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5 나는 왕이로소이다 (36/81)

Chapter 35 나는 왕이로소이다

휘이잉.

제법 높은 구릉지 정상이었다. 계절적으로 늦가을로 접어드니 한 줄기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지드와 일행은 산등성이 한 개를 넘어와서야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에르가니아와 카르발디는 바위 아래쪽에 지드와 그의 일행이 저들끼리 서로 마주 보며 뭐라 소곤거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 그들의 다소 옹색해 보이는 행동에 결국 카르발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행동들도 수준대로 노는군. 지금 내가 저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 나 참!”

에르가니아가 그를 나무랐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하겠어요.”

“들으라지요. 아니 들은들 자신들이 모욕당하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한심해 보이는데요. 사실 지드를 따라나선 그대의 행동 역시 더욱 납득할 수 없는 일이오.”

그녀가 불끈하고 말았다.

“그러기에 누가 따라오라고 했어요? 지금이라도 갈 길 가든지요.”

“참으로 매정한 말만 골라서 하는군요. 내가 굳이 그대와 함께 신생 왕국에 가려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요. 그곳에는 이미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 않았소. 그런데 저 지드라는 자가 등장했다 칩시다. 그는 물론이고 함께 간 동료들 역시 무슨 일을 당할 수 있지 않소. 그러니 이쯤에서 마음을 바꾸고 나와 함께 중부 대륙으로 갑시다.”

“정말 집요하군요. 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지요? 지금부터 그 얘기는 다시 하지 마세요.”

한숨을 짓고 마는 카르발디.

“후우. 알았소. 거기 가서 위험에 빠지든지 말든지 더 이상 상관 않을 테니 지드라는 작자에게 휘둘리지나 마시오.”

한편 바위 밑에는 지드가 헤라와 아라퀘스에게 뭐라 쑥덕거리고 있었으니 자신의 거지 왕초 신분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을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들 알아들었지? 난 왕초고 너희들은 내 밑에 있는 떠돌이 거지라는 거 말이야.”

헤라가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난 숙녀라서 그런 역할 하기 싫은데요.”

“싫은 게 어디 있어! 하라면 할 것이지.”

“혹시 저희가 장난친 거에 대한 화풀이로 괜히 그러시는 건 아닌가요?”

“그건 아니야. 내가 굳이 신분을 속이고 신생 왕국에 가려는 이유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떠보기 위함이지.”

“그렇다고 굳이 거지 행세를 할 건 없잖아요. 그냥 떠돌이 방랑 검사라든지 좋은 게 얼마든지 있잖아요.”

“시끄럽다.”

이번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라퀘스가 말문을 열었다.

“아무튼 신생 왕국에서 기다릴 정도로 대단한 분이라니, 정말 놀랍습니다.”

지드의 안색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으니.

“글쎄다. 너무 오랜만에 돌아왔는지라 예전처럼 반겨 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그곳에서는 한창 내분이 일고 있다던데.”

***

그로부터 5일 후.

지드와 일행은 드디어 언덕 위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 아래 커다란 성벽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예상이 맞다면 저곳이 아직 국호가 정해지지 않은 신생 왕국이 분명해 보였다. 잠시 후 이들은 초원을 가로질러 성문 중앙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위쪽 망루에는 경비병들이 보였고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신분을 밝혀라!”

그러자 카르발디가 대표로 말했다.

“우리는 마르카스 도시의 국경선을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마르카스 도시라고?”

경비대장이 눈빛을 번쩍이며 저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남자 세 명에 여자 두 명, 도합 다섯 명인데 둘의 행색은 그런대로 봐 줄 만했지만 다른 세 명은 영락없는 비렁뱅이가 아니던가.

최근 이곳으로 전향해 오는 떠돌이 용병들 역시 오랜 방랑 끝에 옷이 헤질 대로 헤져 있었으니 그는 저들 역시 이곳에 합류하러 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대들은 용병들인가?”

“그렇소! 우린 전직 용병들이 맞소. 그리고 우리들 중에는 그대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분이 있소이다. 그러니 당장 성문을 열고 영접을 하기 바라오.”

경비대장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분이라니, 그게 누군데?”

“바로 지드 대장이요.”

지드 대장이란 말에 경비대장뿐만 아니라 다른 경비 병사들까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뭐라! 지드 대장이라고? 대체 누가 그분인가?”

그러자 일행 뒤쪽에 있던 지드가 앞으로 나와서는 슬며시 손을 들고는 말했다.

“나요.”

“…….”

경비대장이 그를 살펴보고는 그만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라고?”

“그렇소.”

“정말 당신이 지드요?”

“그렇다니까요.”

완전 거지 차림새에 얼굴도 한 달은 씻지 않은 몰골이랄까.

경비대장은 필시 거지가 그의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이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거짓말하면 목숨이 달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거짓말 아니오!”

“…….”

당찬 대답에 대장이 주저거리자 이번엔 에르가니아가 나섰다.

“지금 당장 가장 높은 상급자를 불러 주기 바랍니다.”

그제야 경비대장이 부하들에게 당장 상부로 갈 것을 지시했다.

잠시 시간이 흘러서야 지드와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지드의 귀환 소식이 알려지면서 신생 왕국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가뜩이나 내분으로 인해 어수선한 상황이건만 그 한가운데 폭풍의 핵이 등장했으니, 이제까지 앞선 세력을 유지해 왔던 이리가시 용병대장은 이만저만 당황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드의 추종자들은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맞은 듯 뛸 듯이 기뻐했다. 맨 처음 지드를 맞이한 자는 티온이었다.

왕궁으로 보이는 큰 건물 현관 앞에는 티온뿐만 아니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수장 지노와 대원들도 나와 있는 것이 아니던가. 돌격대장이었던 스카페트 역시 뒤쪽에 나와 있었다.

“아이고, 대장님!”

“대장님!”

수장의 특유한 억양이 너무도 반갑게 들려왔고 1호의 굵직한 음성, 그리고 2호를 비롯해 막내 8호 아레스가 황급히 계단 아래쪽으로 뛰어 내려와 지드와 포옹을 했다.

“대체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흑!”

“정말 너무하는군요. 말도 없이 우릴 버리고 오 년 만에 나타나다니요.”

지드는 수장과 대원들의 성화에 별다른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글썽였다.

그렇게 그들은 깊은 해후를 나누었고 잠시 후에야 진정을 하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장님 몰골이 왜 그러십니까.”

“일부러 거지 복장으로 위장이라도 하신 거 같은데.”

그 대목에서 카르발디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으니.

“위장이 아니라 진짜 거지라오.”

순간 수장과 대원들이 멍한 얼굴들을 했다.

“진짜 거지라니! 그건 대체 뭔 말이야.”

“대장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다니 정말 싸가지 없는 작자군.”

그들이 화가 난 듯 따지듯 물어보자 카르발디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것 아닌가. 나 참.”

수장 지노가 지드에게 물었다.

“저자 말이 사실은 아니겠지요?”

“…….”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지드. 이에 대원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지드를 다시 살펴보았다.

“설, 설마 진짜 거지는 아니겠지요!”

“대장님! 뭐라 말씀 좀 해 보세요. 아니라고 말입니다.”

“…….”

결국 대답을 않는 지드, 이번엔 티온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네 몰골을 보니 지난 오 년 동안 꽤나 고생이 많은 듯 보이는데.”

그제야 말문을 여는 지드.

“조금 했습니다.”

“그나저나 그 복장은 뭔가.”

“복장이라니요?”

“누가 봐도 비렁뱅이 차림새가 아닌가. 그걸 입고 이곳에 나타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것인가.”

지드는 티온 노인에게만은 뭔가 암시를 주려는 듯 고개만 살짝 끄덕거렸다. 과연 인생 연륜이 높은 티온이 대충 눈치를 챈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 조용한 데 가서 단둘이 얘기함세나. 과연 아르게논 그 친구의 유언대로 자네가 경험다운 경험들을 했는지 궁금하군.”

티온은 지드만을 데리고 어디 은밀한 곳으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에 수장과 대원들은 여전히 슬픈 기색들이었으니 정말 지드 대장이 지난 5년 동안 거지 생활을 한 줄로 믿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헤라와 아라퀘스만이 내심 미소를 지을 뿐.

그 이튿날 이리가시 용병 대장과 그의 추종자들은 지드의 귀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극도로 긴장된 반응을 보였지만 그가 수년 동안 비렁뱅이 생활을 해 왔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가시는 여전히 불안했다. 고집불통에다가 여우 같은 늙은이 티온이 어떻게 하든 반드시 지드를 왕으로 추대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이리가시가 참모진들에게 물었다.

“아무나 의견을 말해 보게나. 지드 그 녀석의 귀환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말일세.”

참모진 중에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의견을 내지요.”

“오호! 하키리우스 님께서요.”

그는 선대 때부터 참모를 지내 온 고령의 노인이었는데 이리가시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니 오히려 존경해 마지않는 정신적 지주랄까.

이리가시 용병 집단이 한때 연승 행진을 기록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그의 천재적인 지략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걱정을 합니까? 제 생각에는 지드 대장의 귀환에 대해서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비렁뱅이 생활을 했던 그의 존재가 두렵기보다는 티온이나 그 외의 추종자들 사기가 충천하여 힘들게 쌓은 우리 세가 흔들릴까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하키리우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유감이군요. 이미 대권의 칠 할을 손에 쥐고도 그런 약한 말씀만 하신다면 애초부터 왕에 자리에 오를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리 고령의 참모라지만 조금은 심한 말이던가. 이리가시의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왕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요?”

“그저 빗댄 말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진정 신생 왕국의 주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가 또박대는 어조로 진중하게 묻자 이리가시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그의 단호한 말에 노인이 그제야 표정이 풀렸고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당장 되십시오.”

“당장 되다니요?”

“병권의 칠 할을 이용하여 그 자리에 오르면 답은 간단히 나옵니다.”

“그러니까 반대 세력과 타협이고 뭐고 없이 무력으로 말이오?”

“물론 그 전에 아주 간단한 절차 하나쯤은 거쳐야 하겠지요. 우리 측으로 넘어온 병사들 중 상당수가 원래 지드 용병단의 하류검사 출신들이 많은데 사실 옛 대장의 귀환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다소 흔들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요. 만일 지금 무력을 사용하게 되면 그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가 작용하기에 확실한 검증 절차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겠지요.”

“검증 절차라니요?

“바로 과연 왕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철저한 검증입니다.”

그제야 이리가시의 화색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지드 그 녀석에 대한 검증을 말씀하신 거로군요.”

“맞습니다. 지난 오 년 동안 그의 행적을 말입니다. 그가 비렁뱅이로 지내 왔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인데 만일 공청회장에 그를 불러 세우고 확실한 망신을 준다면 아마 측근들조차 실망을 금치 못하고 떨어져 나갈 게 틀림없을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요. 그렇게만 된다면 자연스레 왕이란 명분이 내게로 오게 되고 그저 앉아서 편히 받아들이면 되겠네요.”

“허허. 이 싸움은 이미 끝났다고나 할까요. 그다지 걱정하실 가치도 없습니다.”

“잘 알겠소. 지금 당장 티온에게 공청회 제안을 타진해 봐야겠소.”

“만일 그가 거부한다면 우린 병력을 움직일 명분이 충분히 생기는 것이니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하하. 과연 그대는 작전 참모이시오.”

***

며칠 후 광장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은 나라가 세워지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공청회라는 의미로 강당 건물에서 행사를 진행하려 했지만, 그토록 기다려왔던 지드 대장에 관한 검증 공청은 시민들마저 워낙 관심이 뜨거운지라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을 정한 것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임시 목조 연단이 세워지고 그 위에는 개국에 참여한 중요 관료들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들끼리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좌석 배치는 두 파로 나뉘어 분리되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지드 지지자들인 티온과 스카페트 그리고 대원들이 보였고 왼쪽에는 이리가시와 그의 추종자들인 군부 지휘관들이 있었다.

공청회의 시작은 애초 서로 합의한 대로 양측에서 한 명씩 나와 과연 지드가 신생 왕국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심층 있고 자세한 질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배심원들은 그 옛날 전설적인 폭풍 용병단원들로서 현재는 이 나라의 예비 원로원들이었는데 도합 150여 명이었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위대한 영웅 아르게논과 함께 남부 대륙을 질주하며 원대한 꿈을 이룩했던 전설적인 용병들이었다. 그렇기에 아르게논이 임종 직전 후계자로 정한 지드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려 했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오늘날 초라한 몰골로 나타난 그에 대해 저마다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으니 하나 둘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끼리 공청회 직전에 회의를 가졌으니 내용인즉 지드가 비록 후계자의 운명을 타고났을지라도 자격 요건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상대측인 이리가시에게 표를 던질 의사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

곧이어 지드가 연단 한가운데 마련된 의자에 착석함으로써 공식적인 공청회가 시작이 되었다. 먼저 이리가시 측으로부터 지드를 검증할 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이번 공청회를 주도했던 장본인 하키리우스였다.

고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걸어 나오는 그의 기세와 눈빛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당당했고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참석자들 들으라는 큰 소리로 지드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그대의 귀환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지드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공청회를 시작하기로 합시다. 그대의 경력을 살펴보자면 지금으로 오 년 전 전 팔라카스 제국 내(內) 하류 구역 제오 구간에서 아르게논 님과 이리가시 님의 용병들이 제국군에 항거 도중 구릉지에 하류 용병들 이천여 명과 함께 본진에 합류한 것으로 알고 있소. 내 말이 맞지요?”

“그렇소.”

하키리우스는 다소 입맛을 다지며 허무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대의 경력이라는 것이 그게 다지요?”

“…….”

예상했던 대로 처음부터 강공으로 나왔던가. 지드가 당장 뭐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지금부터 시작인 듯했으니.

“그런 경력 가지고 어째서 아르게논 님이 그대를 점찍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그는 말하다 말고 배심원석을 슬쩍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역시 매우 공감하는 듯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키리우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주군을 띄워 주기로 했다.

“그대에 비해 이리가시 용병대장은 수많은 전투 경력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역시 아르게논 님을 돕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제오 구간에 합류했던 일 등, 게다가 수많은 정식 용병 단체들조차 가장 영향력을 펼쳤던 분이 왜 오늘날 그대같이 초라한 경력의 소유자와 왕의 자리를 놓고 공청회를 해야 하는지 난 솔직히 그 의미를 모르겠소.”

제법 언변이 좋은 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군중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듯 보였으니, 이번 공청회의 결과는 벌써부터 결정이 난 느낌이랄까.

그는 잠시 허탈한 척 하늘을 우러러보더니만 이내 지드를 바라보며 간단하게 물었다.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시오. 진정 그대가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

지드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런 그의 소극적인 태도에 하키리우스는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답을 않는 것은 제 질문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소. 사실 난 그대의 경력을 조사하면서 과거 행적에 대해서도 잠깐 살펴볼 수가 있었지요. 그대는 농촌 출신으로서 십 대의 나이로 무작정 하류 구역에 와서 검사의 꿈을 펼치려 했었지요.”

지드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십여 년 동안 정식 용병 집단은커녕 그 어떤 단체에서조차 받아 주지 않았기에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요. 마을에서조차 천덕꾸러기로서 빈둥거리다가 다시 검술의 꿈을 안고 산속에 들어갔다지요. 그 후 어찌된 영문인지 그대는 제법 출중한 검술 실력으로 경호대장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시 하류 구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류검사들을 규합하여 단 한 번 반짝 전투에 참가한 정도가 살아오면서 최대의 경험이라 할 수 있겠군요.”

내심 승기를 확실히 잡은 양, 승자의 표정을 짓는 하키리우스.

“자! 그럼 제 개인적인 결론을 말씀드리겠소. 지금까지 내 얘기를 들어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저런 보잘것없는 삶을 이어 온 자가 피땀 흘려 세운 이 나라의 주인이 결코 될 수 없음 너무도 잘 알 것이오. 우리에겐 아르게논 님의 뒤를 이어 훌륭한 용병 업적을 지닌 이리가시 님이 계시는데 뭘 더 망설이시는 겁니까. 저는 이만 말을 마치려 합니다. 여러분의 표정과 눈빛으로부터 누굴 가려야 할지 확고한 신념을 볼 수 있기에 말입니다.”

그가 연설을 마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군중들 중에 누군가 박수를 쳤고 곧이어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

와와―!

아리가시 측에서 심어 놓은 선동자들의 주동에 군중들의 마음이 흔들렸던가. 여하튼 지드 측에서 그다지 조짐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드를 대변하기 위해 한 젊은 청년이 등장했다. 놀랍게도 그는 아라퀘스가 아니던가. 꼿꼿한 자세에 당당한 발걸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연단의 참석자들과 수많은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일단 제 소개를 올리자면 저는 중부 대륙에 위치한 아르카도 제국 사관생 출신 아라퀘스라 합니다. 제가 지드 대장의 대변인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제법 많은 날들 동안 그분의 행적을 옆에서 지켜봐 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앞서 말한 내용들을 들어 보니 저야말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렇게 보잘것없었던 분이 여기가 아닌 바깥세상에서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런 오해를 풀어 드리기 위해서 제가 보고 느낀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석자들과 군중들의 귀가 그의 입술로 일제히 쏠렸으니 그가 세상 밖에서 과연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매우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뒤쪽 상석에 앉아 있던 티온은 이미 내용을 아는 듯 다소 여유로워 보였고 헤라 역시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라퀘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머나먼 영토에 위치한 아마스란 왕국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그곳 펜스 산악 지방에는 흉악범들만 가두어 놓는 감옥이 있었는데 어느 날 폭동이 일어났고 순식간에 죄수들이 주변 마을들로 퍼져 나가 아주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었지요. 무려 네 개 마을이 점령당하여 살인과 방화, 약탈에 학살까지 당했지만 산악 지형인지라 왕국에서는 군대조차 파견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주변 칠 개 마을들까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직전 때마침 한 분의 검사가 나타나셨는데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지요. 단 일주일 만에 단신으로 그들 모두를 제거했으니까요. 이미 짐작하셨으리라 보는데 바로 그분이 제 뒤에 앉아 계신 지드 대장님이었습니다.”

순간 군중들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정말 그게 사실인가?”

“혼자서 해결했단 그 말이지?”

계속해서 들려오는 아라퀘스의 음성.

“그 후 지드 대장은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장을 역임하시기까지 했죠. 그뿐만 아니라 전임 단장이 어이없는 내기에서 잃어버렸던 휴양지 수익권과 심지어 그들로부터 제법 넓은 영토를 찾아왔으니 제국을 상대로 외교 수환 능력에서 그처럼 뛰어난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놀라운 기지에 찬사를 보내고 싶군요.”

참석자들은 저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등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정말 지드 대장이 비렁뱅이 생활 대신에 그런 엄청난 일들을 했단 말인지. 하지만 아직 아라퀘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지드 대장의 드니로 왕국의 국왕이 되셨던 얘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왕이란 말에 모든 사람들이 멍한 상태가 되었다.

아라퀘스는 지드가 신임 국왕의 신분으로서 왕궁 습격 사건을 파헤쳐 깨끗이 해결한 일 등을 상세히 나열했다.

그도 이미 인간적인 지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음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국왕이 되어 그 자리에 안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국왕의 후계자를 찾아 그 자신은 아무런 미련 없이 벗어났던 얘기와, 그리고 지드 그 자신이 반드시 돌아와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었노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감동 어린 반응을 보이기까지 했다.

아라퀘스의 얘기가 끝이 나자 이리가시 측은 침통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자 하키리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아라퀘스에게 따지듯 물었다.

“난 솔직히 방금 전 그대가 말했던 내용들은 믿지 못하겠소.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런 무용담들은 아무런 근거 없이 얼마든지 입에서 만들어 내면 그만 아니오.”

아라퀘스는 그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줄 알고 이미 아마스란 왕국과 드니로 왕국에 전령들을 보내어 증거 자료를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아마 수일 내로 도착할 테니까 그때 살펴보시도록 하시지요.”

“…….”

말문이 막히고 마는 하키리우스. 양측 공방전이 모두 끝이 나자 총 진행자가 말문을 열었다.

“자! 이제 최종적으로 지드 대장의 얘기를 들어 보는 순서로서 이번 공청회를 마치고 아울러 배심원 분들의 결정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드 대장은 앞으로 나와 주시오.”

지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제법 진중한 얼굴로 아주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오 년 전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르게논 님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경험을 더 많이 쌓은 다음에야 돌아오라는 당시 말씀에 저는 솔직히 이해를 하지 못했었습니다. 또한 저는 그분께서 저를 왜 후계자로 정하셨는지조차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분도 하류 구역 출신이고 저 역시 그곳에서 자랐으니 동향이라 말할 수 있겠죠. 그분께서 살아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죠. 하류 구역은 당신의 고향이자 안식처라고요. 그런 안식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강조를 하셨습니다. 오늘날 여기 신생 왕국이 하나 세워졌는데 과연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이겠습니까?”

지드는 배심원들을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하류 구역 주민들과 하류검사 출신들이 거의 대부분이 여러분 아닙니까. 물론 용병들의 숫자 역시 만만치 않지만 결국 이 나라는 팔라카스 제국에서 보금자리를 잃고 이곳으로 이주해 온 제이의 하류 구역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마도 아르게논 님은 바로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과분한 자리에 오르도록 한 것 같은데, 솔직한 심정에 제 자신이 과연 왕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아니 자신이 없다고 할까요. 그런고로 여러분에게 당부를 드리고 싶군요. 국왕의 자리는 제가 아닌 이리가시 대장님이 적격이 분명하니 저는 이 자리에서 그분을 추천하겠습니다.”

지드가 연설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가자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고나 할까. 설마하니 지드가 이리가시를 추천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결정은 예비 원로원에서 내리는 일.

***

그로부터 수일 후.

짹짹.

테라스 너머로 아름다운 정원이 보였다. 지드는 이른 새벽부터 잠이 깨어서는 그저 가운 하나만 걸치고 이렇듯 테라스 바깥에 탁자를 놓고 앉아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직도 꿈을 꾸는 듯 모든 것이 아른아른 비추어지는 듯했다. 이곳은 그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가장 은밀한 공간인 왕궁이 아니던가.

지드는 허공으로 눈길을 돌려 여전히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으니.

“내가 왕이 되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원로원 결정에 몇 번이나 거부하려고 했지만 이미 대세는 자신에게 확실히 기울어져 있음에 마지못해 왕의 자리를 수락했던 것이다.

이리가시 역시 지드의 됨됨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답게 깨끗이 대권에 미련을 버렸고 지드에게 충성을 다짐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직 내각은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지드와 지휘관들 간에 충분한 시간을 두면서 국정 전반에 걸친 여러 가지 현안들을 안착시켜 갈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실내 문밖으로부터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국왕 폐하, 근위대장 아라퀘스입니다.”

“새벽부터 무슨 일이냐.”

“일단 안으로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들어오게나.”

잠시 후 은빛 군장의 붉은 망토를 착용한 아라퀘스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테라스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지드가 다소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여기 안에서까지 그리 폼 잡을 건 없잖나.”

“습관이 되다 보니까요.”

“그나저나 헤라는 잘 있지? 며칠 동안 못 봐서 궁금하군.”

“잘 있습니다. 워낙 명랑한 성격인지라.”

“너는 어떠냐?”

“무슨 말씀인지요.”

“근위대장 말일세.”

“처음 해 보는 거라서 아직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내가 지금 그 기분이다. 자고 일어나 보니 하루아침에 왕이 된 황당한 느낌이랄까.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군. 그건 그렇고 새벽부터 무슨 일이지?”

“팔라카스 제국으로부터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지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신이라니? 이런 새벽에 말인가?”

“특사의 자격으로 온 자인 듯합니다.”

“특사는 또 뭔가?”

“공식적인 사신이 아닌 통치자들 간에 긴급 전달 사항이 있을 때 보내지는 특별 사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국의 특사가 왔다면…….”

“그곳 황제가 뭔가 전할 사항이 있나 보죠.”

“팔라카스 황제라면 그 폭군인 게라쿠스가 아닌가.”

지드의 안색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랄까.

왕이 된 지 이제 며칠이나 지났다고 새벽부터 그다지 원치 않는 곳으로부터 특사를 맞이해야 하는지.

잠시 후 지드는 접견실에서 아라퀘스와 단둘이서만 특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드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경직이 되고 말았으니 그자는 은빛 머리칼의 레온이 아니던가.

언제나 착용하고 다녔던 반월형 병기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오늘은 특사의 자격으로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쨌든 지드로서는 벌써부터 끓어오르는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피를 토하고 죽어 간 대원들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고 그 자신도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경험해야 되지 않았던가.

레온 역시 지드를 보자 매우 놀라워하는 얼굴이었다.

“최근 왕이 정해졌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당신일 줄이야! 이 나라에 인재가 그렇게도 없었나 보죠? 후후.”

바로 그 순간 아라퀘스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건방진 놈이! 일개 특사 주제에 감히 국왕 폐하 앞에서 망발을 늘어놓다니.”

삭.

그가 검을 빼어 들고는 서슬이 시퍼런 날을 그의 목에다 들이대었다. 그의 우직한 성격대로라면 그저 겁만 주기보다는 진짜 벨 기세였다.

그래서인가. 지드가 재빨리 만류했다.

“당장 검을 집어넣게나.”

마지못해 뒤로 물러나고 마는 아라퀘스. 레온이 이번엔 그를 살펴보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뭐, 뭐야. 저 녀석은…….’

그 기세가 라이벌인 테세우스 못지않게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던가.

레온은 다소 움찔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제국의 특사 자격으로 온 내게 이리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 거요?”

지드는 애써 차분한 태도로 물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하게나.”

“황제 폐하께서는 사신보다는 나를 통해서 확실하고 직접적인 내용을 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셨소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뭔가.”

“일단 그대는 이곳에 나라를 세울 권리가 없다는 말부터 해야겠소. 비록 이곳 영토가 팔라카스 제국의 국경선 밖이라지만 원래 여기 주인은 네르카 부족민들로서 우리와 동맹 관계를 맺은 속국이라는 사실을 밝혀 두어야겠소.”

지드는 어이가 없는지 아예 혀를 찼다.

“네르카 부족민들이 팔라카스 제국과 동맹 관계라는 것은 금시초문인데.”

“원래 동맹 관계는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소. 필요하다면 협약 서류들을 제시할 수 있소이다.”

“그거야 도장 파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여하튼 그대들은 동맹국인 네르카 주민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으니 우리의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소. 만일 일정한 기간 내에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황제 폐하께서 그냥 계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내가 온 것이오.”

“떠나다니! 지금 협박을 하는 건가.”

레온이 은근한 미소로 답했다.

“후후. 그렇게 들렸소이까.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난 이만 돌아가겠소.”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접견실 문을 열고 사라졌다.

쿵.

뒤에 남은 지드와 아라퀘스.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해머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하류검사 5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