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방어선의 승리는 후방 진영과 피체왕국으로도 전해졌으며 가히 엄청난 사기를 촉진시켰다.
제3방어선에 있던 지드와 하키리우스 역시 그와 같은 소식에 이만저만 기쁜 것이 아니었다.
제1방어선의 패배에 대한 충격과 가뜩이나 사기가 저하 된 제3군단이 다시 기사회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한다고나 할까.
그나마 지휘관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지드가 몸소 제3군단에 와서 직접적인 지휘를 해 주니 최근에서야 그 체계가 확실하게 잡혀 가고 있었다.
게다가 제2방어선에서 적들의 진격 제어까지 해 주니 일단은 한숨을 놓고 볼일이었다.
“아레스가 결국 일을 해냈군요.”
지드의 말에 하키리우스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이 군단 전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 준 덕이기도 하겠지요. 제이 군단은 그 옛날 하류 구역 출신 주민이나 용병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전투를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대항했을 겁니다.”
지드 역시 그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들이야 말로 피체 왕국에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투를 다했겠지요.”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제이 방어진처럼 가장 중요한 전술 지역에 그들을 배치 시켜 놓은 것입니다.”
지드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조금은 의외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울 것을 예상하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때 지드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기 제삼 군단의 병사들 대부분 정식 용병들 출신이 분명 하겠군요.”
“지난겨울에 합류했던 부족민들 역시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비록 그들은 하류 구역 출신이 아닌 이방인들이지만 현재로서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혈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 피체 왕국이 함락이 된다면 자신들의 부족 영토와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요. 아시겠지만 어차피 그들도 피체 왕국에 귀속되었으니까 전쟁이 끝날지라도 폐하의 주민이 되는 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건제하겠지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지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아키아가 다음 공격 시에는 무슨 방법으로 나올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이번엔 하키리우스 역시 근심어린 반응을 보였다.
“그 다음부터가 진짜 문제일 것입니다. 아레스는 손자병법의 기본적인 전술을 십분 이해하고 그대로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아키아는 이제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에 모든 것을 걸고 기상천외한 전술로 나올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야 하는 거요? 이대로 또다시 제이 방어 지역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하는지.”
그러자 참모가 수명을 만지작거리며 뭔가에 골몰하더니만 간단하게 답했다.
“이번에도 아레스를 믿어 보는 수밖에요.”
“…….”
지드는 더 이상 반문을 하지 않은 채 저 멀리 제2방어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득 지드가 한숨을 지었다.
‘한 번은 운이 통할 수는 있지만 두 번째는…….’
***
휘잉.
그날 밤바람이 유난히 거셌다. 지드의 숙소가 있는 막사 주변의 깃발들이 꽤나 강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언덕 아래쪽에는 경비병들이 겹겹이 에워 쌓고 있으니 개미 새끼 한 마리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삼엄해 보였다.
지난번 팔라카스 제국의 특수부 검사들이 왕궁으로 침입한 다음부터 지드는 장교들의 관내 막사들을 비롯하여 곳곳에 경비 병사들을 확대시켰다.
하지만 그 자신이 머무르는 곳은 다소 높은 지대였고 경비병들은 그 아래쪽 둘레에 있었으니 그만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일부러 공간을 비워 놓게 했는지도 몰랐다.
만일 누군가 침입을 한다면 상공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스스스스!
파팟!
하지만 세상에는 하늘 외에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곳에 침입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공간이동기술이 가능한 다크퍼스 아르였다.
그는 한동안 테세우스의 검에 봉인이 되어 그를 위해 많은 활약을 한 적이 있는 나카스니아 대륙의 전투 정령이었다.
사실 테세우스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그의 전투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바로 피체 왕국의 국왕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크크.”
달빛 아래 드러나는 뿔 달린 투구의 육중한 괴물의 모습, 사악한 정령답게 입가에는 그 흉측한 몰골에 어울리지 않게 교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듯 인간 하나를 목표로 잠입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는 것이 어찌 본다면 쉽다 못해 즐거운 놀이가 아니던가. 그는 경비병들이 언덕 아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슬슬 막사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스르륵.
그 두꺼운 손으로 막사 천을 살며시 열고는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벌써 성질 같았으면 막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암살 목표에 거대한 무기를 내려쳐 단번에 박살을 냈을 텐데, 오늘만큼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괜히 병사들이 몰려들고 난리를 치는 것보다 골치가 덜 아플 테니 말이다.
스윽.
막사 안을 둘러보니 국왕이 머무르는 거처답게 제법 넓어 보였다. 그리고 등잔불이 초롱거리는 맞은편 침대에 누군가 모포를 머리끝까지 덮고는 잠을 자고 있었다.
“흠. 잠이 들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주 조용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 줘야겠군. 크크!”
아르는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고양이걸음으로 살며시 다가가서는 자신의 무식한 대검으로 심장 쪽이라 생각되는 곳을 겨누어 힘껏 찔렀다.
푹!
“…….”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모포를 젖혀 보니 침구가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뭐야!”
화르르.
바로 그때 뒤편에서 불이 밝아옴에 아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누군가 등잔불을 켠 듯 보였는데 막사 안은 모든 사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정도로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다소 불평 어린 음성.
“요즘은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이거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군.”
아르가 다짜고짜 물었다.
“네가 피체 왕국의 국왕 지드더냐.”
“그렇다. 그나저나 넌 생긴 것이 왜 그 모양인가? 후. 가만 보니까 인간이라 보기에는 꽤나 못 생겼는데.”
“뭐라.”
아르는 상대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듯하자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두렵지 않은가.”
이번에도 지드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별로.”
“별 놈 다 있군. 보통 인간 같으면 나를 보자마자 오줌을 질질 싸며 움찔거리는 데 말이야.”
“미안하군. 그렇게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내 간덩이가 부은 모양이네? 하하!”
“…….”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천진한 아이처럼 활짝 웃는 지드, 그런 그의 모습에 아르는 그만 어이없어 하고 말았다.
“나 참, 내가 지금 놀려고 이곳에 온 줄 아는가.”
지드는 일부러 약 올리는 투로 말했다.
“물론 한밤중에 쥐새끼처럼 몰래 잠입을 했다는 것은 그저 잡담이나 하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
“그래도 국왕의 신분이라 곱게 죽여 주려고 했는데 네 놈의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조금 고통스럽게 만들어 줘야겠구나!”
“그러시든지.”
지드는 갑자기 만세 부르듯 팔을 높게 쳐들더니만 그를 향해 외쳤다.
“가만있을 테니까, 이리 와서 죽여 봐.”
“…….”
이번에도 아르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제껏 상대했던 인간들 중에 가장 이상한 놈이던가.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려고 했다. 혹시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명색이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자가 그럴 리가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하기야 무슨 인간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나야 저놈의 목만 따서 여신님에게 바치면 그만 아닌가.”
지드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되물었다.
“여신에게 내 목을 바친다고? 그건 대체 뭔 소리지?”
아르는 대답 대신에 다짜고짜 대검을 휘둘러왔다.
“어차피 죽을 자가 알아서 뭐 하겠는가!”
붕!
“헉!”
뒤로 날렵하게 피하는 지드, 또다시 검 공격이 들어왔다.
붕!
“와우! 검 한번 무식하게 생겼군!”
지드는 이번에도 검을 비껴 갔다.
이에 아르의 노기가 점점 끓어오르려 했다. 조용히 끝내려고 마법을 배제한 물리적인 검술만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상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날쌘 것 같았다.
“제법이군.”
“고맙군. 후후.”
아르는 결국 검에 어둠의 정령 기운을 입김으로 불어 넣어 이번에는 차원이 한층 강해진 공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자, 인간이여! 이번으로 네놈의 대항은 끝이 나리라!”
파팟!
대검의 끝으로부터 검은 검광이 발사되려는 순간, 막사 벽에 걸려 있던 철 방패가 어느새 그 앞을 가로막아 주는 것이 아니던가.
팍! 웅―
우지직!
그 충돌로 제법 큰 굉음이 일었고 방패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깜짝 놀란 자는 바로 아르였으니 설마 국왕이란 자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뭐야, 이놈. 보통이 아니잖아.”
지드가 이번에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그나저나 테세우스가 나를 죽이라고 너를 보냈더냐? 젠장! 그가 나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건만.”
순간 아르는 멍한 얼굴을 했고 곧바로 되물었다.
“나를 아는가?”
“알다마다.”
“어떻게.”
“수년 전인가. 용병 집단 특별 허가 시험 당시 테세우스가 검으로부터 너를 소환해서 누군가를 해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지.”
아르가 다시 한 번 화가 솟구치려 했다.
“처음부터 나란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단 말이군?”
“물론이지. 사실 너같이 흉측한 괴물이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해 봐라. 세상에 놀라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그나마 다행이라면 난 너를 이미 알고 있었거든. 소환 명령으로 움직이는 테세우스의 개! 다크퍼스 말이다. 후후.”
“뭐라고!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 그리고 오히려 내 존재를 알았으면 더욱 두려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옛날에는 그랬겠지. 헌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네가 그다지 무섭다거나 위축이 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럼 실성한 것이 분명하겠군.”
“미안하지만 그도 아닌 것 같은데. 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하잖아.”
“이제 보니 입만 살은 인간이로군. 어차피 뒈질 놈과 얘기해 봐야 소용없겠지.”
아르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대검을 뽑아 공격하려 했다.
스윽.
지드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잠깐!”
아르가 신경질적으로 거친 음성을 내뱉었다.
“이번엔 또 뭐야!”
“여기는 좁으니까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
“다른 장소라니.”
“그대가 누울 장소라면 그래도 조금은 운치가 있는 곳이 좋지 아니한가.”
“내가 눕는다고?”
“후후. 일단 따라오게나.”
홱― 타다닥!
지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막사 밖으로 확 뛰쳐나갔다. 아르 역시 갑작스런 그의 행보에 얼떨결에 뒤를 쫓아갔다.
“꽤 성가신 놈이로군. 나 참, 사람 하나 없애는 데 이렇게 복잡한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잠시 후 아르는 저만치 앞서가는 지드를 쫓아가면서 그만 아연질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공이 통통 튀기듯 수십여 미터를 도약하며 이 나무 저 나무에 옮겨 다니는 몸놀림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지드의 경공술은 무림에서도 최상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서 이 세계 기준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신묘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물며 아르조차 날개도 없이 저처럼 고공 도약에 따른 엄청나게 빠르게 달려가는 한 인간에 대해 이만저만 놀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앞서 가던 지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보게, 빨리 따라오라고! 생각보다 몸놀림이 둔한 친구로군.”
사실이 그랬다. 아르는 정령이 변질된 존재로서 공기보다도 가벼운 질료로 만들어진 신체를 지니고 있기에 바람처럼 쉽게 앞으로 향해 나갈 수가 있었다.
아니면 순간 이동으로 다른 장소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쫓아가기가 벅찰 정도라면 필시 피체 왕국의 국왕이라는 자는 예사롭지 않은 인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제야 아르는 처음으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냐. 웬만하면 아무 곳에서 싸우자!”
“그건 안 되지. 그래도 우리 둘 중에 하나가 묻힐 곳인데, 웬만하면 경치 좋고 그럴 듯한 장소를 고르는 것이 좋단 말이지.”
“…….”
아르는 짜증나는 표정을 지을 뿐 별로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대략 10여 분이 지나갔을까.
지드가 도착 한 곳은 호수가로서 주변이 암석 충으로서 곳곳에 바위들이 제법 많이 산재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기암괴석들과 관목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아주 경치가 좋은 호반(湖畔)의 정취를 듬뿍 담고 있기도 하였다.
착!
지드는 커다란 바위들 중 하나를 골라 그 위에 당당하게 올라서서 아르를 기다렸다.
저 멀리 헐레벌떡 다가오는 육중한 체구의 다크퍼스, 뿔 달린 투구에 대검을 앞세워 한순간에 지드 앞에 놓인 바위 위로 사뿐하게 안착을 했다.
착!
“이제 다 온 거냐?”
“그렇다.”
그는 주변을 쓱 한번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놈 말대로 괜찮은 곳이로군.”
지드는 일부러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자네가 묻힐 장소 치고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거라고. 후후!”
순간 아르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과연 그럴까! 입만 나불대는 인간!”
그가 대검을 들고는 지드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홱! 붕!
엄청나게 무식한 검치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지드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쳐졌으나, 지드가 곧이곧대로 맞아 줄 리는 없었다.
아르의 대검은 이미 흑 기운이 가득했는지 검게 반짝이는 빛이 톡톡 튀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검을 휘둘러칠 때마다 검은 줄기가 길게 여운을 남겼고 그 기분 나쁜 빛에 닿는 나무와 수풀 심지어 바위마저 타면서 녹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지드는 가볍게 피하는 것 같지만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을 자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붕!
“헉!”
붕!
“아싸, 이번에도 피했다!”
세상에 그 누가 다크퍼스를 상대로 공격은커녕 방어동작만으로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말인가.
아르 역시 공격을 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심정이었는지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네 이놈,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텐가!”
지드가 뒤쪽 바위로 훌쩍 뛰어내리더니만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다소 거만한 자세로 외쳤다.
“그럼 나도 지금부터 공격해 볼까.”
“얼마든지 오너라. 네놈이 뭘 보여 줄지 기대가 되는군.”
지드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머금어지기 시작했다.
“기대가 된다고 했겠다.”
바로 그때였다.
주변에 산재해 있던 돌멩이들이 들썩거리는 것이 아닌가.
툭! 우두둑! 툭!
아르는 그런 현상을 감지하고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 막사 안에서 방패를 움직이는 그의 능력이 공력기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역시 그가 같은 기술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내뱉었다.
“공력기술 따위로 나를 어찌할 수 있다고 보는가.”
“한번 막아 보시지?”
“하하. 그 기술은 레온이 정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까짓 자식을 단번에 없애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하물며 너 따위가 사용하는 공력기술이라면 별 볼일 없을 텐데.”
“내 기술은 레온의 것과는 급수가 달라도 한참 다르지.”
“물론 그럴 테지. 크크, 조그만 돌멩이 조각들 몇 개 날려서 나를 위협하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는 짓이란 것을 알거라.”
“덩치에 비해서 말이 엄청 많은 작자로군. 어쨌든 한번 받아 보라고.”
지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 돌멩이들이 공중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하나 둘 아르에게 향했다.
슈슈슉! 파팟―
하지만 주먹만 한 자갈들이 아르의 몸에 닿기도 전에 흑색 기운의 반탄 강기에 의해서 맥없이 부서지는 것이었다.
우두둑!
스스스.
한 줌의 재로 흩날리기까지 했으니 지드의 공격은 초반부터 시시한 결과를 낳고 있었다.
아르는 다소 동정의 눈길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작 그게 다냐?”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거든.”
이번엔 돌멩이보다 큰 바위 조각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사람 얼굴 만하다고나 할까. 이에 아르는 제법이라는 듯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엔 조금 힘 좀 썼나 보군.”
슈슈슉! 파팟!
우두둑
하지만 바위 조각들 역시 아르의 군장에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으니 두 번째 공격 역시 무위로 끝이 날 것 같았다.
아르는 상황이 점점 재미있어진다는 듯 아예 누런 송곳 이빨을 드리우며 웃기 시작했다.
“크크, 이거 어쩌지. 아마도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 제법 큰 것들로 공격을 시도한 모양인데 말이야. 어쨌든 인간 치고는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군. 자, 그쯤에서 그만두고 목숨을 내놓는 것이 어떠냐.”
지드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주변 바위들이 들썩거렸고 아까보다 큰 바위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 크기가 사람 몸통만 하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그가 아르를 이곳으로 끌어 들인 이유는 바위들이 끝없이 산재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두둑!
이번만큼은 아르는 깜짝 놀라고 말았으니.
“뭐야!”
수십여 개 바위들이 자신을 향해 강력한 속도로 다가오자 쉬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여겼던가. 결국 그가 대검을 들어 일일이 막기 시작했다.
붕!
팍! 우두둑!
허공에서 바위들이 산산조각 나는 동안에 이번엔 숲 지대로부터 나무들이 송두리째 뽑힌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아르는 그 광경을 보고는 기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만 한 바위들에 이어 나무들마저 공격해 들어오니 갑자기 정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홱!
팍! 파파파팟!
그는 사방으로 날아오는 것들을 무차별하게 조각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동작에 서서히 숨을 헐떡였다.
“헉! 헉!”
그 와중에 곁눈질로 저편 바위에 서 있는 지드를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로 공력기술을 시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큰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인간이 이토록 큰 능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대뜸 들려오는 음성.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네. 이젠 내 공격이 마음에 드는가? 아니면 조금 더 강도를 높여 볼 생각인데 말이야.”
순간 사색이 되어 버린 아르의 표정.
“뭐라고! 강도를 더 높인다고?”
바로 그때 잔잔한 호수가 갑자기 파문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콸콸!
그리고는 갑작스레 물기둥이 무섭게 솟구쳐 올랐고 이내 아르를 향해 돌진 해 들어왔다.
홱! 홱! 홱! 홱!
워낙 빠른 속도인지라 물기둥은 순식간에 아르를 덮쳤고 상공 높이까지 끌어 올렸다.
“아악!”
곧이어 물기둥이 그를 뱉어냈고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쿵!
그 거대한 덩치가 바닥과 충돌하자 제법 큰 굉음이 들려왔다.
아르는 신체적으로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보였고 금세 신형을 차리려고 했지만 이어 큰 그림자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는 문뜩 위를 올려다보았다.
“헉!”
집채만 한 바위가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던가.
홱!
쿵!
“어이쿠.”
그는 반사동작으로 겨우 옆으로 피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악스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명색이 나카스니아 대륙의 다크퍼스 출신인 그로서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포와 두려움이랄까?
그 옛날 이리스가 타룬의 병기로 200여 명의 동료들을 학살한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흥분 상태는 극도로 달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인간이 어떻게 저런 힘을…….”
아르는 다시 신형을 일으키고는 대검을 잡았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표정이 완전히 경직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상대를 잘못 골랐던가. 그의 대검이 저절로 그의 손을 떠나더니만 허공에 둥둥 드는 것이었다.
“대검이!”
검은 방향을 바꾸어 오히려 아르의 목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으니,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헉!”
그리고 어느새 나타났는지 지드가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니던가.
홱!
순간 대검의 끝이 아르의 목덜미에 살짝 닿을 정도로 압박해 들어왔다.
지드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만 사색이 되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아르에게 말을 건넸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아아.”
아르는 말조차 제대로 있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으니 그만큼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목숨에는 미련이 있었던가.
“살려 줘!”
“살려 달라고?”
“제발 살려 주시오!”
“지금 나를 죽이러 온 너를 살려달고 떼를 쓰는 건가. 그나저나 한 가지 물어 봄세.”
“뭐든지 물어 보십시오.”
“테세우스가 너를 보냈더냐.”
“아닙니다. 그분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너를 소환할 수 있는 자는 테세우스밖에 없을 텐데? 그렇다면 누가 너를.”
“저기 어둠의 여신께서.”
지드는 다소 생소한 듯 되물었다.
“어둠의 여신이라니.”
아르는 헛말을 한 듯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는 강한 부정을 했다.
“아닙니다. 그분도 상관없이 나 혼자 결정한 사항입니다. 내가 독단으로 그대를 죽이러 온 것이란 말이오!”
갑작스레 당황해하는 아르, 후환이 두려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지드가 다시 물었다.
“어둠의 여신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얘기해 봐라.”
그러자 아르는 몹시 후회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한 것 자체가 지울 수 없는 불행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소. 어차피 그대가 나를 살려 준들 이대로 귀환한다면 그분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암흑의 고통스런 처단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에서…….”
그는 목에 닿아 있는 대검에 달려들었다.
푹!
“컥!”
풀썩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지드가 말릴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지드는 대체 그 어둠의 여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기에 이 괴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는지 이제는 그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의 여신이라니. 그건 또 뭐 하는 존재지.’
***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제2방어 지역의 바위 표면을 따듯하게 달구어 주고 있었다.
지난 번 적들의 다섯 개나 진격 통로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지 어느덧 보름여가 지났다.
당시 그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가.
적들은 아직까지 쥐죽은 듯 고요했고 도통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군단장 지노와 대원들, 특히 아레스는 각 방어 지역을 직접 순찰하며 적의 동태를 살폈지만 이렇다 할 공격 징조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모처럼만에 지노에 의해 군단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데요? 이거 답답해서 원, 그냥 우리가 병사들을 앞세워 쳐들어가 볼까요?”
비스크의 굵직한 음성이 회의 막사 안을 쩌렁쩌렁 울리자 지노가 대뜸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놈! 성질대로 밀고 나가서 전부다 전멸하려고 환장을 했냐!”
“그냥 답답한 김에 내뱉은 말이요. 그걸 곧이 들을 건 또 뭐 있소?”
“여기가 공식 석상이라는 것을 알면서 헛소리하는 건 뭐냐.”
“제발 우리들끼리 있을 때에는 공식이고 뭐고 그런 단어 좀 쓰지 맙시다. 진짜 정 떨어지려고 하니까요.”
“야, 이놈아!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 각 대대장급 지휘관들만 열 명이 넘는단 말이야. 눈깔이 달려 있으면 제대로 봐라.”
사실이 그랬다.
지노를 비롯한 대원들 이외에 제2군단을 이끌어 갈 지휘관들 역시 저마다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회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군단장과 부군단장의 말싸움에 동요를 하거나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은 없었다.
원래 저 둘은 군단 내에서 앙숙으로 유명해졌고 늘 만나기만 하면 다투니 그저 그러려니 하는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결국 2호 게리가 그 둘을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형님들. 제발 그만들 하시죠. 이젠 지겹지도 않소. 나 참 애들도 아니고 대체 왜 그런답니까.”
그의 만류에 둘은 잠시 진정을 했고 회의는 원래의 차분한 분위기로 이어 갔다. 잠시 후 지노가 막내에게 물었다.
“아레스야. 대체 놈들의 꿍꿍 속이 뭔지 네 생각을 한번 말해 봐라.”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추측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나 해라.”
“…….”
결국 침묵을 지키고 마는 아레스, 지노 역시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그날 회의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대로 막을 내렸으니 각 지휘관들은 저마다 답답한 심정으로 회의 막사를 떠나야만 했다.
***
쨍!
한여름의 뙤약볕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레스는 진영의 뒤쪽 바위 언덕 위에 올라가서는 나무 그늘 밑에서 대(大)자로 누워 쉬고 있었다.
그는 잠시 두 팔을 머리 뒤로 하더니만 두 눈을 감고는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있었으니 뭔가에 대해 골몰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뭔 일을 꾸미고 있기에 이토록 조용한 거지.’
사실 그는 온통 적의 진격 작전에 대해서 이만저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 승리를 거둘 때만 해도 모든 세상이 내 것이라도 된 것처럼 기뻐 날뛰었지만 점차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두 번째 진격 공격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보름여 동안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필시 그가 모르는 전략을 준비 중에 있을 확신이 크다는 얘기인데, 대체 그게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도록 갑갑할 지경이었다.
그는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켜 나무 밑동구리에 기대고 앉았다.
휘잉―
한줄기 훈풍이 부드럽게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무심코 시퍼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진정 시키려 했다.
파란 공간에 하얀 뭉게구름이 예쁘게 피워 오르고 있었다. 지금이 전쟁 중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매료되어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낮잠을 자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로부터인가.
하얀 눈발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저건 뭐지.”
아레스의 눈빛이 반짝였고 그것들에 더욱 집중을 했다. 마치 눈가루처럼 솔솔 떠다니는 가루들, 아마 지금이 여름이 아니고 겨울이었다면 눈으로 착각을 했을 게 틀림없었다.
아레스는 손을 펴서 직접 그 하얀 가루를 잡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꽃가루와 비슷해 보였다. 직접 손으로 비벼 보기까지 했는데 끈적한 느낌이랄까.
결국 그는 그것을 코에 대고 냄새까지 맡아 보기로 하였다.
“친숙한 향이 나는 거 같은데…….”
그는 여러 번 냄새를 맡더니만 드디어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송진 냄새가 분명해.”
그렇다면 누가 송진 가루를 말려서 지금처럼 가루를 내어 하늘로 뿌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가 다시 하늘을 올려보니 하얀 가루들이 더욱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왠지 불안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래 진영을 보니 공중에 연들이 떠다니면서 하얀 가루를 마구 뿌리고 있는 것이었다.
진영의 병사들 역시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저마다 바깥으로 나와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것들은!”
“저기 연들로부터 나오는 것 같은데.”
“에구. 살에 닿으니까 무척 끈적거리네.”
아레스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굳어졌다.
“연들이 바람에 날려 와 이곳 진영 한복판에 말린 송진 가루들을 뿌린다는 것은…….”
그는 뭔가 눈치를 차렸는지 말하다 말고 사색이 되어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쳐 대기 시작했으니.
“모두 가루에 손대지 마라! 그리고 막사나 목재 부근으로부터 당장 떨어져!”
진영으로 내려오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는 아레스의 행동에 장교들과 병사들은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아레스는 사령부 건물 쪽으로 다가가서는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형님들, 당장 밖으로 나오세요. 당장요!”
덜컹!
지노와 대원들은 도대체 뭔 일인가 하고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소란이냐. 그리고 뭔 가루가 이렇게 날리는 거지?”
“당장 이쪽 마당으로 오라니까요!”
“뭔 일이라도 생겼냐. 왜 시끄럽게 구는 거냐?”
바로 그때 요새 맞은 편 산등성이로부터 섬광이 이는 듯 했고 하나의 불빛이 점점 크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레스가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 하고는 소리쳤다.
“다들 건물이나 막사와 떨어져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엎드려!”
파파파팟!
강력한 파공음을 내며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불빛, 아레스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아아―!”
(하류검사 8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