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우르릉 쾅!
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던가. 이곳 산 속에도 엄청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법 고지대에 위치한 어느 능선 부근에 겨우 도착한 에르가니아는 아직 아물지 않은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저 아래 무섭게 몰아쳐 내려가는 급류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폭우로 자칫 길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지름길을 겨우 통과해 이젠 안전 지대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진영으로 귀환해야만 하는 이유는, 제3군단 군단장이란 직분과 책임감에 의한 것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한시라도 빨리 아픈 기억을 경험한 왕궁을 벗어나기 위함이 분명했다.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지드의 퉁명스런 음성, 설마하니 그로부터 화를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
다시금 눈물이 나려 했다. 애써 입을 다물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결국 발길을 돌려 산 위 정상으로 향하려는 그녀, 빨리 진영으로 돌아가서 지난 악몽을 모두 잊고 오로지 전쟁 준비에만 몰두하려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일지도 몰랐다.
타다닥!
경쾌한 몸놀림으로 절벽을 튀어 올랐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거대한 바위 벽 중간 지점에 동굴 하나가 있었는데 어둑어둑한 날씨 속에 그 안으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순간 에르가니아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자신의 군단 관할 요새 지역이건만.
대체 누가 허락도 없이 저곳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내 긴장감을 느꼈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혹시, 적의 첩자가……?’
스윽.
그녀는 검을 뽑아 동굴 입구를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전투력이라면 웬만한 검사들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었으니 그다지 두려운 느낌은 없었다.
다만 숫자가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법 넓어 보이는 입구 옆 벽을 타고 몸을 바짝 기대어 한 발자국씩 옮겨 가기 시작했다.
동굴의 길이는 생각보다 짧았고 어느새 모퉁이 벽에 도착해서 제법 넓은 공간에서 모닥불과 그 너머 한 존재를 볼 수가 있었다.
에르가니아의 눈길이 그에게 향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연기에 가려 반쯤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카르발디…….’
도대체 그는 이 밤중에 군영과 다소 떨어진 이런 한적한 동굴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그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그러자 들려오는 사내의 음성.
“이제야 나타나셨군.”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죠?”
카르발디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불 쬐고 있잖소.”
“내 말은 왜 군영과 떨어진 이런 동굴에 혼자 있느냔 말이에요.”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저를요!”
“여기가 군단 진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이니까요. 아마 이곳을 통과하리라 예상했는데 다행히 그대가 이렇게 와 주었구려.”
에르가니아는 다소 의아한 눈길로 말했다.
“굳이 진영에서 기다려도 될 텐데, 여기까지 나와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거야 그대의 얼굴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겠소.”
에르가니아는 다소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뭐라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요.”
“이거, 오랜만에 보는 사이인데 너무 냉랭하게 나오는군.”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직책이 부군단장으로서 내가 없는 동안 지휘관 역할을 대신 수행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뭐, 아직 전쟁도 나지 않았는데 굳이 내가 있을 필요는 없어 보이더군요. 각 대대장들이 워낙 유능하니 다들 알아서 자기 임무에 하더군요. 후후!”
“정말 기가 막혀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무튼 잘 돌아왔소. 그나저나 매우 수척해 보이는 데…….”
카르발디는 그제야 그녀의 왼쪽 어깨가 피로 흥건히 적셔진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에르가니아는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다리도 휘청거렸고 힘없이 주저앉으려 했지만 카르발디가 다가오자 애써 그를 물리치려 했다.
“난 괜찮으니까 다가오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생각만큼 버티어 주지를 못했으니.
“아아.”
털썩
“에, 에르가니아! 에르가니아, 정신 차려요!”
심각한 부상 상태에서 며칠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모든 체력이 고갈되었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카르발디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여 모닥불 근처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상처를 바라보며 왠지 모를 분노의 눈빛을 드리웠다.
“하여간 국왕만 만났다 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 이번엔 그 빌어먹을 놈의 작자가 또 뭔 짓을 한 거지.”
다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뭐라 투덜거리는 카르발디,
사실 그는 처음 에르가니아가 군영을 떠나서 왕궁으로 향했을 때부터 안절부절못했고 지난 열흘 동안 바로 이 동굴에서 그녀의 귀환을 하루하루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있었다. 헌데 그녀가 수척한 몰골에 부상까지 입은 채 나타났으니 괜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 가여운 여인이 이 꼴로 나타났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그 재수 없는 하류 잡배 자식 때문이었으리라.
“만에 하나 에르가니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
화르르.
탁탁!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카르발디는 잠이 든 에르가니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심 한숨을 계속해서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용병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6년에 걸친 자신의 애정공세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지금도 그 차가운 마음에는 요지부동이었으니, 그의 마음은 이젠 점점 타 들어가다 못해 속이 새까맣게 변해 버린 심정이었다.
그녀가 쉽게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한 작자 때문이라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더욱 세게 쥐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뭔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했는지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뭔가 특단의 방법을 내려야 하겠어. 이대로 가다가는 제 명에 못 죽겠군.”
아른거리는 불빛에 그의 얼굴은 서서히 사악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빛을 번뜩였으니 아무래도 속으로 생각했던 바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잠시 후, 에르가니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아른거리는 불빛 너머에는 카르발디가 자신을 동정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킴과 동시에 다짜고짜 물었다.
“내가 잠든 지 얼마나 되었죠?”
“대략 하루 정도.”
놀라고 마는 그녀.
“여기 동굴에서요.”
“그렇소.”
“당장 진영으로 가야 해요!”
그녀가 일어나려 하자 카르발디가 만류했다.
“아직 그 몸으로는 가파른 능선을 올라갈 수 없소.”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시나 현기증부터 밀려오고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우욱!”
“내가 뭐랬소.”
“지휘관들인 당신과 내가 자리를 비워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당신이라도 당장 귀환해서 병영을 살펴봐야죠.”
그러자 카르발디가 단호하게 말했다.
“싫소.”
“싫다니요!”
“사람 목숨이 우선이 아니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사실 난 애초부터 이따위 피체 왕국이나 제국과의 전쟁 따위에는 관심 없었소. 그대가 이곳에 머물려고 하니까 나 역시 발을 들여 놓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부군단장이니 하는 애들 병정놀이 같은 것도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요. 내 명색이 중부 대륙 아르카도 제국의 흑검사요. 언제고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려 왔지요.”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죠?”
“갑자기가 아니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결정을 했던 일이었소.”
“결정이라니요!”
“그대와 함께 중부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 말이오.”
에르가니아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누구 마음대로요!”
다소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카르발디.
“그야 내 마음대로지.”
“뭐라고요!”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짓에 대해 겁내지 마시오.”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놓은 끈으로 재빨리 그녀를 제압해 손을 묶기 시작했다.
홱!
“뭐, 뭐 하는 짓이에요!”
“미안하오!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이해해 주기 바라오.”
“욱! 당장 풀어 주세요.”
“그렇게는 못하겠소.”
“정신 나갔어요?”
“이 지긋지긋한 곳으로부터 그대를 해방시켜 줄 테니 그냥 내 행동을 받아들이란 말이오! 그 지드란 작자가 조만간 결혼한다는 얘기도 들었소. 그리고 그대가 속을 태우며 계속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도 말이오. 더군다나 그처럼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왕궁을 떠나 이곳으로 달려온 까닭은 아마도 국왕이 또 그대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단번에 추측할 수가 있지요. 빌어먹을! 그대처럼 아름답고 착한 여인이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나는 도무지 용납도 되지 않을 뿐더러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란 말이오. 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당장 국왕과 결투를 벌여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란 말이오.”
이미 손을 묶인 그녀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당신, 확실히 미쳤군요!”
그는 진짜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웃었다.
“하하하! 그렇소, 난 미쳤소. 당신에게 단단히 미쳤단 말이오.”
“당장 정신 차리고 이것 풀어요! ……욱!”
“움직이지 마시오. 그대만 더욱 괴로울 뿐. 그대가 몸부림칠수록 내 마음은 더욱 아프오.”
“…….”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카르발디는 진심으로 자신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날 생각이 분명해 보였다.
너무도 차분하다 못해 무표정한 얼굴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에르가니아 역시 이제는 체념한 듯 더 이상의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정말이지 황당하고 당혹한 일이었다. 제3군단장의 직분으로 당장 닥쳐 올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지. 그저 무겁고 침울한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설마하니 카르발디가 이렇게까지 극단의 방법으로 무방비였던 자신을 제압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정말이지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아! 이젠 어떡하지.’
그때 벽에 기댄 채 잠이 든 줄로만 알았던 카르발디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푹 자두시오. 내일 새벽에 우린 이곳을 탈출해서 중부 대륙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함께할 것이니 말이오.”
그 말에 그녀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외쳤다.
“누가 당신과 간다고 했어요! 당장 풀어 주고 군단으로 귀환해요. 여기서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설마하니 내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것 같소? 솔직히 그대가 부상당한 채 여기를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평생토록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속만 태우며 답답한 청춘을 허비하게 되었을 것이오. 여하튼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처지이니 웬만하면 마음을 돌리고 편히 나를 받아 주는 것이 상책일 것 같소.”
“누구 마음대로!”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나란 인간도 점점 깊게 알아 간다면 나름 매력이 있을 테니까 그저 그대의 모든 것을 내게 기대기 바라오. 적어도 그 하류검사 출신의 국왕 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말이오. 마음고생시키는 일도 없고 말이지. 하하!”
분명 단단히 실성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평소에는 제법 이성적인 행동을 했던 그였지만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
카르세크는 몇 날 며칠 동안 폭우가 쏟아진 뒤에 밤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늘 그렇듯 항시 작전 참모 아키아가 있었는데 그 역시 눈빛에 젊은 감성을 가득 담고는 수많은 별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집정관이 그에게 말문을 열었다.
“폭우 때문에 강물이 많이 불어나서 지원물자 수송선박들이 발이 묶였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그게 걱정스럽군.”
“내일이면 강 수위와 급류가 가라앉을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게다가 지원물자들이 일찍 도착할지라도 공격 시점은 변동이 없을 테니까요.”
“대체 언제쯤 공격을 할 생각인가? 여기에서 진을 친지도 벌써 두 달여가 흘러가는데 말일세.”
“평원 보병 군단 병사들 모두가 산악 보병 훈련을 끝마치는 시점일 테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지난번 파견되었던 특수부 검사들의 소식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에 아키아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뭔가, 그 얼굴은.”
“당한 것 같습니다.”
“당하다니.”
“아직 돌아온 자들이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조그만 왕국의 왕궁 기습이건만, 어째 서른 명의 특수부 검사들 중 단 한 명도 돌아온 자가 없단 말인가.”
“제 생각이 맞다면 국왕 지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단 말인가.”
“물론 있습니다. 그전에 말씀 드리자면 일전에 그에 대한 보고서를 읽었는데 거의 대부분 수년 전 것으로서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자료들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류 구역 출신으로서 용병단 특별 허가증을 따기 위해 관문을 통과했고 그 짧은 시간에 무려 이천여 명을 동원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하류구역 분쟁 당시 제오 구간에서 레온에게 패하여 부하를 잃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 보고서 내용 전부였습니다.”
“그 내용이야 나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자의 이후 수년간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된 게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최근의 행적에 대한 정보 수집을 하기 시작했고, 한 달여 동안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어제 도착한 정보원으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뭐 특별한 거라도 알아냈단 말인가.”
“그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라니?”
“집정관님께서도 무척 놀라실 겁니다. 그의 전투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할까요. 만일 보고 내용들이 저부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는 레온과 테세우스에게 쉽게 제압을 당했던 자일세. 아르게논이 같은 하류 구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로 정했기에 오늘날 국왕이 된 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뭐라도 크게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지.”
“어디까지나 옛날 일이겠죠. 물론 수년 사이에 어떤 방법으로 갑자기 강대한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 그의 위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훨씬 그 이상이란 말이죠.”
카르세크는 여전히 못미더운 얼굴이었다.
“그자에 대한 새로운 것들을 말해 보게나.”
“그자는 펜스 지방의 죄수 폭동을 혼자서 제압했고 왕국의 붉은 기사단장을 역임하면서 피가로 제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상당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마스란 왕국의 신임 국왕으로 전격 발령 받고는 그 안에서는 부패와 공권력 남용에 썩은 정치판을 단번에 바로 잡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의 놀라운 행적들이 또 있지만 일단 대략적인 행적은 그러합니다.”
카르세크가 다소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방금 자네가 말한 내용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레온과 테세우스가 용병 척결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영토에서 그와 같은 큰일을 했다, 그 말인데…… 대체 사람이 어떻게 그리 변할 수가 있지? 그런 약골이 단번에 강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세상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이번엔 카르세크가 다소 심각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야 피체 왕국이 지난겨울 동안에 주변 부족 국가들을 규합하여 쉽게 영토 확장을 할 수 있었는지 납득이 가는군. 그 정도 능력의 국왕이라면 그 밑의 수하들 역시 상당한 자들일 테니까 말일세.”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 전쟁은 그저 일개 왕국과의 교전 정도가 아니라 제국 차원으로 보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토록 자존심이 센 아크누스 기병대마저 피체 왕국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 수 있었습니다.”
카르세크는 갑자기 머리가 지근거렸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크누스 기병대라면 일전에 우리 측 사신이 그들을 귀속시키려 했다가 쫓겨난 바로 그 오만한 족속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을 피체 왕국이 끌어들였다 그 말인가?”
“최근에 확인된 사실입니다.”
“산 넘어 산이라. 이런 판국에 자네마저 없었으면 난 어찌했어야 했겠는가.”
그때 아키아가 카르세크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제가 더욱 우려하는 것이 있는데…… 대자객 신전에 대해서 들어 보셨는지요.”
순간 집정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대자객 신전을 모르는 자들도 있었는가! 그나저나 그 얘기는 왜 하는 것인가. 설마하니 그들도 피체 왕국이 접수라도 했단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카르세크가 몹시 흥분해서 외쳤고 아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대, 대체 피체 왕국은 괴물 집단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직 정확한 사실은 아니니 너무 심려치 마시기를.”
“내가 지금 걱정하지 않게 생겼는가! 대자객 신전이라면 남부 대륙 최대 살수 단체이건만, 그들이 피체 왕국을 위해 일한다면 그거야말로 살이 떨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일단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이라니!”
“아마 그 사실이 맞다면 분명 자객들이 오늘 아니면 며칠 내로 여기 최고 사령관 막사를 노릴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카르세크가 기겁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자객이라고!”
“우리가 특수부 검사들을 보내어 선제공격을 했으니 저들 역시 화답을 해 오겠지요.”
“그렇다면 자넨 그들이 올 것을 알면서도 나와 이렇게 태연하게 밖에 나와서 대화를 나누는 것인가.”
“이미 만반의 준비는 모두 갖추어 놓았습니다. 우린 그들을 맞을 준비만 하면 된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미끼란 말이지?”
“송구스럽지만 표현이 좀 그렇군요.”
“하아, 알겠네.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가?”
***
그날 늦은 밤이었다.
어디선가 음산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스스스스.
카르세크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뭐야, 벌써 온 건가!”
아키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절묘한 시점에 때맞추어 왔군요. 후후.”
“지금 그렇게 여유부릴 때인가! 어떻게 좀 해 보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뭔가가 나타난 것 같은데 내가 걱정하지 않게 생겼는가!”
아니나 다를까, 집정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으로부터 정체불명의 복면 사내들 네 명이 이들을 향해 덮쳐 왔다.
홱! 홱!
달빛 아래 번뜩이는 칼날이 요동을 치는 듯했다.
파파파팟
하지만 이미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땅 밑으로부터 수십여 명의 특수부 검사들 공중으로 솟아올라 침입자들을 향해 막았다.
슉! 슉!
파파파팟! 챙!
“헉!”
스윽!
“악!”
기습을 노린 자객들은 오히려 역기습으로 매우 당황한 듯 보였고 공중에서 신형을 잃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아악!”
미리 준비되어 있는 그물망이 재빨리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모조리 덮쳐라! 한 놈도 빠짐없이!”
홱! 홱! 홱! 홱!
“아이쿠!”
“복병이 있었잖아.”
자객들은 고작해야 네 명이지만 이곳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특수부 검사들만 50여 명에 이르렀으니 상당히 수월하게 그들을 생포할 수가 있었다.
잠시 후 카르세크와 아키아는 막사 앞마당에 꿇어앉은 자객들 앞으로 다가가서 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복면을 벗겨라!”
집정관의 명령에 네 명의 자객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피부에 독사와도 같은 눈빛을 드리웠다.
하지만 자신들이 왜 허무하게 잡혔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한 반응들이었다.
“네놈들 정체를 밝혀라.”
“…….”
집정관이 추궁을 했지만 예상대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아키아가 맨 오른쪽 자객에게 다가와서 목덜미 족을 손으로 살폈다.
거기에는 뱀 두 마리 엉켜 있는 문신이 새겨진 것이 아닌가.
그제야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키아.
“목에 쌍 독사의 문신으로 보아서 이들은 대자객 신전 소속 자객들이 분명해 보입니다.”
침울한 얼굴을 하는 집정관.
“결국 피체 왕국이 이들마저 끌어들였단 말인가.”
아키아 역시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보다시피 우리가 상대해야 할 피체 왕국은 결코 만만한 전력을 갖춘 나라가 아닌 제국적 차원으로 전력을 다해야 할 큰 상대입니다. 그동안 발톱을 뒤로 숨겨 놓았다고나 할까요.”
“빌어먹을! 당장 이놈들을 심문해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도록 하게나.”
아키아가 다시 한 번 자객들을 살피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계속해서 말문을 열었다.
“이들은 이급 계열인 듯 보이는데 사전 탐색을 위한 선발진으로 보입니다. 추후 일급 자객들의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요. 만일 다음에 그들이 다시 급습이라도 한다면 오늘처럼 쉽게 생포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집정관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대자객 신전의 일급 자객이라면 웬만한 제국의 특수부 검사들의 전투력을 상회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은가.”
그러자 아키아가 무슨 이유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특수부 검사 기관이 대자객 신전을 상대하기에는 벅찬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군다나 집정관 곁에는 믿음직한 무인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집정관님께서는 훌륭한 인재를 두고 계시면서도 그들을 왜 옆에 가까이 두려 하지 않습니까.”
“훌륭한 인재라니?”
“얼마 전까지 팔라카스 제국의 최강의 무인 레온이 항시 보필해 온 것으로 아는데요. 현재 그는 어디 있습니까.”
그제야 카르세크의 동공이 동그랗게 팽창 되었다.
“오호라, 레온 말인가! 그는 현재 제3군단 보병으로 백의종군하고 있다네. 자네도 알지모르지만 황궁 침입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네.”
아키아가 다짜고짜 말했다.
“그쯤 끝내시고 당장 그를 불러들이시지요.”
카르세크가 잠시 고민스런 얼굴을 했다.
“그건 아직 좀 이른 것 같은데.”
“아직도 모르시는지요. 집정관님 안위가 달린 문제라는 것을.”
“내 안위라니?”
“피체 왕국은 이미 국왕을 비롯하여 그 아래 수하들마저도 우리 특수부 검사들의 전투력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전쟁이 나라 간에 하는 대규모 전이지만 이곳이 산악 지형인 만큼 수많은 국지전에서 개개별의 전투력 능력에 따라 그 향방이 크게 엇갈릴 수 있단 말이죠.”
“흠.”
카르세크는 잠시 심사숙고 하더니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나도 레온을 다시 불러들일까 고민 중에 있었다네. 이젠 황제 폐하의 노여움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도 되었고 말이야. 아무튼 알았네, 내 전령을 보내어 당장 그를 이리로 데려오겠네.”
하지만 아키아의 표정은 아직도 아쉬움이 남은 듯 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에 카르세크가 물었다.
“아직도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가.”
“네, 한 가지 아뢰올 게 더 있습니다.”
“좋네, 이왕 말 나온 김에 자네 생각을 모두 털어놔보게나.”
“현재 지원군단의 군단장 역시 불러들이심이 어떨지요.”
“지원군단장이라면.”
“테세우스 말입니다.”
그가 깜짝 놀랐다.
“테세우스라니! 정녕 그자를 말하는 것인가?”
“네, 맞습니다.”
“그는 안 될 말이네.”
“왜 안 된다는 거죠!”
“그냥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게나!”
그러자 아키아 역시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이 전쟁을 승리를 이끄시고 싶으시다면 반드시 그를 중용해야 합니다. 물론 그가 집정관님의 반대파인 원로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대표저인 인물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인사 등용권은 총사령관이신 집정관님에게 있지 않습니까? 비록 레온이 이리로 온다 할지라도 그만으로는 부족하다 느껴지니 테세우스 역시 함께 거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네 정신이 있는 건가. 테세우스는 현재 지원군단장의 위치에 있는 자란 말일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집정관님께서는 전시 기간 중에 특별 발동 명령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신 분입니다. 황제 폐하의 허락까지 얻으면 당장이라도 그의 지원군단장 직급을 전격 해임하고 곁으로 불러 올수 있는 문제입니다.”
카르세크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진데.”
“그의 도움이 저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그는 결국 마지못한 얼굴로 답했다.
“자네란 사람 말이야. 정말 엉뚱한 구석이 있군그래.”
“제 바람은 오로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모든 요인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결국 집정관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알았네! 알았다고. 테세우스 역시 이리로 불러올 테니 그리 알게나.”
아키아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다만 테세우스는 지원군단장 인계인수에 따라 조금 늦어질 수 있네. 그리 알게나.”
***
피체 왕국은 최근 제3군단 군단장과 부군단장의 갑작스런 행방불명으로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전쟁을 코앞에다 두고 제3전초 기지의 최고 지휘관 두 명이 사라졌으니 이는 건국 이후의 최대의 사건이었다. 특히 국왕 지드에게 있어서는 이만저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의 진상 조사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한 고위 장교가 국왕 집무실에서 자세한 보고를 지드에게 올리고 있었다.
“두 분이 사라진 경위를 조사해 본 결과 근처 바위 절벽 동굴 안에서의 모닥불 흔적 외에는 그 어디에도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지드가 다급한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자객들의 침입이나 기습 공격에 의한 불상사는 아니란 말이지?”
“일단은 그렇게 추측이 됩니다.”
“그렇다면 군단장과 부군단장이 자신의 군영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이탈을 했다는 것인데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조사 위원회에서도 그 점에 대한 특별한 동기나 여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지드의 안색은 완전히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입술이 떨리고 목이 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다시금 머릿속에서 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했는지 거듭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지.’
잠시 후 보고 장교가 집무실을 나가자 지드는 테라스 바깥으로 나가 왕국 너머 산등성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라퀘스가 집무실 입구를 통하여 지드의 등 뒤로 다가왔다.
“폐하.”
“…….”
지드는 아무런 미동조차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산 쪽으로 시선을 집중할 뿐이었다.
아라퀘스 역시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제3군단장과 부군단장이 한꺼번에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사건일 테지만 국왕 개인적으로는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라퀘스는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그저 옆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들려오는 지드의 침울한 음성.
“지난번 그 일 때문에…….”
이에 아라퀘스가 되물었다.
“무슨 말씀인지요.”
“내가 그녀에게 실수를 했는데, 아무래도…….”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군단장님은 그런 사사로운 일 때문에 절대 군영을 이탈할 그런 분은 아닙니다. 에르가니아 님에 대해선 폐하께서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물론 나도 그리 믿고 싶네.”
“혹시 부군단장님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닐는지요.”
지드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카르발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사건은 군단장과 부군단장이 동시에 사라진 사건이니 필시 그 둘은 폐하께서 미처 모르셨던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르가니아와 카르발디가 말이지.”
“사실 부군단장은 제 고국 사관학교와 흑검사 선배이기 때문에 지난번 원정 임무를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 현재 사건이 발생한 한 후에야 당시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 분의 직속 상관이셨던 에르가니아 님에 대한 연정을 얼핏 언급한 적이 있었고 괴로워했던 모습도 생생합니다. 혹시라도 그 둘이 함께 어디론가 갔을지도…….”
지드는 매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뭐라!”
“그저 추측입니다.”
“추측이라도 그런 소리를 하진 말게. 에르가니아는 말도 없이 떠날 그럴 사람이 아니야! 혹여 납치를 당했으면 모를까.”
“…….”
아라퀘스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생각해 보니 납치일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던가.
그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럴 가능성이…….”
불길한 예감이지만 지드 역시 자신이 얘기 놓고도 그 어떤 단서를 잡은 듯 이이내 안색이 창백해 졌다.
“설마 카르발디 그자가!”
“만일 그랬다면 선배가 미친 것이 확실하군요.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지드는 점차적으로 그의 소행일 것이라 심증을 굳혔는지 크나큰 분노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그 작자가 마음이 들지 않았건만!”
“당장 병사들을 풀어 그를 추적토록 하겠습니다.”
“아뿔싸.”
그로부터 며칠 후.
사건 발생이 일어난 시점에서 벌써 일주일이 흘렀기 때문에 이미 추적은 물 건너간 상황이 되어 버렸다.
군영 주변을 토대로 범위를 넓혀 수많은 병사들이 샅샅이 뒤졌지만 그 둘의 행적은 그 어디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지드는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갔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더군다나 지난번 그는 그녀에게 매몰차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반드시 만나서 그 일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남에 정말이지 가슴을 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갑갑함을 느껴야만 했다.
***
휘잉. 출렁출렁―
강 한복판에 조각배 한 척이 물살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갑판에는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청년이 보였고 그 옆에는 귀여운 용모의 소녀가 매우 다정하게 기대어 있었다. 그 둘은 테세우스와 한나였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사내는 그 차가운 인상에 어울릴 법한 음색으로 차분히 대답했다.
“집정관.”
“왜!”
“그가 불렀으니까.”
“그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거야?”
“그래.”
“뭐가 그래?”
“괜한 시비 걸지 말고 가서 잠이나 주무시지.”
“너는 이제 청동갑옷을 착용한 흑운성의 후계자이자 어둠의 진정한 주인이잖아. 그런데 언제까지 그런 시시한 인간 따위의 명령을 들을 거야.”
“이봐! 내 앞길 걱정은 어디까지 본인인 내가 하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시지.”
“좋아, 이번 인간들 전쟁만은 그냥 지켜보기로 하지 뭐. 어차피 네 능력을 시험해 볼 기회의 장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때를 봐서 어둠의 세력을 키워 이 세상을 거두면 되는 거겠지. 아무튼 내가 옆에서 도울 일이 있다면 주저 없이 말하라고.”
“당분간 내 일에 끼어드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안심하셔! 이번 전쟁은 시시할 것 같아서 껴들 마음도 없거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다만 좀 놀 거리가 없어서 심심해서 그렇지.”
“잠이나 자든지.”
순간 한나가 불끈했다.
“너 말이야, 요즘 너무 나한테 소홀한 거 아냐? 그래도 전에는 같이 많이 놀아 주더니.”
“나 바쁘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테세우스는 별 시답지도 않는 말을 들은 듯 인상을 찡그리듯 등을 돌려 선실 안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나가 시끄럽게 외쳤다.
“갑자기 말도 없이 등을 돌리다니! 너 내가 사람 같지 않다 그거냐?”
테세우스의 무심한 음성.
“너 원래 사람 아니잖아.”
“…….”
바로 그때였다.
테세우스는 선실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왼쪽 둔덕 위에 수풀 뒤쪽으로 뭔가가 숨어 있음을 감지한다.
‘저게 뭐지.’
청동갑옷을 착용한 이후 그의 신체 감각 능력은 무려 수십 배로 커졌던가. 지금처럼 먼 거리에서조차 작은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한나.
“뭐야?”
“쉬, 조용히 해 봐. 누군가 있는 것 같은데…….”
“어디 봐봐.”
테세우스가 귀찮은 듯 말했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참견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지.”
그녀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렇게는 못하지. 치.”
방금 전까지 천진한 눈빛과는 달리 수풀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고 자신만만한 듯 말문을 열었다.
“두 명의 인간이 쥐새끼들처럼 수풀 뒤에서 웅크린 채 숨어 있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테세우스 역시 그곳을 바라보며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밤중에 운하 수로 강가에 누가 있다는 거지.”
“한 명은 사내고 다른 한 명은 여자야. 그런데 여자의 숨소리가 매우 거친 것으로 보아서 어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한나 역시 어둠의 여신답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테세우스는 배 선미에 올라서서 정신 감응 능력으로 배를 그 쪽으로 몰았다.
슈슈슈슈!
돛도 없고 노도 없는 배를 자신의 의지대로 몰아가니 누가 그 광경을 본다면 매우 놀라고도 남을 일이었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청동갑옷과 청동검을 착용한 이후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흑운 성의 기운과 맞물려 서서히 그 힘을 되찾기 시작했고, 지금처럼 정신 감응의 능력 또한 저절로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한나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한마디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력이 제법 많이 늘었네. 과연 론의 아들답군.”
“내 아버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니까? 그것도 어린 녀석이 말이야.”
“나 보기보다 나이 많거든? 인간 기준은 수백 살도 넘어.”
“그래, 나이 많이 먹어서 좋겠다. 어쨌든 웬만하면 그냥 생긴 대로 놀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아, 그랬었지? 미안해, 내가 소녀라는 것을 잠시 깜빡했어. 후후, 난 아주 귀엽고 깜찍한 열다섯 살이란 말이지.”
그녀는 은근슬쩍 테세우스에게 다가와서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꼈다.
이에 테세우스는 싫지 않는 듯 가만히 있었지만 표정은 시큰둥해 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하는군.”
잠시 후 배가 강기슭에 도착했고 테세우스는 냅다 뛰어 내려 수풀을 향해 외쳤다.
“거기 숨어 있는 자들은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한나가 뒤쪽에 나타나더니만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숨어 있는 자들한테 다짜고짜 나타나라고 말하면 그들이 나타나준대? 정말 순진하기는.”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들어 허공으로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곧이어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스윽―
“헉!”
“욱!”
수풀로부터 갑자기 허공으로 불쑥 솟구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두 명의 남녀로서 둥둥 떠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발견되어 지금처럼 몸이 절로 떴다는 자체가 경악스런 일이었는지 각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바동거렸지만, 뭔가 거대한 힘에 이끌리듯 속수무책이었다.
테세우스 역시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또 다른 차원에서 어둠의 여신이란 소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능력을 목격하니 새롭게 보인다고나 할까.
잠시 후, 강모래 바닥으로 곤두박칠 치는 두 명의 남녀.
쿵!
“어이쿠.”
“욱!”
곧이어 테세우스는 이들이 누군가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곳 뱃길은 얼마 전 운하 공사로 생긴 통로로서 군사 지역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들은 심중팔구 피체 왕국의 첩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테세우스로서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으니.
“심문할 것도 없겠지. 어차피 진영으로 향하는 중이니 너희들을 그곳으로 데려가서 본격적인 심문을 하도록 할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보통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한나가 이번만큼은 무슨 이유인지 모습을 드러냈고, 두 명의 남녀 앞으로 다가가서 뭐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해.”
“쓸데없이 참견 말라고 했지. 당장 모습을 감추고 뒤로 사라져.”
“싫어, 앞으론 이대로 지낼 거야. 사람들이 뭐라 하면 개인 비서라고 변명하면 되잖아.”
테세우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너 정말!”
“그나저나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니.”
“여기 금발 여자애 말야. 이제 보니 왼쪽 어깨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니 심각한 부상을 당한 것 같아.”
테세우스 역시 그제야 한나가 지적한 것을 발견했는지 그녀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부축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밤중인데다가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있어 어스름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진짜 여인의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은 듯했다.
순간 여인이 입가로부터 피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우욱! 컥! 컥!”
테세우스의 품 안에서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른 여인, 그저 신음만 겨우 낼 뿐이었다.
“이런. 부상이 심한 것 같은데.”
한나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했다.
“거의 죽어 가는 것 같은데. 도대체 이들은 뭐야.”
“글쎄다. 적의 첩자치고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데.”
바로 그때였다.
그제까지 얌전한 채 가만히 꿇어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허리춤으로부터 단도를 꺼내 들더니만 전광석화와도 같이 테세우스의 가슴 왼쪽 심장을 노린 듯 강력하게 찔러 들어 왔다.
“에엣! 죽어라!”
홱! 깡!
“아!”
그처럼 강력한 살기를 드리웠던 단도는 테세우스의 흉갑을 뚫고 심장에 박히기커녕 반탄력에 의해서 뒤로 퉁겨져 버렸고 이에 사내 역시 자빠졌다.
나카스니아 대륙의 최대 병기 중에 하나인 청동갑옷을 인간의 힘으로 뚫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랄까.
원래 차분하고 침착하기로 유명한 테세우스는 갑작스런 기습 공격을 받았음에도 그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의 한나는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뭐야! 이 새끼. 진짜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그녀가 손을 들어 뺨을 날리려는 순간 테세우스가 막아섰다.
“잠깐!”
“말리지마! 저걸 그냥 놔두라고?”
“잠깐 비켜 서.”
“쳇!”
때마침 구름이 드러나면서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자 사내의 얼굴이 비추면서 테세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있어 보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분명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기억을 하는 테세우스.
“이제 보니, 너는…….”
수년 전 용병단 척결 작전에 마지막 전투 때 대결을 벌였던 바로 그 흑검사가 아니던가.
그의 시선이 이번엔 부상당한 여인에게로 갔고 그녀 역시 알아보는 듯했다.
“여자는 레온과 맞붙은 바로 용병대장 같은데.”
당시 이 둘은 레온과 테세우스와 각자 대결을 펼치다 서로 힘에 딸려서 함께 도망을 쳤던 자들이었다.
테세우스는 이들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한나가 물었다.
“아는 애들이야?”
“그래.”
“어떻게.”
“예전에 한번 전투를 치른 적이 있었지.”
“이런 약골들 하고 말이지.”
“이 둘은 전에 용병 집단 지휘관으로서 마지막까지 팔라카스 제국에 대항한 자들이지.”
한나는 소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얼굴에 무서운 살기를 가득 품고는 사내에게 손을 들어 올려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 둔다면 안 되겠지?”
그러자 테세우스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말렸다.
“그만둬!”
“그만두라니!”
“살려 둘 필요가 있어.”
“널 죽이려 했잖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너는 당장 여인을 배 안으로 옮기고 치료부터 해 줘.”
“치료라니?”
“그래야 나중에 심문을 할 수 있잖니.”
“남자 녀석은?”
“내가 맡지. 어차피 저자로부터 알아낼 것도 있고.”
“쳇! 그냥 둘 다 죽여 버리고 우리 갈 길이나 가지 뭘 성가시게 배에 끌어들이냐?”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참견했다가는 너를 그냥 돌려보내는 수가 있다.”
“이젠 청동검에 갑옷까지 입었다고 점점 목소리가 커지네.”
“거참, 정말 시끄럽군!”
***
휘잉. 출렁출렁.
카르발디는 선박 선미 철판 기둥에 굵직한 쇠사슬과 함께 묶인 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당한 에르가니아를 들쳐 업고 먼 길을 가려 했던 그의 의도는 애초부터 무모한 것이었다. 여러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적들이 만든 운하를 통해서 이 지긋지긋한 피체 왕국의 영토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인데, 오히려 적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더군다나 그 자신이 흑검사이면서도 이렇게 꼼짝없는 신세가 된 것은 상대가 테세우스에다가 그 정체모를 소녀 역시 괴이한 능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이제는 죽었다 복창해야 할 입장이었다.
“에르가니아.”
그래도 그의 머릿속에는 다 죽어 가는 그녀가 아른거렸다. 정말이지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그녀에 대한 애정이 크면서도 부상당한 그녀를 인정사정없이 강제로 들쳐 없고 냅다 도망쳤다는 것은 매우 심한 행동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그런 기회가 생길 수가 있단 말인지.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모든 것을 체념해야만 할 시간인 것 같았다.
적국에 넘어가서 심문을 받는다면 실토하지 않더라도 에르가니아와 자신이 피체 왕국 제3군단 군단장과 부군단장 신분이라는 것이 당장 드러날 테니 말이다.
‘어쩌다가 내 꼴이 이리 되었지. 젠장.’
한편 선실 안에는 테세우스와 한나가 침대에 누워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에르가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나가 다소 심술궂은 음성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여자인 내가 봐도 정말 예쁘게 생겼군. 쳇!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겨. 어떡하지?”
테세우스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네가 살렸으면서 없애다니, 말이 안 되잖아?”
“네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없이 살렸지 내 의도는 그렇지가 않았다고. 난 나보다 예쁜 년들 보면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어 미치겠어.”
그러자 테세우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만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너도 예쁜데 뭘 그리 흥분하시나.”
순간 살기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풀리고 말았다.
“그 말 진심이야? 와우, 고마워.”
“어쨌든 대단한 능력이군. 상처를 단번에 아물게 하다니.”
“치! 내가 괜히 어둠의 여신인가?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건 인정하지.”
“그런데 앞으로 이 둘을 어떻게 할 거야.”
“진영에 도착하는 즉시 이들을 넘길 생각이다.”
한나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고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말했다.
“그건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남자 녀석은 마음대로 해도 괜찮지만 여자애는 안 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생각이 바뀌었어. 나 그동안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너는 지원군단장이라고 매일 업무에 빠져서 같이 놀아 주지도 않고 나만 혼자서 막사 구석을 지켜왔는데 이제는 지긋지긋하단 말이야.”
“그래서 뭘 어쩌려고?”
한나가 에르가니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앞으로는 얘랑 놀래.”
“얘라니?”
“내 시녀로 삼고 마음대로 부려먹고 놀기도 할 거야.”
테세우스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물론 제정신이다!”
“정말 돌아 버리겠군.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가서 잠이나 자라.”
“나 지금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좋아, 그렇게 나를 믿지 못한다면 할 수 없지.”
홱!
한나가 손을 들어 자고 있는 에르가니아에게 살수를 펼치려 했다.
“만일 내 얘기 들어 주지 않으면 얘도 죽이고 바깥에 있는 남자도 죽여 버릴 거야.”
“뭐라고!”
테세우스는 잠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철부지 같은 행동에 엄청난 능력으로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으니 일단은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잠깐!”
“왜!”
“알았으니까 그 손부터 내려 놔.”
“내 말 들어줄 거지?”
“알았다니까.”
금세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한나.
“정말?”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게 뭔데.”
“어차피 살려 둘 거라면 진영에 도착할지라도 그녀가 적국으로부터 넘어 왔다는 사실을 숨겨야 할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집정관이나 누가 물어 보면 시종으로 적당히 둘러칠 필요가 있겠지.”
“그건 좋아.”
“하지만 바깥에 묶여 있는 사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한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걔는 굳이 넘길 것도 없이 그냥 없애 버리지.”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니까 신경 끄시지.”
테세우스는 말이 끝나자마자 선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는 카르발디, 선실 안으로부터 테세우스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다소 묵직해 보였던가.
저벅저벅
더군다나 달밤에 비쳐지는 그의 표정이 묵묵했으니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소 냉정하게 들려오는 테세우스의 음성.
“애초 이럴 의도는 없었지만 미안하게 되었다.”
그는 허리춤으로부터 검을 빼어 들어 카르발디의 목을 겨누었다. 이에 카르발디가 기겁을 하고는 두 손으로 그의 종아리를 잡았다.
그의 신분이 부군단장에다가 흑검사이고 나발이고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아예 자존심을 팽개쳐 버리고 죽는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되었다.”
“심문도 하지 않고 죽이다니.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사정이 그러니 날 원망 마라.”
카르발디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 죽는 소리를 쳤다.
“내가 원망하지 않게 생겼소? 명색이 내 신분이 그래도 피체 왕국에서는 부군단장인데 포로 대우는 해 주지 못할망정 이렇게 쇠사슬에 묶어 둔 채 개죽음을 시키려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소이까!”
테세우스는 사내가 부군단장이라는 말에 몹시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부군단장이라고!”
“그렇소이다. 이리 보여도 내 명색이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린 지휘관이란 말이오.”
테세우스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렇다면 안에 있는 여인의 직분은 뭔가?”
“…….”
카르발디가 움찔거리고 당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신분을 말한다면 상대의 반응이 어찌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르가니아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목숨이 위태할 지경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는 솔직한 신분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겼다.
“그녀는 제3군단의 최고 지휘관이오.”
“그렇다면 군단장.”
“바로 보셨소.”
“…….”
테세우스는 그만 말문을 잃고 말았다. 이 자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너무도 황당한 일이 아니던가.
어찌 대치 중에 있던 적국의 군단장과 부군단장이란 자들이 자신의 손에 이렇듯 허무하게 잡힐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검으로 그의 목덜미에 갖다 대면서 노한 목소리로 위협을 했다.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건가.”
“거짓말 아닙니다. 내 말은 진짜입니다.”
“부군단장이란 작자가 자신의 신분을 그리도 쉽게 말할 수가 있는가.”
“지금 내 목이 잘릴 판인데 그런 직분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시오. 하여튼 난 진실을 고했으니 판단은 그대가 알아서 하든지요.”
“…….”
테세우스는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는 어마어마한 대어(大漁)를 낚은 것이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카르발디가 읽었을까.
“나를 살려 준다면 내 그대에게 큰 힘이 되어 주겠소.”
“그건 무슨 뜻이지.”
비굴한 미소를 짓는 카르발디.
“후후. 다 알면서 왜 그러시오.”
“알긴 뭘 안다고 그러나.”
“사실 난 피체 왕국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사람이오. 이 전쟁을 누가 이기든 상관없으니까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그대에게 모두 털어 놓을 용의도 있습니다.”
“모든 정보를 말인가.”
“그렇소.”
테세우스는 상대가 협조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오자 내심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대체 뭐야…… 이 작자는!’
한편 선실 안에는 이제 막 깨어난 에르가니아게게 한나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깨어나는군. 호호!”
에르가니아는 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마치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어두침침한 이상한 곳에서 어느 낮선 소녀가 자신을 향해 다소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하얀 치아를 내보이는 것이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애써 일어나려고 내심 발버둥을 쳤지만 몸은 꼼짝 못한 채 요지부동했다.
그렇다면 지금 겪고 있는 이 순간은 악몽이 분명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은 채 동굴 안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카르발디를 만난 것 같은데 이 이후부터는 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 모든 고통도 사라졌고 모든 것이 아지랑이처럼 아른하고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또다시 졸음이 왔다.
‘아.’
다시 잠이 들고 마는 에르가니아. 그녀를 지켜보던 한나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또 자잖아? 심심하게시리.”
그때 선실 안으로 들어오는 테세우스.
“상태는 어때?”
“방금 전 깨려다가 또 잠들었어. 그나저나 남자 녀석은 없애버렸어?”
“아니.”
“아니라니.”
“살려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야.”
“그냥 그러고 싶어서.”
테세우스는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의자에 앉아 등을 푹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말 많은 한나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야.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