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 지드 Vs. 아라퀘스 Part. 1
펜스 산악 지방 죄수들 살육 사건은 그야말로 광활한 서부 영토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누군가가 단신으로 나타나서는, 그것도 단 3일 만에 무려 세 개 마을을 점령했던 수백여 명의 흉악범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 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중에 아마스란 왕국으로부터 파견 나온 진상 조사단은 희생당한 죄수들의 시신들을 목격하고는 다시 한 번 경악하고야 말았다.
진상 조사단을 책임지고 있는 단장 메르는 아마스란 왕국의 대공 신분으로서 주로 이런 큼직한 사건들을 맡아 왔다. 하지만 이런 참혹한 현장은 처음 목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방금 1차 조사를 끝내고 온 참모에게 물었다.
“이번 사건 장본인의 소재는 알아냈나?”
“현재 찾는 중입니다.”
“빨리 찾게. 어떤 자인지 직접 보고 싶군.”
대공은 다시 마을 사건 현장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혼자서 뭐라 중얼거렸다.
‘세상에…… 대체 무슨 검술을 사용했기에 이토록 끔찍하단 말인가.’
수일 후.
대공 메르는 참모로부터 펜스 지방 살육자의 소재지를 보고받는다. 그는 인근 마을 어느 집에서 어떤 소녀와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대공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고 참모에게 그를 정중히 데려오라 지시했다.
사실 이렇게 소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 대상이 지드였고 지드가 자신이 한 일을 굳이 감추거나 숨기려 들지 않았기에 비교적 쉬웠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놀러 간다는 기분으로 메르 대공의 초대에 응한 지드와 헤라는 그의 저택에서 모처럼만에 편한 휴식을 취했다.
대공 메르는 일종의 검술 집착증 환자처럼 세상 그 모든 검 기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수백여 명의 흉악범들을 모조리 제압한 지드의 검술 원류에 대해 너무나도 궁금해했고 틈만 나면 꼬치꼬치 캐물어 보곤 했다.
결국 지드는 내키진 않았지만 그의 집착에 질렸는지 그저 형식상으로 대충 얘기해 주어야 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저택을 떠나려고 하는 지드를 붙잡은 대공은 무척이나 아쉬운 듯 현관문까지 따라 나왔다.
“더 있다 가래도 그러시네요.”
“아니, 쉴 만큼 쉬었습니다. 대접도 잘 받고요.”
“어디 특별히 갈 곳이 있습니까?”
“당장은 없지만 그냥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 구경이나 더 해 보려고요.”
“웬만하면 도시에서 머물다 가시지 그러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 나라도 충분히 살펴보다 가야겠죠.”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헌데 나중에 옷이 바뀌고 말끔해지면 알아볼 수 있을까 모르겠소이다. 허허!”
“…….”
***
헤라는 강 둔덕에 앉아서 저 아래 물가에 발을 담그고 검으로 머리와 수염을 깎는 지드를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쪽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옷가지가 놓여 있었는데 대공 메르에게서 선물받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완전히 깨끗한 모습으로 변모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헤라는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다. 워낙 산발한 머리에 수염 가득한 몰골, 게다가 짐승 가죽 복장, 그가 달라져 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꾸벅꾸벅.
결국 기다리다 못해 졸기 시작하는 헤라,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문득 바로 앞에 무언가가 나타났고 그림자마저 가려지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그 무언가의 정체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기에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대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누, 누구세요……?”
그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누군지 모르겠니?”
“누구신데요?”
단정한 머리에 말끔한 용모, 뭐 조각상처럼 잘생긴 미남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상당히 준수한 미남형이랄까.
특히 맑게 웃는 인상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기에 헤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아세요?”
사내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알다마다.”
그제야 헤라는 뭔가 눈치를 챘는지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설마…… 아저씨!”
지드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혹시 바보 아니냐? 나를 못 알아보다니.”
“세상에!”
“후후.”
헤라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정말 말도 안 된다고요.”
산발한 머리에 수염 가득한 얼굴이 말끔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차림새마저 새 옷차림이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보니…… 아,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였네?”
그러자 지드가 환하게 웃었다.
“이 녀석아! 내가 삼십 대 중반인데 오빠라니!”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데요. 정말 누가 보면 이십 대라 하겠어요!”
“뭐 그리 봐 주면 좋긴 좋은데 조금은 어색하군. 내가 일찍 결혼했더라면 너만 한 딸이 있었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
사실 지드의 생김새는 동안 중에서도 동안이라 할까. 특히 30대치고는 그 눈빛이 너무도 맑고 천진한 아이와도 같았으니 나이가 어려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만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가 지난번 펜스 산악 지대의 흉악범들을 모조리 쓸어 버린 서부 영토의 살육자라 소개한다면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듯싶었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시점이었다.
어느 숲 속 안에 두 개의 갈림길 앞에서 지드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는 헤라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헤라 역시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갑자기 왜 멈춘 거죠?”
지드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이제 넌 네 마을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
시무룩해지는 헤라,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럼 어쩌려고.”
“오빠 따라다닐 거예요.”
오빠라는 말에 지드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저씨라 부르래도?”
“싫어요.”
“흠. 생각보다 고집이 센 아이구나. 그나저나 이렇게 함께 다닐 수 없잖니. 나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곳에나 자고 먹고 할 건데 너처럼 곱게 생긴 여자 아이가 떠돌이 생활을 할 순 없잖니.”
“오빠랑 함께 다니면 괜찮아요.”
한숨을 짓고 마는 지드, 그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하기야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 된들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끔찍하게 돌아가신 그곳으로 돌아가 봤자 쓰라린 상처와 악몽만 되살아날 테니 말이다. 지드는 하는 수 없이 당분간이라도 그녀와 함께 다니기로 결정했다.
“방랑 생활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고되고 힘들단다.”
헤라가 기쁨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오빠.”
지드가 불끈했다.
“너 이 녀석? 아저씨라 부르래도.”
“저 어리지 않아요. 올해로 열여덟 살이란 말예요.”
결국 지드가 가벼운 꿀밤을 놓고 말았다.
“아얏! 왜 때려요.”
“네 녀석이 열다섯이란 거 다 아는데 어디 거짓말을 하는 거냐.”
“그렇다고 숙녀의 머리를 쥐어박는 게 어디 있어요.”
“숙녀는 무슨 숙녀! 일단 아무 데나 가 보자.”
지드가 앞서 가자 헤라가 눈을 흘기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부턴 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는 누가 뭐래도 분명 숙녀니까요!”
***
이곳은 제법 큰 도시 한복판에 있는, 음식점 2층 테라스였다. 지드와 헤라는 모처럼만에 돈을 내고 원하는 식사를 실컷 먹고 있었다.
지드가 좋아하는 것은 육식이었다. 그래서인지 고기 옆에 있는 샐러드와 콩을 빈 접시에다 골라 놓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헤라가 다시 포크로 골라낸 것들을 지드의 고기 접시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지드가 헤라를 보며 뭐라 했으니.
“뭐 하는 짓이냐.”
“고기는 야채와 함께 먹는 게 건강에 좋다고요.”
“네 녀석이 내 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웬 참견이냐. 더군다나 난 콩은 딱 질색이다.”
“콩은 그렇다 치더라도 샐러드는 반드시 함께 드셔야 해요.”
“강제냐?”
“넵!”
“환장하겠군.”
“후후.”
헤라의 상큼한 미소에 지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지 마라. 정든다, 이 녀석아.”
사실 지드가 편식을 한다기보다는 먹길 꺼려 한 것이었다. 하류 구역에서 지지리도 못살았을 때 콩과 채소를 삶은 돼지죽만 지겹게 먹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옆 자리에는 어느 저택의 경호대원들로 보이는 자들 열댓 명이 함께 자리를 잡고 앉더니만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에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혈기왕성한 20대 젊은 검사들이니 목소리 톤 역시 높았고 크게 들려왔다.
“자네들, 얘기 들었나.”
“이번엔 무슨 얘기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나.”
“진짜 놀랄걸세. 페스타르가 어느 이름 없는 젊은 검사와의 대결에서 패했다는 소문 말일세.”
“그 내용이라면 나도 오늘 아침에 들은 적이 있네만, 내 생각에는 근거 없는 소문일 가능성이 큰 것 같던데. 그저 흥미 있으라고 꾸며낸 얘기 말야.”
“물론 황당한 소문일 수 있겠지만 그 얘기가 나온 처음 나온 곳이 스칼라 검술 학당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신빙성은 더해 주잖아.”
별 관심 없게 들었던 다른 대원들마저 귀를 기울였다.
“아마스란 왕국 최고의 스칼라 검술 학당에서 나온 얘기라면 이건 문제가 달라지지. 더 말해 봐.”
“당시 페스타르와 무명 검사와의 대결에서 심판을 보았던 자가 스칼라 학당 소속 검술 교관이었다나? 그 소문도 그자 입을 통해서 나온 것 같다더군.”
“여하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거야말로 엄청난 사건이 아닌가. 천하의 페스타르가 무명 검사에게 지다니……상상이 가질 않아.”
저들은 주로 경호 임무를 맡는 검사들인지라 얘기 내용은 누가 누구와 붙어서 이겼다는 등 주로 검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잠시 후 그들은 화제를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내 장담컨대 펜스 지방의 살육자가 이곳에 나타난다면 아무도 그를 이길 자는 없을걸세. 하물며 페스타르 조차도 일대일로 붙는다면 아마 땀 좀 꽤 흘리실걸?”
“정말 대단한 자가 분명한 듯한데?”
“그는 항상 다닐 때 아주 미모의 여인을 데리고 다닌다지.”
“정말 부럽군. 검술로 강하고 아름다운 여자도 따라 주고 말일세.”
바로 옆 자리에 지드와 헤라가 식사를 하다가 자신들 얘기들이 나오자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그저 모른 척 계속 듣기만 했다.
특히 헤라 같은 경우는 자신에 대한 소문이 미모의 여인이란 말을 듣고는 어찌나 기뻤던지 함박웃음으로 지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애인 사이래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지드.
“할 말이 없군.”
“그렇다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지을 건 없잖아요.”
“나 원래 이렇잖아.”
“그럼 일부러 웃는 척이라도 해 봐요.”
“그건 못하지.”
“…….”
그때였다. 아래층으로부터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에 화려한 은빛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손님들 모두가 깜짝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마스란 왕국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알 만한 그 유명한 붉은 기사단이었다. 그들같이 귀한 신분이 왜 이런 북새통에 자리 잡은 식당에 왔는지 그 역시 의아스런 일이었다.
그들 사이로 금빛 문양이 수놓인 중년인이 등장하더니만 식당 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테라스 편에 지드와 헤라를 보고는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지드 역시 그를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긴 웬일로!”
“그동안 잘 지냈소?”
그는 다름 아닌 대공 메르가 아니던가. 지드와 헤라를 자기 저택에 초대하여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게 해 주었던 검술 집착광.
“허허. 펜스의 죄수 반란 진압 공로자께서 이런 누추한 평민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니 어울리지 않는군요.”
그의 목소리가 다소 컸던가. 주변 손님들은 지드의 정체를 알고는 자지러질 정도로 큰 반응을 보였다.
특히 바로 옆자리에 경호대원들은 마침 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이만저만 놀란 모습들이 아니었다.
“헉!”
“바, 바로 옆에 펜스의 지방 살육자가…….”
“세상에나!”
지드가 대공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대를 긴히 보러 왔소.”
“저를요? 그나저나 우리를 어떻게 찾아낸 거죠?”
“사실 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람들을 붙여 놓았죠. 허허, 사실 모습이 많이 바뀌어서 알아 보는 게 좀 많이 힘들었다오. 이젠 이십 대 청년이라고 해도 믿겠구려.”
“그럼 미행을…….”
“거두절미하고 나와 함께 왕궁에 들어가시죠. 국왕께서 그댈 보자 하시니.”
“……네?”
잠시 후 지드와 헤라는 영문도 모른 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식당을 나섰다.
***
아마스란 왕궁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멋진 건축 양식의 거대한 성을 연상케 하였다.
왕궁의 접견실은 중앙 건물 넓은 홀과 겸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오늘은 국왕이 몸소 나와 상석에 앉아서 두 명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홀 양옆에는 붉은 기사단들이 나열해 있고 대신들과 귀족들 그리고 내외빈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이 빽빽한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 한가운데 초대 손님 자격으로 서 있는 자들은 두 명의 사내들이었는데 한 명은 다름 아닌 지드였고 다른 한 명은 아주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사실 이 순간에도 지드는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야만 했는지 내심 당황해하고 있었다.
대공이 일단 국왕을 알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따라왔건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넓은 홀에 서 있게 되리라고는 몰랐었다.
바로 옆 청년 역시 표정을 보니 조금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도 얼떨결에 왔던가.
잠시 후 국왕이 손을 들자 좌중이 잠잠해졌고 이어 말문을 열었다.
“원래 붉은 기사단장을 선출하는 행사가 한 달 뒤에나 열릴 예정이었는데 부득이 오늘 부랴부랴 앞당긴 이유는 국경선 부근에서 피사로 제국과 작은 분쟁이 발생했기 때문이오. 상대가 제국인지라 그들과 협상키 위해서는 우리 왕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붉은 기사단이 급파되어야 하기 때문이오. 헌데 두 달 전 단장의 급사 사고로 그 자리가 아직까지 공석 중에 있으니 오늘은 필히 두 후보자를 놓고 단장을 가려야 하겠소이다.”
국왕의 말이 끝나자 지드와 청년은 매우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이런저런 당황할 틈조차 없이 행사 진행 요원이 앞으로 나와서 후보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했다.
“아마 두 후보자들께서도 어리둥절하리라 봅니다. 사전에 충분한 설명도 하지 못한 채 여기 서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마스란 왕국 붉은 기사단장의 후보자는 아무나 선택되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이라도 자신들이 후보자가 된 것에는 무척 자랑스러워 해도 됩니다. 금번 단장 선출 요량 조건 역시 국적에 상관없이 가장 강한 전투력을 지닌 자들 두 명을 후보자로 놓고 대결을 펼쳐 승자가 단장이 되는 방식입니다. 아무쪼록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지드는 그만 어이없어 했다. 후보자가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데다가 갑자기 대결이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법이었다. 설령 단장이 된다 할지라도 한곳에 묶여 있을 테니 그조차도 거부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점점 그의 표정이 굳어졌고 화마저 나려 했다. 하지만 여긴 공식적인 석상이니만큼 당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단 행사 진행에 따라야 할 처지에 놓였지 않은가.
진행 요원의 본격적인 소개 내용이 시작되었다.
“오른쪽 후보자의 이름은 정확히 지드라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얼마 전 펜스 지방의 죄수 폭동을 혼자서 진압한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간략한 소개가 나오자 좌중들은 저마다 경외의 눈빛으로 그를 살펴보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요즘 어딜 가도 화제인 장본인이 바로 저자였군.”
“곱상하게 생긴 것이 도무지 살육자의 모습이 아닌데?”
이번엔 진행 요원이 다른 후보자인 청년에 대해 소개했다.
“두 번째 후보자의 이름은 아라퀘스입니다. 그는 지난 일 년 동안 서부 영토 일곱 개 왕국을 거치며 그 나라 최강의 검사들과 일대일 대결을 하여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다 합니다. 며칠 전에는 아마스란 왕국의 검술의 달인 페스타르마저 제압한 사실이 있고요.”
이번에도 좌중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페스타르를 꺾다니…… 아직 어려 보이는데?”
“정말 모를 일이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마저 무너지다니!”
한편 지드는 식당에서 들었던 내용 중에 페스타르라는 검사가 어느 무명 검사에게 패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저 청년이…… 그 무명 검사라고?’
진행요원이 계속 말문을 이었다.
“이 둘이 붉은 기사단 단장 후보자가 되기에는 다들 아무런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전통대로 아마스란 왕국의 기사단장의 위치는 가장 강한 자만이 오를 수 있는 강자의 권리이기에 선출 방식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의도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럼 대결에 앞서 국왕폐하께서 직접 후보자들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국왕이 지드에게 먼저 질문했다.
“자네 검술 원류를 말해 보게나.”
지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대충 하나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공력검술입니다.”
“공력검술이라니, 대략적으로 설명해 보게나.”
지드는 내심 기분이 언짢았다. 자기가 국왕이면 국왕이지, 남의 검술을 까발리라는 것은 뭐란 말인가.
“공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검술입니다.”
너무도 간단한 내용이었다. 혹시라도 무성의한 태도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국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흠. 그런 거였군.”
“…….”
국왕이 이번엔 아라퀘스에게 물었다.
“자네 검술 원류는 뭔가.”
“원천기술입니다.”
“한번 설명해 보게나.”
“신체 내부로부터 진화되는 기술이라는 설명 외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국왕이 졸린 듯 대충 말했다.
“아함. 그 정도 설명이면 되었네.”
원천기술이라는 말에 지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원천기술이라……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게…… 아마 중부 대륙의 영웅인가 뭔가…….’
머리를 쥐어 짜냈지만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신체 내부로부터 진화되는 기술이라니. 세상에 그런 희한한 개념도 다 있었단 말인가?
그때 아라퀘스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지드 에게 말을 건네 왔다.
“당신에 대해 익히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대결하고 싶었는데 잘됐군요. 부디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당한 표정에 다소 오만한 말투랄까. 지드 역시 은근히 승부감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라…… 이 녀석 봐라? 제법 세게 나오는데?’
(하류검사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