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
화르르!
벽난로부터 나오는 열기가 실내 가득히 훈훈함을 더해 주었다.
이들은 벌써 포도주 두 가죽 통을 다 마시고 세 번째 가죽 통마저 마시기 시작했다. 주인으로부터 대략적인 얘기를 들은 지드의 표정이 매우 무거워 보였다.
“그런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니…… 듣는 사람도 매우 충격적이고 화가 나는데 당하는 사람들은 그 얼마나 끔찍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겠습니까.”
지드의 말에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세가 따로 없는 것 같구려.”
지드는 탁자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다시 들이켰고 이내 주인과 마찬가지로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말씀하신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진짜 말세나 다름없지요. 그것들이 어디 인간입니까! 짐승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사내가 말했던 얘기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아마스란 왕국 영토에 속하는 펜스 산악 지방에 크나큰 사건이 터졌으니, 흉악범들만 가두어 놓는 특수 감옥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그곳이 점거된 것이다.
험악한 지형 특성상 그들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가 파견 될지라도 승산이 있으리란 보장조차 없을 정도로 금번 죄수 반란 사태는 이만저만 심각한 사항이 아니었다.
죄수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수백 명에 달했고, 저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인근 산악 마을들을 습격하고 약탈을 자행하다 보니 이제는 그 피해는 다른 마을로까지 확산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더구나 얼마 전에는 한밤중에 낯선 자들이 어느 집에 들이닥쳐 집주인을 죽이고 약탈해 간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옛날부터 산악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들의 소행이었다.
죄수들에다, 부랑자까지.
그날 이후 마을의 분위기는 이방인들에게 다소 폐쇄적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머나먼 곳에서 자행되는 죄수들의 폭동에는 그다지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촌장의 심정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작 그들이야말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흉악한 떼강도일 텐데 말이다.
지드가 물었다.
“주민들이 힘을 합쳐 대항을 하면 어떻습니까?”
“아이고. 우리가 뭔 힘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게다가 그놈들은 흉악한 죄수들이라오.”
“…….”
이튿날 아침 지드는 눈을 떠 보니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음을 발견한다. 지난 밤 과음을 하고는 모처럼만에 포근한 실내에서 편히 잘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여긴 방 안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주인은 거실에서 자고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폐 끼치기가 싫었는지 재빨리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거실 쪽으로 나갔다.
끼이익.
“…….”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 갔는지. 문득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창문 밖을 내다보니 건물 틈 사이로 보이는 아래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잠시 후 지드는 이들이 뭐 하나 하고 주민들 틈에 껴서 살펴보니 자신을 재워 준 바로 그 사내가 한창 열을 올리며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오늘 서쪽 지역의 아스 마을이 습격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머지않아 놈들이 이곳에도 나타날 가능성이 크단 말이오.”
누군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스 마을이라면 국경선 근처 있는 아주 먼 곳이 아니오. 설마하니 여기까지 그들이 오겠소이까? 커다란 산맥 두어 개는 넘어야 할 텐데요.”
“그렇기는 하지만……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않겠소.”
“거참, 걱정도 팔자지. 촌장은 대체 왜 그리 겁이 많은 게요? 설령 잠시나마 피한다 할지라도 이 많은 주민들이 한동안 어디에 머물다 온단 말이오.”
“그만 갑시다.”
“정 겁이 나신다면 촌장께서 피하시구려.”
주민들은 하나 둘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촌장은 긴급 대책 마련이라는 주제로 주민들을 모아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별 소득이 없는 것 같았다.
지드는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그에게 다가가 한마디 건넸다.
“이제 보니 촌장이셨군요?”
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촌장이면 뭐 하오. 그저 꿔다 놓은 보릿자루에 지나지 않는데.”
“주민들 말대로 이곳은 죄수들의 폭동 지역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인데 괜한 걱정을 하시는 건 아닌지요.”
“모르는 소리 마시오. 비록 산맥 두어 개가 가로막고는 있다지만 지름길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오. 실제로 우린 아스 마을과 물물 교환을 할 시에 사용하는, 불과 일주일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다오. 만일 놈들이 그걸 안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소이다.”
“죄수들이 여기 출신도 아닌데 그 길을 알 리가 없지 않소.”
지드는 별로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마을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촌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왔던 방향으로 그냥 돌아가시오. 괜히 길을 잃고 위험 지역으로 가지 말고.”
지드가 빙그레 웃고 말았다.
“후후. 사람들 말대로 촌장께서는 걱정도 팔자십니다. 나 역시 겁이 많아서 결코 분쟁 지역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차, 그리고 어제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
“부디 조심해 가시오.”
참으로 촌장이란 사람은 순박한 정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손까지 흔들어 주니.
지드가 떠나고 그 이튿날이었다. 마을 공터 한가운데에서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살려 주세요! 제발요.”
“시끄러, 이년아!”
“엄마!”
“아이리스!”
삭! 슥!
“컥!”
“한 번만 더 나섰다가는 이 꼴이 될 줄 알아!”
검은 보호대로 덕지덕지 무장한 자들 서른 명이 각자 서슬이 시퍼런 병기들을 하나씩 부여잡고는 공터 한가운데로 여인네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대부분 앳된 소녀들이나 처녀들이었고 그 앞에는 시체들이 몇 구 있었다. 아마도 끌려가는 자식과 아내를 구하기 위해 나선 부모와 남편들이 분명했다.
흉악하게 생긴 대머리 사내가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몇 명 모았나!”
“이 마을에서만 도합 스물일곱 명입니다.”
“생가보다 숫자는 적지만 그럭저럭 반반하게 생긴 년들이 많아서 손해 본 장사는 아니군.”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대머리에 눈매가 마치 욕정에 걸린 돼지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기름진 눈빛이 한 여인에게 꽂히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놀아 볼까? 흐흐!”
여인은 너무 무서워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던 아버지가 목숨은 상관 않고 달려 나와 딸을 보호했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어찌 이런 짓을…… 커억.”
그러자 대머리 사내의 인상이 팍 찡그려지며 냅다 쌍욕을 했고 발로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팍!
“저리 꺼지라니까!”
아버지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고 딸은 놔주십시오. 제발요! 흑.”
대머리 사내는 씩 웃었다.
그리고, 살기어린 표정으로 병기를 뽑아 들어,
목을 베어 버렸다.
***
지드는 산악 마을을 떠난 지 이틀 만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유인즉 마을을 떠나오기 전 촌장이 말했던 내용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비록 죄수들이 이곳 출신이 아니라지만 아스 마을 주민들을 심문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이지 않은가.
촌장의 말대로 놈들이 이곳 마을까지 쳐들어올 가능성이 충분할 것이다.
지드는 매우 후회하는 얼굴이었고 스스로 자책까지 했다.
“그걸 왜 생각지 못했던가…… 아.”
그는 가장 빠른 신법을 이용해서 절벽을 힘차게 밟고 올라갔다.
홱― 타다닥!
정상에 올라와 저 멀리 마을을 살펴보니 지드는 심장이 철렁했다. 대부분의 건물이 이미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아직도 연기가 그치지 않는 곳도 있었으니 말이다.
“아! 안 돼.”
마을에 도착한 지드는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공터 한가운데 불에 탄 시신들이 보였고 건물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는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지드는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흑!”
“너, 너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소녀가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살펴보니 그녀는 다름 아닌 지난번 집에서 엄마한테 꾸중을 들으며 2층으로 올라갔던 바로 촌장의 딸이었다.
“흑흑!”
그녀는 시체 더미에 아버지와 엄마로 추정되는 시신 쪽을 쳐다보며 계속 울기만 했다.
아마도 어딘가에 숨어서 부모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모두 목격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야 지드는 소녀를 진정시키고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잠시 후 지드는 그녀로부터 마을에 일어났던 끔찍한 만행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찢어 죽일 새끼들!”
“그들이 다른 마을에도 간다고 했어요.”
순간 지드의 눈빛이 번뜩였다.
“다른 마을이라고! 이런…….”
지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 혹시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딘지 아니?”
그녀가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붉은 바위 봉우리 마을입니다.”
“당장 그리로 안내해다오!”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이었다.
바위 빛깔이 유난히 붉기에 붉은 바위 봉우리 마을이란 명칭으로 불리는 이 평화로운 마을에, 한 무리의 악마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바로 어제 인근 마을에서 여자를 납치하고 나머지 주민들을 학살했던 흉악무도한 죄수들이었다.
대머리 사내는 며칠 전에 이어 오늘도 한껏 광기를 드러냈다. 이미 땅바닥에는 여러 시신들이 보였고 여자를 골라낸 후 나머지 주민들의 도륙 명령을 내리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가 검을 들어 부하들에게 외치려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섬광이 임과 동시에 파공음이 들려왔다.
파팟!
“악!”
털썩!
대머리 사내의 팔이 분리되어 검과 함께 흙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아아! 내, 내 팔이……!”
다른 죄수들이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대체 어떤 놈이!”
“당장 나와! 감히 대항을 한다 이 말이지.”
그때 군중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지드였다. 그는 방금 전 사용한 듯한 뭉툭한 검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매우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이 새끼들!”
지드의 범상치 않은 위세에 죄수들이 다소 움츠렸다. 하지만 숫자상으로 그들이 훨씬 많은지라 주저거리는 시간은 그만큼 짧았다.
“뭐야, 저 새끼! 그냥 죽여 버릴까?”
“그럼 네가 먼저 공격해 봐.”
선두에 있던 자가 다소 겁을 집어먹었다.
“대장 팔을 잘랐다면 만만치 않은 놈일 텐데.”
“합공할까?”
“좋은 생각이다.”
“진짜 한꺼번에 공격하기다! 빠지는 새끼 있으면 나중에 눈깔을 뽑아 버릴 테다.”
그러자 팔이 잘려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대머리가 화를 폭발했다.
“이런 개 같은 새끼들이 대장이 이렇게 당했는데 뭔 말들이 그리 많아? 당장 해치우지 않고 말이야. 아니 저 새끼 죽이고 마을도 초토화시켜 버려!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도륙을 하란 말이야. 가축도 남기지 말고 모두 불태워 버려. 여기 이년들도 재수 없으니까 죽여 버리고, 알아들었어!”
지드가 그들 앞으로 나서더니만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할 소리…….”
그의 손으로부터 검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만 순간 섬광이 발했다.
언제 검이 움직였는지 모를 정도로 주변을 확 긋고는 다시 그에게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니던가.
“…….”
대체 그 짧은 찰나에 뭔 일이 일어났는지 주변이 잠잠해졌다. 특히 막 공격해 오려던 열댓 명의 사내들이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는 것이었다.
몇 초가 흘러서야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서 연출되었으니.
여기저기에서 수급 떨어지는 광경에 주민들은 그만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공포와 두려움에 찬 주민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더 무시무시한 악마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주민들은 그가 자신들을 도우러 온 검사임을 확신했다. 허나 무슨 이유인지 주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리고 누가 외쳤다.
“우, 우리 마을은 이젠 완전히 끝이오!”
“맞소이다. 필시 저들은 다시 보복해 올 것이 틀림없소. 지난번 어떤 마을에서 대항을 했다가 모조리 도륙을 당한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그때 마을의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만 지드에게 다가가서 울상을 지어 보였다.
“이보시오. 저토록 무서운 자들을 단번에 제압을 하셨으니 필시 엄청난 검사이신 것 같은데 이거 쓸데없는 일을 한 것 같구려. 그대야 어디론가 떠나면 그만이지만 이곳에 우린 철저히 보복을 당해 모두 목숨을 잃을 거란 말이오.”
그러자 지드가 검을 등 뒤로 다시 차고는 차분히 말했다.
“내가 보복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겠소.”
“…….”
노인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체 이 검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던가.
“그대가 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지녔다 하더라도 혼자 나설 일이 아니란 말이오.”
“노인장께서는 그들의 본부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 주시오. 거긴 아스 마을 근처라 하는데 지름길이 있다고 들었소이다.”
“대체 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거요? 그들은 이미 펜스 산악 지방 대부분을 장악했을 정도로 그 세력이 크단 말이오.”
답답해하기는 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가르쳐만 주시오.”
“허! 거참.”
촌장이 주저거리자 바로 뒤쪽에서 또랑또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지드가 돌아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촌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끔찍한 죽음에 더 이상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지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마치 자기 대신 복수를 해 달라고 하는 표정 말이다.
“제가 아스 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알아요! 아빠랑 여러 번 간 적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소녀는 산맥 아래 협곡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짧은 시간 안에 드디어 서쪽 산악 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헤라였고, 크나큰 슬픔을 가슴속 깊이 억누르며 제법 잘 견디는 것 같았다.
어린 나이치고는 무척 강한 성격이 아닌가 보였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지드를 이끄는 듯한 느낌이었으니 총명함마저 지녔음이 분명했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시점이었다. 아스 마을 한가운데로 산발한 머리에 수염이 난 사내와 그 뒤로 한 소녀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지드와 헤라였다.
그때 여기저기에서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들이 있었으니, 그들의 차림새는 어제 보았던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나같이 험상궂게 생긴데다가 서슬이 시퍼런 무기들을 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멀리 보이는 마을 공터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기둥 몇 개가 박혀 있었는데 그 위에는 교수형 당한 주민들 스무 명 정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 역시 놈들의 약탈과 횡포에 철저히 유린당한 듯 보였다.
지드 뒤를 졸졸 따라가는 헤라는 공포와 두려움 벌벌 떨었지만 아저씨 뒤를 꼭 붙잡고 용기를 냈다.
그때 들려오는 지드의 음성!
“절대 손 놓지 말고 웬만하면 눈을 감고 있어라. 곧이어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테니까.”
잠시 후, 흉악범들이 집단으로 다가와 저마다 한마디 씩 했다.
“이건 뭐 하는 잡것들이야!”
“사내새끼와 어린 계집이라니.”
“가만있어 보자. 그러고 보니 계집을 상납하러 왔나.”
“그렇다면 받아 주지. 남자 새끼는 없애버리고 말이야.”
그들 중 하나가 검을 뽑아 들어 지드를 내려치는 순간 그의 목이 먼저 날아갔다.
삭! 털썩!
목이 땅에 떨어지자 나머지 사내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뭉툭한 검은 지드의 손을 떠나고 없었으니…….
파! 파! 파! 팟!
“억!”
털썩! 털썩!
그들의 손과 발이 절단되어 바닥에 뚝뚝 떨어져지기 시작했다.
피 보라가 튀고 골수가 삐쳐 나오니 정말이지 도축장에라도 온 것처럼 처절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헤라는 지드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며 눈을 꼭 감고 있었으니 제발 이 싸움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지드의 도륙은 이제 마을 초입 구간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발걸음이 안쪽으로 빠르게 옮겨 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그는 걷고 있다지만 보폭이 짧은 헤라는 그를 놓칠세라 전력을 다해 뛰어가고 있었다.
지드가 헤라에게 다시 말했다.
“놓치지 마라.”
“너무 빨라요.”
“걸어가는 건데?”
“그래도 천천히 가요.”
“…….”
지드는 마을 골목길을 돌아다니면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베고 또 베었다.
삭! 슥!
“컥!”
“악!”
대문에서 나오는 자들, 담벼락 혹은 지붕 위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오는 놈들에게 인정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온몸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몰골이 한마디로 무자비한 살육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했다지만 지금은 오히려 철저한 분노의 화신이 되어 산악 지방을 피의 향연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헤라는 더 이상 눈을 감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피비린내 나는 생생한 현장에서 자신이 안내하는 지드의 엄청난 검압에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였고, 이제는 그가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파팟! 삭둑!
털썩!
그냥 베는 정도가 아니었다. 사람의 신체는 무 잘려지듯 여기저기 처절한 분신들을 흘려 놓아야만 했고 차가운 대지는 검붉은 피를 받고는 모락모락 따뜻한 김을 피워 냈다.
때마침 석양 노을이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으니 그의 살육 광경은 흡사 지옥에서 강림한 악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던 수많은 검사들 대부분이 죽음을 당했고 그들 중 소수만이 감히 대항할 의욕을 잃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혼비백산해서 말이다.
전투가 막을 내린 듯하자 지드는 숨을 헐떡이며 공터 한가운데로 갔다. 그러고는 사방이 어둑어둑해지자 헤라에게 말했다.
“가서 장작들을 구해 오너라.”
“…….”
헤라는 그의 말대로 장작을 구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로 발걸음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깔린 게 절단 난 시체들이었으니 어두운 저녁에 그들을 넘어 장작을 구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주저하자 지드가 움직였다.
“네가 여기 있어라. 내가 구해 올 테니…….”
그러자 헤라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에? 싫어요! 같이 가요!”
탁! 탁!
화르르!
모닥불이 너무도 잘 타올랐다.
마을에 널린 게 집들인데 지드가 공터를 택한 이유는 이곳이 높은 지대에다가 사방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한 경계의 의미가 있었다. 이번에도 지드는 말수가 없었다. 엄청난 살인 뒤에 오는 묘한 느낌이랄까.
그저 지나치기에는 무척이나 버거운 감정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천하의 악당이라 할지라도 칼을 휘두른 당사자는 엄연한 살인마인 것이다. 하류검사로 평생 살아오다가 언제부터 세상을 심판하는 처단자로 변했단 말인지.
하류의 습성과 다소 우유부단했던 행동거지, 그리고 온순했던 성질 그 모두가 지난 며칠 동안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었다.
“기분 더럽군.”
한 시간여 만에 처음으로 입 밖으로 뱉어 낸 말이었다.
“…….”
잠시 후 지드는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워 잠을 청했다.
“어서 자라. 내일도 바쁠 테니까.”
헤라의 눈방울이 동그랗게 변했다.
“내일도 싸우게요? 지치지도 않으세요?”
“안 지쳐. 내일도 싸울 거란다.”
“내일 가는 곳은 산악 출신인들조차 오르기 힘들 정도로 험한 지형에 위치해 있어서 조심하셔야 하는데요.”
“괜찮단다. 걱정 마라.”
번쩍!
우르릉 쾅!
아직 늦겨울이건만 눈 대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절벽들과 칼날 같은 능선이 벽처럼 둘러쳐진 안쪽에 건물들이 빽빽이 보였으니 마치 공중 천연 요새를 방불케 했다.
창고 같은 큰 목조 건물 안으로부터 악기 연주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넓은 실내에서는 사내들이 술에 잔뜩 취한 채 그야말로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국경선 근처 제국 영토까지 넘어가서 마을 하나를 약탈하고 데려온 여자들과 값비싼 전리품들에 기쁜 나머지 자축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리 와 보라니까!”
“살려 주세요, 제발!”
“하하. 누가 죽인다고 그랬나. 그냥 예뻐해 준다니까 그러네.”
“제발요! 흑.”
실내가 무척이나 시끄러운 가운데 구석 중앙 만찬석에는 우두머리들이 착석해 있었고 가운데 혼자 앉아 있는 애꾸눈 사내가 대장인 듯 보였다.
그들은 방금 전 아스 마을로부터 도착한 자의 보고를 한창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그자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악마가 틀림없었다니까요. 이상하게 생긴 검을 한번 휘두르면 한 번에 수십여 명의 목가 다리가 절단이 났는데, 그놈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그리고…….”
그러자 애꾸눈 사내가 듣다못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등신 같은 자식이 어디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누군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마구잡이 공격을 하더니만 무려 백여 명이 지키고 있는 마을 하나를 깡그리 초토화시켰다, 이 말이냐?”
“네, 그렇다니까요. 그, 그자는 분명 악마가 분명합니다. 흑!”
보고자는 얼마나 두려웠으면 말하면서 울먹이기까지 했다. 순간 애꾸눈이 바로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그에게 던져 버렸다.
“저 새끼 미쳤나. 재수 없게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더 들어 볼 것도 없다. 당장 끌어내라!”
곧이어 호위 검사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사내, 그는 실성한 듯이 계속해서 지껄여 댔다. 결국 칼집으로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고는 기절해 버렸다.
얼마 후 대장 애꾸눈은 아스 마을로부터 살아 돌아온 또 다른 보고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심각한 얼굴을 했다.
다른 생존자 역시 같은 소리를 반복했으니 필시 아스 마을에서 뭔 일이 벌어지기는 했던 모양이었으니 왠지 모를 두려움 서서히 다가오는 것만 같았으리라.
쏴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우가 계속해서 몰아쳤다. 보초를 서는 자들은 건물 안에서 흥겨운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저들끼리 쌍욕을 하며 저 안에 끼지 못한 설움을 뱉어 냈다.
“하필 이럴 때 보초 당번이라니! 완전 재수 옴 붙었군.”
“누가 아니래. 당번 시간 끝나면 음식 찌꺼기나 먹게 생겼구먼.”
“안주까진 바라지 않아. 술이나 남아 있으면 다행이지.”
“빌어먹을!”
바로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시퍼런 검날이 그들의 뒷목을 신속하게 그어 버렸다.
풀썩.
동시에 쓰러지는 보초 두 명, 다른 구역들 역시 바닥에 피를 흘리며 빗물을 몽땅 받고 있는 시신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사내는 건물 쪽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잠시 후 누군가 건물의 큰 문을 활짝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열려진 문 밖으로부터 천둥과 번개가 쳤고 폭우가 안쪽으로 들이닥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내들은 여전히 술에 푹 취한 상태에서 끌고 온 여자들을 상대로 광란의 짓거리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가 엄청난 공력을 실어 크게 외쳤다.
“놀이는 더 이상 없다!”
귀가 찢어지고 심장이 놀랄 만큼 큰 음성에 대부분 경직되었고 누가 이 즐거운 파티를 방해하나 입구 쪽을 바라보았고 대장 애꾸눈과 직속 수하들 역시 조심스런 눈길로 그쪽을 향했다.
산발한 머리에 수염으로 가득한 짐승 같은 몰골, 그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치아가 사악한 악마를 보는 것 같았으니 애꾸눈은 혹시 보고자가 목격했던 자가 바로 그가 아닌가 했다.
“설, 설마 저놈이!”
수하들 역시 졸인 가슴은 마찬가지였던가. 누군가 섣불리 나설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지드는 헤라를 절벽 밑 안전한 곳에 두고 혼자 침투해 들어와 보초들부터 제거한 뒤에 이곳에 홀로 뛰어든 것이다.
막상 와서 건물 안을 살펴보니 정말이지 두 눈 뜨고는 못 볼 광경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십여 명의 여인들이 농락당하는 광경이라니!
그러다 보니 지드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이다.
지드는 분노와 함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살기 가득한 음성을 내뱉었다.
“지금부터…… 각오해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 대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이 아닌가.
쿵!
놀랍게도 탁자들이 저절로 허공에 뜨더니만 각 벽들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들을 막아 버리기까지 했다.
탁! 탁!
탈출구를 완전히 봉쇄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위기를 느낀 애꾸눈과 수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저놈을 죽여라!”
대장의 말에 흉악한 사내들이 근처 아무 무기나 집어 들고는 냅다 달려갔다. 순간 파공음이 일었고 선두진의 스무 명의 목이 뽑히고 피 보라가 사방으로 튀었으니 그들이 첫 번째 희생자들이 된 셈이었다.
이미 악마의 살육자로 변한 지드는 다시 검을 쥐고는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저벅저벅.
마치 심판을 주관하는 지옥의 사자와도 같이 그의 기세는 살벌함을 넘어서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제야 알았던가.
이 드넓은 건물 안에 갇힌 자들은 자신들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슥―
지드가 검을 들어 공중으로 서서히 띄워 보냈다. 그런 광경에 대장 애꾸눈과 수하들은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허나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
아직은 숫자상으로 훨씬 많은 이쪽이 합공을 한다면 살수도 있을 것이다.
“다들 공격해라! 저놈을 죽이는 자는 부대장으로 승격시켜 주겠다.”
곧이어 100여 명의 죄수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었다.
와와―!
“죽여라!”
“아예 난도질을 하자고!”
그때까지 허공에 떠 있던 검이 갑자기 강력한 회전을 하더니만 주변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저절로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파! 파! 파! 팟!
“컥!”
“으악!”
그 참상은 도저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검의 회전력이 더해질수록 피와 골수가 사방으로 마구 튀었고 하다못해 잘려진 머리들과 신체 부위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둑.
털썩!
순식간에 전 병력들이 도륙을 당해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고 대장 애꾸눈은 감히 덤빌 생각조차 못하고 맨 뒤쪽 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지드가 그에게 곧장 걸어갔다.
그의 발에 밟혀지는 것은 끈적끈적한 핏물과 뱃속에서 튀어나온 내장들 그리고 허연 골수였기에 한 발 한 발 나아갈 때마다 거북한 음이 들려왔다.
애꾸눈이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니 살, 살려 주세요.”
지드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고 바지에다 오줌까지 저렸다.
“아아아! 살려 줘!”
타다닥
그가 문 쪽으로 도망치자 여지없이 검이 날아가 그의 뒷목을 꿰뚫어 버렸다.
팍!
“악!”
풀썩!
구석으로 피신했던 여인들의 낯빛은 아까 전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죄수들 모두를 참혹하게 살육한 지드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곧이어 닫혔던 문들이 저절로 열렸고 지드는 창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렇게도 기승을 부렸던 천둥과 번개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폭우마저 가는 비가 되어 얌전히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