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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5 후퇴 (66/81)

Chapter. 65 후퇴

그로부터 보름 후.

번쩍― 우르릉. 쾅!

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엄청난 폭우가 쏟아 졌다. 벌써 일주일째였던가.

이제는 장마가 걷히고 햇볕이 날 만도 했지만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피체 왕국의 성루 위에는 비옷을 입은 채 계속해서 경계 순찰을 보고받고 있는 군단장 지노와 대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폭우 속에서도 늘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의 주요 화젯거리는 전혀 미동조차 않고 있다는 적진의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 장마 기간이 끝나고 제이 차 공격을 해 올 게 분명해.”

3호 크리스의 말에 2호 게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폭우 덕분에 전쟁이 조금 늦추어지는데 우린 잠시나마 하늘에 감사해야 하겠군.”

“그렇다면 일 년 내내 쏟아 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홍수가 나서 먼저 죽겠다.”

“그런가요. 하하.”

하지만 부군단장 비스크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그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당장 전투다운 전투를 하고 싶어 미치겠다. 이거 매일 비나 맞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화끈하게 싸우다가 놈들의 목을 베든지 죽든지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군단장 지노가 그냥 넘어 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네놈이 무식하단 얘기를 듣는 거다. 도대체 대가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지. 그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쯧쯧.”

“이번엔 또 왜 그러십니까.”

“웬만하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나 참, 하루도 잔소리하지 않으면 어디가 이상해지나 보죠?”

“전쟁이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제일 효율적이라는 말 몰라서 그런 소릴 하는 겨?”

“누가 모른데요? 그냥 하는 소리지.”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이 녀석아!”

“…….”

비스크는 더 이상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아예 입을 다물기로 작정을 했다.

그때 막내 아레스가 이들의 대화를 듣고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라…….’

조금 이상한 느낌이지만 왜 적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아무리 장마철이라지만 전혀 미동조차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인데, 공성전이란 원래 비올 때 치루는 것이 공격하는 입장에서 유리하다고 들었는데 왜 저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까.

그의 궁금증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너무 조용해.’

***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적진의 구조물로부터 이상한 굉음이 조금씩 들려오는 것이었다.

끼이익. 끼이익―

아레스는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무거운 비옷을 당장 벗어 버리고 성루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폭우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그곳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갸웃했으니.

‘구조물 틈새로 물이 제법 많이 세어 나오는데 대체…….’

순간 그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만일 저게 댐 역할을 한다면…… 세상에!”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는 재빨리 사령부실로 달려갔다.

타다닥!

“아이쿠! 이거 큰일 났다.”

지노와 다른 대원들이 그에게 소리쳤다.

“막내,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는 거야?”

“사령부에요.”

“거긴 왜!”

“큰일 났어요!”

“큰일이라니.”

“아무튼 다들 모두 성을 떠날 준비들을 하세요.”

“…….”

“…….”

그들은 대체 아레스가 지금 뭐라 말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잠시 후, 아레스가 성문 중앙 망루에 위치한 사령부 실에 도착하자 공교롭게도 국왕 지드와 하키리우스 역시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 역시 뭔가를 발견한 듯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드가 아레스를 발견하고는 냅다 소리쳤다.

“당장 전군을 철수시켜야 해!”

“저도 그 말씀을 드리려―!”

“시간이 없어. 댐이 무너지면 여기는 끝이란 말이다.”

“설마 댐이 세워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요!”

하키리우스 역시 소리쳤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수도 안의 모든 시민들도 대피시켜야 해. 이거 정말 큰일이군! 설마 아키아가 우리 모두 수장시킬 계획을 세울 줄이야…….”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나마 천운이라면 아직까지 댐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대피할 시간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댐은 당장이라도 무너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 세상에 이보다도 더 다급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빨리 서둘러!”

“예, 알겠습니다.”

***

그날 오후 폭우가 잠시 멈추고 소강상태에 이르기까지 피체 왕국의 수도 성안에는 대혼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을 포함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뒤편 고지대 산악 지형으로 대피를 하느라 난리 법석을 떨었으니 말이다.

끼이익.

끼이익―

진흙 바닥을 겨우겨우 벗어나는 마차 행렬들, 어린 아이들은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급히 움직이는지 이유를 몰라 저마다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늘이 도왔던가.

때마침 병사들이 끝 행렬까지 안전하게 보호하여 구릉지로 이동했을 때였다.

거대한 폭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연이어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이어졌다.

콰쾅!

우르르―

두두두두두두두―!

적이 댐을 터뜨린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 산악 고지대까지 올랐던 병사들과 주민들은 저 아래 자신들의 삶의 본거지가 거대한 해일로 덮쳐 오는 광경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아…….”

“물에 잠기네.”

“흑!”

그들 중에는 자신의 터전이 수장되는 모습에 흐느끼는 아낙네들도 더러 있었다.

하류 구역을 떠나와서 정말이지 어렵게 삶의 터전을 가꾼 소중한 왕국이었는데, 저처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지다니.

눈앞의 현실이 너무도 기가 막힐 뿐이었다.

물줄기는 제일 처음 성문을 박살낸 이후, 성루를 넘어 도시 안쪽까지 그야말로 살벌한 기세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우르르―

쏴. 쏴―

만일 조금이라도 대피가 늦었더라면 모두 수장될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음이 틀림없었다. 때마침 들려오는 천둥소리.

번쩍―

우르릉, 쾅!

쏴아아아아아아아―!

또다시 장대비가 눈앞을 가릴 정도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산 정상 어느 부분에 지드와 참모 그리고 아레스는 정말이지 눈에 피눈물이 날정도로 저 아래의 참상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했다.

특히 지드는 국왕의 입장에서 하류 검사와 주민들을 중심으로 어렵게 세운 나라가 한순간에 무너짐에 통한의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아아!”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아레스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전하!”

“이제 모든 것이 끝이야! 피체 왕국의 운명이 여기까지란 말인가!”

“전하, 무슨 말씀인지요. 다행히 우린 희생자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야. 나라가 통째로 수장된 판에 이제 다 무슨 소용인가!”

이번엔 참모 하키리우스가 말문을 열었다.

“전하, 너무 심려치 마시기 바랍니다.”

“심려치 말라니요! 그대는 눈앞의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아레스 말대로 우린 수도만 잃었을 뿐 사람들이 안전하니 이는 오히려 신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지드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겨우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는, 대체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요? 어찌 해야 좋겠냔 말이오.”

그러자 참모가 젖은 수염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만 잠시 후에야 대답을 했다.

“물론 피체 왕국의 수도 성이 저렇듯 침몰하는 것은 저로서도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터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건 무슨 뜻이오.”

“원래 피체 왕국의 시민들은 하류 주민들과 평원으로부터 자원해 온 각 부족 단체 출신들이니 피난민들은 일단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가서 숨어 지내면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수장된 수도가 복원되어 적이 안으로 진입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에게는 적어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는 것이니, 지금부터 서둘러 흩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책이란 말입니다.”

“흩어져야 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현재로서 피체 왕국은 그저 허울 좋은 수도와 성만이 사라진 것입니다. 훗날 얼마든지 폐하를 중심으로 얼마든지 다시 뭉칠 수 있습니다.”

“…….”

지드는 다시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참모의 말이 위안이 도기는 했지만, 아직도 요동을 치는 하늘이 원망스러웠으리라.

번쩍!

쏴―

결국 지드가 끝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참혹한 광경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끝내 억눌린 신음으로 통탄한 마음을 감출 뿐이었다.

“아아…….”

결국 피체 왕국의 병사들과 시민들은 각 출신에 따라서 각자 부족 지역으로 스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류 구역 출신 주민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보다 깊은 산악 지형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국왕 지드와 하류 검사 출신의 대원들이 그 축을 이루어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남부 대륙에서도 험하기로 유명한 산악 지형인지라 나중에서라도 팔라카스 제국의 추적 군대가 쉽사리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대이동을 할 것이다.

***

그로부터 한 달 후.

물이 다 빠지고 수도 성안으로 입성한 황제 갈라카스와 지휘부는 또다시 허탈함을 느껴야만 했으니 죽은 시신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텅 빈 도시만이 남았던 것이다.

이쯤되자 그토록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아키아마저 현기증이 나려 했다.

‘아아…….’

이어 들려오는 집정관 카르세크의 신음.

“이것들이 또 쥐새끼처럼 모두 빠져나갔군. 대체 무슨 족속들이기에 이다지도 싸우기 힘이 드나.”

이번엔 황제가 모처럼만에 침착한 어조로 집정관을 달래 듯 말했다.

“숙부가 왜 그동안 피체 왕국과의 전투에서 고전을 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구려. 비록 적들이지만 정말 대단하단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도다!”

이번엔 아키아가 자책을 하듯 말했다.

“모두 제 불찰이옵니다. 댐을 조금만 일찍 터뜨렸어도 저들을 모두 수장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거야 댐에 물을 가득 채우느라 그런 거 아닌가.”

“폐하…….”

“어차피 즐거운 사냥 놀이는 지금부터일세. 사실 나는 말이야, 그저 댐 터뜨려서 이 전쟁을 너무 쉽게 끝내는 건 별로라고 생각했거든.”

“무슨 말씀이온지.”

“추적 놀이를 시작하자 그 말이야.”

“추적 놀이라니요?”

“수년 전 하류 구역을 정리했던 때처럼 인간 사냥을 하자는 말일세. 더군다나 우리에겐 당시 큰 활약을 보여 주었던 유능한 특수 검사들이 있고 여기 레온과 테세우스가 있지 않은가. 후후!”

아키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들은…… 이미 산악 지형으로 깊이 들어갔을 텐데요?”

“그래서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소수의 병력을 운용하면서 도망친 놈들의 흔적을 찾아 하나하나 없애는 재미 말일세.”

“…….”

아키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그저 입만 다물고 있었다.

그때 황제는 말하다 말고 뒤에 있는 레온과 테세우스를 각각 번갈아 보며 눈빛을 번뜩거렸다.

“이제부터는 자네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차례이군.”

황제의 말에 그 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

“…….”

쨍―!

장마가 끝이 난 후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한 날이 계속 이어졌다. 레온은 모처럼만에 다리 쭉 펴고 낮잠을 즐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흥분된 탓인지 그처럼 달콤한 시간을 그저 잠으로 소비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부로 특수 검사부 총관으로 완전히 복귀가 되었고 그의 옛 명성을 되찾을 일에 심장마저 쿵쾅거렸던 것이다.

“이제 진정한 내 능력을 보여 줄 차례구나…… 후후!”

자신의 막사 안에서 말로세카의 군장을 착용해 보며 두 주먹마저 불끈 쥐며 결의를 불태우는 레온.

새로 부여받은 그의 임무가 무려 100여 명의 특수 검사들을 대동하고 피체 왕국의 잔당들을 토벌하는 것이 아니던가.

비록 여전히 테세우스와 라이벌 관계가 지속되고 있지만 그마저도 머지않아 자신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온이 자신의 부관을 부르자 막사 밖으로부터 예사롭지 않은 군장 차림의 사내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잠깐 이쪽으로 와 보게나.”

“네.”

레온은 탁자 위에 이미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부분 산악 지형이라서 어느 곳부터 추적을 해야 할지 막막하군.”

그러자 부관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왜 굳이 산악으로만 작전 임무를 수행하시려는지요.”

“지드와 그놈의 수하들이 그쪽으로 도망치지 않았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이곳 산악 영토 범위가 워낙 광대한 곳인지라 사실상 추적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레온이 갑갑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이대로 그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한 십 년쯤 지나도 절대 코빼기도 비칠 놈들이 아닌 것 같은데.”

“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뭐야.”

“피체 왕국의 잔당들은 산악 지형으로 도망친 자들 외에도 평원 부족 단체로 돌아간 자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일단 목표를 그들로 잡는 게 어떨는지요.”

레온이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아니 될 말일세. 내 오로지 한 목표는 지드가 아니던가. 그놈을 잡아서 황제께 바치는 것이 내 삶의 전부일 정도로 난 거기에다 모든 것을 걸었단 말일세.”

“물론 총관님의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큰 대어를 낚으려면 밑밥 역시 공을 들여 왕창 뿌려 놔야겠지요.”

“그건 뭔 말이지?”

“부족민들을 아예 말살시켜 버리는 정책을 펴자는 겁니다.”

레온의 눈빛이 그제야 반짝였다.

“부족민들 전부를 말인가.”

“네.”

“그들은 분명 피체 왕국의 병사 출신들로서 제국에 대항했던 번역 무리가 분명합니다. 당연히 척결을 함에 있어서 조금의 인정도 두면 안 되는 자들이지요.”

“그런 놈들에게 시간과 노력을 뺏기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제가 방금 말씀드렸듯이 미끼를 던지자 그 말씀입니다.”

“미끼라면?”

“물론 지드와 그 수하들이지요.”

그제야 레온이 이마로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하하,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숨어 있는 지드를 끌어내는 방법이란 말이지.”

“정확히 보셨습니다.”

“자신의 백성이 도륙당하는데 그저 가만히 지켜볼 왕이 어디 있겠습니까.”

레온이 그 대목에서 흥분해서 소리쳤다.

“맞아, 맞아. 그 자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부관이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죠.”

“이곳이라면 평원 지역 아닌가.”

“작업하기에도 수월하고 상대 전투력 역시 일반병에 해당하니 그저 가면서 쓸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아마도 마을 십여 개쯤 초토화시키면 지드가 그 소식을 듣고서 나타날 것이 분명합니다.”

“오호라.”

“그때 그를 사로잡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주 좋은 작전일세.”

레온은 공기를 쑥 들이마시고 검을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막사 밖을 나가면서 다짜고짜 소리쳤다.

“작전 시작이다!”

부관이 놀라 되물었다.

“벌써요?”

“특수 검사들은 항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거늘, 무슨 소릴 하는 것인가!”

“그게…… 저어,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중인데요.”

“빌어먹을! 그거야 가는 도중에 사냥감으로 끼니를 때우면 되잖은가.”

“그, 그래도…….”

“자, 다들 대령시켜라. 곧 출발할 테니 어영부영할 생각은 집어치우고!”

“알겠습니다.”

“빨리!”

참으로 성격 급한 자였다.

특수검사들은 저마다 내심 불평 어린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최강의 무인 레온이 원상복귀해서 처음으로 내리는 명령인 만큼 옛 수하들로서 기쁘게 따라 줄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

2달이란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휘잉―

한 줄기 미풍에 수많은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초록의 짙은 냄새에 지드는 숨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여름날의 청명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비록 수도를 버리고 이곳 산골 오지로 피난해 왔다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은 편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세상에 이처럼 천애의 조건을 갖춘 영토가 있었던가.

수많은 산맥이 용의 등줄기처럼 꿈틀꿈틀 움직이는 대자연의 정취,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고 살아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팔라카스 제국의 추적 군대가 감히 들어오기도 벅찬 외길 코스의 산악 지형에는 온갖 기암절벽들이 가득 차 있었으니, 소수의 병력으로 몇 군데만 지킨다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에 고지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한 음료를 마시듯 머릿속을 시원하게 관통해 주기까지 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아카시안이 있었고 그녀 역시 세상의 고뇌를 떨쳐 버린 듯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전쟁도 없고 투쟁도 없는 오로지 자연만이 가득한 세상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그저 내 백성들하고 자급자족하면서 여생을 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요. 하지만…….”

지드가 말끝을 흐리자 아카시안이 의아스런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뭐죠?”

“평원으로 간 나머지 부족 출신의 백성들이 걱정이 돼서 그러오. 그들은 발견되기 쉬운 위치에 거주하기 때문에 적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텐데.”

“숲 지형이 많잖아요. 나름대로 숨어서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아니오. 아예 처음부터 이곳으로 함께 오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 후‥‥ 거참, 그들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우울해지려 하는군.”

“…….”

아카시안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요즘 들어서 지드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으니 그의 근심 걱정은 날로 깊어져만 가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그 때문일까. 그녀는 지드의 진짜 고민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에르가니아.

그렇다. 여자의 육감으로 보자면 지드는 필시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매우 혼란스러워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과연 그녀가 적국으로의 자발적으로 전향을 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한 결정이었는지 말이다.

아카시안은 지드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지만 용기를 내어서 그 문제를 굳이 입 밖으로 거론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가 그녀에 대해 잊고 마음을 편히 가지기를 원할 뿐이었다.

지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만일 신이 내게 한 가지 소원을 말해 보라면 나는 세상일을 잊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그러겠소.”

“무엇 때문인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 일들을 그저 다 잊고 싶어서 그러오. 그리고 지금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 좋으련만.”

“그럼 새롭게 시작하면 되잖아요.”

“내가 그럴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을 그대도 잘 알잖소. 난 아직도 국왕이란 신분에다가 뿔뿔이 흩어져 있는 내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오.”

“…….”

그녀는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때였다.

지드는 저 아래 좁은 협곡으로부터 누군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오는군.”

그는 바로 아레스였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평원 곳곳으로 흩어져 있는 부족 백성들의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고 이제야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 왔건만.”

잠시 후, 지드의 숙소 접견실에는 참모 하키리우스가 방금 전 도착한 아레스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오호! 별일 없이 잘 돌아 와주었군.”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늘 그렇지 뭐.”

“하하, 여전하시군요. 그런데…… 국왕 전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금방 나오실 걸세. 자네가 오는 것을 보시고 냅다 이리로 뛰어오시는 걸 봤거든.”

그때 방문을 열고 나오는 지드.

삐걱.

“아레스!”

“폐하!”

“하하하, 한 달 만인데 마치 일 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군.”

“송구스럽습니다.”

“그나저나 바깥세상 일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

그 질문에는 아레스가 안색을 굳혔다. 이에 지드가 불안한 기색으로 다시 물었다.

“물론 제대로 돌아가지는 않고 있겠지. 팔라카스 제국의 탐욕이 끝없이 펼쳐질 테니까 말이야.”

아레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탐욕이라기보다는 척결 작업에 무척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척결이라면……누구를.”

“폐하의 백성들입니다.”

“…….”

그 말에 지드의 가슴이 철렁 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랄까. 아레스의 말문이 계속 이어졌다.

“각 산지로 흩어져 있는 부족 단체들이 레온과 테세우스의 일당들에 의해서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현재로서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대략 열일곱 개가 넘는 부족들이 사는 마을이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질 정도로 초토화가 되었거나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특히 레온은 폐하에 대한 억하심정이 심한지라, 매우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데. 후! 참으로 천인공노할 아주 사악하고 무지막지한 놈입니다.”

레온이라는 말에 지드의 안색이 굳어지다 못해 창백하게까지 변했다.

“그놈이 결국……!”

지난번 아군의 병사들을 도륙하고도 모자라 아라퀘스의 연인인 키나마저 죽게 만든 장본인, 이제는 자신의 백성들마저 희생의 제물로 삼는 그자가 그리도 증오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내 이놈을 당장 요절을 내주고 말겠다!”

그때 하키리우스가 말문을 열었다.

“마치 수년 전의 암울한 일이 떠오르는군요. 당시에도 레온과 테세우스가 두 파로 갈려 서로 경쟁을 하듯 용병들을 제거해 나갔는데, 오늘날 그 악몽이 되풀이되다니…… 아아, 이 일을 어쩐다 말인가!”

“그보다도 당장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뭔가!”

“제가 알아 낸 정보에 의하면 레온은 아크누스 기병대의 칼차크 종족을 습격하기 위해 그쪽으로 떠났다 합니다.”

순간 지드와 참모가 깜짝 놀랐다.

팔라카스 제국은 피체 왕국에 조금이라도 협조했거나 동참한 자들마저 철저히 소멸 시킬 작전이 분명해 보였다.

지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가만히 두 손 놓고 있을 틈이 없군.”

그러자 참모가 그를 만류했다.

“사태가 급박하기는 하지만 어찌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려는 겁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소. 어쩌면 레온은 나를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잔혹한 짓을 자행하는 것이 틀림없소. 어차피 그자와 나와는 끝내야 할 악연 같은 것이 있으니, 이 기회에 가만 놔두지 않겠소.”

“이곳 역시 폐하의 손길이 필요한 마당인데…….”

“여기는 안전한 지대이니 참모를 비롯해 아라퀘스와 여러분께 맡기면 될 게 아니오.”

“하오나 폐하…… 설마 혼자 가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혼자 갈 거요.”

“네?”

“걱정하지 마시오. 적당한 틈을 봐서 레온과 일대일 대결을 벌일 테니.”

결국 국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가.

하키리우스는 그저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의 갈 길에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발 조심하시기를.”

“걱정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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