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담판, 혹은 거래 - 2.
다음 날 아침, 대흥시청 인수위 사무실.
“... 정말?”
“어.”
“... 저, 정말 그랬다고?”
“어.”
“... 정말로, 진짜로, 리얼리, 혼또니··· 지역구 국회의원이랑 도지사 당선자에게 그딴 식으로 얘기했다고?”
“그렇다니까.”
“......”
깜빡, 깜빡.
말문을 잃고 눈만 깜빡거리던 영배가 가출하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처음 한 일은···.
“야, 이 미친놈아!”
엄청난 소음이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조용히 해, 형! 여기 인수위 사무실이야. 직원들 듣는다고.”
“... 하.”
영배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가운데 도훈은 읽고 있던 자료에 다시 시선을 줬다.
“... 너 취임 전부터 그런 대형사고를 치고도 아무렇지도 않냐?”
“사고는 무슨 사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뭐?”
“거래 안 되면 녹음 공개할 거야.”
“... 헐.”
어처구니없다는 영배의 표정이 망연자실한 것으로 변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송 선생님을 비서실장으로 모시지.”
“... 휴우.”
“한숨 그만 쉬고 공부나 해. 이제 취임 며칠 안 남았어. 오후에 회의도 있고.”
“... 하여간, 너랑은 말이 안 통해. 너 이 자식, 이 얘기 했다가 나한테 욕먹을 것 같아서 어제저녁에 전화 꺼놨지?”
“절대 아니··· 라고는 못하겠네.”
“끙.”
영배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고, 도훈은 시계를 살폈다.
10시에 가까운 시간, 데드라인까지 두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미 거래는 물 건너갔다고 판단하고 있는 도훈이었지만, 그가 아직 다음 행동에 나서지 않은 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상님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 그 도지사란 놈 관상이 염치없고 지저분한 철면피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 뭐, 조상님도 틀릴 때가 있으니까.’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인수위 사무실에 들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도훈은 한발 늦게 답례를 했지만, 영배는 고개를 홱 돌리고 외면했다.
그런 영배의 행동에 머쓱한 표정이 된 남자가 도훈에게 말했다.
“괜찮으시면 저와 잠깐 이야기 좀 하시겠어요?”
“... 알겠습니다.”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와 함께 인수위 사무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진 문을 향해 영배가 인상을 쓰고 중얼거렸다.
“... 하긴, 저것들 더러운 꼴 더 안 보려면 도훈이 선택이 맞을 수도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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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청사 밖 자판기 옆.
도훈은 민의당 소속 초선 시의원 당선인이자 영배에 의해 양상택, 서태기와 함께 도매금으로 ‘협잡꾼’으로 몰렸던 안준식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안준식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했다.
“... 예?”
“이렇게 전하면 이해하실 거라던데요?”
“... 죄송한데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네. 김용진 의원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다음번엔 웃으며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그렇군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훈을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안준식.
“김 의원님이랑 무슨 얘기를 하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 그냥 간단한 안부 인사였습니다.”
“제안이란 건 뭡니까, 그럼?”
“앞으로 서로 잘 돕고 협력하자는 의례적인 얘기였죠.”
“... 그래요?”
“네.”
“... 다른 사람 모르게 전하라던데, 겨우 그 정도 얘기였다고요?”
“네.”
“......”
안준식이 안 믿긴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도훈이 입을 열지 않는 바에야 ‘거래’는 짐작도 못 할 터.
도훈이 말을 않자 안준식이 한숨을 내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 눈치도 이상했는데···.”
도훈은 그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눈치가 이상했다뇨?”
“아니, 김 의원님이랑 통화할 때 좀 기분이 나쁜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혹시 당선자님이랑 상관이 있는 건가 싶었죠.”
“설마요.”
“... 오늘 저녁에 밥 먹자면서 우리 당 시의원 당선자를 전부 소집했어요. 그래서 더 이상합니다. 김 의원님이 갑자기 사람 집합시키는···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흐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랑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도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시치미를 뗐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건, 녹음의 존재와 도훈의 개입을 비밀로 한다는 뜻도 된다.
저쪽에서 입을 다물고 이쪽에서도 조용히 하면 최소한 당분간은 비밀이 유지될 터.
한동안 말이 없던 안준식이 뒤늦게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 뭐가요?”
“저번에 중국집에서 만났던 거요. 우리 당 선배들한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들으신 데다 친구한테 욕까지 먹으셨잖아요.”
“... 안 당선자님도 그 자리에 계셨는데요?”
“저는 그냥 시장 당선자와 안면 익힌다고 따라 나갔거든요. 그 자리에서 선배들이 그딴 얘기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
“당선자님께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은 진즉부터 했는데, 저도 요즘 정신이 없어서···.”
“... 바쁘셨겠죠. 이해합니다.”
“쩝, 아무리 같은 당이고 선배라지만··· 그건 아니죠.”
“흐음.”
도훈이 의구심 어린 시선을 보내자 안준식이 자조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당이 제1야당인 대한자유당보다 개혁적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내부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
“대도시 같은 경우 참신한 인물들이 계속 수혈되니까 개혁적인 성향이 뚜렷하고 점점 더 강해지죠. 하지만, 인구가 적은 곳에는 좀 그런 분들이 아직 계시거든요.”
“......”
“우리 대흥시야 그나마 이번 선거로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쩝, 그 두 분 선배님은···. 하하, 이거 제 입으로 말하기 참 어렵네요.”
양상택과 서태기는 민의당이 아닌 충청지역에 기반을 둔 보수 지역정당 소속으로 정치를 시작했던 인물들.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지금이야 민의당 소속이지만, 개혁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제가 보기엔 시골만 그런 게 아닙니다. 민의당 텃밭이었던 호남 같은 경우, 도시에서도 꼭 민의당 사람이라고 개혁적이고 청렴하다고 할 수 없었거든요.”
“... 그랬죠. 그래서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심판을 받았죠.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할 말 없었죠.”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질 거고요.”
“......”
뭔가 단호한 의지가 실린 안준식의 말.
도훈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쑥스럽다는 듯 뒤통수를 긁더니 말을 이었다.
“뭐, 이런 변명 같은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하하, 아무튼 그날 죄송했습니다.”
도훈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고, 안준식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한참 때늦은 사과였지만, 중국관 뒷방에서 내내 불편한 표정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면피하자고 지어내는 얘기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고 기쁩니다.”
“하하, 창피하네요.”
도훈과 안준식은 얼마간 더 담소를 나누다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안준식을 바라보며 도훈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 김 의원이랑 친한가?”
- 아마도 그렇겠지?
다른 걸 다 떠나서 김용진의 말을 비밀리에 전했다는 것만 봐도 안준식과 김 의원이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김 의원은 일부러 안준식을 통함으로써 도훈에게 그의 존재를 알린 것일 수도 있었다.
우리 당 시의원이 다 ‘누구’ 같은 건 아니라는 뜻으로.
- 그나저나 이렇게 풀리길 천만다행이다.
“... 그렇죠.”
- 어째, 네 눈치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 같다?
“관상 보는 조상님 능력을 믿었다고나 할까요?”
- 헹! 네놈이 잘도 그랬겠다. 난 내심 어제 그 도지사 놈을 홀렸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거 딱 그때뿐이잖아요.”
조상님 귀신은 귀신답게 사람을 잠깐 홀려 뜻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물론, 영구적인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힘의 소모가 심해 도훈은 조상님이 자신에게 빙의하는 것 말고 다른 이를 상대로 그 힘을 쓰는 걸 딱 한 번 봤을 뿐이었다.
- 그게 어디야, 인마. 넌 할 수 있어?
“... 당연히 없죠. 하하!”
- 웃지 마, 인마. 너 이거 운이야, 운! 날벼락 안 맞은 게···.
“네, 네. 잘 알겠습니다.”
잔소리가 길어질 게 무서워, 도훈은 얼른 자르고 걸음을 옮겼다.
인수위 사무실에 들어선 도훈이 영배를 불렀다.
“형.”
“... 왜?”
자료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답하는 영배.
도훈은 사무실 문을 닫고 영배의 책상에 다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형.”
“아, 왜? 그 협잡꾼 시의원 놈이 사과라도 하디?”
“... 어떻게 알았어?”
“응?”
그제야 고개를 드는 영배.
도훈이 말없이 웃자 영배가 인상을 썼다.
“뭐야, 정말 사과한 거야?”
“어. 미안하다고 하던데?”
“... 넌 이 판국에 고작 사과받았다고 웃고 있고?”
“꼭 그런 건 아닌데.”
“... 뭐가 또 있어?”
“당연히 있지.”
“뭔데?”
심드렁한 영배에게 도훈이 말을 이었다.
“송 선생님께 전해.”
“송 선생님? 뭐라고?”
“출근 준비하시라고.”
“... 출근 준비?”
“어.”
히죽.
웃는 도훈의 모습에 영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진짜?”
“어.”
“... 오오오!”
“하하하!”
영배가 환호했고 도훈도 기분 좋게 웃었다.
- ... 좌우지간 다행이다. 너, 인마. 운 좋은 줄 알아.
‘어제 분위기는 완전 결렬이었는데, 의외네요. 김 의원이 도지사를 설득했을까요?’
- 글쎄다. 아무래도 네 제안에 그쪽이 더 호의적이긴 했지.
‘그 양반 말발이 센가 봅니다.’
-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김 의원이 생각보다 심지가 곧은 사람인가 봅니다. 다행이네요.’
- 쩝, 그러면 다행이고···.
환하게 웃는 도훈은 착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집요하기로 유명한 누군가의 흥미를 잔뜩 자극했다는 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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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몇 시간 전, 충남도청 청사 별관 당선자 사무실.
도훈이 나간 뒤로도 얼마간 출입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김용진이었다.
“아니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김용진이 벌컥 화를 냈지만, 강정문은 심드렁했다.
“왜?”
“개념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하니까 김도훈 씨한테 닳고 닳은 정치꾼 소리 들은 거 아닙니까!”
김용진이 목청껏 강정문을 타박했다.
사실, 이런 일이 사석에서 빈번할 정도로 두 사람은 무척 친했고 강정문은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권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치? 그런 소리 들을 만했지?”
“... 정말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하하, 그렇지 뭐.”
“아니 왜요? 선배님 갑자기 치매라도 오셨어요?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안 되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 열 내지 마.”
“도대체 뭐가···.”
“어허!”
강정문의 낮은 호통에 김용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강정문이 일부러 도훈을 자극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자꾸 제지하니 나서서 중재할 수가 없었다.
“어떤 것 같아?”
“뭐가요? 선배님이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 말고, 김도훈.”
“... 김도훈이가 왜요?”
“사람이 어떤 것 같냐고.”
강정문이 눈을 빛내며 묻자, 김용진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휴우. 몰라서 물으세요? 물건이네요.”
“그렇지? 하하, 서른다섯짜리 초짜 시장이 국회의원에 도지사에게 또박또박 따지고 대드는 게 보통이 아니지?”
“... 에휴. 또 병 도지셨네.”
“하하하.”
강정문은 인재수집 ‘병’이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인재가 아닌, 자기주장 강하고 신념을 걸고 일하며 싸울 때는 물러섬이 없는 ‘강성’을 병적으로 좋아했다.
“김도훈이가 선배님 마음에 들면 뭐합니까? 앞으로 그 친구가 선배님을 도지사는커녕 정치인으로 인정이나 하겠습니까? 상종하려고 하겠냐고요!”
“오해는 천천히 풀어도 돼. 시간은 4년이나 있어. 그 4년,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어휴,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김용진의 핀잔에 강정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요구는 타당한 것 같은데···. 어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 아까는 창피해서 정말···.”
“시의원들 단속할 수 있겠나?”
“어렵지 않을 겁니다. 다만, 딴 이유를 대야 하니 조금 공은 들여야겠죠.”
“그럼 김도훈이 뜻대로 해줘. 시의 일은 시의원에게 맡기는 게 맞지만, 이번 건은 놔두면 안 되겠어.”
“그러게요.”
둘 다 당이나 지역구의 일에 필요 이상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불합리하게 개입하는 인물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흐음. 시장이 젊은데, 시의회 의장도 젊은 사람이면 구색이 맞겠네. 아예 부의장도 젊은 사람으로 해.”
“몰라요! 하여간 내가 이놈의 작자들을 그냥!”
“하하. 그리고 앞으로 김도훈이 주의 깊게 살펴. 그놈 지금보다 더한 물건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어우! 미치겠네.”
김용진이 어처구니없어하는 가운데, 소파에 몸을 파묻은 강정문이 중얼거렸다.
“정말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놈을 발견했네. 하하하.”
도훈의 도전적이고 서늘한 눈빛을 떠올리는 강정문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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