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7. 어둠의 여신 (48/81)

Chapter 47. 어둠의 여신

테세우스는 갑작스레 나타난 소녀를 보고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지원 군단장이란 제법 묵직한 직급을 배정을 받은 뒤로 그의 하루 업무는 눈 매우 바빴고 요즘 들어 새벽녘에 들어와 잠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그의 숙소에는 수십 여 명의 병사들이 철통같이 경비를 서기 때문에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침입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침대 아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자신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한 소녀의 존재가 테세우스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넌 누구냐.”

“…….”

소녀가 말이 없자 테세우스는 한 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종인 것 같은데…… 내가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그러자 소녀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만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시종처럼 보이니?”

“…….”

테세우스가 멍한 얼굴로 소녀를 살폈다. 대뜸 반말을 하는 그녀가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지 말이다. 아니면 나이가 너무 어려 시종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금방 투입된 아주 초짜이거나.

테세우스는 대체적으로 아이들에게는 관대한 구석이 있기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해하려 했다.

“하하, 그 녀석 매우 당돌한 아이로군. 자! 아침 시중 같은 것은 나 혼자 해결해도 되니까 어서 나가 봐라.”

“바보 같은 놈! 나를 시종으로 보다니,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더니 멍청한 건 똑같네?”

“…….”

이건 또 뭐란 말인가. 테세우스의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으니.

“네 이 녀석!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그런 망발을 하는 건가.”

“화내는 거니?”

“진짜 혼나기 전에 냉큼 나가 봐라. 방금 전했던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해 줄 테니까.”

“싫어.”

소녀는 짧게 답하고는 테세우스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냅다 튀어 올라왔다.

홱! 털썩.

“후후, 제법 푹신한데?”

그녀는 뭐가 신났는지 침대에 팡팡 뛰며 놀기 시작했다. 이에 테세우스는 매우 황당한 듯 그저 멍하니 그녀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숙소 밖의 병사들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거기 누구 있는가!”

즉시 반응이 있었다.

“무슨 일이 온지요!”

“내 방에 들어온 아이를 당장 데려가도록!”

털컥.

문이 열리자마자 병사들 네 명이 들어왔다.

“누가 감히 군단장님의 숙소에! 누가 침입했다는 거죠?”

“자네들이 모르면 누가 아는가. 내 참 기가 막혀서.”

병사들이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세우스는 아직도 팡팡 거리며 뛰어 노는 철없는 시종 계집아이를 바라보며 어서 데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헌데 병사들이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가.

“저…… 누구를 말이죠?”

“여기 아니 말일세.”

“그러니까 아이가 어디 있다는 거죠?”

“뭐라!”

다른 병사들 역시 침대 위에는 테세우스만이 있고 아무도 없음을 발견하고는 저마다 의아스런 반응을 부였다.

“대체 누가 있다고 그러시는지요?”

“자네들 눈에는 여기 계집아이가 보이지 않는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요.”

“…….”

테세우스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면 정말 저들 눈에 이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병사가 말했다.

“저기 혹시 아직 잠결이신지…….”

“지금 정신은 말짱하다네.”

“아무래도 요즘 업무에 시달리시느라…… 그러시는 게 아니올지.”

‘아. 정말 이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생각해 보니 헛것이 분명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병사들을 물렸다.

“잠시 나가 있겠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 일들 보게나.”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당장 말씀하십시오. 그럼 이만.”

병사들은 저들끼리 의아한 눈치로 슬금슬금 내실을 빠져나갔다.

쿵!

경비병들이 사라지자 테세우스는 애써 정신을 차려 다시 눈을 떠 보았다.

순간 그가 놀라고 말았으니.

쪽!

헛것인 줄 알았던 소녀가 바로 코앞에서 자신의 입술에 기습적인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헉! 뭐야!”

“너 생각했던 것보다 진짜 잘생겼다. 호호!”

급기야 테세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를 냈다.

“이, 이런 황당한……!”

“화내니까 더 멋있네?”

“당장 꺼지지 않을 텐가!”

소녀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싫은데.”

“이런 요망한 것 같으니라고.”

그는 결국 검을 집어 들어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소녀는 피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들어 한번 슬쩍 휘둘러 쳤다.

홱! 스르르!

우두두둑

놀라운 일이었다.

테세우스의 다크퍼스 소환 검이 잘게 조각이 나서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헉!”

대자객 신전 특급 자객 시절부터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검이 눈앞에서 한순간에 박살이 나자 그로서는 이만저만 흥분한 게 아니었다.

“세상에! 내 검이…….”

그가 망연자실해 하자 소녀가 한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까워하지 마. 그까짓 거 개한테 줘도 가져가지 않겠다. 치.”

그제야 테세우스는 소녀의 존재감에 대해 처음으로 긴장감을 느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그러자 소녀가 심술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당장 밝히지 못할까!”

그러자 소녀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애인. 후후.”

“애인이라니?”

“앞으로 연인 사이하자, 그 말이야. 나 말이야? 널 보자마자 반했거든. 앞으로 나와 사귀어 볼래?”

“…….”

엉뚱한 답변을 늘어놓는 소녀 아이, 테세우스의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누구냐니까!”

소녀 역시 큰소리로 당차게 말했다.

“네 애인이라니까! 어머, 나 진짜 네가 좋아질 거 같아. 너무너무 잘생겼어. 후후.”

살다 보니 이런 황당한 순간도 맞이할 때가 다 있던가.

“빌어먹을,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현재 테세우스의 심정이 바로 그런 것 같았다. 테세우스는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곧이어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 가지 일을 떠 올렸다. 지난 번 자신의 소환 검으로부터 나온 다크퍼스가 했던 얘기가 생각이 났다.

나카스니아 대륙에 관한 얘기부터 대살육자 이리스의 활약을 꿈속을 통하여 생생하게 보여 주었던 그때 일 말이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기 전에 했던 말이 이제야 귓가에 생생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네. 조만간 그분께서 자네에게 모습을 드러낼 걸세. 다소 장난을 좋아하니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기대하게나. 그럼 난 내 임무를 마쳤으니 그만 귀환을 해야겠지. 후후, 론의 후계자여! 부디 어둠의 힘을 되찾고 부활하기를 바라네!”

테세우스는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드는 것 같았다. 그가 소녀를 다시 쳐다보며 자기도 무르게 외쳤다.

“그렇다면 혹시 어둠의 여신이…… 너?”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누구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반말했다가 살아남은 녀석들이 없었어. 하지만 너는 잘생겼으니까 특별히 예외로 해 줄게? 후후.”

“…….”

테세우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해 하자 소녀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궁금하지 않니? 뭐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말해 주지. 잎으로는 지긋지긋하게 붙어 다녀야 할 테니까. 난 한나라고 해.”

“한나…….”

“그럼 오늘은 이만.”

팟!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테세우스는 아직도 아침잠이 덜 깬 사람처럼 몽롱한 상태였고 심지어 손으로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

그 이튿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테세우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모포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안고 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이건!”

거실 바닥으로 튕겨 나온 그는 모포를 걷어치우고 불청객을 확인했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는!”

그제야 두 눈망울로 두리번거리며 일어나는 소녀, 그녀는 바로 어제 등장했던 한나였다.

“벌써 날이 밝았나?”

태평스럽게 말하는 그녀에게 테세우스가 소리쳤다.

“네가 왜 내 침대에 있는 거야!”

그녀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왜?”

“뭐냐니까!”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당장 사라져!”

“우린 애인 사이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나와도 되는 거야?”

“뭐…… 라고.”

테세우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마저 내둘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긴장도 되었다. 대략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녀는 어둠의 여신이 강림한 것이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인간의 범주로 상상 힘들 정도의 막강한 권능을 지닌 여신, 무슨 이유로 지금처럼 소녀 모습을 하고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조심스러울 필요는 있는 것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오히려 더 이상한 표정을 짓는 한나.

“왜 이러냐니? 네 소환 다크퍼스가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니. 난 이 인간 세계에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말이야. 더군다나 너처럼 흑운성의 기운을 지닌 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흑운성이라고.”

“네 아빠처럼 말이야. 비록 지금은 어둠의 종족을 해방시킨다고 쓸데없이 나섰다가 영원한 암흑세계로 갔지만 그래도 한때에는 나카스니아 대륙에서 수백만 명의 어둠 종족을 거느린 군주였거든.”

그녀의 말에 테세우스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신을 남겨 두고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 그의 행방을 몰랐었는데 지금 이 소녀가 대략 알려주는 것이 아니던가.

한나가 침대에서 내려와 테세우스에게 다가왔다. 놀랍게도 그녀는 속이 거의 다 비치는 속옷 차림이었다. 마치 천사가 목욕을 하고 난 후의 모습처럼 너무도 귀엽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 나가자!”

“나가다니?”

그녀가 이번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스윽.

“어디든 구경시켜 줘!”

테세우스가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헉! 떨어져!”

“정말 왜 그러니. 그냥 나가서 여기 세상 구경 좀 시켜 달라는데.”

그는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젠장! 가장 바쁠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네가 하는 일이라도 좋으니까 일단 우리 밖에 나가자. 응?”

그녀가 또다시 다가오자 테세우스가 두 손을 들어 기겁을 했다.

“가까이 오지 마! 구경시켜 줄 테니까 일단 떨어져 있어. 아니 그것보다 일단 옷이나 입어!”

그녀가 보란 듯 관능적인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왜? 내 몸매가 별로니? 쳇, 이 세계에서 만큼은 일부러 어린 모습이 하고 싶어서 이런 거니까 네가 이해해 줘라?”

“어린 모습이라니―”

“성인은 별로거든. 순수하지가 않아. 나는 그냥 천진하게 막 놀고 싶어. 후후. 물론 네가 잘 받아 줘야 해!”

그녀가 눈 한번 깜빡이자 예쁜 드레스 차림으로 바꾸었다.

“이젠 됐지? 그럼 팔짱 껴도 돼?”

“그건 안 돼!”

어느새 다가와서 테세우스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

“벌써 꼈는걸.”

“…….”

그날 오후.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였다. 해가지도록 지원 군단의 모든 병사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인 물품들을 각 대형 막사 창고들에 분리시키느라 훈련장은 시장처럼 북새통을 이루었다.

제아무리 테세우스가 비록 일반 군단이 아닌 지원 군단이라 할지라도 그 직급은 엄연한 군단장으로서 삼천여명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고위 관료에 속했다.

게다가 그가 하는 일은 20만 명에 육박하는 10개 군단 모두의 군수 물자 배급을 책임지는 아주 막중한 임무로서, 얼마 후 원정식을 시작으로 그야말로 실전에서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마당에 골치 아픈 존재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고 있으니 테세우스로서는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네 직분이 고작해야 이런 것들 가져다주는 심부름꾼이란 말이지?”

한나가 또다시 테세우스의 속을 긁기 시작했다.

“그게 지원 부대의 역할이다.”

“왜 하필 지원 부대를 맡게 되었어?”

“상부에서 지시를 받았을 뿐.”

“그럼 싫다고 해.”

“싫다니?”

“다른 군단의 군단장 직을 달라고 해.”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군. 그게 생각대로 되는 일이냐?”

“왜 못해. 네 아버지는 인간 세계에 있었을 때에도 흑마술 사령관으로서 나라를 통치까지 했었는데.”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니까 제발 좀 그만 귀찮게 해.”

“아버지 반만이라도 닮지. 쯧쯧. 어쩌다가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냐.”

순간 테세우스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정말 혼나 볼래!”

그러자 한나가 고개를 버쩍 쳐들고 담담히 말했다.

“그러다 진짜 치겠다?”

마침 오른편에 한 무리의 백마 탄 장교들이 누군가를 호위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모든 병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허리를 숙여 최대한의 예를 표했다.

호위를 받으며 유유히 지원 부대 내를 통과하는 자는 다름 아닌 집정관 카르세크였다.

이에 테세우스가 그쪽으로 향했고 그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셨는지요.”

카르세크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소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준비는 잘 돼 가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이까짓 지원 부대 지휘하는 일이야 그다지 어려울 건 없겠지. 원정식이 머지않았으니 완벽한 준비를 하게나. 원로원 늙은이들이 뒤에서 봐준다고 대충 대충하지 말고.”

“물론입니다.”

“대답은 잘하는군.”

카르세크는 그대로 말을 탄 채 딴 곳으로 고삐를 틀었고 호위장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지원 부대 내를 완전히 떠나자 그제야 테세우스는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한나가 뭐라 참견했다.

“방금 걔는 누구야?”

“집정관.”

“높은 사람이야?”

“높고말고. 황제 다음가는 직분이랄까.”

“그래서 꼬랑지 만 개처럼 굽실거렸구나?”

다시 불끈하고 마는 테세우스.

“뭐라!”

“호호. 솔직히 그렇게 보였어!”

“부하가 상관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도 네 모습이 좀 초라하더라. 아까 걔가 착용한 옷 말이야. 제법 번쩍번쩍 하더라고. 그런데 너는 그게 무슨 꼴이니?”

“내가 어때서?”

“아까 말 듣기를 비록 네가 지원 부대를 지휘하는 군단장이라 들었는데, 그래도 뭔가 있어 보여야 하잖아? 아, 잠깐만! 생각해 보니 너한테 뭐 줄 게 있네? 이따가 숙소 탁자 위를 살펴봐.”

“무슨 일인데?”

“아무튼 살펴 봐! 네 아버지의 유품이니까!”

팟!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진 그녀. 테세우스는 이번에도 다소 혼란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그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업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 온 테세우스, 아까 한나가 낮에 한 말을 까맣게 잊고 탁자를 지나가다가 문득 뭔가가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마치 흑요석처럼 윤기가 반짝 반짝 흐르는 검과 갑옷이랄까.

그제야 그녀의 말이 생각났던가.

‘가만있어 보자. 이게 혹시?’

그녀가 언급했던 아버지의 유품 청동검과 갑옷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는 한나, 그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격스럽군! 결국 위대한 군주의 유품이 아들에게 돌아오게 되었으니. 어디까지나 내 덕인 줄 알아라?”

테세우스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손으로 만져 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그저 눈으로 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기운이 느껴졌던가. 아니 그보다도 왠지 모르게 친밀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아 왔고 손에 때가 묻은 익숙한 물건을 만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때, 친숙하지? 그건 네가 흑운성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야.”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감이 느껴졌다. 아니 꼭 안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났다.

마치 운명의 끈이 저절로 그의 손을 움직이는 것처럼 이다.

‘아,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처럼 마음에 설레는 날이 있었던가.’

그때 한나가 손을 들어 방 안 허공에다가 무엇을 그리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하나의 광경이 연출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꿈속에서 상상의 날개가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외쳤다.

“이왕이면 네 아버지 론이 그걸 얻은 배경과 잠깐의 활약에 대해서 목격하는 것이 좋을 듯해. 네가 얼마나 위대한 군주의 후계자인지 스스로 느껴 보라고. 지금 볼 것은 쌍좌 흑운성의 운명을 이어받은 론과 투다카스탄이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장면인데 꽤나 재미있을 거야. 후후.”

테세우스는 그녀가 만들어 낸 허공의 영상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듯 말이다.

***

론의 청동 군장 뒤에 달린 날개가 상당히 거북한 음을 내면서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붕 뜨는 론. 거대한 날갯짓과 함께 드디어 그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엄청난 위세였다. 그 옛날 이리스가 펼쳤던 테드칸의 그것과 똑같았다.

투다카스탄의 얼굴이 노래졌고 경악에 찬 신음마저 내뱉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날개라면 나도 가지고 있다. 에잇!”

그는 자신만의 날개를 형성시켰다. 그 모양이 인간 종족의 손길이 들어간 융합군장과는 그 개념부터 달라 보였으니, 날개는 마치 어둠의 힘을 매개체로 형성이 된 듯 보였다.

슈슈슈슉!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오른 투다카스탄. 날개를 달은 그의 위용 역시 어둠의 군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가 맞은편 허공에 떠 있는 론에게 일침을 가했다.

“청동 전사! 후후, 수천 년 전에 그 존재조차 어디로 사라졌을지 모르는 시조 케이스탄 님을 복원시키려 꽤나 애를 쓴 모양이군? 흑성제단에서 정보를 입수한 뒤 제법 그럴싸한 군장을 만들었나 본데…… 지금 누굴 속이려 하는 것인가! 네가 인간 대륙에서 연금술과 흑마술의 정수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터라 필시 너는 술수를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하!”

참으로 인정하기 싫었던가.

그는 론이 여전히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다. 론이 답답한 듯 말했다.

“이 군장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이 사기꾼 놈아!”

“제발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제가 이 군장을 얻게 된 연유를 말하겠습니다.”

투다카스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끄럿! 나는 네놈의 그 수작에 그냥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테다. 그동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었으면서, 일말의 내색조차 하지 않은 무서운 놈 같으니라고!”

“투다카스탄 님 역시 쌍좌 흑운성의 힘을 받으신 군주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떠한 대립도 원하지 않습니다. 어둠의 종족에 내려진 저주를 풀고 암흑으로부터 영원한 해방을 위해서는 투다카스탄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때 갑자기, 투다카스탄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지면서 어둠의 검을 가슴 부위로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척!

“이미 너와 나 사이는 끝이 났다!”

비장함이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현재 그의 발검 자세는 이제까지 보여 준 그 어떠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에너지가 모이는 것 같았다.

웅!

어둠의 검이 주변 지역 전체를 울릴 정도로 진동했다.

번쩍번쩍.

우르릉, 쾅!

구름은 미친 듯이 이리 저리 흘러 다녔고 그 위로 뿌려지는 섬광과 천둥 소리.

온 대지가 검은 기류로 쏴하고 밀려들었고 하늘마저 악령들의 울부짖음 들려오는 듯했으니, 아마도 투다카스탄의 최후 공격이 시전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공격 직전 투다카스탄이 한마디 했다.

“애초부터 두 명의 군주 중 하나는 반드시 소멸해야 한다는 전설이 있었지. 후후, 이제야 기억이 나는데…… 그런 말을 문헌에 남긴 장본인은 바로 시조이신 청동 전사 케이스탄 님이었다. 그런데 네놈은 그의 환생자라면서 두 명의 군주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런 모순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환생자로 태어나 저주를 풀고 평온을 얻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나더러 지금 믿으라는 것인가!”

“.......”

순간 말문이 막히는 론, 그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투다카스탄이 갑자기 날개를 휘저으며 전속력으로 론에게 다가왔다.

휘리리릭!

“론이여! 네놈의 술수는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밝혀지리라!”

투다카스탄의 마지막 일침에 천지가 더욱 요동을 쳤다. 어둠의 군주의 자격으로 모든 기운을 끌어 모은 것 같았다.

대지가 출렁이고 하늘이 요동을 쳤다. 주변 검은 기류들이 투다카스탄의 검으로 빨려 들어갔고 곧이어 강력한 에너지가 그의 검 끝을 통하여 론에게 발사되었다.

마지막 승부는 기세와 힘으로 결판이 날 것인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잠시 후 두 명의 군주 중 한 명만이 명실상부한 어둠의 종족 통수권자로 올라설 것이다.

파파파팟! 쩡!

“악!”

슉! 쾅!

강렬한 파공음 뒤에는 아주 명쾌한 음만이 ‘쩡’ 하고 들려왔다.

그 뒤로 이어지는 비명!

설마하니 이런 극강 고수의 대결이 한쪽이 맥없이 무너지면서 허무하게 끝이 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 귀에 들어오는 소리로 판단한자면 너무나도 짧고 간결하게 마무리 지어진 것 같았다.

“컥! 컥!”

투다카스탄은 무려 허공에서 100여m 뒤쪽으로 날아가더니만 바위 절벽으로 푹 박힌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참으로 간단한 승부였다.

 론은 아직도 청동 검을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투다카스탄의 공격을 막아 내고 그도 모자랐는지 그를 저 멀리 바위에 박아 버렸으니 론 그 자신도 퍽 놀란 모양이었다.

승부는 갈렸다.

바위 속에 투다카스탄, 워낙 깊숙이 박혔던가. 단단한 암석의 벽이지만, 엄청난 열기로 녹아 흐른 용암처럼 아직도 소가 침을 질질 흘리듯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위는 굳어 버리고 그는 그 안에 갇힌 채 영원한 안주를 할지도 몰랐다.

***

한나가 허공에 그려 낸 광경은 거기까지였다. 테세우스는 지난 번 이리스가 다크퍼스들을 살육하는 장면만큼이나 이번에도 재차 충격을 받은 듯 멍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 놀랍게도 그것은 현재 자신의 용모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어쨌든 그분이 보여 준 전투는 가히 하늘을 찢어내고 대지를 울릴 정도로 엄청난 것이기에 그저 할 말이 없을 뿐이었다.

그때, 한나가 부연 설명을 했다.

“네 아빠가 청동 검 하나로 저 대해와 같은 힘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청동 검의 재질 자체가 흑운성에서 떨어져 나와 지상으로 하강한 운석이기 때문이야.”

“운석이라고?”

“응. 애초부터 어둠의 종족 자체가 생겨난 원인은 청동 전사 케이스탄이 유성 흑운석을 손에 쥐면서였어. 흑운성은 암흑의 힘이 만들어지는 정수이자 근원이라 할 수 있거든. 청동 검은 병기의 기능보다는 모든 암흑과 악령의 근본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진정한 어둠 군주의 상징인데, 애석하게도 투다카스탄은 위대한 힘에 도전한 꼴이었으니 멀리 바위에 푹 박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호호!”

한나는 말하다 말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런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당시 대결은 네 아빠가 패했어야 했어.”

테세우스가 무심코 반문했다.

“그건 왜지?”

“어둠 종족을 해방시킨다고 하면서 자칫 성인군자 행세를 했으니까 말이야. 결국 그의 희생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었지만 상대적으로 어둠의 힘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어. 다크퍼스들마저 이리스에게 굴욕을 당한 시점인지라 어둠 세력은 한동안 기조차 펴지 못하고 저 끝없는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지. 오죽 했으면 다른 차원에서 놀고 있던 내게 도움을 청했겠어? 쳇!”

그녀는 갑자기 침대 쪽으로 가더니만 몸을 던지듯 누웠다.

홱! 푹―

“아함. 졸려.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돌출적인 행동을 보여 주는 그녀, 테세우스가 한 가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이제, 나를 찾아온 정확한 이유를 말해 주시지?”

“그쯤 힌트를 주었다면 이제 깨달았을 텐데?”

“혹시 어둠 세력을 키우고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우리 자기.”

“내가 그런 운명을 택하리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뭔가 모르시나 본데, 흑운성의 운명을 타고난 자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 자체가 권능이라고.”

“권능이라니?”

“정말 말 많네. 탁자 위에 있는 것들을 보고도 몰라서 물어!”

테세우스가 다시 청동 검과 청동 군장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녀가 말한 권능의 의미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앙탈을 부리듯 말하는 한나.

“그건 그렇고 당장 이리 와. 우리 같이 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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