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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8. 손자병법 (49/81)

Chapter 48. 손자병법

지드와 작전 참모 하키리우스는 왕국으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국경선 근처 구릉지 위를 걷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친 채 주변 지형과 번갈아 보면서 매우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한 시간여가 지나고 나서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근처 아늑한 곳을 골라 모처럼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직 때 이른 봄인지라 능선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우 찼고 고령인 하키리우스의 백발과 흰 수염을 간간히 날리고 있었다.

이에 지드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참모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거라도 걸치시지요.”

하키리우스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폐하의 망토를 걸칠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씩 미소 짓는 지드.

“기사단이야 산 아래 대기 중에 있으니 그때까지만 걸치세요. 내가 국왕이기 이전에 그대는 고령의 노인이 아니십니까. 게다가 아까부터 기침을 하는 것 같은데.”

그는 결국 망토를 건네받았고 씁쓸하게 웃었다.

“허허, 이거 서운합니다. 폐하께서 마치 저를 퇴물로 보시는 것 같아서.”

“퇴물이라니요! 오늘날 피체 왕국이 그나마 체계적인 틀이 잡힌 것이 다 참모 덕분이 아닙니까.”

“어차피 누가 참모가 되었을지라도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해냈을 겁니다.”

지드는 그 말에는 극구 부인하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본적이라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정말이지 참모 덕으로 지난 겨울 동안 생각보다 몇 배나 되는 주변 영토와 세력을 얻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정말이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소.”

“폐하께서 부하들을 잘 두신 덕이겠죠.”

그는 멋쩍은 듯 아까 열심히 봤던 양피지를 꺼내 들고는 다시 살폈고 내심 감탄스런 표정을 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셨는지요?”

이에 지드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아마 말씀 드려도 잘 모르실 겁니다.”

“솔직히 궁금합니다. 여기에 적힌 작전과 전술 내용은 일찍이 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것들로서 절로 놀람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참모가 감탄해 마지않는 그 양피지는 지난번 화산 보물 상자 안에서 꺼내온 병법 모음집이었다.

물론 지드가 이 세계 언어로 번역한 뒤에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전략전술 내용이 담겼고, 평생 작전 참모의 역할을 수행해 온 하키리우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지드와 참모는 지난 며칠 동안 이것을 토대로 왕국 주변의 지형지물들을 살펴보며 사전 답사를 해 오고 있었다.

이제 조만간 제국의 군단이 침략해 올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철저한 작전과 전술을 세우기 위한 마지막 점검이자 준비라 할 수 있었다.

지드는 그 양피지를 바라보며 내심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그 역시 번역 작업을 하면서 그 얼마나 놀라고 또 놀랐던가.

기존의 개념과 차원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사고 체계들,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듯 수많은 전술들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으리라.

그가 중점적으로 연구를 한 중국 병법가는 바로 손무였다.

손자병법.

하키리우스는 이미 손자병법을 수십 수백 번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중 그 내용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오자서 장군과 손무라는 병법가가 활약했던 오나라가 현재 이곳 피체 왕국과 그 모든 면에서 상황이 비슷한 것에 대해서도 무척 놀라고 있었다.

“이런 병법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신께서 우리 왕국을 버리지 않으셨음이 분명합니다. 마침 대규모 전쟁을 앞둔 시점이니까요!”

하카리우스의 말에 지드가 되물었다.

“대체 어떤 면에서 손자병법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중국 오나라가 위치한 곳은 중국 변방 지역으로서 오랑캐들의 터전이었던 곳이라 나왔습니다. 일단 우리 하류 구역 주민들이 세운 피체 왕국과 비슷한 맥이 있고 산악 지형과 하류 강이 흐르는 지형으로 보아서 오나라 군대 체제가 주로 보병들로만 이루어진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팔라카스 제국은 주로 전차 부대에 이은 후속 보병 부대가 합류하는 전술이니, 대평원이나 편편한 지역에서만 그 이점을 따질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헌데 오나라는 보병들로 하여금 산악 지형이라는 지름길을 이용하여 상당히 먼 거리의 적국들을 침략하게 했으니, 이는 같은 지리적 여건의 우리 왕국에게 크나큰 희망을 주는 보물과도 같은 병법서입니다.”

지드 역시 그 말에 동의를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산악 지형과 하류 강들이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곳에 왕국이 위치해 있으니 자연스레 보병 체계가 큰 비중으로 이루어져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우리 영토 주변 지역은 대부분 완만한 초원 지대로 대평원이 펼쳐진 광활한 지역이잖습니까. 만일 제국의 전차 부대와 보병들이 우리 왕국으로 들어가는 초입 구간까지 밀려와 진을 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죠?”

하키리우스가 은근한 미소로 답했다.

“사실 그들이 그렇게 해 주기만을 학수고대 하고 있답니다.”

“무슨 말씀인지요?”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평원을 점령하고 산악 지형 한가운데 있는 우리 왕국의 초입 구간을 틀어막은 채 장기전을 생각한다면 외부와의 교통이 완전히 끊김으로써 다소 힘겹고 버거운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흰 이미 수년 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물자와 식량 그리고 식수를 이미 비축해 두었기에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들은 우리 왕국만을 목표로 원정 군단을 파견한 게 아니라 남부 대륙의 모든 나라들을 공격 대상으로 정했기에 속전속결 작전으로 나올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제야 지드는 안심이 되는 듯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이번엔 하키리우스가 무슨 이유인지 다소 안색이 굳어진 채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우려라니요?”

“최근 제국에서 활동하는 정보원들로부터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카르세크 집정관이 매우 뛰어난 전술가를 얻었다 합니다. 그는 얼마 전에 팔라카스 제국으로 망명한 아키아란 자인데 원래 출신은 쎈 왕국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뛰어난 두뇌를 가졌기에 불과 십오 세에 최연소 학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수년 후 약관 이십 세가 되어서 전공으로 전략 전술을 마스터하게 되었죠. 마침 쎈 왕국이 주변국들과 분쟁으로 인한 전쟁을 시작할 때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발휘되었답니다. 그 덕분에 쎈 왕국은 불과 일 년 만에 세 개 적국들을 제압하고 그 지역에서는 패권 왕국으로 떠올랐지요. 헌데 그의 소문이 동맹 제국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헤브론 제국 역시 전쟁 중에 있었는데 아키아를 영입함으로써 그 이후의 전투는 승승장구하게 되었다지요.”

지드가 감탄의 표정으로 말했다.

“제국에서 먹힐 정도라면 그 아키아란 자의 능력이 보기보단 상당하군요?”

“상당할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남부 대륙의 최고 전술전략가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제야 지드는 하키리우스가 왜 안색이 굳어졌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자가 팔라카스 제국으로 망명했다면 이는 우리에게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까.”

“사실 폐하께서 손자병법을 구해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머리를 붙잡고 끙끙 앓고 있었을 겁니다. 저 역시 전술 전략으로 공부하며 평생을 살아 왔지만 아키아처럼 타고난 천재 지략가에게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거든요. 헌데 손자병법을 보니까 그 세계에서 희대의 병법가인 손무라는 인물과 오자서라는 뛰어난 장수의 활약이 자세하게 적혀 있는 게 아닙니까. 제가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그렇다면 이번 전쟁은 손무와 아키아라는 자와의 지략 싸움이 될 공산이 크겠군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 중요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전차 부대를 앞세워 평원의 끝인 초입 구간까지 진격해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건 왜죠?”

“전차 부대 위주로 진격해 올 시에 우리가 평원에 나가서 맞서지 않는다면 막대한 자금을 들인 저들의 주력 전차 부대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죠.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전차들은 산악 행군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그때가 되면 부랴부랴 보병으로 편성하여 산악 진격을 서두르겠지만 일단 초반부터 저들은 우왕좌왕하는 꼴이 되고 말겁니다.”

“그거, 멋진 생각이군요.”

“하지만 방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그 아키아라는 자가 참모가 된다면 아마도 처음부터 전차를 배제한, 오로지 보병 군단으로만 이루어진 체제를 갖추어 진격해 들어 올 것이 분명합니다.”

순식간에 지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뛰어난 지략가이니까 그럴 수 있겠군요.”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지략가일지라도 집정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집정관을 속이는 겁니다.”

“집정관을 속이다니요?”

“얼마 전에 합류해 온 아크누스의 기병 부대를 일찌감치 초원에 진을 치게 함으로써 우리가 평원에서 전면전을 하리라는 암시를 주는 겁니다. 아예 그 참에 전차들 을 만들어 놓고 주변 지역을 정찰하는 척 보여 주는 것도 좋겠지요.”

“아! 그러니까 집정관이 애초 전차 부대를 앞세워 진격하도록 유도하는 거군요. 그리고 막상 눈앞에 다가올 시에 우린 기병대를 철수시켜 산악 지형으로 숨어들면 그만이구요.”

하키리우스가 미소로 답했다.

“바로 그겁니다.”

“하하!”

“그 작전이 성공한다 할지라도 산악 지형에서의 전투 역시 무척 버거울 겁니다. 저들의 병력이 워낙 방대하고 아키아라는 인물이 합류를 한 상황일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손자병법이란 희대의 병법서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귀한 병법서가 있지만 우리 지휘관들이 얼마나 그 전술에 따라 주느냐가 최대 관건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휘관들로 하여금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의 임무 지역들을 샅샅이 살펴보게 하셨군요.”

“눈감도 찾아갈 수 있도록 지형지물에 능통해야만 적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라고 손자병법에 나와 있습니다. 우린 익숙해진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가급적이면 유리한 점을 최대로 끌어 올려야 할 겁니다. 그래서 지금 폐하와 저, 그리고 모든 지휘관들은 손자병법 제일 단계, 계획(計劃) 편에 따른 ‘싸우기 전에 신중히 계획하라’의 내용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계획도 하나의 병법이라 그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 다음은 뭐가 있죠?”

“작전(作戰)입니다.”

“작전요?”

“오래 끌지 말고 속전속결하라. 예를 들어 적의 식량을 빼앗고 수요를 채워라. 등 보급부대를 노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전략(戰略)으로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대로 전면전보다는 모략으로 공격 목표와 작전 방법, 승리를 미리 예측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 이후로 기습 공격에 대한 활용과 너무도 다양한 전술이 많지만 일단 전투가 시행되면 체계적으로 시행을 해야겠죠.”

그때 지드가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휘유, 저절로 혀가 내둘러지는군요. 그보다, 날도 저무는데 이제 돌아가야겠군요.”

휘잉.

하키리우스 역시 바람에 백발을 날리며 일어났고 지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작전을 세운들 저들은 제국인 만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지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전쟁이라……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군.”

그 둘은 강풍에 바람을 펄럭이며 앞으로 치열한 전투 현장이 될 발아래 지형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야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

“벌써 봄이 시작되었군요. 눈 쌓인 곳이 거의 보이지 않으니 말이오.”

“…….”

***

짹짹

봄바람의 훈훈함이 왕궁의 정원을 가득 메웠다.

아카시안은 마치 천국의 나락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천사처럼 모처럼만에 환한 표정으로 주변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정녕 이게 꿈이던가, 생시이던가!

지난 수년 동안 세 동생들과 함께 황궁 별관에 갇혀 지내면서 그 짧은 동안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기를 겪은 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신이 도왔다고나 해야 할까?

광기로 가득 찬 황제 게라쿠스의 마수로부터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악마 같은 인간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또 벗어나서 이곳 정원의 풀과 나무들이 새싹을 피는 것을 즐기고,

새들마저 봄을 찬양하는 것을 만끽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못내 흥분이 되는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왕궁을 두리번거렸다.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지드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왕국의 국왕이라는 것도 매우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에게서 오늘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의 자초지종을 직접 들었다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침 정원 입구로부터 지드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카시안 역시 매우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향했다. 그러자 지드가 저만치에서 갑자기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 아닌가.

“아가씨,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

이에 아카시안이 당황했는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옛날 경호 대장 시절에 자신을 아가씨로 모셨던 바로 그 말투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아침 일찍 돌아다니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냥 편하게…….”

“저 같은 하류 검사 출신 경호원이 감히 명문가 출신의 따님에게 어떻게 편하게 대합니까? 후후!”

그제야 그녀는 지드의 속셈을 알았던가.

“지,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장난이라니요? 아가씨.”

“정말 그럴 거예요? 우린 지난번 헤어질 때 그런 관계를 버리기로 했잖아요!”

“엥……?”

이번엔 지드가 당황하는 척했다. 하류 구역 제5구간에 합류하기 위해 그녀와 동생들의 경호 임무를 그만두고 이별을 해야 했던 일,

그때 아카시안은 처음으로 본심을 드러내며 자신의 등 뒤를 껴안고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라 눈물을 뿌렸다.

물론 그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며칠 전에 그 기억을 아레스가 상기시켜 줬기도 했다.

그녀 말대로 이 둘은 이미 그때부터 연인사이라 할 수 있었다.

지드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하하, 그대처럼 총명한 여인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몹시 재미있는데요?”

이번엔 아카시안이 갑자기 허리를 숙여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목소리도 낮추어 아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폐하께서 장난이지만 미천한 저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심장이 막히고 다리가 후들후들 거립니다.”

“……엉?”

어이없어 하는 지드.

그런 그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그녀가 한마디를 더 던졌다.

“정말이지 너무나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셔……?”

지드는 이번엔 그녀가 자신에게 장난친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는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짐이 명하겠노라. 그대는 당장 내게 가까이 와서 안기기를 명하노라.”

“…….”

아카시안이 멍한 얼굴을 했다. 이어 들려오는 큰 목소리.

“냉큼 안기지 못하겠느냐!”

그녀가 얼떨결에 지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 지금 장난치는 거죠.”

“어험! 장난이라니? 감히 짐이 하는 말에 토를 달다니.”

아무리 총명한 여인일지라도 조금은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안기라고 말씀…… 하셨나요.”

“그렇다. 진하게 포옹 한번 해 봐라!”

지드는 그렇게 말해 놓고는 내심 재미있어 죽겠다는 심정으로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바로 그때, 자신의 품에 안기는 아카시안.

“헉!”

“안기라면 못 안길 줄 알았나요?”

“뭐, 뭐야! 그래도 이건…….”

“폐하와 평생 함께 살 건데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요. 후후!”

“아이고, 여긴 정원이라고! 남들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

“방금 전 안기라고 명령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안긴 것뿐입니다.”

그녀는 지드의 품 안으로 들어가 그를 꼭 앉은 채 머리마저 파묻었다.

지드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금세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아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나 참.”

“앞으로는 저를 두고 떠나지 마세요.”

“자! 일단 우리 떨어져서 이성적으로 얘기합시다.”

“그전에 약속해 줘요! 가지 않겠다고.”

“내 약속하오.”

“정말이에요?”

“그렇소.”

그제야 지드의 품에서 살며시 떨어지는 아카시안.

한 줄기 봄바람이 지드와 아카시안의 머리칼을 동시에 일렁였다.

그 둘은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도록 분수대 벤치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든 그 녀석…… 역시, 그렇게 할 줄 알았소.”

“정말 그 덕분에 저와 제 동생들은 수년 동안 안심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황제가 술에 만취하여 제 별관에 찾아오면 그는 기지를 발휘해서 그와 술 대적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간혹 가다 충성이 지나친 자들이 황제의 청혼을 거절하는 저를 못마땅하게 여겨 음해하려는 시도 역시 사전에 이든님이 모두 막아 주었어요. 과연 집정관의 아드님이라서 그런지 영향력도 상당하더군요.”

지드는 7호 이든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그 녀석이 마음고생이 무척 심할 텐데.”

아카시안 역시 그의 심정을 잘 아는 듯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안 됐어요. 그는 늘 입버릇처럼 당장이라도 황궁을 떠나서 이곳으로 오고 싶다고 했거든요.”

지드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 그런 말을 했소?”

“하다뿐인가요. 눈물이 맺힐 정도로 대장과 옛 경호 대원들 모두를 보고 싶어 했지요. 하지만 자기 때문에 동료들 셋이 죽은 일이 몹시도 가슴 아파했는데…… 특히 8호 아레스에게 미안해하더군요.”

“그럴 만도 하지요. 그 둘은 친형제보다도 더욱 친했으니까요.”

“어쨌든 제가 떠나오기 전에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어요.”

“정체성이라니요?”

“이번 전쟁을 앞두고 자신의 선택해야 할 곳에 대한 갈등이랄까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곳으로 오고 싶겠지만 그래도 혈육의 정이 있는지라 아버지 곁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심정이겠지요. 어머니와 여동생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마당에 장남인 그가 옛 정을 지키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이에 지드 역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내가 그 녀석 입장이라도 무척 어려운 일이겠구려.”

지드는 문뜩 저 멀리 왕궁 지붕 위로 피워 오르는 뭉게구름을 바라보았다.

아카시안 역시 허공을 응시하며 그곳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세월이 제법 흘렸고 모든 것이 변한 느낌이오.”

“저는 우리가 지금 함께 있다는 자체에 너무 감사해요.”

“세상에 그대 마음처럼 아름다고 긍정적으로 흘러가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소. 우린 앞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시련을 겪어야 할 운명이니 말이오.”

“…….”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전쟁을 앞두고 지드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은 앞으로 일어날 일일 뿐.

지금은 그의 옆에서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아주 귀한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그 자체에 행복함을 느끼고 싶었다.

이번엔 그녀가 지드의 팔짱을 꼭 끼고는 가슴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수줍은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이대로 언제까지 있으면 좋을 텐데…….”

지드 역시 그녀의 그런 행동에 손으로 어깨를 감싸주며 함께 하늘 세상을 구경했다.

***

같은 시각.

왕궁 집무실 3층 테라스에는 누군가 기둥 뒤에 서서 정원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드와 아카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지형지물 답사를 끝내고 방금 돌아와 보고를 올리려는 대기 중인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에르가니아였다.

하지만 우연찮게 목격한 정원의 두 연인에 대해서 표정이 다소 굳어졌던가.

분명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는 전에도 아카시안에 대해서 얘기를 간간히 들은 적은 있었다. 국왕이 예전 경호 대장 시절 모셨던 아가씨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헌데 그 둘이 서로 포옹을 하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지 않은가.

그 둘이 애정을 나누는 사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현재 그녀가 몹시 당혹스러워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

가슴이 쓸려 내린다고나 할까. 현기증마저 나려고 했다. 그동안 국왕께서 자신만을 특별히 신경 써 주며 챙겨주었던 그 모든 일들이 허망한 모래성으로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그저 부하의 관계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관심으로 자신을 잘 대해 주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여기서 뭐 하세요?”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누군가에 에르가니아가 깜짝 놀랐다.

“어머?”

“놀라셨어요, 언니? 호호!”

“헤라.”

에르가니아의 말대로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여인은 헤라였다.

그녀는 에르가니아 옆으로 다가오더니만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고 저 아래 분수대에서 다정다감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지드와 아카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닷없이 한다는 얘기가.

“정말 속 터지죠?”

“무슨 말이지?”

“왜 알면서 모른 척해요? 지금 이 순간 가장 화가 날 사람은 바로 언니일 텐데요.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것 같아요! 어쩜, 저 둘이 저럴 수가 있는 거죠?”

“…….”

그제야 에르가니아는 헤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골적인 얘기가 조금은 거북스러웠던가.

“헤라, 폐하를 그렇게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아.”

“옳지 않다니요! 우린 사람도 아닌가요, 뭐. 흥! 솔직히 언니나 저나 국왕 폐하를 내심 사모해 온 것은 사실이잖아요. 저는 그렇다 치고서라도 언니는 진짜 폐하가 마음에 둘 정도로 무척 좋아했던 분이신데, 언제 그랬나는 듯 저렇게 정원에서 남의 이목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둘이 애정을 표시하다니요. 너무해요! 치!”

“…….”

에르가니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입에서는 그저, 옅은 한숨만이 뿜어 나올 뿐이었다.

결국 에르가니아는 더 이상 참기 힘든 듯 발길을 돌려 집무실 입구 쪽으로 향했다.

“나 그만 갈게. 보고는 오후에 하는 게 좋겠어.”

저벅저벅,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가 버리는 에르가니아.

헤라는 그녀가 사라진 내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드가 아카시안하고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하하 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남자들이란…… 치!”

***

지평선이 하늘과 이어진 평원의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해 보였다.

아크누스가 지휘하는 사천 기병대가 그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모습은 가히 일대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초록이 짙은 벌판 오른쪽에는 조그만 한 언덕이 있는데 그 위에는 수장 지노를 비롯한 옛 경호 동료들이 보였다.

1호 비스크와 2호 게리는 야외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보다가 가끔 주변을 번갈아 보며 제법 진중한 대화를 나누었고, 3호 크리스와 8호 아레스는 저들끼리 얘기 하고 있었다.

이어 지노가 큰소리로 외쳤다.

“다들 모여 봐라! 시간 없으니까 오늘부로 회의를 완전히 끝내야겠어.”

대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자 지노가 비스크에게 먼저 물었다.

“임시 숙영지 설치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냐?”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조금 가면 아주 적당한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다 설치할 계획이오.”

“규모는?”

“대략 천 개쯤?”

“병력 수용 수치가 어느 정도나 되지?”

“에이, 그것 참. 형님은 명색이 대장인데 그런 상식도 모르오?”

순간 불끈하는 지노였다.

안 그래도 항시 1호 녀석의 반항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가.

“누가 몰라서 그러냐! 그냥 대장이 부하한테 형식으로 물어 보는 거지. 이 무식한 자식 같으니.”

“쳇…… 그렇다고 성질부리기는. 막사 하나에 다섯 명이 자니까 오천 명 아뇨!”

“그렇다면 천 개 더 쳐서 도합 이천 개로 늘려.”

“왜요?”

“왜라니! 하라면 하란 대로 할 것이지.”

“지금 가지고 있는 건 막사 천 개밖에 없소!”

“본국으로부터 조달하면 되잖아?”

“아, 진짜! 거 정말 번거롭게시리……!”

“어라? 이놈이 아예 대놓고 개기네. 적의 정찰병들이 고작 천 개 가지고 속겠냐. 적어도 이천은 되어야지 이곳 평원에서 전면전을 벌이는 줄 안단 말이다. 머저리 같은 놈!”

“알았수다, 그렇게 하면 되지 왜 열은 내고 그럽니까.”

이번에 지노가 아레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진행이 잘되어 가냐?”

“물론입니다. 일단 전차는 오백 대만 만들기로 하겠습니다.”

“오백 대라…… 말 네 마리에 마부와 전사 하나씩이니까. 이천 마리의 말들과 천여 명의 병력이라. 규모가 장난이 아니군.”

“비록 겉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만 전차 부대를 구성하는 것이지만 놈들을 속이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막내는 일을 할 때 꼼꼼한 구석이 있군. 누구처럼 대강대강 해 가지고 대충 어림잡아 하는 그런 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니까.”

이에 1호 비스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예 대놓고 욕을 하지 그래요! 나 참, 사람을 무시해도 그렇지…… 동생들 앞에서 창피하게 그게 뭐요. 진짜 사람이 왜 그러는 거요?”

“뭐라! 너야말로 한참 형님뻘인 내가 무슨 얘기만 하면 꼬투리 잡는 놈이! 이게 시건방지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형님 진행하는 방식이 조금 허접스러운 게 눈에 보이니까 그러죠.”

순간, 지노가 공중으로 떠서 이단 옆차기를 때려 버렸다.

“에잇! 너 오늘 진짜 뒈져 봐라!”

붕―

탁!

“아이쿠.”

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날아 차기 직전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게리와 크리스의 만류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아이고! 네놈들이 이제 작당을 하고 나를 패 죽이려는구나! 이 나쁜 놈들 같으니.”

“툭 하면 폭력을 쓰니까 그렇죠. 제발 진정 좀 하죠.”

“그래, 알아 봤다! 알아 봤다고! 젊은 네놈들이 서로 짜고 나를 골리려는 모양인데― 내가 그리 호락호락 당할쏘냐.”

그래도 인격이나 성품이 좋은 게리가 그에게 다가가서 부드러운 미소로 말렸다.

“정말, 형님 왜 이러세요? 이젠 형님께서는 무려 오천여 병력을 지휘할 제1 군단장이신데 누가 감히 무시를 한단 말입니까? 우린 그 친형제 같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오. 그런 것쯤은 넓으신 아량으로 받아 주어야지 그게 사는 맛이지요.”

이에 수그러드는 지노.

“누가 뭐래나, 쳇! 그나저나 밥이나 준비하라고 해. 배고파 뒈질 것 같네.”

“그 말투부터 고치시죠? 우리가 아무리 하류 구역에서 산전수전을 다 겼었다지만 이젠 위상이 달라졌다고요. 명색이 군단장이신데 그런 저급한 말투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냅둬라! 이렇게 살다 죽게. 거참, 오늘따라 이것들이 왜 이래? 너희들이야말로 말들이 많군.”

결국 1호 비스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으니.

“야, 야, 집어쳐. 됐다, 됐어! 시끄럽게 뭐 하는 짓들이야? 형님께선 그 누구보다 하류 습성이 몸에 진하게 배였으니 우리가 이해하자고.”

굳어지다 못해 창백해지는 지노.

“이노오오오오옴! 너…… 너 이 자식! 지금 뭐라고 했어. 엉?”

“내가 틀린 말 했나요?”

“이 망할 놈의 자식이! 야, 너 이리 와!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나도 부군단장인데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달라 이 말입니다.”

“헹! 웃기는 소리!”

지노가 또다시 이단 옆차기를 시도하려 하자 대원들이 다시 그들을 뜯어 말렸다.

“정말 못 말리는군.”

“대체…… 이 형님들은 전생에 원수가 졌나.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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