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치오 제국의 최전방 서부 산악 요새 사령부 작전 회의실.
사령관 위스퍼는 흑마술 군단과의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모든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장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제군들이여! 그동안 십여 차례 적들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공세를 잘 막아 주었다. 우리의 임무는 사부 관문의 최전방 요새를 지키는 것으로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롤란도 평원을 내주게 될 것이다. 그곳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스카치오 제국으로 가는 거대한 길목으로 적들에게 유리한 고지 내주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전투에서 목숨 걸고 승리를 거두어야 함이다. 자, 이제 곧 적들의 공세가 펼쳐질 것이다. 이제까지 용감하게 싸워 왔듯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혈전을 벌여 저 사악한 암흑의 무리를 저지해야 할 것이다.”
위스파는 목에 핏발이 돋을 정도로 연설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회의장 분위기는 그의 기대와는 상반되게 여전히 침울한 상태로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회의가 끝이 나고 참모 레이만이 남아서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레이는 방금 전 어떡하든 각 지휘관들의 사기를 충천시키려는 사령관의 노고에 대해 뜻을 같이하려 했지만 워낙 현실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한지라 그저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사령관 위스퍼가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자네마저 그리 축 처진 모습을 할 게 뭐가 있는가. 아직 진짜 전투는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그러자 참모 레이가 답답한 듯 말했다.
“한 달 전부터 요청한 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는 한 지금 남아 있는 병력으로는 도저히 이곳 요새를 사수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원군은 언제 도착할 예정이랍니까?”
이에 위스퍼가 처음으로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원군은 오지 않을 걸세.”
“오지 않다니요.”
“오늘 아침 전령으로부터 소식을 전달 받았네. 우리보다 급한 동부 요새 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말일세.”
레이가 펄쩍 뛰었다.
“그런 게 어디 있답니까! 정말 시급한 쪽은 바로 우리 서부 요새란 말입니다. 만일 저들의 대규모 공세가 한번만 더 닥쳐온다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사령관님께서 더욱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일세. 그래도 우린 지리적으로 험한 지형의 요새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 점을 이용해 이번 공세만 막는다면 한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 걸세.”
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동안 십여 차례 적들을 저지한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 일전에서 기적을 바라신다는 것은 무모한 기대일 뿐입니다. 지리적인 이점에도 한계가 있는 법, 이제 남은 병력은 고작해야 이천 명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들은 그 병력이 오히려 늘어나 무려 우리 군단의 다섯 배 규모입니다. 만일 그들의 총공세가 이어진다면 우린 할 수 없이 여기를 내주고 말 것입니다.”
“자네는 참모이면서 어찌 그리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것인가. 어쨌든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네. 하지만 우린 반드시 이곳을 사수해서 롤란도 평원을 내주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야.”
“…….”
레이는 답답한 표정을 지을 뿐 더 이상 반문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들려오는 나팔 소리.
뿌우―
뿌우―
두 번의 신호음으로 보아서 적들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 틀림없었다. 사령관 위스퍼는 황급히 군장을 차려 입고 투구를 쓰면서 뭐라 중얼거렸다.
“기어이 올 게 오고야 말았군.”
뒤이어 따라가는 레이 역시 안색이 굳어질 대로 굳어 져 있었으니 이제 마지막 혈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초긴장을 하고 있었다.
휘잉.
기암절벽이 쫙 펼쳐진 능선 위에 통나무 담벼락을 단단히 묵어 놓았기에 이곳 요새는 적들이 함부로 기어오르지도 못할 만큼 험준한 지형이었다.
그동안 적들의 공세를 잘 막아 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지리적인 이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 아니던가. 물론 용맹한 스카치오 제국의 병사들의 덕도 만만찮았다.
망루에는 사령관 위스퍼와 참모 레이가 저 아래 개미떼처럼 밀려오는 흑마술 군단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가 외쳤다.
“아! 어마어마하게 밀려오는데요.”
“자네 말대로 총공세가 분명해 보이는군.”
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 다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요새에 남아 있는 병력이라도 최선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와와― 와와―
홱홱홱홱.
퍽!
“컥!”
팍!
“아악!”
궁수들로부터 발사된 화살들이 빗발치듯 흑마술 병사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수많은 파공음과 함께 들려오는 적들의 비명. 비록 요새가 천애 지형의 유리한 선점을 안고 있다지만 새까맣게 밀려오는 흑색 군단의 위세에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발사!”
홱홱홱홱!
“아악!”
“절대 물러서지 마라! 도망치는 자들은 내가 처단하겠다.”
사실 뒤로 도망칠 구석도 없었다. 뒤로는 절벽이 가로 막혀 있었으니 배수의 진을 치고서라도 이곳에서 마지막 혈투를 다해야만 했다.
사령관 위스퍼와 차모 레이 역시 지휘 망루에서 내려 와 병사들과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삭! 슥!
“컥!”
“빌어먹을! 왜 이리 많은 거야. 아무리 죽여도 끝이 없잖아.”
“사령관님!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당장 후퇴 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후퇴할 곳이라도 있던가! 이 멍청한 놈아.”
“요새 뒷문을 이용해서 일단 사령관님부터라도 피신하시는 것이…….”
“지금 나 혼자 살라고 도망치라 그랬냐!”
“늦기 전에 지금 당장!”
“너부터 죽기 전에 그 입 다물라. 나는 병사들과 함께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이다.”
“사령관님! 제발!”
“그렇게 말할 시간이 있다면 네놈도 검을 들고 싸워라.”
삭!
“악!”
슥!
“컥!”
요새 담벼락을 넘어 오는 흑마술 병사들과 그들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스카치오 제국 최고의 정예 병사들 간에 대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연 사령관 위스퍼는 그 유명한 맹장답게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적들을 맞아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와와―
와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요새가 불리해졌다. 결사적으로 활을 쏘고 투창과 투석기를 발사한들 저 수많은 적들의 병력 앞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서부 관문 요새. 사령관은 싸우다 말고 허공을 바라보며 탄식의 소리를 내뱉었다.
“신이시여! 정녕 이대로 끝이 나는 것입니까!”
그 역시 거의 체념한 듯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이후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참모는 사령관의 목숨만이라도 구하려는 듯 그의 팔을 잡고 자꾸 뒤쪽으로 가려 하였다.
“당장 물러나세요!”
“이 팔 놔라!”
“사령관님만이라도 목숨을 구하셔야 합니다!”
“놓지 않으면 네놈부터 죽이겠다.”
“아이고, 사령관님! 일단 이곳을 내주고 롤란도 평원에서 다음 기회를 보심이!”
“어라, 이놈 보게나. 여기가 내 임무지건만 무슨 기회를 보라고 하는 건가.”
“여태껏 사수한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입니다요! 사실 평원 전차 부대는 전문가이신 사령관님께서 직접 이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히 왜 이곳에서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 저 역시 병사들과 당장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반드시 사령관님을 안전히 모시라는 특명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그제야 위스퍼가 놀란 듯 레이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의 특명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진짜 전투는 롤란도 평원에서 벌어 질 텐데 그때 대군을 이끄실 분은 사령관님밖에 없잖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물러나는 것은…….”
“어차피 여긴 끝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 말 좀 들으세요.”
“…….”
위스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저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가끔 살다 보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때가 있지 않던가.
놀랍게도 대공세를 취하고 있었던 흑마술 병사들이 나팔 소리에 공격을 멈추고 슬금슬금 후퇴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뿌우― 뿌우―
그야말로 함락 위기에 몰렸던 서부 요새에 한줄기 광명이 내리쬐는 듯 보였다.
이에 위스퍼와 레이는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하였다.
“뭔 일이지? 왜 놈들이 후퇴를 하는 거야.”
“글쎄요!”
마침 그때 적들의 후방 진영이 매우 소란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와―
와와―
물론 위스퍼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이 되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쪽에도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설마 원군이라도 왔단 말인가.”
사령관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 했다.
“원군일지라도 적의 군단 한복판을 뚫고 이쪽으로 오기란 거의 불가능할 텐데요.”
“원군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 순간에 적의 후방을 칠 수 있단 말이지?”
같은 시각.
챙! 창!
파파파팟!
“아악!”
파팟!
“컥!”
엄청난 혈전이었다. 지드와 대원들은 소수의 인원에도 불구하고 적의 진영을 철저히 유린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100여 명이 조금 넘을까.
하지만 수천 명의 흑마술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옴에도 그들의 몸 끝조차 건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드를 비롯한 대원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전사들이 아니던가.
지노와 비스크, 게리, 그리고 크리스와 아레스의 무공 능력과 역사단으로 이루어진 기사단, 게다가 대자객 등으로 혼성팀을 이루고 있는 피체 왕국의 최정예 특공대를 과연 그 누가 막을 수 있을 텐가.
어쨌든 전투 와중에도 항상 시끄러운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지노를 비롯한 하류검사 출신의 대원들이었다.
“형님의 격공장이 나한테까지 미치잖아요.”
“그러기에 잘 봐야지, 멍청한 자식아.”
늘 다투는 지노와 1호 비스크, 그들은 격렬한 전투 현장에서조차 아옹다옹하고 있었다. 이에 2호 게리가 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지금 우리끼리 싸울 시간 없다고요! 놈들이 수도 없이 밀려오고 있다니까요.”
“와 봤자지. 제기랄!”
파파파팟!
“아악!”
파팟!
“컥!”
그때 막내 아레스가 저 앞에서 엄청난 전투 기술로 적들을 순식간에 함몰시키고 있는 대장 지드를 바라보면서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와우! 대장님 좀 봐. 한 번에 수십 명씩 해치우다니.”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던 크리스 역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아. 어떻게 인간이 저런 능력을 지닐 수가 있는 거지?”
“저건 예전의 공력 기술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새로운 걸 창안하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드가 착용한 선인갑의 힘으로 주변 대지를 함몰시키니 적들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그 아래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쿵! 우지직!
“아아악!”
발을 한번 내디딜 때마다 죽음의 비명이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디 그뿐이던가.
그의 평범하게 보이는 검, 선인도 역시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섬광이 번쩍 하면서 적들 수십 명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나가자빠지고 있었다.
한편 기사단들 역시 대단한 선전을 하고 있었으니 그들 대부분은 아라퀘스로부터 전수받은 원천기술을 시전하며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나카스니아 대륙 역사 종족 출신으로서 전혀 지친 기색 없이 그 많은 적들을 추풍낙엽 휩쓸어 버리듯 쓸어 내고 있었다.
대자객들 또한 1급 자객과 2급 자객들이 뒤섞인 채 고도의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으니, 제아무리 적들의 병력이 많다 할지라도 이들 혼성 부대원들 앞에서는 맥도 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요새에서 이를 살펴보던 스카치오 제국의 병사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특히 사령관 위스퍼와 참모 레이는 더더욱 그랬다.
“대체 저들은 어느 부대 소속이란 말인가.”
위스퍼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복장으로 보아서 아군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른 나라 출신이란 말인데. 정말 어마어마한 전투 능력을 지닌 자들이 분명하군.”
“와우. 불과 백여 명이 조금 넘는 것 같은데 적의 군단 내 진영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때 위스퍼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만 있어보자. 저들이 누구든지 우릴 도와주러 온 모양인데 이렇게 가만있을 것이 아니지.”
“어떡하시려고요?”
“그야 물론 요새 안에 배치된 병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도와주어야지.”
레이가 깜짝 놀랐다.
“네! 여기를 비우자고요?”
“뭘 그리 놀라나. 시간 없으니까 당장 공격 명령을 내리라고.”
“아, 네. 그렇게 합죠.”
“빨리!”
잠시 후 요새 문이 열리면서 스카치오 제국 병사 2천 명이 총 공세를 시작했다. 가뜩이나 적의 후방 지역이 사분오열되어 있는 상황인지라 흑마술 군단 병사들은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뒤로 후퇴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공격!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위스퍼의 외침에 병사들이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또 돌진하며 적들을 베어 나갔다.
삭―
“악!”
슥―
“컥!”
그 와중에도 위스퍼는 적의 후방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뛰어난 전사들이 누군지 궁금해 하였고 그쪽으로 향했다.
와와― 와와―
“죽여라!”
“투창 발사!”
홱! 홱! 홱! 홱!
팍!
“악!”
푹!
“억!”
세상에 이처럼 격렬한 전투가 또 있을까.
시간은 흘러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처럼 처절했던 공방전 역시 그 막을 서서히 내리는 중이었다.
산과 들에는 오로지 검은 군장의 흑마술 병사들의 시신들만이 즐비하니 오늘의 승리는 저 이름 모를 전사들과 스카치오 제국 서부 요새 차지였다.
***
그날 저녁 요새 내에는 승리를 자축하는 성대한 만찬회가 열렸다. 오늘의 주인공은 물론 혜성과도 같이 나타나 적의 본진을 초토화시켜 승리를 가져다 준 지드와 그의 대원들이었다.
위스퍼는 직접 술잔을 지드에게 권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자, 한잔 합시다.”
지드 역시 그와 술잔을 부딪치고는 잔을 들어 비웠다.
꿀꺽꿀꺽.
“술 맛이 좋군요.”
“그야 스카치오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아주 귀한 술이기 때문이죠.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을 위해 미리 내려 주셨다고나 할까요. 허허.”
사령관은 반백 머리에 주름진 얼굴의 비쩍 마른 중년인이었다.
한눈에 봐도 전장 경험을 숱하게 했을 만큼 야전 사령관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가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그제야 지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대와 수하들은 어디 출신이기에 그토록 뛰어난 전투 기술을 지니고 있소이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구려. 아까 전투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말이오.”
지드가 멋쩍은 듯 답했다.
“나와 제 수하들은 특히 국적이 없습니다. 그저 이 암울한 세상에 서로 뜻이 맞아 만났고 이 암울한 세상에 대항하고자 뭉친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럼 소속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죠.”
지드는 자신과 수하들이 피체 왕국 출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위스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속이 없다고요…….”
지드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술이나 한잔 더 합시다.”
“그거야 좋소.”
탁!
그 둘은 한잔을 더 비우고 다시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위스퍼는 이 정체불명의 대장과 단체에 대해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뭐, 소속이 없이 그저 뜻이 맞아 뭉쳤다니 그런 줄 알아야 하겠죠. 그나저나 어떻게 이번 전투에 껴들게 되었소?”
“우린 스카치오 제국으로 가는 길이었소. 그런데 이곳 서부 요새를 지나다 보니 마침 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목격했기에 무작정 뛰어든 거죠.”
“아, 그랬었군요. 어쨌든 고맙소이다. 그대들 덕분에 서부 요새를 지킬 수 있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은혜랄 것까지는 없고 그저 저희가 스카치와 제국의 일원이 되어 흑마술 군단에 대항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조만간 나는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고 궁으로 귀환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소이다. 그때 그대들도 함께 가면 좋겠구려.”
지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정말입니까?”
“허허. 사실 원래 내 보직은 전차 군단 대장이오. 하지만 쓸데없는 알력 싸움에 휘말려 잠시 이곳으로 좌천되어 온 것뿐이지요. 그리고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소.”
그 말에 지드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령관님께서 저희를 거두어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는지요.”
그 말에 위스퍼가 다소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대들을…….”
“어차피 저희는 아무 소속이 없는 떠돌이 전사들로서 무작정 스카치오 제국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이렇게 귀하신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위스퍼의 화색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허허. 우린 서로 통하는 데가 있나 보오.”
“무슨 말씀인지요.”
“사실 그 내용은 내가 오히려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네!”
“그대들처럼 뛰어난 전사들을 거둔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게 뭐가 있겠소. 사실 지난번 숙청 싸움에 휘말려 내 직속 수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그대들을 만나니 이거 기분이 너무 좋소이다.”
지드는 사령관 위스퍼의 인간 됨됨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역시 내심 흐뭇했다.
“한잔 하시죠.”
“그럽시다.”
꿀꺽. 꿀꺽.
둘은 또다시 잔을 비우고 매우 기분 좋게 계속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스카치오 제국 최고의 명장 위스퍼와 지드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어쨌든 지드는 그의 휘하로 들어간 이상에 상관으로 철저히 모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말 놓으시죠, 사령관님.”
“허허. 그럴까.”
그 이튿날 지드를 포함한 162명의 대원들은 전차 군단 대장 위스퍼의 근위대로 새로 임명이 되었다.
지드는 그 자신이 국왕이란 신분을 아예 잊은 듯 했고 처음부터 백의종군이라는 개념으로 오로지 위스퍼를 위해 충성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위스퍼 또한 너무나도 든든한 호위대를 얻었으니 이만저만 든든한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