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드는 안력을 돋워 적들의 숙영지가 끝없이 늘어진 평원을 제법 세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작전 참모 하키리우스와 기사단장 아라퀘스가 서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휘잉.
적들의 막사 앞에 꽂혀진 수많은 제국의 깃발들이 강풍에 펄럭이고 있었지만, 그 요란함에 비해 적 진영은 경비병들만 간간히 돌아다닐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잠시 후, 지드는 무슨 이유인지 고개를 갸웃했다.
“거참…….”
그런 그의 모습에 참모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너무 조용해서요. 명색이 팔라카스 제국 주력 군단이건만, 진격이 한 차례 막혔다고 저렇게 많은 대군이 전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는 하키리우스 역시 동의를 표했다.
“저 역시 그 점에 대해서 고심 중이었습니다. 필시 무슨 내막이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 의미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사실 적 참모인 레미우스란 인물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자에 대해선 나도 잘 알고 있지요. 별칭이 늙은 여우로, 전략 전술에 능통한 자라죠?”
“요즘은 나이가 들어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뛰어난 전략가임에는 분명합니다. 일단은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어차피 저들이 이곳을 뚫지 못하면 우린 자연스레 방어를 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결국 여기서 바위처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 그 말씀이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저들이 시간을 끌어 봐야 군량만 소비할 뿐 손해 보는 것은 자기들일 테니까요.”
“그래도 영 마음이 편치 않은데…… 이거, 내가 쓸데없이 신경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군.”
“허허, 심려치 마십시오.”
애석한 일이지만 이들은 레미우스가 첫 전투에서 전사(戰死)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현재 집정관 카르세크의 옆에 천재 지략가인 아키아가 있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제부터 이곳 최전방은 직접 맡아 주십시오. 나는 각 진영의 상항을 살펴보고 왕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설령 저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이곳 초입 구간을 내준다 하더라도 산악 지형 곳곳에는 아군이 이중 삼중으로 매복 중이오니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하하, 믿고 있겠습니다!”
***
쨍!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무렵이었다.
지드는 아라퀘스와 함께 산 아래를 내려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또 다른 산봉우리 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제2방어선으로서 에르가니아와 카르발디가 지휘관으로 있는 곳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아라퀘스가 묻자 지드가 다소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제일 방어선과 대치 중인 적의 분위기가 말입니다.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그 얘기는 아까 참모가 있을 때 내가 말했던 내용이잖아.”
“네, 맞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뭔 말이냐. 할 말이 있다면 그때 꺼냈어야지.”
“제가 어찌 폐하와 총 참모께서 대화하는데 껴들 수 있겠습니까.”
“못 껴들건 뭐야, 또. 네 의견이 있다면 당당히 밝혀야지.”
늘 그렇지만 아라퀘스는 이상하게도 지드 앞에서는 기가 죽는다고나 할까. 툭하면 구박을 받아 왔던 것이 어느덧 습관으로 밴 것이랄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여간 사관학교 출신이라고 쓸데없는 예법에 얽매이기는. 쯧쯧.”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죄송할 짓을 왜 하냐! 답답한 녀석 같으니라고. 네 스스로가 기사단장에다가 국왕을 보살피고 조언을 아끼지 않을 근위대장 직까지 겸비하고 있는 것을 명심하고 앞으로는 네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해라. 알았냐?”
아라퀘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허이구, 대답은 잘하지…… 됐다. 아무튼 이왕 그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난 아직도 적의 동태에 대해서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적의 병력이 무려 두 개 군단에 해당하는 오만여 명이건만 선발진이 막혔다고 해서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팔라카스 제국의 주력 군단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진격하기로 유명한 최강의 정예병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수십 일 동안 숙영지에서 막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을 준비 중에 있다는 것이 아닐는지요.”
지드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만 마지못한 얼굴로 답했다.
“뭐, 당장 뭔 일이 나는 건 아니겠지. 참모가 안심하라고 했으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제아무리 적 참모 레미우스라는 자가 지략이 날고 긴다 하더라도 이곳 산악 지형을 통과하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섣불리 움직일 리가 있겠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지드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가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태양이 쨍쨍거렸건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사방이 어두워졌군.”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데요?”
“우비도 없는데 서둘러 올라가지.”
그날 오후, 국왕과 기사단장의 갑작스런 행차에 제2방어선은 초긴장에 들어갔다.
특히 대장 에르가니아와 부대장 카르발디는 진영 초입부터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지드는 에르가니아를 보자 뭐가 그리도 좋은 환한 미소부터 흘렸다.
“그동안 잘 있었소?”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에르가니아.
“네.”
“…….”
평소 그녀의 전매특허였던 상큼한 미소와는 다르게 다소 우울해 보였던가.
“어디 아프오?”
“아닙니다.”
“안색이 좋지 않소.”
“바람이 찬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럽시다.”
지드는 등을 돌려 안내를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뭔가 찬바람이 쌩쌩 느껴지는데.’
***
잠시 후, 막사 안에서 에르가니아가 지도를 펼쳐 놓고 제2방어선의 병력 배치 현황과 매복을 위한 기습 공격 작전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드는 그녀가 말하는 내용보다는 왜 시무룩한 반응을 보이는지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인가.
“다 알아들었으니 그만 하시오.”
“네?”
“보고는 그것으로 마무리하시오.”
지드의 퉁명스런 한마디에 에르가니아는 물론 카르발디 외에 지휘관들이 긴장했다.
혹시 무슨 심기라도 건드렸는가 싶어서 말이다.
그때 지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바깥으로 나가서 진영이나 둘러보겠소.”
갑자기 진영이라니. 에르가니아는 혹시라도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걱정스런 얼굴로 변했다.
그때 다시 들려오는 지드의 음성.
“그대가 직접 안내를 하시오.”
에르가니아가 놀라서 되물었다.
“제가요?”
“당연히 이곳 최고 지휘관인 그대가 안내해야지 않겠소? 싫으면 관두고 뭐…….”
괜한 심통에 그녀는 초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나갑시다.”
“아아, ……네.”
지드가 휘장을 걷어치우고 바깥으로 나가자 그녀가 재빨리 뒤를 따라갔다.
휘리리릭― 휘잉.
한 줄기 바람이 한차례 지드와 에르가니아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진영을 절반쯤 돌 때였다. 다소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지드는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겠소? 사실 그대와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오.”
이에 흠칫 놀라는 에르가니아.
“무슨 일이신지요.”
“무슨 일 때문에 내가 보자고 한 것 같소?”
그녀는 거의 죽어 드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심통스런 표정에 말투마저 조금은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지드의 속마음을 그녀가 어찌 알까.
“사실 여기 들어설 때부터 그대가 왠지 울적해 보여서 나도 좀 기분이 그렇더군요.”
“…….”
침묵을 지키는 에르가니아.
그게 이유였던가. 어쨌든 이 자체도 의아한 일이었다. 자신이 울적하든 말든지 무슨 상관이 있기라도 한 건지.
“혹시 내게 무슨 기분 언짢은 일이라도 있소?”
그 말에 당황하는 에르가니아.
“언짢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대 표정이 그래 보이는데?”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폐하께 언짢을 수 있겠습니까.”
신기하게도 에르가니아는 아니라고 부정하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지난번 국왕과 아카시안이 왕궁의 정원에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모습이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제아무리 침착한 성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그녀도 여인인지라 쉬 다가오는 질투심에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심정을 지나칠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어찌 그런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지드가 다시 물었다.
“진짜 괜찮소?
“그게……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음. 그래, 그랬던 거였소? 어쩐지.”
“죄송합니다.”
“그게 왜 죄송할 일이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려면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몸조리에 주의를 기울이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지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만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보니 지금 우리 대화하는 모습 말이오. 뭔가 이상하지 않소?”
“이상하다니요?”
“원래 우리가 이렇게 어색하고 딱딱했소?”
“…….”
그녀는 이번에도 당장 대답을 못하고 당혹스런 반응을 보였다.
“아, 아뇨.”
순간 눈빛을 반짝거리는 지드, 그는 몇 번을 떠 본 뒤에야 그녀가 뭔가에 단단히 토라져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이번에는 강경하게 물어 보았다.
“아프다는 것은 핑계인 것 같은데, 제발 내게 말할 것이 있다면 솔직하게 털어놔 보시오. 이대로 돌아간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단 말이오.”
“…….”
또다시 머뭇거리는 에르가니아.
하지만 어차피 지드는 자신의 속마음을 모른 채로는 그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용기를 내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폐하께선 오래전 제가 하프를 켜고 있었을 때 제게 다가오셨었고, 마치 천진한 아이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셨죠. 정말 처음부터 무척 인상적이 분이셨습니다.”
“아, 그때 일들이라면 나도 기억이 나는구려. 정말 좋았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그대를 보는 순간 마음이 어찌나 설렛는지…… 지금도 당시만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린다오.”
순간 에르가니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 그러셨나요.”
“정말이오. 사실 내가 여기를 방문한 것도 그대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기 위한 것이오. 그동안 전쟁을 준비하느라 이렇게 대화할 시간이 적었지만 오늘은 기필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였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매우 냉담해 보이니, 어찌 그대로 돌아갈 수가 있었겠소.”
“…….”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여자의 마음이란 칼날처럼 날카롭다가도 사랑하는 연인의 숨결 한 번에 쉬 녹고 마는 연약한 눈송이와 같다고.
그렇게도 이성적이고 차분했던 그녀라지만 지금은 눈물마저 글썽이려고 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다고나 할까.
그때 지드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후! 내가 왕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
“아마 지금보다는 그대와 더욱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소. 그래서 말인데 때로는 내 신분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소이다.”
에르가니아는 내심 그 말에는 동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느꼈다.
“국왕의 신분이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데 뭐가 원망스러운지요.”
“…….”
이에 말문이 막히고 마는 지드, 그는 국왕 신분 때문에 옛 여인인 아카시안을 되찾지 않았던가.
서로 간의 감정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대화는 점차 깊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지난번 보고를 드리려고 왕궁에 갔다가 우연찮게 폐하께서 어느 여인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황스러워 하는 지드.
“거길 왔었다고요!”
“당시 뵙지 못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웬만하면 나를 보고 가지 그랬소.”
“두 분이 함께 정담을 나누시는 듯 보이는데 제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방해는 뭘…….”
“정말 너무 아름답더군요. 같이 계셨던 분께선.”
“아카시안 말이오?”
“네, 두 분의 특별한 관계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죠.”
“…….”
그녀는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그의 말에 계속해서 토를 달았다. 본디 곧은 성격과는 달리 말이다. 정말이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유치함을 피해 갈 수 없었나 보다.
이 둘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지드는 순찰 일정상 먼저 자리를 떠야만 했고 결국 무거운 발걸음으로 언덕 아래를 향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며 에르가니아에게 마음에 담고 있던 속내를 말했다.
“어쨌든 그대 모습을 보고 가니 마음이 한결 편한 것 같소. 그럼 다음에 또…….”
그로부터 얼마 후, 지드가 가고 난 뒤에 에르가니아는 병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앉아서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쟁을 앞둔 시점이라지만 왜 이리도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일까.
아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하다고나 할까. 하늘도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잔뜩 흐려 있었다.
고향을 떠난 지 어언 7년이란 세월이 흘렀던가. 워낙 밝고 환한 성격인지라 아무런 연고지도 없는 이곳에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헌데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으니 설마하니 그에게 빠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처음에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순박한 미소를 지었던, 그저 장난기 많은 평범한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모습이 온통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사랑이란 이렇게 말없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녀 나이 이제 스물여섯. 남자에 관심을 나타 내지 말란 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사랑에 빠진들 그 누가 뭐라 할 것인가. 한 가지 문제라면, 하필 국왕이란 고귀한 존재를 선택하였으니 잘못이라면 애초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난 지드를 알고 지낸 것이었다.
‘차라리 평범한 신분이었다면…….’
생각할수록 머리만 무거워졌다. 그래도 그가 잊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와 준 것만 해도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하늘로부터 한차례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휘잉. 우두둑.
올해 처음 맞는 봄비였다. 때마침 비도 뿌리고 있었으니 세상은 이미 우수 어린 분위기를 넘어서 쓸쓸하기까지 했다.
빗줄기가 제법 굵게 내렸지만 오히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물방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쏴―
“아! 시원하다.”
마치 심장을 관통 당하는 사람처럼 잠시 동안이라도 자신의 영혼을 드넓은 공간에 맡기고 싶어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본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얼마든지 공감이 가리라.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꼴이…… 이게 뭐지? 후후.’
사랑을 알기 전엔 무척 쾌활했던 그 자신이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이 우스워 보였으리라. 사실 따지고 본다면 세상사 별것 있던가. 인간이란 마음먹기에 얼마든지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법.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그녀가 두 손바닥을 펴서 빗방울을 받아 자신의 얼굴에 문질렀다.
‘시원해…….’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웃음소리.
“후후.”
에르가니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가 보았다.
“카르발디!”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면 어떡해요!”
“난 분명 정면으로 걸어왔소. 다만 그대가 넋이라도 나간 듯 못 알아보더군요. 그나저나 뭔 일 있었소?”
“뭔 일이라니요?
“마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후후. 그대처럼 항시 침착하고 차분한 여인이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나로서는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이에 얼굴이 굳어지는 에르가니아.
“남의 일에 신경 쓸 것 없잖아요.”
“남이라니, 이거 정말 섭섭하구려. 비록 연인 관계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더라도 이제 우리 사이는 특별한 경우에 속하지 않은 건가요?”
“상관과 부하의 관계라면 받아들이겠어요.”
“그리 말할 줄 알았소, 나 참.”
카르발디는 오른손에 쥔 가죽 우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몸살 걸리지 않으려면 그거라도 뒤집어쓰시오. 쳇, 무슨 괴로운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몸은 챙겨야 할 것 아니겠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우비를 받아 들어 머리부터 덮어썼다. 카르발디 역시 자신의 우비 쓴 채 그녀 옆 바위 위에 털썩 앉아 버렸다.
“비가 오니까 내 마음도 우울해지는군. 누구는 여복이 좋아서 두 여인을 놓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를 않나. 누구는 그중 한 여인을 너무도 좋아하는데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후. 사람에게는 타고난 복이 있던가. 나는 왜 이리 지지리도 운이 없는지. 쳇!”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에르가니아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혹시 폐하와 제가 대화 나눈 것을 엿들었나요?”
그러자 카르발디가 당황한 기색을 했다.
“엿듣다니요! 나, 난 우연찮게…….”
“어쨌든 엿들은 거잖아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근처에 숨어 있었던 거로군요.”
“후후, 미안하오. 일부러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곳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폐하와 그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 나무 뒤에 있었지요. 헌데 둘의 대화를 듣는 동안에 왠지 그대 모습이 하도 딱해 보이기에 그만 나도 모르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소.”
“제가 뭐가 딱하다는 거죠!”
에르가니아가 언성을 높이자 카르발디는 당황한 듯 엄살을 부렸다.
“아이고! 그 표정 말이오. 잘못하면 사람 패겠소?”
“당신이란 사람 정말 구제불능이군요.”
“하하.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데 그래도 난 할 말은 해야겠소. 국왕 폐하께서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신데 그런 분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대의 표정이 너무도 가여워 보이더군요.”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비를 벗어 버렸다.
스윽, 탁!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요. 나는 오히려 명색이 사내대장부랍시고 남의 얘기나 엿듣는 당신이 더 딱해 보입니다.”
에르가니아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을 돌려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카르발디가 히쭉히쭉 웃으며 다소 멋쩍은 얼굴을 했다.
“후후. 세상에 남자가 한둘인가. 쳇! 여기 나와 같은 멋진 사내도 있는데.”
내려가던 에르가니아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련하시겠어요.”
“생각해 보시오. 자고로 사람이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살아야 탈이 없는 법이오. 설령 짝사랑하던 대상과 결혼을 할지라도 그 후에도 항시 대접받기를 원할 테니 결코 바람직한 결합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짝사랑은 짝사랑에서 끝내고 그저 추억으로 남겨야지 바람직하다오. 내 말 명심해서 들으시오!”
“그래도 당신과는 사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과연 그럴까요. 하하하.”
벌써 저만치 내려간 에르가니아는 어느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으니 그의 얘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으리라.
***
왕궁으로 돌아온 지드는 무슨 이유인지 한동안 정원 뛰 뜰 은밀한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다.
그는 늘 곁에 따라다녔던 아라퀘스마저 물리고 벌써 며칠째 숲 속에서 지냈는데 그곳 주변에는 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었다.
휘잉―
초여름의 미풍이 간간히 지드의 머리카락을 일렁이며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마와 콧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굵직한 땀방울들을 식혀 줄 수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그대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지드.
뭐가 그리도 괴로운지 오만가지 인상을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애써 고통을 누르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것 같았다.
“아…….”
가끔 입가로부터 새어 나오는 신음, 현재 그가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는지 그냥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최근 들어서 가끔 뭔가의 거대한 힘이 몸 밖으로 분출되려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지금처럼 내공심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드는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주화입마
언젠가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인간이 너무 강한 내공을 얻어 속성의 과정으로 강력한 무공을 익힌다면 반드시 따라오는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고수 반열 중에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무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인데 현재 지드가 그와 같은 입장에 놓인 것 같았다.
화산파 내공과 여타 무공들을 익히고 우연찮게 얻은 공력검술을 신체에 도입했을 때 내공과 공력이 융합이 되면서 그의 신체는 엄청난 반응을 일으켜야만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자연의 포스가 흡수 단계에서 이미 내공과 상충되었던 탓에, 육체가 갈기갈기 찢어질 정도로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공심법으로 겨우 다스릴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포스의 공력은 내공과 서서히 융화 작용을 일으켰고 전대미문의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했다.
원래 잠재해 있던 내공이 이 세계에 만연하는 포스의 힘을 극대화시킨다고나 할까.
거짓말 같지만 무림에서 1할에 해당하는 힘을 이곳에서는 무려 10할의 힘으로 극대화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의미는 현재 지드의 내공이 무림에서 웬만한 고수 반열에 이르는 2갑자에 해당되지만 공력의 포스로 전화시킨다면 무려 10배에 이른다는 것이다.
만일 지드가 지금 당장 무림에서 활약한다면 그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경지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번 마교로부터 온 측유와의 결투에서 수백의 검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그의 능력 역시 우연찮게 얻은 기연의 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서도 주화입마는 결코 피해 갈 수 없었으니, 바로 속성 과정으로서 강대한 힘을 얻은 것에 대한 부작용이 표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어찌나 괴로웠으면 꽉 깨문 아랫입술로부터 피가 흘러내렸던가. 아니 지금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면 진짜 몸이 폭발해 버려 산산조각이 날 수 있었다.
모든 혈이 거꾸로 돌았고 단전의 기류 역시 제멋대로 들쑥날쑥하면서 뜨겁게 달구어진 공력의 포스가 지드의 몸을 불화산처럼 지져 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드는 모든 의지를 동원하여 어떡하든 이 난관을 극복하려고 했다.
터져 버리느냐 아니면 가라앉혀서 극복하느냐.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흘렀을까.
그는 여전히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감에 모처럼만에 눈빛을 반짝였다.
‘주화입마란 무림의 개념으로 내공이 뒤틀리고 혈이 역류하는 거라고 했는데 내 몸에는 내공뿐만 아니라 공력의 포스와 변화된 융합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세계의 순수한 포스만을 극대화시킨다면 주화입마의 현상이 사그라질지도 모르겠군.’
이론은 그럴 듯했다.
하지만 이미 융합해 버린 두 가지 힘을 어떻게 분리해서 한 가지만 극대화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아, 빌어먹을! 이대로 가다가 진짜 끝장나는 건지 모르겠군. 빌어먹을.’
정말이지 위기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아아!”
비명이 점점 커져 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고, 숲을 가로막고 있던 조그만 바위산 부근이 폭발을 하면서 사방으로 산산조각 잔해를 날리는 것이 아니던가.
콰쾅!
우르르.
숲 주변에 경비를 보던 병사들이 저마다 놀라서 허겁지겁했고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그 안쪽을 살펴보려고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세상에, 바위 전체가 날아간 것 같은데.”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
“폐, 폐하께서 숲 안에 계시는데. 서둘러!”
타다닥!
병사들은 아직도 풀풀 풍겨 나오는 구름먼지 속으로 향했는데 그때 맨 선두에 가던 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누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한 병사의 말에 다른 경비 병사들도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살펴보았다. 먼지구름이 수북한 머리와 얼굴 그리고 옷가지조차 만신창이로 찢어진 채 걸어 나오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지드였다.
병사들 역시 황금색 문양의 토가 차림의 옷자락만 보고도 그가 국왕이란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폐하시다!”
“폐하!”
경비 병사들은 저마다 놀란 듯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지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들어 외쳤다.
“괜찮으니 다들 걱정 마라.”
그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경비대장이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숲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지드가 씁쓸한 얼굴로 마지못해 답했다.
“얘기하자면 길다. 어쨌든 별일 아니니 다들 그만 하자.”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 병사들이 물러가자 그는 등을 돌려 초토화가 되어 버린 숲 지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길,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뭐라 중얼거리면서도 무심코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지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뭐…… 그래도 주화입마로부터 헤어 나오려다가 새로운 기술을 하나 얻다니.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야, 후후!”
그는 무슨 이유인지 손목을 까닥거리며 왕궁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혼자서 떠들었으니.
“뒤틀린 내공은 공력으로 전환시키고 역류하는 혈은 손가락 끝에 모아 포스로 다스려 결국 탄지신공으로 한꺼번에 내뿜는다. 이처럼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을 가지고 그동안 고생만 죽도록 했다니. 근데 그렇다고 바위벽 전체가 박살이 날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