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만남 - 2.
도훈이 예상한 첫 번째 화제.
그것은 여당이 대흥시 시정의 ‘연정’, 혹은 도훈의 여당 입당을 추진할 거라는 것이었다.
여당은 시장직을 빼고는 모두 가졌고, 도훈은 시장 직함을 빼면 가진 게 전혀 없으니 후자가 가능성이 클 거란 건 뻔한 예측이었다.
도훈의 미소를 좋은 신호라 판단했는지 양상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공약 중에도 좋은 게 있고, 당선자님의 시정 추진에 힘도 실리고···. 어때요?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하, 글쎄요. 일단 스카우트 제안받는 것 같아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하하하! 역시 우리 당선자님은 남다르네요! 우리 당이 협력하면 시정의 질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당선자님 주변에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오늘 낮에만 해도 혼자 시청에 인사 다녀왔다면서요?”
“......”
“인수위만 해도 그래요. 우리는 인수위 인원으로 10명 가까운 사람을 준비했어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경험이 있고 전문지식이 있는 귀한 인재들이에요. 그 정도는 돼야 제대로 현황 파악도 하고, 사업 준비도 할 수 있는 겁니다.”
“하하, 그런가요?”
도훈이 웃으며 반문하자, 이번에는 서 모라는 다른 시의원이 입을 열었다.
“뭐,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요.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보세요. 이건 당선자님과 우리 당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입니다.”
“아니죠. 알찬 시정을 펼쳐서 시민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죠. 일거양득이 아니고 일거삼득이네요.”
“하하, 그렇게 되나요?”
“물론이죠!”
“하하하하!”
말없이 웃고만 있는 도훈 앞에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가는 두 시의원의 모습에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지X을 하고 앉았네.’
웃는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도훈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속에서는 뭔가가 점점 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도훈이 원래 성질대로 곧바로 받아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도훈이 담담히 웃고 있자, 이를 어떻게 여겼는지 나이 든 두 시의원이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입당은 천천히 생각하셔도 될 테고, 급한 건 인수위 문제가 아니겠어요?”
“...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하. 우리 인수위 사람들을 한번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공약검토도 하고 말이죠.”
“......”
“공약도 중요하지만, 함께 일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셔야죠. 아무래도 우리 당이 지난 4년간 시정에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에 시청 내부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 중책을 맡을 만한지, 어떤 사람들이 좀 그런지 말이죠. 하하하.”
“... 이를 테면요?”
“하하, 그건 함부로 말하기가 좀···.”
양상택이 망설이자 도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시는 건데요.”
“... 추, 추천? 허허.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그럼요.”
조금 더 망설이긴 했지만, ‘그 정도야 뭐 어때?’하는 표정인 도훈의 부추김에 결국 양상택이 넘어갔다.
“음···.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자면 지역경제과 기업지원팀장 강ㅁㅁ, 사회복지실 복지기획팀 남ㅇㅇ, 건설교통과장 이ㅎㅎ, 안전총괄과···.”
술에 취해 조심성이 없어진 때문일까?
아니면 웃으며 적당히 맞장구 쳐주는 도훈이 자신들의 얘기를 수용할 것 같다 여긴 때문일까?
김칫국을 사발째 마시기라도 했는지, 나이 든 두 시의원은 앞을 다퉈 시 공무원 중에서 쓸만한 인재와 ‘상종 못 할 인재’를 풀어냈다.
대부분 간부급이었고 숫자도 양쪽을 합해 열이 훌쩍 넘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없이 앉은 40대 당선자가 미미하게 인상을 쓴 가운데, 술기운 오른 두 시의원이 열변을 토했다.
말없이 웃는 얼굴로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어째 예상과 전혀 다르질 않네.’
도훈이 예상한 오늘의 두 번째 화제.
그건 다름 아닌 인사청탁이었다.
다만, 두 번째 화제를 이렇게 대놓고 던질지는 도훈도 확신하지 못했다.
초면인 것도 그렇지만, 인사청탁이란 게 보통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게 두 시의원의 ‘인재추천’이 얼마간 이어지다 끝났다.
“... 이 정도면 대충 다 언급한 것 같네요. 어때요?”
“말씀 고맙습니다. 참고하지요.”
“이야! 그 사람들을 한 번에 다 외웠어요? 우리 당선자님, 머리도 좋으시네!”
“하하.”
“어쨌든, 그 사람들 중용하시면 시정을 단번에 틀어쥘 수 있을 겁니다.”
“... 참고하겠습니다.”
‘그래 틀어쥐겠지. 내가 아니라 너희가···.’
“아, 그리고 무엇보다 비서실장이 참 중요합니다. 당선자님이 행정 경험이 없으시니 더욱 그러하지요. 시장의 손발이 되어야 할 사람이지만 시청 직원들을 당선자님보다 더 많이 상대할 테니까요.”
“그렇죠.”
“제가 몇 사람 추천할 수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래요? 말씀해 보시죠.”
“저도 추천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든 두 시의원의 입에서 다시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됐고, 도훈은 흥미 있는 표정을 유지한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세세한 경력까지 곁들이며 열띠게 비서실장 ‘감’을 추천하는 두 의원은 서로 경쟁적이기까지 했다.
“... 어떻습니까?”
“언급하신 분들 모두 자격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하하! 이거 당선자님하고 이렇게 얘기가 잘 통할지 몰랐습니다. 이야, 이거 우리가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안 그래요, 안 의원?”
“아, 예.”
내내 침묵하던 40대의 당선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안 아무개’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그는 뭐가 불편한지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도훈은 그의 얼굴에서 불만스러운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허허, 이거 오늘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얘기하면서 제법 많이 마셨는데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별로 취한 것 같지도 않아요.”
처음 주문했던 빼갈 세 병이 어느새 비워진 상태.
“... 저, 잠시 화장실 좀···.”
“아, 그래요? 그럼 다녀오는 김에 술 하고 안주 좀 더 주문하고 와요.”
“... 알겠습니다.”
40대 당선자가 자리를 뜨자, 두 의원의 눈빛이 변했다.
그걸 목격한 도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아직도 남았어?’
먼저 공세에 나선 건 역시 양상택.
함부로 말하기 그렇다던 사람은 어디 가고 양상택이 아주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 당선자님은 구체적인 사업을 공약으로 내거신 게 없다시피 한데 혹시 이유가 있습니까?”
“이미 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그 사업들부터 평가하고 검토하는 게 우선이겠죠.”
“그래요? 그래도 시민들의 불편 해소를 위해 급히 추진해야 할 일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과정을 꼭 거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흐음, 타당성이 확실하다면 빨리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하겠죠.”
“그렇죠? 하하!”
그다음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유서면에 말이죠. 아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게 하나 있는데···.”
“그것도 문제지만, 우리 운계면에 당장 필요한 것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두 시의원.
그들이 말하는 ‘사업’은 분명 자신들 지역구의 현안이거나 각자가 내건 선거 공약이었을 터.
열변을 토하는 두 시의원 중 재선된 서 모 씨를 바라보며 도훈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내가 저 인간을 안 찍길 잘했지···.’
양상택 말고 서태기란 이름의 의원이 바로 도훈이 사는 동네 시의원 중 하나였다.
다만, 도훈은 서 의원이 아닌 나이가 젊은 다른 여당 후보에게 투표했는데 그는 아쉽게 낙선했다.
도훈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두 의원은 여전히 사업 설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 이 사업은 도에서 예산 지원받을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 운계면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비가 아니라 국비 지원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죠.”
두 의원의 설명은 40대 당선자가 돌아와 문을 열며 끝이 났다.
도훈은 표정을 바꾸고 조용해진 두 시의원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 앞으로 이런 인간들하고 일해야 한다니···.’
오늘 얘기한 것 중 범상한 건 하나도 없었다.
명확히 불법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초면인 사이에 조심성 없이 할 얘기는 절대 아니었다.
시의원들이 술에 취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반응이 좋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이 도훈을, 똥인지 된장인지 갈피를 못 잡는, 아는 거 쥐뿔도 없는, 듣기 좋은 말로 구슬려 휘두르기 좋은, 아주 빈틈 많고 만만한 ‘얼뜨기’로 보고 있다는 것.
“...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하하, 말씀하세요.”
“오늘 저와 만나신 건 지역위원장님도 동의하신 겁니까?”
“김 의원? 하하, 그럼요.”
초선인 지역구 국회의원은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여당 내 개혁 성향이 뚜렷한 인물로 분류되곤 했다.
그런 사람이 오늘의 만남, 대화 주제를 과연 동의했을까?
‘... 만나는 건 알지 모르겠지만, 주제까지 동의했는지는 모르겠네. 아니, 그러지 않기가 쉽겠지. 어쨌든 이 만남으로 그 사람까지 판단할 수는 없겠어.’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만큼 들어줬다고 생각한 도훈이 이제 자기 얘기를 하려던 순간.
쾅!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예상 못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 김도훈!”
“......”
갑작스러운 서슬에 놀란 실내의 모두가 말문을 잃은 가운데, 버럭 소리 지른 남자의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이딴 소리나 들으려고 나 떼어놓고 너 혼자 왔냐!”
“......”
도훈에게 일갈한 영배가 때려죽이고 말겠다는 눈빛으로 시의원들을 훑더니 다시 도훈에게 시선을 주고 고함쳤다.
“이딴 협잡질이나 하려고 시장하겠다고 한 거야! 당장 때려치워! 이 망할 새끼야!”
얼굴색이 똥 빛이 된 시의원들이 말이 없는 가운데,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영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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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뒤.
시의원들이 쫓겨나듯 방을 나서고 영배가 도훈과 마주 앉아 있었다.
씩. 씩. 씩.
도훈이 말없이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영배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너만 단골이냐?”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네가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이유가 뻔히 보여서 나도 덕 좀 보려고 했다. 사장님한테 얼굴만 비치고 가려고 했어. 그래야 앞으로도 여기 올 수 있을 거 아니야.”
끄덕, 끄덕.
도훈이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영배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앞에서 듣자 하니, 별 거지 같은···.”
“계속 문앞에 있었던 거야?”
“... 옆방에 있었다.”
중국관의 뒷방은 원래 하나였던 걸 나무 벽으로 막아 둘로 나눴다.
필요하면 철거할 수도 있는 구조여서 방음 효과는 그다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데?”
“시청에 혼자 갔느니 어쩌니부터.”
“들을 건 다 들었네.”
담담히 말하는 도훈에게 영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인간들은 닳고 닳은 정치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너는 도대체 어떻게 그딴 얘기에 맞장구를 칠 수가 있어?”
“......”
영배가 말 없는 도훈을 잠시 째려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휴우, 안 되겠어. 너 잘할 거라고 믿고 난 학원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이젠 내가 널 못 믿겠으니 딱 달라붙어서 감시해야지. 비서실장? 그거 내가 한다.”
“... 나중에 후회할 소리 하지 마라.”
“후회? 인마! 내가 너랑 선거운동, 아니 애초에 너랑 친구인 게 후회되는 중이다!”
영배가 버럭 화를 냈지만, 도훈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품에서 핸드폰을 하나 더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액정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터치했다.
톡.
“... 뭐야?”
“뭐긴 뭐야? 내 업무용 핸드폰이지.”
화면을 확인한 영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녹음하고 있었어?”
“어.”
“왜?”
“......”
“... 너 설마?”
도훈은 영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어디 가?”
“짬뽕 주문하러 간다. 빼갈을 들이붓다시피 했더니 속이 아려서.”
“... 너 진짜 일부러 그런 거야?”
“그럼? 내가 미쳤다고 그딴 청탁 받아주려고 비싼 술 먹고 웃으며 비위 맞춰주고 있었겠냐?”
“......”
“못 믿어? 딱 붙어서 감시를 해? 비서실장?”
“......”
“흥! 내가 사양일세, 이 양반아!”
“야!”
머쓱해진 영배가 불렀지만, 도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 하여간···. 저 인간도 못 말려.’
좁은 복도를 걷는 도훈이 피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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