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자마자 결투를 신청하겠다는 불사의 용 나르시오스와 벌써 수개월을 동행하면서도 이상하게 그에게 그다지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인질로 끌려 다니는 신세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처럼 어느 때는 친근함마저 느껴졌다.
요즘에 그는 더욱 부드럽고 친근함을 나타내니 게토로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화르르. 탁탁.
역시 가을 저녁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의 향취는 언제나 좋게 느껴졌다.
방금 전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어 육질만 구워 먹는 이 맛, 그 어떤 음식점의 것보다 맛있음이 틀림없었다. 나르시오스는 그 자신이 직접 꼬치를 구워 게토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도 먹어 보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먹는 게토, 그가 무심코 물었다.
“이제 그만 저를 풀어 주시죠.”
나르시오스가 담담히 말했다.
“아직은 안 돼. 네 형을 찾아 아독의 행방을 알고 난 뒤에 할 일이다.”
“남부 대륙에 온 지 한참 되었는데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렇다고 너를 풀어 줄 수는 없는 일. 당장 네 형 아라퀘스를 만나는 일부터 시급한 문제다.”
게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정말 우리 아버지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 얘기에 그가 고기를 먹다 말고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내 말문을 여는 나르시오스.
“사실 그리 원수진 일은 없지.”
“그럼 뭐죠?”
“오늘따라 질문이 많군.”
“궁금해서요.”
“하여간 어린 네 녀석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관계이지. 사실 그는 원수이기 전에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게토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생명의 은인이라니요!”
“네 아버지와 나는 꽤나 다투면서도 친근한 사이였지. 그리고 어느 때인가 아독의 군장을 내가 잃어 버렸을 때에 나를 구하러 위험도 무릅쓴 적이 있단다.”
“그건 무슨 얘기죠? 위험을 무릅쓰다니요.”
“벌써 수십 년 전 일이 되어 버렸군. 당시 나는 마물들의 최강의 전사들인 크로포시탄에게 잡혀 먹힐 운명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니 아찔한 상황이었다. 아독이 아니었으면 난 목숨을 잃어 버렸을 테니까.”
“…….”
게토는 뭔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나르시오스 간에 얽힌 내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 일화가 듣고 싶어졌다.
“당시 얘기 좀 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자 나르시오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 못할 것도 없지. 어떻게 보면 그보다도 스릴 있었던 기억은 없을 것이다. 네 아버지란 사람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지독한 인간이었지. 덕분에 내가 살아났지만 말이다. 후후.”
그는 말하다 말고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그때 상황의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말이다.
그러고는 당시 내용을 게토에게 자세히 말해 주기 시작했다.
***
“쯧쯧. 그 위대한 전사께서 어찌 이런 불쌍한 꼴을 하고 있을까.”
쇠사슬에 감긴 나르시오스가 바로 옆에 실로 꽁꽁 감겨서 꼼짝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진 아독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동정어린 시선과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아독이 불끈했다.
“뭐, 뭐야, 이 자식. 난 너를 구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그 따위로 말할 거야! 게다가 너 이번에도 은근히 반말하는데, 진짜 죽는다.”
순간 나르시오스가 정말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닥에 바짝 깔린 아독을 바라보았다.
“후우! 당신이라는 인간 정말 도저히 파악이 안 되는군. 지금 저들에게 죽을 마당에 그런 걸 꼭 따져서 뭐 하냐. 도대체 그 머릿속에는 자존심만 들었는지.”
“너 이 자식, 이제 막가자는 거지!”
“더 이상 삶의 희망도 없는데 막간들 누가 뭐래나. 아무튼 당신, 이왕이면 그 더러운 성질 고치고 죽지그래?”
“너 진짜 죽는다.”
“그렇게 실에 꽁꽁 묶인 채로 날 어떻게 하려고? 후후, 아마 그전에 당신이 저들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걸. 그나마 저들이 당신의 그 잘난 군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보고 의논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우리의 목숨이 조금 더 연장될 수 있는 거지.”
아독은 군장이라는 말에 바닥에 처박힌 얼굴을 들어 그쪽을 간신히 쳐다보았다.
“이리스의 군장……·.”
그런 그의 표정을 본 나르시오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꿈 깨시지. 그렇게 묶인 상태에서 저걸 착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
나르시오스의 말에 아독이 다시 체념의 빛을 띠웠다.
“젠장, 눈앞에 이리스 군장을 두고도 이렇게 뒈져 버려야 하나.”
“그러니 누가 군장을 버리는 경솔한 짓을 하라고 했나. 하여간 인간의 그 잘난 자존심과 멍청한 오기는 똥값만도 못한데 평생 그런 걸 알고 세상을 하직할 사람들이 몇이나 되던가. 불쌍한 인간들이여!”
나르시오스의 말이 비아냥거림으로 들렸지만 아독은 이번에는 그다지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뭐라 중얼거렸으니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발한 생각이라도 난 것일까.
바로 그때 아독이 나지막이 말했다.
“자존심이라…….”
“갑자기 왜 그래?”
“너 내게 가까이 귀 좀 대 봐.”
“혹시 반말했다고 마지막으로 내 귀를 물어뜯으려는 거야!”
“좋은 묘안이 떠올랐으니까 당장 귀를 갖다 대라고.”
“묘안이라니?”
“죽기 싫으면 당장 대!”
“진짜지?”
“진짜.”
“절대 귀 물면 안 돼!”
“빌어먹을 놈! 정말 짜증나게 하네.”
나르시오스는 다소 불안했지만 이 급박한 상황에서 어찌하랴.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자신의 귀를 아독의 입술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아독은 그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소 시간이 흐른 뒤.
저벅저벅.
프라츠가 한손에 군장을 들고 아독과 나르시오스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그들 앞에 그 군장을 던져놓았다.
턱!
“이까짓 가짜 이리스 군장을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뭐 네놈들의 그 나약한 능력이 단숨에 세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한참을 살펴본 결과, 저들끼리 내린 결론은 그 군장이 가짜라 판명하였으니 어떻게 본다면 아독과 나르시오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프라츠가 갑자기 살기 띤 표정으로 흉흉한 말투를 내뱉었다.
“하여간 인간이라는 것들은 겉만 요란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 실속이 없단 말이야. 그나저나 이거 쓸데없는 일 가지고 너무 시간을 지체했군. 자, 그렇다면 이제는 죽어 줘야겠군. 육질의 신선도를 살리기 위해 식사 전 바로 도살하는 것이 좋은 방법.”
순간 프라츠가 자신의 두 손을 들어서 아독과 나르시오스의 목을 향해 겨누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나르시오스가 황급하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잠깐만요!”
“……·.”
나르시오스의 외침에 프라츠가 주저거렸다.
“뭐, 뭐야.”
“진짜 공평한 승부를 했다면 당신은 우리 형을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공평한 승부라니?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사실 저 군장은 그 옛날 이리스의 군장을 본떠서 만든 가짜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공들여서 만든 군장이기에 그 견고함이나 여타 장치들이 꽤나 쓸모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군장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우리 형 것인데, 만일 형이 그 군장만 착용했어도 당신은 게임도 안 되었을 겁니다.”
나르시오스의 말에 프라츠는 너무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허, 거참. 그 형에 그 동생이라니. 도대체 이 두 놈은 미친 것도 어찌 이리 똑같냐? 야, 이놈아. 너희들 인간들 중에 크로포시탄과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수호 전사들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냐. 그것도 일대일로나 말이다. 하물며 이곳에는 나를 비롯해서 무려 4명의 크로포시탄이 있으니 4명의 수호 전사가 올지라도 아마 무릴 제압하기는 힘들걸? 하물며 저따위 가짜 군장에다 허접한 실력의 네 형이 내 발끝 하나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냐? 젠장. 그나저나 이거 내가 어린 인간 놈하고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프라츠가 다시 손을 들어 공격을 하려 했다. 이번에도 나르시오스가 급박하게 외쳤다.
“속으로는 괜히 두려우니까 일단 무조건 죽이고 보자 이거겠죠. 하하. 그것도 당신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혹시라도 우리 형한테 질까 봐 말이죠. 아무튼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꽁꽁 묶어 두고 죽이는 것이 잘하는 겁니다. 만일 우리 형이 저 군장을 착용하고 당신과 재결투를 벌인다면 망신만 톡톡히 당할 테니 말이죠.”
“뭐, 뭐라고!”
이번에는 프라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으로 보아서 나르시오스의 심계에 단단히 걸려 들은 것 같았다.
“이놈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뭐라! 내가 질까 봐 지금 너희들을 당장 죽이려 한다고? 허, 참. 살다 보니 별 잡놈의 새끼가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네.”
바로 그때 뒤에 있던 동료 크로포시탄이 한마디 했다.
“이보게, 프라츠. 열 받지 말고 그냥 죽여 버림세. 괜히 저놈에게 저 가짜 군장이라도 착용하게 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말이야.”
이번에는 다른 동료가 한마디 했다.
“암! 괜한 짓이지. 난 지금 무척 허기가 져 미칠 지경이라네. 그러니 당장 죽임세.”
이에 프라츠가 멈칫거리자 아독과 나르시오스는 식은땀이 마구 흘러내리고 심장마저 쿵쿵 뛰기 시작했다. 프라츠의 선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천당과 지옥의 기로에 놓인 순간을 가장 많이 맛보아야만 했던 아독,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개새끼! 두렵다면 두렵다고 솔직히 말해. 사실 내 동생 말대로 내가 군장만 착용했다면 너 같은 건 수십 명이 와도 개박살 낼 수 있어, 이 겁쟁이 새끼야. 그래, 그래. 괜히 망신 당하기 전에 빨리 죽여라, 이 등신 같은 놈아! 내가 그렇게도 두렵나…….”
부들부들.
순간 프라츠는 너무 분노하여 주먹을 꽉 쥐고 어깨마저 떨었다.
“뭐, 뭐라고. 이 새끼들이 정말! 그래 어디 한번 군장을 입고 덤벼 봐라. 아주 처절하게 죽여 주마.”
파파파파팟.
그가 한번 손을 휘젓자 아독의 몸에 묶인 실이 순식간에 다 풀렸다.
“빨리 그 군장을 착용해! 이 새끼, 네가 지껄인 만큼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 줄 테니까.”
참으로 프라츠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애석하고 애석한 일이었다. 이리스의 환생자에게 이리스의 군장을 착용하라 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아독은 자유로워진 몸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그러고는 바닥에 뒹구는 회색 톤의 군장을 집어 들었다. 내심 또 군장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소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이 순간 어쩌랴. 지난번 나르시오스의 말대로 이리스 군장의 주인은 바로 그 자신이 아니던가.
바로 그때였다. 프라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 건방진 인간 새끼!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착용해!”
“알았어! 알았다고! 지금 착용하면 될 거 아니야. 이 군장은 여기저기 고리 쇠들이 많아서 다소 시간이 걸린다고.”
“아가리 닥치고 당장 입기나 해.”
“후후.”
프라츠의 호통에 아독은 묘한 미소만을 지을 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스르륵.
흉갑과 하체 보호대, 각 관절 보호대마저 하나로 이어진 특이한 군장, 다시 집어든 느낌 역시 새털처럼 가벼웠다. 이런 예사롭지 않은 군장을 저들은 가짜라 결론지었으니 아마도 일생일대의 최대 실수를 저질렀음에 틀림없었다.
나카스니아 대륙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병기라 불리는 이리스의 군장. 용족을 잡아먹고는 사는 테드칸 익룡마저 융합된 군장으로서 그 옛날 청동 전사의 운석 군장과 버금가는 희대의 보물이기도 하였다.
사실 이리스의 군장은 아스티안 신전의 정령왕이 이리스만 착용할 수 있도록 아주 강력한 사술을 걸어놓았기에 다른 자가 소유한다 할지라도 사용할 수 없다.
덜컥!
잠시 후 아독은 드디어 금속 연결 고리마저 잇기 시작했다. 군장을 착용한 아독의 모습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확 바뀌었다. 이에 크로포시탄들 중에 대장이자 유일한 여성인 줄리아가 다소 근심어린 표정으로 아독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뭔가 불안했다.
혹시라도 저 군장이 가짜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프라츠는 코웃음을 쳤으니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일까.
“그런대로 외관은 진짜 이리스의 군장을 쏙 빼닮았군. 하지만 과연 변화의 기술까지 갖추어져 있을까. 후후 도대체 저따위 쓸모없는 가짜를 만드는 이유가 뭐야.”
그때 아독이 하얀 치아를 짝 드러내고 씩 웃더니만 가슴 부위 버튼에 손을 누르더니 한마디 했다.
“이런 모습은 어떤가? 한번 감상해 보게나.”
우웅― 착! 착! 착! 착!
순간 진동음이 들리는가 싶더니만 군장 여기저기 금속 돌출이 마구 튀어 나와 그 볼륨감을 극대화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가.
“헉!”
“뭐. 뭐야!”
순간 프라츠와 동료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을 쳤다. 한편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바닥에 주주 앉아 있는 나르시오스는 아독의 그런 늠름한 모습에 눈물이라도 날 지경이었다.
살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그 위대한 전사의 재림을 다시 구경할 수 있다는 것에 절로 감격이 벅차올랐던 것이다.
“오, 이리스여!”
하지만 정녕 이 순간에도 프라츠는 눈앞에 버젓이 일어는 현상을 믿지 않았는지 갑자기 웃기까지 했고 박수까지 치는 것이 아닌가.
짝! 짝! 짝! 짝!
“하하하하.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정말이지 인간 놈들의 연금술에 의한 대장장이 기술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군. 이왕 모조품을 만들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이제 보니 저 가짜 군장을 만든 목적이 혹시라도 적을 마난다면 위협을 하고 도망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군. 하지만 이걸 어쩌나. 이리스의 환생자가 인간 대륙에 영원히 갇혀 버려 절대 올라오지 못할 신세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 그따위 눈속임으로 감히 우리 크로포시탄을 속이려고 하나.”
그때 아독이 갑자기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씨익 웃으며 간단하게 한마디 했다.
“이거 진짜야, 인마.”
“진짜라고? 하하하하!”
“어라! 웃어? 이거 진짜라니까? 이리스의 군장 말이야. 넌 지금 완전히 내게 속은 거라고. 후후.”
“미친놈. 죽기 전엔 무슨 말을 못하겠나.”
“자식, 진짜 안 믿네.”
그때 이를 지켜보던 줄리아가 무척이나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프라츠,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군장으로부터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너는 그렇지 않니?”
“기운은 뭔 기운. 웬만큼 솜씨가 좋은 연금술사라면 약간의 에너지를 군장에 융합할 수 있겠지. 자, 그렇다면 장난은 여기까지만.”
프라츠는 다소 무료한 표정을 짓더니만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공격을 펼치려 했다. 아독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그가 갑자기 어깨 쪽으로 손을 올렸다.
“그렇다면 나도.”
스르륵.
마치 산봉우리에 반달이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것처럼 진짜 반월형의 철 조각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독은 그것을 한 손으로 집어 들고는 안쪽에 장치된 돌출 버튼을 찾아서 눌렀다.
우웅! 휘리리리릭―!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 뭔가 거북한 파공성이 귀를 찢을 듯 울렸다.
조그만 반월형의 무기가 공작새가 꼬리를 활짝 펴는 것처럼 사람의 키만큼의 날카로운 검들을 드러냈으니 이번에는 프라츠와 그 동료들이 뒤로 주저앉듯 휘청거렸고 그와 동시에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던가.
타룬
이리스의 첫 번째 병기 타룬, 그 옛날 수많은 전설을 남기며 공포의 대명사로 불렸던 타룬의 실체가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허나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갑자기 생긴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 역시 무척이나 힘들 것이다.
그래서인가. 프라츠와 그의 동료들은 다소 의문 어린 눈길로 아독의 손에 들려진 살벌한 타룬 병기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잠시 후 프라츠가 아까의 호탕한 기세와는 달리 이번에는 다소 긴장한 듯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 그것도 위장용으로 만든 타룬이겠지.”
프라츠의 말에 아독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 위장용이라. 뭐, 어떻게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난 아직 병기 다루는 솜씨가 서투니까.”
“서툴다고?”
아독의 말에 프라츠가 갑자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저 말뜻의 의미는 뭐란 말인가. 완벽한 위장용 군장을 가지고 사기 치는 데 사소 서툴다는 뜻이던가.
여하튼 프라츠가 갑자기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으니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비, 빌어먹을 놈 같으니! 아무리 가짜라지만 순간 심장이 떨어질 뻔했잖아? 하여간 너희 인간 놈들의 대장장이 기술은 대단하단 말이야. 뭐, 물론 그래 봤자 그런 능력은 거기까지일 뿐이지만. 어차피 세상은 전투 능력이 강한 자가 지배하는 법, 인간이란 결국 지배를 받는 나약한 종족에 지나지 않지. 아니 이제는 거의 소멸 단계에 이르렀구나. 하하하하, 하여간 인간들이란!”
플라츠는 한바탕 웃었고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뒤에 있던 동료 둘에게 명령조로 큰소리를 쳤다.
“저 인간 사기꾼 새끼를 당장에 없애버려!”
프라츠는 직급으로 따지자면 엄연한 부대장이었다. 그래서인가 대장 줄리아는 가만히 서 있었고, 대신 다른 2명의 크로포시탄이 앞으로 걸어 나와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들의 표정 역시 꽤 피곤해 보였다. 허기져 죽겠는데 아까부터 입씨름만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다 이리스의 흉내까지 내는 사기꾼 인간을 죽여서 빨리 그 신선한 육질을 맛보고 싶은 심정이 얼굴에 여실히 나타났음이 분명했다.
슈슈슈슈슉!
크로포시탄들의 강력한 거미줄이 마치 긴 창이 날아가는 것처럼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갔다. 이에 아독이 타룬을 앞으로 가볍게 휘두르니 신기하게도 수십 개의 칼날 중, 2개만이 파공음을 내며 공격을 가하는 자들에게만 향해 발사되었다.
파파파팟. 탁! 탁!
“욱!”
“악!”
타룬에서 발사된 서슬이 시퍼런 검 날들은 각각 크로포시탄의 가슴에 꽂혀 버렸고 신기하게도 관통하는 대신에 그 신체를 허공으로 들어오려 벽에 박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살아 있는 박제를 벽에다 걸어 두고 주인에게 보라는 듯 말이다. 이에 아독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직은 타룬 다루는 법이 무척이나 서투른 그에게 있어서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그저 타룬을 앞으로 휘둘렀을 뿐인데 단 2개의 검 날이 스스로 뽑혀서 두 명의 공격자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한편 검 날에 신체가 껴서 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동료의 비참한 꼴을 바라본 프라츠와 줄리아는 그만 오줌이라도 쌀 것처럼 오금을 저릴 수밖에 없었으니, 세상에 저 병기가 진짜 타룬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저 인간 놈이 착용한 것이 진짜 이리스의 군장!’
그때 프라츠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웠는지 비틀거리다가 뒤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하얀 치아를 드러낸 미소를 날리는 아독을 향해 무심코 중얼거렸다.
“너, 너는 진짜 이리스의 환생자!”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나르시오스와 아독의 꾐에 빠져 그만 군장을 던져 준 장본인, 바로 그 주인공이 프라츠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카락이 빠져라 하고 잡아당기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세,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지……·.”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기 전에 이리스의 제물이 됨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사실 프라츠는 이리스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선배들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을 뿐이다. 하지만 왜 이리 숨이 막힐 정도로 두렵단 말인가.
이리스의 병기 중 하나인 무시무시한 타룬을 직접 목격해서 그런가. 아니면 이리스의 환생자가 풀풀 풍기는 그 기세가 너무나도 흉흉해서 그런 것일까.
어차피 죽은 목숨, 프라츠는 마지막 발악을 하며 공격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프라츠는 지금까지 유지해 온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 절규에 가까운 몸짓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 이리스의 환생자여! 너는 인간 대륙에 갇혀 있어야만 할진대 어찌 이런 곳에 나타난 것인가?”
프라츠는 죽을 때 죽더라도 그게 궁금했다. 도대체 이 넓고 넓은 대륙에 왜 하필 여기 북쪽, 자신 앞에 출현할게 뭐란 말인가. 한마디로 재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아독이 싸늘한 음성으로 제법 그 톤을 높였다.
“네놈은 아직까지 내가 인간임을 모르는가. 오늘날 이곳 북쪽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가 대륙으로부터 마물들의 위협을 피해 몰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는 그들을 수호하기 위해 당연히 이곳에 온 것이다. 하지만 네놈은 여기다 아예 자리를 잡고 인간을 식량으로 수도 없이 희생시켰겠다. 이 죽일 놈들아!”
아독은 진짜 수호 전사가 된 것처럼 다소 멋지게 말했다.
“……·.”
아독의 호통에 프라츠는 쥐죽은 듯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또다시 아독의 매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들이 어둠의 종족에게 충성하는 마물들이라는 거 잘 안다. 그 때문에 이 자리에서 죽어 줘야겠군. 내 존재가 그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건 없거든.”
“목, 목숨만이라도 살려 주시기를…….”
“개소리! 그렇게 인간들을 구워먹고 삶아서 요리해 먹은 주제에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때 아독은 저편 2명의 크로포시탄을 벽에 박히게 한 채 꼼짝도 않고 있는 검 날을 회수하고자 한 손을 내밀어 젓는 시늉을 했다.
“……·.”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제멋대로 발사된 검 날 2개, 도대체 회수하는 방법은 뭐란 말인가. 아직 이리스의 병기에 서투른 아독, 이번에는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돌아와!”
슉. 파팟.
덜컥!
아독의 한마디에 검 날이 그들의 가슴팍에서 스르르 뽑히더니만 엄청난 파공음을 내며 원래의 자리에 돌아왔고 거짓말처럼 그 공백을 메웠다.
참으로 보면 볼수록 신기한 무기였고 그 무시무시함 역시 아독이 그 자신이 주인이면서도 간담이 서늘함을 느껴야만 했다.
***
나르시오스의 얘기가 끝이 나자 게토는 너무나도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네 녀석에게 없는 얘길 꾸며서 하겠는가.”
“듣고 보니까 두 분은 친한 그 이상의 사이로 보이는데 어찌 원수지간이 되었나요.”
그러자 나르시오스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법이지.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네요. 형제가 아닌 이상에 누가 목숨을 걸고 구하러 가겠어요.”
“그거 한 가지만은 사실이다. 아독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의리 하나는 대단했거든.”
“그런데 꼭 제 아버지를 찾아서 대결을 하셔야겠어요?”
“나도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수방관할 수만도 없는 일이지.”
“대체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죠.”
나르시오스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녀석 정말 질문 많군.”
“정말 알고 싶습니다. 두 분이 어쩌다가 의가 갈리셨는지요.”
“사실 우리 둘 사이에는 서로 멀리 해야만 할 특별한 일은 없었다네. 다만 세상과 운명이 갈라놓았을 뿐.”
“이제 그 얘기가 궁금하군요.”
“좋다. 어차피 내친 김에 마저 얘기를 해 주지.”
나르시오스는 이번에도 허공을 응시하며 당시 일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
얇게 쌓인 눈밭 위로 이카루시아의 발걸음이 당차게 전진했다. 잠시 후 그는 방금 전까지 론이 서 있던 바로 그 장소에 나왔고 이내 아독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마저 좌우로 흔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빌어먹을 놈 같으니! 도대체 네놈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이야. 아니면 론이 얻은 청동전사의 힘이 지나치게 과장이 되었든지. 제길.”
또다시 지랄 발광을 하듯 마구 몰아 부치는 이카루시아의 그런 말투가 반가웠던가. 아독이 그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용족의 군주로 올랐으면 이젠 좀 체통을 지키지 그러나! 하하.”
“이번에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나를 조롱거리듯 비웃다니.”
“비웃는 것이 아니라 네놈과 이렇게 마주 대하니 한편으로는 반가워서 그러네.”
“반갑다니…… 쳇. 그나저나 지금까지 잘 버티어 준 네놈에게 고맙군. 명색이 네놈 같은 천하의 독종이 허무하게 무너질 수야 없지 않은가.”
“동족은 무슨 놈의 동족! 그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지.”
“여하튼 일이란 너무 쉽게 끝나면 재미없는 법. 그래도 지금처럼 다소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만 지루하지 않지. 어쨌든 아독! 너는 내 동생 붉은 용 에스타란토를 제압했으니 싫든 좋든 나와의 대결은 피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날 우리의 인연은 과거일 뿐, 이 승부가 어떻게 끝이 나든 원망은 하지 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도 하는군. 하여간 자네의 동생 일은 정말 유감이네.”
“아직 기억을 찾지 못한 나로서는 직접적인 슬픔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넨 내 친혈육을 죽인 원수가 아닌가.”
“…….”
이번만큼은 이카루시아의 말에 아독 역시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이카루시아의 말문이 다시 이어졌다.
“아독…… 한때 우리는 친구로서 그 운명을 다른 방향으로 함께 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군.”
“결국 그런 셈이군.”
“그런 셈이라……·.”
“제기랄 놈의 세상이지! 하하.”
“망할 개 같은 세상이지. 하하.”
이들의 웃음 뒤에는 무엇인가 내키지 않는 듯 씁쓸한 표정이 보였다. 아독은 이카루시아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묘한 맞수의 관계, 겉으로는 서로 으르렁대며 거친 말투를 뱉는 사이라지만 분명 이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끈끈한 우정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면서 이들의 오랜 관계는 그 막을 내릴 것이다.
이 둘은 그런 결과가 벌써부터 허탈한 심정으로 다가왔는지 몰랐다.
그때 아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네놈도 론을 닮아 가는가. 대결 직전에 그렇게 말이 많은 것을 보니 말이야.”
“하하. 남말하는군.”
“그럼 시작하지.”
태양이라도 얼어붙게 만들 극단 지방의 기후는 오늘 따라 다소 온화한 빛을 내비치는 것만 같았다. 오랜 세월 나카스니아 대륙을 통치해 왔던 용족과 그들에 막강한 세력을 견제해 왔던 인간 종족, 드디어 이 두 종족 간의 최후의 대결이 군주들 간에 이루어지려 했다.
용족의 신성은 정확히 3번의 진화를 거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신성의 힘을 얻은 상태였다. 그 주체 자는 한때 인간 대륙으로 환생함으로써 이카루시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산성 아케이튼이란 황금용의 절대적인 권력을 움켜진 만물의 제왕이었던 것이다.
아독 역시 이리스의 환생자로서 오랜 세월 용족의 그늘아래 희생자 같은 삶을 끈질기게 이어 온 인간 종족들의 정신적 기둥이요, 수호자로서 드디어 신성 아케이튼과 전투를 벌일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이카루시아가 갑자기 허공을 향해 도약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용의 변신을 하여는 것이 틀림없었다.
타탁! 슉.
그의 점프는 마치 허공으로 쭉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가볍게 튀어 올랐으며 이내 엄청난 크기로 변신 과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슈슈슈슈.
기이한 진동음과 함께 마치 하늘에서 금빛의 소낙비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사방이 온통 황금색으로 변한 듯 보였다.
나카스니아의 백색 태양에 반짝이는 거대한 황금 용, 아마도 그 첫 번째 형상이 점차적으로 유형화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많은 마물들이 놀라고 심지어 같은 전투 용족들조차 경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일반 용보다도 두세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몸체, 정녕 말로만 들었던 신서의 실체가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잖은가.
이에 아독 역시 황홀한 용의 자태에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인간 성지 내부에서 몰래 지켜보는 자들 역시 경악의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신의 세상에서 강림한 위대한 존재처럼 고개마저 숙이고 경배를 드리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일어날 지경이었다.
“아아.”
“세상에…… 저런 영묘한 생명체가 존재하다니.”
한편 아독은 애써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황금용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역시 내심 경외의 마음이 절로 들기는 했지만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싸울 상대가 아니던가.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망나니 같은 이카루시아 놈이 저런 고귀하고 황금빛 찬란한 명물의 모습이었다니, 정말 놀랄 일이군. 그나저나 용의 꼬리 세 번째 힘의 실체가 뭐란 말인가. 설마 저 거대한 꼬리를 무기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면 그 위력이 강대할지 몰라도 조금은 단순한 구석도 있을 텐데…….’
그때 황금 빛 용이 날개를 펄럭이며 똬리를 틀듯 그 커다란 체구를 마음껏 용틀임했다.
크앙!
휘잉.
대지를 찢을 듯, 괴성에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은 갑자기 폭풍이라도 몰려온 듯 주변 지역을 마구 강타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곳 전방에 서 있는 마물 지휘관들은 그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의해 허공에 붕붕 떠서 뒤로 나가떨어지기도 하였다.
잠시 후 왕금 용 이카루시아는 변신을 끝마쳤는지 그 거대한 몸체에 어울리게 굵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독. 지금부터 공격을 시작할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 아래 빙하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그의 음성은 매우 웅장했고 진동마저 일으켰다. 그야 어찌 되었던 아독 역시 초반부터 기세 싸움세서지지 않으려는 듯 목청을 돋워 크게 외쳤다.
“신서의 세 번째 힘이라 나 역시 궁금하군. 자! 난 준비가 되었으니 시작해라.”
“단단히 정신 차리고 조심하기 바란다.”
“미친놈. 네 걱정이나 해라. 나 역시 방어 보다는 맞불 작전으로 공격할 테니까. 갑자기 몸이 태산만큼 부풀더니만 내가 매우 나약하게 보이나 보는군. 후후! 이봐, 이카루시아. 난 네놈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가 않으니 너야말로 방심하지 마라!”
“하기는 청동전사의 힘을 받은 론을 간단히 제압한 것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안에 잠재 된 신성의 힘 역시 만물의 제왕답게 거의 신에 능력에 버금갈 정도로 광대한 것이다. 그 점 염두에 두고 나와 대결하기 바란다.”
“쳇. 또 말부터 앞세우는군.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자! 그럼!”
파드득.
획!
바로 그렇게 두 개의 강대한 힘이 충돌했다.
***
파팍!
우르릉 쾅!
콰광!
폭발음과 함께 세상 전체가 진동을 하듯 마구 흔들렸다.
우르르르―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그 충격 여파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니 한쪽의 에너지가 너무 강하여 다른 한쪽의 에너지를 가볍게 누른 것 같아 보였다.
“아악!”
동시에 누군가의 신음이 성지 중턱 바위벽으로부터 들려왔으니 아마도 이번 힘의 균등에서 밀려난 대결 자가 분명했다.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용의 꼬리는 아독이 만들어 낸 빛의 구체를 파훼시키고도 모자라 그 주체자를 벽 속에 박아 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꼬리 끝 부분은 혹시라도 아독이 바위벽에서 나올까 봐 아예 그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독은 벽 안에 박힌 채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고 이카루시아는 그런 그를 자신의 황금빛 꼬리로 강력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번 대결은 이카루시아의 압승으로 끝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보였다.
컥! 컥!
입가에 피를 마구 흘리는 아독, 그는 기침마저 연신 해댔으니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독은 아직 헤란타의 검을 꽉 쥐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꼬리에 의해서 산산이 부셔진 빛 덩이의 잔재들이 수백 수천 개로 쪼개져 그의 몸을 보호해주듯 마치 반딧불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카루시아의 목소리가 허공으로부터 들려왔다.
“아독.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너로부터 항복을 받고 싶을 뿐이다.”
“컥! 컥! 웃기는 소리. 난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을 뿐 이제 대항할 힘조차 없지 않은가. 이보게나. 아독. 네가 지금 항복을 선언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인간 성지를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며 소멸 역시 없을 것이다. 선성으로서 약속할 테니 이제 패배를 시인해라.”
진심이었다. 애초부터 이카루시아는 아독이란 걸출한 전사와의 승부욕 쪽으로 그 관점을 두었을 뿐 결코 전쟁을 일으켜 성지를 초토화시키고 무고한 인간들을 소멸 한다는 것은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물론 이후 흑룡 헤파토스가 아직도 호전적인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잔소리를 해 댄다면 이제는 그를 명령으로서 제압할 것이다
완전한 신성의 힘을 찾은 이카루시아로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없으니 말이다. 곧 만물의 제왕인 그 자신의 말이 법인 셈이다.
지금 당장 그의 소원이 하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전투를 잘하는 저 고집불통의 아독으로부터 진정한 항복 선언을 받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아독이 자신의 부하이자 친구가 되어 준다면 좋으련만.
“네가 공식적인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 성지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네 동족을 모조리 소멸시킬 것이다. 다소 치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차피 넌 내게 패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남자답게 패배를 시인하라.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이 고집쟁이 놈아!”
그때 이카루시아의 말에 갑자기 아독이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 반드시 내 입으로부터 항복이란 말을 듣고 싶은 거로군. 그렇게도 내가 미웠나. 아니면 인간 대륙에서 내게 패한 일이 두고두고 한으로 남았던가. 그나저나 이거 어떡하지. 내가 진짜 패했다면 항복을 벌써 했겠지만 아직 승부가 나지 않은 것 같은데.”
“승부가 나지 않았다니.”
“진실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네놈의 꼬리가 나를 이렇게 가두어 두고 있지만 나는 그 덕분에 원래 의도했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이 될 수 있었지.”
아독의 말에 순간 이카루시아가 당황했다.
“공격이라니. 방금 저 그 커다란 빛 덩이가 네 마지막 공격이 아니던가.”
“멍청한 친구 같으니. 설마하니 미끼를 단번에 덥석 물어 버릴 줄은 몰랐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상 천지에 깔린 것이 포스의 질료이다. 다만 엄청난 질료를 원천기술의 극체인 내 몸에 축적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흠이지. 물론 초반에 형성한 빛 덩이는 그저 너를 혼란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네 꼬리가 나를 벽에 박아두고 이렇듯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다른 방향에서는 빛의 활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지.”
“헛소리. 네놈이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찌 그런 상태에서 무슨 힘을 모은다고 그러나!”
“물론 신은 아니지. 다만 자연의 힘을 빌려 쓸 만큼의 능력은 되지. 그것도 제법 많이. 이카루시아! 당장 좌우를 살펴보아라. 나 역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으니 요령껏 피하기 바란다.”
순간 황금용의 거대한 머리가 좌우로 돌려졌고 이내 경악의 외침이 들려왔다.
“헉!”
파파파팟.
양방향에서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해일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이카루시아가 화들짝 놀란 기색으로 상공을 향해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신속한 동작 때문에 가까스로 높은 상공까지 올랐지만 아까 길게 늘어트린 꼬리가 너무나 커져 버린 관계로 미쳐 빛의 해일 속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미 자신의 모든 정수를 꼬리에 담아 두고 있었건만 바로 그 힘이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파묻혀 온통 유린을 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파드득.
크앙!
고통에 울부짖는 황금용, 그는 빛의 공간에서 빠져 나오려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했지만 이미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꼬리로부터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 채 고스란히 정수의 에너지를 빛으로부터 빼앗기고 있었다.
이에 아독 역시 매우 씁쓸한 표정이었고 결국에 차마 볼 수 없었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말았다.
자연의 힘, 포스의 질료를 있는 대로 끌어 모아 거대한 빛으로 환원시킨 후라서 아독 그조차도 스스로의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카루시아가 그곳으로부터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치기라도 한다면 점점 빨려 들어가니 이대로 가다가는 빛의 세계로 끌려들어가 목숨마저 잃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가. 아독은 눈을 번쩍 떴고 자신이 형성했던 거대한 빛의 해일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바위벽으로부터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 역시 이미 모든 힘을 다 써 버렸던가.
털썩.
그저 힘없이 바위 지면 아래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상공 황금빛 용에게로 가 있었다.
‘이카루시아…….’
“…….”
비단 아독만이 애타는 심정은 아니었다. 지상에는 흑룡 헤파토스와 전투 용족들이 군주의 처절한 몸부림에 저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신음마저 흘렸다. 참으로 기막힌 광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가로질러 오는 섬광체가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 드넓은 들판을 건너는 데 눈 깜짝할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섬광은 황금용에게 다가가는 듯 했다.
“저건 뭐지?”
“불길에 온통 휩싸인 것 같은데!”
“세상에 이제 보니 온몸에 불이 붙은 용이잖아.”
용의 정체는 바로 나르시오스였다.
“아버지!”
다짜고짜 아버지라고 외치는 정체불명의 용, 하지만 황금용 이카루시아는 빛의 늪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니 누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든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때 나르시오스는 타오르는 화염을 없애고 회색의 빛깔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이키루시아 배 밑 부분으로 들어가더니 그를 상공 위로 힘차게 밀어 올렸다. 분명 빛의 해일로부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동작이 틀림없었다.
스스스스.
잠시 후 회색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꼬리의 힘을 잃은 이카루시아는 그만 실신하고 말았고 나르시오스는 그를 자신의 등에 업은 채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제법 중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독! 당신은 내 삼촌을 죽였고 우리 아버지마저 이 꼴로 만들어 놨으니 이후부터 나와는 원수지간이 될 겁니다!
한편 바닥에 널 부러진 채 아직도 선혈을 토하는 아독이 상공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너는 나, 나르시오스…….”
지난날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 준 빚은 오늘 이후로 모두 끝입니다. 만일 다음에 나와 마주친다면 그 때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명심하세요!
“나르시오스! 네가 정말 나르시오스 맞나?”
“…….”
팟!
나르시오스는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아버지 이카루시아를 등에 업고 저 멀리 한순간에 사라지고야 말았다. 아독은 그저 하염없이 저편 허공을 올려다 볼 뿐, 그저 놀랍기도 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
나르시오스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게토는 다소 침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둘 사이에 있던 일들을 확연히 알고는 왜 그가 아버지를 찾아나서야 하는지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나르시오스 역시 허탈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일로 내 아버지께서는 심한 부상과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계시지. 그런데 아들 된 도리로 어찌 내가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나는 반드시 아독을 찾아내어 끝내지 못한 매듭을 지어야 할 테니 그리 알거라.”
“…….”
게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
그 이튿날 새벽 나르시오스의 수하 헬시아가 돌아와서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얼마 전 아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나카스니아 대륙으로 떠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나서야 이곳에 돌아 온 것이다.
“늦었습니다.”
“아닐세. 그나저나 뭔가 알아낸 소식 좀 있나?”
“아독에 대한 행방은 아직 묘연합니다.”
“묘연하다는 것은 모른다는 뜻인가?”
“네, 그렇습니다.”
“흠.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헌데 다른 정보를 알아 왔습니다.”
“다른 정보라니?”
“흑검 군단입니다.”
“흑검 군단?”
“혹시나 아라퀘스에 대한 소식을 알아볼까 하고 중부대륙 아르카도 제국을 들렀는데 놀랍게도 그곳으로부터 무려 이만여 명에 가까운 흑검 군단이 파병 준비를 서두르고 있답니다.”
이에 나르시오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라고!”
“파병 목적지는 최근 테세우스의 세력에 선전을 하고 있는 스카치오 제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흑검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은 누군지 알아냈는가?”
헬시아가 처음으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는, 바로 아라퀘스입니다.”
나르시오스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라퀘스!”
한편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게토 역시 자신의 형 이름이 나오자 귀가 번쩍 뜨였다. 형이 아르카도 제국에서 흑검 군단을 이끌고 이곳 스카치오 제국으로 향할 것이라는 소식에 어찌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르시오스가 간만에 시원한 소리로 말했다.
“그거 잘됐군. 스카치오 제국으로 가면 그 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잘하면 아독에 대한 정보도 들을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럼 당장 그리로 가지. 가서 기다림세!”
모처럼만에 나르시오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게토는 이만저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심 형의 소식을 들어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만일 나르시오스가 형을 만나면 당장 제압해서 아버지의 소식을 캐물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아…….’
이번엔 나르시오스가 헬시아에게 말했다.
“자넨 다시 나카스니아 대륙으로 돌아가서 아독의 거처를 계속 살펴보게나.”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