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배의 합류.
“... 와, 미쳤네! 이 인간들!”
도훈의 업무용 핸드폰에서 재생되는 대화를 듣던 진주가 버럭 화를 냈다.
시의원들과 만난 다음 날 늦은 저녁, 도훈, 진주, 영배는 물론 영배의 와이프까지 함께 한 자리.
진주의 학원 건물 3층 집에서 진주 아들과 영배 부부의 아이들은 일찍 밥을 먹고 순심이와 놀거나 자고 있었고 어른들은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야, 너 성질 많이 죽었다? 어떻게 이걸 참아줬냐?”
“참아주기만 했냐? 도훈이 쟤, 쿵짝 맞춰준다고 웃고 맞장구치는 게 배우 저리가라였어.”
진주에 뒤이어 영배가 말했다가 도훈의 매서운 눈총을 받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제, 시의원들이 돌아간 뒤 둘이 남아 짬뽕에 소주를 마시며 풀긴 했으나 도훈은 오래간만에 잡은 이 ‘빌미’를 최대한 써먹고 있었다.
- 다 내 덕이다, 알지?
- ...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네요.
머릿속에 전해오는 조상님의 말에 도훈이 웬일로 지극히 겸손하게 답했다.
선거에 나서겠다는 결심을 한 뒤, 조상님 귀신에게 안 그래도 자주 들었던 얘기를 몇 번이나 다시 들은 도훈이었다.
- 경세가(經世家), 요새 말로 따지면 정치가나 행정관리를 일컬을 수 있겠지. 이런 사람에게 순수함은 미덕이 아니다. 힘없는 백성을 대할 때는 그래야겠지. 또한, 그 어떤 선입견이나 권위의식 같은 게 없어야겠지. 하지만 그런 때에도 긴장해야 한다. 왜냐고? 힘을 가진 이에게는 온갖 유혹이 시도 때도 없이 꼬이기 마련이니까.
- 경세가는 ‘능수능란’해야 하기도 하지만, 속내를 숨기고 상대방의 숨겨진 의도를 읽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소 뒤에 숨겨진 사특한 의도에 휘둘릴 수도, 웃음 속에 감춰진 칼에 맞을 수도 있으니까.
조상님 귀신이 다짐하고 또 다짐한, 이른바 소리장도(笑裏藏刀)를 조심하라는 얘기.
도훈은 이번에 그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도훈의 시선을 외면한 영배가 열 받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하튼, 이번 일로 저놈을 혼자 시청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건 확실해졌어. 시의원들이 저런 수준이고, 저런 시의원들에게 줄 선 공무원들이 수두룩박박할 텐데, 쟤 혼자 어떻게 그걸 상대해? 나라도 함께 가야지.”
도훈이 더 매서운 눈초리로 영배를 쏘아봤고, 영배는 더 고개를 틀어 그걸 외면했다.
고마워해야 할 도훈이 그런 태도인 건 영배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더 크게는 영배 와이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영배 와이프 남선아 씨의 태도가 도훈의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 내 눈치 봐서 영배 오빠 째려봐야 소용없어요, 도훈 씨. 나도 그러라고 할 거니까요.”
“... 형수님?”
“... 언니?”
도훈도 놀랐고 진주도 놀랐다.
그런데 가장 많이 놀란 건 다름 아닌 영배인 듯했다.
“... 여보, 바, 방금 그 말 진짜야?
“어, 오빠. 진짜야. 내가 학원에 복귀할게.”
“......”
원래 오늘 저녁 모임 자체가 와이프를 설득하는 걸 도와달라며 영배가 ‘계획’한 일이었다.
영배가 계획을 말하자 진주는 장소와 음식을 제공했고, 도훈은 계획 자체에 반대했다가 진주에게 등짝을 맞고 몸만 참석했다.
선거 다음 날부터 영배가 몇 번 와이프에게 은근슬쩍 도훈과 함께 시청에 들어갈까 한다고 운을 띄웠다는데 그때마다 냉담한 시선만 받아서 공략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본론이 채 나오기도 전에 함락(?)될 줄이야.
말문을 잃은 영배에게 선아가 웃으며 물었다.
“왜? 하기 싫어? 계속 반대해줄까?”
“아, 아니!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그 얘기 꺼내면 도끼눈 뜨고 쳐다봤잖아.”
“은근슬쩍 찔러보는 게 아니고 오빠가 진지하게 상의해 주길 바랐던 거야. 오빠 생활만 변하는 게 아니고 나랑 애들 생활에도 변화가 오는 거잖아.”
“......”
“난 내내 기다렸는데, 오빠가 나한테 진지하게 ‘의논’이라는 걸 한 게 오늘 아침이지, 아마?”
“... 그, 그때도 아무 말 안 했잖아.”
“냉큼 허락하기에는 뭔가 억울하더라고.”
“......”
영배가 다시 말문을 잃은 가운데, 도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수님,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말은 고마운데, 이미 결정했어요.”
“아니, 민지, 민욱이는 어쩌시려고요? 네 살, 두 살밖에 안 됐잖아요.”
“요 옆에 어린이집에 맡기면 돼요. 물어보니까 자리가 있대요. 우리가 대도시에 안 사는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네요.”
“......”
“어차피 학원 일은 오후에 시작해서 늦어도 8시면 끝나잖아요. 좀 복잡하긴 한데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두 녀석 다 보육료 지원 대상이 되니까요. 이번에 받아 보죠, 뭐.”
진주의 학원 옆의 옆 건물에 올 3월에 새로 생긴 어린이집이 있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영배가 조심스럽게 묻자, 선아가 남편을 슬쩍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미 다 알아봤다는 말 어디로 들었어?”
“......”
“나 민욱이 낳기 전부터 2년 가까이 쉬었잖아. 사실, 집에만 있는 게 좀 지겹기도 했어.”
“... 선아야.”
“결정적으로, 오빠가 학원 일 할 때는 별로 표정이 없었거든? 그런데 선거운동 뛸 때부터 입으로는 힘들다고 하지만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맨날 웃고 다니더라? 처음에는 그냥 강사 일이 지겨워져서, 다른 일이 신기해서 그러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
“......”
“그래서 학원 말고 다른 일 해보겠다고 하면 말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감격한 영배가 말없이 선아의 손을 잡으려 했다.
찰싹!
“남사스럽게···.”
“하, 하하.”
영배가 머쓱해 했고, 도훈이 선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형수님.”
“호호. 빡세게 굴리세요. 저도 집에서 최대한 부려먹을 테니까요.”
“물론이죠.”
각오하라는 듯 영배에게 눈을 부라린 도훈이 맥주잔을 비우다 테이블 건너편의 진주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진주가 입을 열었다.
“... 미안한데 난 딱히 널 도울 방법이 없어.”
“아무 말 안 했다.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대신 해장국은 원 없이 먹을 수 있게 해줄게.”
“쯧쯧. 그전에 간이 맛이 가겠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놈의 은행 대출금이 뭔지···.”
“아, 미안해할 필요 없다니까?”
“그래? 알았어. 지금부터는 안 미안한 거로 하자.”
어느새 고개를 치켜들고 활짝 웃는 절친.
도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 고맙다, 정말.”
선아가 선선히 영배의 ‘이직’을 허락한 때문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영배가 도훈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쩔 거야?”
“뭘?”
“시의원들 말이야.”
“어쩌긴 뭘 어째? 내가 자르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공론화 안 시킨다고?”
“아마도?”
“야!”
“애초에 그 사람들이 명백히 불법적인 얘기를 하지 않으면 그냥 참고삼아 듣기만 하려고 나간 자리였어.”
“......”
“이 정도만 들은 것도 대박이긴 한데, 눈치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누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초대박을 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
도훈이 영배를 침묵시키자 진주가 끼어들었다.
“혹시 야당에서는 연락 안 왔어? 그쪽에서도 너 입당하라고 유혹할 법도 한데?”
“그럴 정신이 없을걸?”
“왜?”
“거기 시의원 당선자하고 전화로 인사를 나눴는데, 언뜻 듣기로 그 사람 말고 나머지는···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라고.”
이번 선거 전(前)에는 대흥시 시의원 7명 중 여야비율이 3대4였다.
그런데 이번 선거 결과, 그 비율이 6대1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라 도지사는 물론, 대흥시 시장도 졌고 대흥시를 대표하는 도의원 선거도 졌다.
이런 참패는 TK 지역을 제외한 전국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당연히 혼이 나갈 수밖에.
진주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선아가 입을 열었다.
“도훈 씨랑 만난 시의원들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나머지 시의원은 전부 초선이라는 거에요. 그만큼 때가 덜 묻었을 거 아니겠어요?”
“네. 저도 형수님 생각과 같아요.”
어제 만났던 여당 소속 3선, 재선 시의원을 제외하면, 1명의 여당 소속 비례 대표를 포함한 나머지 다섯 명 모두가 초선이었다.
초선인 만큼 당색이나 정치인 특유의 기묘한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은 참신함이 있을 터.
“그나저나 영배 오빠 때문에 취임하기도 전에 의원들이랑 관계 나빠지는 거 아니야?”
진주의 말에 영배가 화들짝 놀랐다.
“뭐? 갑자기 나는 왜 걸고 들어가?”
“오빠가 어제 자리 파투냈잖아. 아까 녹음 들으니까 협잡질 어쩌고 했던 것 같던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기분이 참 좋았겠다.”
“......”
“보아하니 3선 아니면 재선한 사람이 의장이 될 게 뻔한데, 오빠가 도훈이 비서실장 하면 오빠 덕분(?)에라도 도훈이가 참 예쁘게 보이겠다. 안 그래?”
“......”
영배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진주가 끌끌 혀를 찼다.
말문을 잃은 영배 대신, 선아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요, 도훈 씨?”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걸 도훈 씨가 어떻게 장담해요?”
“두고 보시면 압니다.”
여유 있게 웃어 보이는 도훈은 전혀 걱정할 게 없다는 투.
영배와 선아, 진주까지 근심 어린 눈빛인 가운데 도훈은 저만치 자리한 소리 죽인 TV 화면에 시선을 줬다.
- 여당 충남지역 당선자 워크숍 가져.
지역 뉴스의 한 장면을 바라보는 도훈의 눈이 차분히 빛나고 있었다.
가만히 뉴스를 보던 도훈이 뒤늦게 뭔가를 떠올리고 영배에게 말을 걸었다.
“참, 형. 내일 오후에 나랑 누구 좀 만나러 가야 하니까 잊지 마.”
“내일? 오후? 몇 시쯤?”
“음, 한 2시부터?”
“2시라···. 알았어. 그런데 누구를 만나러 가는데?”
“있어.”
“그러니까 누군데?”
“중요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만 알아.”
“아, 그러니까 그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나 비서실장 시킬 거라며? 비서실장한테도 말 못하는 거냐?”
신경질적인 영배의 추궁에 도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형이 좀 진득하니 믿을만해 지면 뭐가 됐든 미루지 않고 말해줄게.”
“뭐, 인마?”
“어제 일 보면 아직은 멀었어. 쯧쯧.”
“......”
말문을 잃은 영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고, 진주와 선아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취임일까지 얼마 남지 않은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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