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와 에르가니아는 함께 테라스에서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까만 카펫에 다이아몬드를 흩뿌려 놓은 은하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잠시 후 테세우스가 무슨 이유인지 가벼운 한숨 섞인 채 말문을 열었다.
“저기 동북쪽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빛이 보이오?”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가 의아해 했다.
“네?”
“저 별이 내 아버님과 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흑운성이라오.”
테세우스는 말하다 말고 잠시 그 옆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다소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후. 그런데 말이오. 그 옆에 항상 붙어 있던 별 하나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군요.”
“…….”
그녀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무슨 말씀인지요.”
“아무래도 한나가 패한 것 같소.”
에르가니아는 무슨 말인가 하고 되물었다.
“패하다니요?”
“그대의 연인 지드가 한나를 제압했단 뜻이오.”
순간 깜짝 놀라는 그녀.
“네!”
“설마하니 한나가 질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오.”
에르가니아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인가요.”
“그런 것 같소…… 흑운성 옆의 있던 어둠의 별이 없어졌으니 말이오. 나로서도 무척 당혹스런 일이오.”
에르가니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지드 님이…….’
그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던가. 한나가 그를 제거하러 떠날 때만 하더라도 그녀조차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여겼건만 그 결과는 반대로 나왔으니 말이다.
그때 테세우스가 힘없이 말했다.
“물론 그대는 기뻐하겠죠.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하오. 내 가장 든든한 동지를 잃었으니 말이오. 아무래도 지드라는 자를 내가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소.”
참으로 의외의 결과였다. 테세우스는 아직도 믿기지 못하는 얼굴이었고 무거운 한숨만 뱉어냈다. 지드란 자가 얼마나 강하기에 어둠의 여신이 패했단 말인가.
“결국 다음엔 내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소. 물론 그대는…… 그자를 응원하겠지.”
당연한 걸 물어보았던가.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
“…….”
지금 이 순간이 서로의 감정의 교차되는 순간이랄까.
잠시 후 내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아키아입니다.”
“들어오게나.”
“예.”
곧이어 아키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에르가니아가 발걸음을 옮겼다.
“저는 이만.”
“알았소. 이제 들어가 보오.”
그녀는 아키아가 열고 들어 왔던 문을 통해 나갔고 테라스에는 테세우스와 총작전 참모 단둘이 남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보고를 드리고자 이렇게 밤늦게 찾아뵈었습니다.”
“보고라면 무엇에 관한 일인가.”
“출정식과 여타 문제를 논의 드리려고요.”
“그래 출정식 준비는 잘 되어 가는가.”
“앞으로 오 일 후 모든 출정식 준비가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 보게나.”
아키아가 잠시 망설였다.
“저기…… 스카치오 제국 서부 요새 함락에 실패했습니다.”
이에 테세우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실패했다고!”
“네.”
“내가 알기로는 우리 병력이 꽤 많이 투입이 되었는데.”
“정확히 삼 개 군단입니다.”
“그런데 그곳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했단 말을 내게 하러 온 것인가!”
“죄송합니다.”
“자세하게 말해 보게나.”
“저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그곳 사령관이 워낙 뛰어난 명장이라서 그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뛰어난 명장이라니? 그자는 누구인가.”
“위스퍼란 자입니다.”
“위스퍼…….”
“그는 본래 스카치오 제국의 최강 전차 군단의 군단장 출신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최근에 내부적인 알력 싸움 때문에 그의 수하들이 숙청당하고 본인은 그곳으로 좌천당했다고 합니다.”
“흠…….”
“그자의 지휘 능력이 너무도 탁월하여 결국 아군의 요새 탈환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적진 병사들이 그의 말에 일거수일투족이 되어 용맹함을 떨쳤다 합니다.”
테세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대 진영에 제아무리 날고뛰는 명장이 있다 해도 수적으로 훨씬 유리한 아군이 쉽게 패했다는 것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얘기이군.”
아키아가 이번에도 잠시 주저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보고에 의하면 외부 도움도 있었답니다.”
“외부 도움이라니.”
“그게…… 엄청난 전투 기술을 지닌 소수 정예 부대였답니다.”
“대체 누구지.”
“고작해야 백여 명이 넘었는데 아군의 후방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요새 함락 실패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그들 때문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테세우스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백여 명이라고! 정녕 그들이 군단 규모의 진영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군.”
아키아가 힘없이 대답했다.
“세상에는 숨은 강자가 많은 법인가 봅니다.”
“대체 어떤 자들인지 궁금하군.”
테세우스는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난간을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결국 그 명장인가 뭔가 하는 위스퍼의 요새로 합류했겠군.”
“사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려하다니…… 또 뭔가.”
“위스퍼가 서부 요새에서 승리를 거두었기에 아마도 스카치오 제국에서 그를 다시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게 어때서.”
“그렇게 된다면 그의 전차 군단이 다시 부활을 할 테고 곧이어 벌어질 롤란도 평원 전투에서 꽤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러니까 명장의 귀환이라 그 말이군.”
“네. 그런 셈이죠.”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은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 것 같군.”
“어차피 상대해야 할 적이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기야, 우리 흑마술 병사들은 삼십 개 군단의 백만 명에 육박하지 않는가. 수적으로도 그들 보다 한참 위에 있으니 초반부터 밀어붙이면 승리는 우리 것이 될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네.”
“저 역시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테세우스는 오늘따라 다소 자신 없어 보이는 아키아에게 의아스런 눈길을 보냈다.
“대체 왜 그리 힘이 없어 보이는가.”
“제삼의 세력이 개입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삼의 세력이라니.”
“중부 대륙 아르카도 제국 말입니다.”
“뭐라.”
“그곳에서 흑검 군단이 창단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 숫자가 무려 이만여 명이 된다 합니다.”
“아르카도 제국이라면…… 아독이 그곳 출신이 아닌가.”
“아무래도 그자가 오늘 날을 대비해서 안배를 남긴 것 같습니다.”
“…….”
정말이지 테세우스 입장으로서 달갑지 않은 내용들만 줄줄 나왔다. 흑검 군단이라 함은 흑검사들로만 구성된 부대인데 그 개개인의 능력은 흑검술이란 뛰어난 전투 기술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병력 규모가 무려 이만여 명이라면 웬만한 부대와 비교하자면 열배 이상 되는 아주 큰 세력이 되는 셈이었다.
“그들이 스카치오 제국에 합류한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는 것인가.”
“아직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확인되지 않았다면 반드시 합류하란 법도 없겠군. 어쨌든 이 전쟁은 스카치오 제국을 함락시킴으로써 끝을 내야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설령 그들이 개입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병력 규모가 훨씬 크지 않는가. 게다가 우리 역시 흑마술로 무장된 병사들이기에 그리 호락호락하게 전세를 쉽게 내주지는 않을 걸세.”
“…….”
“이제 모든 보고는 끝났는가.”
“네.”
“가서 쉬게나.”
“예정대로 출정일은 오 일 후로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아키아가 물러가자 테세우스는 다시 테라스 허공위에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으니.
“후…… 산 넘어 산이라. 한나마저 떠나고 예상치 않은 복병들이 나를 괴롭히는구나.”
그는 두 손으로 난간을 꽉 부여잡고 다시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게 내 운명이라면 밀고 나가야겠지…….”
사실 그의 머릿속에는 이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지드였다.
‘그나저나 그 지드란 자 역시 언젠가는 나를 찾아오겠지. 한나를 제압한 실력이라면 상당한 능력을 지녔을 텐데…… 도대체 알 수 없는 자로군. 그 짧은 시간에 어디서 그만한 힘을 얻었단 말인지.’
결국 테세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아…….”
***
그로부터 보름 후.
스카치오 제국 시민 광장 개선문에는 이제 막 그곳을 통과하는 군인들에 대해 성대한 환영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부 관문 요새에서 승리를 거둔 병사들로서 맨 선두에는 사령관 위스퍼와 참모 레이 그리고 바로 뒤에 지드와 대원들이 당당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와와!
와와―!
시민들의 열렬하고도 뜨거운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에 얼떨떨한 사람들은 바로 위스퍼의 새로운 근위대들인 지드와 대원들이었다.
“와우! 엄청난 인파군.”
1호 비스크의 말에 막내가 맞장구 쳤다.
“이거 기분 정말 좋네요.”
“암! 좋고말고. 누구 덕에 승리를 거두었는데. 대장님과 우리들이 아니었으면 서부 요새는 결코 지켜지지 않았을걸? 하하!”
“후후, 여하튼 사령관도 대단한 분이 분명한 것 같은데요?”
“그건 왜지?”
“얼핏 듣기로 스카치오 제국의 최고 명장이라 하던데.”
“명장은 무슨 명장! 금번 요새 함락은 전적으로 우리들 덕이라니까! 우리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했겠느냐.”
“정확히 때를 맞춘 것도 있고요.”
“상을 주려면 우리가 받아야 한단 말이다. 하하.”
그때 지노가 비스크를 나무랐다.
“이놈아! 제발 체통 좀 지켜라. 열도 맞추고.”
“아이고, 또 잔소리입니까. 그리고 제가 체통을 못 지킨 게 뭐가 있답니까.”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입이 싸서야 쓰겠나.”
“입이 싸다니요!”
“비록 우리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는데 뭐가 불만입니까.”
지노가 혀를 끌끌 찼다.
“네놈은 언제 철이 들 테냐. 쯧쯧!”
“그만 열 좀 내시죠? 오늘은 좋은 날인데.”
“너만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데 열 안 내게 생겼냐!”
“쳇!”
“엥! 너 지금 ‘쳇’이라 했냐?”
“왜요. 여기서 또 때리게요?”
“때리라고 하면 못 때릴 줄 알았더냐.”
“그럼 한번 쳐 보쇼.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흠…….”
지노는 주먹이 올라가려다가 억지로 참았다.
“관두자. 너랑 다투어 봤자 나만 손해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라! 이 자식이 꼬박꼬박 말대꾸야!”
결국 2호 게리가 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분 그만들 하시죠. 시민들이 보고 있습니다. 후. 고양이와 개도 아니고 만났다 하면 싸웁니까.”
그때 막내가 외쳤다.
“다들 조용히 하세요. 저기 연단 앞에 황제가 직접 마중 나온 것 같은데요.”
“…….”
“…….”
잠시 후 사령관 위스퍼는 직접 시민광장에 나온 황제로부터 영접을 받는다.
황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서 금색 토가를 두르고 머리에 월계관을 썼다. 그가 위스퍼를 뜨겁게 포옹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오호! 나의 위스퍼! 어서 오게나.”
그러자 위스퍼가 당장 무릎을 꿇어 정중히 예를 표했다.
“폐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나야 잘 있었지. 그동안 자네가 없어서 얼마나 적적 했는지 아는가.”
“폐하!”
“아무튼 대단한 일을 해냈네. 열세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서부 관문 요새를 지켜 내다니 말이야.”
그러자 위스퍼가 바로 뒤에 서 있는 지드를 위시한 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저들 도움이 아니었으면 요새는 지켜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자 황제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저들은 누구인고.”
위스퍼가 소개하기 시작했다.
“흑마술 군단에 대항하기 위해서 뜻을 모아 뭉친 아주 대단한 전사들로서 스카치오 제국에 합류하러 온 자들입니다. 현재에는 제 새로운 근위대 소속으로 충성을 다짐하기 까지 했습니다.”
위스퍼는 말을 하는 도중 지드의 손을 잡고 황제 앞으로 나오도록 하였다. 이에 지드는 다소 당혹스러웠지만 재빨리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말했다.
“근위대장 지드라 하옵니다.”
“오호라. 자네와 저 젊은이들이 위스퍼를 도와주었다고.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전사들이 틀림없겠군.”
황제가 지드의 등을 도닥거리기까지 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허허.”
황제가 이번엔 위스퍼의 손을 손수 잡아 주면서 자신의 옆자리로 데려갔다.
“오늘은 자네가 주인공이니까. 환영 만찬식을 실컷 즐기세나.”
“아, 예.”
그때 황제가 뒤편에 앉아 있는 원로원들의 눈치를 살피더니만 위스퍼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원로원 의원 작자들한테 얼마나 시달리며 살았는지 아는가.”
위스퍼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폐하! 시달리다니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 원로원 의원들이 황권 세력을 팍팍 누르려고 기를 쓰고 있잖은가. 황권파의 실세인 자네 역시 그 때문에 서부 관문 요새로 좌천이 되어 버렸고 말일세. 어쨌거나 자네가 없는 동안에 그 작자들이 내게 얼마나 무례했는지 아는가.”
순간 위스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자들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감히 황제 폐하를!”
황제가 그를 만류했다.
“흥분하지 말게나. 여기서 열을 내 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네. 어차피 아직까지 모든 군권을 원로원에서 쥐고 있으니 자네 역시 그들의 뜻에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할 걸세.”
“…….”
그제야 위스퍼 역시 뒤쪽에 앉아 있는 의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성질을 꾹꾹 참는 것 같았다. 그 둘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지드의 눈길이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이 나라도 골치 아픈 구석이 있군.’
한편 황제 뒤편에 모여 앉아 있는 원로원 의원들의 분위기는 시민들과는 상반되게 대체적으로 무덤덤한 반응 들이었다.
그들 중 집정관 아벨과 참모의 얼굴에는 냉기마저 흐르는 듯했다.
“자네도 봤는가. 저 둘이 속닥거리는 것을…….”
“물론 봤습니다.”
“위스퍼가 돌아왔으니 앞으로 황제가 기세등등할 걸세.”
참모는 무슨 이유인지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 못할 거라니?”
“오전에 원로원에서 이미 손을 써 놨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위스퍼의 전차 군단 군단장 복귀를 만장일치로 거절했다 아닙니까.”
순간 집정관 아벨의 화색이 확 밝아졌다.
“오호! 정말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죠. 서부 요새 한번 사수했다고 모든 것을 얻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위스퍼는 보병 군단 제삼 군단 군단장으로 임명이 될 것입니다. 전차 부대로의 복귀만 막으면 그 역시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가 될 것입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군. 후후!”
“물론 황권 세력 역시 잠잠해질 겁니다.”
“원로원에서 아주 좋은 결정을 했군.”
“이번 전쟁만 끝이 나면 더욱 기를 펴지 못할 거고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후후…….”
한편 멀리서 청력을 이용해 그 둘의 대화를 듣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지드였다. 그는 내심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나라 역시 황권과 원로원의 대립 구도가 심한 것 같은데 그 자신이 모시는 위스퍼가 적들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드는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며 내심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
“서쪽 산에서 봉화가 피어올랐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서쪽으로 집중이 되었다. 서쪽 봉화로부터 불이 피어올랐다는 것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적은 흑마술 군단이 틀림없었다. 광장에 가득 들어 찬 시민들 역시 봉화를 보고는 난리법석을 떨었다.
“놈들이 쳐들어왔다!”
“드디어 올 게 왔군.”
“서쪽이라면 롤란도 평원이잖아.”
“그렇다면 동부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말인데. 이를 어쩌지.”
“아아.”
황제와 위스퍼 그리고 아벨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들은 하나같이 올게 오고 말았다는 심정은 똑같았을 것이다. 특기 위스퍼에게는 더욱 그랬다.
“이제 진짜 시작인가…… 허나 내 보직이 일반 보병 부대라니, 이것 참 암울한 기분이군. 거기서 뭘 한단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