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스니아 대륙 아스티안 신전.
인간 세계에 비해 이곳은 모든 것이 경이로운 광경을 지니고 있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초저녁과도 같은 저녁노을과 한데 모인 별무리들이 하얗게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이곳 아스티안 신전만큼은 순수한 본질의 고급 정령들이 구축한 정교한 세계로서 아직은 악의 세력이 근접을 못하는 신성한 영토이기도 했다.
거대한 신전 구조물 앞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날개 달린 전사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었고 제단석 위에는 한 백발 노인과 금발의 아리따운 중년 여성이 보였다.
노인은 정령왕 아스티안으로서 자신의 딸 헤르시안과 함께 수호 전사들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수호 전사들이여. 그대들의 왕 이리스는 아직 신전 안에서 할 일이 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도록 하게나.”
그러자 수호 전사들 중에서 대장 카스피에가 당장 외쳤다.
“우리는 군주님을 뵙기 전에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이미 인간 세계로 토하는 차원의 틈새가 서서히 열리고 있기에 당장 서둘러 그리로 가야 함을 어찌 모르시는지요. 정녕 답답합니다.”
그러자 정령왕이 답했다.
“답답한 것은 오히려 나이니라. 이리스는 현재 최근에 어둠의 제왕의 부활로 붕괴된 차원의 틈새를 막기 위해서 신전 제단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음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물론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틈새는 계속해서 벌어질 테고 결국 통로가 완전히 개방된다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용족과 마물들이 인간 세계로 쏟아져 내려갈 텐데 도대체 왜 망설이시지는 겁니까.”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문이 열리기 전에 그 틈을 메우려 함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미 벌어진 틈은 다시 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군주님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갈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갑갑한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았다.
“허, 거참. 고집이 센 자들이로군.”
그때 나서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이리스이자 인간세계에서 아독이란 불리는 영웅의 아내 헤르시안 정령이었다.
“다들 제 말 명심해서 들으세요. 이리스 님은 절대 신전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나마 그분이 차원 틈새를 막고 있기에 아직은 용족들과 마물들이 대거 이동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찌해야 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어둠의 종족 다크퍼스들과 용족의 앞잡이인 마룡들이 이미 인간 세계로 내려가서 크나큰 혼돈을 야기하고 있다는데 말입니다.”
“…….”
헤르시안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잠시 고민에 잠기는 듯 보였다.
그리고 다시 말문을 여는 그녀.
“일단 그대들부터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대장이 의외의 얼굴로 말했다.
“저희들부터라니요.”
“방금 전 그대가 말한 대로 인간 세계에 닥친 위험이 벌써 나카스니아 대륙의 세력 범위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으니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비록 이리스 님이 함께 못하시지만 그대들이 인간계 전사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형성하여 다크퍼스와 마룡들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막아 주는 것이 급선무라 봅니다.”
결국 대장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잠시 후 수호 전사들은 각자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라 어디론가 날아갔다.
대략 500여 명이랄까.
그들은 수십 년 전 이리스와 함께 인간 성지를 지키기 위해 뜻을 모았던 나카스니아 대륙의 유일한 인간 종족들이었다.
한편 머나먼 상공 위로 철새 떼처럼 날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던 정령왕은 한숨을 짓고 말았다.
“저들이 저러는 것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 후. 설마 어둠의 여신이 론의 아들을 찾아내어 그에게 흑운성의 권능을 부여 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때문에 용족의 나르시오스마저 지상으로 내려가서 자신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소위 돌격부대에 속하는 마룡들을 불러 내리고 있으니 말이야.”
헤르시안 역시 노심초사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큰일이에요. 그들이 작은 틈새를 이용해 인간 세계로 쏟아져 내려간 지 벌써 일 년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부 대륙 서부 영토가 완전히 잠식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정령왕이 이번엔 더 큰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 외손자들은 잘 있는지 모르겠군.”
그러자 헤르시안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아, 아마 무사할 거예요. 아라퀘스는 제 앞길을 헤쳐 나갈 만큼 컸을 테고 게토는 제국의 황실 역사서고 연구원으로 발탁이 되어 근무할 테니까 별일 없겠죠.”
“최근에 소식은 주고받았느냐.”
“아뇨.”
“하기야. 너 역시 이리스 옆에서 차원의 틈새를 줄이려고 고생했으니 인간 세계에 신경 쓸 틈이 없었겠지.”
“…….”
헤르시안은 슬픈 기색으로 변했고 눈물마저 글썽이려고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지금쯤 두 아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하건만.
다시 들려오는 정령왕의 탄식 섞인 음성.
“지금 이 상황에서 한 가지 매달려 볼 게 있다면, 인간 세계에서 아주 특출한 전사가 나타나서 그들을 막아 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수호 전사들이 그리로 향했으니까 당분간은 괜찮겠죠.”
“그들 가지고도 역부족이라는 것은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솔직히 내 심정 같아서는 당장 이리스를 불러서 지상 세계로 파견시키고 싶다만.”
“그럴 수 없는 건, 아버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대체 이 일을 어쩔꼬. 제발 이리스 전투력의 반만이라도 따라오는 쓸 만한 인간 전사가 등장한다면 얼마나 좋을 텐가!”
“그런 분이 나타나기를 빌어야겠죠.”
정령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
“희망을 가지세요. 일단은 하렘의 군장을 남겨 두고 왔으니 위급할 시에 아라퀘스에게 그 군장을 착용하라고 했거든요.”
“하기야 지금으로서 믿을 것은 그 녀석밖에 없겠지. 더군다나 정령인 너와 이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 만큼 그 잠재적인 능력이 매우 특출 날 것이라 믿고 싶다. 사실 용족 이카루시아와 피아체 사이에서 태어난 나르시오스 역시 오늘날 불사의 용으로서 나카스니아 대륙을 지배하고 있지 않느냐. 따지고 보면 그 둘은 사촌 관계이고 그 어떤 능력 면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헤르시안이 다소 어두운 안색을 했다.
“정작 본인에게는 그 얘길 아직 해 주지 못해서…….”
“스스로가 깨달아야지. 이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하렘의 군장을 착용한다면 자연스레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를 알게 될 거야.”
“설령 능력을 찾는다 할지라도 혼자서는 무척 힘들 텐데요.”
그러자 정령왕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이리스와 너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놈이 그 누구에게 쉽게 당하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난세에 영웅이 태어나는 법. 아마도 녀석의 운명은 지금 시대와 어우러져 있음이 분명할 게야. 물론 다른 존재가 등장해서 녀석을 도와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허! 인간 세상에는 이렇게도 인재가 없었던가.”
“…….”
***
남부 대륙에 사상 초유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팔라카스 제국을 중심으로 인근 영토에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등장하여 세상천지를 피로 얼룩진 대지를 점점 넓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마계가 열려 지옥의 심판을 받고 있음을 믿는 실정이었다.
무시무시한 다크퍼스들과 마룡들과의 혈전에 애꿎은 희생자들은 오로지 인간들뿐.
하루에만도 수많은 인간들의 육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니 이곳은 이미 인간 세상이라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나마 그들에게 대항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산악 지방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피체 왕국이었다.
그들은 주변 나라들과 부족들을 규합하여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을 마계의 존재들로부터 구하느라 오늘도 백방 노력을 하고 있었으니, 그 노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피체 왕국의 사령부.
현재 이곳은 부재 중인 국왕 지드의 공석으로 참모 하키리우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군단장 지노와 옛 대원들이 각 수장 자리를 꿰차고 ‘주민들 구하기’ 작전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었다.
회의는 연일 열렸고 그날마다 각자 실적을 보고하고 차후 대책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호 비스크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에네스 부족민들은 어제 이쪽으로 모두 안전하게 이동시켰습니다. 후후, 설마 놈들이 계곡과 구불구불한 협곡을 따라서 탈출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자 지노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거야 놈들이 서로 싸우느라 추적 의지가 없어서 그런 거지.”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네놈의 그 잘난 공치사가 듣기 싫어서 그런다. 막내 아레스는 며칠 전에 아칸 왕국의 주민들을 통째로 피난 시켰건만 지금까지 한 번도 자랑이니 그런 비슷한 소리 한 적이 있더냐!”
“그게 다 성격 차이 아닙니까. 요즘은 자기 자랑 시대라고 나는 내가 한 일 알리고 싶은데 어쩌라고요.”
“하여간 저놈은 고놈의 주둥아리만 살아 가지고서는…… 쯧쯧!”
“괜히 그러셔…….”
이번엔 아레스가 다소 어두운 기색으로 참모에게 말문을 건넸다.
“국왕 폐하께서는 아직 소식이 없으신가요.”
그러자 회의장 분위가 다소 침울한 분위기로 변했다.
“아직…….”
3호 크리스가 말했다.
“설마 진짜 테세우스에게 당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비스크가 버럭 소릴 질렀다.
“재수 없는 소리! 폐하께서 그리 호락호락 당하실 분이시더냐.”
크리스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그따위 소문은 믿을 거 없다. 분명 폐하께서는 당분간 어디 갔다 오시느라 늦는 거라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2호 게리 역시 매우 굳은 표정이었다.
“연락이라도 해 주시면 이렇게 마음고생도 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비스크가 외쳤다.
“정말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폐하께선 너무 무심하신 게 아닌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판에 대체 어딜 가신 건지. 나 참!”
순간 지노가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무례하게 감히 폐하를 그런 식으로 운운하다니.”
“저도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답답해도 그렇지.”
그러자 그동안 잠자코 있었던 참모 하키리우스가 그들을 만류했다.
“다들 진정들 하시오. 머지않아 폐하께서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막내 아레스가 물었다.
“그런데 요즘 기사단장 아라퀘스가 보이지 않는데 어디 파견 나갔나요?”
“그는 잠시 고향에 갔네.”
“고향이라니요?”
“무엇 좀 가져올 게 있다고 해서.”
비스크가 다시 심통을 부렸다.
“이 판국에 고향이라니. 남들은 인간들 구하느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누군 아주 팔자 좋군그려.”
“그저 고향에 놀러 간 곳이 아니니 자네가 이해해 주게나.”
“뭐, 저도 그냥 해 본 소리였습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감세나. 어제 파나스 왕국으로부터 전령이 급히 왔는데 현재 그곳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하더군,”
“이번엔 다크퍼스랍니까, 마룡이랍니까.”
“마룡이라네.”
“빌어먹을 괴물들!”
“자네들도 알다시피 마룡들은 인간 변신 능력이 있는 존재들로서 요즘은 왕궁부터 장악하여 국왕과 왕족들부터 살해하고 그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인간들을 통치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네.”
“설마 거기 가서 주민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은 아니겠죠.”
“…….”
참모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비스크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이고. 이번에도 죽었다 복창이네.”
“이번 임무는 매우 어려울 테니 비스크 자네와 아레스가 함께 가게나.”
그러자 그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막내와 함께라면 좋습니다. 후후.”
“내일 새벽에 출발하게나.”
“네, 알겠습니다!”
***
아라퀘스는 수년 만에 돌아온 고향의 폭풍의 언덕을 바라보며 옛 회한에 잠기고 있었다.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밀밭에서 아버지와 함께 뒹굴던 추억들, 동생 게토 녀석이 넘어져 울면서 엄마한테 이르기 위해 밀밭을 뛰쳐나갔던 일들.
그로부터 벌써 10여 년이 흘렀던 말인가.
휘잉―
한 줄기 광풍이 가을 녘의 황금빛 들판을 거세게 휘저었다. 아라퀘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려고 했다.
어렸을 때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떠난 뒤로 처음 와 보는 집, 들판에는 벌써부터 수확을 하려는 밀밭 농사꾼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그는 언덕 위에 있는 하얀 석조 건물 앞에 다다랐다.
“아.”
정원에 잡초들이 무성하게 나 있는 것을 보니 역시나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삐걱―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가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신기하게도 떠날 때 그 모양 그대로 말이다.
다만 먼지만이 수북이 앉아 있었으니 가족의 손길이 끊어진 지 수년이 흘렀기 때문이리라.
이번엔 뒤뜰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착!
“와우.”
어머니가 항상 꾸미던 정원의 꽃밭 만큼은 아직도 알록달록해 보였으니 갑자기 옛 그리움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앉은키만큼이나 자란 잡초들을 뽑으며 그와 동시에 꽃향기를 맡으며 행복해 하였다.
꽃밭을 지나 숲으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니 큰 바위 언덕이 보였다. 그는 그 뒤편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덤불에 가려진 돌무더기를 발견했고 그것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탈가닥. 탈가닥.
거의 돌을 치웠을 무렵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그 뚜껑을 열자 회녹색빛의 군장과 피처럼 붉은 색상의 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와.”
실로 감회가 새로웠다. 아버님께서 직접 사용하셨던 물건이니 만큼 경건한 자세로 그것들을 끄집어 올렸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났다.
아버님은 이 물건을 함께 이곳에다 파묻으며 말씀하셨다.
***
“아라퀘스.”
“네, 아빠.”
“이것들이 뭔지 아느냐.”
“군장과 검 아니에요?”
“그저 단순한 병기와 보호대가 아니다.”
“그럼 뭐예요.”
“이건 나카스니아 대륙의 유물이라 할 수 있지.”
“나카스니아 대륙의 유물이라니요? 거긴 어디죠?”
“하하. 아직 내가 얘기해 주지 않았던가.”
“뭘요.”
“하긴 이제 일곱 살인 네가 뭘 알겠느냐. 난 그래도 네 엄마가 얘기해 준 줄 알았는데.”
“도통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얘길 해 주마. 우선 이 검은 헤란타의 붉은 검으로 네 녀석이 상상조차 못할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단다. 그리고 이 군장은 하렘의 군장 혹은 이리스의 군장으로 불린단다.”
“하렘은 누구고 이리스는 누군데요.”
“하렘 님은 내 조부님과 친구셨고 이리스는 바로 나카스니아 대륙에서 불렸던 내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거 아빠가 착용하셨던 거예요?”
“그렇지. 험.”
“우와!”
“이 군장 역시 보통 것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단다.”
“뭐가요?”
“군장의 변화가 가능한 독특한 물건이지. 가령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가졌다든지 어깨 양옆 보호대 속에는 타룬이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병기들도 숨겨져 있단다.”
“그런대 이걸 왜 여기다 묻어 두는 거예요?”
“훗날을 대비하기 위함이지.”
“훗날이라니요?”
“혹시라도 이 세계에 불어 닥칠 위험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때 아독이 아들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때가 되면 네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제 힘이요?”
“이제 내일부터 이 아비가 네게 흑검술과 원천기술을 가르쳐 줄 테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라.”
아라퀘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어차피 네 녀석의 운명 또한 나와 비슷하니 일찌감치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구나.”
“전 그런 거 배우기 싫은데요.”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반드시 익혀야 할 것이야.”
“정말 싫은데요. 저 내일 애들하고 강가에 가서 물고기 잡기로 약속했거든요.”
아독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네 녀석도 좋은 시절은 다 갔군.”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튼 다른 생각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싫은데요. 정말…….”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그리 알거라. 그리고 훗날 네가 원천기술 제3장 파동역발검을 모두 익히거든 그때에는 이곳에 와서 이 상자를 열고 군장과 검을 갖도록 해라.”
“그건 왜죠?”
“반드시 필요한 날이 올 것이다. 군장과 검 사용법은 상자 밑바닥에 따로 적어 두었으니 참고하도록 하고.”
“아버지는 그때 어디 계실 거죠? 마치 떠나시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후후. 그 녀석 누구 닮아서 그리도 말이 많은지.”
“…….”
***
아라퀘스는 옛 생각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결국 이렇게 됐군요. 후후.”
아버지께서는 바로 오늘날 사태를 예언하고 이런 물건들을 남기셨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아라퀘스는 동생의 소식이 궁금해서 아르카도 제국에 도착해서 역사 서고 위원회부터 찾았다.
헌데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식이란 말인가.
서고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동생 게토는 지금으로부터 3개월 전 행방불명이 되었단 것이다. 아라퀘스는 한동안 멍한 자세로 일관을 해야만 했다.
그날 저녁 그는 옛 사관학교 동기이자 현재 흑검단 교관을 맡고 있는 친구 에세를 찾았다. 드넓은 대저택, 들어가면서부터 위축이 될 정도로 화려한 정원과 온갖 귀한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잠시 후 로비에서 아라퀘스를 반갑게 맞이해 주는 친구의 음성.
“아라퀘스!”
“에세…….”
“오! 정말 자네가 맞는가.”
“…….”
아라퀘스는 잠시 힘없는 얼굴을 했다가 곧이어 물었다.
“혹시 내 동생 일에 대해서 아는가?”
순간 에세 역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게토 말이지? 흠…… 그게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뜬금없이 일어난 일이라서. 나도 도통 모르겠네.”
그러자 아라퀘스가 성질을 내듯 외쳤다.
“내가 그렇게도 부탁을 했건만 내 동생 하나 살피지 못했단 말이냐!”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나 역시 모든 수색대를 동원해서 근처는 물론 주변 지대까지 샅샅이 찾아보도록 했워. 무려 한 달에 걸쳐서 수천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런 단서조차 없고. 혹시라도 고향에 내려갔나 해서 수하들을 보냈지만 아무도 살지 않더군.”
순간 아라퀘스는 그 자리에서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아. 게토 이 녀석이 대체 어디를!”
친구 에세 역시 갑갑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잠시 후 친구의 부축으로 접견실에 들어온 아라퀘스, 그는 아직도 멍한 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에세는 그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말 붙이는 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바로 그때였다.
현관을 들어서는 중년인이 있었으니 바로 에세의 아버지 카르타시스였다. 그가 이들에게 다가와서는 아라퀘스를 살펴보며 아들에게 물었다.
“누구지?”
그러자 에세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마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친구인가.”
“친구도 보통 친구가 아니지요.”
“아빌 놀리지 말고 어서 말해 보거라.”
“바로 아라퀘스입니다.”
“…….”
카르타시스는 아라퀘스라는 말에 잠시 멍한 상태로 있었고 되물었다.
“혹시 아독의…….”
“맞아요. 아버님 친구 분의 장남.”
“오호! 세상에.”
그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냅다 아라퀘스를 껴 앉는 것이 아닌가.
“이리 와 보게. 자네가 진정 아독의 아들인가!”
아라퀘스는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다소 당황스런 모습을 했다.
“아, 네.”
“내 자네를 찾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가.”
“저를 찾다니요?”
“자네 동생 일은 무척 유감스럽지만 그보다도 우선 자네에게 할 말이 있으니 냉큼 거기 앉게나.”
“…….”
아라퀘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현재 아르카도 제국의 집정관이자 실세인 친구의 아버지, 그가 왜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았는지 그것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집정관 카르타시스의 얘기를 모두 전해 들은 아라퀘스는 이만저만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 아버님께서 정말 그리 말씀하셨나요?”
“암, 그렇고말고.”
“저는 무슨 내용인지 아직도 도통 납득이 가지 않는 군요.”
“그럴 만도 하겠지. 나 역시 처음에는 그저 건성으로 들었으니까. 알다시피 나와 자네 부친과는 흑검사 동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수십 년 지기라고 할 수 있지. 그런 나도 그의 선견지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에세 역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설마 모든 군권을 아라퀘스가 쥐게 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가 아라퀘스에게 전해 달라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5년 전쯤 아독이 에세의 부친을 찾아오셨다고 했다.
그때 아독은 언제가 대륙의 틈이 열리는 시기가 있을 테고 다른 세계로부터 기이하고 강력한 존재들이 출현할 시기에 세상은 크나큰 혼돈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말했단다.
그때를 대비해서 군권을 강화하고 현재의 특수부서의 흑검사 숫자를 대폭 늘려서 아예 군단 규모로 편성해야만 하는 내용들, 특히 에세가 놀란 부분은 언제가 찾아올지 모르는 아라퀘스에게 흑검 군단의 모든 지휘권과 권한의 일임해 달라 부탁했다는 대목이었다.
에세의 부친은 아독의 말대로 무려 2만여 명으로 이루어진 흑검군단을 창설했고 이제나 저제나 아라퀘스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물론 아라퀘스는 뭔가에 홀리는 기분이었으니.
“제가 어떻게…….”
“나는 무조건 자네 부친의 말을 믿는 사람일세. 실제로 현재 남부 대륙에서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의 예언이 들어맞고 있음이 사실일세. 그러니 다른 것은 일체 생각지 말고 그저 내 말대로 흑검군단을 이끌어 주기 바라네.”
“…….”
“이게 다 그 친구가 남긴 일이니까 아들인 자네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참고로 흑검군단 부단장은 에세가 내정되어 있으니 그 점 참고하게나.”
“저, 저기 제 동생부터 찾아야 하는데요.”
“일단 그 일은 집정관인 내게 맡겨 두게나. 전군을 풀어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그러니 자네는 무조건 군단과 함께 남부 대륙으로 가서 마물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나라들을 도와주게나. 이건 어디까지나 자네 아버지 뜻이라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