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71 전설은 시작되다(9권) (72/81)

Chapter. 71 전설은 시작되다

머나먼 동남부 영토로부터 작은 전설은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혜성과도 같이 나타나 인간들을 위협하는 괴물들을 물리친다는 이야기.

허름한 갑옷을 입은 그가 이상하게 생긴 검 하나로 이미 수많은 다크퍼스들과 마룡들을 피의 제물로 삼았다는 소문은 끊이질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세상을 구하러 온 수호 전사라 칭하고 있었다.

***

휘잉 하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 바람 뒤에서,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붉은 갑옷 차림의 한 사내가 산등성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등 뒤에 찬 검이 태양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는 한 손으로 땀을 닦으며 가볍게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저곳이 히피 왕국의 영토라 그랬던가.”

그러더니 자리에 앉아 가죽 물통을 입에다 대고는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오랜 여정에 지친 방랑자와도 같이 바위에 등을 기대어 휴식을 취한다.

“아무리 죽여도 끝이 없으니. 거참, 혼자선 역시 무리였나. 후…….”

결국 한숨을 쉬고 마는 사내, 그는 잠시 눈을 붙였으니 지는 석양 아래 잠을 청할 모양이었다.

***

같은 시각 히피 왕국의 왕궁 내.

팍!

“아아.”

팍!

“헉!”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커다란 회전판에 묶어두고 돌리면서 다크퍼스들이 단도를 던지고 있었다. 단도는 노인의 겨드랑이와 다리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비껴 꽂혔는데 이에 한 여인이 울부짖으며 그들의 잔혹한 놀이를 만류하고 있었다.

“제발 그만 두세요. 우리 아바마마를 살려 주세요!”

“시끄러워, 이년아! 네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으니까 우리가 이러는 거 아니냐.”

“이제 뭐든 하라는 건 다할 테니까 제발 풀어 주세요!”

다크퍼스들 중 하나가 입술을 불쑥 내밀며 심통스럽게 말했다.

“진작부터 그렇게 나올 것이지. 하지만 이젠 늦었다.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크크!”

팍!

“아아.”

팍!

수십여 다크퍼스들은 묶여진 국왕에게 칼을 던지는 게임에 이미 푹 빠졌는지 공주의 절규조차 외면하는 것 같았다.

“살려 주세요. 오늘밤부터라도…… 시중을 들 테니까요.”

그러자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흉측한 몰골의 다크퍼스가 말했다.

“거참 성가신 계집이로군.”

“제발요!”

“언제는 죽어도 싫다고 발악 우기더니만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뀐 것이야? 에잇! 성질 나는데 이년도 묶어 버려야겠군.”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헉!”

“그러게 누가 시끄럽게 굴랬어?”

“이거 놔줘요!”

잠시 후 국왕 옆 회전판에 묶여진 공주, 결국 그녀 역시 다크퍼스들의 단도 던지는 게임 놀이 목표가 되고 말았다.

“하하, 이거 더 재밌어지겠군. 아비와 그 딸년이……라.”

“그럼 난 공주 쪽으로 던져야겠군.”

“나도!”

“단도가 신체 부위 가장 가까이 닿는 녀석이 내기에서 이기는 거다.”

“하지만 공주만큼은 다치게 해선 안 돼. 오늘밤 우리들을 상대해야 하니까.”

“어차피 내기 놀이인데 보장은 할 수 없지.”

“뭐, 일단 시작하지.”

이제 다크퍼스들은 국왕 대신 공주 쪽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단도를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공주는 너무나 무서워 눈을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자 국왕이 분노하여 소리쳤다.

“이놈들아, 차라리 나를 죽여라! 어찌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하는 거냐!”

그 말에 다크퍼스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저 늙은이 뭐라는 거야?”

“죽여 달라는 것 같은데?”

“시끄러운 노인네구나. 콱 소원대로 죽여 줄까? 내기 놀이는 공주로 대신 하고 말이야.”

이번엔 그 말이 공주의 귀에 들렸을까.

“안 돼요! 차라리 저를 죽여 주세요. 흑흑!”

“뭘 또 징징거리고 그래.”

“제발 아버지는 살려 주세요!”

그러자 대장 다크퍼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저것들이 아주 놀고 있네. 서로 죽겠다고 지랄들이니.”

“그래서 인간들이 재수 없다니까? 그냥 성질 나는데 공주고 나발이고 둘 다 죽여 버릴까.”

“그러지 뭐. 계집년들은 이 왕궁 안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뭐 상관은 없겠지.”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합의를 본 듯했다. 참으로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사람들을 그저 벌레 보듯 살인하는 것도 즐거운 놀이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다크퍼스가 단도를 들어 국왕 쪽으로 던졌다.

홱!

팍!

“악!”

단도는 정확히 국왕의 오른쪽 허벅지에 꽂혀 버렸다. 이에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으니.

“아아아아!”

공주가 절규했다.

“아바마마! 흑…….”

하지만 다크퍼스들은 두 부녀의 외침에도 상관하지 않는 듯 저들끼리 시시닥거렸다.

“겨냥을 잘못했잖아. 머리 쪽으로 던져야 즉사를 하지.”

“보채지 마. 일단 맛보기만 보였을 뿐이야.”

“제대로 해 보라고.”

“다음엔 명중시킬 테다.”

“잠깐. 이미 네 순서는 지나갔어. 이번엔 내 차례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지. 크크.”

한 다크퍼스가 단도를 들어 다시 국왕에게 겨냥하여 던지려고 했다. 결국 그의 서슬이 시퍼런 칼날이 그의 손을 떠났다.

홱!

공주는 아버지에게로 날아드는 단도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헌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단도가 국왕의 코앞에서 저절로 멈추는 것이 아니던가!

이에 다크퍼스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저마다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도가 절로 섰네?”

“대체 뭔 일이야. 빌어먹을!”

“어떤 놈이 방해한 거 아냐?”

“누가!”

바로 그때였다.

스르르.

국왕 바로 앞에 나타나는 한 인형이 있었으니 다소 독특한 갑옷 차림의 한 사내였다.

그는 다크퍼스들을 향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후후.”

“웬 놈이지? 혹시 단도를 세운 놈이 저놈인가?”

“감히 우리 놀이를 방해 하다니, 당장 죽여 버리자!”

그러자 사내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자, 나를 목표로 하던 게임이나 마저 하시지.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하.”

“저 자식 뭐라는 거야. 자기한테 단도를 던지라는데?”

“미친놈인가.”

그러자 대장 다크퍼스가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마디 했다.

“미친놈이 단도를 허공에서 멈추게 한다더냐. 내가 보기에 저놈은 보통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보통 인간이 아니어 봤자 그게 그거지.”

한 다크퍼스가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단도를 사내에게 던졌다.

“이얏! 뒈져라.”

홱!

슈슈슈―

파공음을 지르며 날아가는 시퍼런 날, 한데 사내는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어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으니.

파팟! 퍽!

“컥!”

이미 던져진 단도가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원래 던진 자의 눈에 사정없이 박혀 버리는 것이 아니던가.

“아아악!”

그 다크퍼스가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으니 그제야 다른 다크퍼스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장이 대뜸 물었다.

“네놈의 정체가 뭐냐!”

사내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내 정체가 뭐냐 하면 네놈들을 잡으러 온 사자다.”

“뭣이라!”

“개새끼만도 못한 잡종들.”

“모두 뭐 하냐! 저놈을 향해서 집중 공격해라.”

대장의 말에 다크퍼스들이 모두 단도를 꺼내 들어 일제히 던졌다.

파파팟!

수십여 개의 파공음! 이어 역방향에서 비명이 들려왔으니!

퍽!

“컥!”

팍!

“악!”

이번에도 단도들이 방향을 바꾸어 다크파스들의 안면을 사정없이 박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털썩털썩―

단도는 하나같이 급소에 박혔는지라 거의 대부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자는 대장뿐,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뭐, 뭐야. 네놈은…….”

이제야 알았던가. 그가 요즘 동남부 영토에 등장한 수호 전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검을 뽑고도 감히 대적하려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어쨌든 그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그의 몸이 저절로 허공으로 붕 떠서 사내에게 다가가고 있었으니 지금 이 상황으로서는 속수무책 끌려가야만 했다.

“사, 살려 줘.”

슈슈슈슈―

어느새 사내 코앞까지 붕 떠서 다가서 버린 대장, 그는 마치 육중한 돼지처럼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지상으로 하강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뭔가의 힘이 더욱 죄어들어 왔으니 정말이지 거대한 태산 앞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사내가 말했다.

“방금 전 했던 놀이가 재미있었나?”

“…….”

대장이 대답을 못하자 사내가 다시 씩 웃었다.

“후후.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사내는 국왕과 공주를 풀어 주었고 오히려 그 회전판에 대장을 묶어 두었다. 그러고는 다크퍼스들이 썼던 단도들을 주워 와서는 대장을 겨누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단도가 네놈을 비껴 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말하자마자 단도 하나를 세게 던졌다.

홱!

팍!

“아아!”

정확히 가랑이 사이 위쪽으로 꽂혀 버렸으니 대장은 오줌이라도 지릴 판이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다 말할 테니.”

“벌써 불면 재미없는데…… 아직 놀이를 즐기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래도 대장으로 보이는데, 말하는 꼴이 영 보기가 좋지 않네?”

홱!

팍!

“헉!”

순간 하나의 단도가 다시 그의 얼굴 옆 회전판에 다시 박혔다. 그리고 볼썽사납게 대장은 진짜로 바지 아래로 오줌을 흘리고 있었다. 사내가 그 모습을 보고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직접 당해 보니 스릴 있지 않나? 하하하.”

사내가 웃자 이번엔 국왕과 공주가 그의 광기 어린 모습에 뭐라 말을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로서는 죽음 직전에 자신들을 구해 준 그자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내가 대장에게 다시 물었다.

“사령관의 행방을 아는가?”

“사, 사령관이라니요.”

“카르발디 말이다.”

“아! 카르발디 사령관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 있어?”

“저, 저기…….”

대장이 말끝을 흐리자 단도 하나가 다시 던져졌다.

팍!

“아악!”

이번엔 둔탁한 음이 났고 칼날의 끝이 정확히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꽂혀 버렸던 것이다.

“아아아아!”

비명의 끝이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좀 전보다도 더욱 냉담해지고 있었다.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이번엔 눈깔에 박아 주겠다. 자 카르발디는 지금 어디 있는가.”

대장이 재빨리 외쳤다.

“사령관님은 현재 키라 왕국의 왕궁에 계십니다!”

“키라 왕국?”

“네.”

순간 다시 파공음이 들려왔다.

홱!

퍽!

“컥!”

두 개의 단도가 그의 두 눈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사내는 더 이상 캐물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그냥 죽여 버렸다. 그의 잔인함에 국왕과 공주가 뭐라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까 봐 우려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국왕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요? 그나저나 시간이 없는데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 그러시오.”

“키라 왕궁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국왕이 얼떨결에 손을 들어 북쪽을 가리켰다.

“북쪽으로 산맥 두 개를 넘어야 합니다.”

“감사하오.”

사내는 더 이상 물어 보지 않고 등을 돌려서 떠나려 했다. 그러자 국왕이 용기를 내어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요.”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 같은 놈 이름 알 필요 없소이다.”

“혹시 동남부 영토의 수호 전사…….”

사내는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그렇게 불리던가요? 후후.”

“아. 그, 그분이 맞으시군요.”

국왕과 공주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 분은 당장 왕궁을 떠나서 어디 인적이 드문 곳으로 피하십시오. 머지않아 다크퍼스들이 또다시 들이닥칠 테니까. 그럼, 이만.”

“…….”

바로 그때였다. 사내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하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탁!

슈우욱! 팟!

한순간에 상공 위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 사내, 이를 바라보던 국왕과 공주는 믿기지 않는 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공주가 말했다,

“어떻게 저런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요.”

국왕 역시 혀를 내두르며 답했다.

“적어도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자 같은데…….”

***

카르발디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남부러워 할 것이 없었다. 남부 대륙을 휩쓸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테세우스의 오른팔로서 동남부 영토 다크퍼스 사령관 자리에까지 오른 그가, 지금에는 얼마 전에 함락시킨 키라 왕국의 왕궁에서 국왕처럼 군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과연 다크퍼스 군단의 힘은 무적 그 자체였다. 그들을 지휘하면 그 어느 곳을 가든지 간에 연전연승을 하니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힘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그에게도 한 가지 풀리지 않은 가슴의 앙금이 있었으니, 바로 에르가니아 문제였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대한 연정이 깊은 만큼 오늘날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으니 그런 아픔을 달래기 위해 매일 같이 황궁의 궁녀들과 주색잡기 놀이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휘잉.

선선한 바람으로 한여름의 열기가 식어 가는 계절이었다. 카르발디는 지난밤의 숙취를 이기지 못한 듯 연신 물을 들이켰고 침실에서 일어나 테라스 바깥으로 나왔다.

“후.”

한숨 깊게 들이 쉬며 이내 한숨을 쉬고 마는 카르발디, 연일 계속된 연회에 찌든 몸을 겨우 붙잡고 드넓은 황궁의 연병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는 에르가니아가 아른거리니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애초 에르가니아를 납치한 일과 테세우스의 심복이 되기로 한 일이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러고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으니.

“후후. 내가 이만한 위치에 올랐는데 무엇을 후회하겠는가.”

사실이 그랬다. 이제는 한 여인에 대한 연정보다는 권력을 움켜쥔 그 마음이 더욱 강했던가.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후회란 개념은 없었다.

오늘은 다크퍼스들을 위한 특별한 날이었다. 황궁의 연병장에는 거대한 솥들이 수십여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각각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솥 밑부분에는 매우 큰 장작들이 서서히 불이 지펴지고 있었다.

황궁 경비대로 보이는 수백여 명의 다크퍼스들은 각자 대검을 앞세워 어디로부터인가 데려온 인간 포로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인육 파티에 끌려온 가여운 시민들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면 끓는 물속에 산 채로 던져져 저들의 고기감이 되고야 마는 신세들, 남자와 여자 심지어 애들과 노인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저 바들바들 떨며 잠시 후 가혹한 운명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무서워.”

“아가야 울지 마.”

“저들은 악마들이 틀림없어. 아!”

한편 테라스에서 이를 바라보던 카르발디는 그저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그 자신도 곧이어 벌어질 축제에 관심을 가지는 듯 보였다.

그가 무시무시한 다크퍼스 군단을 오늘날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이끌어 왔던 이유들 중 하나가 오늘 같은 인육 파티를 자주 열어 주며 그들의 환심을 사 왔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오늘은 사람들이 꽤 많이 끌려 왔군. 아예 날 잡았나.”

그는 저들과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다지 동정심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그저 다크퍼스들이 파티를 즐기며 기뻐하는 모습에 중점을 둘 뿐이었지 포로들의 생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잠시 후, 솥단지들의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자 다크퍼스들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각각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세상에 그 누가 뜨거운 물속으로 순순히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텐가.

“살려 줘요! 엄마!”

“아가야! 제발 살려 주세요.”

“엉엉.”

그들 중에는 가족도 있었고 앞서 솥으로 던져지려는 자식을 향해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처절해 보였다.

그 광경에서는 카르발디마저 인상을 찡그리며 쓴맛을 다셨다.

“제길.”

어차피 인간의 인성을 버린 그였지만 다크퍼스들의 무차별한 행위에 대해서는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사령관으로서 저들 위에 군림하려면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첫 제물의 아이가 솥으로 던져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신기하게도 아이가 저절로 둥둥 떠서 다크퍼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스윽.

“뭐, 뭐야.”

황궁의 연병장의 모든 다크퍼스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으니 담벼락 너머로 둥실둥실 떠 가는 아이였다. 이에 카르발디의 눈빛이 번뜩였다.

“저, 저건 공력 기술!”

그는 단번에 눈치를 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니나 다를까, 담 위에 아이를 앉고 서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으니 이내 그가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지드!”

사내는 다름 아닌 지드였다.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저, 저 자식이!”

바로 그때였다.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지드 역시 테라스에 나와 있는 카르발디를 발견했고 큰소리를 쳤다.

“오랜만이군. 잘 있었나!”

공력이 담긴 음성이라 황궁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에 카르발디로서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네놈이 갑자기 왜 나타난 거지!”

“그야 널 보러 왔지.”

“날 보러 왔다고!”

“이제 네놈과의 볼일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고 할까?”

이에 카르발디가 당혹스러워 했다.

“나는 네놈과 볼일 없는데.”

“볼일이 없다니!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

“대체 여기는 왜!”

“너는 피체 왕국의 제3군단 부군단장의 신분이면서도 군단장 에르가니아를 납치하여 전향하지 않았던가.”

“그, 그건 어떻게 하다 보니까…….”

“오늘날 테세우스의 개가 되어 다크퍼스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도륙케 하고 지금은 인육 파티를 열려고 하니 어찌 하늘이 너를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뭔 빌어먹을 소리를 하는 거야? 마치 네놈이 하늘이라도 된 것처럼 지껄이는군. 현재 네 앞에는 정예 다크퍼스들 만 수백여 명이 지키고 있는데 감히 나를 어쩌지는 못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지드가 짧게 말했다.

“모르겠는데.”

“뭐라!”

그러자 카르발디가 다크퍼스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당장 저놈을 죽여라!”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의 파티를 방해한 자이기에 그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무기를 빼 들고 앞장서서 나섰다. 이에 지드가 분노의 눈길을 태우며 담벼락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곧이어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홱!

“헉!”

“뭐야! 몸이 저절로 뜨잖아.”

그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곧이어 펄펄 끓는 물로 직행하고 말았다.

풍덩풍덩―

“카아아아악!”

“크오오오오.”

첨벙첨벙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 연병장, 사람들을 끓이기 위해 준비해 놓았던 솥단지에 자신들이 빠져 익혀지는 고기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살려 줘!”

“앗, 뜨거워.”

“아아아악.”

지드의 눈빛은 더욱 타올랐고 그의 시선이 찍히는 존재마다 몸이 절로 떠서 솥단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공력 기술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카르발디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내심 겁이 덜컥 났다.

“아아, 저놈이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끌려온 시민들 역시 저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토록 무시무시한 다크퍼스들이 한 사내에 의해서 속수무책 익혀져 가는 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지드가 무려 100여 m나 떨어져 있는 테라스 쪽으로 도약을 하여 순식간에 카르발디 앞으로 다가섰다.

탁!

가뿐한 착지로 난간 위에 올라서자 카르발디가 기겁을 한 듯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헉! 가, 가까이 오지 마!”

지드가 검을 뽑아 그의 목에 겨누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살려 줘!”

“살려 달라고! 그런 짓을 하고도 목숨에 연연하다니 양심조차 없는 새끼!”

“사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 의도가 아니라 테세우스에게 잡힌 신세가 되고부터였어!”

“잡혔다고?”

“그, 그래. 에르가니아 역시 할 수 없이 그들의 인질이 되고 말았고 나 역시 죽지 않기 위해 테세우스에게 협조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순간 지드의 칼날이 그의 목을 좀 더 파고들어 갔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스윽

“악!”

피가 톡 하고 터졌지만 아직은 생명에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이에 카르발디가 절규의 소리를 드높였다.

“방금 한 말은 절대 사실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하지만 지드의 노기가 더욱 하늘을 찔렀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네놈이 자행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법. 자, 이제 그 죗값을 고스란히 받아라.”

“…….”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카르발디였다. 그는 체념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들려오는 가벼운 파공음!

“헉!”

털썩.

그의 목 대신에 머리카락 한줌이 바닥에 떨어졌다. 카르발디는 어쩐 일인가 하고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이유인지 검 끝이 목 대신에 자신의 머리칼만 자른 것이 아니던가.

그때 들려오는 음성.

“죽일 가치조차 없는 놈!”

“살, 살려 주는 거요?”

지드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 그리고 테세우스에게 내 말을 전하라.”

“전하라니요?”

“내 곧 찾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를 정말 살려 주시는 것입니까!”

“마음 변하기 전에 가라니까?”

“아, 아, 네!”

그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만에 하나 지드가 다시 공격해 올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타다닥!

왕궁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려 저 멀리 사라지는 카르발디, 지드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휘잉―

구름에 태양이 가려진 오후 한나절이었다. 지드는 공허한 세상을 바라보듯 황폐해진 왕궁을 들러보며 내심 한숨만 나왔다.

‘어찌 세상이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이제 테라스의 주인은 지드였고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에르가니아.”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에게 가서 결투를 신청하고 에르가니아를 구해 오고 싶었지만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인도와 선인갑의 기연을 얻은 그로서 엄청난 힘을 얻었지만 아직은 그 기술을 조율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하지 못했기에 조금 더 신중함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스윽!

답답한 마음에 난간을 꾹 잡는 지드.

우지직!

너무 힘을 주었는지 대리석 난간이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적의 수중에 있으니 속이 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적이라는 자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로서 솔직히 선인도와 선인갑의 기술을 터득한다 할지라도 그 승산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 최근에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는 그 옛날 아독과 자웅을 겨루었던 흑마술 군단 론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힘과 흑운성의 기운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초강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어둠의 여신이라는 존재마저도 거대한 해일처럼 턱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섣불리 나설 처지도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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