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하류 구역 제5구간 섬멸 작전은 제국 산하 등록 용병 단체들의 강력한 항의로 중단되었다.
그 뒤에는 원로원 의원들의 입김이 작용된 듯했고, 게라쿠스 황자를 비롯한 황족들은 커다란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중립적인 태도를 지켜 왔던 군부 관계자들 역시 용병 단체들이 제국의 수도마저 위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저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동안 용병 거주지로부터 불법적인 세금 상납을 받아 왔던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버리는, 결코 그들이 원치 않았던 결과를 낳게 되었으니 가뜩이나 움츠려 있는 세력 입지를 더욱 좁히게 되었다.
제국의 세력 다툼이 이랬건 저랬건 간에 절체절명의 함락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하류 구역 제5구간은, 구사일생 살아날 수 있었음을 하늘에 감사해야만 할 것이었다.
만일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면 거의 대부분이 학살당했을 테고, 설령 살아남았을지라도 반란죄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참형을 당해야만 했을 테니.
그렇게 본다면 5구간은 물론이거니와 하류 구역 전체 주민들의 안전은 아직 보장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황자 게라쿠스와 실세 카르세크가 조만간 군단을 다시 구성하여 이번엔 전 구간들을 싹 쓸어버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 있어 애석한 일이 하나 생겼다는 것도 문제였다.
아르게논이 지난번 전투 때 화살이 심장 부위를 스쳐 지나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는 현재 처절한 투병 중에 있었지만, 돌아가는 정세를 티온으로부터 들어 잘 알고 있기에 제대로 눈을 감고 세상을 하직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오늘 내일 안에 죽음을 예감한 그는 티온과 이리가시 그리고 지드를 불렀다.
그 후 가장 절친한 친구인 티온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보게, 티온. 자네가 주민들과 용병들을 데리고 하루빨리 이곳 하류 구역을 떠나 주게나. 컥컥! 팔라카스 제국의 황제가 죽고 나면 게라쿠스가 황제가 될 텐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여기 하류 구역뿐만 아니라 용병 거주지의 등록 용병 단체들과 심지어 원로원 의원들마저 엄청난 피바람을 받아야만 할걸세. 그러니 제발 가여운 주민들 모두를 이 나라로부터 멀리 보내 주게나.”
티온이 그의 손을 잡아 주며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 하겠네. 우리에겐 여기 이리가시의 용병들과 지드의 하류검사들이 있으니, 이들에게 주민들 보호를 맡게 하고 내일 당장이라도 여정길에 오르겠네.”
그 말에 아르게논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지드는 자네들과 함께 가지 않을걸세.”
“함께 가지 않다니?”
“지드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 주겠나? 부탁이네.”
곧이어 티온과 아리가시가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지드만이 그의 침대 옆에 남게 되었다.
아르게논은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겨우 올리더니만 지드의 손을 잡기를 원했다.
“손 좀 줘 보게나.”
“네……?”
지드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순간 손으로부터 양피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이게 뭐죠?”
“가져가게나. 내 그걸 주기 위해서 남으라 한 것일세. 듣기로는 자네 역시 수하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지? 하루 종일 집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식사도 거른다고 하는데…… 이제는 마음을 추스르고 정신 똑바로 차리게나. 아직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야.”
“…….”
이에 지드는 그만 고개를 푹 숙이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대원들 중 세 명을 잃었다.
두 명은 심각한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어찌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레온과 테세우스에 대한 기억이 그를 무척이나 괴롭히고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바닥에 머리를 찧고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르게논이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너무 괴로워하지 말게나. 살아오면서 내가 확실하게 느낀 한 가지 진리는 제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것일세. 그러니 지금의 상황을 반드시 극복하게.”
지드가 겨우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르게논이 건네준 양피지 조각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뭐죠?”
“그건 지도라네. 공력변환기술의 원본이 묻혀 있는 곳을 나타내는.”
“공력변환기술…… 이라니요?”
지드는 물었다. 아르게논이 그 질문에 답하려고 했을 때였다. 말문을 열려던 그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토해졌다.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였다.
“컥컥! 명심해서 듣게나. 그 기술은 세상에 나오면 절대 안 되는 것이지만…… 자네가 그걸 익히고 이미 세상에 등장한 공력변환기술 시전자들을 제거한다면, 난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을걸세.”
“대체…… 그걸 왜 저더러…….”
지드가 다소 내켜 하지 않자 아르게논이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그의 소맷자락을 겨우 붙잡고 말했다.
“부탁이 있네. 그걸 모두 익히고 나면 반드시 자네가 모르는 낯선 세상으로 가게나.”
기운 빠진 목소리였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히.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철저히 혼자가 되어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네. 그러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일어나게. 그리고 스스로 힘이 강대해졌을 때에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그때가 되어야만 갈 곳 없는 수많은 주민들과 용병들이 자네의 보살핌을 원할걸세. 지금은 아…… 명심하게나. 반드시 진정한 경험을 얻게나. 진정한…….”
털썩.
그는 마저 하려던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침대로 다시 쓰러졌다.
지드가 그를 살펴보니 숨이 완전히 끊어진 듯 보였다.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아.’
***
그로부터 수일 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이었다. 그렇게도 떠나기 싫었던 하류 구역 주민들은 용병들을 선두로 저 머나먼 여정의 길에 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마차들만 그 수가 수백 대가 넘었던가. 진흙 바닥을 겨우겨우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일단 그들의 목적지는 제국의 국경선을 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어느 영토에도 속하지 않는 황량한 불모지에 임시 정착을 할 것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고 주변 왕국들로부터 난민 유입에 대한 심한 견제마저 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피난민 행렬 후미 부근에는 돌격 대장 스카페트를 비롯하여 1호 비스크와 2호 게리 그리고 부상 때문에 마차에 실려 가는 3호 크리스와 막내 아레스가 보였다.
대장 지드가 어딘가로 행방불명된 가운데 수장 지노만이 뒤를 돌아다보며 무척이나 허탈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고…… 아아.”
그저께는 황자 게라쿠스의 근위대가 들이닥치더니만 자신을 밀쳐 내고 아카시안과 세 남매를 강제로 황궁에 데려갔다. 더구나 대장 지드마저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그로서는 이만저만 답답하고 슬픈 심정이 아니었다.
아가씨야 황궁으로 가면 호의호식할 수 있으며 잘 살 테지만 갑자기 사라져 버린 지드 대장에 대해 이만저만 걱정이 앞서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용병단은 건재했다. 새로 가입한 돌격 대장 스카페트는 보기보다 우직한 사람이었고 지노 자신을 임시 대장으로 추켜 주기까지 했다.
1호를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 역시 지드 대장의 공석을 한동안 수장 지노가 대신해 주기를 요청한 상태였다.
한편, 마차에 실려 가는 8호 아레스 역시 부상당했던 그날 이후부터 계속 침울한 상태였다.
그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주된 이유는 바로 7호 이든 때문이었다. 친형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항시 붙어 다녔던 이든이 제국의 황실 일원이라니, 자신마저 철저히 속여 왔다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배신을 위한 연극이었을까.
아레스의 머릿속은 좀처럼 가벼워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각.
강풍이 부는 바위 언덕 정상 위에 허름한 하류 복장의 30대 사내가 저 아래 긴 행렬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척한 몰골 가득 슬픔이 드리워진 자의 정체는 바로 지드였다. 그는 아르게논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일단 일행들로부터 빠져 나와 혼자 여행길에 오르기로 결정을 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너무도 정이 들은 저들과 헤어진다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휘잉―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과 망토를 세차게 날리고 있었다. 이번엔 그가 제국의 수도를 향해 바라보았다.
그곳 역시 너무도 그리운 영혼들이 있었으니 아카시안과 세 남매들이었다. 그들과도 헤어진다 생각하니 이번엔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황자 게라쿠스의 명으로 황궁에 초청받아 들어갔으니 더 이상 그들을 경호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삶이 있을 뿐, 더 이상 자신이 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왠지 서글펐다. 아니, 가슴이 메워진다고나 할까. 지난번 그녀가 자신의 등을 끌어안고 말했던 음성이 여전히 귓가에 잔잔히 메아리치니 말이다.
반드시 돌아오셔야 해요. 저는 언제까지 지드 님을 기다릴 거예요. 언제라도, 영원히…….
***
휘이잉―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산맥 지대가 보였다.
어느 바위 산봉우리 정상 위에 산발한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괴인이 앉아서 저 앞 드넓게 펼쳐진 세상을 관조(觀照)하듯 눈에 담고 있었다.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보이는 눈빛으로부터 예사롭지 않은 하늘빛 광채가 은근하게 발산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천지가 청명한 가을의 푸름을 담고 있어서일까.
높은 상공 아래 듬성듬성 보이는 숲 지대가 서서히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니 또다시 낙엽을 떨어트릴 테고 세월은 어느덧 햇수로 2년을 맞게 될 것이다.
반나절 동안 꼼짝 않고 한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만, 이내 깊은 고뇌의 한숨을 쉬고 만다.
긴 머리카락과 수염이 바람에 날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면 흡사 중년을 넘어선 방랑자의 몰골과도 같았다. 하지만 맑은 눈빛과 고운 피부,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오뚝한 콧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30대 초반의 젊은 사내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지드였다.
1년 전 이곳 트라이벤슬 산맥 지대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제법 깔끔한 용모에 청년의 표상을 지닌 듯했는데, 현재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뭔가 알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신비한 은둔자의 모습이랄까.
오늘 그는 이 근처에서 제일 높은 바위 산 정상에 올라왔으니 아마도 지난 기간 동안 혹독한 수련 과정들을 한번쯤 돌이켜 보기 위함인 것 같았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험한 산악 지형으로 유명한 트라이벤슬 산맥에 있었으니, 혹독했다는 건 당연한 소리였던가.
지드는 아르게논이 남긴 지도를 따라 그가 남긴 공력변환기술에 관한 모든 자료를 근처 절벽 어느 동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저 비급 하나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동굴 전체가 수많은 양피지 두루마리로 가득했다.
그 모든 것이 공력변환기술에 관한 것을 알고는 그만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력변환기술 이전에 나온 공력검술과 그 모체가 되는 마법과 사술들까지 방대하게 기록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르게논의 조부님이 대마법사였다는 사실과, 그의 외숙부가 사술의 대가(大家)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검에 공력이란 공간 질료, 즉 새로운 자연의 에너지를 접목시켜 공력검술을 창안한 것도 그들이 뒤에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보였다.
어쨌든 지드는 이미 무공을 통해 나름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도 주저 없이 공력검술의 과정을 혼자서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신개념의 전투 기술을 독학하면서 난해한 주술적 언어들과 마법 이론에 관한 과정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하며 매우 더디게 나아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니 신기하게도 무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술적 언어는 무림에서 구결운용(口訣運用)과 비교되었고 포스라든지 공력 또한 무림에서 내공이라는 개념과 거의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어느 한 부분의 물꼬를 터트리듯 쉽게 이해하자 그 뒤로는 줄줄이 그의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고 수련 과정 속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지드는 단 6개월 만에 공력검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아르게논조차 만들어 놓고도 세상에 등장시키기가 두려울 정도로 강력한 전투 기술인 공력변환기술의 수련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공력변환기술이란 말 그대로 자연에 풍부하게 널려 있는 일종의 질료 형태의 포스를 자신의 공력으로 변환시켜 그 힘과 함께 물질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전투 기술!
공력검술이 검만을 이용한 검술이라면 공력변환기술은 검 이외에 수많은 형태의 병기들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고 심지어 사방에 깔린 그 어떤 물질들이라도 가능했다.
예를 들자면 돌멩이와 바위, 나무와 여타 움직이면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물과 불 기운마저 조종할 수 있다고 할까.
그 수련의 기간과 강도에 따라 능력이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더더욱 강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공력변환기술이란 지드조차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는지 초반 몇 개월은 거의 진도가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혹시라도 수련이 실패할까 불안하고 답답해하던 차에 그는 잠시 무공의 자하신공을 수련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헌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진전이 없었던 자하신공의 구결 운용이 온몸의 혈도를 펑펑 뚫어 주듯 신체 곳곳에 단전의 힘이 배분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지드로서 매우 기뻐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하신공의 성취는 곧바로 검법의 경지와 곧바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니 말이다.
십사수매화검법 절반 정도의 성취를 이룬 그로서는, 나머지 일곱 개 초식마저 단번에 이룰 수 있을 테고 독고구검 역시 현재 3초에 머물러 있다지만 마지막 구성까지 기대해 볼 수 있는 문제였다.
바로 여기서 지드는 한 가지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으니, 바로 공력변환기술이 무공과 상호 보완 작용을 보인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쪽에서 막히면 다른 한쪽에서 돌파구를 찾음으로서 다른 한쪽에 도움이 되듯, 차례차례 그 과정 단계를 올라서는 느낌이랄까.
그의 추측은 놀랍게도 맞아떨어졌으니 자하신공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경지에 이르자 그토록 난해하게 느껴졌던 공력변환기술의 수련 과정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진전을 이루어 간 것이다.
지드로서는 이만저만 신이 난 것이 아니었다. 두 개의 이질적인 전투 기술들을 적절히 상호 보완하여 각자 수련과정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어제였다.
오늘은 향후 새로운 수련 과정을 준비하고자 하는 날이었고, 정확히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지드는 새로이 다짐하고자 이곳 정상에 올라온 것이다. 그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도전할 수련은 다소 무모하고 황당하다고나 할까.
아르게논이 새로운 개념의 전투 기술을 창안했듯, 지드 역시 한 번쯤 자신의 생각을 시도해 보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시도하려는 과정은 바로 공력변환기술과 무공과의 접목이었다.
이를 조금 더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공력과 내공의 융합!
다시 풀어서 본다면 자연의 공력과 신체의 단전에 응집되어 있는 내공을 하나로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개념의 에너지를 창출한다 할까.
이론상 그 두 개념이 합쳐진다면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강대한 힘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지드의 몸은 산산조각 폭발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을 지드는 모험을 걸고서라고 추진할 생각이 있었다.
게다가 세상에는 레온과 테세우스와도 같은 엄청난 고수들이 즐비하기에 웬만한 성취 가지고는 아예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대륙 최강의 전투 능력을 갖추기 전에는 말이다.
결국 그는 오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원래 수련 장소로 향했다.
‘어차피 넘어가야 할 산…….’
결국 목숨을 건 도박을 선택하고야 말았으니 훗날 그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그 이듬해 겨울, 폭설이 사방을 덮고 있었다. 지드가 이곳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흘러 버린 탓에 이제 그도 삼십 대 중반에 이른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산중 벌판 어느 눈밭을 걷는 그의 모습은 전과 마찬가지로 산발한 머리에 수염이 얼굴 가득했고, 짐승의 가죽들을 덕지덕지 입은 것이 흡사 전문 사냥꾼과도 같아 보였다.
폭설을 피해 그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나무 밑동이었다. 먼 길을 온 듯 그곳에 등을 기대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지드.
그는 가죽 모자를 벗어 문득 허공을 바라보았다.
감회가 새롭다고나 할까.
바로 이곳 나무 아래 장소는 그가 아르게논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와야만 했던 트라이벤슬 산맥 지대 초입 구간이 아니던가.
오늘날 근 3년 만에 모든 산악 수련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니, 그의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하나의 위대한 융합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그동안 지겹도록 생사를 오가며 얼마나 고통스럽고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가.
그래서일까, 그에게 있어서 이 지긋지긋한 곳을 죽기 않고 제정신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실로 꿈같은 일이었으리라.
지드는 모처럼만에 찾은 여유와 해방감에 문득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에 옛 기억들을 그려 보았다.
과연 그동안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류 구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던 수많은 난민들은 무사한지, 어디에서 정착했을지, 또 안전할지……
더구나 너무도 보고 싶은 수장 지노와 대원들, 그리고 용병들은 무사히 잘 지내는지.
무엇보다도 황궁으로 들어간 아카시안과 남매 녀석들의 얼굴도 보고 싶어, 당장이라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아르게논 님이 눈을 감기 전에 남기신 말씀 때문이던가.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철저히 혼자가 되어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네. 그러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일어나게. 그리고 스스로 힘이 강대해졌을 때에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그때가 되어야만 갈 곳 없는 수많은 주민들과 용병들이 자네의 보살핌을 원할걸세. 지금은 아…… 명심하게나. 반드시 진정한 경험을 얻게나. 진정한…….”
지드는 한동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어느새 시간은 더 흘렀는데 석양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필시 하나의 기로에 서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꽤 고심하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그립고 보고 싶었던 영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나려면 원치 않는 길일지라도 가야만 하기에…….
정말이지,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서 그 해답을 내리기가 이토록 힘든 것일 줄은 처음 느꼈으리라.
폭설이 사방을 무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지드는 경공술이나 신법을 사용하지 않고 한 발씩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고개를 들어 쏟아지는 눈발을 올려다보자며 이내 하얀 눈이 눈썹과 수염을 덮고 만다.
그의 행색은 마치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뭔가를 갈구하는 영혼처럼 보였다.
철저히 혼자가 된다는 것.
지난 며칠 동안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씹고 곱씹었는지 몰랐다. 상상도 못할 힘을 얻은들 왜 이리 가슴이 텅 빈 것처럼 그 모든 것이 허탈하게만 느껴진단 말인지.
알몸은 존재하지 않고 빈껍데기만이 거칠고 낯선 세상을 활보한다고나 할까.
지드의 영혼은 갈팡질팡했고 벌써 이틀 동안 폭설이 내리는 추운 눈밭을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그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는 바위 구릉지 위로 오를 수 있었다.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남색의 맑은 초저녁 하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커다란 보름달과 수많은 별무리들이 영롱한 빛을 내며 저 멀리 내려앉은 하얀 눈밭을 반짝반짝 그 윤기를 더해 주었다.
지드는 밤하늘이 자아내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강대함 힘을 얻고도 허탈함이 느껴진다 함은 아르게논 님 말씀대로 아직 내가 정작 필요한 경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뭔지…… 정말 답답하군.’
정말이지 속이 탔다. 대체 무슨 경험을 더 쌓으라는 것인지. 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하류 구역 내에서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는데다가, 수년 전에는 대원들과 용병들마저 거느린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게논 님은 서른 살 훌쩍 넘은 지드에게 진정한 경험을 얻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셨으니, 천성적으로 다소 소심한 지드로서는 이만저만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또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그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고향과 정반대이니 새로운 다짐이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사방은 구름이 간간이 산중턱에 걸릴 정도로 제법 높고 험한 산악 지대였다. 그나마 산맥 두어 개를 넘어서야 좀 나은 편이랄까.
지난 며칠 동안 지드는 절벽을 오르고 협곡으로 내려오고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앞 산마루 왼쪽에서 조그만 마을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수년 전 수련 과정에 들어간 이후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인적이란 말인가.
잠시 후 마을에 들어선 지드, 초입 구간부터 좌우로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서 바라본 것처럼 아담한 회벽 집들이 옹기종기 계단식으로 배열이 되어 있었고, 무척이나 평화로운 마을 같았다.
하지만 집집마다 대문이 꼭꼭 걸어 잠겨 있었다. 주민들은커녕 아이들과 개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드는 계단식 산간 마을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서야 왼쪽 끝의 돌담 집 굴뚝으로부터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을 목격했다.
현관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니 한참 후에야 쉰 듯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시오.”
“그저 지나가다 들렸습니다.”
“거 무슨 소리요. 여긴 산간 마을 중에서도 깊은 산중이건만, 지나가다 들렸다니…….”
“잠깐 문 좀 열어 주시구려. 물이나 얻어먹고 갑시다.”
“…….”
잠시 잠잠하나 싶더니만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자기들끼리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열어 주면 안 돼요.”
“지나가는 사람이라 그러잖소.”
“문틈으로 보이는 저 사내는 아마도 사냥꾼인 듯한데 아마도 길을 잃고 여기로 들어선 것 같소.”
“그렇다면 당신 마음대로 해요. 나중에 무슨 일 나면 책임지라고요.”
“쯧! 어찌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는지…….”
끼익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 안쪽으로 부부인 듯한 중년인과 중년 부인이 다소 경계의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모두 엿들은 지드가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심시키려 했다.
“안녕하십니까. 하하! 사냥하다 길을 잃어버리기는 처음입니다. 짐승을 쫓다 보니까 전혀 낮선 지방에 들어섰지 뭡니까.”
짐승 가죽을 덧대어 덕지덕지 만든 차림새에 산발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보니 전형적인 사냥꾼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제야 중년인이 말했다.
“……들어오시오.”
“감사합니다.”
후루룩.
아직 때가 겨울인 만큼 중년인은 물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왔고 지드는 향을 음미하며 목을 살살 달구고 있었다.
그때 지드가 문득 물었다.
“마을이 무척 조용하군요. 보통 아이들이 나와 저들끼리 노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말이오.”
그러자 중년인의 다소 불안에 잠긴 듯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왔던 길로 돌아가시오.”
“…….”
돌아가란 말에 지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뭔가 겁을 집어먹은 듯 주인, 문득 옆쪽 주방에 서 있는 부인을 살펴보니 야채 같은 것을 다듬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 야채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것이, 정서적 불안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지드는 대체 이 마을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기고 말았다.
“조금 있으며 날도 저물 텐데 하룻밤만 묵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두 내외는 서로가 약속이나 한 듯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다소 성질 급한 부인이 다짜고짜 말했다.
“안 돼요!”
“…….”
순간 무안해진 지드, 아무래도 오늘 밤은 이 마을에서 머물기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2층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대략 15살 정도 되어 보였을까.
“엄마, 나 배고파.”
그러자 부인이 당장 딸에게 가더니만 화를 냈다.
“낯선 사람이 오면 절대 내다보지 말랬는데 왜 나온 거야! 냉큼 올라가서 방문 걸어 잠그지 못하겠니!”
딸이 울음을 터트렸고 다시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누가 왔는지 몰랐단 말이에요. 흐아앙!”
졸지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 버리자 지드는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가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다들 불안에 떨고 있는 겁니까.”
“…….”
노골적으로 물어보자 사내가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때 부인이 다가오더니만 지드가 들고 있는 찻잔을 냅다 뺏는 것이 아닌가.
홱!
“지금 당장 나가 주세요!”
“나 참……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나가래도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난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이번엔 남편이 부인을 말렸다.
“제발 그만두시오. 이 손님의 표정을 살펴보니 진짜 이 지역에 처음 온 분 같소. 그러니 그만 신경 끕시다.”
냅다 터져 나오는 잔소리.
“당신이 뭐 점쟁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그러다가 우리 딸에게 무슨 일 일어나면 책임질 거예요!”
그러자 남편 역시 참다못해 화를 벌컥 냈다.
“그래!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시오!”
“그럼 마음대로 해 보시지!”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제법 컸다. 남편은 거실 찬장으로 가서는 가죽 술통과 잔 두 개를 내어 왔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드에게 말했다.
“잘 익은 포도주는 있지만 안주는 기대하지 마시오. 집사람이 저렇듯 토라져 버렸으니 말이오. 원래는 매우 착하고 친절했는데 얼마 전부터 완전 성질을 다 버렸다오. 뭐, 우리 와이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속을 내려고 이렇게 술까지 내오지 않았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