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中.
도훈의 취임 첫 주 금요일 오후.
“... 그래서 오늘 저녁 일정도 취소라고?”
“네.”
“... 허허허.”
홍영진이 영혼 없는 웃음을 흘리자 고정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퇴근 빨라지는데 안 기쁘세요?”
“... 글쎄.”
“......”
“...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네, 주무관님.”
홍영진이 힘없이 사라지고 비서실에 홀로 남은 정임이 기지개를 켰다.
“웃차! 오늘도 정시퇴근이겠네.”
원래 시장 취임 직후에는 저녁마다 중요한 식사 약속이 잡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도훈이 지시한 어떤 일의 영향으로 수요일부터 오늘까지 저녁 약속이 모두 취소되었다.
“시의회는 또 왜 그러나 몰라.”
시청이 발칵 뒤집혔으니 간부들과의 식사야 당연히 연기.
지역 유력자들과의 식사는 도훈의 판단으로 유보.
오늘 예정됐던 의원들과의 식사는 조금 전 의회 사무과에서 미루자는 연락이 왔다.
“... 분위기가 좀 살벌하긴 하지.”
어쩌다 취임 직후 칼바람부터 날리게 된 도훈이었다.
비서실장 송두진이 감찰을 진행 중이었으니까.
도훈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에 변화가 있었다.
‘겸손하고 사람 좋고 참신한 것 같다’에서 송두진 비서실장이 등장하며 ‘칼을 숨길 줄 안다.’는 말이 돌았는데, 즉각적인 감찰의 여파로 ‘원칙적’이라는 평이 추가되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도훈.
다행히 직원 다수는 그런 도훈을 호평했고 거기에 정임도 포함됐다.
이는 충분히 분노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정중한 태도를 지키는 모습이 큰 영향을 끼쳤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정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 내려가신 지 한참 됐는데 왜 이렇게 안 오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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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감사실 법무팀 사무실.
테이블에 팀장 및 직원들과 자리한 도훈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 방금 그 얘기 진짭니까?”
“네.”
“......”
“계속 통화가 안 돼서 어제 찾아갔는데, 문에 건설회사 명패가 붙어있긴 합니다만··· 그 사무실이 건물 옥상에 있는 작은 컨테이너였습니다.”
“... 컨테이너요?”
“네.”
“... 실제 회사가 아니란 말씀이죠?”
“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개인사업자로 추정됩니다.”
“... 행정‧시설팀은 그 사실을 몰랐고요?”
“그랬다고 합니다.”
도훈이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법무팀이 고소를 준비하다 당시 공사를 수주한 회사가 하청을 줬는데 정작 하청받은 회사가 또다시 재하청을 줬다는 걸 뒤늦게 알아냈다.
그런데 그 하청받은 회사를 가보니 컨테이너를 사무실로 쓰고 있단다.
실제 건설일을 하는 게 아닐 테니 당연히 재하청을 줬을 터.
그것도 문제지만, 담당 부서에서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건···.
‘... 휴우. 진짜 몰랐는지 아니면 모른 척 한 건지···.’
위이잉!
도훈의 개인 핸드폰이 울렸고, 액정을 확인한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확 인상을 썼다.
‘... 이 아줌마가 진짜···.’
절대 받고 싶지 않아 씹고 있는 전화.
화요일 오후부터 시작해 하루에 몇 번이고 걸려오는 전화가 도훈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기실, 주 내내 본 직원들의 한심한 모습도 짜증스러웠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이 전화도 짜증의 극치였다.
도훈의 표정이 나빠짐과 동시에 갑자기 사무실이 조용해졌으나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상황.
누군가 지긋이 그의 발을 밟았다.
옆을 보니 영배가 살짝 몸을 돌려 입가를 가린 채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표정관리.’
‘아차.’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은 도훈이 다시 담담한 얼굴을 만들었다.
“... 조금 전에 추정이라고 하셨어요?”
“네. 어제 사무실이 잠겨 있어 당사자를 못 만났습니다. 어제 오후 늦게 통화 때 오늘 오후에 들어온다고···.”
“그럼 진짜 공사를 누가 했는지 아직 모른다는 말이군요.”
“... 죄송합니다.”
“......”
부르르.
테이블 밑에 가려진 도훈의 주먹이 떨렸다.
‘시방서대로’ 해놓으라 전하라, 고소를 검토하라는 말을 한 게 화요일 낮.
감찰은 송두진이 맡아 착착 진행하고 있는데, 금요일인 오늘 오전까지 법무팀의 보고가 없어 직접 찾아왔다.
그런데, ‘범인’이 누구인지도 아직 모른단다.
‘... 휴유, 이러니 내가···.’
시 공무원에 대한 감찰 및 비위 조사를 담당하는 건 기획감사실 ‘감사팀’.
하지만 이번 감찰은 감사팀이 아닌 비서실장 송두진이 주도하고 있었다.
법무팀 막내가 송두진 곁에 붙어있긴 하지만, 그건 혹시 모를 권한 침해 시비를 무마하기 위한 것일 뿐, 감사팀은 이 일에서 배제된 상태.
계약, 공사관리를 제대로 해야 했을 게 감찰받는 행정‧시설팀이라면, 그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관리 감독할 책임은 감사팀에게 있었다.
즉, 지금의 도훈에게 행정‧시설팀이나 감사팀이나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감찰의 대상이었다.
‘휴우···.’
담담한 얼굴로 속으로 한숨 쉬는 도훈.
임기가 시작된 일요일부터 남몰래 한숨 쉬는 횟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 이들도 변명할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도훈 앞에 면목 없는 표정을 하고 앉은 법무팀장 이하 직원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그들의 권한은 시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민간인이 포함되지 않으니까.
다시 말해, 시청 청사 내에서야 때론 호랑이가 될 수도 있지만, 청사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시민들에게 봉사할 의무를 진 똑같은 공무원일 뿐이다.
‘... 수사권을 가진 경찰이 아니니까. 휴우···.’
그걸 알기에 도훈은 참는 중이었다.
직원들 모르게 한숨을 쉬고 또 쉬면서.
“... 온다고 했다니 일단 기다려보죠.”
“... 네.”
“그런데, 이게 일반적인 경웁니까?”
“... 무슨 뜻이신지···.”
“재하청을 준 사람이 부실에 사기라는 게 들통난 상황에서도 너무 느긋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솔직히, 저희도 당황스럽습니다.”
“......”
‘한심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꾹 억누른 도훈은 회의를 마무리했다.
법무팀 사무실을 나와 계단을 오르던 도훈은 아래쪽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췄다.
“하하, 계장님. 안녕하십니까?”
“아, 황 부장님.”
“안녕하세요.”
방문객이 직원 중 누군가와 떠들썩하게 인사하는 소리.
도훈이 걸음을 다시 옮기려는데,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 말이 들려왔다.
“아, 나 이사님도 오셨습니까?”
“아, 예.”
“어쩐 일로 이사님이 직접···.”
“뭐,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요. 수고하세요.”
“아, 예.”
심드렁한 목소리에 이어 발소리가 들려왔고, 남자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에 멈춰 선 도훈과 영배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세 남자가 향하는 건 기획감사실 쪽.
“... 설마.”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는 도훈을 영배가 붙잡았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어.”
“그래? 셋 중에 누구?”
“가운데 사람.”
언뜻 보기에도 가장 젊어 보이는 가운데 남자의 목이 제일 빳빳했다.
세 사람의 모습이 기획감사실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고, 도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 누군데 그래?”
영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고 도훈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무척 어이없다는 표정의 도훈이 답했다.
“... 형이 정말 싫어하는 사람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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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살짝 넘은 시장실.
“... 정말 신흥 건설이랍니까?”
“그렇답니다.”
“... 하하, 이것 참.”
송두진이 웃었다.
무척 허탈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함께 자리한 영배와 정임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영배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쩐지 개인사업자가 배짱을 튕기는 것 같더라니. 믿는 게 이거였네요.”
재하청을 받아 실제로 사방공사를 한 건 신흥 건설이라는 회사.
세 남자를 쫓아 기획감사실에 갔던 영배가 알아온 따끈따끈한 소식이었다.
직원들이 그중 젊은 작자에게 좀 저자세라는 말도 전했다.
그가 사기 공사를 한 건설회사를 대표해서 온 것인데도 말이다.
아까 계단에서 봤던 셋 중 하나가 하청받은 개인사업자였고, 나머지 둘은 신흥 건설 직원이었다.
실무를 담당한다는 부장에 사장을 대신해 왔다는 이사.
그중 도훈이 알아본 건 젊은 이사로, 신흥 건설 사장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작자는 전전(前前) 대 시장 나경태의 아들이자 영배가 무척 싫어하는 탁구 동호회 부회장 장혜란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 아줌마가 끈질기게 전화를 해댔던 게 밥 먹자는 게 아니라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영배가 입을 열었다.
“공사를 수주했던 회사보다 신흥 건설이 더 크잖아요?”
“그럴걸요.”
영배의 물음에 답한 것은 정임.
“그럼 하청을 주면 줬지 받을 회사는 아닌 것 같은데···.”
“전 시장님 때문일 거예요.”
“... 예?”
“강운천 전 시장님과 나경태 전전 시장님은 정말 서로 사이가 안 좋았어요. 공개된 장소에서 대놓고 싸울 정도로 나빴죠.”
“......”
“그 때문이라 확신할 순 없지만, 최소한 제 기억에 강운천 시장님 재임 중에 신흥 건설은 시에서 발주한 공사를 한 번도 입찰받은 적이 없어요.”
“... 그래서 재하청을 통해서 자신들인지 모르게 숨기고 공사를 수주했다는 겁니까?”
“제 추측은 그래요.”
“......”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 영배의 시선이 두진을 향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 그럼 행정‧시설팀에서는‧···.”
“몰랐을 거야. 고 주무관 말대로 두 시장이 서로 원수 대하듯 했거든. 그 판국에 감히 현직 시장 모르게 전 시장 회사에 일 줄 생각을 할 간 큰 직원이 있겠나? 자네라면 그럴 수 있겠어?”
“... 못하죠.”
“그래. 다만, 공사 규모 작다고 대충대충 넘긴 게 잘못이겠지.”
“... 그건 또 그것대로 개···.”
‘개판’이라고 말하려던 영배가 정임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고, 듣고만 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건 실장님의 공식적인 판단입니까?”
“네. 제 판단에 행정‧시설팀의 잘못은 업체와 현장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은 것입니다. 굳이 감리 업무를 설계사무소에 위임할 필요가 없었는데 위임한 것도 잘못이고요.”
“흐음.”
“규모에 비해 과한 예산이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공사비 부풀려서 착복하려고 직원들과 짜고 친 판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당연히 감사팀도 움직일 일이 없었겠죠.”
“... 그나마 그건 다행이네요.”
유서면 사방공사는 특별한 기술이나 특수한 자재가 필요한 것도 아닌 약 40m 정도의 도로 양편 야산에 실시한 일반적인 공사일 뿐이었다.
당연히 공사 비용이 적었고 기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신흥 건설과 건축사가 짜고 쳤다는 말이 되는 겁니까?”
“제 판단은 그렇습니다.”
“확신하십니까?”
“현재로써는 그렇습니다.”
두진의 단언에 도훈과 영배는 별 반응이 없는 반면, 정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한 직원들에게 중징계가 떨어질 일은 없을 거라 여긴 때문이었다.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 글쎄요.”
띠리리리.
도훈이 무표정하게 답하는데, 정임이 손에 들고 있던 비서실 무선 전화기가 울렸다.
도훈이 받으라 눈짓했고 정임이 짧게 통화하더니 송화기 부분을 가리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법무팀장인데··· 신흥 건설 나 이사가 시장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
“일없다고 하세요.”
“... 알겠습니다.”
단박에 무 자르듯 잘라버리는 도훈.
정임이 전화기를 들고 비서실로 나갔고 두진과 영배도 뒤를 따랐다.
“휴우.”
시장실에 홀로 남은 도훈이 한숨을 쉬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이잉!
“이 아줌마가 정말···!”
다시 인상을 확 구긴 도훈이 핸드폰을 살펴보니 이번은 전화가 아닌 메시지였다.
- 김 시장,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계속 전화한 거야. 만나서 얘기를 좀 했으면 싶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 낯 붉히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해결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우리가 김 시장을 도울 수 있어. 아니, 적극 돕겠어. 선거가 됐든, 뭐가 됐든 우리 전문가야. 알지? 연락 좀 줘.
이제 와 메시지를 보낸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팍 느낌이 오는 건 있었다.
상대가 다급하다는 것.
“... 전문가? 웃기고 있네.”
핸드폰을 내려놓은 도훈이 창가에 가 섰다.
“휴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한숨을 쉬고 있다는 걸 깨달은 도훈이 실소를 흘리고는 창밖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일요일 밤, 긴급한 연락을 받고 상황실로 달려간 그 순간부터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한순간, 한순간을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씩을.
석상처럼 굳어졌던 도훈이 움직인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어쩔 수 없나···?”
담담히 중얼거린 도훈이 걸음을 옮겨 핸드폰을 집어 전화를 걸었다.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 결정했냐?
“... 네.”
도훈의 표정이 딴 때 없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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