어쨌든 약속하지. 앞으로는 절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기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황자님께서 무슨 행동을 하든지 이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황자는 마치 아카시안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성 편력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그 유명한 바람둥이 황자, 그는 그녀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여전히 질투심에 불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카시안은 그런 그의 심중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일종의 자아도취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랄까.
일단 그의 눈에 찍히면 귀족 자녀나 시녀, 심지어 부녀자들까지도 그 탐욕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반항이라도 한다면 인정사정없이 폭행을 일삼았으니.
물론 그처럼 잔인한 습성의 황자에게도 웬일이지 함부로 행동 못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아카시안이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가 제아무리 모든 권략을 쥔 일국의 황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가 당장 가 주기만을 빌 뿐.
한편 테라스에서는 황자와 함께 왔던 카르세크와 레온이 난간을 부여잡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르세크는 뭔가 못마땅한 듯한지 다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할 일이 태산 같건만 황자님께서 고작 첫사랑을 찾아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줄이야. 허, 거참.”
한편, 대화를 받아 주면서도 레온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까 봤던 경호대장이라는 자. 그저 일개 하류검사 출신 같은데 용병단 창설 허가증을 지니고 있는 점이나, 특수부 검사 두 명을 처리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마침 대문을 통해 대원들이 앞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새로 창설한 지드 용병단의 홍보를 겸해 가입자들을 모으려고 아침나절부터 이 구간 저 구간 돌아다니다 이제야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때 레온이 그 속에서 7호를 발견하고는 눈빛을 반짝였다.
‘저자는…….’
지난번 저택의 담을 넘다 걸렸던 바로 그자가 아니던가. 어찌어찌 해서 도망갔다지만 그의 얼굴을 분명 기억 할 수 있었다.
레온이 카르세크에게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저택에 숨어들었던 쥐새끼를 기억하시는지요.”
레온의 말에 카르세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뭔 말인가.”
그가 누군가를 손짓하며 말했다.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청년 말입니다. 바로 저자가 그날 저택을 염탐했습니다.”
“뭐라…….”
그제야 카르세크가 7호를 눈여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허여멀건 얼굴에 큰 키.
특히나 강렬한 눈빛에 입술 아래에 폭 들어간 이중 턱 하며 비록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왜 이리 낯설지가 않은 건지.
가만 생각해 보니 젊었을 때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정말이지 뭐라 말로 표현하지 못할 묘한 느낌이었다.
그때 레온이 말했다.
“당장 저 녀석을 잡아 추궁해 볼까요.”
카르세크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닐세. 그냥…… 뒤를 한번 캐 보게나. 아주 자세히.”
“예? 저자를 조사해야 할 만한 무슨 이유가 있는지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게나.”
“알겠습니다.”
얼마 후 황자 일행은 돌아갔다. 지드는 방문자가 대체 누군지 아카시안에게 물었고 그가 진짜 황자였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가을 하늘이었다. 이토록 세상은 환하고 상쾌한 공기로 가득하건만 그 아래 인간들의 세계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둥! 둥! 둥! 둥!
착! 착! 착! 착!
수도 성문을 통해 나오는 군단 규모의 정예 군사들, 맨 선두에는 팔라카스 제국의 상징이자 문양인 독수리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백마 탄 보랏빛 망토의 지휘관들이 당당히 앞을 나서고 있었다. 다소 비쩍 마르고 날카로워 보이는 화려한 보호대로 잔뜩 치장한 은빛 군장의 중년인, 그는 카르세크였다.
이번 5구간 섬멸 작전을 위해 직접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옆에는 언제나 그를 철통같이 경호하는 레온이 보였고 반월형 병기가 햇빛이 번뜩이며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군단 행렬은 용병 거주지 상류 구역과 중류 구역을 지나서 하류 구역의 초입 구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르세크는 일단 행군을 멈추도록 지시했고 각 대대 지휘관들을 소집한 뒤에 저 앞에 내려다보이는 하류 구역을 살펴보았다.
“상황은 어떤가.”
카르세크가 묻자 작전 참모로 보이는 자가 즉각 대답했다.
“예상대로 초입이라 할 수 있는 제1구간부터 장애물들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그러자 카르세크의 인상이 굳어졌다.
이들의 목표는 구역 한가운데 위치한 제5구간의 아르게논과 그의 추종자들이건만 다른 여러 구간의 주민들이 통로를 막고는 군단의 행군을 방해하려 했다.
“이것들이 한번 해보자 이거지? 좋다, 제1대는 돌격 병사들에게 횃불을 준비시켜 길을 막는 그 어떤 방해물이건 태워 버리도록 명하라! 그래도 계속해서 대항을 한다면 그 본보기로 주변 집들도 다 불 질러 버려라!”
“네, 알겠습니다.”
참모는 명령을 받고 즉각 행동에 개시하러 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저 아래 초입 구간 여기저기에서 검은 연기가 피워 올랐고 사람들의 통곡이 8구간 언덕까지 들려왔다.
지드와 대원들은 판잣집 지붕에 올라가서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사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비단 이들 뿐이던가.
5구간을 제외한 주변 구간의 모든 판잣집 지붕이 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 그들 역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5구간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저들이 무너지면 그 다음에는 자신들이 희생양이 될 테니 가슴을 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드는 저 멀리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피어오르는 것을 보다 보니 가슴속으로 답답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제국의 군대의 뻔히 제압당할 것을 알고도 항거하는 아르게논과 그의 추종자들, 대체 승산 없는 싸움에 왜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하는지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번 우연찮게 그를 만나고 들은 얘기가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고 잊고 싶었던 고된 하류 구역에 귀환한 내 모습에 그제야 깨달았지. 인간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명예와 권력보다도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고. 사실 이곳에 머물며 아직은 그게 뭔지 해답을 찾는 중일세. 하지만 결국 여기에다 뼈를 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네.”
솔직히 지드는 아직도 그 말이 뭘 뜻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고 별다른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그처럼 추앙을 받고 있는 영웅이 뭐가 아쉽기에 늘그막에 열악한 환경의 구렁텅이로 들어와서 일부러 희생하려는 걸까.
다소 갑갑할 뿐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수장 지노가 뭐라 중얼거렸다.
“아이고! 저 제국 놈들이 실성들을 했나! 설마 했는데 진짜 아르게논 님을 치러 갈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부 대륙의 모든 용병들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영웅을 죽이러 가다니! 에잇,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그러자 철없는 아레스가 다소 납득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영웅일지라도 제국에서 시행하는 법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격이니, 그건 좀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7호가 불끈했다.
“그래서 내가 너같이 호의호식하며 자란 귀족 출신들을 재수 없다고 하는 거다! 저분 역시 하류 구역 출신이야. 자신의 고향이 짓밟히고 불쌍한 주민들이 쫓겨날 판인데 마음이 편하시겠냐! 쯧쯧, 하기야 그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로운 일을 하려는 그 숭고한 정신을 네놈이 알 턱이 있겠냐!”
아레스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 되었다 싶어 입을 쏙 다물고는 가만히 있었다. 사실 이 순간 가장 뜨끔한 사람은 지드 그 자신이었다.
그 역시 아레스의 생각과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명색이 대장이란 위치에 올라놓고도 세상물정이나 대의명분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나 할까.
물론 그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임무, 아카시안과 그 남매들을 끝까지 보호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1호 비스크가 오른쪽 높은 구릉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좀 보세요!”
그의 말에 지드와 대원들이 일제히 그쪽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용병 차림의 검사들 수백여 명이 언제 나타났는지 저 아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지드는 그들이 제국의 정식 등록 용병 집단 소속이 분명하다 생각했다.
비록 저 아래 벌어질 전투가 자신들과 상관은 없다지만 그래도 용병 수호자로 불려 왔던 아르게논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1호 비스크가 저들을 의식한 듯 뭐라 불만을 표명했다.
“저 자식들! 정말이지 너무들 하는군.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그래도 아르게논 님은 용병들의 우상이자 정신적인 지주라 할 수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는 꼴이란! 쯧!”
2호 게리가 힘없이 말했다.
“우리 역시 저들과 별반 다를 게 없잖소. 남의 불구경하듯 가만히 지켜보는 건 마찬가지이니.”
게리는 한마디하고 축 늘어진 어깨로 지붕 아래로 향했다. 다른 대원들 역시 힘없는 표정들이었고 하나 둘 내려갔다.
지붕 위에 남은 사람은 지드와 수장 지노 이렇게 두 사람이었다. 수장이 지드에게 말문을 열었다.
“녀석들의 행동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마도 아르게논 님 같은 분이 제국의 위협에 고스란히 당할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본다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그러는 것일 겁니다.”
“…….”
지드는 그저 침묵만 지킬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수장 지노마저 내려가자 남은 사람은 지드 한 사람뿐이었다.
저 멀리 검은 연기가 피워 오르는 지역이 확산될수록 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두 주먹을 쥐기까지 했으니
그 역시 심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였다. 모두가 다 내려간 지붕 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니던가.
지드가 다소 놀라 주위를 돌아보니 굴뚝 뒤로부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피식 웃는 다소 빤질거리는 카르발디, 그가 지드에게 다가왔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쇼. 후후.”
지드는 심중을 읽힌 듯 다소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무슨 말이지?”
“남의 싸움에 껴들지 말라는 거요. 지드 대장은 용병단 창설 허가증을 가지고 있으니 이번 제국의 용병 거주지 폐쇄 조치와는 아무 상관없잖소.”
“그대야말로 남의 일에 상관 말고 본인 일에 신경이나 쓰시오.”
“내가 머무는 용병단인 만큼 당연지사 신경을 써야 하겠죠? 그나저나 내게 확실한 직급이나 알려 주쇼. 요즘 들어서 당신 부하들이 나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도대체 당신 같은 자가 무엇이 모자라 왜 여기에 머무는 건지 모르겠군.”
“대장도 알다시피 나는 용병단 허가증 얻는 것을 실패 했지 않소. 이제는 모든 여비도 떨어지고 고향 가기도 창피해서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거요.”
그 말에 지드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했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친구는 아닐지라도 사정이 그러하니 매몰차게 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카르발디는 지드의 속마음을 꿰고는 실실 거렸다.
“고맙소! 헤헤.”
“난 아직 아무 말 안 했소.”
“그대 표정이 말하고 있지 않소. 후후.”
“여기 오래 있으려면 그 웃음소리부터 고치쇼.”
지드가 한마디하고 지붕 아래로 향하자 카르발디는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내가 도움이 될 거요.”
“…….”
그 후 카르발디는 남부 대륙의 용병 거주지 광경을 눈에 담으며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실전 흑검사 감독관으로 내려왔다가 특이한 검술을 사용하는 지드를 발견하고는 그를 관찰하려고 접근해 온 것까지는 그런대로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 한 가지 우려되는 일이 있었으니.
‘이 멍청한 작자가 설마 저들 싸움에 껴드는 건 아닐 테지? 만에 하나 그렇게 한다면…… 그땐 어떡하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 바보가 아니고서 그런 결정을 할 리는 없을 거야.’
한편, 5구간 코앞까지 도착한 카르세크와 그의 군대는 일단 이곳에서 주민들 건물을 강제로 빼앗아 임시 숙영지를 정하기로 했다.
설마하니 5구간 주민들 모두가 피난은커녕 제법 확실한 방어 시설들을 만들어 저마다 녹슨 검이나 괭이로 무장하고, 또 아르게논과 그의 추종자들에 섞여 전투 준비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 중에는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 그리고 늙은이들까지 있었는데 아마도 하류검사인 가장을 따라서 대항하다가 함께 죽으려고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카르세크는 내심 찜찜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늙은 영웅 하나와 그의 추종자들만 깨끗이 싹 쓸어버리려 했건만…….
“재수 옴 붙었군. 빌어먹을!”
설령 이번 작전이 성공을 거둘지라도 나중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학살을 했다는 일이 알려지면 필시 원로원에서 트집을 잡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우물쭈물하다가는 괜히 일만 그르칠 수 있었다.
당장 공격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참모진에게 간략하게 말했다.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일단 여기서 하루 쉬고 내일 새벽 일찍 총공격을 시행할 것이니 각자 만반의 준비들을 갖추기 바란다.”
각 지휘관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카르세크가 자신의 막사로 향하자 레온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
그날 밤, 제17대 지휘관 숙영 막사 안에는 제5지부 수장 대공 자라투스와 그의 참모 카이 그리고 호위검사 테세우스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 역시 특수검사부 자격으로 금번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사령관이자 제1수장인 카르세크의 의해서 후방 지원 17대에 배정받고는 무척 기분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
“나 참, 명색이 특수부 검사 수장인 내가 지원 부대에서 식량 배급과 여타 지원 임무만 하게 생겼으니! 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이 빌어먹을!”
참모 카이는 대공의 심기를 어떡하든 달래려고 안달을 하고 있었다.
“대공께서 원로원파이니 당연지사 경계를 하겠죠. 아마 이번 전투에는 직접적인 참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말이야. 나를 양파와 감자 부대 자루만 잔뜩 있는 이곳 17대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완전히 조롱하는 처사가 아니고 뭔가! 하다못해 후방 진격부대 대장으로라도 배정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까 5구간 방어 막 안쪽을 들여다보니 늙은 용병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상당수 많이 포함되어 있더군요. 그들을 상대로 정예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한다는 것이 과연 내키는 일일까요?”
“그거야, 그러니까…….”
“거 보십시오. 대공께서도 꺼림직 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인데 이번 전투는 지금처럼 뒤에서 그저 지켜보는 것이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 전투는 승리를 해도 꽤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 같습니다.”
대공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지고 있었다. 카이는 바로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테세우스에게도 공감을 얻으려는 말을 건넸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않은가.”
얼떨결에 대답하는 테세우스.
“아, 예.”
“거 보십시오. 이 친구도 그렇다고 하잖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하기야 이번 일에 내가 나설 명분은 애초부터 없었지. 사실 원로원에서 바라는 것은 이 전투가 실패로 끝이 나서 카르세크와 더 나아가 황실이 궁지에 몰리는 것일 테니까.”
“사실 대공님과 우리 지부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순간 대공이 손가락으로 카이의 입을 막았다.
“쉿! 조용히.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을 모르는가.”
“조심하겠습니다.”
한편 테세우스는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심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시 이런 암투와 술수가 존재한단 말인지.
그가 몸담았던 대자객신전이나 제국의 특수검사부나, 정말이지 그 안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 어느 것이든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이튿날 새벽.
총공격을 앞둔 군단 중앙에 임시로 마련된 사령관 막사가 보였다. 카르세크는 참모진들과 함께 첫 명령을 내리기 전 최종 점검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전 참모로 보이는 자가 제5구간 방어 형태에 관해서 간략하게나마 보고를 했다.
“화공(火攻)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저들이 요새 담벼락 전체를 진흙과 지푸라기를 섞은 회반죽을 덕지덕지 발라 놓았기 때문입니다. 5구간으로 통하는 입구는 총 3개로, 정면에 보이는 것 하나와 각각 동서(東西)쪽에 하나씩 더 있습니다. 물론 그곳은 저들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노병들이 집중해서 지키고 있고 마을을 둘러싼 방어벽 뒤에는 노병들과 주민들이 섞여 대항할 준비를 갖춘 듯 보입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카르세크가 손으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5구간 쪽을 살펴보았다.
“흠, 저들의 총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 보게나.”
“대략 천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주민들까지 합쳐서 말일세.”
“주민들까지라면 약 사천여 명쯤 될까요.”
다시 굳어지는 카르세크의 표정.
“빌어먹을!”
만일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할지라도 용병들 뺀 나머지 3,000여 명의 주민들마저 학살해야만 하는 큰 부담이 그의 머릿속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참모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제5구간 주민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알리게나. 지금이라도 그곳을 빠져 나온다면 살 수 있다고. 당장!”
잠시 후 한 장교가 5구간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카르세크의 명령으로 최후의 통첩을 알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우렁찬 음성이 몇 번을 반복해서 쩌렁쩌렁 울렸음에도 그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잠시 후 상황을 지켜보던 카르세크는 결국 특단의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전쟁 기록관에게 전투 일지 첫 페이지에 다음의 내용을 기록할 것을 명했다.
“난 분명 주민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건만 저들이 그것을 거부했음을 명확히 기록하게나. 태양이 오전의 햇살을 드러내기 전 이른 새벽에 공격을 감행했노라고 말일세.”
기록관은 묵묵하게 카르세크의 지시대로 그 내용을 받아 적을 뿐이었다.
이윽고 공격을 알리는 나팔 신호가 울려 퍼졌고 방패로 무장한 돌격 전사들이 제일 먼저 진군했다.
그 뒤를 정예 병사들이 따랐다. 병력은 대략 5,000여명으로 방패와 긴 창, 그리고 백병전을 대비한 장검으로 무장한 그야말로 팔라카스 제국의 최강 보병 군단이었다.
이곳 하류 구역이 협소 이유로 기병대는 출동하지 않았고 오로지 보병들만이 저 허술해 보이는 방어벽을 뚫고 순식간에 함락할 기세였다.
와와!
“방어선이 뚫리면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
“선두진에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라고!”
“빌어먹을! 저들의 반격이 생각보다 강해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겠어.”
“성벽도 아니고 고작해야 마을 수준의 담벼락인데, 대체 뭘 꾸물거리는 거야!”
뒤에서 엉겨 붙어 밀어 제치는 후방 부대원들이 투정을 부리자 선두진에서 성질을 냈다.
“빌어먹을 새끼들! 네놈들이 한번 선두로 나와 봐라. 늙은이들이 예상치 못한 강력한 검술을 시전하고 아군들이 그저 속수무책 당하고 있단 말이다!”
챙챙!
휙! 획! 휙! 휙!
“악!”
선두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5구간 담벼락 안으로부터 무수히 날아오는 병기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선봉진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초장부터 병사들의 투구와 팔과 다리가 절단되는 끔찍한 광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전방과 후미 쪽에 있는 지휘관들끼리 예기치 않은 사태에 긴급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획! 획!
“병사들을 뒤로 물리라니까!”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물러나란 말이냐!”
“젠장, 앞 상황을 몰라!”
“지휘부 상관이 무조건 진격하라는데 어쩌라고!”
“아악!”
그 와중에 대화를 나누던 선두 지휘관의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붕! 붕!
치열한 전투 현장 상공 위로 날고 있는 무수한 병기들, 그것들은 각기 제국 병사들을 마음껏 유린한 뒤에야 주인들에게 돌아갔다.
첫 전투부터 제법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낸 군단 선봉 부대는 아직도 정신을 자리지 못한 듯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생각도 못한 상황이랄까. 하지만 5구간의 반격의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였다.
“발사!”
슉! 슉! 슉! 슉!
5구간 진영의 담벼락 안으로부터 화살들이 빗발치듯 쏟아져 나왔다.
미처 방패 대열을 이루지 못한 병사들의 가슴과 목에 팍팍 박히기 시작했다.
“악!”
“으악!”
이어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들!
팍! 슈우욱! 쿵!
사람만 한 돌덩이들이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처참하게 압사당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놀랍게도 저들은 투석기(投石機)마저 갖춘 듯했다.
마치 공성전투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저항이 훨씬 강했던가.
그제야 병사들은 저마다 두려움이 가득했는지 감히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가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한편 후방 지휘 본부에 있던 카르세크와 참모진들은 무척이나 당혹해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급기야 퇴각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곧이어 뿔 고동 소리가 연거푸 두 번이 울려 퍼지자 제국 병사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일시에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전투는 아르게논이 이끄는 5구간의 승리였던가.
그 안에서 기쁨의 함성이 들려왔다.
와! 와! 와와―!
어디 그뿐이던가. 그들의 승리는 주변 높은 지역에 위치한 다른 구간들 주민들에게도 생생히 목격되었으니 이는 곧 하류 구역 전체의 기쁨이기도 했다.
8구간에서 건물 지붕 위로 도로 올라가 있던 지드와 대원들 역시 마치 자신들이 승리를 한 듯 서로를 끌어안고 함성을 질렀다.
그들 모두는 이제야 알았으리라.
용병대장 아르게논이 왜 수십 년 전 영웅으로 불렸는지 말이다. 방금 전 전투에서도 증명이 되었다.
그를 추종하는 옛 늙은 용병들의 전투력이 아직 시들지 않았음이 분명했고, 궁수와 투석기를 동원한 체계적인 대응 역시 일국의 군단장 체제하에서나 나올 법한 전술이었다.
지드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전투 현장을 지켜본 이유도 있겠지만 그의 눈앞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는 늙은 영혼들이 매우 인상 깊게 각인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대장을 보호하려고 모여든 옛 전우들, 사실 그들 모두가 어느 정도의 공력검술 시전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아는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한편, 지드는 감동을 느끼면서도 늙은 용병들이 전투 시에 시전했던 기상천외한 검술이 지난번 두 자객들이 사용했던 검술과 같음에 호기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체 무슨 검술이지?’
***
그날 저녁 카르세크의 지휘막사에는 레온을 위시한 특수검사부 관계자들과 군 참모진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쾅!
그 큰 탁자가 부셔질 정도로 카르세크는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선발진을 비롯한 후방 지원 부대까지 그까짓 작은 구간 방어 담벼락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지리멸렬 도망칠 수 있나! 그러고도 명색이 제국 정예군들이 말인가!”
“…….”
참석한 지휘관들은 저마다 꿀 먹은 벙어리인 양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으니, 그들 역시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회의 막사 맨 뒤쪽에는 대공과 카이 그리고 테세우스의 모습도 보였다. 특히 대공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보아서는, 금번 전투 실패에 대한 것에 나름대로 흡족해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흐흐.”
그런 그의 모습을 카이가 곁눈질로 보다가 마지못해 귓속말로 속삭였다.
“대공님, 제발 표정 관리 좀 하세요.”
그러자 대공이 놀란 듯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때 다시 들려오는 카르세크의 쩌렁쩌렁한 음성.
“성급한 공격 명령을 내렸던 내게도 잘못이 있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대체 저들이 어떻게 하류 구역에 궁수 부대를 끌어 들이고 투석기마저 갖출 수 있나! 세상에 명색이 비밀 정보부서라 할 수 있는 특수검사부 수장인 내가 정보 싸움에서부터 패하다니, 이거 원! 지금부터라도 그 아르게논이라는 자에 대해 아는 대로 얘기해 보게나. 그가 태어난 곳, 습관과 하다못해 식성과 즐겨 먹는 것들까지, 모조리, 모조리 다! 그리고 아까 늙은 용병들이 사용했던 그 이상한 검술도 말일세.”
“…….”
그 질문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참모진들 대부분이 30대 중반으로서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활약했던 일개 용병대장에 대해 알 리가 만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게논은 어디까지나 용병들의 영웅일 뿐 제국에서의 그의 존재는 그다지 큰 비중은 아닌 듯 보였다.
카르세크가 답답한 듯 한숨을 짓자 그제야 뒤에 있던 호위검사 레온이 앞으로 나서 조심스럽게 그에게 속삭이듯 말문을 열었다.
“아르게논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순간 카르세크의 눈빛이 번쩍였다.
“회의가 끝나고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카르세크는 아무런 결론도 없이 회의를 끝냈고 참석자들은 자기 진영으로 모두 돌아간 상태였다. 그리고 대형 막사에는 카르세크와 레온만이 남아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까 아르게논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고 그랬지?”
“예, 그렇습니다.”
“어디 말해 보게나.”
“우선 아르게논과 그의 늙은 용병들이 전투 초반에 사용했던 검술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아르게논이 스스로 창안한 기술로서 자연의 포스와 신체 공력을 융합시킨, 일명 공력검술(空力劍術)이라 불리는 검술입니다. 폭풍 용병단의 소수만이 시전 가능했다고 전해집니다.”
카르세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력검술이라. 흠,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군. 검들을 날려 보내어 상대를 공격하고 마치 부메랑의 원리처럼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검술이라고 말일세. ……아, 그러고 보니 자네의 반월형 병기 역시 같은 원리가 아니던가?”
“사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 이렇게 개인적으로 뵙자 한 것입니다.”
그제야 카르세크는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더욱 기울였다.
“계속 해 보게.”
“사실 공력검술이란 말 그대로 공력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검을 조종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방금 전 부메랑의 원리라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것보다도 신체 내부의 공력의 힘으로 조종될 수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용하는 반월형 병기 역시 사실 공력검술에 일종이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에 카르세크가 깜짝 놀랐다.
“자네도 말인가.”
“하지만 아르게논의 공력검술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고 할까요. 굳이 명칭 하자면 공력변환기술(空力變換奇術)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력변환기술이라니?”
“기존의 공력검술로부터 훨씬 진화(進化)된 기술이랄까요. 원래의 신체 공력에 자연의 포스가 가미됨으로써 그 위력이 족히 수배는 강해졌고 또한 검에만 유용했던 기술이 변환되면서 각종 병기들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력변환기술입니다.”
카르세크는 마치 레온으로부터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더욱 호기심 어린 얼굴을 했다.
“흠,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하군. 그나저나 자네는 어떻게 익힐 수 있었나.”
“사실 폭풍 용병단 부대장이 제 조부님이 되십니다.”
“뭐라!”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조부님은 아르게논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아르게논의 공력검술은 그 혼자 창안한 것이 아니라 조부님과 수년 동안 함께 수련하면서 얻은 결실입니다. 검술 탐구욕이 강하셨던 조부님께서는 아예 깊은 산중으로 은둔하시어 평생을 공력검술 연구에 몰두하셨고 끝내 공력변환기술을 완성시키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조부님이 재창안한 기술을 이어받게 된 거고?”
“네, 그렇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내용일세. 게다가 자네 조부님과 아르게논과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이거 의외로군.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봄세. 현 상황이 자네 조부님과 절친한 친구였다던 아르게논과 그의 옛 폭풍 용병단 전우들을 소탕하려 하는데, 아무런 동요도 없는가?”
그러자 레온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뭔가 결의 찬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조부님으로부터 공력변환검술을 익히고 세상에 나온 이유는 바로 아르게논에게 빚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그가 제 조부님을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내쫓다니?”
“그는 공력검술의 창안을 완전히 자기 공으로 돌리려 했었는데 유일하게 자신과 대등한 실력을 갖춘 부대장이자 친구가 항시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결국 어느 날 그는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아서 조부님을 강제로 탈퇴시키고는 개인적으로도 절대 공력검술에 대해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 협박까지 했답니다.”
카르세크가 다소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게논은 매우 의롭고 우정을 아는 자라 얘기를 들었는데, 설마 그가 친구를 그런 식으로 대했겠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영웅이란 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자면 보통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추악한 이면이 있기 나름입니다.”
카르세크가 동조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동감일세. 겉으로 보여 지는 것에 중점을 두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 말일세. 사실 그런 작자들이야말로 더 재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허상을 만들고 마음 내키는 대로 영웅이란 용어를 갖다 붙이며 추앙하지! 정말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라고!”
“그럼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공격시에는 저와 제 직속 수하들을 선봉에 서게 하여 주십시오.”
“선봉이라고?”
“아르게논과 그 추종자들이 공력검술로 대항하면 저와 대원들은 공력변환검술로 맞대응을 할 생각입니다.”
“오호라, 그렇게 해 주겠나?”
카르세크의 화색이 모처럼만에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
이튿날 오전.
레온을 위시한 특수검사부 선발진들이 가세함으로써 전투는 초반부터 더욱 치열해졌다.
소위 공력변환기술이란 신개념의 전투력은 가히 아르게논과 늙은 용병들의 공력검술을 압도했으며, 그 기세를 이어 제국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5구간의 방어벽에 달라붙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와와!
홱! 홱!
“아아악!”
어제와는 달리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5구간의 형세가 급격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첫 전투에서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용병 궁수들의 활 공격 역시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제국 병사들이 이미 수도 성문 안으로부터 공수해 온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그 뒤로 몸을 숨기고 한 발씩 전진해 들어온 탓이었다.
용병들과 주민들이 힘겹게 만들었던 투석기들 역시 돌들을 발사해 봤자 저들의 두툼한 방어 체제에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하고 점차 그 활용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온의 반월형 병기와 그의 직속 부하들이 날리는 각종 무기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용병이고 주민이고 할 것 없이 무차별적인 살육의 파티가 벌어졌다.
게다가 제국 병사들의 투창이 하늘을 은빛으로 수놓으며 안쪽 진영으로 떨어질 때 또다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으니,
한마디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엄마, 살려 줘!”
“아가야!”
“아버지!”
“거기서 꼼짝 말고 가만있어! 빌어먹을, 숨어 있으라니까!”
늙은 용병들이야 전장에서 싸우다 죽으면 그나마 명예로운 가치로 남을 수 있다지만, 5구간 주민들은 끔찍한 학살을 당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각자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려고 의로운 결심을 하고 끝까지 남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피를 쏟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
결국 그 자신 역시 땅바닥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테고, 혹여나 아내와 아이들이 곁으로 다가와 절규를 하는 광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레온의 특수검사부나 군인들은 전쟁터에 당당히 껴들었던 주민들에게 동정심을 던져 줄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들 눈에 보이는 하류 구역 거주자들은 사냥터의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여겨졌을까.
담벼락들 중 어느 한곳이 무너지고 돌격 병사들이 그 안으로 침투했을 때 제국군의 서슬이 시퍼런 무기들은,
상대가 어른이던,
심지어 상대가 아이이던,
아무렇지도 않게 무차별적으로 마구 휘둘러졌다.
“아아악!”
“담벼락이 무너지면 모조리 쓸어버려!”
각 중대 지휘관들은 이미 살육의 악마가 되어 부하들에게 철저한 학살을 요구했다.
감히 제국에 맞서 대항한 이 하찮은 하류 구역 주민들이 그렇게도 혐오스럽고 증오심마저 가득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 죽여 버리라고! 에잇!”
파팟!
“끄아아아악!”
정말이지 참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주변 구간 판자 지붕을 가득 메운 주민들은 생생한 전투 현장을 지켜보면서 여기저기 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특히나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대항이라도 할 요량으로 돌멩이를 던지려고 몸부림치는 광경에서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뿌리는 주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 남자들만큼은 당장이라도 아무 무기나 하다못해 농기구라도 들고 뛰쳐나가 저들과 함께 싸우다 죽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처자식들을,
그들의 꽉 부여 쥔 손을,
그들의 그 애처로운 표정과 떨리는 두 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실상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8구간의 지드와 대원들 역시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대원들 중에는 성질 급하기로 하면 1호 비스크와 7호 이든이 막상막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주먹으로 벽과 바닥을 내리치며 뭐라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당장 나가서 싸웁시다. 언제까지 여기서 구경만 할 겁니까!”
“맞아요! 이렇게 가만있다가는 5구간 주민들은 전부 몰살당하고 말겁니다. 창피하지도 않아요? 아르게논 님과 용병들 모두가 저토록 힘겹게 사투를 벌이는데 팔다리 멀쩡한 우리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수수방관하다니!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드는 그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
그 역시 속이 타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였으리라. 경호대장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절로 입술을 깨물게 된다.
왠지 모를 분노가 저 가슴속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때 수장 지노가 흥분한 대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다들 진정하라고! 어차피 전투는 제국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으니까 지금 껴들어 봐야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1호 비스크가 외쳤다.
“그럴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대장님과 수장님, 정말 비겁합니다!”
순간 그토록 순박해 보였던 수장이 안색이 확 굳어졌다. 지노가 비스크에게 달려가더니만 그의 멱살을 잡고 속으로 꾹꾹 눌렀던 감정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말이면 다하는 줄 알아! 그래 네 말대로 저들의 전쟁에 껴들었다 치자! 그리고 개죽음을 맞이했다 치자! 그 뒤를 생각해 봐. 네놈 하나를 믿고 겨우 살아가는 처자식들은 통곡을 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걱정하겠지. 너만 아니라 우리들 다 그렇단 말이다. 누군 마음이 편해서 이러고 있는……!”
악다문 잇새로 분노가 치밀어올라 말조차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스크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더니만 그 큰 덩치가 울기 시작했다.
“그냥 죄 없이 죽어 가는 애들이 불쌍해서 이럽니다. 불쌍하다고요! 흑흑!”
이에 침통한 표정을 하는 지드, 대원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저 아래 5구간으로부터 점점 크게 들려오는 제국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이들의 절망감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
와와!
“서쪽 담벼락이 무너졌다!”
“중앙도!”
“전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소탕해야 할 것이다!”
팍!
“아악!”
슥 삭.
“우욱!”
그야말로 함락 위기에 몰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아르게논과 늙은 용병들은 붉은 선혈에 빨갛게 적셔진 수염을 날리며 마지막까지 투혼을 보여 주고 있었다.
“네 이놈들! 여자와 애들은 손대지 마라!”
삭!
“악!”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하지만 무패의 전설 아르게논도 병사들 몇 명을 더 해치우고 나자, 거의 기력이 떨어졌는지 거친 호흡을 갈무리하지도 못했다.
그가 하늘을 보며 탄식을 했다.
“결국 이렇게 막을 내리는 건가. 아아…….”
자포자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지만,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적들 뒤편으로부터 함성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요새 안으로 밀고 들어 왔던 제국 병사들은 후방 쪽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함성이 들려오자 저마다 당황한 얼굴들이었다.
“뭐, 뭐야!”
“지원군이 끊어진 것 같은데?”
“혹시 후방이 공격 받고 있는 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들려오는 나팔 소리.
뿌우― 뿌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나팔 소리는 정확히 두 번이었다.
퇴각을 알리는 신호다.
“빌어먹을! 거의 다 이긴 전투였는데 후퇴라니!”
“당장 감세! 퇴로가 끊어지면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단 말일세.”
이번 전투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레온과 직속수하들 역시 뭔일인가 하고 병사들 틈에 섞여서 뒤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후방 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리가시 용병단이다! 각자 대열을 정비하고 조심하라!”
그 말에 레온이 눈빛이 번뜩였다.
“이리가시 용병단이라니…… 그들이 왜.”
***
절체절명의 순간 이리가시 용병단의 등장으로 구원의 손길을 받은 제5구간, 아르게논과 늙은 용병들 그리고 주민들은 무려 700여 명에 달하는 그들의 입성을 열렬하게 환호했다.
너무 격한 감격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요새 안 아르게논의 집무실에는 용병대장 이리가시가 착석한 가운데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호! 그대와 용병들 덕분에 겨우 막아 낼 수 있었소.”
대략 40대 후반의 중년인 이리가시는 고령의 아르게논이 직접 손을 잡아 주며 감격에 겨워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늦게 합류한 점을, 정말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아니오!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온 그대의 용병단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설마하니 그대가 움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오.”
“비록 저희가 제국 산하 등록 용병단이라지만 지금부터는 실리와 이익을 떠나서 의로운 싸움을 하시는 아르게논 님과 뜻을 같이 할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칠백십이 명의 대원 모두가 피의 서약을 하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르게논 님을 오래 전부터 존경해 왔고 오늘에 와서 함께 한다는 자체에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받아 주시어 저 무지막한 제국 놈들에 대항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거 정말 감사하오.”
잠시 후 그가 집무실 밖으로 사라지자 아르게논은 마치 천군마마라도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리가시 용병단이라면 요즘 시대에 있어서 용맹하기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나름대로 여러 무용담을 만든 바로 그 주인공들이 아닌가.
마치 그 옛날 폭풍 용병단처럼 그들 역시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크고 작은 전쟁에서 수많은 숱한 일화를 남겼던, 그리고 대륙을 종횡하면서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서 가끔은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이끌어 냈던 꽤 유명한 용병 단체였다.
집무실 한쪽 문에서 휘장을 걷고 등장하는 노인이 있었다. 그가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아르게논이 그를 맞이했다.
“티온. 어서 오게나.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보려던 참이었네.”
“나를 말인가. 뭣 때문에…….”
다소 냉혹하게 생긴 몰골에 말투마저 퉁명스런 노인이었다. 아르게논이 말했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면 이젠 인상 좀 풀고 다니게나.”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라고.”
“살면서 고치면 어디 탈나나.”
“자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신경 쓰시게나.”
“하여간 그놈의 성질은 여전하군. 어언 육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으니. 쯧.”
“이른 아침부터 괜한 시비 말게나. 그렇지 않아도 갑갑하던 참인데.”
“시비라고 생각하나? 거참, 무슨 말도 못하겠군.”
“용건이나 말하시게.”
티온은 폭풍 용병단 돌격대장으로서 아르게논에게는 친구이자 오른팔 같은 존재였다.
워낙 괄괄하고 차가운 성격 때문에 일명 ‘독사의 피’라는 별호로 세인들에게 더 유명한 자였다.
아르게논이 말문을 열었다.
“정말 뜻밖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뭐가 말인가.”
“이리가시 용병단이 합류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하늘이 우릴 버리지 않으셨음이 분명함세.”
그러자 티온이 뚱한 얼굴을 했다.
“물론 그들의 합류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열세에 놓인 전세에 그리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네.”
“또 부정적으로 말하는군.”
“난 언제나 보이는 현실과 있는 사실대로만 말하네.”
“물론 자네 말대로 칠백여 명이 합류했다고 당장 제국 군대 병력을 능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용병들과 주민들 사기가 높아질 테고 그에 따른 희망 역시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희망은 무슨 얼어 죽을 희망.”
“사람 참. 들어보게나, 내 말 뜻은 파급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얘기이네.”
“파급 효과라니?”
아르게논이 눈빛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서 중요한 내용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이리가시 용병단이 움직였다면 다른 용병단들 역시 그리 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내 추측이긴 한데, 자넨 어찌 생각하나. 그들 모두의 병력이 합친다면 자그마치 수만 명에 달할 테니 그들만 움직여 준다면 아무리 제국이라 할지라도 심사숙고하게 될 테지.”
“…….”
티온 역시 그의 말에 동했는지 잠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골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리가시 용병단이야, 그동안 대외적으로 저들이 해 왔던 방식대로 열세에 놓인 대상에 합류해서 극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약 큰 명성을 노렸던 집단이 아닌가. 그 외에 다른 모든 용병단들은 오로지 실리와 이익만 추구하는 전형적인 제국 소속형 단체라 할 수 있으니 고작 그 한마디로 그들이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물론 이리가시 용병들 역시 이곳으로 합류한 결정만큼은 무모했음을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되겠지. 도저히 승산 없는 전쟁에 뛰어든 자신들의 모습 말이야.”
결국 아르게논은 고개를 휘휘 내젓고 말았다.
“후우! 자네란 인물은 어찌 보면 냉철한 판단력을 갖춘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재수 없는 작자일세. 그저 눈에 보이는 현실과 오로지 사실적 관점에만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하니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말일세.”
그 말에 굳은 표정을 유지해 왔던 티온이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허허”!
“자네도 웃을 때가 있었던가. 하여간 이때만큼은 천진한 인간으로 보이는군.”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함세.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자네를 긴히 찾아온 이유부터 말함세. 잘 듣게나.”
“한번 해 보게나.”
“오늘 전투 초반에 은빛 머리칼의 젊은 녀석과 그놈의 수하들로 보이는 검사들을 기억하겠지.”
그 말에 아르게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물론 기억하고말고.”
“그럴 테지. 그자들이 공력변환기술을 시전했으니.”
“…….”
아르게논이 다소 침울한 기색으로 말이 없자 티온이 계속해서 말문을 열었다.
“결국 하메스 그 자식이 일을 저지를 줄 알았네. 참으로 그런 사악한 인간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걸세. 사실 자네는 나보다 그자와 더 절친했지 않은가. 같은 하류 구역 동향으로서 거의 반평생을 함께 지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쉽게 배신을 하다니.”
아르게논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얘기는 그만 두게나.”
그러자 티온이 더욱 언성을 높였다.
“자네가 평생을 기울여 재완성한 공력변환기술이 아까 낮에 그 은발머리 녀석을 통하여 버젓이 등장했는데 내가 흥분하지 않게 생겼는가! 우리 폭풍 용병단은 자네의 공력검술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네. 그리고 자네가 공력검술을 재차 보완한 공력변환기술을 이론적이나마 완성 단계에 올렸을 무렵! 그 망할 자식 하메스가 모든 비전 내용을 훔쳐서 야반도주했지 않았는가. 이런 빌어먹을! 역시 그놈은 규칙대로 목을 베어 버렸어야 했어! 갑자기 자네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빌어먹을! 그놈을 죽였어야만 했는데!”
쾅!
티온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문.
“아직도 그때 자네의 행동이 납득이 가질 않아. 그 잘난 옛 우정과 측은함마저 떨쳐 버리지 못했는지 그를 놔주었단 사실 말일세. 그것도 모자라 자넨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공력변환기술의 모든 정수를 그가 가져가도록 허락까지 했지!”
결국 아르게논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지난 일이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
하지만 티온의 음성이 더욱 격앙되었다고나 할까.
“그저 지난 일이라면 내 굳이 그때 얘기를 꺼내지도 않을걸세. 문제는 당시 그놈이 가져갔던 공력변환기술이 오늘날 세상에 등장했다는 점일세.”
“…….”
이번만큼은 아르게논이 침묵을 지켰고 티온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메스, 하메스! 하메스! 그놈은 평생을 은둔하며 생을 보내겠다며 연신 약속했지. 하지만 기억하나? 불과 일 년도 채 안 되어 녀석이 퍼트린 소문 때문에 자네는 크나큰 곤혹을 치러야만 했었잖아. 지난 수십 년간 폭풍 용병단의 활약이 자신 때문이라나, 뭐라나. 게다가 공력검술을 오히려 자기가 창안한 듯 자네가 자신의 것을 훔쳐서 영웅 행세를 해 왔다고 개소릴 했지!”
갑작스레 큰소리로 외치는 아르게논.
“그만!”
그러자 티온 역시 자리에서 확 일어나더니만 한마디 했다.
“이제 어쩔 건가. 자네의 그 잘난 동정심 덕분에 무시무시한 살상 전투 기술이 세상에 등장했고 지금은 보기 좋게 우리를 위협하고 있네. 물론 당시 자네가 공력변환기술을 스스로 창안하고도 그 자체의 엄청난 위력 때문에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을 잘 아네. 만일 그 기술이 세상 밖으로 나간다면 사람들을 큰 혼란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단 생각 때문이겠지. 결국 하메스가 그걸 훔쳐 달아나다 내게 붙잡혔을 때에도 자네는 그저 그가 그것을 가지고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 주기를 바랐을 거야. 자!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라네.”
“…….”
마음속 깊이 묻히고 싶었던 내용이 결국 티온의 입 밖으로 모두 내뱉어지자 아르게논은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만을 쉴 뿐이었다.
티온 역시 더 이상 말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는지 갑갑한 가슴을 부여잡고 입구 쪽으로 슬며시 향했다.
곧이어 그가 집무실 문을 열고 사라졌다.
쿵!
방문이 닫히자 아르게논은 다시 힘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이젠 어찌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