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럭―
펄럭―
제3군단 사령부 회의 막사의 깃발들이 강풍에 찢겨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기운이 흐르는 회의 분위기.
오늘도 역시나 총작전 참모 하키리우스가 제일 먼저 서두를 꺼냈다.
“이후의 전투 상황은, 한마디로 나라의 운명이 걸린 풍전등화와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제3군단 진영은 왕국의 마지막 저지선으로서 사활을 걸고 적들을 막아야 할 판국에 놓여 있음을 다들 상기하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미 적국의 주력 부대들이 제이 방어선까지 함락한 상태입니다. 금세 이곳까지 무서운 기세로 몰아닥칠 것도 불 보듯 자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참석한 분들은 모두들 군단 내 최고 수뇌부들과 참모들입니다. 이 자리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 마련한 것입니다. 각자 좋은 의견이 있다면 주저 말고 얘기하기 바랍니다.”
하키리우스가 말을 끝내자 장내는 잠시 숙연해졌다. 다소 위축된 분위기라고나 할까.
“…….”
“…….”
예상대로 침묵이 길어졌다. 결국 하키리우스가 다시 말문을 열고 말았다.
“아무도 없소?”
“…….”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상석에 앉아 있던 지드와 그 옆에 아라퀘스 역시 별다른 방안을 찾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로가 계획한 전술을 공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내 의견을 말하겠소.”
이에 조용했던 회의장이 다시 활기를 찾는 것 같았다.
그만큼 하키리우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한다고나 할까.
“아키아의 군단과 버젓이 눈앞에 대치된 상황에서 우리 할 수 있는 일은 정면 대응보다는 다소 편법적인 전술을 세워야 함을 미리 말하겠습니다. 적들이 병력 규모 면에서 우리보다 무려 세 배나 많은 상황이니 방어선을 튼튼하게 구축한 채 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요. 바로, 이 상황에서 손자병법은 하나의 좋은 예를 제시하고 있소이다.”
그는 말하다 말고 미리 준비해 온 손자병법 양피지를 꺼내 들어 펼쳐 보이며 다시 말했다.
“적의 기세가 강하여 승산 없는 대치 상황에 있을 때에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수송 지원 부대를 격파하는 것입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임이 일었다.
마치 다들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양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송 부대 기습 작전이 그리 쉽게 먹힐 수 있을 까 하는 의문도 전체적으로 같은 생각인 것 같았는지 금세 표정들이 어두워졌다.
급기야 제2군단장 지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자, 다들 조용히 하고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지금 참모께서 좋은 안을 내놓으셨는데 내 생각을 말씀드리면 적의 수송 부대는 주력 군단과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충분한 물자와 식량을 확보한 상태이기에 굳이 그건 전술을 시행할 이유가 없을 것 같소.”
지노의 말에 하키리우스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물론 그와 같은 사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의미를 조금 오해 하신 것 같군요.”
“오해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수송부대가 아니라 그보다도 원천적인 본진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본진이라니. 거긴 이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강기슭이 아닌가.”
“대체 현재 대치 상황과 거기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맞는 얘기일세. 이곳이 뚫리면 끝장인데 거기까지 생각 할 겨를이 있을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할 판국인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들 소곤거리며 한마디씩 했다. 그때 하키리우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전쟁에 있어서 지원 물자란 끊임없이 수송되어야 할 아주 주요한 자원임을 강조하면서 제가 굳이 그곳을 목표로 삼는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시오. 설령 아키아의 주력 부대가 이곳을 함락시키고 우린 왕국의 성 안으로 퇴각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될지라도 그들은 또다시, 엄청난 지원물자와 식량이 필요하게 될 테고 그때가 되면 이미 초토화가 되고 없어진 강기슭의 본진으로부터 지원을 조달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아키아가 계속 진격을 할지 아니면 마지못해 후퇴를 할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
“…….”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키리우스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랬던가. 참모는 두어 단계 앞을 내다보고 얘기한 듯했으니 그제야 수궁이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으니 이번에는 국왕 지드가 직접 물었다.
“듣고 보니 아주 좋은 의견이라 생각은 됩니다만 과연 우리 병사들이 적들이 잔뜩 포진해 있는 그 먼 거리를 뚫고 지나간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 와중에 적의 침공이라도 받는다면 그 작전마저 실행도 하기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하키리우스가 빙그레 웃었다.
“누가 이 작전에 일반 부대의 병사들을 보낸다고 그랬습니까.”
“그럼 누구를 보낸단 말입니까?”
“속전속결의 기습 공격을 시행할 자들이 누군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속전속결이라면……?”
“아라퀘스의 기사단과 대자객 신전이 있잖습니까.”
그제야 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들이라면, 아주 빠른 시간 내에 험난한 산악 지형을 가로질러서 적의 본진을 초토화시키고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아키아가 공격을 서두르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겠지만요.”
“정말 기발한 생각입니다.”
“허허, 과찬의 말씀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인데…….”
지드 역시 다소 상기된 얼굴로 참모의 전술 계획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라면 아주 적격이겠죠.”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기사단장 아라퀘스와 대자객 신전 총관만 남아서 나와 상의 좀 했으면 좋겠소. 물론 국왕 전하께서도 함께 이번 작전에 대해 좋은 말씀을 나눠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의는 결국 하키리우스의 작전 계획을 드러내면서 막을 내렸다.
***
그날 저녁,
타다닥.
파파파팟!
협곡으로부터 절벽을 타고 능선 위쪽으로 오르는 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엄청난 빠른 속도와 민첩한 동작으로 등반하기도 어려울 만큼 비탈진 곳을 평지 달리듯 통과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대략 200여 명쯤 되었을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용모와 흑색 군장 차림새였는데, 그들 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50여 명만이 은빛 군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뒤에 있는 흑색 무리를 이끄는 듯 미끄러지듯 능선을 절묘하게 타며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맨 앞에는 대장으로 보이는 은빛 군장 사내와 흑색 군장 사내가 보였는데 그 둘은 마치 한 조가 된 것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 달리고 있었다.
타다닥.
파팟.
“이보시오. 기사단장.”
“왜 그러시오?”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소. 웬만하면 조금 늦추는 것도 괜찮을 텐데.”
그러자 단장이 짧게 대답했다.
“시간이 없소.”
“대체 그대의 기사단원들은 무슨 능력이 있기에 우리 대자객 신전의 일급 계열 자객들조차 쫓아가기가 벅찰 정도로 빠른 것이오? 나조차 힘들어 죽겠소이다.”
아라퀘스가 처음으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우린 특별한 체질들이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산악 도보는 그야말로 오랫동안 특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텐데…….”
“여하튼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대체 적으로 완만한 숲이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로시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이 둘은, 다름 아닌 피체 왕국의 기사단장 아라퀘스와 대자객 신전 총관 헤브론이었다.
하키리우스의 엄명을 받고 적국 강기슭에 위치한 본진을 치러 가기 위해, 형세가 험준한 지름길을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브론은, 그 자신과 수하들이 일급 자객임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원들의 산악 진격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에 따라가는 것조차 매우 벅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원래가 나카스니아 대륙의 역사 종족 출신들이 아닌가.
또한, 원천기술 소유자들로서 전투력 또한 대단한 경지에 도달해 있는 일종의 초인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열을 내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이유에는 지난번 부기사단장 키나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대한 복수심이 각자 마음속으로부터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 당장 그곳에 가서 분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다닥.
파파파팟!
힘차게 능선의 둔덕을 밟고 지나가는 존재들, 아직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 보였으니, 마치 새벽에 먹잇감을 찾으러 가는 흑표범들과도 같아 보였다.
그 이튿날 새벽녘.
무려 한나절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특별 기습 부대원들은 강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언덕 방위 지대 뒤에 숨어서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동이 터 오르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군요.”
“…….”
헤브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라퀘스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적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곳은, 큰 강줄기의 하류 지역이었다.
아키아의 운하 작업으로 팔라카스 제국으로부터 선단들이 오가며 모든 물자와 식량들을 실어 날랐으니 이곳이야말로 참모 말대로 적들의 보급이 진행되고 있는 원천이라 할 수 있었다.
이곳을 초토화시킨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했다.
헤브론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과연 우리가 이 임무를 무사히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다소 자신 없는 그의 말에 아라퀘스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그게 무슨 말이오?”
“보다시피 적들의 본진의 규모가 상당히 크지 않소. 아직 상당수의 병력이 남아 있고 말이오. 내가 보기에는 대략 수천 명으로 보이는데.”
“그래 봐야 물자를 나르는 지원 군단 병사들이 대부분이죠.”
“정규 복장을 한 병사들도 보이는데…….”
“그들 역시 고작해야 천 명밖에 되지 않소이다.”
“천 명은 너무 많은 게 아니오? 그것도 제국의 정예인데.”
아라퀘스가 다소 한삼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자객 신전이 원래 그리 겁이 많은 살수 집단이었소?”
그러자, 헤브론이 불끈했다.
“겁이 많다니요! 무슨 말을!”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나는 단지 조금이라도 더 신중을 기하자는 거요. 사실 우리 임무는 주로 암살 테러를 위해 몰래 잠입해서 적장의 특정 대상들을 노리는 임무가 주목적이었소이다. 헌데, 무슨 방법으로 저곳을 박살내자는 거요.”
“오늘은 그 누구를 몰래 암살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걱정 마시오.”
“그렇다면 진짜 이대로 밀고 들어갈 작정이오?”
아라퀘스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정면 돌파요.”
헤브론이 깜짝 놀라 외쳤다.
“정면 돌파!”
“아직 새벽녘이니 그냥 밀고 내려가서 닥치는 대로 공격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요. 보다시피 저들은 우리가 기습해 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고 경비병들조차 미약하게 서 있지 않소. 게다가 막사 주변이 조용한 것으로 보아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이니까 일단 궁수들에게 불화살을 날리게 하여 막사와 건물부터 불을 지르고 그 혼란한 틈을 타서 투입한다면 이번 임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
헤브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아라퀘스와 그의 단원들이 복수심에 불타올라 공격을 서두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번 기습 작전은 예상외로 쉽게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인원이 200여 명에 불과하다지만 그야말로 피체 왕국에서 최강의 전사들만 뽑아서 온 정예들이 아니던가.
한 사람이 능히 일당백의 전과를 올릴 수 있는 아주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
‘흠…….’
결국 헤브론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리 합시다.”
“생각 잘했소.”
“날이 밝기 전에 지금 당장 공격합시다.”
“네, 어차피 이판사판이니 그렇게 합시다.”
잠시 후, 궁수들이 먼저 아래쪽으로 내려가 화살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헤브론의 명령으로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발사!”
홱! 홱! 홱! 홱!
파파파팟.
어두운 공간에 대략 100여 개의 빛줄기들이 하공을 가로 지르며 강력한 파공음을 냈다.
대자객들이 발사한 화살이기에 일반 궁수들보다는 그 사거리가 2배 이상은 되었다.
슈우욱―
퍽퍽.
화르르.
화르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으로 된 막사에 불화살이 박히자마자 일제히 타 올랐다. 불길은 순식간에 앞뒤 건물에 옮겨 붙었고 일대 화염 바다로 번지고 있었다.
그제야 경비병들과 잠에서 깨어난 병사들이 허둥거리며 소리를 쳤다.
“불이다!”
“당장 물을 날라 꺼라!”
하지만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으니 정작 지옥의 손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 순간 서쪽 방어 진영으로부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으니.
“적이다!”
“욱!”
외친 자의 비명이 크게 들려오고 나서야 병사들은 자신들이 기습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들의 공격이다!”
“당장 무기를 들고 대항해라.”
하지만 이미 무기 창고와 막사가 불타고 있었으니 그마저 챙기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아악! 내 몸에 불이 붙었어!”
“내 무기 어디 있지.”
“나 불부터 꺼 줘!”
“빌어먹을! 대체 놈들은 어디 있는 거야.”
“여, 여긴 후방 지역인데 어떻게 적들이 나타날 수 있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무기부터 챙기라니까!”
바로 그때였다.
삭. 슥―
“억!”
“욱!”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던가. 죽음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병사들을 덮치며 피를 토하게 했으니 말이다.
홱!
“컥!”
“살려 줘!”
팍!
“우우!”
아라퀘스와 단원들 그리고 헤브론과 대자객들은 그야말로 도축업자들이 가축들을 몰살하는 느낌으로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마구 검 날을 휘둘러 치며 피 보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제거하라!”
헤브론의 명령에 냉혹한 살수들은 여기저기에서 살벌한 기세를 팍팍 뿜어내고 있었다.
아라퀘스와 단원들 역시 각자 눈에 독기를 품고는 병사들을 마구 학살하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지옥의 악마들이 따로 없었다.
파파파팟!
“아악.”
파팟!
“컥!”
이들은 월등한 전투 실력 덕분인지 한번 휘둘러 치면 보통 네다섯 명이 나가 떨어졌다
꽈당!
데굴데굴.
한마디로 인정사정없었다.
화르르. 화르르―
불길 속에서 이미 불붙은 자들 역시 칼날을 피할 새도 없이 몸통 중에 사지 한 군데가 절단되어 고스란히 타들어 갔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있을까.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팍.
“아악!”
“살려 줘!”
한편, 아라퀘스는 정신없이 칼날을 휘두르는 마당에 오른편 막사 옆에 낯이 익은 자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뭐야.”
놀랍게도 지난번에 에르가니아와 함께 실종이 된 부군단장 카르발디가 있었다. 그는 몇 번을 자세하게 눈여겨봤지만 분명 자신의 선배이자 상관이었던 그가 틀림없었다.
“아. 선배가 맞는 것 같은데…….”
헌데, 그는 적들과 한편이 되어 무서운 기세로 대항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흑검술로 아군인 대자객들을 가차 없이 베고 또 베었으니 아라퀘스는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리 회전이 빠른 그는 순간 깨달았다.
“그렇다면 선배가 배신을…….”
거기까지 생각하자 화가 벌컥 났다.
“이런 빌어먹을 작자 같으니라고!”
아라퀘스는 검을 들어 다짜고짜 카르발디에게 달려갔다.
타다닥.
“이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
마침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카르발디는 아라퀘스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한 얼굴이었다.
“헉! 저, 저놈이 갑자지 왜……!”
아라퀘스가 달려옴과 동시에 공중으로 붕 떠서 원천기술을 시전했다.
홱!
파파파팟.
“제길!”
팍!
강력한 파공음을 일으키면 공격해 들어오는 아라퀘스의 일검에 카르발디가 가까스로 막아 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아라퀘스! 네 녀석이 여기는 웬일이냐.”
“웬일이냐니! 이 배신자 놈아, 바로 널 죽이러 왔다!”
“잠깐! 일단 얘기부터 하고 보자!”
“얘기는 무슨 얼어 죽을! 당장 어디 한 군데라도 사지 절단하고 들어 볼 것이다.”
홱!
파팟
“이런 빌어먹을!”
챙!
“부군단장이란 자가 할 짓이 없어 배신을 하고는 적진에서 아군을 상대로 대항을 하는 건가!”
전투력에서 한참 밀리는 그로서는 궁색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만 했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유 좋아하시네.”
붕!
“헉!”
탁!
파파파팟!
“아이쿠!”
연속적인 공격에 뒤로 밀리는 카르발디, 그 역시 그대로 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냅다 기습 공격을 시도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 너 죽고 나 죽자.”
홱! 붕! 채애앵!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가. 오히려 아라퀘스의 검이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삭―
“욱!”
꽈당.
어깨를 베이고 그 충격으로 뒤로 벌렁 자빠지는 카르발디. 그 틈을 이용해서 아라퀘스가 다가오자 그가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후후. 설마 네 선배를 어찌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라퀘스는 정말 궁금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부터 물어보는 것이 순서였으리라.
“에르가니아 님은 어떻게 했나.”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그녀 역시 여기 있지.”
아라퀘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군단장님이 여기 있다고!”
“테세우스가 데리고 있으니까 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후후.”
“왜 그분이?”
“그야 그녀도 나처럼 팔라카스 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려고 전향했지.”
순간 아라퀘스가 경악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어!”
카르발디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역시나 저 순진한 녀석은 거짓말에도 당장 심정이 흔들리니 말이다.
도망칠 기회는 이때였던가!
“에잇!”
홱!
“아악!”
카르발디가 손으로 흙 한 줌을 쥐어 그의 눈에다 확 뿌렸고 먼지 속으로 냅다 도망쳐 버렸다.
“하하하. 너도 승산 없는 피체 왕국 따위를 위해 일하지 말도 나처럼 전향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미친놈이!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어디 있나.”
“너 같으면 나 잡아 보쇼 하고 나타나겠냐! 아무튼 나중에 두고 보자. 그럼.”
“당장 거기 서지 못해!”
“…….”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 이미 사라지고 만 것이 분명했다.
아라퀘스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으니 방금 전 카르발디가 말한 대로 에르가니아 님마저 진짜 배신을 했단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 이건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