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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 지드, 왕국을 얻다 (31/81)

Chapter 30 지드, 왕국을 얻다

짹짹.

정말이지 상상 속에서나 그려 봄직한 예쁜 새들이 긴 꼬리 깃털을 나부끼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광경을 보니, 이곳이야말로 남부 대륙의 최상의 휴양지인 아란시아 지방이 가까워져 왔음이 분명했다.

지드와 헤라는 사방을 둘려보며 계속해서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면 아라퀘스는 그다지 감흥이 없는 듯 별 반응이 없었으니 결국 지드가 또 한 소리 하고 말았다.

“하기야 네 녀석이 자연의 멋을 알기나 해? 쯧쯧!”

한번 눈에 나면 계속 미워 보이는 것일까. 지드는 아라퀘스의 진중한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렇게도 거슬릴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항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뭔가 무게를 잡는 모습이나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는 차분하고 굵게 말하지를 않나.

가끔 지드가 웃기려고 농담을 할라 치면 입을 꾹 다물고는 무표정으로 일관하질 않나.

그러다 보니 지금은 자신의 수하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자신과의 재대결 추진을 위한 연극이자 몸부림일 뿐이지 녀석은 승부사 기질로 똘똘 뭉친 검사에 지나지 않는 느낌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세상을 향해 도전해 가는 전형적인 승부사랄까. 모처럼 만에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저 자연은 자연일 뿐이죠.”

아라퀘스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지드가 불끈했다.

“그건 뭔 말이냐!”

“지극히 개인적 사견이 들어간 관점은 자칫 평온한 관조(觀照)의 흐름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가 이번에도 어려운 말을 늘어놓자 지드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쉬운 말로 하면 어디가 덧나?”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닌데요.”

“그래 너 잘났다.”

“대체 왜 그리 흥분을 하시는지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요.”

“그 잘난 면상 자체가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

아라퀘스는 당황한 나머지 그만 말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이번에도 헤라가 나설 수밖에 없었으니.

“단장님! 그만하세요, 트집도 적당히 잡으셔야죠!”

“갑자기 혈압이 올라서 그런다.”

“왜요?”

지드는 등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뒤에 남은 헤라와 아라퀘스는 다소 멋쩍은 듯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헤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단장님은 원래 저런 분 아니셨는데 요즘 들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라퀘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괜찮습니다.”

“아무튼 제가 다 미안하군요.”

“하하! 괜찮다니까요, 진짭니다.”

헤라는 그의 웃는 모습을 처음 봤던가. 매우 신기해하였다.

“어머, 웃을 줄도 아세요?”

“전 사람도 아닙니까? 웃지도 못하게요.”

“그게 아니라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거라서.”

“그동안 감정 조절을 했을 뿐, 나 역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이 없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정말 의외로군요. 뭔가 반전이 일어난 느낌이에요.”

“그대 역시 은근히 재미있는 숙녀 분이군요.”

“…….”

숙녀라는 말에 헤라는 그만 감격에 젖어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또래보다 조숙해 보이는 자신을 아마도 스무 살에 가까운 처녀로 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인가. 헤라는 더욱 얌전을 뺐고 말투 역시 부드럽고 우아하게 말하려고 노려했다.

“오늘따라 달빛이 무척 밝군요. 마치 제 고향에 있는 폭풍의 언덕에 와 있는 느낌이에요.”

“폭풍의 언덕이라고요?”

“네. 거긴 항시 바람이 이는 곳으로서 어릴 적 친구들과 많이 놀던 곳이랍니다. 후후.”

“이거 정말 놀랍군요.”

“놀랍다니요.”

“제 고향 레알카스 지방에도 폭풍의 언덕이라 불리는 명소가 있거든요.”

“정말요?”

“유서가 매우 깊은 곳이랍니다.”

“레알카스 지방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어디더라?”

그러자 아라퀘스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달이 밝군요. 얼마 만에 밤하늘을 감상하는 건지. 후우.”

“그 의미는 한동안 감상에 젖는 일이 없었다는 얘기겠네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두 청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헤라는 자신이 겪은 얘기들을 모두 해 주었는데 특히 지드가 펜스 지방의 죄수들과 전투를 벌이는 광경을 세세하게 말해 줄 때에는, 그처럼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던 아라퀘스마저 제법 관심을 가지고 경청했다.

잠시 후 헤라의 얘기가 모두 끝이 난 듯하자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 연유로 단장님을 따라나선 거로군요.”

“그분은 제 은인이랍니다. 이제 제 얘기는 끝났으니까 아라퀘스 님 차례예요.”

그가 문뜩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저는 한 위대한 영웅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지요.”

“집을 나섰다는 것은 가출을 의미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부모님 허락 하에 레알카스 지방을 떠나 수도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지요. 사관 생활 사 년 만에 흑검사 인준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아버님의 전례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제국을 벗어나서는 아버지의 흔적이 없는 여기 남부 대륙으로 오게 되었지요. 현재로서는 그분의 발끝이라도 따라가려고 열심히 세상 경험을 쌓는 중이고요.”

“아버님을 굳이 따라잡아야만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 있지요.”

“저기…… 제가 그 이유를 알면 안 될까요?”

그러자 아라퀘스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얘기 누구한테 해 본 적이 없는데, 굳이 알고 싶으시다면 얘기하겠습니다. 제 삶의 목표는 위대한 영웅이셨던 아버지의 위명으로 온통 감싸인 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누구신지 궁금하네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3군단을 이끄셨던 분인데 여기 남부 대륙에서는 아실지 모르겠군요.”

순간 헤라가 멍한 얼굴을 했다.

13군단의 영웅이라면 대륙 전체를 통틀어 그의 이름 ‘아독’을 모르는 사람이 몇 있겠는가. 산간 마을 출신인 자신도 그의 이름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건만!

“저, 정말 그분의 아들이세요?”

“…….”

아라퀘스는 말없이 밤하늘의 별빛만 두 동공에 가득 담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갔다.

휴양지 구역 중에서도 최상의 경관을 자랑하는 한가운데에는 그야말로 대리석으로 정성 들여 지은 호사스런 별장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귀빈들 중에서도 각국의 왕족이나 실세들을 위한 특별한 장소로서 오늘은 피가로 제국의 집정관과 군부 사령관이 독차지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야외 온천욕을 즐기는 두 사람, 그들은 잠시 후 이곳을 방문할 아마스란 왕국의 신임 붉은 기사단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어떤 자일지 궁금하군.”

사령관이 말하자 집정관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번 그 덜떨어진 단장과 거기서 거기겠지.”

“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발언은 삼가게나. 왕국 규모의 작은 나라에도 인재는 얼마든지 있는 법일세.”

“그 인재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버리고 제국으로 모두 몰려드니 그게 문제겠지.”

“하여간 다시 생각해 보게나. 여기 휴양지는 아마스란 왕국에게는 없어서도 안 될 중요한 관광 자원일 텐데 명색이 집정관이라는 자네가 개인 사욕을 위해 꼭 뺏어야 하겠나.”

“어차피 세상은 강한 자들 아니면 똑똑한 자들이 지배하게끔 되어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순리를 따라갈 뿐 멍청한 작자들에게는 일말의 동정도 없다네. 그 상대가 왕국이든 아니든 말이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때 거실 안쪽에서 시녀가 다가와 뭐라 보고했다.

“손님들이 방문하셨습니다.”

“누군지 확인했는가?”

“신임 붉은 기사단장이라 합니다.”

집정관의 화색이 단번에 밝아졌다.

“오호라! 드디어 왔군.”

그는 시녀 앞에서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 뚱뚱한 몸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별장 집무실에는 집정관과 그의 친구 군부 사령관이 좌측 상석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신임 단장이 착석해 있었다. 집장관은 상대방을 뚫어져라 살펴본 다음에야 말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젊군. 그나저나 자네 이름이 뭔가?”

“이번에 붉은 기사단 단장으로 새로 발령받은 지드라 하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니, 오히려 내가 할 소리이지. 난 하시우스라 하고 이쪽은 페세라 하네.”

지드는 집정관이란 자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50대 초반 정도의 중년인 같았는데, 유난히 반짝거리는 대머리에 살찐 볼 살이 마치 늙은 돼지를 보는 양 한눈에도 그가 매우 탐욕스러운 자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반면 옆에 페세라 소개한 비쩍 마른 중년인은 매우 차분한 인상이었고 다소 무게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상당히 위압감이 있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지드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은 제국의 집정관이 아니던가. 그가 이곳에 다시 나타난 이유는 십중팔구 이곳 휴양지의 수익권 나머지마저 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정관 하시우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전 단장 파멜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네.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지. 작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나와 형제 같은 사이로 매우 즐겁게 지냈건만. 훌륭한 인품을 지닌 아우였는데 정말 슬픔을 감출 수가 없네.”

집정관은 말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지드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순진한 전직 단장을 부추겨 결국 그의 자결을 이룬 장본인이 과연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씁쓸함부터 느껴졌다.

‘첫인상부터 더러운 기분이 팍팍 느껴지는군.’

지드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순박하게 웃었다.

“높으신 분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다니요. 정말 영광입니다요. 붉은 기사단 단장 자격으로 진심으로 이곳 방문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아무쪼록 잘 쉬다 가시기를 바라고요. 헤헤.”

지드가 갑작스레 실실거리는 말투로 바뀌자 하시우스가 손으로 자신의 두툼한 턱살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다시 살폈다.

“흠.”

지드는 일부러 허리를 굽히고 두 손바닥마저 비비며 말했으니 아예 비굴 모드로 가려는 것일까.

“기회만 주시면 잘 모시겠습니다요.”

결국 하시우스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허허. 보아하니 나와 단번에 나와 마음이 통할 자인 것 같은데 우리 한번 친해져 보면 어떤가.”

그러자 지드는 너무도 황송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체를 90도로 숙이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짜 고맙습니다요. 헤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정말 최선을 다해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지드의 태도는 웬만한 간신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매우 저자세였고 그 웃음이나 말투마저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친 쓸개 빠진 작자처럼 보였다. 하시우스는 젊은 신임 단장의 행동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내 기분이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부터 호감이 드는 친구로군. 하하! 이보게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밤 연회에 당장 참석하게나.”

“연회라니요?”

“자네를 위해 특별한 술 파티가 있단 말일세.”

술이라는 말에 지드의 귀가 번쩍 뜨였다.

“정말이십니까요?”

“집정관인 내가 딴소리를 하겠는가. 아무튼 자네와 측근들도 데려오게나. 내 후한 대접을 할 테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직 단장과 못다 한 사업 얘기도 있고 말이야.”

“사업이라니요?”

“이따 와서 자세한 얘기 나눔세.”

“아, 예.”

잠시 후 지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탁자에는 하시우스와 페세가 남아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덜떨어진 놈이 왔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걸?”

하시우스의 말에 페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소왕국이라지만 저따위 놈을 단장으로 선출했다면 아예 나라를 말아먹자는 거지. 쯧! 그래도 붉은 기사단이면 그 이름값 정도는 할 줄 알았거늘.”

“대체 자네는 누구 편인가.”

“속이는 자네보다 속는 자들이 너무 한심해서 그저 하는 소리네.”

“이제 알았는가. 세상은 멍청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넉넉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저 아무 얘기나 자신의 관점으로 갖다 붙이면 다 되는가. 자네 역시 제발 좀 그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게나.”

“정말 못 말리는 친구로만. 그놈의 잔소리는. 그나저나 가끔 생각해 보면 어째서 자네와 친구가 되었는지 모를 일일세.”

“내가 할 소리를 골라서 하는군.”

하시우스는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괜한 다툼 그만하고 못다 한 온천욕이나 더 함세.”

***

그날 오후.

피사로 제국의 집정관과 군부 최고 실세의 주최로 여는 파티랄까. 휴양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호사스럽고 규모 면에서도 드넓은 별장 저택 안에 수많은 귀빈들이 초청이 되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아마 이곳에 모인 손님들의 국적을 헤아린다면 수십 개 나라는 될 정도로 그들의 복장 역시 가지각색이었다.

그들 중에서는 유독 지드와 그의 일행들만이 집정관으로부터 최상의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연회석 중에서는 맨 상단에 위치한 곳에서 온갖 진귀한 음식들을 맛보고 있었다.

바로 옆 중앙 상석에는 집정관 하시우스와 군부 사령관 페세가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하시우스가 무슨 이유인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지드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지드와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만류를 했다.

“일어나지 말게. 난 그저 자네와 술 한잔 하고 싶어 온 거니까.”

“아, 네.”

하시우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술잔 하나에 술을 가득 부어 지드에게 건넸다.

“마시게나. 내 특별히 자네를 위해 준 술이니 말일세.”

“영광입니다요, 헤헤.”

지드는 너무도 감사하다는 듯 잔을 입에 대어 쭉 들이켰다.

꿀꺽.

“캬! 정말 좋네요.”

“나도 한 잔 주게나.”

이번엔 지드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고 그가 단숨에 들이켰다.

“아우가 따라 준 술이라서 그런지 정말 맛있네그려. 허허.”

“고맙습니다요.”

한편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지드의 일행인 헤라와 아라퀘스는 그의 그런 비굴한 행동에 못마땅해하는 얼굴들이었다.

특히 헤라는 단장이 술만 먹으면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되었다.

결국 그녀가 바로 옆에 있던 아라퀘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단장님 많이 취했나 봐요.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게요.”

그러자 아라퀘스가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모르는 일이라니요?”

“…….”

아라퀘스는 대답 대신 술 한 잔을 입에 갖다 대어 천천히 음미했다. 헤라가 다시 물었다.

“방금 전 그 말 무슨 의미죠?”

그러자 그가 헤라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는 단장님과 친하다면서 생각보다 그분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제, 제가요?”

“자, 우리 복잡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마십시다. 그나저나 술 마실 나이는 넘었겠죠?”

“…….”

어느 정도 시간이 무르익어 가자 집정관은 드디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술잔을 들어 지드와 부딪치며 은근슬쩍 작년 얘기를 꺼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쯤일까. 바로 이 장소에서 전직 단장 파멜과 나는 의형제를 맺고 몇 날 며칠을 술로 지새웠다네. 그런데 오늘날 그가 저 세상으로 갔다 하니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네그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그리 착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데려가야 했는지.”

지드가 물었다.

“많이 괴로우시겠습니다.”

“괴롭다마다. 사실 지금 참고 있는 거지만 슬픔이 여기 목까지 차올랐다네. 생각해 보면 그 아우의 죽음에 내가 원인을 제공한 꼴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마음이 갑갑하군.”

“원인을 제공하다니요?”

“그저 나는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그 아우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더라고. 여하튼 그 내기만 하지 않았어도 오늘날 그를 다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그 일이 무척 후회가 되는군.”

“내기라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하시우스는 갑자기 술잔을 들이켜더니만 진중한 표정으로 지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 당시 우린 한 가지 내기를 했다네. 내 호위병들과 아우의 붉은 기사단과 대결을 펼칠 시 누가 승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일세.”

지드는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분명 있었지. 그 내기에는 제법 큰 물건도 걸려 있었다네. 내 누누이 말하지만, 난 그저 장난으로 시작하려 했다네. 하지만 아우가 매우 진지했고 심지어 이곳 휴양지의 수익권의 절반을 내기에 건다고 그러지 않았는가.”

“휴양지라니요?”

“나 역시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었지. 하지만 가만 살펴보니 진심이더라고. 나 역시 할 수 없이 내 사유 재산인 평원 하나인 프리다 평원을 걸게 되었다네. 그리고 그날 결과에 따라 비극의 시초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애석한 일이지만 그의 기사단들이 보잘것없는 내 일반 호위병들에게 패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내기라지만 당시 주변 귀빈들이 참석했는지라 내기에 걸었던 물건들을 가져와야만 했다네. 흠. 다시 돌려줄 생각도 여러 번 했었지만 오히려 아우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꼴이 될까 봐 아직도 그 수익권은 내가 간직하고 있다네. 이제는 그 후임자인 자네에게 돌려주고 싶어도 그 어떤 명분 없이 그리 한다는 것이 세인의 주목도 있고 말일세. 흠.”

참으로 뻔뻔한 자가 아닐 수가 없었다.

최강의 특수검사를 일반 호위병 복장으로 위장시키고는 전직 단장을 아예 가지고 놀고도 모자라 자결케 한 다음에 오늘날에는 자신을 상대로 나머지 수익권을 뺏으려 하다니. 그 속셈이 너무도 치사하고 더러워 보였다.

지드가 말했다.

“전임자가 내기에서 진 물건을 돌려주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제게 명분을 세워 주시면 되겠군요.”

하시우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명분이라니?”

“저 역시 집정관님의 수익권을 그냥 돌려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작년과 똑같이 한 가지 내기를 놓고 그 결과에 따라서 정당한 대가를 바랄 뿐이죠.”

“또 내기라?”

“그렇습니다. 마침 오늘은 이곳에 각국으로부터 많은 귀빈들이 오셨는데 그분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기를 선언함으로써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생각입니다.”

“만일 자네가 져도 그리 할 텐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흠. 어차피 이번엔 내가 그리 승산이 없으니 굳이 자네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승산이 없다니요?”

“사실 작년 일 때문에 내 심경이 그리 편치 못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래서 이번에는 일반 호위병들도 아닌 그저 개인 시종들만 데려왔다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번엔 그들이 자네 기사단과 대결하게 할 걸 세.”

“네? 시종이라니요?”

시종이라는 말에 지드는 매우 놀라는 척을 했다.

“조금은 검술을 할 줄 아는 녀석들인데 아마 자네의 기사단에게는 맥도 추지 못할 걸세.”

물론 지드는 그의 음흉한 속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복장만 시종 차림인 매우 막강한 고수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는 내기이니만큼 이번에도 문서로 작성함세나. 나는 휴양지 수익권 절반에다가 작년과 똑같이 프리다 평원을 내놓을 테고 자네는 휴양지 나머지 수익권을 걸게나. 어디까지 형식이지만 말일세.”

순간 지드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후후. 형식 좋아하시네.’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그야 물론입니다. 대신에 이번 대결은 일대일이 어떻습니까.”

“일대일이라…… 뭐 나야 상관없지. 그나저나 누구 쓸 만한 수하가 있나 보군.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것을 보니 말일세.”

“전혀 아닙니다. 며칠 전 새로 가입한 신참입니다.”

“신, 신참이라니.”

“제법 검술은 할 줄 아는 자입니다.”

“설마 그런 애송이를 내보내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그를 내보낼 참입니다.”

“진심인가?”

“집정관께서 시종을 선택하셨으니 저 역시 어느 정도 형평성에 맞게 신출내기를 내보내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가장 실력 있는 자를 고르는 것이…….”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뭐 그렇게 하든지.”

“그럼 이곳에 오신 손님들 모두를 불러 모으겠습니다.”

“생각보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렇다면 그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우린 그저 내기만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잠시 후 귀빈들이 모인 가운데 하시우스와 지드는 탁자에 마주 앉아 서로 간에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용인즉 집정관 측과 지드 측으로부터 각 한 명만 나와 일대일 시합을 치르는데 결과에 따라서 양쪽이 내세운 내기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

잠시 후 별장 뒤편 조그만 공터에 손님들이 운집한 가운데 두 명의 대결자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 명은 시종 복장 차림이었는데 목검을 쥔 채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붉은 기사단 출신으로서 헐렁한 복장에 이제 갓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앳된 청년인지라 누가 봐도 신출내기가 분명한 듯했다.

그의 뒤에는 한 소녀가 응원을 보내고 있었는데 바로 헤라였다.

“아라퀘스 님, 조심하세요.”

“뭐, 그러죠.”

한편 시합장 중앙에는 자그마한 연단이 보였고 그 위에는 집정관을 비롯한 페세, 그리고 지드가 상석 줄에 편히 앉은 채 관람을 하고 있었다.

집정관은 시합 결과를 미리 상상에 떠올리기라도 한 듯 그 탐욕스런 미소를 은근히 내뿜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표정 관리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휴양지의 대한 모든 권리가 자신에게 이양될 것이라 생각하니 좀처럼 가만있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반면 지드는 매우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라퀘스를 살펴보고 있었다.

지난번 단장 선출식에서 자신과의 시합 때 보여 준 그 놀라운 전투 능력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매우 큰 것 같았다.

‘원천 기술이라 했겠다? 과연 집정관의 최강 검사를 제압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내기보다는 아라퀘스의 능력에 더욱 관심이 많은 지드,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다.

곧이어 시합이 속행되었고 시종복을 입은 자가 먼저 재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타다닥.

그에 반해 아라퀘스는 지난번처럼 그 특유한 상체 비틈 자세에 손목마저 확 비틀어 버리더니만 순식간에 몸통 회전력을 이용하여 무섭게 돌진해 오는 상대를 맞아 정면으로 들어갔다.

휘리리릭.

파팟.

“아악!”

그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마자 파공음과 신음이 들려왔다.

털썩!

뒤로 붕 떠서 나자빠진 자는 시종 복장이었다.

“컥컥!”

굵은 선혈을 계속 토해 내는 시종. 그에 반해 아라퀘스는 방금 전 비틈 자세로 검을 지면에 내려놓은 채 멀뚱히 서 있었다.

그때 참석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

“뭐야, 벌써 끝난 거야?”

“그 짧은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지?”

“시종이 쓰러진 것으로 보아서 된통 가격을 당한 모양인데.”

집정관 하시우스와 페세 역시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황을 다시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눈앞에 벌어진 느낌이랄까.

그처럼 짧은 시간에 대결이 끝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세상에, 대체 뭐야!’

어쨌든 이미 승패는 났다. 하시우스의 표정이 굳어지다 못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빌어먹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사실이 그랬다. 정말이지 피사로 제국 특수검사부 출신의 고수가 소왕국 기사단의 신출내기에 패한다면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런 믿어지지 않는 일이 눈앞에 버젓이 발생했으니 어쩌란 말인가. 지드가 애써 안타깝다는 얼굴로 집정관에게 말을 건넸다.

“시합이 싱겁게 끝이 났군요. 하기야 시종이 검을 몇 번이라도 더 잡아 본 기사단 신출내기를 이길 리는 없겠지요.”

지드는 말하다 말고 방금 전에 작성한 문서를 집어 들고는 다시 실실거렸다.

“헤헤. 어쨌든 고맙습니다요. 수익권 도로 돌려주셔서요. 아 참, 그리고 개인 사유지인 프리다 평원도 있었지요. 그곳 영지 규모를 알아보고는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왕국 하나 세울 정도로 엄청 넓다고 그러는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집정관님 덕분에 그게 통째로 굴러 왔으니 말이죠. 헤헤!”

“…….”

하시우스는 할 말을 잊은 채 부들부들 경련만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뭐에라도 홀린 듯 넋이 나간 사람 같다고나 할까.

대체 일이 왜 이리 틀어져 버렸는지 당장 납득하기가 어려웠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 지드가 내기 문서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레 왕국으로부터 돌아오라는 긴급 전갈이 와서 급히 서둘러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는 집정관이 딴소리라도 할까 봐 일부러 없는 얘기를 만들어 부랴부랴 자리를 뜨려고 했던 것이다.

“그럼 이만.”

아니나 다를까. 하시우스의 두꺼비 같은 손이 지드의 손목을 잡고 말았다.

홱!

“뭐, 뭡니까?”

“하하! 뭐가 그리 바쁘신가. 좀 더 즐기고 가게나.”

그의 완력이 은근히 셌기에 지드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야 하는데…….”

“정말 이 사람, 따 놓고 배짱인가?”

“배짱이라니요? 무슨 뜻인지요.”

“허허. 그냥 그렇다는 말일세. 그나저나 자네 이제 보니 겉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네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혹시 저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보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 그건 아니고…… 험. 그러니까 말이지 난 자네와 술이나 한잔 더 들고 싶어 괜히 둘러친 말이라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술 몇 잔만 먹고 진짜로 자리를 뜨겠습니다.”

하시우스는 정말이지 빤질빤질한 녀석의 면상을 보며 내심 죽사발이 될 정도로 가격을 하고 싶었지만 그야말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저 여우같은 놈이 문서를 들고 이 별장을 나가는 순간 자신의 금쪽같은 프리다 평원이 넘어가게 생겼으니 어떻게 하든 절대 나가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써야만 할 다급한 입장이었다.

지드 역시 그런 그의 생각을 훤히 읽고 있었다. 이쯤에서 지드의 진정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했던가.

잔머리 대왕!

그렇다. 그에게 유일하게 타고난 재주가 있다면 바로 잔머리였다. 항시 자신이 총명하다고 자부하지만 그 수준이 저급한 것들이 많은지라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에는 그의 잔머리는 한층 더 승화되어 일종의 슬기로운 기지로서 새로 탄생할 때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드가 술을 한잔 먹고 나서는 다소 괴로운 표정으로 집정관에게 말을 건넸다.

“제게 한 가지 고민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오호! 어서 말해 보게나.”

하시우스는 어떻게 하든 그를 붙잡아 놓을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오히려 그가 얘기를 꺼내 시간을 지연시켜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때 지드는 술에 취한 듯 께적지근한 목소리로 일부러 발음을 흘려서 말했다.

“신임 단장으로서 부하들에게 설움을 당하는 그 심정 아시는지요.”

“그 심정! 알다마다, 나 역시 초창기 장교 시절에 꽤 힘든 시기가 있었다네.”

“그러셨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붉은 기사단 단장만큼 텃세가 센 곳은 없으리라 봅니다. 보시다시피 제 나이가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데 단장 직을 수행하려다 보니 초반부터 여기저기 부딪치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게다가 전임 단장 파멜이라는 분의 검술 실력이 너무도 출중하였는지 글씨 이놈의 기사들이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집정관께서 그런 제 심정을 아시기나 합니까. 그나저나 취한다. 너무 마셨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겠구먼.”

“하다마다요. 지금도 기사단은 저를 신임하지 않을 뿐더러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전 한마디로 허울만 좋은 한심한 단장이란 말입니다.”

“흠. 그런 사정이 있었군. 내 경험을 말하자면 신임 지휘관들은 배정받은 곳에 도착하자마자 초반부터 강력한 기세로 기를 꺾어 놓아야 하건만.”

“제가 그때를 놓쳤다 아닙니까.”

“그거 안 됐군.”

그때 지드가 곁눈질로 집정관을 은근히 살피더니만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 준다면 단번에 위상이 오를 수도 있겠는데.”

하시우스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순간이었다.

“위상이 오를 수 있다니,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군.”

“제가 직접 시합을 치르는 것입니다.”

“시합이라?”

그때 술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 위로 고꾸라지는 지드.

쿵!

“아이고, 취한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어지럽네. 컥!”

하시우스가 그를 겨우 일으켜 세워 다시 물었다.

“이보게나, 그럼 이렇게 함세. 우리 측에서 한 명을 내 보낼 테니 자네가 그를 멋지게 제압하게나.”

“네? 무슨 말씀인지요? 컥. 후우.”

“내 자네를 도와준다는 말일세.”

“정말이요?”

“정말이고말고. 집정관 체면에 허튼소리를 하리라 보나.”

“아, 아닙니다요. 저는 도와만 주신다면 무조건 좋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문서 준비하고 시합을 합시다.”

문서라는 말에 하시우스의 정신이 확 깨였다.

“문, 문서라니?”

“이번에도 내기를 하자, 이 말입니다.”

내기라는 말에 하시우스는 정신이 확 깨었다. 아마도 녀석은 술 취한 김에 객기를 부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당장 문서를 준비하겠네.”

“빨리 빨리요. 컥, 취한다. 그나저나 이번 내기는 뭐로 할까요. 집정관님께서는 이미 휴양지 수익권과 프리다 평원도 잃었잖아요.”

“허! 이 사람이 왜 이러나. 내 명색이 제국의 집정관인데 설마 하니 그 정도 잃고 의기소침해질 줄 알았던가.”

“그럼 뭘 거실 건데요?”

“프리다 평원 바로 옆에는 매우 넓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네.”

“호수라고요? 글쎄요, 그게 좋은 건가…….”

그때 옆에 있던 페세가 깜짝 놀란 듯 하시우스의 소매를 끌어당기고는 귀에다 대고 뭐라 말했다.

“자네 정신이 있는 건가! 거긴 국유지이거늘!”

그러자 하시우스가 페세의 손을 끌고 잠시 만찬회석 뒤로 갔다. 잠시 후 그가 페세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도와주게나. 저 뱀같이 사악한 녀석을 이대로 보낸다면 난 평생 끙끙 앓고 지낼 걸세. 그러니 이번 한 번만은 자네가 이해함과 동시에 나서 주게나.”

“나서다니? 그건 뭔 말인가.”

“자네가 저 녀석 시합 상대로 나서란 말일세.”

페세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내가 말인가?”

“제국의 군부 사령관인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무리인 줄 알지만 한때 특수검사부에서 최강의 전투 기술로 수많은 실전에 명성을 날렸으니 이번 승산은 백 퍼센트라네.”

“그래도 어찌 내 체면에 저런 자와…….”

“그래서 친구로서 도와 달라는 그 말일세. 녀석의 검술 능력이라 봐야 보잘것없을 테고 게다가 술에 잔뜩 취해 있으니 자네가 입김만 불어도 픽 하고 쓰러질 것일세. 어쨌든 내 부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겠네.”

“이보게나,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부탁함세.”

하시우스가 등을 돌려 만찬회석으로 가자 페세는 다소 멍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었다.

지드가 물었다.

“어디 갔다 오십니까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저어, 내기는 없던 걸로 하지요. 제가 너무 술에 취해서요.”

화들짝 놀라는 하시우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법이 어딨나 말일세!”

“아뇨, 그냥 술에 너무 취하다 보니…… 자신도 없고…….”

“아닐세, 그건 결코 아니야. 남자가 한번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가야지!”

하시우스가 재차 다독거려 주자 지드는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지만 사내대장부로서 한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하겠죠.”

“암 그렇고말고. 하하. 자넨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니까.”

“아이고,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그럼 아까 말씀하셨던 호수인가 뭔가 하는 거 걸 겁니까?”

“내 분명 그렇게 말했지.”

“좀 약한 것 같은데요.”

순간 집정관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약하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저는 여기 아란시아 휴양지 수익권은 물론 이곳 관광 지방 전체를 통째로 걸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호수는 별로라 생각이 드는군요.”

“뭐라고!”

확실히 술을 이기지 못하고 실성했음이 분명했다. 영토 소유권 자체를 완전히 건다니 말이다.

“더 큰 물건을 걸지 않으시려면 이 내기 없었던 걸로 합시다. 컥! 취한다. 에고!”

지드는 자리를 뜨려는 듯 슬며시 일어났다.

“이젠 가서 쉬어야 하겠어요. 그럼…….”

하시우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여야만 했으니 녀석의 구미가 확 당겨지는 뭔가를 내놓아야만 했다.

일단 그의 소매를 잡아끌어 다시 자리에 앉히는 하시우스.

“왜 이러시나. 아직 초저녁이건만, 좀 더 즐기고 가게나.”

“뭐, 내기 건도 끝나고 별 재미도 없는 것 같아서요.”

하시우스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다. 까짓것, 호수 대신에 왕국 하나를 걸지.”

이번엔 지드가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왕국이라니…… 이 작자가 진짜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제, 제가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왕국이라 하셨습니까.”

“분명 왕국이라 말했지.”

“저, 저기 그러니까 나라를 말씀하시는 거 맞지요?”

“드니로 소왕국이란 곳이 하나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왕궁 습격 사건으로 인하여 국왕은 물론 왕족들 모두가 살해를 당했기에 한동안 국왕이 없는 상태로 그곳 신관과 대신, 그리고 기사단장 이렇게 세 명이 통치를 해 왔다네. 그러다가 지난번 무슨 이유인지 그곳으로부터 왕정 정치를 할 수 있게 요청이 들어온 상태일세. 다시 말해서 신임 국왕을 동맹국인 피사로 제국의 집정관인 나더러 선출해 달라는 것일세. 만약 내가 이번 내기에서 진다면 자네를 거기 신임 국왕으로 자리를 내주겠네. 어떻겠는가.”

“…….”

지드는 아무리 술에 취한 연기를 하고 있지만 심장이 이만저만 쿵쿵 뛰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이죠?”

“진심이다마다.”

“그럼 좋습니다.”

“당연히 좋고말고. 세상에 이와 같은 파격적인 제안이 어디 있겠는가. 잘만 하면 나라 전체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일세.”

지드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시우스는 그 자신이 황당한 제안을 내놓고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제아무리 세상이 두 쪽이 날지라도 녀석이 피사로 제국의 전설적인 특수검사 페세를 이기리란 확률은 전혀 없을 것이니까.

어쨌든 이번에는 지드가 서둘러 말했다.

“문서 준비할까요?”

“손님들도 증인으로 다시 불러 모으겠네.”

“나중에 딴 말씀하기 없깁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이네.”

잠시 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시우스와 지드가 각각의 합의 문서에 서명을 하고 서로 건네주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두 사람의 무모한 내기에 저마다 납득이 가지 않는 듯 혀를 내둘렀다. 아마도 술에 잔뜩 취한 두 사람이 정신이 나간 나머지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으로 여겼을까.

여하튼 오늘 밤 이 별장에는 다소 희한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

찌르르.

찌르르.

마당 주변의 풀밭과 수목 사이로 풀벌레가 유난히 울었다. 참석자들이 빙 둘러친 가운데 두 대결 검사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한 명은 비쩍 마른 몰골의 중년인 페세였고 다른 한 명은 비틀거릴 정도로 만취한 지드였다. 그는 연신 한숨을 쉬며 술기운을 토해 내고 있었는데 가끔 토악질 증세까지 있었는지 헛구역질을 했다.

“컥! 에고. 이것 참,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한편 헤라는 이만저만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 어린 그녀로서는 현재 지드의 행동에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무덤덤한 반응을 보여 왔던 아라퀘스 역시 막상 눈앞에 시합이 임박해 오자 눈빛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지드가 지닌 전투 기술이랄까. 세상에 나와서 7번의 대결에서 승리한 자신을 8번째 대결에서 패배시킨 장본인이 드디어 그 누군가와 대결을 가지려 하니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헤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단장님 술에 너무 취해서 제대로 시합도 못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아라퀘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취한 척하는 거겠죠.”

“취한 척이라니요.”

“진짜 취한 사람은 저렇듯 두 발의 적당한 보폭을 유지하며 폭풍이 와도 쓰러지지 않을 듯 절묘한 균형 감각으로 버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비틀거리는 것 같은데요.”

“자세히 살펴보면 상체 윗부분만 일부러 흔드는데 전체적으로 불균형하게 보일 수 있지요.”

“그렇다면 단장님이 진짜 연기를 하는 건가요?”

“단장의 행동은 상대방의 방심을 조장한 일종의 전술이라 할 수 있지요. 조금은 치사한 방법이지만…….”

“치사하다니요?”

“제 개인적인 견해이니 새겨들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

휘이잉.

시합장 한가운데 때 아닌 바람이 일었으니 두 검사의 충돌을 예견하는 것 같았다.

페세는 거대한 태산과도 같이 꼿꼿한 자세에서 목검을 한 손으로 쥐고는 어깨에 척 하니 올려놓았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보였지만, 그는 내심 자신이 피사로 제국 군부 최고 실세로서 이런 휴양지에서 내기를 위한 대결에 나왔다는 자체를 무척 당혹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것보다도 그가 이 순간을 매우 꺼려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술에 잔뜩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저런 녀석과 이 많은 귀빈들 앞에서 대결을 펼쳐야만 한다는 사실이 서글플 정도였다.

“이보게, 웬만하면 이 시합 없었던 것으로 하세나.”

그러자 지드가 대뜸 반박했다.

“없었던 일이라니요! 저는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 단장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컥!”

말하다 말고 헛구역질을 하는 지드, 그런 그의 모습에 페세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술 깨고 온전한 정신에서 대결을 하는 것이 어떤가?”

“싫소! 지금 내기에서 질까 봐 뒤로 빠지려고 그러는 거죠? 정말 치사하게 나올 겁니까! 아니면 시합도 하기 전에 힘 빼려는 작전일지도 모르겠지요.”

순간 페세는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뭐, 뭣이라!”

우직한 성품의 그로서는 설마 하니 지드가 술 취한 척 일부러 큰 소리로 자신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으리라. 결국 그가 목검을 어깨로부터 내려 지드에게 향했다.

“어리석은 자 같으니! 술김에 나라 영토를 내기에 걸 정도의 한심한 인물이 붉은 기사단 단장이라니! 같은 무인으로서 창피한 일이로다.”

지드가 입술을 쭉 내밀고 약 올리듯 말했다.

“대체 뭔 말이래요?”

“젊은 녀석이 귀까지 먹었는가.”

그때 갑자기 지드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고 페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국의 최고 권력자가 조그만 왕국의 관료를 속여서 부당 이득을 취한 일은 한심하다 못해 파렴치한 일이 아닌가요!”

페세가 놀란 얼굴을 했다. 느닷없이 녀석이 제정신으로 돌아와서는 똑 부러지게 말하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 내용인즉 집정관을 빗대어 말하는 것 같으니 당장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상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하시우스 역시 속으로 철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지 모르지만 녀석이 다소 사악한 얼굴로 돌변해서는 자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페세가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주둥아리만 나불거리지 말고 당장 오너라. 내 요절을 내 줄 테니 말이다.”

지드가 손으로 입을 막더니만 킥킥거렸다.

“그냥 해 본 말인데 기분이 상하셨나 봐요.”

“뭐라!”

“진짜로 뭐 찔리는 거 있나요?”

페세가 목검을 꽉 움켜쥐고 지드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모양인데, 내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지!”

저벅저벅.

삭 슥.

곧이어 페세는 목검으로 지드의 상체 중에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를 겨냥해 정확히 두 번 휘둘러 쳤다.

“…….”

헌데 그저 허공을 가른 느낌이랄까. 허전했다. 아니 그곳에 있어야 할 지드가 어느 순간 옆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는 미소를 짓는 녀석.

“저 여기 있지요! 헤헤.”

“언, 언제 그쪽으로…….”

페세는 그저 두어 대 가격으로 녀석을 바닥에 누임으로써 이 시답지도 않은 시합을 끝내려 했건만 어느새 옆으로 피해 있었던 것이다. 술 취한 놈치고는 매우 신속한 동작이었던가.

‘어라, 이놈 봐라? 그렇다면!’

붕!

“헉!”

페세의 기습적인 공격에 지드가 개구리처럼 팔짝 뛰어 뒤로 피했다.

착.

“피했다!”

“뭐야?”

다시 한 번 허공에 검을 긋고 만 페세, 그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젓고 말았다.

“보기보다 제법이군.”

그때 지드가 흐느적거리며 양손을 들어 이상한 동작을 취하는가 하면 비틀거리다가도 균형을 잡고 요상한 폼으로 춤추는 듯했던가. 결국 페세의 눈살이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장난이라니요! 이건 취권(醉拳)이란 무공이란 말입니다.”

“추이…… 구…… 언…… 이라니?”

발음하기도 힘든 이상한 언어였다.

“하지만 이렇게 손에 목검을 쥐었으니 지금부터 화산검법으로 상대해 드리겠소.”

“화…… 산…… 은 또 뭔가?”

“자, 이젠 제가 공격해 들어갑니다.”

지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목검을 앞세워 돌진해 들어갔다.

“독고구검 제일 초!”

타다닥.

홱!

“헉!”

“제이 초!”

휘리리릭.

파팟.

“욱!”

페세는 연이은 기습 공격에 복부를 강타당한 채 상체를 숙였고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설마 하니 저 망나니 같은 자의 검에 당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곧바로 검을 부여잡고 노기 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한번 해 보자 이건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해도 괜찮은데요.”

“이젠 나와 농담도 따먹자 이건가. 좋다!”

웅.

착!

진동음에 이은 파공음이 그의 목검으로부터 일었고 어렴풋한 하늘색 강기가 주변에 발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화가 난 나머지 실전 검술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살벌한 눈빛으로 지드에게 다시 말했다.

“이번 공격으로 자네 목숨이 날아갈 수 있으니 잘 생각해서 대비하게나.”

그러자 지금까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던 지드가 진중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배려 어린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승부는 끝나 봐야 아는 법이 아닙니까. 이쯤에서 결단을 지으려는 모양인데 웬만하면 최고의 경지를 끌어 올려 공격하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이 대결이 시시하지 않을 테니까요.”

“뭐라…….”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던가.

페세는 상대가 완전히 실성을 한 듯 혀까지 끌끌 차기에 이르렀다.

“쯧쯧.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그 모양이 되었을꼬. 어쨌든 승부는 내야 하니 각오하게나.”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조차 엄청난 포스가 실린 듯 바닥 돌판에 금이 갈 정도였다.

하물며 그가 쥔 목검에는 이미 강력한 강기가 서려 있었으니 그 옛날 전장에서 수많은 적들을 베고 또 베었던 특수검사의 실전 검술이 오랜만에 폭렬이라도 할 참이었다.

“조심하게나!”

붕!

파팟.

지드 역시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두 개의 무기가 충돌하는 순간 들려오는 무식한 음들.

부지직.

빡!

“억!”

풀썩.

힘 대 힘이랄까. 서로의 공력이 실린 두 개의 목검이 맞부딪치자마자 한쪽이 나뭇가지처럼 쉽게 부러지며 이마 부분을 정통으로 가격 당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장본인이 페세였고 뒤보기 좋게 뒤로 자빠져 실신에 이르게 되었다.

“…….”

수많은 참석자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는 듯했지만 곧이어 누군가의 외침이 있었다.

“사령관께서 쓰러지셨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벌써 끝난 건가?”

목검끼리 단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한쪽의 무기가 박살나면서 상대마저 바닥에 고요히 누워 버린 상황이던가.

더군다나 그 장본인은 제국의 군부 사령관이라는 사실이 그제야 인식이 되었는지 여기저기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점차적으로 증폭되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

“이건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되는 입장에 놓인 자는 바로 집정관 하시우스였다.

“어찌 이런 개 같은 일이!”

부들부들.

그는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고 두 주먹은 으스러지도록 세게 주었다. 그때 지드가 마당을 가로질러 그가 있는 단상 아래까지 다가오더니 큰소리로 물었다.

“제가 내기에서 이긴 것 같은데요. 아까 문서 합의 조항은 예정대로 이루어진 거 맞죠?”

“…….”

집정관이 대답을 못하자 지드는 주변 참석자들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각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이 분명할진대 제가 아마스란 왕국 붉은 기사단 단장으로서 한 가지 물어봅시다. 시합 전에 피사로 제국 집정관님과 저와 문서로 합의한 조항대로 저는 이행하려 하는데 이의가 있으신 분들은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드는 집정관이 딴생각을 할까 봐, 미리부터 증인들 앞에서 확고한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었다. 어쨌든 반응은 즉각 나왔으니 누군가 말했다.

“문서로 합의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하겠죠!”

“맞소이다. 이는 비록 내기일지라도 많은 증인들과 나라 간에 협약이니 공식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오이다.”

“집정관께서는 약속을 지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감이오.”

지드가 집정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합의한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드니로 왕국은 어디 있는 겁니까?”

“…….”

털썩.

집정관은 망연자실한 채 그만 제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마당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부축으로 겨우 일어나는 페세, 그는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잠시 후 지드는 자신에게 다가온 헤라와 아라퀘스에게 멋쩍은 듯 씩 웃었다.

“이거 팔자에도 없는 왕 노릇까지 하게 되었네?”

그러자 헤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진짜 내기 조항대로 할 거예요?”

“당연하지. 국왕 시켜 준다는데 그걸 마다하면 되겠냐.”

이번엔 아라퀘스가 놀란 듯한 눈치였다.

“진짜 거길 가실 겁니까.”

“농담 아니다.”

아라퀘스와 헤라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이튿날 아침, 지드는 붉은 기사단 수뇌들을 불러 이곳에서 일어났던 얘기들을 자세히 적은 편지를 주며 메르 대공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

편지 내용 마지막 부분에는 지드 자신은 할 일을 마쳤으니 단장 직을 사임한다는 얘기를 간단하게 적어 놓았다.

그리고 집정관으로부터 내기에서 얻은 프리다 평원은 훗날 제국과의 관계를 위해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되 머나먼 드니로 왕국의 국왕 자리에는 관심이 있어서 그곳으로 출발한다는 아주 솔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같은 시각 휴양지를 벗어나는 또 다른 마차가 있었으니 그 안에는 전날에 내기에서 패한 집정관 하시우스와 사령관 페세가 있었다.

그들은 매우 침통한 표정들이었는데 저마다 가끔 마차 창밖으로 내다보며 한숨을 짓곤 했다.

“자네 때문에 이 무슨 망신인가? 늘그막에 이젠 좀 쉬면서 국정에 임하려고 모처럼만에 휴양지에 왔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기 좋게 뻗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일세.”

페세의 푸념에 하시우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설마 하니 자네가 패하리라고는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젊은 단장 놈이 그리도 강할 줄이야.”

“어쨌든 난 실력으로 졌으니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겠지만 자넨 드니로 왕국의 국왕 자리를 빼앗겼으니 이만저만 상심이 큰 게 아니겠군.”

역시 그 둘은 수십 년 지기 친구였던가. 이런 큰일을 겪었지만 누굴 탓하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배려적인 차원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무슨 이유인지 하시우스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는 것이 아니던가.

“자네는 정말로 내가 그 녀석에게 국왕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생각하나?”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 녀석이 국왕 노릇을 할 드니로 왕국의 내부 사정을 안다면 그리 생각 못하지. 사실 난 이미 특수정보원들을 파견해서 그곳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상태라네. 왕궁 습격 사건 때문에 왕가 전체가 몰살당한 사건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사정을 말일세. 어쨌든 드니로 왕국이란 나라는 내가 살면서 보아 온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가장 역겹고 더러운 정치판이 존재하는 곳이야. 왕가 몰살 사건이 몇 번이라도 더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끔찍한 곳이라네.”

“그래서 순순히 그곳의 왕 자리를 내기에 걸었었군?”

“사실 반대 세력의 눈엣가시 같은 자를 골라서 그곳에 보내 고생 좀 시키려고 했는데 그 자리를 오히려 그 얄미운 젊은 단장 놈이 갔으니 나로서는 그다지 손해 보는 일은 아닌 게지. 후후!”

“도대체 드니로 왕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일단 왕궁 습격 사건에 대한 전모부터 들려줌세. 그리고 그 배후와 얽히고설킨 내용까지 말일세. 아마 먼 여정 길이 심심치는 않을 걸세.”

“범인은 밝혀졌는가.”

“물론이지. 그런데 그게 좀 복잡하네그려.”

“복잡하다니?”

“지금부터 말할 테니 다 듣고 나서 자네도 한번 추리를 해 보게나.”

“추리라고?”

“아무튼 흥미 있는 사건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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