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0 나카스니아 대륙으로 (81/81)

Chapter. 80 나카스니아 대륙으로

허공 한 지점으로부터 푸르스름한 공간이 열리며 두 명의 존재가 지면으로 떨어졌다.

“어이쿠.”

“아.”

그들은 지드와 아라퀘스로서 인간세계로부터 바로 이곳 나카스니아 대륙으로 차원 이동을 했던 것이다.

지드는 신형을 추스르고 일어나 주변부터 살폈다. 그저 말로만 들어왔던 신비한 세계, 정말이지 모든 것이 색달라 보였다.

아라퀘스 역시 지드와 마찬가지로 처음 도착한 이곳에 대해서 매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와우. 모든 것들이 큼지막하게 생겼네요.”

“여기가 나카스니아 대륙이란 말이지. 바위나 나무 그리고 풀과 꽃들마저 인간세계 것들과 달라 보이는데.”

“어쨌든 제대로 도착한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아스티안 신전은 어디 있냐.”

“…….”

당장 대답을 못하고 아라퀘스.

“글쎄요.”

“글쎄요? 뭔 대답이 그러냐.”

“저도 아스티안 신전이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처음 와 보는 것이라서. 그저 아버지께서 주셨던 귀환서 가지고 차원 이동만 했을 뿐인데요,”

지드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나 참. 그럼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거냐?”

“일단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봐야죠.”

“밑도 끝도 없이 뭘 찾는다고그래?”

“누구든지 처음 만나는 존재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네 녀석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여길 온 거냐.”

“당장 급하니까 할 수 없었죠.”

지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처음부터 골치 아프게 생겼군.”

“일단 여기부터 떠나죠.”

“어디로 가게.”

“아무 데나요.”

“지금 장난하냐!”

“어쩔 수 없잖아요. 여기서 계속 머물 수도 없고요. 아무튼 누구든 만나면 그때 가서 아스티안 신전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때 지드가 아라퀘스가 착용한 군장과 붉은 검을 바라보더니만 다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군장 한 번 죽이는군. 더군다나 핏빛처럼 뻘건 검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거냐?”

“아버지께서 물려 주신 겁니다.”

“꽤 폼 나는데?”

아라퀘스가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후후. 이 복장이 여기서는 매우 먹어 준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바로 지금 제 모습이 이 세계의 모든 마물들이 이름만 들어서 벌벌 떤다는 이리스의 복장이거든요.”

“이리스라…….”

“아버님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고 있답니다.”

“오호라. 그러니까 그분의 물건을 물려받아서 아주 자랑스럽다 그 말이군.”

“자랑스럽고말고요.”

“…….”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지드와 아라퀘스는 숲속을 지나 어느 붉은색 바위 산 중턱으로 한참 오르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돌아다녔지만 인적을 찾기 힘들었고 이들은 곧 지쳐 버렸다.

결국 지드가 불만을 토로했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거냐?”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괜히 이상한 대륙으로 건너와서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이게.”

“조금만 더 가봅시다.”

“더 간다고 뭐가 달라지나.”

바로 그때였다.

아라퀘스가 뭔가를 감지한 듯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만이라니.”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데요?”

“뭐라.”

지드 역시 안력을 높여 주의를 집중했다. 잠시 후 지드가 화색이 밝아지며 말했다.

“진짜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쪽으로 가 보죠?”

“좋아.”

잠시 후 숲속 바위 뒤에 숨어서 저 아래 공터에 모인 사람들을 몰래 지켜보는 지드와 아라퀘스, 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처음으로 만난 존재들은 대략 수백여 명으로서 신전 제단 앞에 엎드려 뭔가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제단 맨 앞에는 신전 제사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양피지 하나를 들고 크게 말하고 있었으니.

초원의 바람이여!

옛날 옛적 신비한 전설을 내게 들려다오.

대지를 울리고 하늘을 찢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득실대는 곳. 인간 종족을 위해 한줄기 빛이 음습한 대륙을 비추었다네.

잔잔한 호수의 물결이여!

지나간 전설을 너의 맑고 투명한 수면 위로 보여 다오.

인간의 육신이 산을 만들고

그 핏물로 수많은 강을 이루었던 대륙.

바로 이곳에 한줄기 소낙비가 내려와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 전설.

아! 이리스의 전설을 들어본 사람이 있다면

그의 노래나 함께 불러 보세나.

잔잔한 운율의 시구가 하프의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노인의 입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꿈결 속에 천사라도 나타나서 보드라니 심장을 어루만지는 축복의 노래,

이를 듣고 있던 지드와 아라퀘스는 그 선율이 너무 좋아 흠뻑 취하고 있었다.

곧이어 지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용을 들어 보니 자네 아버지에 대한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아버지를 위한 시예요.”

“여하튼 대단한 분이 틀림없었던 것은 사실이었군. 아직까지 이곳 사람들에게 의해서 불려지니 말이야. 그나저나 내가 알기로는 나카스니아 대륙의 모든 인간들이 인간 세계로 차원 이동을 했다고 아는데 저들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미처 이동을 못하고 마지못해 남아 있는 인간들이겠지요.”

“어쨌든 사람들을 찾았으니까 당장 모습을 드러내자고.”

그러자 아라퀘스가 지드를 말렸다.

“잠깐만요.”

“왜.”

“조금만 더 지켜봐요.”

“쳇. 뭐 그렇게 하지.”

한편 의식을 다 치른 노인이 뒤로 돌아 바닥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위대한 영웅 이리스 님은 반드시 돌아올 거요. 아직도 이곳 나카스니아 대륙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남아 있으니 말이오. 다들 희망을 가지시오.”

그러자 군중들 누군가가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희망은 무슨 희망이오! 어젯밤에는 내 둘째 딸이 마물들에게 납치를 당했소. 벌써 우리 마을에서만 열일곱 명이 희생을 당했는데 무슨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매일 쓸데없이 기도 의식이나 치르고 있으니 이게 말이나 되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 외쳤다.

“맞소이다. 촌장께서 의식을 치른 지 벌써 일 년이 넘었소. 하지만 이리스가 등장하기는커녕 마물들만 더욱 득실대니 이러다가 인간들의 씨가 모두 말라 버리겠소.”

“당장 힘을 모아 마물들에게 대항이나 합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떳떳하게 말이오.”

“옳소.”

그러자 노인이 두 팔을 들어 올려 좌중을 진정시켰다.

“내 말 좀 들어 보오. 이리스님은 절대로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실 겁니다. 아마도 지금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 분명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 여러분, 믿음을 가지를 바랍니다.”

“믿음은 개뿔!”

“아제부터 의식 같은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오. 오로지 마물들을 상대로 대항할 뿐!”

한편 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드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고는 아라퀘스를 한번 보더니만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봐, 아라퀘스.”

“네?”

“현재 자네 복장이 아버님 것과 똑같다고 그랬지.”

“네.”

“검도 말이야.”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지드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만 대뜸 말했다.

“네가 이리스 행세를 하면 안 되겠냐?”

아라퀘스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뭐라고요!”

“안 될 것도 없잖아.”

“그, 그건 좀…….”

지드가 갑자기 그의 등덜미를 끌더니만 냅다 신전 제단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헉! 이거 놔요.”

“이미 늦었어.”

한편 노인과 사람들은 갑작스레 제단 뒤쪽 바위로부터 나타난 두 사내의 등장에 저마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헉! 뭐야.”

노인이 얼떨결에 물었다.

“누, 누구시오.”

지드가 당당히 대답했다.

“여기 옆에 계신 분이 이리스입니다. 이분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 나타난 것이 다들 놀라지 말기 바라오.”

“…….”

“…….”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이리스라니.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촌장 역시 이리스의 출현을 그토록 바라며 열심히 기도 의식을 치러 왔지만 막상 대하고 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 진짜 그대가 이리스 님이시오?”

이에 가장 당혹스러워 한 자는 당사자인 아라퀘스였다. 지드에 의해 억지로 떠밀려 나오기는 했는데 본인 스스로 이리스라 말하기가 조금은 그랬나 보다.

그때 군중들 속에서 제법 나이 먹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특유한 군장에 붉은 검을 보니 이리스 님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맞아요. 나도 먼발치에서 딱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이리스 님이 틀림없습니다!”

“세상에, 그분이 나타나시다니!”

“아아,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군중은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에 아라퀘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군장과 검을 착용한 그로서 남들이 이리스로 오해할 만도 했지만 이렇게 뜨거운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결국 그가 실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들 들으시오. 나는 이리스가 아니라…….”

그 순간 지드가 그의 입을 막았으니.

“웁!”

그리고 대신 말문을 여는 지드.

“다들 걱정하지 마시오. 여기 이분은 이리스가 틀림없소이다. 여러분을 돕기 위해 나타난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

여기저기 함성이 들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요새 망루 위 경비병이 다급하게 외치는 것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마물들이 쳐들어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특히 촌장은 안절부절 못하며 급히 망루 쪽으로 향했다.

지드와 아라퀘스 역시 그를 따라갔고 대체 마물들이 얼마나 몰려오나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망루 위에 올라선 그들은 숲 지대를 가득 매우고 공격해 들어오는 마물들의 생김새에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눈살을 찌프렸다.

“뭐야, 저놈들은.”

“반은 인간에다 반은 짐승처럼 생겼잖아.”

“참으로 흉측하군.”

그때 촌장이 아라퀘스에게 부탁했다.

“이리스 님. 제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그 숫자가 저렇게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아서 총공세를 취하는 것 같습니다.”

“…….”

아라퀘스가 당장 뭐라 말문을 열지 못하자 이번엔 지드가 나섰다.

“자네의 도움이 절실할 때인 것 같네. 설마하니 폼으로 그 군장과 검을 착용한 것은 아니겠지?”

인간 병사들 역시 저 밀려오는 마물들과 망루 위에 서 있는 아라퀘스를 번갈아 보며 무언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다들 그가 이리스임을 믿고 있었기에 이 순간 나서 주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것 같았다. 촌장이 아라퀘스에게 다시 말했다.

“이리스 님, 놈들이 코앞까지 닥쳐왔습니다.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결국 진중한 표정을 짓는 아라퀘스, 그 자신이 이리스이든 아니든 간에 뭔가 특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슴 부위 돌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군장의 변화가 생겼으니.

착! 착! 착! 착!

휘리리릭!

일단 요란한 소리에 군장의 각 보호대가 작동이 되면서 그 볼륨감이 두껍게 변화했고 등 뒤로부터 거대한 금속성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곧이어 공중을 박차 올랐으니 망루 아래쪽으로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파팟!

휘리리릭!

이미 등 뒤로부터 빼어든 빨간색의 붉은 검이 석양 노을빛을 받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파파파팟!

“컥!”

파팟―!

“크아악.”

그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러 대었으니 반인반수의 마물들이 맥없이 쓰러져 갔던 것이다.

엄청난 전투 기술에 혼자서 천 마리를 상대한다는 것이 벅차 보일 수 있지만 가히 그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잠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도 지쳤는지 점차적으로 동작이 둔해져만 갔다.

“헉헉.”

아라퀘스가 망루에서 그저 팔짱을 낀 채 지켜만 보고 있는 지드에게 원망의 소리를 뱉어 냈다.

“그렇게 구경만 할 겁니까? 도와주지 않고요.”

지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혼자서도 잘 싸우는데.”

“정말 너무합니다! 나 혼자서 이 많은 마물들을 다 상대하라고요?”

지드가 한심한 듯 말했다.

“멍청하기는. 너는 아직 비장의 무기도 꺼내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엄살이냐.”

“비장의 무기라니요.”

“타룬 말이다.”

“타룬이라고요?”

그제야 아라퀘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그게 있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아라퀘스는 다시 가슴 부위의 돌출 버튼을 눌렀다.

탁!

휘리리릭!

그러자 양어깨 보호대가 열리면서 28개의 서슬이 시퍼런 타룬 병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옛날 이리스의 가공할 만한 무기가 오늘날에 다시 선을 보였던 것이다. 아라퀘스가 큰소리로 외쳤다!

“타룬이여! 저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해치워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28개의 무기가 각자 무섭게 뛰어나갔다.

파파파팟!

“아악!”

“파팟!”

“으악!”

칼날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공간을 휘젓고 다니면서 가차 없이 마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나를 처지하면 바로 관통하여 그 뒤에 있는 자들마저 절단을 냈으니 마치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야 마물들도 무시무시한 병기의 주인공을 알아 차렸던가.

여기저기에서 경악의 소리가 들려 왔다.

“타, 타룬이다!”

“그건 이리스의 병기인데.”

“그렇다면 이리스가 나타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빌어먹을! 갑자기 이리스라니.”

“우린 다 죽었다.”

과연 타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았다. 아직도 허공을 가로 지르며 남아 있는 마물들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절단을 내는 초유의 병기,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아라퀘스는 혼자서 천여 마리나 되는 마물들 모두를 물리쳤던 것이다.

잠시 후에야 전투 상황은 막을 내렸고 승리는 확정적이 되어 버렸다.

이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함성.

과연 그 누가 이리스의 출현을 의심한단 말인가. 지드 역시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저처럼 무시무시한 무기를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아라퀘스가 전투를 끝내고 망루로 돌아오자 지드가 한마디 했다!

“수고했다.”

“수고는 뭘요.”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랄까. 상상외로 무시무시한 병기를 소유했군그려.”

“제 아버님 덕이죠. 그나저나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보다는 당장 아스티안 신전을 찾아 가야 하는데.”

지드가 촌장에게 물었다.

“아스티안 신전은 어디 있소.”

그러자 촌장이 북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으로 산맥 두 개만 넘으면 바로 거기 있습니다.”

순간 지드와 아라퀘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당장 그리로 가지.”

“물론입니다.”

자리에 남은 촌장만이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이리스 님이, 이리스 님이 오셨어…… 근데 아스티안 신전 위치도 모르신단 말인가…….”

***

초저녁의 별무리들이 아름답게 빛이 났다. 이곳은 나카스니아 대륙 아스티안 신전으로서 성스러운 정령들의 안식처이다. 신전 앞 계단 위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중년의 여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령왕 아스티안과 헤르시안이었다.

정령왕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인간 세계에서 테세우스의 흑마술 군단이 패배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믿어지지 않는구나.”

“정말 다행이에요.”

“더욱 놀라운 것은 어둠의 여신과 론의 아들 테세우스가 그 누군가에게 제압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인간 세계에도 대단한 인물이 존재하는 것 같구나.”

“이번 전쟁에서 아라퀘스의 흑검 군단 가세가 큰 도움이 되었다 합니다.”

그러자 정령왕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오호. 내 외손자가 큰일을 해냈구나! 과연 아독의 아들이라.”

헤르시안 역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아들이기도 하니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때 정령왕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나르시오스가 걱정이 되는군. 그놈이 아독을 찾기 위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헤르시안 또한 근심어린 얼굴을 했다.

“정말 걱정이에요. 그가 아독을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인데요.”

“절대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원수를 졌기에 그런 겐가.”

“자기 아버지 때문이겠죠.”

“그거야 아독이 인간 성지를 지켜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대결 때문이 아닌가.”

“당시 신성 아케이튼이 크게 다쳐서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린다 합니다. 아마도 그 일이 마음속에 두고두고 한이 맺혔겠지요.”

“어쨌든 그놈이 이곳을 찾아 내지 말아야 할 텐데.”

바로 그때였다.

신전 외부 출입문으로부터 경비 정령이 황급하게 뛰어 오는 것이 아닌가.

“큰일 났습니다!”

정령왕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나르시오스가 나타났습니다!”

순간 정령왕과 헤르시안이 깜짝 놀랐다.

“뭐라고!”

“현재 에카스 신전에 나타나서 아독이 있는 곳을 대라며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입니다.”

정령왕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아, 이 일을 어쩔꼬.”

헤르시안 역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당장 아독을 피신시켜야 할 텐데요.”

“그렇다면 차원의 틈새를 그 누가 막을 텐가.”

그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스티안 신전 앞마당에 거대한 용이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쿵!

크아앙!

“하하하, 여기들 있었군.”

그는 불사의 용 나르시오스였다. 뒤늦게 들이닥치는 경비 정령들.

“놈을 막아라!”

그러자 용이 입으로부터 화염을 내뿜었다.

“아악!”

스르르!

수십여 명의 경비 정령들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불에 타 한 줌의 재로 흩어졌다. 이번엔 나르시오스가 정령왕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정령왕이여! 당장 아독을 내놓으시지요.”

정령왕이 지지 않고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침입을 해서 난동을 부리는가! 당장 나가지 않겠는가.”

“하하. 아독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왔습니다. 난 그와 볼일이 있으니 상관 말고 길을 비켜서시오.”

“그렇게는 못합니다. 정 비켜서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할 겁니다.”

정령왕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 이런 건방진 놈이.”

“그럼 할 수 없죠.”

나르시오스의 인상이 굳어지고 전투 태세를 갖추자 이번엔 헤르시안이 나섰다.

“이봐! 나르시오스. 여기 계신 분은 너의 외조부이며 나는 이모인데 이렇게 무례하게 나와도 되는 건가.”

그 말에 나르시오스가 움찔거렸다.

“…….”

헤르시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네 몸속에는 정령의 피가 흐르고 있건만 어찌 성스러운 정령의 신전에서 행패를 부리는가!”

그러자 나르시오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옛날 일가지고 뭐라 하는데 난 이미 어렸을 때 이곳으로부터 쫓겨난 몸이었소. 어머니 역시 용족이신 아버지와 결혼했다고 내쳐 놓고 이제 와서 친척 운운하는 것이 웃기지도 않습니까? 어쨌든 난 아독하고 볼일이 있으니까 그리들 아시오.”

정령왕이 호통을 쳤다.

“이런! 그래서, 나에게 대항을 하겠단 건가.”

“못할 것도 없죠. 뭐. 어차피 난 용족의 손에 길러졌으니 그저 당신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오냐. 정 아독을 만나고 싶다면 나부터 쓰러트리고 가거라.”

“아독은 네 이모부인데 정 그와 대결을 하고 싶단 말인가.”

“그전에, 제 아버지를 헤친 원수에 지나지 않을 뿐이죠.”

“이런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좋다 내 너를 기꺼이 상대해 주마.”

“괜히 후회나 하지 마세요.”

“자, 덤벼라.”

정령왕은 말이 끝나자마자 손끝으로부터 빛의 검을 형성했다.

파팟!

나르시오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할 수 없죠.”

회색빛 거대한 몸체를 지닌 나르시오스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휘리리릭!

그에 비해 턱없이 적은 정령왕 역시 빛의 검을 지닌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백발과 하얀색 토가가 바람에 훌훌 날았다.

나르시오스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비교적 여유를 부렸다.

“그렇게 달려들면 뭐 뾰족한 수가 있습니까?”

홱!

정면으로 달려드는 정령왕에게 가볍게 꼬리로 내려치는 나르시오스.

팍!

“억!”

기세등등했던 정령왕이 꼬리의 끝 부분으로부터 강력한 타격을 받고 뒤로 수십 여 m나 튕겨 나갔다

털썩!

“아아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실력차이가 나도 났다. 바닥에 쓰러진 정령왕은 단 한 방을 맞고 무척 심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컥컥!”

헤르시안이 재빨리 다가와서 그를 부축했다.

“아버님!”

“아아.”

“괜찮으세요.”

그때 나르시오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내가 불사의 용이라는 것을 잊은 모양인데요. 세상에 나를 상대로 이길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요. 그러니까 당장 아독을 불러오세요.”

헤르시안이 큰소리로 외쳤다.

“너 정말 이럴 거니! 네 몸속의 반은 정령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야.”

“그놈의 훈계, 정말 지긋지긋 하네요.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정령이 아니라 용족의 통치자란 말입니다. 어쨌든 아독을 내놓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을 겁니다.”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아스티안 신전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물을 마구 부숴 버리기 시작했으니!

“이얏!”

홱!

쾅!

우르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신전 건물들이 그가 내뿜는 화염과 꼬리에 의한 타격에 의해서 마구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콰쾅!

수백 명의 정령 경비대들이 있었지만 감히 그를 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신전 건물이 방대하게 펼쳐져 있기에 나르시오스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파괴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점점 흥분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대체 아독은 어디 있는 거야! 말하지 않으면 여기 모든 건물들을 다 부숴 버릴 테다. 에잇.”

화르르!

우르르 쾅!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르시오스는 진짜 모든 건물을 파괴할 모양이었다.

불과 반나절 만에 건물의 절반이 초토화가 되어 버렸으니 이제 아독이 있는 곳에도 점점 위험이 닥쳐 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정령왕과 헤르시안은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정녕 저놈이 실성을 했단 말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신전들을 마구 부수는 거지.”

정령왕의 말에 헤르시안 역시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했다.

“큰일 났어요. 아독이 있는 건물 쪽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어요.”

“아! 놈이 아독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일 텐데. 아독조차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뿐더러 천공 갑옷도 아들에게 물려 주지 않았던가. 그는 오로지 차원의 틈새를 막느라 거기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을진대 저 용 놈은 미쳐 날뛰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일단 아독부터 피신시키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건 안 돼. 차원의 통로가 열린다면 인간 세계는 그날 이후로 종말을 맞는다는 사실을 모르더냐.”

“…….”

정말이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리는 두 사람.

바로 그때였다.

신전 입구로부터 두 명의 존재가 이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어머님!”

귀에 익은 소리에 헤르시안이 깜짝 놀랐다.

“아라퀘스!”

아라퀘스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달려와 어머님 품에 안겼다.

“어머니. 흑!”

정령왕 역시 외손자의 등장에 무척 기쁜 얼굴을 했다. 헤르시안과 아라퀘스가 해후를 나눈 지가 수년이 흘렀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아니한가.

곧이어 헤르시안이 바닥에 누워 있는 정령왕에게 처음 보는 아라퀘스를 소개했다.

“아버님, 얘가 아라퀘스에요.”

“오호라. 네가 정녕 내 외손자란 말이냐. 이, 이리 가까이 다가와 보거라.”

“네, 할아버지.”

“어쩜 네 아비와 꼭 닮았단 말인지. 컥컥.”

그때 헤르시안이 아라퀘스와 함께 온 지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온 분은 누구지?”

그제야 아라퀘스가 그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를 도와주시기 위해 함께 온 피체 왕국의 국왕이십니다.”

“국왕이라?”

정령왕과 헤르시안은 다소 의아스런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아라퀘스가 인간 세계로부터 그를 데려왔는지 말이다. 아라퀘스가 그런 그들의 속마음을 알았던가.

“이분은 저를 도와 저 오만한 나르시오스를 제압할 것입니다.”

순간 둘이 깜짝 놀랐다.

“나르시오스를 제압한다고!”

“아마 이분에 대해서 들으시면 놀라실 겁니다. 지난번 어둠의 여신과 흑운성의 후계자 테세우스를 제압한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헤르시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이분이…….”

“예, 맞습니다.”

아라퀘스가 주변을 돌아보며 한숨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나르시오스가 신전을 초토화를 내 버렸네요. 아버님은 아직 안전하시죠?”

“그렇기는 하다마는…….”

“시간이 없군요.”

아라퀘스가 지드를 바라보며 외쳤다.

“폐하! 이제부터 저와 함께 저 멀리 보이는 회색 빛 용과 일전을 벌어야 하는데 마음 준비는 단단히 되셨는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럼 시작할까요.”

“좋지.”

아라퀘스가 먼저 날개를 폈다.

휘리리릭

곧이어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지드는 비록 날개가 없었지만 한 번의 도약으로 100여 m를 튀어 오르니 가히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듯 보였다. 이에 정령왕과 헤르시안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높이 오를 수가 있지요?”

헤르시안의 말에 정령왕 역시 믿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아독만이 가능했던 능력일진대 저자가…….”

“그런데 걱정이 되는군요. 과연 아라퀘스와 저기 지드란 분이 나르시오스에게 대적이 될지 말예요.”

“우리에게 있어서 저들이 마지막 희망인데…… 제발.”

헤르시안은 저 멀리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아라퀘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조심해라!”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제압을 할 테니까요.”

***

그로부터 잠시 후.

거대한 회색 빛 용 나르시오스는 갑작스레 자신의 앞에 나타난 두 존재에 대해서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둘 중의 하나는 아독의 아들로서 지난번 한 번 본 적이 있기에 기억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눈에는 왜소해 보이는 이 둘이 그렇게도 가소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뭐야, 네놈들은.”

아라퀘스가 크게 외쳤다.

“더 이상 신전을 파괴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자 나르시오스가 콧방귀를 끼었다.

“흥. 능력 있다면 한번 해 보시지.”

그때 나르시오스는 아라퀘스 옆에 서 있는 지드를 살펴보더니 다소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나저나 넌 누구냐.”

지드가 당당히 말했다.

“난 지드라 한다.”

“지드라고?”

나르시오스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아라퀘스가 이들의 대화에 껴들었다.

“이분은 어둠의 여신과 암흑의 제왕 테세우스를 제압한 피체 왕국의 국왕이시다.”

그 말에 나르시오스가 다소 놀란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

그제야 관심을 가졌던가. 조금은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아독과 거의 비등하다는 수준인데.”

한편 지드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용 앞에서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생소하게 보였건만 갑자기 거대한 생물체 앞에서 대항한다니 말이다.

나르시오스가 외쳤다.

“네 녀석들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난 불사의 용으로서 결코 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후후.”

아라퀘스가 당당히 말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물론 그렇게 말고 싶겠지. 하지만 어디까지 희망 사항일 뿐. 가소로운 존재들이여! 어디 한번 덤벼 봐라.”

아라퀘스가 지드에게 말했다.

“합공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다면 시작하죠.”

“두말하면 잔소리.”

그 둘은 대화가 끝이 나자마자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용에게 달려 들어갔다.

타다닥―

이에 나르시오스가 울부짖음과 함께 입으로부터 화염을 내뿜었다.

화르르, 화르르―

마치 활화산이 뿜듯이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지드와 아라퀘스는 각자 절묘한 동작으로 화염을 피했고 공중으로 도약하여 용의 등줄기에 올라탔다.

“이얏!”

타다닥!

척!

지드가 외쳤다.

“공격!”

그의 외침과 함께 지드의 선인도와 아라퀘스의 붉은 검이 용의 가죽을 목표로 박아 넣었다.

파팟

“헉!”

헌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검 끝이 살가죽을 파고들기는커녕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팅 팅―

아라퀘스가 외쳤다.

“검이 박히지 않아요.”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들려오는 나르시오스의 음성.

“하하. 내가 불사의 용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모양들이군. 자, 조무래기들이여. 이제는 내가 공격할 차례인 것 같은데.”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꼬리를 움직여 자신의 등 뒤에 탄자들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홱!

“헉!”

파팟

“훗!”

지드와 아라퀘스는 강력한 충격으로 각자 수십 여 미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쿵!

팍!

지드는 숲속 공터로 떨어졌고 아라퀘스는 벽에 폭 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에서 물러날 자들이 아니었다.

지드의 선인갑과 아라퀘스의 하렘 군장이 그 모든 충격을 완화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신형을 추스르고 다시 공격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드가 아라퀘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저 자식, 뭐가 이렇게 센 거야!”

“그야 불사의 용이니까 그렇죠.”

“불사의 용이라면 죽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네, 맞습니다.”

지드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 싸움은 승산이 없는 것 아니냐.”

아라퀘스가 다소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잖아요.”

“빌어먹을! 나를 꼬여서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서 함께 죽을 생각이었던가.”

“저 혼자보다는 그래도 폐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우리 둘이 합작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솔직한 생각에 나는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아라퀘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만에 하나라도 불사의 용이 차원의 틈새를 막고 있는 제 아버지를 찾아내어 해치기라도 한다면 나카스니아 대륙과 인간 세계의 통로가 완전히 뚫려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 것입니다.”

“제길, 암울한 얘기만 하는군.”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이번엔 앞뒤로 합공을 하죠.”

“합공이라니.”

“제가 뒤를 공격할 테니까 폐하께서 정면을 공격하세요.”

그러자 지드가 불끈했다.

“내가 왜 정면이냐. 놈이 불을 뿜으면 새까만 숯덩이로 변할 텐데 말이다.”

“그야 피하면 되죠.”

“그게 말처럼 쉽냐.”

“그럼 저랑 위치를 바꾸든지요.”

“…….”

지드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한마디 내뱉었다.

“싫다. 꼬리 부분 치는 것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야.”

한편 나르시오스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는 가소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를 상대로 감히 합공을 하겠다 그 말인가. 하하. 이거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군. 자, 네놈들의 의견 교환이 끝났으면 어디 한번 시도를 해 보거라. 얼마든지 막아 줄 테니까 말이다.”

결국 지드가 용의 정면으로 나섰고 아라퀘스가 뒤쪽 부분을 맡기로 하였다.

“이얏!”

타다닥

지드가 먼저 달려들었다.

그의 도약은 대략 50m 이상을 떠올랐고 선인도를 앞세워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아라퀘스 역시 그 때를 맞추어 꼬리 부분을 향해 돌진했으니 어찌 본다면 완벽한 합공 기술이었다.

하지만 과연 불사의 용이던가.

그는 동시에 불을 뿜고 꼬리를 휘둘러 쳤다.

홱!

“헉!”

파팟!

“훗!”

쾅!

아까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야 말았으니 지드는 화염을 피하기 위해 멀찌감치 숲속 공터 뒤로 물러났고 아라퀘스는 다시 바위벽에 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저히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가. 이제야 지드와 아라퀘스는 자신들이 어마어마한 괴수와 싸우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고작해야 한 줌도 안 되는 것들이 내게 도전을 하다니. 거참, 웃음도 나오지 않는군.”

이번엔 나르시오스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휘리리릭!

순식간에 상공으로 날아오르더니만 수직 하강을 서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지켜보았던 정령왕 아스티안이 큰소리로 외쳤다.

“위험해. 놈이 수직 하강을 시작한다면 거대한 화염과 함께 주변이 초토화될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필시 나르시오스는 이번을 통해서 마지막 승부를 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스키안 신전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건물 어딘가에 있을 아독 역시 피해를 받을 것이다.

아라퀘스가 정령왕에게 물었다.

“도대체 불사의 용은 약점이 하나도 없나요!”

“약점이 하나 있긴 있지.”

“그게 뭔데요!”

“정수리 부분이다.”

“정수리요?”

“가장 근접하기 힘든 곳이지만 만일 그곳에 충격을 준다면 그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순간 아라퀘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러고는 지드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폐하! 놈이 수직 하강의 공격을 한다면 한마디로 이 지역은 물론이고 우린 끝입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는 것인데 어떡하든 이번 한 번에 그를 막을 방도를 찾아야겠어요.”

“좋은 방도라도 있냐.”

“하나 있습니다.”

“뭔데.”

“제가 타룬의 병기를 작동시켜 놈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릴 테니까 폐하께서는 오로지 놈의 정수리만 노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작전은 그가 거대한 화염을 뿜어내기 전에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정수리라…….”

“거기야 말로 그의 유일한 약점이거든요.”

“흠.”

“시간이 없어요. 빨리 결정을 내셔야 합니다!”

“좋다.”

그때 들려오는 소리.

벌써부터 상공 위로부터 나르시오스의 수직 하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휘리리릭!

파파파팟!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불과 수초 후에는 아스티안 신전 전제가 무너질 태세였으니 살아남는 자들조차 전혀 없을 것이다.

아라퀘스가 먼저 외쳤다.

“그럼 저부터 시작합니다.”

그가 가슴 부위 돌출 버튼을 누르자 양어깨 보호대가 열리면 28개의 타룬 병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활짝 폈다.

그와 동시에 무섭게 튀어나가는 타룬 병기.

착! 착! 착! 착!

이미 수직 하강을 시도하고 있었던 나르시오는 아라케스의 타룬들이 자신에 날아오자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까짓 애들 장난감으로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한심한 녀석!”

하지만 나르시오스가 간과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지드의 선인도였다. 그 역시 때를 놓칠세라 검을 빼 들어 하늘로 향했다.

“선계여! 그곳의 힘이 필요하나이다!”

그가 외치자마자 지드 머리 위 상공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섬광에 이은 천둥소리.

번쩍!

비마저 한줄기 시원하게 쏟아졌다. 지드는 모든 신경을 나르시오스의 정수리에게만 집중이 되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벼락을 그곳에다 집중시킨다면 이 싸움은 의외로 쉽게 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실수하면 안 된다. 절대로.’

그는 스스로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라퀘스의 타룬 병기가 그의 신경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으니 지드는 정확히 번개만 만들어 내면 되었다.

지드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드디어 먹구름 사이로부터 섬광에 이은 벼락을 만들어 냈다.

번쩍!

쩍―!

크아앙!

거의 지상 밑으로 내려왔던 나르시오스의 정수리에 강력한 빛줄기가 꽂히는 순간이었다.

불사의 용이라지만 뇌가 있는 부분에 벼락을 정통으로 맞았는지라 그대로 바닥에 추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드를 비롯한 아라퀘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정령왕과 헤르시안 마저 믿기지 않는 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불사의 용이라 한다면 절대 죽지 않는 영물인데 그들 눈앞에 머리가 터져 즉사한 대상이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드가 용에게 다가가 다시 살폈다. 새까맣게 탄 머리통을 보니 숨이 확실히 끊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아라퀘스 역시 지드 옆으로 달려와 흥분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세상에, 불사의 용이 죽었잖아.”

정령왕와 헤르시안 역시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집채보다도 더 큰 용을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었다. 지드는 선인도를 다시 등 뒤로 집어넣고는 아라퀘스에게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 내가 도움이 되었느냐?”

“도움이 되다 뿐입니까.”

“내 할 일 끝났으면…… 나 돌아가야 하겠다.”

정령왕이 만류했다.

“그래도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지드가 정중히 사과했다.

“아닙니다. 당장 가서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요.”

사실 지드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에르가니아 그녀 한 사람의 얼굴만이 맴돌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단숨에 달려가서 뜨겁게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고 할까.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아라퀘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장 가시죠.”

“너는 여기서 좀 더 있다 오지 그러냐.”

“저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보고 싶은 사람이라니? 그게 누구냐.”

“헤라입니다.”

지드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둘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냐.”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둘이 잘 어울릴 것도 같군.”

“폐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후후!”

“하하. 아무튼 좋은 일이야. 이제 피체 왕국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시 재건해야겠지.”

“물론입니다.”

Epilogue

그로부터 3년 후.

피체 왕국이 제국으로 승격이 된지 어느덧 1년이 흘렀다.

그 옛날 하류 구역 주민들은 이제야 제국의 면모를 갖춘 나라의 시민으로서 당당한 주권을 갖게 되었다. 지드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황제로서 그 위엄을 갖추었고 제법 많은 업무를 직접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가끔 테라스로 나와서 황궁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계절에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첫째 부인 아카시안과 둘째 부인이 정원의 꽃밭을 가꾸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보기가 무척 좋아 보였다.

휘잉.

한줄기 시원한 미풍이 지드의 머리카락을 일렁였다. 그는 허공으로 고개를 들어 심호흡을 한 한번 했다.

“후. 날씨 한번 죽이는군. 그나저나 오늘 제국 일 주년 행사를 잘 치러야 할 텐데…….”

바로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똑똑

“누군가.”

아라퀘스입니다.

“들어오게나.”

곧이어 문이 열리고 아라퀘스가 내실로 들어섰다.

지드가 말했다.

“테라스로 오게나. 오늘 날씨 한번 기가 막히는군.”

“네.”

잠시 후 지드 옆으로 다가온 아라퀘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편찮은 데가 있으신지요.”

“난 괜찮네. 다만 업무량이 늘어서 다소 머리가 무거울 뿐입니다.”

“조금 쉬면서 하시지요.”

“지금 쉬고 있잖은가.”

“아, 네.”

“그나저나 올해 집정관 선출 후보 명단에 자네 포함되었다지?”

“네.”

“이번엔 행운 비네.”

“아직 제가 모자란 것이 많아서…….”

그러자 지드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지나친 겸손도 가끔 짜증나는 일일세. 이제 자네의 위상이 근위 대장이 아닌 집정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를 바라마지 않네.”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헤라의 몸 상태는 어떤가.”

“다음 달이 산달이니까 지금부터라도 몸조심을 시키고 있습니다.”

“자네도 이제 아빠가 되는군. 후후, 세월 한번 빠르게 지나간다고 할까.”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왕자님들 역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니까요.”

“오늘 행사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는가.”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초대 손님들은 대략 어느 정도 될 것 같은가.”

“정확히 718명입니다.”

지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라, 그렇게나 많은가.”

“머나먼 북부 대륙과 중부 대륙으로부터 축하 사절단이 포함이 되어 예상외로 손님들이 많아 졌습니다.”

지드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반가운 일이군.”

바로 그때였다.

아래 정원에서 대략 3살배기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으며 각각 자신의 엄마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아카시안과 에르가니아는 각자 자신의 자식들을 안아 주며 활짝 웃는 얼굴을 했다.

“후후, 귀여운 것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저 멀리 지평선에 꾸역꾸역 피워 오르는 뭉게구름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지드는 새삼 옛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말이지 별 볼일 없었던 하류검사 시절, 온갖 고생을 다하며 이 자리까지 온 과정 자체가 기적과도 같이 느껴졌다.

“후. 삶이란 일단 무조건 살아 봐야 그 끝을 아는 법.”

그는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시원한 바람을 들이마셨다.

그때 아라퀘스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초대 손님들 중에 제 아버님도 참석하실 겁니다.”

순간 지드가 깜짝 놀랐다.

“뭐라고! 자네 아버님이시라면 아독 님인데…….”

“아버님께서 폐하를 꼭 한번 찾아뵙고 싶어 하시기에.”

“그분은 차원의 틈새를 막느라 시간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차원의 틈새는 최근에 저절로 닫혔으니 시간 내시는 것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이거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군. 그 유명하신 자네 부친께서 직접 오시다니.”

“아버님 역시 지난번 폐하의 활약에 대해서 몹시 흡족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욱 만나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거, 벌써부터 떨리는데?”

***

그날 만찬회장.

지드는 넓은 만찬회장에 가득 찬 손님들에게 건배를 제창 했고 흥겨운 시간을 가지려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건만 그토록 만나 뵙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아독이 나타나지 않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지드가 아라퀘스에게 물었다.

“자네 아버님은 왜 아직 오시지 않는 거지.”

“글쎄요.”

“흠. 빨리 뵙고 싶은데 말이야.”

바로 그때 만찬 회장 입구로부터 중년인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아독이었다.

아라퀘스가 외쳤다.

“아버님이 오셨군요.”

그러자 지드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영접하러 직접 나섰다.

참석자들은 황제 지드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고 시선이 그리로 집중이 되었다.

“누구지.”

“글쎄올시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맞이하신다면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누군지 정말 궁금하군.”

한편 지드는 손님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던가.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내 말에 집중하기 바라오. 지금 내 앞에 서 계신 이분은 위대한 영웅 아독 님이십니다.”

순간 좌중이 일대 술렁였다.

그는 현재에도 살아있는 전설이자 지드의 말대로 위대한 영웅이 아니던가. 그러자 아독 역시 질세라. 큰 소리로 외쳤다.

“진정한 영웅은 내가 아니라 바로 피체 왕국의 황제이신 바로 이분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두 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위대한 영웅으로서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강하게 각인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속세를 떠나 있었던 아독의 출현은 정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참석자들은 저마다 흥분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가. 모든 사람들이 지드와 아독의 곁으로 몰려들었고 함께 건배하기를 희망했다.

그날 만찬 회장은 밤늦게 끝이 났지만 아직도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지드와 아독이었다.

“정말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지드의 말에 아독 역시 환한 미소로 답했다.

“하하. 나 역시 만나 보고 싶었소. 과연 어둠의 여신과 론의 아들 테세우스. 그리고 불사의 용을 제압한 그 장본인이 누군지 말이오. 내가 차원의 틈새를 막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만일 그대가 없었더라면 아주 큰일이 날 뻔했소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자제 분인 아라퀘스가 제 곁에서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하튼 아주 훌륭한 일을 하셨소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 할 따름입니다.”

“일단 건배 하실까요?”

“이거 너무 과음을 하는 거 아닙니까. 벌써 스물 한 잔인데.”

“서로 생각이 통하는 것 같은데 밤새도록 마셔도 끄떡없을 것 같소.”

“그럼 한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그거 좋소. 하하.”

“자, 그럼 건배.”

탁!

꿀꺽 끌꺽!

두 영웅들은 진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고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즐거운 대화를 가졌다.

훗날 역사 서고에는 이날 두 영웅들의 만남을 기록했으니 지드와 아독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류검사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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