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9. 천재 지략가 아키아 (50/81)

Chapter 49. 천재 지략가 아키아

팔라카스 제국에는 여느 대국(大國)들과 마찬가지로 전술 전략에 정통한 인재들이 수두룩했다.

대부분은 주로 자국 내 사관학교 출신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총명하고 성적이 우수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더군다나 그들 중에서조차 소수만을 가려내어 전략가로 최정예 교육 과정에 입문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훗날 제국을 위한 참모로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명성과 부도 얻게 되는 것이다.

요즘 들어서 팔라카스 제국의 대규모 원정 군단이 편성된 가운데 집정관 카르세크는 각 군단에 배정된 수십 여 명의 기라성 같은 참모들을 소집하며 향후 원정에 대한 사전 작전 계획을 세세하게 검토 중에 있었다.

참모들 간에도 서열이 있듯이 집정관이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레아무스였다.

레아무스.

그는 원정 군단 총 작전 참모로서 제국 내에서 최고의 인재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거리는 50대 중년인으로서, 주로 연구회에서 전략에 관한 집필을 하며 말년을 보내야 하는 나이이지만 뒤늦게나마 제국의 패권 야욕에 동참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멋들어진 콧수염에 정갈하게 뒤로 넘긴 올백은 그저 겉모습만 봐도 얼마나 깔끔한 성격인지는 그냥 알 수 있다고 할까.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전 과목과 모든 과정에서 수석이라는 기록을 남긴 그였기에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거침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20대에 이르러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그의 재능은 본격적으로 발휘되어 제국에서 인정받는 참모가 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입지는 굳어져 갔고 오늘날 대규모 원정 군단의 총 작전 참모가 되었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최고점에 올랐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으니, 전혀 예기치 않은 한 인물이 참모 소집 회의에 동참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짹짹―

레아무스는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입궁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아내와 시종들이 의관을 입혀 주고 정리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레아무스는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으로서,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어제는 집정관께서 다소 이해 못할 행동을 하시는데 뭐라 말씀을 드리기에도 뭐 하고― 이거야 원, 답답해서 나 원 참!”

중년의 아내가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글쎄 말이오. 집정관께서 얼마 전 망명해 온 아키아라는 자를 전격 수용하여 오늘부터 참모 소집 회의에 참가시킬 것이라고 일반적인 통보를 하지 않았겠소? 총참모인 내게 일언반구조차 없이 말이오.”

그가 내뱉은 아키아라는 말에 아내가 다소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아키아라면 헤브론 제국의 천재 지략가라고 소문이 자자한 바로 그 사람 맞나요?”

이에 레아무스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까지 왜 그러오? 그자가 그리도 유명했단 말인가. 쳇!”

“그냥 소문만 들었지요. 이십 대 나이에 참모로 등극해서 헤브론 제국이 대륙의 동북 지역 전체를 함락하는 데 일조를 했다고요.”

“언제부터 남의 나라 정세에 그리도 해박했소.”

“다 아는 얘기인데요, 뭐…….”

“어쨌든 나는 기분이 좀 그렇소.”

“왜요?”

“그 애송이가 제법 유명하기는 하지만 엄연한 망명자로서 외국인이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정관께서 참모 소집 회의에 참가시킨 의도가 뭐겠소.”

“그거야…… 뻔한 일 아닌가요? 그의 능력을 보고 싶은 거겠죠.”

레아무스는 속 모르고 얘기하는 아내 때문에 결국 언성을 높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오! 우리 참모들 중에서도 나를 비롯하여 인재들이 수두룩한데 그깟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을 참가시킨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오!”

아내가 그의 남편 레아무스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세요? 당신답지 않게요. 아마도 집정관께서는 불과 이십 대 나이에 엄청난 일을 해낸 그를 직접 살펴보고 싶은 거겠죠.”

“물론 그저 살펴만 보면 좋겠소! 그러다가 그자가 집정관의 마음을 홀리기라도 한다면 그게 문제지.”

레아무스의 아내는 다소 어이없는 얼굴로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정말 오늘 이상하네요! 당신 위치가 지금 어딘데 그런 일에 신경을 쓰나요? 정말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애처럼 변하니 걱정이에요.”

“애, 애라니! 말이 지나치지 않소.”

레아무스는 의관 정리가 끝나기도 전에 거실에서 나와 궁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는 아내, 그녀로서도 최근에 레아무스가 저렇듯 신경이 예민해진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

참모 소집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

원정 그 첫 번째 대상인 피체 왕국의 공략 작전에 대한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참모들은 저마다 신중한 의견을 냄으로써 매우 중대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느 때처럼 집정관 카르세크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피체 왕국은 얼마 전 황제 폐하의 본관에 고작 국왕에 지나지 않는 자가, 자기 멋대로 침입하여 수모와 치욕을 주었던 나라요. 물론 우리 팔라카스 제국에서 가장 먼저 함락시켜야 할 대상 중 그 첫 번째라 할 수 있소. 비록 작은 나라이고 당장 생각 같아서는 며칠 내로 초토화를 시켜 버려 황제 폐하께서 당한 일을 수십 배 갚고 싶지만, 전쟁이란 항시 신중해야 하는 법! 본인은 그대들의 구체적인 의견을 듣고 싶소. 물론 처음으로 나올 의견은 총참모께서 제시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이외다.”

이에 레아무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피체 왕국 공략에 대한 원정 병력 규모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곳은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작은 나라인 만큼 총 십 개 군단에서 제일 군단과 이 군단의 두 개 군단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군단들은 예정대로 다른 경로를 통하여 각각 서남쪽과 동북쪽으로 진격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일단 피체 왕국이 함락되면 나중에 그들과 합류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사견입니다만, 집정관께서는 황제 폐하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직접 제1군단에 참가하시어 진두지휘를 하시는 편이 어떠실지요.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곳에 참석 중인 저와 참모들 여럿이 최선을 다해서 보필할 것입니다.”

그러자 집정관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난 그대만이 있으면 되니까 다른 참모들은 각각의 군단에 배정시키도록 하시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아무스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집정관이 여전히 자신만을 최고로 신봉하는 하니 말이다.

“계속하시오.”

집정관의 지시에 레아무스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문을 이어 갔다.

“피체 왕국은 산악 지형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서 큰 강줄기가 통과하는 붉은 협곡이 있습니다. 최근 주변 세력들을 확장하고 군력을 키운 것으로 보는데, 괄목할 만한 사실은 아크누스의 기병대를 영입함으로써 본격적인 평원 진출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정찰 대장으로부터 보고 받기를 에스페른 평야에 아크누스 기병대를 포함한 전차 부대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마 우리의 진격 정보를 알고 교전 준비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집정관이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하고 말았다.

“감히 우리와 전면전을 펼치자 그 말인가? 대체 그까짓 조그만 나라의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이기에…….”

레아무스는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평원에 보이는 그들의 숙영지 규모만 하더라도 일만에 육박했고 전차 규모도 오백이 넘는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게다가 아크누스의 사천여 기병대를 포함해 후속 지원 부대까지 고려한다면 대략 이만여 명이 넘는 병력이 포진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허……! 거참, 그래도 제법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군. 신생 왕국 따위가 그 짧은 기간에 상당한 병력을 보유 했으니 말이오. 무엇보다도 우리 제국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전차 부대와 기병대마저 있다하니 한마디로 정면 승부를 보자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가소로워서 못 봐주겠군? 어쨌든 그대 생각을 계속해서 말해 보시오.”

“물론 저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일단 우리 측도 전차 부대를 제일 군단과 이 군단에 집중적으로 배정시켜 그 수를 일천 대로 늘릴 것이고 기병대 숫자 역시 일만 여로 확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정확히 저들의 두 배가 됩니다. 그 다음에 보병들이 합류한다면 총병력의 규모가 오만에 육박하니 무려 다섯 배로 이상이 되겠죠. 게다가 전차 부대와 기병대 전술 활용도 면에서 전혀 경험이 없는 저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됩니다.”

집정관이 손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골몰하더니만 말했다.

“말대로 된다면 일이 쉽게 풀리겠군. 하지만 전쟁이란 모든 예측 가능한 변수를 항시 생각해야만 하오. 만일 저들이 평원으로 나오지 않고 산악 지형으로 숨어든다면 그때는 어찌 하겠소?”

그러자 레아무스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는 정찰병들로 하여금 평원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게 지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 병력을 그곳으로 집결시키느라 정신이 없다는 보고가 속속들이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첫 전투만큼은 기세를 세우기 위해 주력전을 감행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 정신은 높이 살 만하군! 제국의 주력 부대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려 하다니 말이오.”

집정관이 이번엔 다른 참모진들을 둘러보며 말문을 열었다.

“다른 의견을 낼 참모는 없으신가?”

“…….”

물론 잠잠했다. 총참모 레아무스의 의견에 누가 함부로 이견을 제시한다 말인가.

하지만,

가끔 예외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법.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는지요.”

그러자 모든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이 되었고 곧이어 집정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대는…… 아키아.”

아키아라는 말에 갑자기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천재 지략가가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맨 끝 왼편 구석에 여리 여리하게 생긴 청년이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오늘 그는 집정관의 특별 부탁으로 이곳 참모 긴급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순간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순간이었다.

레아무스는 그를 보자 내심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뜩이나 그에 대한 존재감으로 신경이 은근히 날카롭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국 나서고야 마는 젊은 망명자가 괜히 미워 보였다.

그때 집정관이 쌍수를 치켜들고 그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오호…… 의견이 있다면 한번 말해 보게나.”

“여러 고견하신 참모들께 먼저 양해를 구하고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는 일단 집정관과 레아무스에게 정중히 허리 굽혀 예의를 표했다.

정말이지 여자보다도 더 백옥 같은 피부에 가녀린 몸매, 사내이면서도 마치 여인 같은 풍모가 느껴지는 중성적 타입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눈빛에 지적인 외모는 그냥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호감이 가는 준수한 청년의 용모였다.

“제 생각을 감히 말하자면 일단 피체 왕국으로 진격하는 군단 내에 전차 부대를 대폭 줄이고 보병으로 전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기병대 역시 저들의 숫자와 그 형평성만 맞추고 절반으로 줄이는 것 또한 바람직한 조절이라 봅니다.”

순간 레아무스의 표정이 굳어졌고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다짜고짜 반말로 따지듯 물었다.

“전차 부대와 기병대를 줄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침착하게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하는 아키아.

“쓸데없는 장비 계열의 군비를 축소하자는 의미입니다. 어차피 저들은 산악 지형으로 숨어 들 것이 자명하니까요.”

“뭐라고!”

“아마도 의도적으로 이쪽의 쓸모없는 군비 확장을 유도하기 위해 평원에서 진을 치는 작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결국 레아무스가 호통을 쳤다.

“이런 건방진 작자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따위 망발을 하는 것인가. 명색이 참모 소집회의 중이건만! 더구나 수많은 정찰과 보고들을 수집하고 내린 결론인데! 자네, 대체 지금 어디서 그런 의견을 내놓는 것인가!”

“…….”

상황이 이쯤 되자 아키아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듯 살며시 자리에 앉았고 더 이상의 말을 삼갔다. 그때 집정관이 레아무스를 진정시켰다.

“그는 내가 직접 부탁을 하여 이곳에 처음 왔기에 아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인가 보오. 그래도 전략가로서 상당히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니, 그대가 곁에 두어 조언을 듣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레아무스가 정중히 거절했다.

“집정관께서 제게 신경 써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이미 유능한 참모진들이 넘쳐 나는 관계로…… 제게 일단 생각할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집정관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 이거 내가 괜한 일을 한 것 같군요. 난 그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데려왔건만.”

“성의는 무척 감사합니다만…….”

“아무튼 알겠소. 앞으로 작전권에 대해서는 일체 참견치 않을 것이오.”

한편 아키아는 구석 어두운 곳에 침통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

그날 오후.

아키아는 또 다시 허탈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후회 막심하다고나 할까.

아까 참모 소집 회의에서 문뜩 나섰다가 결국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는 손으로 머리칼을 감싸면서 다시 자책했다.

“아악! 나는 항상 이 모양이지?”

이전에 있던 나라에서도 다른 고참 참모들에 비해서 몇 발자국 앞서 내다보는 혜안(慧眼)은 그들의 미움을 사기에도 충분하지 않았던가.

전쟁이 끝나자 그는 질시의 대상으로 찍혀 모함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여기 팔라카스 제국으로 망명해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유명세 덕분에 집정관의 직접적인 관심을 받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괜히 나서는 바람에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집정관은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 하셨는지 보직 추천서를 직접 써 주며 그 누구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 누구란 바로, 지원군단장 테세우스라는 자였다.

‘후. 지원군단장이라면 앞으로 그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말인데. 나 같은 전략가가 지원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후우, 뭐…… 원활한 수송 공급이나 물자 배급 같은 임무가 많겠지만 그래도 즐겁게 받아 들여야 하겠지.’

잠시 후 지원 부대 사령관 막사에 도착한 아키아.

탁자 맞은편에는 한눈에 보아도 카리스마가 철철 넘쳐흐르는 젊은 군단장 테세우스가 있었다.

아키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테세우스에게 추천서를 넘겨주었다.

그는 집정관이 직접 써 준 추천장을 살펴보더니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대의 전공이 전략가라고 여기 적혀 있는데…… 왜 여기로 온 것인가?”

아키아가 태연하게 답했다.

“저는 그저 집정관님이 배정해 주신 대로 여기 온 것입니다.”

“흠. 이상한 일이군. 우리 지원 부대에서 전략가를 쓸 이유가 없건만. 하여간 추천서를 가지고 왔으니 일단 받아는 주겠다.”

“고맙습니다.”

테세우스가 잠시 그를 살펴보더니만 한마디 했다.

“그나저나, 자네 셈은 잘할 수 있나?”

“셈이라니요?”

“이곳에서 일하라면 어마어마한 물자들을 각 군단들에게 골고루 배분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만큼 셈에 능통한자의 일손이 절실하다네.”

아키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부전공이 수학입니다.”

“그거 잘됐군.”

“아무 일이나 맡겨만 주십시오.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테세우스가 잠시 생각하더니만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집정관께서 직접 추천해 준 전략가 출신이라면 그 직급이 낮아서는 안 되겠지. 그렇다면 일단 첫 임무를 부여할 테니까 한번 해 보긴 하게나. 그 후에 다시 얘기를 나눔세.”

“제가 할 일은 뭐죠?”

“제삼 대대 군비 물자 배급 총괄 지휘를 맡길 테니, 지금 당장 그리로 가 보게.”

“예, 알겠습니다.”

곧이어 아키아는 안내 병사를 따라서 막사 밖으로 나갔다.

테세우스는 그가 사라진 입구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곳은 이틀 전에 셈이 뒤틀려 정말이지 큰 골칫거리를 안고 있는 대대인데, 셈에 정통한 관계자들 몇 명이 도와주러 왔다가 울상이 되어 포기하기도 했지. 후후! 집정관, 아마도 원로원파인 내게 심복을 심기 위해 저놈을 전략가로 위장해서 내 곁에 붙여 두려는 심산인가 본데…… 어림없는 짓이지. 어쨌든 이 일을 빌미로 그를 쫓아내면 그만이니 나중에 별 탈은 없을 거야.”

테세우스는 아키아의 등장이 집정관의 의도적인 첩자 심어 두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튿날,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무려 보름여동안 골치를 앓아 왔던 제3대대 군비 물자 배급에 관한 임무가 깨끗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이유인즉 새로 온 지휘관 아키아가 놀랄 만한 속셈으로 무려 열 개 군단의 수백 중대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종 물자를 공급했던 것이다.

얼마 전 물자가 도난당했던 사건 때문에 중간에 셈이 뒤틀려 버렸었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는 한계까지 들이닥쳐 원정을 앞둔 군단에 크나큰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을 중대한 사건이었다.

헌데 한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청년이 단 하루 만에 해결했으니 테세우스는 무척 놀라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그를 자신의 막사로 불러와 다시 한 번 면담을 가지기로 했다.

“자, 자네. 어떻게 일처리를 한 것인가.”

“저는 그저 셈대로 했을 뿐입니다.”

“아니, 이보게! 그저 셈을 해서 일을 해결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제 부전공이 수학입니다.”

“이곳 제국에도 수학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조차 너무 복잡해서 포기한 것을 자네가 했다고?”

“새로운 공식을 도입했더니 셈이 쉽더군요. 제가 만든 것치고는 제법 쓸모가 있다고 할까요?”

놀라고 마는 테세우스.

“그러니까 공식을 자네가 만들었다, 그 소리인가!”

“그저 미천한 실력입니다.”

“…….”

테세우스는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제야 그가 다시 보였던가.

정말이지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으로서 지적, 지성 그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영혼처럼 느껴졌다.

점차적으로 그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아키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언이라…….”

“아마 제 말씀대로 하신다면 무척 도움이 되실 겁니다.”

“한번 말해 보게나.”

“얼마 후 제일 군단과 이 군단이 전차 부대와 기병대 그리고 보병 군단을 피체 왕국으로 출정시킬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원 군단장께서는 전차 회수와 기병대원의 수천 마리의 말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고 무조건 산악 보병에 필요한 물자를 대거 준비해야 하실 겁니다.”

순간 테세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아마 십중팔구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초반부터 적들의 계획에 말려드는 것을 보고도 어찌 할 수가 없군요. 다만 지원 군단장께서 후차적인 대비를 해 두심이 좋을 듯합니다.”

테세우스는 다소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전투 상황의 앞일까지 미리 내다보고 내게 그런 조언을 하는 것인가? 정말 가소롭지 그지없는 친구로군. 후후!”

순간 아키아는 자신이 또 쓸데없는 말을 했나 싶어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아차!”

그런 그의 당황하는 모습에 테세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삼 대대 일을 해결한 것은 인정해 주지만 방금 전 한 말은 정말 어이가 없군. 어쨌든 자넨 오늘부터 정식으로 지원 군단 장교이니 그리 알고 나가 보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예의를 표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때 모습을 드러내는 한나, 그녀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쟤 귀여운데? 후후!”

그러자 테세우스가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귀엽지 않은 사내가 있던가?”

“그래도 나 그렇게 헤픈 여자 아니야. 그리고 솔직히 너만은 못해. 좀 계집애처럼 생겼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저 녀석 어떤 거 같아.”

이에 한나가 다소 놀라는 표정이었다.

“지금 나한테 조언을 구하는 거야?”

그동안 테세우스는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던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그가 물어보니까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어 들려오는 테세우스의 음성.

“어떠냐니까?”

“뭘 물어 보고 싶은데.”

“……믿을 만한 녀석인지를 말이야.”

“믿든지 말든지 간에 쓸모 있는 애라고 생각해.”

“그건 왜지?”

“보통 인간이 아니거든?”

의아해하는 테세우스.

“그 의미는…… 저 녀석이 뛰어나다는 건가.”

“응!”

“얼마나.”

“뭘 그렇게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니까.”

“아, 진짜? 그래, 그래, 무척 많이 뛰어나.”

“더 자세하게!”

“쳇, 귀찮게 왜 자꾸 물어봐! 아무튼 걔는 남들보다는 독특하고 특별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니까!”

테세우스의 눈빛이 반짝 거렸다. 그리고 입가에 드리워지는 은근한 미소.

‘이거야 원…… 듣도 보도 못한 별의별 놈이 다 나타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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