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0 역사 종족의 진실 (41/81)

CHAPTER. 40 역사 종족의 진실

우우우.

가시나무와 수풀 사이로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사방은 마치 저녁처럼 어두워져 있었으니 왠지 기분 나쁜 지역이었다.

결국 에르가니아는 참모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숙영지를 세워 야영을 명령했다.

부대장들인 카르발디와 아라퀘스 역시 전방에 펼쳐진 가시나무 숲을 바라보며 저들끼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참 이상하군.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숲이었는데 갑자기 가시나무라니.”

카르발디 말에 아라퀘스가 덧붙여 말했다.

“더 이상한 건 가시나무들이 대략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다는 겁니다.”

“일정한 간격이라니?”

“일종의 방어 지역을 형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심어진 형태랄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은데.”

“다소 위장을 위해 삐뚤어진 열도 제법 많지만 제 눈에는 저것 자체도 일부러 그리 한 것처럼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패턴이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좋아, 네 말이 맞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런 산악 외진 곳에다 저런 가시나무 방어 지역을 만들었냐는 거지.”

“그거야 저도 모르죠.”

“…….”

그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에르가니아와 두 부대장들은 긴급회의를 가졌다.

회의 내용은 갑자기 나타난 가시나무 숲 지대를 ‘통과하느냐 마느냐’였다.

카르발디가 물었다.

“대장, 어떡하면 좋겠소?”

“그야 통과해야죠. 가시나무 숲 역시 우리 임무지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인위적으로 조성된 숲이라면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순 없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내 생각은 일단 정찰병을 보내 보자 이거요.”

그때 아라퀘스가 재빨리 껴들었다.

“정찰병들 대신에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카르발디가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또 너냐?”

“네. 아까 보니까 가시나무 숲이 워낙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병사들이 정찰하기에는 무척 버거운 곳입니다.”

“젠장! 그 취지는 좋은데 왠지 혼자 활약해서 은근히 잘난 체하려는 의도적인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그러자 아라퀘스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고작 정찰인데 그렇게 말해야겠습니까.”

“하늘같은 선배한테 눈 똑바로 뜨고 대드니?”

“제가 언제 눈을 똑바로 떴다고 그러십니까. 이젠 뭔 말도 못하니, 쳇!”

“뭐라?”

결국 에르가니아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둘이 함께 갔다 오면 되겠군요.”

순간 카르발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싫소. 저 녀석이 자진해서 정찰한다고 하니 한번 맡겨 봅시다.”

“이건 대장으로서 명령하는 거니까 내일 아침 해가 밝는 대로 당장 떠나요.”

“아이고. 그냥 가만있을걸.”

그때 아라퀘스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회의 끝났으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카르발디가 심통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디 가냐?”

“제가 어디 가는 것도 허락을 받고 가야겠습니까?”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다.”

“산책이나 하려고요.”

“심심하면 같이 가 주랴?”

“싫어요. 혼자 조용히 정리할 게 있어서요.”

“정리라니 뭐를?”

아라퀘스는 더 이상 대답하기 싫다는 듯 휘장을 걷어 치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의 태도에 카르발디가 뭐라 중얼거렸으니.

“이젠 대놓고 무시까지 한다 그 말이지?”

이번엔 에르가니아가 한마디 했다.

“저 역시 혼자 생각할 게 있으니까 그만 나가 주세요.”

“…….”

잠시 후 아라퀘스는 숙영지 근처에서 산책하는 척하며 다소 멀리 떨어진 바위 구릉지까지 올라왔다.

사실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원천기술을 수련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그는 바위 벽 아래 자리를 잡고는 앉아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어 착 펼쳤다. 중간 부분에 초점을 맞추더니만 작은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원천기술 제3장 파동역발검은 말 그대로 파동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일종의 무형의 에너지로서 인간의 신체적 한계점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제2장 신체발검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근원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이는 물리적인 에너지의 정점인 진화적 형성기가 완성하는 시점으로서 비로소 파동의 원리를 깨우치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제3장 파동역발검의 시작은 역동작이 우선이다.

아라퀘스는 거기까지 읽고는 잠시 허공 위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늦추려 했으니 오늘이야말로 원천기술 제3장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일어나서는 검을 들어 제법 넓은 공간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저벅저벅.

“그러니까 역발검 이전에 제일 장 원천분산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나와 있고 단순히 그와 같은 형태에서 역발검을 취하라 했겠다?”

슥.

그가 검을 수직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애초에 취했던 제1장 원천분산의 오른쪽 비틈 자세를 역으로 왼쪽 비틈 자세로 바꾸어 버렸다.

이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발검 자세로서 무척 낯설어 보였지만 양손 검술을 수련한 그로서는 그다지 불편한 동작도 아니었다.

“역발검이란 자세가 한 방향만 뒤트는 것이 아닌가 한데. 어차피 양손잡이인 내게는 방향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그때 아라퀘스는 갑자기 경직이라도 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서부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손에 집힐 듯했지만 다시 난관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다시 양피지를 꺼내어 짝 펼쳐 보았다. 그리고 아까 읽었던 내용 아래 부분을 주시했다,

제3장 파동역발검은 제2장 신체발검의 연장선일 뿐이다.

단지 이미 포화 지경이 되어 버렸을 진화적 신체 특성을 밖으로 표출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제2장 신체발검의 시전자는 이미 파동의 무한한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을지 모른다.

역발검은 바로 잠재력을 표출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불과하다. 시작은 새로운 것이되 분출은 원래의 것으로 사용하라.

“시작은 새로운 것이지만 분출은 원래의 것을 사용하라…….”

순간 아라퀘스는 심장이 요동을 치는 것을 느꼈다.

수십 년 전 그의 아버지 아독 역시 이 대목에서 고민하다가 의미를 깨닫고는 무척 흥분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들 아라퀘스가 아버지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으니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랄까. 어차피 원천기술이란 대를 이어 유전되어 오는 아주 독특한 진화적 기술인 만큼, 자식이든 후손이든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며 익힐 수 있는 독특한 기술일 것이다.

아라퀘스가 이번엔 왼쪽 방향 비틈 자세인 역발검 동작을 취해 보였다.

“분출은 원래의 것이고 역발검 자세에 원래의 오른쪽 발검 자세로 순간 전환한 다음에!”

홱!

“분출하라!”

파파파팟!

검의 날 끝으로부터 강력한 파공음이 일어나면서 반경 180도 지점에 강력한 폭풍이 지나간 듯 보였다.

역발검에서 원래의 발검 자세의 원심을 이용하여 회전 동작을 연상케 했다. 시전이 끝이 나자 아라퀘스는 주변에 무슨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어 주위 깊게 살펴보았다.

“…….”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가. 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뭐야…… 실팬가?”

순간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으니.

“분명 뭔가 분출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아아.”

급기야는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결국 아버지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마는 것인지. 그의 가장 큰 불만은 바로 그 점이었다.

언제나 거대한 산그늘에 가려져 자신의 존재성이 한없이 미미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원천기술 제3장은 아버지가 지금 이 나이 대에 성공했던 기술인 만큼 그 역시 반드시 해내리라 굳은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으니 스스로의 한계가 그렇게도 미울 수가 없었다.

순간 그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으로 지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캉!

캉!

“멍청하기는! 나 같은 놈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단 말이다.”

캉! 캉!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사방에 들려오는 소리에 아라퀘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우르르.

우두둑.

순간 그의 동공이 확 팽창이 되어 버렸으니 울퉁불퉁 솟아 오른 바위들과 벽들이 스스로 허물어 내려지는 것이 아닌가.

“뭐지.”

조각조각 나다 못해 아주 작은 자갈로서 마치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말이다. 이에 아라퀘스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서, 설마…… 원천기술 제삼 장이 성공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지, 그 위력이 저 정도라면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그는 뭔가에 홀린 듯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이튿날 아침.

대낮에도 그 안이 어두컴컴한 가시나무 숲 지대를 들어서는 두 사내가 있었으니 카르발디와 아라퀘스였다. 그 둘은 음산한 분위기로 가득 찬 숲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기분 나쁜 곳이군. 제길! 저 안 깊숙이 뭔가가 툭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고작 우리 두 명만 정찰이라니. 이게 다 네 녀석이 쓸데없이 나섰기 때문이 아니냐.”

카르발디의 말에 아라퀘스는 오히려 그의 태도가 더욱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참으로 투정도 많군요. 명색이 실전 흑검사 위치에 있는 분이 말입니다.”

“흑검사는 사람이 아니더냐. 초반부터 사람 성질 은근히 긁지 마라.”

“긁는 것이 아니라 한번 생각해 봐요. 중부 대륙에서는 그 어떤 뛰어난 검사든 간에 오히려 이런 낯선 곳이라든지 다소 결계 지역으로 의심되는 장소에서 흑검사가 뛰쳐나와 살인 게임을 저지를까 봐 벌벌 떠는 심정인데 선배는 그 반대이니…….”

“그런 살인 게임이야 인성이 몹시도 사악한 자들이 가끔 행하는 짓이지 나와는 상관없다. 게다가 내가 이런 곳에서 네놈한테나 그냥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괜히 폼 잡을 거 있냐?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내가 볼 때에는 네 녀석의 그 가식적인 행동이 더욱 재수 없게 여겨진다.”

“재수 없다니요? 그건 무슨 소리죠.”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모르는데요.”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진짜 모릅니다. 제가 가식적이란 얘기는 평생 처음 들어 봅니다.”

“지금 네 그 어리바리한 척하는 행동이 가식적이란 말이다.”

아라퀘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짜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후우, 무슨 얘기가 통해야지 대화를 계속하든가 하지요. 그만둡시다.”

“이런 낯선 지대는 마땅히 정찰조를 구성하여 수색케 하는 것이 부대 규칙이거늘 너는 혼자서 그 임무를 대신하겠다는 그 의도부터가 이상한 거 아니야. 아마도 대장 에르가니아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한 행동 같은데 내게는 매우 얄팍한 술수처럼 보인다 그 말이다.”

아라퀘스는 아예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선배님, 아까 식사 때 뭔가 잘못 드셨소?”

“정곡을 찔리니까 움찔했지, 요놈아.”

“그리 얘기한다면 한번 물어봅시다. 내가 왜 대장한테 잘 보여야 합니까.”

“대장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그녀와 보통 사이가 아닌 국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겠지.”

“뭐라고요! 거기에 국왕 폐하는 왜 걸고 들어갑니까.”

“와우.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얼굴 표정도 바뀌지 않다니. 확실히 오랫동안 가식적인 습성이 진하게 배어 있음이 분명하군그래.”

아라퀘스는 고개를 휘휘 젓기까지 했다.

“그렇게 사람 싸잡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내가 적나라하게 말해 주지.”

“좋소. 한번 얘기나 들어 봅시다.”

“네 녀석이 국왕과 어떤 친분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미 신생 왕국의 근위대장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얼마 전 국왕께서 새로운 나라의 공신들 자격을 백지화시키고 이번 원정 임무를 통하여 그 공훈에 따라서 새로운 보직을 결정하게 한다는 지시에 속이 무척 쓰렸을 테고. 후후! 어때, 내 말이 맞지?”

카르발디는 얘기하다 말고 아라퀘스의 표정을 살피며 고소해하였다.

“계속해 보시죠.”

“오냐, 계속하마. 그래서 네 녀석은 입지가 흔들거리자 새로운 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가만히 보니 국왕께서 에르가니아에게 특별한 연정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그녀에게 줄을 섰다는 거.”

“그래서 제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이번 정찰을 자진해서 나섰다는 거군요?”

“이제 속내를 드러내시지.”

“풉, 아예 소설을 쓰시죠?”

“뭐, 뭐라!”

“뭔가 잘못 아시는 모양인데 저는 이번 원정 임무와는 상관없이 계속 근위대장입니다. 한마디로 큰 공을 세우든 못하든 제 입지와는 아무런 상관없단 뜻이죠.”

“상관없다니! 그렇다면 왜 삼 조 원정 임무에 동참하게 된 거지?”

“국왕 폐하의 특별 지시가 있기 때문이오.”

“그게 뭐냐.”

“원래 말하면 안 되는데 선배님이 딱해 보여서 말해 드리지요. 내 임무는 대장님을 보호하는 겁니다.”

“대장이라면 에르가니아?”

“선배님이 한 가지는 맞췄군요. 국왕께서 대장님을 특별히 생각하신다는 거 말이죠.”

“…….”

카르발디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조용했고 아라퀘스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제가 가시나무 숲 정찰을 자진했던 이유는 저 안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정찰조를 구성해 파견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혹시라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래도 전투력이 나은 제가 나서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선배님 역시 저와 함께하니 든든하고요.”

“젠장, 누가 뭐라냐?”

“아직도 제가 가식적으로 보입니까?”

“그거야 모르지.”

“모르긴요! 저는 인생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언제나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아니면 아닌 거고 나름대로 신념을 정해 놓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저더러 가식적이라면 그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정말 너무하는군요, 선배님.”

카르발디는 아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기까지 했다.

“그 자식 참 말 많네.”

카르발디는 괜한 심통을 부리더니만 저만치 앞서 나갔다.

후다닥!

“어디 한번 혼자 실컷 떠들어 봐라.”

“아직 얘기 끝나지 않았소.”

“시끄럽다.”

“같이 가요!”

“아, 글쎄! 일 없다니까!”

그로부터 대략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 가시나무 숲 영역은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다.

어둡고 음산한 통로를 거쳐 맞은편으로 나오니 햇살이 쨍한 밝은 광명의 세계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이 겨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초록 들판에 강줄기가 굽이굽이 흐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랄까.

세상에 이런 낙원이 존재하리라고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둘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파란 하늘을 선회하는 새들과 그 아래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풀밭을 밟으며 초원 지대로 내려온 두 사람. 기후마저 온화하게 느껴지니 이만저만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겨울철 아니냐?”

카르발디가 묻자 아라퀘스 역시 사방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는데요.”

“그런데 숲에 꽃이 피고 공중에는 곤충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어째 이상하지 않냐.”

“당장 상식적으로 설명은 되지는 않겠지만 여기 지역만 왜 이런지 그 이유가 있겠죠.”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군.”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봅시다.”

“과연 이곳에 사람들이 살지 의문이군.”

“그래서 정찰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 둘은 초원을 가로질러 언덕의 숲 지대에 도착했다. 높은 곳에서 주변 경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니 이곳 지대 둘레에 아주 높은 산맥이 빙 둘러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천애의 자연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말이다.

그나마 가장 낮은 지대라 할 수 있는 곳에는 가시나무 숲이 빽빽이 조성되어 있기에 외부인의 발길이 없었을 추측할 수가 있었다.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는 본격적인 정찰을 위해서 숲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짹짹!

쪼르르―

온각 종류를 알 수 없는 새들이 숲 여기저기 숨어서 지저귀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체 이곳은 낙원이라도 되는 것일까.

외부 세상의 추운 계절과는 전혀 상관없이 훈풍으로 가득 차 있고 꽃씨들마저 사방 허공을 떠돌아다니며 또다시 생명을 잉태하려 하니 말이다.

숲 안쪽으로 대략 한 시간여를 들어가니 조그만 언덕이 나왔다.

바로 그때 아라퀘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고 뒤따라오던 카르발디 역시 제자리에 섰다.

“쉬려고?”

“아니요.”

“그럼 왜?”

아라퀘스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쉿! 조용히.”

“…….”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귀를 기울이며 무엇인가 감지하려고 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카르발디가 다시 물었다.

“뭐여!”

“아이들 소리 같은데요?”

“아이들이라니!”

“여기 언덕 너머로부터 확실히 들려옵니다.”

“그럼 사람이 산다는 얘기잖아.”

“그런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일단 직접 가서 확인해 보죠.”

카르발디가 경계의 눈초리로 말했다.

“분명 아이들이라고 했지?”

“예.”

“그럼 쫄 것도 없겠네.”

잠시 후 언덕을 넘어 바로 아래 큰 바위 뒤쪽으로 몸을 숨긴 이들은 바로 아래에 보이는 제법 넓은 숲 속 공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아라퀘스의 말대로 아이들 수십여 명이 서로 두 패로 갈리어 손에 목검들을 하나씩 들고는 대치하는 광경이 보였다.

“이곳에도 사람이 사는군.”

“아이들 복장이 대부분 짐승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보아 여기 주민 같은데요.”

“그런데 뭐 하는 거지?”

“아마 전쟁놀이를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흠. 어디 가나 애들이란…….”

그 둘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 저 아래 두 패거리들은 어느새 싸움이 붙었고 각자의 목검을 들고 제법 격렬하게 치고 박기 시작했다.

타다닥.

팍!

“악!”

파팟.

탁!

“욱!”

털썩!

“뒤통수를 때리는 게 어디 있어! 씨!”

“너도 지난번에 그랬잖아.”

“넌 모서리로 가격했잖아. 여기 피까지 나잖아.”

“고작 피 나는 거 가지고 엄살이냐! 난 지난번에 발목과 손목이 부러졌는데.”

“그까짓 것도 부상이라고! 피가 나면 일단 옷에 얼룩이니까 엄마한테 더 뒈지는 거 몰라서 그래!”

“나 참, 말 더럽게 많네. 그냥 덤비라고.”

“좋아. 너도 한번 터져 봐라! 에잇!”

홱!

“아싸! 피했다.”

“너 씨!”

“하하.”

한편 바위 뒤쪽에서 얼굴만을 조심스럽게 내밀고 아이들의 전쟁놀이를 지켜보던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는 동시에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눈앞에 광경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 저거 애들 놀이 맞나?”

“그러게요.”

“세상에 진짜 피 튀기게 싸우는 것이 그저 놀이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던가. 불과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전투는 더욱 치열해져 갔다.

이제는 아예 검술다운 검술을 보여 주며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 홱홱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경악스런 광경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이에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는 아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서야 카르발디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저, 저건 그냥 전쟁놀이가 아닌데? 대체 무슨 애들이 한 번 도약으로 수 미터를 뛰어오르고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으로 인정사정없이 휘둘러 버린단 말이냐.”

“…….”

아라퀘스의 멍한 표정으로 보아 그가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 중에는 이미 팔과 다리가 골절 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투지를 불태우며 목검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엄살을 떨거나 우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 정말 괴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팍!

“아얏!”

“또 팔 부러졌지? 하하!”

파파파팟!

“욱!”

얼굴에 정통으로 가격을 당한 뒤에 입가로부터 선혈을 쏟는 아이. 그 앞에 한 아이가 다가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부터 여기 숲은 우리 거다!”

“어림없는 소리! 컥! 컥!”

부상당한 아이가 억지로 일어나려 하다가 다시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싸움은 멈추었다. 아마도 그 둘은 각 진영의 대장들로서 하나가 패하자 자동적으로 놀이는 끝이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광경이 다시 벌어졌다.

“오늘 놀이는 이것으로 끝낼 테니 각자 부상자들을 알아서 데리고 가자.”

그들은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싸웠던 적이건만 한 마을에 사는 것처럼 함께 부축하고 어디론가 발길을 향했다.

더욱 놀란 것은 한 아이가 양팔에 두 명을 끼고 가면서도 전혀 힘이 들거나 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석양 노을이 지며 땅거미가 내려앉자 아이들은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뒤편으로부터 어른 둘이 나타나면서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 얘들아!”

순간 아이들은 뭔가 하고 일제히 뒤로 돌아섰다. 그들 눈에 비친 자들은 흑색 군장 차림의 사내와 은빛 군장의 청년이었다.

물론 그들은 카르발디와 아라퀘스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경계의 눈길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아이가 당찬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시죠?”

그러자 카르발디가 재빨리 나섰다.

“너희들 여기 사니?”

“…….”

“…….”

대장과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당장 뭐라 말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아까의 전투적인 본능으로 가득 찬 아이들답지 않게 매우 순박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아라퀘스가 물었다.

“우린 나쁜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해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는 대장 아이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우리를 해칠 능력이 있다고는 보이지 않아요. 다만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그게 이상할 뿐이죠.”

“그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린 가시나무 숲 바깥세상으로부터 왔는데 일단 너희가 사는 마을로 안내를 해 다오.”

“그건 왜요?”

“어른들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렇다.”

아이가 그다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별로 안 좋아할 텐데요. 언제가 외부인들이 이곳에 들어왔다가 한 명도 돌아가지 못했거든요.”

그 말에 이 둘은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호의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적대적이라면 진짜 무슨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의 놀라운 능력으로 보아 마을 주민들 역시 엄청난 전투력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둘의 임무가 정찰인 만큼 이대로 물러난다는 것은 아니 될 말이었다.

“그런 거 상관 않을 테니까 일단 마을로 안내해 주기 바란다.”

아이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뭔 일이 있어도 전 책임 안 집니다? 아저씨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알았으니 앞장서거라.”

그제야 카르발디가 뭐라 중얼거렸다.

“녀석, 겁 되게 주네그려.”

아이들이 숲 속으로 향하자 이 둘 역시 그들을 따라서 안쪽으로 따라가지 시작했다.

대략 한 시간여 만에 그 둘은 아이들의 안내로 협곡 밑 조그만 마을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비록 저녁이라지만 이곳은 달빛도 밝고 아름다웠는지라 천연 요새와도 같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와 같은 광경을 처음 본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는 놀라고 말았으니.

“와우!”

“후우.”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또 다시 감탄을 자아내게 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아주 독특한 건물 양식 때문이었다.

건물들의 대부분은 돌을 깎아 정교하게 쌓아 만든 석조(石造) 건축 양식으로서 높이는 대략 3층 정도랄까.

헌데 돌 하나하나의 크기가 상당했음으로 어디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런 산악 지형에 들어설 구조물은 아니었다.

바위를 옮길 만한 자재나 인력이 어마어마하게 요구되어질 테니까 말이다.

“가히 도시 건물에 비견될 만큼 정교하고 큰 규모로군요.”

“설마 저기 요새 주민들이 건물을 지었을라고?”

“그럼 누가 했겠어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바로 그때 맨 선두에 가던 대장 아이가 이들에게 다가오더니만 다소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아저씨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내 책임 아닙니다.”

아라퀘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하마. 그나저나 부상당한 아이들부터 챙겨라. 매우 심각해 보이는데 말이다.”

소년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심각하긴요. 한 며칠 있으면 멀쩡해질 텐데요.”

아라퀘스가 즉각 반문했다.

“며칠이라니? 골절상에 피부가 제법 깊게 찢기어 피가 줄줄 나는 그런 중상을 입고도 말이냐?”

“네.”

“네― 라고?”

소년은 오히려 물어본 사람이 더 이상하게 보였는지 이번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한 거 가지고 뭘 그리 놀랍니까. 아무튼 우린 볼일 봤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들 하죠.”

대장 소년이 마을 입구로 향하자 아이들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이에 아라퀘스와 카르발디가 그들을 바라보며 다소 멀뚱히 서 있었다.

“제길, 아무래도 요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아이들 하는 얘기 못 들었냐. 마치 우리 안전을 보장 못한다는 그런 거 말이야.”

“어차피 정찰 그 자체가 모험을 건 거니까 일단 들어가 봅시다.”

하지만 카르발디는 주저하는 눈빛이었다.

“너 혼자 가면 안 되겠니?”

“설마 혼자만 살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요? 나 참.”

“자식이 말이야! 무슨 얘기를 고따위로 하냐. 난 다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자, 괜한 투정 말고 들어가기나 합시다.”

“난 애초부터 호랑이를 잡으려는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너 혼자 들어가라.”

결국 아라퀘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자! 애들처럼 굴지 말고요.”

“이거 놓으라니까!”

“명색이 실전 흑검사이면서 대체 왜 그리 겁이 많습니까?”

“아 나, 진짜! 말끝마다 흑검사, 흑검사! 에이 씨, 나 오늘부로 흑검사 내논다!”

바로 그때였다.

요새 정문 안쪽으로부터 한 무리의 청년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던가.

숫자는 대략 50여 명쯤 되어 보였고 대부분 짐승 가죽 차림의 20대 초 중반으로 간간히 여성도 끼어 있었다.

그들 각자는 한 손에 기다란 목검을 들고 있었으니 자기들 딴에는 무장을 한 듯 보였다. 아마도 앞서 들어간 아이들이 이 둘에 대해 얘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뭔가 분위기가 썰렁했던가. 아라퀘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린 그저 가시나무 숲지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연찮게 여기 마을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아이들을 따라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쪼록 경계를 푸시고 저희를 손님으로 맞아 주시오.”

하지만 그들의 굳어진 안색은 여전히 풀릴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저들끼리 다소 신경질적인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외부 침입자들이 이번에 벌써 세 번째야.”

“그러니까 가시나무 숲을 완전히 베어 버리고 아예 늪지대를 만들어 독충들을 풀어 놓으면 외부 사람들이 근접을 하지 못하잖아.”

“그렇게 되면 그 통로가 완전히 단절되니까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봐. 가끔은 외부로부터 생필품하고 여타 약품들을 대량 구입해 와야 하잖아.”

“맞아, 가시나무 숲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어. 그거 조성하느라 피 빠지게 고생했는데 말이야. 뭐, 가끔 외부침입자가 있을지라도 규칙대로 감금하면 그만이잖아. 외부 세계에 알려질 이유도 없고 말이야.”

그러자 한 청년이 다소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웃기는 소리들 하고 있네.”

“웃기는 소리라니!”

“네놈들의 그 핑계거리도 지긋지긋하다. 솔직히 너희들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시나무 숲을 그대로 두고는 언제가 때를 보는 거 다 안다.”

그러자 다른 자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마치 정곡을 찔린 것처럼 말이다.

그들 중 다소 우락부락해 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나서더니만 방금 전 말했던 청년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다짜고짜 잡는 것이었다.

“너 이 자식, 그 얘기 장로에게 고자질했다가는 죽을 줄 알아.”

이에 다른 청년들도 가세하여 그자를 면박 주는 것이 아닌가.

“항상 저놈이 문제였어.”

“맞아, 저 자식이 장로 끄나풀이었어.”

“우리 이참에 장로에게 가서 정식으로 따지자. 우리 단원들만큼은 평생 여기에서 썩으란 법은 없잖아.”

“앞으로는 외부 침입자들이 점점 더 많이 생길 테고 이곳이 바깥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란 말이다.”

“그럼 지금 당장 가자고!”

“맞아, 그렇게 하자.”

50여 명의 젊은이들은 서로 뜻이 맞았는지 어느 방향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 벽 모퉁이로부터 등장을 하더니만 그들을 턱하니 가로막았다. 그러자 이들은 깜짝 놀란 듯 저마다 경직이 되어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회장!”

“깜짝이야.”

“갑자기 나타나다니.”

“그렇잖아도 잘 왔다. 마침 우리 장로들에게 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한편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는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부적인 문제에 더 신경을 쏟는 것을 보고는 다소 의아스러워 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새로 등장한 인물에 대해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장이란 자는 아마도 이들을 이끄는 대장 정도로 보였는데 놀라운 점은 그가 여자인데다 상당한 미인이라는 점이다.

해진 가죽 옷차림이라지만 가녀린 몸매에 언뜻 볼록해 보이는 가슴과 둔부, 그리고 뽀얀 허벅지 살은 야릇한 기분마저 들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초롱초롱한 눈방울에 다소곳이 다문 분홍빛 입술, 비록 찬바람이 날 정도의 무표정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부드러움이 절로 배어 있다고 할까.

그녀가 한마디 했다.

“다들 그만둬.”

“그만두라니, 이번만큼은 반드시 우리 뜻을 전달하고 넘어가야겠어.”

“장로에게 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얘기는 해 보자 이거야.”

“만일 그랬다가는 가시나무 숲에다 진짜 늪지대까지 만들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시킬 텐데.”

그 말에는 아무도 반문하는 자들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도 너희들처럼 이런 한정된 곳에서 삶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다만 지금 그 시기가 아니라는 거야. 우린 아직 청년 단원들로서 앞으로 수년 후 중요 직책에 올랐을 때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보는데.”

“…….”

그녀의 설명이 단번에 먹혀 들어갔던가. 방금 전까지도 술렁이던 분위기는 이내 잠잠해졌고 이제는 외부 침입자들에게 관심이 다서 집중이 되었다.

여인이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저들이 가시나무 숲을 지나왔다, 그 말이지?”

“응.”

여인은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둘 다 군장 차림에 무기를 지닌 것으로 보아서 군인들이 분명해 보이는군. 지난번 온 자들은 사냥꾼이거나 길을 잃고 들어온 방랑객들이건만 대체 군인이 이 근처에 왜 나타난 걸까.”

“회장 어떻게 할까.”

“일단 무기를 빼앗고 장로들에게 데려가자.”

그녀의 명령에 청년들이 다가와자 카르발디가 극도의 경계를 드러내며 흑검을 뽑으려 했다.

“물러서지 않으면 다들 뒈질 수 있다!”

순간 움찔거리는 청년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차분해졌고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저마다 목검을 앞세워 다가왔다.

카르발디 역시 흑검사인 만큼 그 기세에서 전혀 눌리지 않고 일당백의 전투력을 보여 주려 했다.

그때 아라퀘스의 손이 먼저 다가와 그의 손목을 제지하는 것이었다.

탁!

“그만두죠?”

홱!

“뭐야!”

“여기서 말썽을 일으켜 봐야 좋은 거 없을 것 같은데요.”

“이대로 당하라고!”

“일단 여기 장로라는 분을 만나나 봅시다.”

“만나서 뭐 하게.”

“왜 무턱대고 흥분부터 합니까. 아마도 사술의 포스가 선배님의 인성을 진하게 물들였나 봅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자, 그럼 실례합니다.”

슥!

아라퀘스는 어느새 카르발디로부터 낚아챈 흑검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그 자신의 검 역시 발밑에 조심스럽게 놓아두었다.

툭!

그제야 청년들이 무기를 집어 들고는 그 두 사람에게 다가와 몸수색을 하였다.

카르발디는 아직도 못마땅한지 나름 저항을 해 보려 했다.

“어딜 만지는 거야! 빌어먹을.”

헌데 그들의 완력이 엄청났던가.

“욱!”

양옆에서 팔짱을 꼈는데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흑검사인 그로서는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뭐야, 이놈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들어선 강당 내부는 보기보다 무척 넓었다.

상석에는 대부분 장로로 보이는 노인이 한 자리씩 차지했고 왼쪽에는 중년에 해당하는 자들이 점잖은 차림새로 착석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청년 단원들이 있었는데 아까 동료들을 진정시킨 여인이 맨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라퀘스는 이곳에 끌려온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이 갔으니, 정말이지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처음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넋을 잃은 모습에 카르발디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 이 상황에 한눈 팔 때냐?”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아라퀘스.

“아차, 죄송합니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너 믿고 여기까지 온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데…… 이거 뭔가 불길한 예감까지 든다.”

바로 그때 장로석으로부터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잡담을 나누는 게냐!”

순간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는 입을 쏙 다물고 말았다.

“…….”

“…….”

계속해서 들려오는 굵고 쉰 음성.

“보아하니 차림새로 봐서 군인들 같은데 내가 알기로는 이 지방을 비롯하여 인근 영토에까지 그 어떤 왕국도 없는 것으로 안다. 그대들이 여기까지 나타났는지 그 이유와 신분부터 소상히 밝혀라.”

아라퀘스는 기다렸다는 듯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우선 아무 예고 없이 이곳에 들어온 것에 대해 양해를 바라는 바입니다. 저는 이곳으로부터 북동쪽 팔라카스 제국의 국경선 근처에서 새로운 터를 잡은 신생 왕국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제 정확한 신분은 근위대장입니다.”

신생 왕국이란 말에 강당 분위기가 조금은 술렁였다. 장로가 물었다.

“신생 왕국이라니! 대체 나라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아직 나라 이름은 정해진 바 없습니다.”

“뭐라!”

“국왕 폐하께서 원정대로 하여금 주변 부족민들을 모두 통합한 뒤에 국호를 결정하실 예정입니다.”

노인이 혀를 찼다.

“뭐 그런 나라가 다 있다더냐. 국호도 없이 원정부터 서두르다니. 그나저나 듣고 보니 기분 나쁘군. 그렇다면 네놈들 역시 원정의 임무를 띠고 여기까지 정찰해 왔단 그 말이겠지.”

그러자 아라퀘스가 재빨리 해명을 했다.

“그건 아닙니다. 저희가 정찰을 위해 가시나무 숲을 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종족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종족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제가 오히려 여쭤 보려 했는데요. 혹시 역사 종족이라 들어 보셨는지요.”

“…….”

순간 좌중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대부분의 참석자들의 표정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 보였으니 아라퀘스는 뭔가 말을 실수했는가 싶었다.

잠시 후 장로가 아까와는 달리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역사 종족에 대해 언급했던가?”

“네.”

“어, 어디서 들었는가.”

“어디서 듣다니요?”

“역사 종족에 대해서 말일세.”

“본국 작전 참모로부터 들었습니다.”

“작전 참모가 누군지 이름을 말해 보게나.”

“이름이라니요…….”

“주저 말고 말해 보게나.”

아라퀘스는 장로가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나 싶나 조금은 어리둥절했지만 즉각 대답을 하였다.

“하키리우스 님입니다.”

순간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키리우스라고!”

“혹시 아시는 사이라도?”

“흠.”

아라퀘스와 카르발디는 그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해하였다.

하지만 장로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듯 다시 착석하더니만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뭐라 중얼거렸다.

“결국 그 친구가…….”

잠시 시간이 흐르자 장로는 강당 중앙에 멀뚱히 서 있는 아라퀘스와 카르발디에게 말했다.

“멀리서 오느라 수고 많았네.”

갑작스레 부드러운 어조에 인상마저 온화해 보였으니 이 둘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제대로 찾아왔군.”

아라퀘스가 되물었다.

“제대로 찾아오다니요?”

“여기가 바로 역사 종족이 거주하는 곳이라네.”

순간, 놀라고 마는 두 사람이었다.

“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테지만 내 숙소로 가서 얘기 좀 하세나. 그렇지 않아도 하키리우스 그 친구에 대한 근황이 궁금했는데 말일세.”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제법 한밤의 정취를 더욱 은은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장로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 둘과 술잔을 벌이며 벌써 수 시간째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라퀘스와 카르발디는 장로로부터 많은 얘기들을 들은 뒤부터 마치 동화에 빠진 아이들처럼 이만저만 신기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설에나 나올 법한 나카스니아 대륙에 관해 얽힌 일들, 그리고 이리스의 신화에서부터 결국 아독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당연지사 아라퀘스가 가장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저 아르카도 제국의 13군단을 이끈 흑검사란 사실만 알았지 장로의 말대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카스니아 대륙에서도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다는 말은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 장로는 술에 흥건히 취한 듯 아직 못다 한 얘기들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간 종족은 최후의 성지에서 이리스 님을 중심으로 나카스니아 대륙의 총연합군인 용족과 어둠의 종족, 그리고 마물들을 상대로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접전을 벌어야만 했지. 우리 역사 종족 역시 다른 수많은 전사와 더불어 혈전에 혈전을 벌이며 어떻게 해서든 소멸당하지 않으려고 했다네. 더군다나 우린 이리스 님과 같은 혈족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자부심을 느끼며 그분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여 갔지.”

그때 아라퀘스가 내심 놀란 반응을 보였다.

‘같은 혈족이라고?’

이리스는 아라퀘스의 아버지인 아독의 환생 전 인물이니까 역사 종족이 혈족이라면 엄밀히 일가친척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마침 카르발디 역시 그런 점이 궁금했는지 노인의 말을 끊고 물어보았다.

“아독 님과 혈족이라니요? 대체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장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 점이 궁금했던가. 사실 이리스 님이…… 아니 자네들 세계에서는 아독 님이라 불리니 그렇게 칭하겠네. 그분의 실제적인 조상은 먼 옛날 나카스니아 대륙으로 건너온 인간 종족들 중 한 부족으로서, 훗날 원천기술의 완성을 위해 자연의 왕 네키르께서 선택하신 축복받은 부족이었지. 원천이란 한 세대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듭하여 조금씩 진화되는 순수한 인간 신체 기술일세. 어쨌건 그 부족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여느 인간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해져 갔지.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니 주변에서는 그 부족의 후예인 우리를 역사 종족이라 칭하더군. 엄밀히 말하면 원천기술 계승 민족이랄까. 어쨌든 훗날 원천기술의 정수를 완전하게 이어받은 자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분이 바로 이리스였다네. 진정한 원천의 힘을 깨닫기 위해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었고 아독이란 이름으로 그 세계에서도 걸출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지.”

아라퀘스는 뭔가 뒤통수를 거대한 해머로 맞은 것처럼 띵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가문의 비밀이야 지난번 제국 사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주변 친구들로부터 얻어들을 수 있었다지만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아버지가 위상이 떨쳤다니,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장로가 계속해서 말문을 열었다.

“전쟁은 인간 종족에게 급속도로 불리해졌고 결국 최후의 성지는 거의 함락 직전에 이르게 되었지. 하지만 인간의 운명으로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네. 애초 인간들을 나카스니아 대륙으로 끌어들인 자연의 왕 네키르는 원래의 각본대로 이리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드디어 성지로부터 인간 세계로 통하는 차원의 입구를 열 수가 있었지. 그때 우리 역사 종족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로 넘어왔는데 우린 특별한 능력을 지닌 종족으로서 사람들 시선을 피하기 위해 오자마자 은밀한 장소를 골라서 숨어 지내게 된 것일세. 그리고 비록 역사 종족은 아니지만 나와 절친한 친구였던 하키리우스 역시 한동안 이곳에서 함께 지내다가 답답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이고. 수년 전 이리가시 용병 집단인가 하는 곳에 몸을 담았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번 방문하고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가 오늘날에야 자네들이 그의 소식을 가져온 셈이었지.”

그의 말이 끝이 난 듯했지만 아라퀘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장로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먼 길을 온 사람들에게 이거 내가 괜히 밤늦도록 붙잡아 둔 것이 아닌가 모르겠군.”

카르발디가 재빨리 나서서 말했다.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니?”

카르발디는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양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후후. 이제 보니 오늘 아라퀘스가 이곳까지 와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겠군요. 마치 운명의 손길에 끌렸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노인 양반께서는 제가 하는 얘기를 듣는다면 기절초풍을 할 겁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기에…….”

“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으시죠. 하하.”

“이 사람이 정말? 당장 말해 보게나. 늙은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여기 순진해 보이는 이 녀석 말이죠. 그러니까 아라퀘스가 바로 아독 님의 아들이라면 믿겨지겠습니까?”

순간 장로가 깜짝 놀라다 못해 멍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라!”

과연 장로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당장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시 말해 보게나.”

“혈족을 만난 기분이 어떻습니까?”

“진정 이 청년이 그분의 아드님이 맞는가!”

“그렇고말고요.”

“오호, 이런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장로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주글주글한 두 손으로 아라퀘스의 얼굴을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정녕 네가 이리스 님의 후계자란 말이냐! 아아!”

“…….”

아라퀘스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가만히 있었다. 카르발디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어째 이거 일이 신나게 돌아가는군.’

그 이튿날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시점이었다. 강당 안에는 어제처럼 많은 참석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장로 왼쪽 좌석에는 아라퀘스가 당당히 앉아 있었다.

하루아침에 파격적인 대우랄까. 사람들은 그런 장로의 행동을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때마침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에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매우 상기된 것으로 보아서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점을 벌써부터 잔뜩 기대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아니나 다를까.

참석자들은 저마다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였고 개중에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흥분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이리스란 존재는 같은 혈족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추앙하는 대상이랄까.

설마하니 그분의 아들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또 며칠이 지났다.

가시나무 숲을 빠져나와 능선에 오르는 수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보였다. 맨 선두에는 아라퀘스와 카르발디가 그들을 이끌었고 한 가냘픈 여인이 그들 뒤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아라퀘스의 방문이 청년회 회장인 그녀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그토록 기다려 왔던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던가. 장로회의 끝에 이리스의 아들이라면 무조건 외부 세계로 믿고 따라가도 된다고 하였으니, 청년회 전원 51명은 그 결정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휘잉.

한 줄기 바람이 살을 엘 듯 불어왔다. 때마침 하늘로부터 눈이 내려왔으니 생전 처음 하얀 물체를 목격하는 역사 종족 젊은이들은 손을 내밀어 그것들을 잡으려 했다.

“와우, 이게 뭐지?”

“처음 보는 건데, 이거 닿자마자 녹아 버리네?”

“무척 차가워.”

바깥세상에 나오자마자 맞는 축복의 선물일까, 아니면 험한 세상으로 나가는 이들의 앞길에 응원이라도 해 주는 것일까. 사실 가시나무 숲 넘어 저들의 지역이 항시 온화한 이유는 바로 그곳이 활화산이 잠재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대지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풀풀 솟아올랐으니 사시사철 훈풍에 젖어든 그들에게는 세상 첫 경험부터가 무척이나 이채로웠다.

아라퀘스는 폭설을 피하기 위해 근처 바위 동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때 회장이 아라퀘스에게 다가오더니 말문을 열었다.

“잠시 옆에 앉아도 되겠지요?”

아라퀘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망토를 벗어 찬 바닥에 깔아 놓았다.

“물론이죠. 자! 여기 앉으시죠.”

그녀는 그의 친절함에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당연한 일 가지고요.”

“…….”

여인은 동굴 밖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게 뭐예요?”

“저건 눈이라 합니다.”

“눈이요?”

“글쎄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그러니까 비가 얼어서 저렇게 변했다고나 할까요.”

“얼다니요?”

그녀는 태어나서 따뜻한 지역에서만 살았기에 언다는 개념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두 손으로 팔을 비볐다.

“후, 정말 바깥세상은 너무 따뜻하질 못한 것 같아요.”

“계절이 겨울이라서 그렇습니다. 봄이 되고 여름이 오면 그땐 좀 낫지요. 일단 깔고 앉은 망토를 드릴 테니 그거라도 입고 가세요. 매우 두툼하니까 보온 효과는 제법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아라퀘스는 마치 소년처럼 볼에 홍조를 띠더니 곁눈질로 여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첫날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가슴을 술렁이게 만든 장본인이기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번엔 용기를 내어 묻기로 했으니.

“저기 이름이 뭐죠……?”

“키나라고 해요.”

“키나…… 예쁘군요?”

“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조금 짧지 않나요? 전 그게 불만이에요.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죠?”

“대략 보름 정도면 왕국에 도착할 겁니다.”

“저희들이 거기 가면 무슨 일부터 하지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막상 낯선 세상에 나오니 조금은 두렵군요.”

아라퀘스가 흐뭇한 표정을 했다.

“그런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아마 국왕 폐하께서 대환영을 하실 겁니다!”

키나의 두 눈방울이 커졌다.

“정말요?”

“그렇고말고요. 대단히 좋은 분이시거든요. 가끔 화를 잘 내시지만요.”

“그런데 그분은 저희를 잘 모르시잖아요.”

“모르긴요. 제 아버님과 같은 혈족이라면 쌍수를 치켜들고 환영이죠. 원천기술 진화 종족이 단체로 입단한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저는 그대와 동료들 모두를 새로 창설하는 기사단으로 추천할 겁니다.”

“기사단원이라니요?”

“국왕을 보필하는 일인데 보통 나라에서는 가장 명예로운 직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상당한 전투력을 지닌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이니까요. 원래 그 모체가 근위대원인데 이번 원정 후에 기사단으로 명명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그런 일을 한단 말이죠?”

“아마, 대륙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기사단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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