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초여름을 맞는 왕궁의 정원이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변해 있었다.
특히 뒤쪽 뜰에는 어쩌다가 국왕 지드만이 산책로로 이용할 뿐이기에 거의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하였다. 다소 은밀하다고나 할까.
오늘은 지드가 아주 특별한 사람을 이곳에 데려와 함께 오솔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긴 금발을 붉은색 머리 끈으로 묶은 제3군단장 에르가니아였다.
그녀는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시점에 전선으로 출정할 예정이었는데 지드의 부름을 받고 왕궁 뒷문으로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에르가니아는 다소 풀숲과 나무에 가려진 정원을 모습을 보고는 지드가 자신을 은밀하게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 챌 수가 있었다.
짹짹― 찌르르.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새들과 곤충들이 시끄럽게 굴고 있었다. 지드는 제법 긴 산책로를 따라가면서도 한동안 침묵을 지킬 뿐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
에르가니아 역시 입을 꼭 다물고는 가끔 주변 나무들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지드가 문뜩 말문을 열었다.
“그저 얼굴 한번 보려고 그대를 불렀소.”
에르가니아 역시 그제야 지드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
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들려오는 지드의 음성.
“제발 몸조심하시오. 내 말 알겠소.”
“…….”
이번에도 대답이 없자 지드가 조금은 답답한 반응을 보였다.
“뭐라 말 좀 해 보시오.”
그제야 겨우 말하는 그녀.
“예, 알겠습니다.”
“겨우 그 말뿐이오?”
“그게, 뭐라 드릴 말씀이…….”
참으로 서먹한 분위기라 할까. 정녕 에르가니아는 무언의 항변을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최근에 터져 나온 지드와 아카시안 간에 결혼설이 그녀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지드 역시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저 소문일 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그 말에 에르가니아의 반응이 다소 당황스러웠던가.
“신경 쓰지 말라니요. 무슨 말씀인지…….”
그러자 지드가 갑자기 허공에 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어디 편찮으신지요.”
“그냥 이것저것 복잡해서 그러오. 국왕이란 신분이 때로는 원치 않는 일에조차 이토록 신경이 쓰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소.”
에르가니아는 지드가 왜 이러는지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 결국 그녀는 잠시 주저거리다가 속내를 말하기로 결심했다.
“혹시 결혼 때문이라면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괜찮으니까요.”
그러자 지드가 다소 언성을 높였다.
“정말이지, 나는 아직 원치 않는 일이란 말이오!”
“그 문제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상관이 없다니요.”
“그분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 같은데 왜 굳이 부인하시는 거죠?”
다소 난색한 반응을 보이는 지드.
“후우, 모르겠소…… 정말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에르가니아 역시 답답한 한 듯 결국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카시안 님이 지금 옆에 계셔도 그렇게 얼버무리는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신지요.”
“…….”
말문이 막히고 마는 지드.
계속 들려오는 에르가니아의 음성.
“지난번 보고를 드리러 왕궁에 갔다가 정원에서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먼발치였지만 한눈에도 두 분께서 아주 다정한 연인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그건 그저 얘기를 나눈 것인데.”
“변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정말 괜찮으니까요.”
지드는 갑갑한 듯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만 결국 조심스런 눈빛으로 말문을 열었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 맞소?”
순간 에르가니아가 당혹스런 반응을 보였다.
“질투라니요. 저는 그저.”
“아무튼 미안하오.”
“출정식 준비 때문에 이만 물러가도 될는지요.”
그녀가 등을 돌아가려 하자 지드가 외쳤다.
“에르가니아! 잠깐만.”
“말씀 다 끝나시지 않았나요.”
“그대로 간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소.”
“저 역시 폐하와 이대로 같이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맺히려고까지 했지만 결코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지드가 그녀에게 다가와서 손을 살며시 잡아 주며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무슨 말씀인지요.”
“아까도 말했듯이 내 심경이 무척 복잡하단 말이오.”
에르가니아는 그이 손으로부터 자신의 손을 살며시 빼며 다시 등을 돌렸다.
“그럼…… 이만.”
바로 그때였다.
“아아악!”
“살려 줘요!”
풀 숲 넘어 앞 정원으로부터 들려오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에 지드와 에르가니아가 그곳을 바라보았다.
“뭐지!”
에르가니아가 소리쳤다.
“당장 그리로 가 보죠.”
“알았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에 그 둘은 방금 전까지의 우울한 분위기는 접어 두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냅다 달려갔다.
물론 경공술의 달인인 지드가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 있었다.
훌쩍!
타다닥.
순식간에 숲을 지나 왕궁 정원에 도착한 지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경비병들과 시녀들의 시체들이었다. 그리고 검은 군장 차림의 청체 불명 사내들이 서슬이 시퍼런 검을 들고 분수대를 지나서 대리석 조각상 뒤에 숨은 한 여인에 다가갔다.
그녀는 다름 아닌 아카시안이 아니던가. 지드가 공력을 실어 사자후를 외쳤다.
“네 이놈들, 당장 멈추지 않겠느냐!”
어찌나 쩌렁쩌렁했는지 난간에 놓인 꽃병들이 요동을 쳤고 그처럼 살벌한 기세를 풀풀 뿜어 냈던 사내들이 멈칫 거렸고 음성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드는 누가 감히 왕궁을 침입해서 경비병들과 시녀들을 죽이고 아카시안마저 시해하려는지 일단 분노부터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뒷짐을 지고는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섰다.
“뭐 하는 놈들이기에 대낮부터 남의 왕궁에 들어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가.”
그때 사내들 중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대뜸 물었다.
“그대가 국왕인가.”
“내가 먼저 물었거늘 네놈들의 정체를 냉큼 밝혀라.”
그러자 사내가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죽을 텐데 알아서 뭐 하려고. 그나저나 제대로 찾아오긴 한 모양이군. 옷차림을 보아하니 국왕 같은데…… 후후, 명색이 한 나라의 왕이란 자가 이렇게 경비를 허술하게 세워 놓을 줄은 몰랐네.”
지드는 그제야 짐작이 갔는지 눈을 휘 번득 거렸다.
“그러고 보니 카르세크의 개들이었군.”
저들은 팔라카스 제국의 특수부 검사들이 분명해 보였다.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카르세크가 암살단을 보내어 자신의 목숨을 노린 수를 썼다고나 할까.
“우리 정체를 알았으면 이만 목숨을 내놓으시지?”
“누구 맘대로!”
마침 이때 도착한 에르가니아, 그녀 역시 저들의 알았는지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
“저들이 사람들을 많이 해친 것 같아요.”
지드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저들은 내가 맡을 테니까 그대는 계단 쪽에 있는 아카시안을 보호해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당장 서두르시오.”
에르가니아가 그쪽으로 가자 지드는 그제야 안심을 한 듯 침입자들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오히려 이쪽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으니.
“명색이 제국을 대표하는 고수란 자들이 죄 없는 시녀들을 마구 죽이다니…… 내가 웬만해서는 적당히 하려 했지만 그 죄질이 악하여 아주 무섭고 고통스런 형벌을 내리겠다.”
순간 키득키득 웃고 마는 검사들.
“크크. 지랄하고 자빠지네. 왕궁을 지키고 있던 사방팔방의 경비병들을 다 없애 버렸는데 무슨 수로 우리에게 형벌을 내린다고 그러시나?”
다른 동료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국왕치고는 좀 모자라 보이는데.”
“어쨌든 빨리 일을 끝내도록 하지. 저자 목만 가져가면 이번 전쟁은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거든. 우린 영웅 대접을 받을 거라고.”
“자! 그럼 시작하지.”
스윽.
무려 20여 명이 꽉 쥔 칼날들이 지드에게 향했고 서서히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애석한 일이지만 그들은 지드를 그저 일개 왕국의 평범한 국왕으로 본 것이 틀림없었다.
지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네놈들은 특수부 검사들이라서 적어도 사전 정보에 밝을 줄 알았건만 그렇지 못한 모양이군. 후후!”
“그건 뭔 소리여!”
“피체 왕국의 국왕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최근에 들어 본 적이 없더냐!”
한 사내가 답했다.
“물론 들어 본 적 있지. 아마도 하류 구역의 비렁뱅이 출신이라지? 이름은 지드라고, 수년 전 우리 수장 레온 님에게 부하를 잃은 것도 모자라 대항 한번 못하고 개망신을 당했던 일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
다른 사내가 덧붙여 말했다.
“현재 지원 군단장 테세우스에게도 겨우 목숨을 빌어 살았단 얘기가 있던데?”
“그러니까 그런 자가 오늘날 국왕이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우리들에게 큰소리치며 대항 하는 꼴을 좀 보게나. 오늘도 무슨 치욕을 당하려고 저러시나?”
“하하하!”
지드의 표정이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
“정말 말 많은 놈들이군. 계집애들도 아니고. 나 참. 어쨌거나 그 입들 가지고 함부로 나불거린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뭐라!”
대장으로 보이는 검사가 먼저 공격해 들어왔다.
“이얏!”
삭! 파팟!
꽝!
“악!”
난데없이 꽃병 하나가 날아오더니만 대장의 면상과 부딪쳐 허공에서 박살이 나 버렸다. 하필 그 부분이 입이던가.
짓뭉개진 입술을 손으로 가리고 피를 흘리며 바닥을 뒹구는 사내.
“아이고!”
피가 대리석 바닥으로 주르륵 흘렀다.
“주둥아리 잘못 놀린 대가다. 후후.”
지드의 다소 사악한 미소에 특수부 검사들은 그제야 긴장하는 눈치였다.
난데없이 꽃병이 날아 왔다는 증거는 상대가 공력검술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 기술은 자신들이 우상처럼 모셨던 레온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던 고도의 기술인 동시에, 직속 수하인 그 자신들도 전수를 받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는 건데 어떻게 저자가 그걸 했는지.
모두가 저마다 아리송한 표정들이었다.
그제야 누군가 외쳤다.
“다들 조심해!”
“빌어먹을! 대장이 당하다니.”
아직도 피를 줄줄 흘리는 대장, 비록 싸울 전의를 잃어버렸다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한꺼번에 공격해라. 보통 강한 놈이 아니다.”
그 소리에 지드가 냉소를 흘렸다.
“자, 오너라.”
이윽고 자객들은 저마다 긴장 어린 얼굴로 합공 대형으로 강력한 살기를 품으며 다가왔다.
스윽.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이었다. 과연 제국의 최강 검사들답게 수십여 명이 하나가 된 것처럼 한 동작이 되었고 눈빛마저 불태우니 이번에는 강력한 살수를 펼쳐 승부를 보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먹잇감의 위치에 있는 지드의 표정은 무척이나 태연스러웠다. 늘 그렇듯 그의 양손에는 그 어떤 무기하나 쥐어지지 않았고 그저 맨손으로 뒷짐을 쥔 상태였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토가 자락 안에는 태산처럼 버티고 있는 그의 두 다리가 이미 대리석 바닥을 천금같이 디디고 있었으니 그의 주변 반경 수 미터가 금이 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 역시 공력을 모은 상태에서 단 한 번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애석한 일이라면 자객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 명의 자객이 공격 신호를 알렸다.
“지금이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자객들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지드를 한 점으로 하여 수직 하강의 엄청난 검 공격을 시작했다.
타다닥!
홱! 홱! 홱! 홱!
놀랍게도 수십여 명이 동시에 몸통 회전을 하였으니 일명 회오리 검술로 동시에 회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회오리 검술은 난이도가 매우 높은 최상급의 기술로서 한 사람이 사용할지라도 그 위력이 상당하여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일진대 지드는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리는 듯했다.
파파파팟!
회오리 기둥이 수십 개가 각자 칼날을 숨기고 지드를 목표로 하강할 때였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으니.
우두둑. 우지직―
홱! 홱! 홱! 홱!
그가 딛고 있던 주변 대리석 바닥이 갑자기 굉음을 내며 갈라졌고 순식간에 여러 조각이 되어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물론 수백 개의 파편들은 저마다 목표물을 찾아서 강력한 충돌을 만들어 냈다.
파파팟!
퍽!
“억!”
팍!
“악!”
그처럼 살벌하게 다가왔던 회오리들이 무수한 대리석 조각들을 맞고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속수무책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쿵!
“아아아아…….”
쿵!
“아악!”
여기저기 신음이 들려왔고 각자 선혈을 쏟기 시작했다. 내상을 입었음은 물론 군장을 뚫고 신체 여러 부위에 박힌 파편 조각들 때문인지 하얀 바닥 위에는 자객들의 빨간 핏물이 빠르게 고이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더 이상 항거할 능력이 없었으니 승부는 난 것으로 봐야만 했다. 마침 왕궁 입구로부터 경비 지휘관들과 몰려드는 병사들이 보였다.
지드는 그들을 보자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빨리도 나타나는군.”
사실 지드가 승부를 너무 일찍 냈던 것이다. 곧이어 그가 부상당한 대장에게 다가갔다.
질퍽질퍽.
흥건히 고인 핏물 위로 지나가자니 끈적끈적함이 전해져 왔다.
“기분 더럽군.”
국왕을 암살하기 위해 온 자객들이 죄 없는 시녀들과 시종들을 죽이고 이제는 오히려 자신들의 피를 뿌려 놓았으니 그다지 동정이 갈 일은 없었다.
지드가 아직도 고통의 신음을 흘리고 있는 자객 대장에 말문을 열었다.
“누가 보냈지?”
“…….”
대답이 없자 지드의 눈빛은 살기를 더해 갔다.
“고통스럽게 죽기 싫으면 묻는 말에 대답하라.”
그제야 말문을 여는 사내.
“명색이 특수부 검사 소속인 내가 그따위 어설픈 심문 따위에 입을 열 것이라 보는가. 아무리 고문을 해도 나는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을 것이다. 컥! 컥!”
지드가 피식 웃었다.
“후후. 물론 그렇겠지. 자네 위치 정도면 목숨 정도는 쉽게 버릴 수 있어야 함은 나도 동의를 하네. 사실 나도 그다지 심문할 생각은 별로 없다. 집정관 카르세크가 암살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할진대 뭐 하러 귀찮게 그 따위 짓을 하겠는가?”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어서 죽여라!”
지드는 그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와 부하들은 내 병사들이 감옥으로 끌고 가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물론 형식적이나마 심문을 시도하겠지. 하지만 그들의 임무가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다소 과격한 고문을 시행할 테니 알아서 해라. 자결을 하든지 아니면 입을 열든지 말이다.”
그 말에 사내가 울상을 지어 보였다.
“빌어먹을,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라!”
“싫다니까.”
“감옥까진 가고 싶지 않다.”
“어디 세상이 네놈 마음대로 된다더냐!”
지드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들 데려가라.”
“예! 알겠습니다.”
사내는 체념을 한 듯했지만 그 와중에도 갑자기 눈빛이 반짝였다. 정면 계단 쪽에 여인 둘이 보였고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몰래 숨겨 둔 단도로 손이 갔다.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군장 차림의 여인이 보호하는 뒤에 보이는 여인의 신분은 필시 높은 신분이 분명해 보였다.
‘이대로 고문실에 끌려가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과연 제국의 특수부 검사 대장답게 자신의 목숨보다는 끝까지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그 책임감이 앞선 자였다. 그는 이미 선혈을 많이 토해 내어 탈진한 상태였지만 마지막 한 번의 시도를 위해 전력을 다해 동작을 취했다.
“에잇!”
홱! 파팟!
“악!”
풀썩.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 죽어 갈 것처럼 보였던 사내가 허리춤으로부터 단도를 꺼내 들어 계단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단도는 매우 가늘고 뾰족한 생김새로서 특수부 검사의 공력이 실린 상태였기에, 에르가니아의 어깨 죽지의 보호대를 뚫고 뒤쪽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아카시안의 오른쪽 가슴에 박히고 말았다.
그 둘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함께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에르가니아는 본능적으로 아카시안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덮쳤다.
홱!
“괜찮아요!”
“아아…….”
신음을 흘리는 아카시안, 그녀들 주변 바닥에는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한편 지드는 너무도 갑작스런 일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손을 들어 기습 공격을 감행했던 사내의 머리통에 탄지신공을 날려 버렸다.
“이런, 개새끼가!”
탁!
“악!”
그가 즉사하자 지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 쪽으로 냅다 뛰어갔다.
“아뿔싸!” 때늦은 방심이 이런 일을 만들어 냈던가, 금방 후회가 막심했다.
곧이어 그는 피로 뒤범벅이 된 채 함께 엎어져 있는 두 여인들을 발아래 두고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시선은 단도가 왼쪽 가슴 부위에 꽂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아카시안에게 집중되었고 냅다 그녀를 부축했다.
“아카시안! 정신 차려, 눈 좀 떠 봐!”
신음을 흘리는 그녀.
“아아.”
“아카시안!”
“저 괜찮아요.”
지드가 부상 부위를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이던가. 단검의 끝이 손마디 한 뼘 길이 정도만 박혀 있기에 깊은 상처는 아닌 듯 보였다.
이유인즉 에르가니아의 어깨 죽지를 관통하면서 그 속도가 줄었기에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 지드는 그 사실을 몰랐으니 그의 원망은 오히려 에르가니아에게 갔다.
“내가 분명 아카시안을 보호하라고 당부했건만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녀가 당황했다.
“저, 저는…….”
“그대는 무인이면서도 경호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요!”
“죄송해요.”
지드는 아직도 그녀의 심각한 부상을 몰랐던가.
아카시안의 피가 군장에 묻은 것으로 생각했고 퉁명한 음성으로 다시 뭐라 외쳤다.
“잠깐 비켜서시오!”
“…….”
에르가니아는 고통을 참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지드가 아카시안을 안고 냅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타다닥―
“당장 궁중 의사를 부르고 치료 준비를 갖추라 하라!”
잠시 후 홀로 남겨진 에르가니아는 고통에 찬 기침을 하면서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컥! 컥!”
단도가 급소와는 상관없는 곳을 관통했다고 하지만 이는 엄연한 심각한 부상이었다.
그녀 역시 당장 치료하지 않는다면 큰일 날 것이다. 더군다나 피를 많이 흘렸으니 벌써부터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억장을 무너지게 만든 것은 지드의 행동이었다. 그저 따뜻한 한마디라도 해 주었다면 이리도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을 것을.
“아아!”
풀썩!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고 마는 그녀, 그제야 남아 있던 병사들과 시종들이 그녀 주변에 모여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외쳤다.
“세상에! 상처가 심하잖아.”
“어깨가 완전히 관통 당했어.”
“그렇다면 당장 옮겨야지! 자! 내 등에 업히라고!”
그로부터 이틀 후.
왕궁의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오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국왕 지드였다.
그는 정원을 가로질러 장교 관사가 있는 구역으로 냅다 뛰어갔다. 하필 오늘 아침에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다니.
정말이지 하늘도 무심하지, 정작 심각한 부상자는 아카시안이 아니고 에르가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이틀 동안 지드는 아카시안 옆에서 그녀의 부상에만 온 집중을 다하고 자리를 뜬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 불현듯 에르가니아가 생각이 나서 대신에게 물어보자 그제야 모든 상황 설명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설마 에르가니아의 어깨가 관통이 당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 덕분에 아카시안이 목숨을 구했지만 지드는 오히려 부상 안위를 묻기는커녕 퉁명스럽게 대했으니 당장 이를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이런 난감할 때가 있나. 아아, 에르가니아! 내가 정말 무심했소!’
타다닥.
에르가니아가 묵고 있는 관사 입구에 다다르자 경비병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국왕의 모습에 저마 당황한 얼굴들이었다.
지드는 계단을 통해 입구로 뛰어 들어가서 어느새 그녀의 숙소 문 앞까지 다다랐다.
“에르가니아! 안에 있소?”
“…….”
“있으면 대답 좀 해 보오!”
“…….”
반응이 없었다. 결국 문을 열고 마는 지드.
덜컹!
“에르가니아!”
그가 다급하게 외치며 안으로 들어갔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헌데 빈 침대만 있을 뿐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에르가니아…….”
그때 문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
“폐하께서 어인 일로…….”
지드가 돌아보니 중연 여성이 머리를 숙인 채 문 앞에 있었다. 그녀는 시종장으로 지드도 잘 아는 여인이었다. 그가 다짜고짜 물었다.
“에르가니아는 어디 있소?”
시종 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늘 새벽에 전방 요새로 떠나셨습니다.”
“떠나다니!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말인가?”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 아침에 와 보니 안 계시기에 관사 경비병들에게 물어 보니 이른 새벽에 입구를 통해 나가셨답니다.”
“아!”
그 말에 지드는 다리에 힘이 풀려고 침대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풀썩!
다시 들려오는 시종장의 음성.
“정말 걱정입니다.”
지드가 비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가 간호를 했소?”
“부상을 당해 이리로 옮겨 오신 날부터 저와 시녀들이 최선을 다해서 부상을 돌보았습니다.”
“괜찮은 것 같았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의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시종장이 끝말을 하지 못하자 지드가 물었다.
“하지만 뭐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하루 종일 울고 계셨습니다.”
“울다니?”
“처음에는 고통이 심해서 그런 줄 알고 진통제를 다량 사용했지만 그래도 눈물이 마르지를 않았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뭔가에 충격을 심하게 받으신 듯 보였습니다만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정말 답답했습니다.”
“…….”
그 말에 지드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아, 내가 정녕 무슨 한심한 짓을 한 건지!’
잠시 후 지드는 테라스 바깥으로 나가 두 손으로 난간을 꾹 움켜쥐었다.
하늘도 그의 우매함에 화가 났던가.
금세 먹구름이 몰려오더니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번쩍. 우르릉 쾅!
우두둑― 쏴―
장대 같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니 초여름의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았다. 지드는 빗물이 쏟아짐에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덧 옷이 흠뻑 젖은 지드는 아까보다 인상이 더욱 찌그러져 있었으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하필 이때 폭우가 쏟아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