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 선인도(仙人刀), 선인간(仙人鉀)
휘잉!
텁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머리칼의 사내가 힘없이 어느 산악 지대의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중턱 부근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고 등짐을 풀어 바위벽에다 놓고는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힘없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던가.’
그는 지드였고 지난번 테세우스와의 패배에 이어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길로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옛 수련 장소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는 에르가니아의 간절한 눈빛을 지울 수가 없었다.
3년 안에 다시 구출하러 오겠다고 약속을 해 놓았지만 현재 그로서는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탄식은 여러 번 흘러 나왔고 급기야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괴로워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테세우스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란 말인가.
잠시 후 그는 다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윽―
무작정 수련 장소로 돌아간다고 일이 해결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발걸음은 절로 그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화산파 장문인이셨던 스승님을 만났고 화산 검술을 익힘으로써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곳을 떠난 뒤에 단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절망과 회한의 심정을 지니고 다시 귀환하게 되었으니 정말이지 삶이란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그로부터 수일 후…….
쨍―!
이제 여름도 그 끝에 이르렀고 어느새 초가을의 뙤약볕을 내리고 있었다. 지드는 지난 보름여 동안 걸어서 수련장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고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화산 검술들 중에 매화십사수를 비롯하여 독고구검마저 깨우친 그가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마치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좋아 했었다.
수하들도 생기고 하류 구역의 용병들 대장에다가 훗날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더 이상 찬란한 인생이 없을 정도로 잘나가는 중이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입지는 사랑하는 연인 하나 구하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배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으니, 정말이지 가슴이 너무 아프고 머릿속이 복잡해질 뿐이었다.
휘잉―
협곡 안쪽에 위치한 수련장 한복판으로부터 한줄기 바람이 불어 왔다. 선선한 바람이지만 마치 심장이라도 관통하듯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 아래 건물 굴뚝으로부터 연기가 꾸역꾸역 피워 오르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곳은 스승님이 결계를 쳐 놓은 곳으로 일반 사람의 출입이 가능하지 않는 곳인데 연기가 나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지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저벅저벅.
잠시 후 수련장 한 복판으로 지나며 건물 입구에 다다른 그가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들려오는 낯익은 음성.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겨!”
“헉.”
저 특유한 발음에 이상한 억양. 분명 스승님이 분명해 보였다.
“스승님…….”
“왔으면 냉큼 들어오지, 뭐 해?”
정녕 스승님이 이 세계로 다시 돌아 오셨던 말인가. 지드는 문을 활짝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중앙 제단석에 모포를 깔고 가부좌로 앉아서 눈을 부릅뜨고 계시는 스승님. 순간 지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흑! 정말 스승님입니까.”
그때 스승 목유성이 지드의 허름한 차림새를 보더니만 혀를 끌끌 찼다.
“그 모양새가 왜 그 모양이냐. 십 년 만에 돌아왔더니만 아예 거지꼴을 하고 있네그려. 쯧쯧! 혹시 동냥질하러 다니는 건 아니겠지?”
지드는 냅다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했다.
“제자가 인사드립니다.”
“인사는 뭔 인사. 험!”
“그동안 별고 없이 잘 지내셨는지요.”
“나야 뭐 그렇고 그렇게 지냈지. 헌데 네놈, 그 몰골이 뭐냐.”
“사,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은 무슨 놈의 사정. 화산 검술을 익힌 놈이라면 응당 지금쯤에는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그게 뭐여!”
“…….”
잠시 시간이 흘렀다.
탁탁!
화르르, 화르르―
모닥불이 타는 가운데 목유성과 지드는 한참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특히 지드는 자신이 그동안 겪은 일들을 모두 얘기하는 중이었고 스승은 매우 관심 있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지드의 설명을 모두 들은 스승이 허공을 들어 한숨을 푹 쉬었다.
“허, 거참! 많은 일들을 겪긴 겪었구먼.”
“결국 제가 못 나서 여기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고요.”
“아무튼 잘 돌아왔구나. 그래서 나를 만나게 되었고.”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해라, 이 녀석아. 국왕의 위치까지 오른 녀석이 뭐가 아쉬워 이 늙은이를 보고 싶어 했겠느냐. 허허!”
“진짜입니다.”
“그나저나 나 역시 네 녀석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무림 일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
그 질문에 목유성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지드가 다시 물었다.
“혹시 마교 세상이 되기라도 했답니까. 왜 그렇게 힘없는 표정을…….”
그제야 스승이 말문을 열었다.
“한때 마교가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기도 했지. 구파일방은 물론 오대세가에 이어서 황궁마저 감히 나서지 못할 만큼 온 천지가 그들의 본거지가 되어 상상조차 못할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고.”
“그래서 또다시 여기서 쫓겨 오신 건가요.”
순산 스승이 눈을 부라렸다.
“쫓겨 오다니! 이놈이 무슨 말을 그렇게.”
“그렇게 보이는데요?”
“네가 여기 온 것은 네놈에게 맡긴 화산 보물들을 가져오기 위함이다.”
“마교가 지배하는 그 세계로 가져가서 뭐 하게요?”
“그놈 말하는 싸가지 좀 보게나. 누가 마교가 판을 친다고 그랬나.”
“방금 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저 한때에는 그렇다고 그랬지.”
지드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했다.
“한때라고요?”
“그렇단다. 지금은 평온의 시기를 맞았다고나 할까.”
“마교는 어떻게 되고요?”
“한때 십만 고수들을 보유한 그들은 이제 모두 소멸되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니라.”
지드가 깜짝 놀랐다.
“사라지다니요!”
“나 역시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 한 존재가 갑자기 등장해서 그들 모두를 토벌했다고나 할까.”
“한 존재라니요?”
“그분은 선인계에서 내려오신 분으로서 마교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인간 세상에 잠시 강림하셔서 그들을 평정하셨었지. 이는 무림 역사상 초유의 일로서 앞으로도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대사건이기도 하였다.”
“선인계가 대체 뭐 하는 곳이기에 혼자서 그 어마어마한 세력을 절단 내셨대요?”
“그곳은 차원이 다른 곳이여. 여하튼 우리 나약한 인간들은 선인의 도움으로 옛 시절의 평화를 되찾게 되었으니 이만저만 감사한 게 아니라네.”
“와우, 세상에 그렇게 싸움 잘하는 존재도 있었던가요.”
“녀석, 그 경박한 말투는 옛날과 다를 게 없군.”
“어쨌든 놀랍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존재가 다 있으니 저는 아직도 우물 안에 개구리 신세가 된 것 같습니다.”
“하기에 네 말을 듣고 보니 이 세계에도 강력한 인간들이 더러 있어 보이는구나. 네놈의 화산 검술과 그 공력기술인가 뭔가 하는 것을 융합시키고도 그 누구에게 패했다니 말이다.”
“정말이지, 테세우스란 녀석은 한마디로 인간의 힘을 훨씬 상회하는 존재가 틀림없었습니다.”
“어디든지 우리 상상을 초월한 힘을 지닌 자는 존재 하는 법이겠지. 여하튼 난 화산 보물들을 되찾는 즉시 다시 돌아가야 하겠다.”
“벌써요?”
“가서 할 일이 많거든. 게다가 이제는 이 세계로 통하는 결계의 문이 완전히 닫힐 테니까 그전에 반드시 돌아가야 하느니라.”
“섭섭하네요.”
“섭섭해도 할 수 없단다. 자네와 나와의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을 어떡하겠나.”
“그래도요.”
그날 오후 해가 질 무렵 지드는 바위 산 정상에 숨겨 둔 화산 보물을 담겨 져 있던 흑단 상자를 스승에게 건네주었다.
목유성은 푸르스름한 공간 속으로 떠나기에 앞서 지드와 이별식을 가졌다.
“나 그럼 가 보마.”
지드는 한숨만 나왔고 별다른 작별 인사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스승님이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대로 헤어진다면 그대로 별 볼일 없는 삶을 마감하며 죽을 게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
“아차. 말해 줄 게 남았군.”
지드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뭔데요?”
“내가 이 세상에 가져온 물건들이 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수련장 동굴 안쪽 깊은 곳에 묻어 놓았느니라.”
“물건들이라니요.”
“그것들은 절대 무림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들로서 이 세계에 영원히 파묻히는 것이 좋다는 판단 하에 가져 왔느니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선인(仙人)의 물건들이다.”
“선인이라면 혹시 아까 마교를 혼자서 소멸시켰다는…….”
“그분의 갑옷과 검 그리고 책자이니라.”
순간 지드의 눈빛이 반짝였다.
“선인께서 남겨 놓으신 거라고요!”
“무림에서 그 누구에게 그것들이 소유된다면 그날로 세상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거두어 이곳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선인은 어디 가고요?”
“선인계로 돌아가셨지.”
“자기 물건들은 남겨 둔 채요?”
“무슨 이유인지 남겨 두고 갔지.”
“왜 그랬대요.”
“아, 거참. 녀석 말 많은 건 정말 여전하구먼 그래. 선인께선 그 물건과 인연이 있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지.”
“인연이 있다고요?”
“그래,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세계로 가져왔으니 이젠 이 세계와 인연이 있지 않을까 싶구나. 아무튼, 가 보마. 나 그럼 진짜 간다?”
스승이 짧게 말하고 공간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파팟!
지드는 그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완전히 사라진 스승의 여운을 슬픈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바위 정상 위에 앉아서 저 아래 수련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휘잉─
가을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일렁였다. 참으로 쓸쓸한 계절이었다.
“또 혼자 남은 건가.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스승께서 말씀하셨던 선인의 물건들이었다.
“가만,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데.”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자리에서 벌떡 얼어나 동굴이 위치한 곳으로 향했다.
동굴 입구에 도작한 지드는 입구에 쌓여진 돌무더기를 들추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낮인지라 그리 깊지 않은 동굴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저벅저벅.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살펴보는 지드.
“어디다 두셨으려나.”
마침 그의 눈길이 동굴 제일 깊숙한 안쪽으로 쏠렸다.
“저곳에 돌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봐선…….”
지드는 두 번 생각할 겨를 없이 냅다 그쪽으로 다가가서 돌들을 헤쳤다.
타다닥!
달그락.
이윽고 하얀 천에 꽁꽁 쌓여진 두툼한 것을 발견했으니 지드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진짜 있네!”
곧이어 그는 꽉 매어진 끈의 매듭을 하나씩 풀고 천을 헤집기 시작했다.
스윽.
천을 펼치자 그 안의 물건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간 지드의 동공이 확 팽창이 되었다.
갑옷으로 보이는 금속 천이 둘둘 말린 채 있었고 그 위로 한 자루의 예사롭지 않은 검과 책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드는 갑옷을 펼쳐 보았는데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고 이 세계의 군장과 다르게 여타 보호 장비도 없었고 볼륨도 얇아 보였다.
중국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이랄까. 검 역시 양날이 아닌 한쪽 칼날만 잘 다듬어져 있는 도검(刀劍)이었다.
솔직히 지드 입장으로서는 잔뜩 기대를 하고 봤지만 그저 평범한 일개 장수의 의복과 무기에 지나지 않았던가.
“뭐야. 선인이 사용한 것이라기에 대단한 건 줄 알았더니만.”
지드가 이번엔 책자를 들어 표지부터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목이 없는 낡은 고서였다.
스윽.
첫 장을 펼쳐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장도 넘겼는데 또 빈장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계속해서 마지막 장까지 펼친 다음에야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을 알고는 다시 실망스런 기색을 보였다.
“도대체 이 책은 왜 남겨진 거지? 아무런 내용도 없는데…….”
그는 마지막 장까지 덮은 채 무심코 뒤표지를 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선인도(仙人刀)는 하늘의 힘을 다스리고 선인갑(仙人鉀)은 대지를 꿈틀거리게 하도다.
지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선인도와 선인갑이라.”
굵은 채 바로 밑에는 작은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덧붙여 쓰여 있었다.
인간들이여, 이 물건들을 탐하지 마라! 영원한 소멸의 길로 이를 수 있으니.
그래도 정 원하거든 십 갑자의 힘을 갖추고 소유하리라.
아주 간단한 구절이었다. 아마도 선인이 자신의 세계로 가기 전에 남긴 글인 것 같은데 일종의 경고성이 아닌가했다.
지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대목은 바로 십 갑자란 의미였다.
“후. 십 갑자라. 스승님 말씀에 무림 역사에서조차 그 경지에 이른 초절정 고수들은 몇 안 된다고 했는데.”
지드가 이번엔 첫 구절을 다시 읽어 보았다.
“선인도(仙人刀)는 하늘의 힘을 다스리고 선인갑(仙人鉀)은 대지를 꿈틀거리게 하도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지?”
그는 감히 그 갑옷과 검을 만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살펴보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글귀의 경고성 때문이던가.
십 갑자에 이르지 못하면 아예 손도 대지 말라는 간단한 내용을 그가 모를 리는 없었다.
지드는 현재 자신의 내공 수위가 십 갑자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는 내심 답답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지난번 주화입마의 과정을 극복함으로써 스스로의 경지가 칠 갑자에 도달했음을 대략 짐작할 뿐이었다.
“이제 어떡한담. 함부로 만질 수도 없고…….”
바로 그때였다. 구겨진 천 안쪽에서 접힌 종이 쪼가리가 보였고 지드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지.”
얼핏 본다면 종이 재질의 잘 접어진 서찰 같았는데 아주 깨끗한 질의 최근 것 같아 보였다. 지드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펼쳐 보니 낮 익은 문체가 쓰여 있었고 한번 쭉 읽어보기로 하였다.
벌써 10여 년 전 일이던가.
지드 네 녀석에게 화산 보물을 맡기고 잠시 이 세계를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적잖이 의심을 품었던 것이 못내 미안하게 생각되는구나.
이제는 무림이 평온을 되찾고 나 또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과연 네가 다른 마음을 품고 화산보물들과 함께 사라졌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다.
하지만, 너를 보았을 때 그런 걱정을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구나. 난 화산파 장문인으로서 오랜 역사를 자랑해 왔던 화산 보물들을 다시 가지고 돌아가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이게 다 네 덕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말인데 그 보답으로 몇 가지 영약을 남기고 가니 잊지 말고 꼭 복용하여라.
내가 가져온 것은 소림사의 대환단과 어렵게 얻은 공청석유, 만년설삼 등 그 이름만 들어도 무림인들에게는 꿈같은 영약들로 네 녀석에게 꼭 필요한 것들일진 모르겠지만 도움은 될 것이다.
영약들은 본관 건물 제단석 밑에 잘 숨겨 놓았으니 그리 알거라.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선인께서 남기신 선인갑과 선인도는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의 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십 갑자 이하일 테니 결코 착용해거나 검을 뽑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잘 보관하길 바란다. 그럼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함세나. 꾸준히 수련하여 부디 원하는 일을 이루도록 비마.
반드시 자네의 배필이 될 그녀를 구하도록 그 말이다. 허허, 인연이 닿는 날이 있다면 그때 다시 보마.
지드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역시 스승님이던가. 그냥 무심하게 돌아가시지 않고 뭘 남겼으니 말이다.
“흑. 스승님.”
지드는 그 길로 수련장 건물로 돌아왔고 제단 석상 밑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단 천으로 꽁꽁 싸 맨 두툼한 것이 있었으니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선인갑과 선인도였다.
‘내공이 십 갑자에 이르러야만 한다고 그랬던가. 그렇다면…….’
지드는 갑자기 영약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것들을 복용하고 내공 수위를 좀 더 끌어 올린다면 십 갑자가 될지도 몰라!”
한 줄기 희망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듯했다.
휘잉.
가을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지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벌써 한나절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원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달쯤 전, 스승님이 남기고 가신 영약들은 그야말로 무림에서 그 어떤 고수라도 평생에 한번 구경할까 말까 하는 것들로서 가히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데 솔직히 지드로서는 의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가. 아직은 먹을 생각은 없었고 그저 단전호흡을 통해서 처음부터 내공과 공력의 융합 수련만을 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느 세월에 상당한 경지에 올라 테세우스와 맞상대를 벌여 에르가니아를 구해 올 수 있을 텐가.
‘후.’
한숨만 절로 나왔다. 이대로 가부좌만 틀고 평생을 늙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의 시선은 다시 바로 앞에 놓인 영약들에게 갔다.
스승님 말씀에 영약들은 그 순서에 따라서 한 번에 하나씩 복용하면서 운기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지드의 결심이 굳어진 듯했으니 그가 처음으로 집어 든 것은 대환단이었다.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내공이 증진된다…… 거참 편리한 약들이로군.”
무림과는 상관없는 이 세계의 사람으로서 영약에 관한 개념이 그다지 없는 그로서는 그냥 한번 속는 셈 치고 먹기로 했다.
주저 없이 입속으로 밀어넣고 마는 지드.
홱!
꿀꺽.
“우웩!”
무척 썼다. 하지만 내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씹어서 삼키느라 노력했다.
잠시 열기가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는 화산 내공심법 중에서 자하신공의 운용을 하기 시작했고 단전으로부터 모든 혈을 타통시켜 그 힘을 분배하려고 했다.
이미 공력과 융합 신체를 지닌 그로서는 본래 순수한 무림 신체가 아닌지라 혹시라도 이 약이 부작용을 가져다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욱!”
온 몸이 타들어 갈 정도로 고통이 엄습해 왔다.
데굴데굴.
급기야 땅바닥을 구르고 말았으니.
“아아. 이러다 죽겠네!”
대한단의 효과는 소림사의 것으로서 그 나름대로 소림 구결을 운용해야 해야 하건만 무턱대고 약부터 삼켜 버렸으니 그런 현상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
“우우욱.”
지드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 심한 갈증마저 느꼈다. 이대로 조금만 가다가는 목의 있는 침이 모두 말라 비틀어서 기도가 막히고 숨을 내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당장 물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 제단에서 바깥 우물까지 가려면 수십 미터는 되었는데 그 전에 죽을 판이었다. 결국 눈앞에 놓여 진 푸르스름한 액체 병을 손에 쥐고는 뚜껑을 열었으니 바로 공청석유였다.
꿀꺽꿀꺽.
뒤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마셔 버렸으니.
‘아.’
당장은 갈증이 해소되어 사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고통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온몸 구석구석이 바늘로 콕콕 찔러 왔던 것이다.
“아이고!”
비명을 질러 대고 다시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지드. 이러다가 입에 거품을 물고 죽기 십상이었다. 그는 덜컥 겁이 났고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공심법이 아닌 공력 에너지 운용을 해야겠다. 아아.”
순간 가부좌 자세에서 당장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지드, 지난번 주화입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만의 독특한 자세였다. 어차피 그의 신체 안에는 내공과 공력이 융합된 새로운 개념의 힘이 가득 차 있었다.
영약의 효과를 보려면 지금처럼 대자연의 힘을 끌어들여 몸속에서 함께 희석해야 함이 맞다고 생각했다.
“후아후아.”
시원한 공기를 몇 번 들여 마시니 방금 전의 고통은 금세 사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머릿속이 맑아지고 온 몸이 가벼워진다고나 할까.
“진작부터 이렇게 할걸.”
잠시 시간이 흐르자 놀랍게도 그의 몸이 절로 지상으로부터 붕 뜨는 것이 아닌가. 과연 영약들과 융합 에너지 간에 작용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이제는 그 힘을 조율을 못하니 땅바닥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헉! 뭐, 뭐야.”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제 몸 하나 지탱 못하는 모습이랄까.
바로 그때 지드 발아래 보이는 것이 있었으니 만년설삼이었다. 그는 거꾸로 물구나무 서기 식으로 그것을 겨우 집어 들고 입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우걱우걱. 쩝쩝.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마저도 복용하기로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아직도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이걸 먹으면 혹시라도 제대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으니 오히려 몸은 부풀어 오른 돼지 허파처럼, 또 허공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민들레 홀씨와도 같았다.
“아이고! 대체 이게 뭔 일이야!”
결국 이번에도 그가 생각해 낸 것은 공력의 운용이었다. 내공 심법이 아닌 이 세계의 순수한 에너지로서 다른 이질적 세계의 영약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랄까.
그의 생각이 맞아 털어진 듯했다.
착!
지면으로 겨우 발을 내딛는 지드, 하지만 마치 구름을 밟고 있는 듯 아직도 날아가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다만 그의 공력기술로 겨우 걷는 시늉을 할 뿐, 정말이지 큰일 났다.
평생을 이렇게 지내야 만 할 것인가.
“약들은 괜히 먹어 가지고…….”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지드는 혹시나 하고 바닥에 누워 보기도 했다. 그러자 몸이 지면으로부터 대략 2m 위로 붕 뜨는 것이 아닌가. 비록 공력 기술을 사용했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고 말았다.
“아, 하필 이런 몹쓸 약들을 남기고 가시다니!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고요.”
절박한 심정이었다. 만일 무림인들이 이 약들을 복용했다면 적절한 운기심법에 의해서 그 효과를 톡톡히 봤을 텐데 새로운 힘의 개념을 몸에 담고 있는 지드로서는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지드는 고민스러웠다. 아직도 허공으로 떠오르려는 몸을 공력기술로 겨우 제압을 하고는 눈앞에 펼쳐진 선인갑(仙人鉀)과 선인도(仙人刀) 두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그냥 저걸 입어 버릴까.”
금세 부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휘휘 돌렸다.
“그건 아니지! 내 능력이 아직은 저걸 입을 자격이 되었는지 확인도 하지 못했는데……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야.”
하지만 지드의 안색은 더욱 굳어져 들어갔다. 그렇다고 이대로 평생 지내야만 할 것인가. 어차피 그의 입장으로서는 모험을 걸어야 할 판이 아니던가.
모험을 걸고 강해지든지, 아니면 이대로 이상한 꼴이 되어 평생 늙어 죽든지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젠장. 어차피 죽고 사는 건 하늘의 뜻. 테세우스를 제압하지 못하고 에르가니아를 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드디어 그가 용기를 가지고 선인갑부터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가볍군.’
그다지 볼품 없는 가죽 군장,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예사로운 힘이 서서히 느껴졌다.
결국 지드는 선인갑을 입기 시작했다.
홱!
스윽―
탈칵.
고리를 채우고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심스럽게 기다려 봤다.
“…….”
아무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정된 기분이랄까. 신기하게도 몸이 날아오르려는 작용부터 사라진 듯 보였다.
“와우.”
지드는 혹시나 하고 자기 의지대로 슬쩍 뛰어올라 보았다. 그러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붕!
홱―
“뭐야!”
한 번의 가벼운 도약으로 10여 m를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던가. 다시 지면으로 사뿐히 안착하는 지드. 지드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방금 전 그는 정확히 10여 m를 생각하고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점까지 뛰어오른 것 같았으니, 우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한 백여 미터로 해 볼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
“이얏!”
슉
“헉!”
다시 한 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으니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어느새 상공 한복판까지 오른 것이 아니던가.
발밑을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엄청 높았다. 주변에는 새들이 가깝게 날아다니기까지 했다.
지드는 다시 지상으로 안착하려고 가볍게 몸놀림을 했다.
스윽― 착!
순식간에 지면에 안착했다.
“와우.”
정말이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일단 선인갑을 착용 하는 데에는 별다른 부작용이 없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지드 자신의 내공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 문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다음 구절이었다.
선인갑은 대지를 꿈틀거리게 하도다.
과연 무슨 뜻인지 지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지를 꿈틀거리게 하다니, 그건 뭐지.”
그는 마치 천진한 아이처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저 장난으로 발로 지면을 한번 가볍게 밟았다.
“쿵!”
순간 그의 발 부분이 닿은 지점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던가.
우지직! 쩌어억―
“헉!”
사방으로 금이 가고 바닥이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뒤로 훌쩍 뛰어 근처 바위 지면으로 날아 착지 하고 말았다.
척!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진짜 대지를 꿈틀거리게 한다더니 그 말이 들어맞는 것이 아니던가.
지드의 궁금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긴?”
이번엔 바위 구릉지로서 훨씬 단단한 표면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발을 내딛는 동작이 훨씬 컸다.
쿵. 저어억!
우르르르르르르―
이번에는 그 강도가 셌는지 바위가 갈라지면서 주변 지대가 함몰되고 마는 게 아닌가. 참으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우와. 세상에!”
지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했으니 직접 그 자신이 행하고도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세상에 어쩜 이런 일이 다 생긴단 말인지.
그는 잠시 자리에 앉아서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냥 말로만 선인갑이 아니로구나.’
과연 인간이 아닌 선인의 군장이랄까.
이번엔 그의 호기심이 저 아래 나무에 기대어 있는 선인도에 가 멈췄다.
과연 선인도의 힘은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지드는 냅다 아래로 튀어 내려갔고 당장 검을 들어 보았다.
“흠. 보기보다 묵직하군.”
상당한 무게였다. 하지만 지드에게 있어서는 그저 갈대를 집어 올릴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무심코 선인도를 공중으로 들어 올랐다. 그러자 이게 무슨 변인지 그렇게도 청명한 날씨를 유지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아니던가.
“갑자기 비라도 오는 건가.”
때마침 들려오는 천둥소리.
번쩍!
우르릉― 쾅!
“아이쿠.”
그는 지례 놀란 표정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선인도가 일으킨 기묘한 현상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필시 이 검과 관계가…….”
내친김에 지드는 저 위 바위산을 향해서 한번 휘둘러 봤다.
홱!
쾅! 우르르―
이번에도 믿지 못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말았으니 그처럼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가 번개에 맞아서 박살이 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와우!”
계속해서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는 지드, 하지만 그의 욕심은 더욱 컸으니 이번엔 오른쪽 거대한 나무를 대상으로 찌르기 동작을 했다.
쩍!
그러자 검의 형상이 길게 뻗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변하더니만 숲지대 자체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마치 상상조차 못할 거인이 검을 내리 뻗는 것처럼 말이다.
거대한 검의 형상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지드의 손아귀에 가볍게 쥐어 져 있었다.
“…….”
대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가.
지드는 그저 멍한 얼굴로 일관 할 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로부터 수일 후.
선인갑과 선인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경험을 겪은 그로서는 아직도 심장이 떨리는 일이었다.
세상에 이처럼 막강한 무기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놀라고 또 놀랄 뿐이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조율이던가. 무작정 힘이 강하다고 해서 그 에너지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한다면 그 것 또한 골치 아픈 일이었다.
“수련이 더 필요해. 이것들을 자유자재로 내 것으로 완전히 만들기 위해서는.”
그저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 없는 모양의 선입갑과 선인도이지만 오히려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복장이라서 더욱 자연스러웠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모처럼만에 미소를 띠었다.
“하하!”
실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었던가.
그리고 내뱉는 한마디.
“이제 다 죽었어!”
훗날 역사 서고는 오늘의 일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었으니.
악의 세력이 득실거리는 혼란한 세상에 어느 이름 모를 숲에서 위대한 전사가 탄생했도다.
놀랍게도 그는 하류검사 출신으로서 피체 왕국의 국왕을 지냈던 지드였으니.
나카스니아 대륙의 흉악한 존재들이 그의 발아래에서 벌벌 떨었고. 그 옛날 이리스의 전설을 계승이라도 하듯 이제 그를 능가하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도다.
………
그리고, 1년이 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