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세크는 한창 운하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강과 주변 지역들을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서 있었다.
요즘 그의 즐거움이라면 전장과 제법 멀리 떨어진 이곳을 시찰하며 새로운 참모 아키아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제국의 병사들이 전투 대신에 은밀히 운하 공사 작업에 전격 투입되어 한창 열을 올린다는 것을 적국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모든 작전의 실질적인 지휘자는 아키아로서 공사 현장을 이리저리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가급적 일을 빨리 진척시키고자 노력 중이었다.
그가 각 공사 지휘관들을 불러 놓고 하나씩 세심한 명령을 내렸다.
“제삼 현장에 병사들이 필요 이상 몰려 있는데 인력 절반을 제칠 하구 공사로 투입하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이 대대장은 근력이 매우 강한 병사들 이백 여 명을 선별해 제오 지구 현장으로 가기 바랍니다. 그쪽 지반이 다른 곳에 비해 매우 단단하여 힘센 역사들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당장 그리로 가겠습니다.”
“경비대장은 공사 현장 근처를 직접 시찰하며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 주기 바랍니다.”
“예!”
“그럼 각자 해산하고 내일 이때 다시 보죠.”
***
그날 오후 해가 질 무렵에 카르세크가 아키아를 막사로 불러 현재 공사 진척에 대해서 보고받기를 원했다.
“앞으로 얼마쯤 걸릴 것 같은가.”
“현재 절반 정도 진척되었으니 대략 보름이면 물길이 트일 수 있습니다.”
카르세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거 생각보다 빠른데? 과연 자네답군. 허허!”
하지만 아키아의 얼굴을 그리 밝은 기색은 아니었다.
“될 수 있으면 병사들을 재촉해서 운하 공사를 더 앞당길 생각입니다. 아마 적들은 우리가 숙영지에서 몇날 며칠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 조금씩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길어지면 정찰대를 보내어 상황 파악에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흠. 만일 적의 정찰대가 여기 운하 작업 지대를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이거 큰일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큰일 정도가 아니라 이번 전쟁의 승산을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거참, 듣고 보니 심장이 떨리는군.”
“하지만 일단 마음을 놓으십시오. 저들은 우리가 이런 먼 지역에서 운하 공사를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테고 혹여 정찰대를 보낼지라도 이 일대 주변에 보병 장교들을 비롯하여 돌격 전사들 모두를 동원하여 이중 삼중 경계를 하게 하였으니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암, 그렇게 해야지. 정말 잘했네.”
“배편들은 무리 없이 진행을 하고 계시는지요.”
“걱정 말게나. 이미 제국에 통보해서 대략 백 척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선박들을 강어귀에 대기시켜 놓았으니 운하가 건설되는 대로 이리 몰려올 걸세. 그나저나 제국의 황제 폐하와 모든 대신이 내가 선박들을 원하자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더군. 어디에다 사용하느냔 투로 말일세. 하하, 그들 역시 우리가 설마 운하를 판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는 것 같네.”
“일단은 본국에서조차 모르게 일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적의 첩자들이 활동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이지. 그래서 선박들 역시 늦은 밤이나 새벽에 이동시켰고 그 주변에는 병사들로 하여금 철통같은 방비를 지시해 놓았네.”
“정말 잘하셨습니다.”
“자네 같은 뛰어난 참모가 있으니 나 역시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느낌이라네. 허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보름 후.
휘잉―
순풍 돛을 단 듯 소형 선박들이 운하를 통과해서 협곡 강줄기로 향해 갔다. 대략 수십여 척 정도 되었을까.
외부에서 배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각각 천막이 쳐져 있었고 노 젖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배들은 협곡을 지나 시야가 탁 트인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시각 강 둔덕 뒤편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지드와 참모 하키리우스 그리고 아라퀘스였다.
저마다 매우 놀란 표정들이었으니 설마하니 눈앞에 보이는 강 한복판으로 배들이 유유히 내려오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에 진을 친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전쟁은 첩보와 정보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가. 하키리우스는 여러 날이 지나감에도 적의 동태가 너무 조용하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이다.
마침 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보원들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어귀에 배들이 현저하게 줄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보고는 그냥 듣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이번 전쟁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탁자 앞에 손자병법을 뒤적거리다가 한 가지 부분에서 그의 눈빛이 번뜩였으니, 바로 운하를 이용한 전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옛날 중국이란 나라는 전쟁을 함에 있어서 모든 지형지물을 이용해야지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고 나왔는데 특히 강과 강을 연결시키는 운하 공사에 관한 전략은 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즉시 정찰대원들을 총동원해서 강 주변 지형을 철저히 살펴보라고 지시를 내렸고 얼마 후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제국군은 이쪽으로 흐르는 협곡의 강과 연결시키기 위해 운하를 파고 있던 게 아닌가. 참으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병사들을 동원해서 이곳 강 초입 구간에 매복시키고는 궁수들로 하여금 화공 전법을 준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저들의 작전을 몰랐다면 이번 전쟁은 초반부터 매우 힘겨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으리라.
지드는 아직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오. 어찌 강과 강을 연결해서 배로 병사들을 실어 나를 생각을 했단 말인지요.”
하키리우스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만일 폐하께서 제게 손자병법을 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린 꼼짝없이 저들의 계획에 말려들어 안방에서 적을 맞이하게 될 뻔했습니다. 우연찮게 그 책을 보고 나서 적들이 운하 공사를 시행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했으니까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 하키리우스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지더니만 가벼운 한숨을 지으며 뭐라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하아.”
지드가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시오?”
“아무래도…… 아키아를 불러들인 것 같습니다.”
“헤브론 제국의 그 천재 전략가 말이오?”
“맞습니다. 이런 기가 막힌 발상을 할 수 있는 존재는 그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그자가 참모가 되었다면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만큼은 그자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미리 막을 수 있을 테니 일단은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화공전법으로 적들의 배를 불태워 버려 통로를 차단한다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전략가라 할지라도 더 이상의 전술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지드.
“후, 그렇다면야…….”
잠시 후, 적들의 배가 사정권 안에 모두 들어오자 하키리우스는 가차 없이 화공 명령을 내렸다.
“발사!”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겨 불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스윽―
홱! 홱! 홱! 홱!
수많은 활들이 강 한복판으로 다가오는 배들에게 쏟아지듯 날아갔고 돛을 비롯해 위장으로 쳐 놓은 천막에 박히자마자 불길이 확 일어났다.
화르르.
불화살은 계속해서 발사되었으니 수십여 척의 선박들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홱! 홱!
화르르!
화공 작전은 예상외로 너무 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어떠한 저항의 움직임도 없었고, 그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여 모닥불을 피는 듯 강 한가운데 훈훈한 불의 축제가 벌어지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결국 하키리우스는 뭔가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째 배들이 불에 타고 있는데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거지.”
지드 역시 안력을 높여 살펴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던가.
“그러게 말이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저 배들에는 아예 사람들이 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배들 역시 그 숫자가 예상외로 적어 보입니다만.”
“이거 예감이 좋지 않소만.”
참모의 안색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뿔싸!”
“왜 그러시오!”
“저것들은 위장용 선박들이 분명합니다!”
“위장용이라니요!”
“빈 배들을 보내어 이곳을 살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눈치 챘단 말입니까?”
“그건 아닐지라도 일종의 선발 정찰대를 보내어 혹시라도 화공이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에 지금처럼 공격을 유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아키아는 자신의 계략이 제아무리 완벽하고 기상천외하다 여겨져도 결코 그냥 소홀히 넘어가는 법이 없이 철두철미한 존재가 틀림없습니다.”
지드는 무척 상기된 듯 혀까지 내둘렀다.
“후…… 대체 어떤 인물이지 보고 싶군.”
***
같은 시각.
협곡 정상 위에는 카르세크와 아키아가 저 아래 불타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세크는 매우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매복이 있을 줄이야! 이번 운하 공사는 쥐도 새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이 되었건만 대체 저들이 어떻게 눈치를 차렸던 말인가.”
아키아가 말했다.
“저 역시 놀랍군요. 혹시나 하고 빈 선박들을 위장해서 보냈는데 화공을 받다니.”
“그냥 밀고 들어갔었다가는 큰일 날 뻔했군.”
“선발진이나 정찰을 보내는 것은 병법에서 기본입니다. 다만 저들이 운하 공사를 알아내어 바로 저 지점에 매복을 한 것은 저로서도 매우 놀랍고 의외의 일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아키아는 설마하니 운하 공사를 알아차리고 화공으로 대응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예감했던 일이었지만 피체 왕국에는 상당히 뛰어난 전술가가 참모로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카르세크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래봐야 별 볼일 없는 왕국의 참모가 아닌가.”
아키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자고로 탁월한 참모는 열세의 형국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법입니다. 지금처럼 우리 아군이 허를 찔러 운하를 통해 진입했는데 저들 역시 역으로 허를 찌른 화공 공격을 감행했으니 이후로 보다 철저한 전략을 세워 대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주력 선단과 함께 적진 안으로 들어가야겠죠.”
카르세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들어가다니. 저렇듯 적들의 매복해서 불화살들을 마구 퍼부을 텐데…….”
아키아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필시 자신감에서 오는 표정이랄까.
“얼마든지 그러라고 하지요. 후후.”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인가.”
“네, 있습니다.”
“뭔가?”
“저들이 화공으로 대처한다면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선박들에 조치를 취해 놓을 것입니다. 물에 푹 젖은 짚으로 배를 덮고 전진해 나간다면 불화살들은 두툼한 방어막에 박히는 동시에 불이 꺼질 테니까 병사들은 안전하게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배들만 수백 척이 넘고 병사들 숫자에 이만 명에 육박하니 강기슭에 닿자마자 곧바로 보병대형을 이루어 빠른 시간 내에 거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다 말고 가슴 안쪽으로부터 지도를 꺼내 들어 집정관에게 보여 주며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이 전초 기지로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주변이 완만한 구릉지로서 적들의 매복이나 기습에 대처할 수 있을 뿐더러 곧바로 산악 지형으로 통하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랄까요? 후방으로부터의 지원물자 역시 운하를 통해서 손쉽게 수송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카르세크가 다소 감탄스러운 듯 흡족한 미소마저 흘렸다.
“허허. 과연 자네답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사실 전략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앞으로 산악 지형에서의 치열한 국지전부터 본격적인 전술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까요?”
“어쨌든 자네가 옆에 있으니 정말 든든하군그래.”
“그리 생각해 주시니 그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허허,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군!”
“음. 이제 슬슬 배들을 출격시킬까 하는데요.”
“당연히 그래야지. 감히 제국에 대항하고 황제 폐하를 능멸한 저 오만불손한 피체 왕국을 초토화시키기 위해서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전진해야겠지.”
그때 아키아는 무슨 이유인지 잠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골몰을 하는 듯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카르세크가 이상한 듯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때, 아키아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더니만 카르세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특수부 검사들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특수부 검사들이라니.”
“그들에게 하달할 임무가 생각이 나서요.”
“흠. 뭐 그들은 이번 내 호위검사 겸 여타 임무를 위해서 이번 전쟁에 대거 투입되었으니 얼마든지 자네 앞에 데려올 수는 있지. 그나저나 몇 명이 필요한가?”
“30명 정도면 충분합니다.”
“30명? 적은 수는 아니로구먼. 그래,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들을 피체 왕궁에 투입하기 위해서입니다.”
카르세크의 눈빛이 번뜩였다.
“오호라. 그들에게 암살 명령을 내리려고?”
“어차피 이곳에 숙영지와 요새를 세우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테고 저들 역시 본국에서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입니다. 저는 그 어수선한 틈을 노려 왕궁에 자객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피체 왕국 국왕 지드라는 인물이 예사롭지 않은 존재로 생각되는데, 이 기회에 그를 살펴보려 합니다.”
카르세크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그자는 황제 폐하를 개망신을 준 아주 천하의 못된 놈이니 전쟁에 앞서 미리 목이라도 따 온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
이번만큼 아키아는 묘한 반응을 보였다.
“과연 특수부 검사들이 임무를 수행할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그건 무슨 말인가.”
“국왕 지드란 자 말입니다. 제국의 황실을 제집 드나들듯이 황제를 제압하고 인질들을 구출해 간 인물이라면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런 정보를 알고서도 특수부 검사들을 보낸다는 것인가?”
“그자의 능력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봅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기를…….”
“뭐, 나야 자네 뜻이라면 무조건 동의하네만.”
***
뿌우우― 뿌우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어마어마한 숫자의 배들이 일제히 돛을 펴고는 운하 입구 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젖은 짚으로 덮여 있었고 병사들은 그 안에 탄 채 상륙하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배들이 협곡의 하류 지역으로 유유히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강기슭 위쪽 둔 덕에는 지드와 하키리우스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배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다.
지드가 말했다.
“활이라도 발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씁쓸한 표정으로 답하는 하키리우스.
“두툼하고 젖은 짚으로 덮였는지라 소용없습니다.”
“엄청나게 몰려오는군.”
“어림잡아 수백 척에 병사들 또한 수만 명은 되어 보이는데 아무래도 주력 군단 전체가 이곳으로 이동해 오는 것 같습니다.”
“저들은 하류 지역 넓은 구릉지를 전초 기지로 삼을 것이 확실합니다.”
지드가 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결국 저 많은 대군을 안으로 끌어들인 셈이라…… 이제 어쩌지?”
그의 절망 섞인 반응에 비해 하키리우스는 대체로 침착함을 유지했고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전쟁의 승세를 누가 점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산악 지형에서의 전투는 제국 군단이나 우리나 소규모전이 대부분일 테니까 단번에 승부를 내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저들에게 뛰어난 참모 아키아가 어떤 전술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지드가 반문했다.
“우리에게는 손자병법이 있으니까 그리 걱정할 건 없잖소. 지형지물을 이용한 모든 전술이 담겨 있으니까 그대로 따르면 되지 않을까요.”
“사실 지형지물을 먼저 이용한 쪽은 저들입니다. 아키아는 스스로의 발상만으로 운하 공사 계획을 했고 이곳에 매복이 있을 줄 예상하고 위장 선발 배들을 보낸 아주 무섭도록 치밀한 자입니다.”
“하필 그자가 팔라카스 제국으로 망명할 게 뭔지…….”
하키리우스는 눈앞에 보이는 엄청난 배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어차피 이곳은 저들의 기지가 될 테니 당장 철수를 서두르고 다음 전초 기지에서 대비책을 마련해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제국 군단이 숙영지를 세우고 기지를 세우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저희 역시 새로운 시점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드.
“그렇다면 당장 그렇게 합시다.”
잠시 후 매복해 있는 병사들은 저마다 열을 이루어 뒤쪽 산악 지형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