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아 오자 새벽 전투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미 불타 없어진 잔해와 나 뒹구는 시체들, 서먼 강기슭의 본진 기습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비록, 팔라카스 제국의 주력 군단 전초 기지라지만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으니 그 광경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비축해 두었던 식량과 물자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수천 명의 잔류 병력마저 거의 몰살당했으니 이는 피체 왕국에 있어서 대승전보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아라퀘스와 헤브론 그리고 특별 기습 부대원들 모두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자, 이제 모두 돌아가지요.”
아라퀘스의 말에 헤브론이 아직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작전은 대성공이오.”
“운이 좋았을 뿐이요. 돌아갈 길도 만만치 않으니 빨리 서두릅시다.”
“물론이죠.”
곧이어, 일사천리 초토화 지역을 빠져나가는 대원들, 그들은 왔던 대로 돌아갈 때에도 신속한 동작으로 산악 지형 쪽으로 달렸다.
타다닥.
파파파팟―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강 옆 협곡 능선 정상까지 올라간 그들은 몸이 휘날릴 정도로 귀환을 서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느 대원이 오른쪽 강을 내려다보더니 무엇을 발견했는지 외쳤다.
“저기 좀 보세요.”
선두를 달리던 아라퀘스와 헤브론이 발길을 멈추고 일제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으니.
“세상에 저게 뭐지?”
“선단 같은데.”
“와우, 새까맣게 밀려오네.”
두 지휘관은 심장이 철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강 전체를 가득 메운 대규모 선단이랄까.
대략 수백 척은 넘어 보였다.
대체 저 많은 배들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아라퀘스의 얼굴이 잔뜩 굳어지고 말았다.
“지원군 같은데?”
“지원군이라니요!”
“팔라카스 제국으로부터 온 지원군 말이오.”
아라퀘스 말에 헤브론 역시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설마 저 많은 배에 병력이…….”
“어림잡아 수만 명은 되어 보입니다.”
“수만 명이라고요!”
참으로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진 기습 작전 대성공을 거두고 얼마 지났다고 금세 절망에 가까운 신음을 흘려야만 하는가.
현재, 아키아의 주력 군단만 하더라도 상당수에 이르는 데 지원 군단마저 합류한다면 정말이지 심장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당장 가서 보고를 드려야 하겠소.”
“아…… 어째 이런 일이.”
이 둘은, 눈앞의 현실에 망연자실했으며 지난 새벽의 전투 승리에 대한 기쁨도 금방 사라지는 듯 보였다.
같은 시각.
수많은 선단 가운데에도 가장 커다란 뱃머리에는 금색 토가를 착용한 한 젊은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팔라카스 제국의 황제였다.
그 옆에는 한 늙은 대신이 서 있었는데 저 멀리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피워 오르는 곳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대신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폐하, 아무래도……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기습 공격이라니. 빌어먹을 하필 우리가 도착할 때, 저와 같은 꼴을 당하다니. 대체 집정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아마도 주력 군단을 이끌고 적의 방어선 함락을 주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후방 본진에 대한 방어는 철저히 해야 할 거 아닌가.”
“허를 찔린 것 같습니다.”
“집정관 옆에는 아키아 같은 유능한 작전 참모가 있거늘 저기 하나 방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송, 송구스럽습니다.”
“자네가 송구스러울 것까지 없다. 어차피 때마침 우리가 왔으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오만 명의 병력이 합류한다면 피체 왕국을 소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당장 강기슭에 배를 대고 병력을 구성해서 집정관에게 가 보세나.”
“네, 알겠습니다.”
황제는 전쟁이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그 자신이 원로원과 의논하여 무려 세 개 군단을 이끌고 직접 파병 나왔던 것이다.
지난 번, 피체 왕국의 국왕 지드로부터 당했던 수모를 수백 수천 배 돌려주려고 말이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뭐라 중얼 거렸다.
“어차피 전쟁이란 너무 쉽게 끝나 버리면 재미없을 테니까 오히려 잘된 일이야. 그래도 우리 전초 기지가 초토화된 광경을 보니 기분 더럽게 나쁘군.”
잠시 후, 수백 척의 배들이 강기슭에 닿았고 정예 병사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구 쏟아지는 병력들, 그들은 원래 다른 영토에서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군대인데 황제가 모두 거두어 들여 직접 인솔하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
그로부터 보름여 후,
집정관 카르세크는 황제와 그의 군단을 맞이하며 몹시 당황해 하고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려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제가 이곳 전방 기지까지 합류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황제를 맞이했다.
“어인 일로 여기까지…….”
“숙부께서 고전한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내 몸소 여기까지 왔소.”
“고, 고전이라니요.”
황제가 퉁명한 반응을 보였다.
“조그만 왕국 하나 함락시키는 데 꽤나 힘들어 보인단 말입니다.”
“저기 그게 말이죠. 피체 왕국이라는 데가 보통이 아니라서.”
“숙부님 정말 실망입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시는 건지요.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황제 체면에 군단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지난번에 당한 수모 때문이라도 난 반드시 피체 왕국을 철저히 말살시켜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남기지 않고 싹 쓸어 버릴 작정입니다.”
황제의 강경한 말에 카르세크는 당혹스런 태도를 보였다.
“그, 그러시다면.”
“그나저나 전방부터 살펴봅시다. 대체 어디까지 진격 해 놓은 상황인 거요?”
“저기 이쪽으로 오시죠. 가면서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집정관이 황제와 함께 망루 쪽으로 가자 뒤에 따르던 아키아와 레온 그리고 테세우스 역시 매우 긴장어린 분위기들이었다.
잠시 후, 카르세크의 설명을 들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적의 제2방어선에 해당 되는 영토로서 저 앞에 보이는 산등성이 두 개 봉우리가 마지막 방어선입니다. 저곳만 진격하면 우린 곧바로 수도 성문으로 치달아 공성전을 벌일 수가 있습니다.”
황제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눈빛을 불태웠다.
“공성전이라…….”
“물론 공성전이라면 우리 팔라카스 제국의 전유물이 아니옵니까. 아마도 반나절 만에 적의 심장부를 거머쥘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작전 참모가 전술을 짜내고 있습니다.”
순간, 황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전술은 무슨 전술! 지금 당장 참모를 부르시오.”
“참모라니요.”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 보기 위해서이오.”
마침 뒤에서 젊은 청년이 재빨리 모습을 드러내어 황제 앞에서 예의를 표했다.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대령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다소 흥미로운 눈길로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네가 참모인가?”
“예, 폐하. 총작전 참모 아키아라 합니다.”
“생각보다 젊군.”
“송구스럽습니다.”
“그나저나 본론으로 들어감세나.”
“아, 네. 알겠사옵니다.”
“현재, 아군 병력과 저들의 병력 차이부터 말해 보게나.”
“황제 폐하의 원군을 합쳐서 아군의 병력은 구만에 이릅니다. 반면 저들은 이만여 명으로 추정되오니 거의 다섯 배 차이가 나옵니다.”
“그 정도나 차이가 난다면 전술이고 나발이고 뭐 볼 것 있는가.”
“무슨 말씀이온지.”
“허허, 총작전 참모라는 자가 이래서야…… 숫자로 밀어붙이자 이 말일세.”
“그래도 아군의 희생을 줄이려면 전술을…….”
“그만두게! 당장 진격 명령을 내릴 것이니 자네가 알아서 병력 구성을 하고 당장 서두르게나.”
“…….”
아키아가 다소 당혹스러워 하자 바로 옆에 있던 카르세크가 눈짓을 주었다.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는 아키아.
“네, 폐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진작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그때였다.
황제는 뒤편으로 고개를 돌리더니만 누구를 쳐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대상은, 지난번 황궁 경비 총책임을 맡고 있던 레온이었다. 당시 지드에게 수모를 겪은 이유가 바로 그가 경비를 소홀해서 사건이 일어났음을 아직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가.
그가 신경질적인 투로 카르세크에게 말했다.
“레온이 왜 여기 있는 거요!”
그러자 집정관이 몹시 당황스런 기색을 보였다.
“저, 저기 그게 말이죠.”
“내 분명 저자를 직위 해제하고 멀리 내쫓으라 했건만.”
“이, 이제는 충분히 반성한 것으로 보이기에…….”
“반성은 모슨 반성! 내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울분을 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나 있소!”
“폐하! 이런 말씀드리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레온은 우리 군에 필요한 인재 중 인재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팔라카스 제국 역사상 최강의 무인으로서 바로 지금의 전쟁 상황에서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옵니다.”
“사실 그건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바로 그때였다. 레온이 재빨리 황제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털썩.
“폐하, 신 레온, 죽을죄를 졌습니다.”
그가 직접 와서 사죄를 올렸지만 황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죽든지.”
레온은 이 상황에서 절박한 심정을 느꼈고 연기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충성을 다하여 제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오니 제발 선처를 바랍니다. 흑!”
울먹이는 소리, 정말이지 남들이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로 그 큰 덩치의 사내가 애처럼 떼를 부리는 듯 보였다.
레온 그 자신도 바로 옆에서 테세우스가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은 지난 10년 동안, 정말이지 물불 가리지 않고 이 정도 위치에 올랐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 내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가장 하기 싫은 행동을 할 필요는 있는 법이었다.
“폐하,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흑.”
“…….”
황제는 레온이 절박하게 나오자 막상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레온의 행동을 좀 더 지켜보았다.
“소신 역시 당시의 일로 인해 백의종군하면서 피체 왕국의 왕, 지드라는 놈이 어찌나 원망스러운지 이제나저제나 복수의 칼날을 갈고 또 갈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옵니다. 제발 한 번 더 지켜봐 주십시오.”
“흠.”
“제발, 청원드리옵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그 자식에게 빚을 갚아 줘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군.”
황제의 말이 약간 수그러드는 기색이 보이자 레온은 반색을 하며 황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남아 있다 뿐이겠습니까, 폐하.”
“좋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까 내 너를 한 번 더 믿어 보도록 하지.”
레온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바닥에 머리를 여러 번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이번엔 황제가 레온 뒤에 서 있는 테세우스를 쳐다보고는 관심을 가지지 시작했다.
“원로원파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러자 카르세크가 재빨리 말문을 열었다.
“현 시점에서 무척 필요한 인재이기에 제가 직접 등용을 했습니다.”
“뭐, 숙부께서 하신 일이라면 제가 관여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기야 레온 하나로 부족할 테니 그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닌 것 같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편, 레온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내심 심장이 터질 정도로 분노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하필이면 지금 이 자리에서 테세우스 자식 얘기가 나올게 뭐란 말인지.
요즘은 그와 비교 당하는 그 자체가 고통이라면 무척 큰 고통이었다.
***
그날 오후.
황제의 명으로 진격을 하게 된 병사들은 대규모 병력답게 산 아래를 가득 메우며 엄청난 함성 소리와 기세로 무작정 제3방어선 기지를 밀어 닥치듯 들어갔다.
와와―
와와―
헌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가.
선발진의 병사들은 그토록 고함을 지르며 전력 질주를 했건만 점점 고지에 오를수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지금쯤이며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화살에, 적들의 고함이 천지를 울려야 하건만, 너무나도 조용했던 것이다.
“뭐야!”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전부 도망갔나.”
병사들이 고지 위 요새의 담벼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짜로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적들은 이곳을 버리고 총퇴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뒤늦게 도착한 총수뇌부들 역시 어안이 벙벙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황제에게 있어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공격을 한 터였기에 허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황제의 투덜거림에 카르세크 역시 다소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긴 놈들의 꽤 중요한 방어선 일진데요.”
“그러니까 지금 적들이 방어선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이겁니까?”
“보시다시피…….”
그때, 뒤에서 나서는 나자 있었으니 바로 참모 아키아였다.
그는 일단 황제에게 예를 표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들이 이곳을 버리고 수도 성으로 후퇴했어야 할 이유는 바로 황제 폐하의 병력이 합류한 그 시점이라 추정되옵니다.”
“뭐라.”
“이곳 방어선은 능선 위에 세워진 보잘것없는 요새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자기들 병력의 다섯 배에 달하는 아군의 병력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곧 자멸을 뜻하는 거겠지요.”
“그렇다고 모두 도망을 쳤다 그 말인가.”
“이 보 전진을 위해서 일 보 후퇴한 격이라 보시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수도 성에 남은 모든 병력을 집결해서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겠지. 지금이라도 당장 밀고 들어간다면 그곳 역시 쉽게 함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
황제의 말에 아키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황제 폐하,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니!”
“그들이 수도 성으로 후퇴했다는 의미는 공성전에서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해석으로 받아들이셔야 할 것입니다.”
“공성전이라…….”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오늘과 같은 날을 대비해서 성을 매우 높고 견고하게 지었음은 물론이고 병사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마저 합세하여 방어에 동참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군의 병력이 그들의 다섯 배가 넘는다 할지라도 성을 방비로 삼는 적들과 대적을 하게 된다면 백중지세가 될 것이고 결국 함락하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황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대는 참모라면서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는군. 그렇다면 결국 이대로 상황을 두고 보면서 시간만 낭비하자 그건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부터 공성전에 대비해서 철저한 준비를 하자는 것이 소신의 의견이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아시다시피 공성전은 팔라카스 제국의 전유물로서 지금까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신 역시 최선을 다해 공성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여 성을 함락시킬 것입니다.”
“공성 준비 기간은 대략 얼마라 예상하는가.”
“적어도 한 달은 잡으셔야 합니다.”
“한 달이라니! 너무 길지 않은가.”
“각종 공성에 필요한 투석기와 파괴기 및 여타 전술에 필요한 기기들을 제작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 생각드옵니다.”
“이런 젠장! 이곳에 오자마자 또 쉬게 생겼으니.”
이번엔 카르세크가 직접 나서서 황제의 답답함을 달랬다.
“무엇이 그리 급하십니까. 일단 천천히 쉬시면서 연회를 즐기시는 게 어떨지요. 이렇게 야외에서 자연을 보며 만찬을 하는 것 역시 황궁하고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황제가 모처럼 만에 미소를 드리웠다.
“후후, 그 말이 참이라면 좋겠는데.”
“물론이고말고요.”
“하기야 숙부가 이곳에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구려.”
“감사합니다, 폐하.”
“자, 그럼 오늘 저녁 당장 연회를 준비하도록 하시오. 어차피 공성 준비야 아랫것들이 하니까 우리는 그때까지 놀면서 기다리면 그만이겠지요.”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황제나 집정관이나 거기서 거기였던가.
전쟁을 함해 있어서 계획 수립이나 여타 준비에 신경을 쏟는 것보다 일단 어떻게 하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더욱 치중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들에겐 아키아가 있었으니 공성 준비의 모든 것은 그의 몫이 될 것이다.
***
한편, 제3방어선을 버리고 수도 성으로 퇴각하는 지드는 침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아라퀘스 역시 같은 기분이었는지 많은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만, 하키리우스만이 덤덤하게 말고삐를 잡고 앞만 보고 가고 있었으니 급기야 지드가 그에게 다가가서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정녕 이곳을 이대로 저들에게 내주고 가야만 한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음, 그것도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말이오.”
“황제의 군단의 합류한 이상 더 이상은 산악 국지전이 아닙니다. 그들은 십중팔구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앞세워 총진군 명령을 내릴 것이고 우리는 그대로 뚫릴 것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제3방어선은 임시방편으로 지어진 작은 요새 일뿐 난공불락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도 성은 애초부터 적의 침공에 대비해서 지어졌기에 그곳에서 적을 맞이하는 것이 나은 판단이라 사료되옵니다.”
“…….”
지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그저 말고삐만을 세게 움켜쥘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