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체 왕국의 왕궁 접견실에는 국왕 지드와 총작전 참모 하키리우스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방비는 아무런 이상이 없겠지요.”
지드의 말에 참모가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상에 완벽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 성의 방비는 철저하게 보완하기를 수십 번은 넘게 했으니 지국의 주력 군단이 총공격을 해 올지라도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떡하든 버텨 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뒤로 물러 날 곳은 더 이상 없으니 말이오.”
“이 한 몸 다 바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쉬운 싸움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황제의 군대마저 합류를 했으니 적의 병력 규모가 어림잡아 십만 대군은 되지 않겠소? 만일 참모께서 이 성을 세울 때 공성전을 대비하여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우린 벌써 큰일이 났을 겁니다. 성의 앞쪽은 비탈진 곳으로 적이 진격하기가 수월치 않고 그 앞에 흐르는 강 때문에 사다리 대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수도 뒤쪽에는 깎아지를 듯 높고 높은 절벽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충분히 지탱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저들의 지원 물자와 식량이 떨어지는 시점까지만 버티어 준다면 이번 공성전은 우리에게 승산이 올 가능성 역시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키리우스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야 된다면 좋겠지만,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는 법입니다.”
“변수라니요.”
“바로 아키아가 그 변수입니다.”
지드가 시무룩했다.
“그 작자가 있었다는 것을 깜빡했군요.”
“사실 아키아의 전공이 공성전으로서 지금까지 그의 전략으로 난공불락이었던 성들이 수십 개나 함락이 되었던 전적을 가진 아주 무서운 자입니다. 아마 지금쯤 이곳의 지리적 환경과 여타 제반 시설 등을 세세하게 살펴보고 나름대로 각각 기상천외한 공성 기기들을 제작하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기상천외한 공성 기기라니요?”
“일찍이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로서 그만의 천재적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랄까요.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한 달 후면 그의 창의성으로 만들어진 기기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잠시 침묵을 지키는 지드, 대체 그 아키아라는 인물의 능력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하필 그자가 팔라카스 제국으로 망명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노을이 서산으로 질 무렵, 지드는 테라스에 나와서 물끄러미 그곳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비통한 심정이었다.
지난번 특별 임무를 마치고 돌아 왔던 아라퀘스로부터 전해 들은 에르가니아의 소식,
정녕 그녀가 적국으로 전향을 했단 말인지. 그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그녀가 그렇게까지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아, 에르가니아. 대체…….’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괴로워했다.
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똑똑.
“…….”
대답이 없자 다시 들려왔다.
똑똑.
“저 아카시안이에요.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요?”
“들어오시오.”
잠시 후 그녀가 거실을 지나서 지드가 있는 테라스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시안은 다소 헝클어져 있는 지드의 머리칼을 보고는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이긴…….”
“힘이 없어 보여요.”
“아무 일 아니오. 그나저나 여기는 웬일이오?”
평소와는 다소 퉁명스런 음성에 아카시안이 당황해 하였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소.”
“저, 저기…….”
“부탁이오.”
아카시안은 내심 슬픈 감정이 들었지만 그는 연인이기에 앞서 국왕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으니 용기를 내어 겨우 물었다.
“저, 하나만 물어 봐도 괜찮을까요.”
“뭐요?”
“제3군단장 에르가니아 님이 적국으로 전향을 했다는 데 그게 사실인지요.”
지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그건 내가 누구보다도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니 어디 가서 그런 헛소문은 믿지 마시오.”
“…….”
당혹한 표정의 아카시안, 설마하니 지드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정말 몰랐었다.
“죄송해요.”
지드 역시 자신의 말투가 너무 과하다 싶었는지 사과했다.
“아니오, 내가 쓸데없이 언성을 높였나 보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걸 물어본 것 같군요. 두 분이 그런 사이인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
“…….”
이 둘은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
봄날의 아른거리는 아지랑이가 성벽 너머 들판으로부터 새록새록 피워 오르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새싹들 덕분인지 어느덧 초원의 평원을 예감하는 듯했다.
지금이 전쟁 기간이 아니라면 벌써부터 아낙네들은 아들딸과 함께 지난겨울을 버티어 활짝 핀 봄꽃과 열매들을 따느라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하늘만 보자면 망루 위쪽으로 피워 오르는 뭉게구름에 파란 공간이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드넓게 퍼져 있었으니 병사들은 저마다 성루 난간에 기대어 나릿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 피체 왕국의 수도 성 중앙 관문에는 지난번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제2군단 지노와 대원들이 지휘관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류검사로 동고동락해 온 터였기에 서로 간에 스스럼이 없었고 그 다른 진영보다도 시끄럽고 때로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와우! 날씨 한번 기가 막히는군.”
“이런 날에 갑옷이고 무기고 다 팽개치고 따뜻한 햇살이 달구어진 바위 위에서 낮잠 한번 자면 정말 죽여 줄 텐데.”
부군단장 비스크의 말에 지노가 은근히 심통을 부렸다.
“그래! 아예 자다가 뒈져 버리지 그러냐.”
“아이고! 형님 왜 또 그러십니까. 그놈의 심통은 시도 때도 없이 항상 나온답니까? 쳇! 정말 무슨 말도 못하네!”
“이놈아, 명색이 부군단장이라는 놈이 적과의 대치를 앞두고 그게 부하들 앞에서 할 소리냐? 지금 상황이 눈을 까뒤집고 적의 동태를 살펴도 모자랄까 하는 마당인데 말이여.”
그러자 비스크가 성루 너머 들판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뭐, 아직까진 별 조짐이 없어 보이는데요. 보다시피 잠잠하잖아요. 그리고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니 이렇게 잡담이나 하면서 노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하여간 저놈 좀 보게나. 마치 지가 일개 사병인 줄 알고 있네 그려.”
“차라리 그냥 병사로 지냈으면 좋겠군요.”
“뭣이라!”
“매일 형님 잔소리에 들볶이니 그게 낫겠다 그 말이오!”
“너 말 한번 잘했다. 그래 지금 당장 병사로 강등시켜 줄 테니 백의종군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내가 미쳤소! 그냥 농담 한번 해 본 거 가지고 또 열 내기는.”
“네 이놈! 지금 그게 상관한테 할 소리냐!”
“아오, 진짜. 우리들끼리 있을 때에는 제발 편하게 지냅시다. 나 참, 만일 형님이 국왕이라도 되었다가는 아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겠소이다. 후후.”
“뭐라! 이놈이 정말 두고 보자 하니까!”
군단장 지노가 화를 참지 못하고 옆차기를 시도하려고 하자 결국 이번에도 동생들이 말려야만 했다.
“형님, 또 왜 이러신데요.”
게리에 이어 크리스까지 나섰다.
“저 형님 원래 그렇잖아요. 그냥 큰 형님이 참으시는 것이.”
“참는 데도 한도가 있지. 너희들 저 자식 말하는 걸 들었지? 나랑 무려 열 살 차이가 나는데도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 좀 보라고.”
이에 비스크가 한마디 더 했으니.
“형님은 도대체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 거요? 애들처럼 툭하면 성질이나 내고!”
“너 진짜 뒈질 테냐.”
이번엔 막내 아레스마저 나서서 지노를 말렸다.
“정말 두 분 이제는 말리는 것도 힘드네요.”
바로 그때였다.
중앙 망루 제일 꼭대기에 있는 한 병사가 뭐라 외치는 것이었다.
“적들 쪽에서 뭔가가 날아오고 있다!”
병사의 외침에 지휘관들이 일제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뭔가가 들판 언덕을 넘어 차츰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상한 굉음까지 냈으니 이들의 눈빛이 금세 긴장감에 물드는 듯했다.
끼릭끼릭.
끼릭끼릭.
“저게 뭐지!”
“글쎄요. 무슨 탑처럼 보이는데.”
“와우, 엄청나게 크군.”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은데, 아마도 놈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당장 이 사실을 국왕 전하와 참모님께 알려야 해.”
순간 성루 계단 모퉁이로부터 누군가 나타났으니 공교롭게도 바로 지드와 하키리우스였다.
“그럴 필요 없네. 내가 직접 왔으니까.”
“헉! 전하.”
지노를 비롯한 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지드와 참모가 성루 난간 앞으로 바짝 다가가더니만 들판 언덕을 넘어 오는 탑처럼 생긴 기기들을 세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그나저나…… 저게 뭐지.”
지드의 중얼거림에 하키리우스 역시 한마디 했다.
“그동안 공성전을 준비해 왔던 바로 그 결과물일 테죠.”
“그렇다면 파괴기란 말인가요.”
“글쎄요. 아직은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뭐라 딱히 설명드릴 방법이 없군요.”
“흠.”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들판을 넘어 오는 거대한 탑들은 수많은 병사들에 의해 밀고 당겨져 성 인근 수로 지역 앞까지 당도했다.
그 숫자를 세어 보니 도합 50개나 되었고 성과 마주보며 횡렬로 나란히 줄을 맞추어 멈추어 서 있었다.
탑들은 대부분 목재로 이루어진 것 같은데 혹시라도 화공에 대비하여 전면 부분에 철갑을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중간 부분과 맨 꼭대기에는 네모난 방패를 연결하여 방어벽을 설치했고, 그 안에 상당수의 병사들이 도사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쪽의 성과 비견되는 높이의 탑들을 세워 놓고 서로 활이나 쏘자는 것인가?
아직도 저들이 왜 저토록 비대한 기기들을 성 앞에다 갖다 놓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하키리우스가 말문을 열었고 지드를 비롯한 중앙 성문 지휘관들이 귀를 기울였다.
“아예 성벽을 만들 작정인 것 같은데?”
그 말에 지드가 다소 의아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성벽이라니요?”
“말씀 그대로 성벽이 분명합니다. 저 탑들은 공성전에 투입될 기기라기보다는 일종의 축 역할을 하는 것들로서 제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도 탑들 사이사이에 돌과 흙으로 메워 하나의 담을 쌓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정녕 저들이 벽을 쌓는단 말이오? 아니 저기에다 만들어 놓은들 여기까지와는 한참 거리가 먼데 대체 무슨 이유로 저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키아가 그저 관심을 끌려고 임시 성벽을 만들려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지난번처럼 송진과 화약 가루들을 날려서 불화살이라도 날리는 전술을 쓸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여긴 대부분 돌로 구축된 견고한 성이고, 그런 방법은 먹히지도 않을 텐데 말이오.”
“글쎄요. 아직은 좀 더 두고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
며칠 후.
과연 하키리우스의 말대로 탑들은 연결 축의 역할을 하며 사이사이에 쌓여 올라가는 흙벽돌로 인해 하나의 성벽으로 구축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공성전 사례는 많이 알고 있었지만 저와 같은 형태는 처음 접해 보는 것인지라 몹시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모한 공사에 병력 대부분을 투입하는지 말이다.
게다가 더욱 불안한 것은 상대의 탑 높이가 이곳의 성벽 망루보다도 높아 보였으니, 오히려 구조물이 다 완성이 된다면 오히려 이쪽이 위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허, 거참. 아키아란 자의 생각이 뭔지 모르겠지만 필시 그저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우리도 무엇이든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저들의 높이보다 성벽을 더 높게 구축하던지요.”
“저도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들의 대화에 껴드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레스였다.
“저기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아레스는 지난번 제2방어선에서 아키아를 상대로 무려 네 곳의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가 눈빛을 반짝거리며 입가에 은근한 미소마저 지어 보였으니 뭔가 자신만만한 표정 같아 보였다.
지드는 평소 막내인 아레스에 대해 유달리 신임하고 아끼고 있었으니 당연지사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였다.
“오호라, 그래 할 말이 있다고.”
그러자 아레스는 주변을 살피며 조금은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전하, 그리고 참모님께만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흠, 그럼 그렇게 하지.”
지드와 하키리우스는 다소 의아스러워 했지만 그가 뭔가 중대한 얘기를 하려는 줄 직감했는지 곧바로 성루 사령부실로 가기로 했다.
잠시 후 그들이 가고 난 자리에는 군단장 지노와 대원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니, 부군단장 비스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 녀석 뭐래요?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지.”
3호 크리스가 한마디 했다.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라도 되나.”
그러자 지노가 냅다 신경질을 냈다.
“네놈이 그런 거에 신경 쓸 이유가 뭐 있냐. 아마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니까 상담을 드리려고 조용한 곳으로 간 거겠지.”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설령 기발한 생각이 났다 할지라도 여기서 그냥 얘기하면 안 되나요.”
지노가 한심 한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네가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여.”
“무식하다니요!”
“국왕 전하와 총작전 참모께서 계시는데 너 같으면 기발한 생각을 이런 야외에서 대놓고 떠들겠냐.”
“…….”
이에 비스크가 입을 쏙 다물고 말았다. 이번엔 2호 크리스가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기에…….”
그때 지노가 성루 바깥 쪽 적들의 탑들을 보며 얘기했다.
“어쨌든 이 시점에서 아레스가 또 한 건 해 주기를 바라야겠지.”
***
한편 사령부실 탁자에 서로 마주 앉아 있는 지드와 하키리우스 그리고 아레스는 하나의 양피지를 펴놓고 뭔가 진지하게 의논을 나누고 있었다.
양피지는 손자병법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서 아레스는 어느 장을 펼친 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여기 나와 있는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키는 방법 중에 기상천외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 성 밖의 탑들을 축들로 세워 놓고 하나의 높은 벽을 세운다는 것은 방금 전 말씀드린 대로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에 하키리우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레스의 말을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
“제가 보기에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저 위세로 커다란 방벽을 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거든요.”
이에 지드 역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레스가 아주 중요한 의견을 내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군. 어차피 저들의 탑 벽 하고 이곳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에 화살이나 투석기 따위로 먼 거리 공격하기에는 무리수가 있거든.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 그와 같은 공격 형태가 시작될 것이 거의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그때 하키리우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잠잠해졌다.
그런 다음에 다소 흥분 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지금이 계절적으로 편서풍이 부는 시점인데 아키아가 그것을 이용할지도.”
아레스가 그제야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확신이 가시겠죠?”
“확신이 가다뿐인가. 이거, 자네 아니었으면 그냥 앉아서 당할 뻔했네그려.”
지드가 손으로 아레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후후, 과연 막내답군.”
“감사합니다.”
지드가 참모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들이 그런 공세로 나온다면 우린 어떻게 막아야 하겠소?”
“이미 아키아의 속셈을 파악한 이상 저들의 공격을 막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당장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그럼 저는 당장 아레스와 함께 전군에게 특별대책 방비 명령을 내리기 위해 나가겠습니다.”
“오호, 어서 그렇게 하시오.”
그리고…….
또다시 수일이 흘렀다.
***
휘잉, 휘이잉…….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어 왔다.
해마다 이곳의 지역성 특성 때문에 봄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계절에는 심한 편서풍이 한동안 불어오다가 장마철이 시작되곤 하였다.
올해도 그 시기가 다가오니 어김없이 강풍이 불어왔다.
펄럭펄럭.
성루의 수많은 깃발들이 찢겨질 듯 바람의 세기는 이만전만 강한 게 아니었다.
성 밖에는 탑을 축으로 거대한 성벽이 이미 거대한 구조물로 만들어져 있었고 꼭대기에는 커다란 방패로 덕지덕지 겹쳐 있기에 그 안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비록 태양이 구름에 가려서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오후가 시작되는 한낮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뿌우우. 뿌우우.
갑작스런 뿔 고동 소리에 그처럼 굳건하게 닫혀 있었던 적들의 탑과 벽 위의 방패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뒤로 자빠지더니만 뭔가가 일시에 도약을 하면서 날아올랐다.
타다닥. 휘리리릭!
“공격!”
“모두 성벽으로 공격하라.”
이어 시끄럽게 들려오는 적진의 음성들, 드디어 첫 공성전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있는 연들, 강한 바람을 타고 일제히 피체 왕국의 성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 설마하니 이런 고공 대규모 공격이 이루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홱! 홱! 홱! 홱!
등에 연을 매단 수천의 제국 병사들을 하늘을 가로 질로 하나 둘 성류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의 이런 공격에 상대가 무척 당황해 하리라고 생각하니까 입가에 절로 미소까지 머금어졌던 것이다.
“하하하, 네놈들 이제 다 죽었다.”
“자! 내리자마자 모조리 쓸어 주자고. 우리 선발진은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이니까 각자 능히 열 놈 정도는 박살을 내 줄 거란 말이지.”
“두말하면 잔소리.”
그들은 벌써부터 승리에 도취가 된 듯 고공비행 중에서도 왁자지껄 떠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했으니 적의 성루에 허둥지둥 되는 병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놈들이 왜 보이지 않지.”
“글쎄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 봄세.”
그들은 연의 방향키를 절묘하게 조정하면서 점점 안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으니.
“저게 뭐야!”
“헉! 이런 젠장.”
“다, 다들 위험해. 당장 방향을 틀어.”
“바람이 세서 뒤로 돌릴 수도 없어.”
성루 위 전 구역에는 병사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네모난 방패들이 향해 바닥처럼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그 틈으로 수 미터나 되는 긴 창들이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나와 있었으니 애써 여기까지 고공비행을 해 온 제국 병사들은 그 아래로 내딛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이 우리 작전을 안 것 같아.”
“이제 어떡하지. 바람이 한쪽 방향으로만 부니 뒤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그렇다고 저 아래로 뛰어내린 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고.”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무려 수천여 명의 고공비행 병사들은 그저 허공을 맴맴 선회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모두 방패를 열고 일제 투창과 활을 발사해라!”
성루 누군가의 명령으로 방패가 열렸다.
착! 착! 착! 착!
홱! 홱! 홰애액!
삭―! 삭―! 삭―! 삭―!
활과 창들이 허공으로 새까맣게 발사 되었다.
팍!
“욱!”
퍽!
“아악!”
펄럭펄럭.
배나 다리에 창과 활이 꽂힌 채 빙글빙글 돌아 추락하기 시작하는 고공비행 병사들.
바람을 이용한 그들의 기상천외한 작전은 초반부터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아니, 이미 전세는 피체 왕국으로 기울어졌다고나 해야 할까.
홱!
퍽!
“아아아아아.”
삭! 삭!
“살려 줘.”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 보고 죽어 가는 팔라카스 제국의 최정예 병사들, 아마도 그들도 이런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절대 고공비행에 자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하늘에는 성을 위협하는 고공 무리들이 없어지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이 날아가는 새들을 잡듯 여전히 사냥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놈은 내가 한번 잡아 볼게.”
“아냐! 이번엔 내 차례야.”
“넌 방금 전 두 놈 잡았잖아. 그러니까 내가 할 거야.”
“그거야 내가 능력이 좋으니까 그런 거지. 아무튼 같이 발사하지 뭐.”
“이런 치사한 자식 같으니라고. 혼자만 공 세우려고.”
“못 잡는 놈이 바보지.”
“뭐라고!”
“저렇듯 하늘을 날고 있는 놈들을 하나도 잡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니까 기회를 달라 하는 거 아닌가! 저리 비켜 보게.”
툭!
“이런 제길!”
피체 왕국의 병사들은 이제 여유를 넘어서 사냥 게임을 하듯 적국의 병사들을 모조리 척살하고 있었다.
한편 성루 사령부실 테라스에는 지드 그리고 아레스가 매우 흡족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이번 공성전에서 모든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말이다.
“아레스! 네 녀석의 조언이 큰일을 해냈구나. 하하!”
“감사합니다, 후후.”
“고공 공격 작전이라. 난 미처 그것을 생각지도 못했는데. 너 정말 대단해.”
“너무 과찬의 말씀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인데요.”
하지만 참모 하키리우스의 반응은 달랐다.
“아키아의 작전치고는 단순한데요.”
지드가 반문했다.
“단순하다니요.”
“흠, 그의 지략 능력으로 그저 이번 작전 한 번에 모든 것을 걸 리가 없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걱정도 팔자구료. 우린 그저 방어만 하면서 적의 수천 명을 공중에서 모두 추락시키지 않았소.”
“헌데 과연 아키아가 그 한 번의 공격을 위해 저처럼 거대한 구조 벽을 쌓아 올렸다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아서요.”
“어쨌든 이번 전투는 승리를 거두었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겠소. 자, 일단 우리끼리라도 자축을 합시다.”
“…….”
참모는 여전히 꿍한 표정이었고 전방에 보이는 적의 구조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이었다.
‘겨우 이런 공격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닐 텐데…… 대체 저걸 공들여 지은 이유가 뭔지…….’
같은 시각.
팔라카스 제국의 구조물 망루 위 부분에 황제 게라쿠스와 그 외에 참모들이 바로 앞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패배를 직접 목격하고는 다소 담담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헌데 불같은 성격의 황제가 화를 내기는커녕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키아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자네의 첫 번째 작전이라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폐하.”
“놈들의 시선을 현혹시키기 위한 위장 공격이라.”
그는 말하다 말고 등을 돌려 구조물 안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지휘관들 역시 그처럼 뒤로 돌아 섰다.
출렁출렁.
그곳에는 놀랍게도 탑 구조물 안쪽으로 물이 반쯤 차 있는 것이 아니던가. 마치 거대한 웅덩이에 인공 호수를 만든 것처럼 방비 벽은 일종의 댐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황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과연 대단한 참모일세. 사실 자네를 처음 보았을 때 아직은 어려 보이고 똑똑해 봐야 얼마나 잘났을까 의심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그 모든 생각이 내 불찰이었음을 시인하겠네. 하하!”
“송구스럽습니다.”
“이후로 내 앞에서 송구스러울 필요는 없네. 자넨 과연 숙부님께서 직접 천거하셨을 정도로 대단한 인재이니 말일세.”
“지금부터 시작이니 아직은 그런 말씀 듣기는 때가 이릅니다. 이번 작전이 끝이 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어야만 저 자신도 안심을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성공할 걸세.”
그는 말하다 말고 먹구름이 뒤덮인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뻗어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자네 말대로라면 계절적으로 이 지방엔 곧 장마가 시작되겠지.”
“네, 그렇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이곳 드넓은 인공 호수가 가득 차겠네그려.”
“폭우는 몇날 며칠 동안 집중해서 내릴 것입니다. 해마다 그래 왔으니까요. 아마도 이 구조물이 넘실거릴 정도로 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겠지. 산악 계곡의 모든 개울과 시냇가의 수로를 이쪽으로 터놓았기에 물이 차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테고.”
황제가 다시 뒤로 돌아서 피체 왕국의 성을 바라보았고 나머지 지휘관들 역시 그대로 따라서 등을 돌렸다.
“이 댐을 무너뜨리면 엄청난 물이 곧바로 저 성을 넘어 순식간에 물바다 속에 잠기게 한단 그 말이라. 하하하.”
그는 말하면서도 뭐가 그리도 흥분되고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비단 그뿐이던가.
아키아의 수공에 대한 지략 계획은 집정관과 다른 지휘관들에조차 그저 감탄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카르세크가 덩달아 신이 나서 말했다.
“수도가 물에 잠기면 놈들은 물에 생쥐처럼 더 이상 저항할 능력을 잃고 말겁니다. 우린 나중에 초토화된 그곳으로 천천히 입성하면 그만일 테지요.”
황제가 맞장구 쳤다.
“난 전쟁이 이렇게 재미난 것인 줄은 상상도 못했소. 결국 병사 대 병사 싸움이 아닌 한 사람의 지략으로 나온 결과로 그 승운이 지배 된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에야 알았고요.”
황제는 급기야 손으로 아키아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는 팔라카스 제국이 소유한 보물 중의 보물일 세.”
“과찬의 말씀입니다. 일단 수공 작전이 끝이 난 다음에…….”
한편 뒤쪽에 다른 지휘관들처럼 서서 경청을 하던 레온과 테세우스 역시 아키아의 전술에 대해 무척 상기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런 어마어마한 전략을 세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가.
“괴물 같은 자로군.”
레온은 아주 작은 소리로 뭐라 중얼거렸지만 바로 옆에 있던 테세우스의 귀가 밝았던가.
“내 뭐라 했나. 우리 같은 무인들에 비교하자면 참모의 능력은 아주 상당하다 볼 수 있다네.”
“누가 물어봤는가! 제발 남의 말에 참견 좀 하지 말게나.”
“그렇다면 제발 좀 중얼거리지 좀 말게나. 귀에 들리는 걸 어떡하나. 후후.”
“정말 지긋지긋한 녀석이군.”
“알고 보면 내게도 괜찮은 구석도 있네.”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